가이아나(르펜 60.7%, 마크롱 39%), 과들루프(르펜 69.6%, 마크롱 30%) 마르티닉(르펜 60.9%, 마크롱39.1%), 5년 전에는 정반대로 마크롱이 64%, 르펜이 36%이었다. 이번 선거는 금융자본가들과 깊은 이해관계를 가진마크롱에 대한 절대 저지 세력과 서민과 소외층을 타깃으로한 극우 마린 르펜에 대한 절대 지지세력 간의 대결이었다. 주류 언론과 주요 정당, 심지어 노조연맹과  연예계, 스포츠계 스타 500명이 합세해 마린 르펜을 절대악으로 지목했으나, 해외령 주민들은 그들의 주적을 마크롱으로 본 것이다. 본토에서의 선택은 조금 다를 테지만, 해외령에서 멜랑송을 찍었던 표의 대부분은 르펜에게 갔다. ‘인종주의자‘로 악명 높은 르펜에게 인종차별의  주 대상이던 해외령 주민들의 표가 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장 취약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극좌에서 극우로 넘어가는 의식 전환의 순간을 보여준다.
이런 특징은 한국의 대선 결과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저소득층이 난민, 외국인, 젠더, 경제정책 등에서 극우화성향을 보이는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표를 몰아준 것은, 어쩌면 국제정치의 흐름에 부응하는 셈이다. 프랑스에서처럼 유력한 극좌와 극우 후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외계층이 우경화하는 현상은 기존 좌파 정당이나 진보 정당, 중도정당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P10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던 유권자의 상당수(24%)도 결국불복하는 프랑스 후보에게 투표했다. 최고 득표자 당선 투표 방식에서 삼자 구도가 연출되면 세 진영 중 한 진영은 2차 투표에 진출하지 못한다. 멜랑을 지지하는 집단은 경제와 사회 체제의 대립에서는 마크롱과 대치되고, 문화와 국가 정체의 대립에서는 르펜과 대치된다.  이런 격차 때문에 1차 투표 이후 공약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낳았고, 멜랑송을 지지했던 유권자의 상당수가 두 최종 후보 어느 쪽에도 표를 던지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당선 후보는 소수 진영 혹은 소수의  유권자 지지만을 기반으로 선출되는 셈이다.  세 개 진영으로 나뉜 프랑스의 대선 형국에서는 패자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기 때문이다. 40년 전에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규합하고자 했던 ‘프랑스인 3명 중 2명‘은 요원한 일이 됐고, 이제는 프랑스인 3명 중 1명‘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이런 정치 지형에서 마크롱은 선거에서는 이길 수 있었지만, 과연 정권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을까?  - P49

혁명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바꾸었고,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다. 개인의 개념에도 변화가다. 혁명의 결과로서 민중과 박애가 생겨났다. 민중은 혁명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사실 민중의 대부분은 비주류였다. 주변인, 동부, 노동자, 내의 제조업자, 방랑자 등과 같은 부류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든 이들이 민중으로 인정받게 됐다. 그들이 무대를 장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공화국이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아찔한 일이었다. 모든 기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만약 문맹인도 지식인과 똑같이 발언하고 전문가와 다름없이 행동할 권리가 있다면, 만약 바보도 어엿한 국가의 일원이라면, 우리는 더는 민중을 어린애, 무책임한 자, 말썽꾼으로 여기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정의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의 위계질서까지도, 즉, 봉건제도의 종말이다. 이제 이성은 왕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두운 세계, 꿈틀대는 욕망,  환상 세계의 탈주자에게는 더이상 민중을 억누를 수 있는 동물적인 힘이 없다. 해방이든 또는 내밀한 야만성의 수용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사육제의  승리는 오래기억될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곧 시민이다. 실패한 인간의 내면과 외면, 여성, 광인,  통제할 수 없는 자부질서한 영역의 그림자까지도. - P88

선거결과에 따라 20대 여성과 남성 둘 중 한 진영이 승리하고, 다른 한 쪽은 씁쓸하게 질 수 밖에 없었다. 인구의 약 절반을 패배자로 만드는 이 구도 자체가 위험했다.  이는 어느 진영이 더 정의로운지와  별개로 사회분열과  갈등의 문제다. 이 갈등은 여진이 되어, 우리 사회는  계속 남아있는갈등에 소모될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이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 격인 윤석열 당시 후보가 새 정권의 수장이 됐으니, 여진이 제대로 수습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대통령이시니, 손수 격화된 갈등을 봉합해주십사‘라고 요구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그에게 선거운동당시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가련하게도 말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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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5-12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다른 곳들도 아니고,
프랑스 해외령에서 르펜이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 너무나 충격
적이네요.

기아나-과들루프-마르티니크...
프랑스 사람들 중에 소수 중의 소수
자인 이들이 자신을 대표할 사람으로
르펜에게 표를 던졌군요. 그야말로
하이퍼 리얼리스틱한 상황이네요.

필리핀에서도 독재자의 아들이 대통
으로 당선되었다는 뉴스를 듣고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시간이 너무 흘러 젊은이들이 당시
돈으로 10조원이나 해먹은 최악의
독재자의 아들을...

전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기괴한
정치적 현상을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12 11:48   좋아요 1 | URL
프랑스 대선에서는 마크롱이 당선되었지만, 5년 전보다는 표 차이가 많은 줄었습니다. 프랑스에서도 극우세력이 신장되었다는 반증이겠지요. 경제가 어렵고 힘들어졌을 때, 가지지 못한 자들이 그나마 가진 것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극우세력에 동조하는 흐름은 코로나19를 통해 더 가속화된 듯 합니다. 여기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금리인상, 러-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세계경제의 위축 현상은 여기에 기름을 붓겠지요...
 
엘리트 세습 -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지음, 서정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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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눙력주의 meritocracy는 고유한 언어를 형성할 정도로 일관된 용어와 무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 언어는 여러 맥락에 걸쳐 되풀이되어 이 시대 모든 시민에게 친숙한 삶의 형태가 되었다. 그 결과 엄청나게 강력한 마력을 얻었다. 그 광채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시선을 잡아끌어 비판적 판단을 잠재우고 개혁을 억누른다. 능력주의는 그 자체를 기본 상식으로 내세우며 일상 경험의 바탕에 파고 들어감으로써 현재 그 논리에 직면한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해악을 은폐한다. 실제로 능력주의 때문에 혜택을 분배하는 그 외 방식은 부당하거나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_ 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 1969 ~ )의 <엘리트 세습 The Meritocracy Trap: How America's Foundational Myth Feeds Inequality, Dismantles the Middle Class, and Devours the Elite>은 전통적인 귀족정 aristocracy을 대신한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기존의 귀족정이 피지배계급의 수탈과 착취에 기반한 정체(政體)라면, 능력주의는 엘리트 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에 근거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동시간과 희생을 감내하기에, 이러한 수고에 대한 대가는 정당한 것으로 일반에게 받아들여진다. 그렇지만, 이러한 능력주의를 과연 공정하고 효율적인 제도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엘리트와 중산층을 갈라놓고 있다. 중산층은 기득권에 원한을 품고 엘리트는 특권 계층의 부정한 특혜에 집착한다. 중산층과 엘리트가 공유해야 하는 사회는 쌍방 비난, 무배려, 기능 장애의 소용돌이에 말려들도록 있다. 이런 모든 해악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능력주의의 마력 때문이다. _ 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더 좋은 스펙을 바탕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더 많은 소득을 가져가는 것. 크게 평등(平等)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능력주의는 결과적으로 능력의 세습을 통해 새로운 계급을 양산하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전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력주의가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배경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마코비츠의 분석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크게 노동시장과 교육시장에서 나타난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많은 부문에서 경영진의 직접 통제 및 역할 수행이 가능해지면서 중간관리층의 일자리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으로 중산층을 형성하던 이들의 감소는 중산층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고, 중산층과 엘리트 층사이에는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신분상의 틈이 생겼다. 점차 공고화되는 이러한 노동시장과 교육시장의 순환관계 속에서 틈은 점차 깊어졌다. 한편 이러한 현 세대의 틈은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의 틈으로 전이된다.


 신기술이 중간 숙련도를 갖춘 인간 근로자를 대체하고 20세기 중반의 경제를 이끌었던 중산층 일자리를 없앤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기술이 미숙련 근로자와 특히 초숙련 근로자 모두를 보완하고, 숙련도가 가장 낮은 근로자와 특히 가장 높은 근로자의 수요를 증대함으로써, 오늘날의 생산을 지배하는 다수의 암담한 일자리와 극소수의 번지르르한 일자리를 창출한다. 그와 동시에 혁신이 엘리트 근로자와 나머지 근로자를 갈라놓는 기술 경계선을 숙련도 분포의 윗부분으로 끌어올리는 경향이 심화된다.  _ 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기술 변화가 가져온 사회 구조의 변화에서 학위(學位 degree)는 하나의 '신호'로 작동한다. 자동화가 가져온 일자리 감소와 소수의 경영진에게 집중화된 업무는 선택된 이들에게 돌아가야 했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능력을 객관적으로 보증할 수 있는 학위라는 보증서다. 차별화된 능력을 키우기 위한 투자가 비과세 되는 재테크 방식이 되면서 경제적 불평등은 상속되었고, 자연스럽게 사회 전반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능력주의는 경제 불평등을 변화시켰듯이 정치도 변화시켰다. 평등주의자들은 그 변화를 뒤늦게야 인식했으며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정치에 공백이 생겨났고, 그 공백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감지하고 능력주의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러 나선 기회주의자로 메워졌다. 선동가들은 부패한 세력을 비난하고 취약한 외부인을 공격함으로써 중산층의 분노를 부추긴다. 그들은 이런 공격을 통해 신화에나 나올 법한 황금기를 회복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_ 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이처럼 능력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폐해는 명백하다. 사회의 두터운 허리를 형성하는 중산층 뿐 아니라 엘리트 계층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엘리트 계층에 집중된 과도한 업무와 책임은 그들에게도 '인간소외'라는 부작용을 가져오기에 결국 능력주의는 사회의 전반적으로 불행으로 작동한다. 저자는 본문에서 이에 대한 해결방안도 제안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각자 읽는 것으로 넘기도록 하자...


 <엘리트 세습>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다.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과적인 평등에 앞서, '왜 소수의 사람들에게 많은 일이 몰리는가?' 라는 기회균등의 원칙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실업의 문제를 자발적인 요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구조적인 문제로 볼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통해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독자들의 관점을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능력주의는 경제 불평등을 변화시켰듯이 정치도 변화시켰다. 평등주의자들은 그 변화를 뒤늦게야 인식했으며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정치에 공백이 생겨났고, 그 공백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감지하고 능력주의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러 나선 기회주의자로 메워졌다. 선동가들은 부패한 세력을 비난하고 취약한 외부인을 공격함으로써 중산층의 분노를 부추긴다. 그들은 이런 공격을 통해 신화에나 나올 법한 황금기를 회복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정치와 정책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능력주의에 대한 불만에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 능력주의의 덫은 중산층의 좌절과 엘리트의 소외를 돕는 선동가들, 인생 상담 코치들보다 훨씬 더 설득력있게 설명한다. 능력주의의 덫이 그려낸 그림을 보면 능력주의가 불평등뿐만 아니라 재분배까지 변화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결과 불평등과 재분배는 더 이상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중산층을 다시 세우는 일에 엘리트의 자원을 빼올 필요가 없으며 구멍 뚤린 통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능력의 상속은 현재 일반적인 유산에 적용되는 재산세에서 완전히 면제된다. 부유한 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쏟아붓는 막대한 투자는 재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사립학교와 대학은 공익 자선단체와 마찬가지로 세금 혜택을 누린다. 이런 관행은 능력주의 교육을 사실상 엘리트들만 이용할 수 있는 조세 회피처로 만든다.

노동시장은 ‘암담한 직업‘과 ‘유망한 직업‘으로 양분되었다. 즉각적인 보상도, 승진에 대한 희망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암담하며, 드러난 광채가 숨겨진 고통을 가린다는점에서 번지르르한 것이다. 기술의 그림자는 오늘날 중간 숙련도 직업과 암담한 직업을 뒤덮은 어둠의 원인이다. 기술의 번쩍이는 빛은 번지르르한 직업에 얄팍한 광채를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기술이 진보할수록 기술 진보에 따른 임금 둔화의 영향을 받는 직업이 증가하는 한편, 기술 진보에 따른 임금 팽창의 영향을 받는 직업은 점점 더 줄어 들고 있다.

훈련과 교육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부유한 어린이들은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중산층 어린이들을 교육 단계마다 체계적으로 앞서나간다. 아동기 전반에 걸쳐 부유한 어린이의 인적자본에 대한 막대한 투자는 이들의 걸출한 성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그런 투자는 아동기 이후 청년기와 성년기까지 능력주의적인 선별 기준과 맞물려 과도한 투자와 뛰어난 성과를 한층 더 강화하고 연장한다. 이런 메커니즘은 그 끝에 다다르면 차세대 사위 근로자 절대다수가 현 세대 상위 근로자의 자녀로 채워지는 결과를 낳는다. 오늘날의 왕조는 능력 상속을 토대로 구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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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5-12 1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라는 사람이
부에 따른 교육의 세습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장관이 자식의 진학을 위해 다
양한 방식의 편법을 자행해 왔으면
서도 뭐가 문제냐고 하는 장면도
어이가 없었구요.
수오지심이 없는 사람들이구나
싶더군요. 그들의 선민의식에 정말...

아주 대놓고 계급제 사회로 가자고
외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12 11:40   좋아요 2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권모씨의 발언은 대중의 공분을 충분히 살 만한 내용입니다만, 다른 한 편으로 이미 ‘계급제 사회‘는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여론 악화의 이유라 생각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교육이 ‘훌륭한 톱니바퀴의 부속‘이 아닌 각자가 가치있는 존재로 서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이와 달라 씁쓸하게 여겨집니다...

Redman 2022-05-12 19: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능력주의를 다루는 책들이 요새는 많다는 정도를 넘어서 쏟아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 책들을 다 읽어야 하나 싶습니다.전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었습니다. 샌델의 책 같은 이론적 웅장함이나 능력주의에 대한 이 책만의 특별한 분석이나 관점이 있을까요?

겨울호랑이 2022-05-12 19:51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엘리트 세습>은 이론보다 르포 형식으로 구성되어 미국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책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 ^^:)
 

이 책의 두번째 권인 교환의 세계(Les Jeux de l‘Echange)를 끝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자본주의의 과정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오직 일정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이 갖추어져야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들은 자본주의의 과정을 준비해준 것이거나 적어도 용이하게 만들어준 것들이었다. - P861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예들에서 보았듯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요인이 되는 가문의  영속성과  연속적인 축적이 확보될 수있을 만큼 계서화된 사회는 자본주의의 전(前)단계를 밟아가는 것이다. 유산이 상속되고 가산이 불어나며 가문 사이에 유리한 연결이 맺어진다는 것, 동시에 사회가 여러 집단으로 분화하고 그중 어떤 집단이 지배적이거나 잠재적으로 지배적이며 또 계단식이든 사다리식이든 사회적 상승이 — 쉽지는 않더라도 — 어쨌든 가능하다는 것 등, 이 모든 것은긴, 아주 긴 사전 준비를 의미한다. 사실 여기에는 정치적이고 소위 "역사적인" 그리고 특히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들이 개입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수세기에 걸친 사회 전체의 움직임이 작용하는 것이다.  - P862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점은 세계시장이라는 특별한 해방세력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원거리 무역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도의 이익을 누리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다.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권인 제III권에서 세계 - 경제(économie-monde)의 역할을 다시 볼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특별한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는, 지구상의 자립적인 각 지역으로 구성된 닫힌 공간이다. 세계 - 경제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 - 경제의 변경이 변화하며, 유럽이 세계 정복을  시도하는 것과 동시에 세계 경제는 커진다. 세계경제와 함께 우리는 또 다른 수준의 경쟁, 또 다른 차원의 지배를 보게된다. 우리는 유럽과 세계의 시간상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다름 아닌자본주의 전체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는 세계체제의 연쇄를 통해서 수없이 반복한 바 있는 법칙을 추적해갈 수 있다.  - P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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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사람은 다른 지적인 사람에게 바보로 보이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멋쟁이가 자신의 우아함이 무시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대귀족이 아닌 시골뜨기 앞에서다. 세상이 존재한 이래 사람들이 낭비해 온 재치의 비용과 허영심에 의한 거짓말의 사분의 삼은 - 이런 것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트렸을 뿐이지만 - 항상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새로운 사랑이 합쳐진 후부터는 사랑을 암시하는 불꽃이 스며들어 사교 생활을 따뜻하게 채색하며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삶의 이런 시기에 이른 사람은 이미 사랑을 여러 번 경험했으며, 따라서 사랑은 더 이상 그 고유의, 미지의 숙명적인 법칙에 따라, 우리의 수동적인 놀란 마음 앞에서 저절로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에 도움을 주며, 기억이나 암시로 사랑을 왜곡하는 것이다.

사랑은 더 이상 그 고유의, 미지의 숙명적인 법칙에 따라, 우리의 수동적인 놀란 마음 앞에서 저절로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에 도움을 주며, 기억이나 암시로 사랑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의 정신이 더 이상 고귀한 관념을 품지 않게 된 후부터는, 그런 이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믿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물의 본질을 소홀히 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생각으로 도피하는 습관을 얻었다.

대중이란 서서히 동화된 진부한 예술 작품으로부터 길어 올린 것만이 매력과 우아함과 자연의 형태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독창적인 예술가란 바로 이런 진부함을 벗어 버리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에겐 대가들의 그림에서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보편적인 특징뿐 아니라, 반대로 보편적인 것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 즉 우리가 아는 얼굴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거장들의 그림 속에서 찾아내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특이한 취향이 있었다.

사랑이 생겨나는 온갖 방식들이나 성스러운 병을 퍼뜨리는 온갖 요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효과적인 것은 이따금 우리를 스쳐가는 저 커다란 동요의 숨결이다. 그런 순간에 우리가 기쁨을 함께 나누는 존재야말로 바로 우리가 사랑하게 될 사람이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그 존재가 그때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또는 다른 사람과 같은 정도로 우리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우리 취향이 배타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 곁에 없을 때, 그 사람의 동의로 우리가 즐기던 쾌락이 갑자기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불안한 욕구로, 이 세계의 법칙으로는 결코 충족되거나 치유될 수 없는 저 부조리한 욕구로, 즉 그 사람을 소유하겠다는 미친 듯한 고통스러운 욕구로 대치될 때, 이런 조건은 실현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이성이 그날 밤에는 도저히 실현될 수 없으리라고 말해 주던 기쁨이 이제는 오히려 그런 사실 덕분에 더욱 현실적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기쁨에 협력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기쁨은 그의 밖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기쁨을 자신에게 부여하기 위해 정신에서 끌어낼 필요도 없었다. 기쁨은 그 자체로부터 발산되었고, 기쁨 자체가 그가 두려워하던 고립을 꿈처럼 사라지게 하는, 눈부시게 빛나는 진실을 투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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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상 능력주의는 기회의 평등과 결합되는 일이 많다.  물론 능력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보완하는 요소로  받아들여졌으며 초기에는 엘리트 계층을 다른 계층에게 개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 이동을 촉진하기보다 억제하는 요소에 가깝다. 한때 사람들을 하찮은 주변부에서 미국의 상층부로 올려놓았던 수단들이 현재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중산층 가정은 부유한 가정처럼 정성스러운 교육을 감당할 여력이 없으며, 평범한 학교는 충분한 자원을 끌어모으지 못하고 열등한 교육을 제공하기 때문에 갈수록 엘리트 학교에 뒤처지는 추세다. 

마찬가지로 능력주의로 말미암아 직업은 엘리트 대학에서 특별한 교육을 받은 대졸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결과 직업은 학교에서 형성된 불평등을 확대하고 심화한다. 실력과 성실한 직업의식만으로는 더 이상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노동시장이 갈수록 특별한 교육과 값비싼 훈련을 받은 인력을 우대하는 추세로 변화하는 가운데 일류 대학 학위가 없는 중산층 근로 인력은 노동시장전반에서 차별을 받는다.
능력주의는 결과의 배제뿐 아니라 기회의 배제까지도 유발하며 능력주의식 가치관은 물질적 피해도 모자라 도덕적 모욕까지 안긴다. 능력주의는 중산층에게서 훌륭한 교육과 보람된 일자리 기회를 박탈하면서도 학교와 직장에서의 성과를 고결한 가치로 포장한다. 

게다가 능력주의는 엘리트 계층에 특혜를 부여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이상 엘리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때 사회 전반에 공평하게 분배되었던 교육과 직업이 현재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 숫자가 너무 적은 엘리트 계층에 집중되어있다. 중산층에 타격을 입힌 바로 그 힘이 엘리트 계층에게도 과중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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