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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발전의 핵심을 두 가지 들라면 첫째, 상부에서여러 도구가 발달한 것이고 둘째, 18세기에 여러 수단과 방법이 증가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어땠을까? 유럽과 가장 거리가 먼  경우는 중국으로서 이곳에서는 제국의 행정이 경제의 계서화를 가로막았다. 단지 효율성 있게 돌아가는 것은 하층의 읍 및 도시의 상점과 시장뿐이었다. 유럽과 가장 유사한 경우는 이슬람 권과 일본이다. 물론 우리는 세계적인 차원의 비교사를 다시시도해보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거나 아니면 적어도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하도록 해줄 것이다.
- P184

내가 "경제 (economie)" — 또는 시장경제 — 라고 부른 것과
"자본주의(capitalisme)"라고 부른 것 사이의 영역 차이는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중세 이래 유럽에서 언제나  지속되던 상수(常數)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산업화 이전 시기의 모델에 세번째의 영역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非)경제라는 제일 아래층이다. 경제는 이곳을 부식토로 삼아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전체를 장악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 최하층은 거대하다. 이 위에 시장경제의 영역이 수평적으로 여러 다양한 시장과 연결을 늘려간다. 이곳에는 어느 정도의  자동성(automatisme)이 있어서 수요와 공급과 가격을 연결해준다. 마지막으로 이 시장경제라는 층의 옆에, 차라리 그 위에, 반(反)시장(contre - marché)의 영역이  있다. 이곳은 가장 약삭빠르고 가장 강력한 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바로 이곳이 자본주의의 영역이다. 그것은 산업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이다.
- P323

간단히 말해서 자기 영역이 아닌 곳에 자본주의가 침투한 것은 그 자체로는 정당화가 안 된다. 단지 상업의 필요성이나 이익에 따라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생산에 손을 댔다. 자본주의가 생산 영역에 침입하는 것은 기계 사용이 생산의 조건들을 변화시켜서 산업도 이윤의 확대가 가능해진 영역이 된 산업혁명기에 가서야 일어난다. 이때 자본주의는 그런 것에 의해서 크게 변형되고 나아가서 확대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국면에 따라 변화하는 행보를 포기한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9-20세기가 되어서는 산업과는 또 다른 조건들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산업시대의 자본주의라고 해서 그것이 단지 산업생산 양식에만 연관된 것은 결코 아니다.
-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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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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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우리가 삶을 사랑한다면 삶의 과정이, 다시 말해 변하고 성장하며 발전하고, 더 자각하며 깨어나는 과정이 그 어떤 기계적 실행이나 성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27/160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 ~ 1980)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Lieben wir das Leben noch?>은  저마다 다른 주제를 다룬 독립된 저자의 유작 8편을 묶은 책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다보면 각 편들의 내용을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를 발견할 수 있고 이 연결고리를 통해 개인부터 현대 사회의 공통된 문제와 해결방안을 발견할 수 있다. 프롬은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이는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삶의 목적을 미래의 행복에 두지 않고, 지금 눈 앞의 현실에서 발견하는 자세는 수단과 목적을 원래자리로 돌려놓는 것과 같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언어적이며 추상적인 것 대신 비언어적이며 구체적/경험적인 것을 긍정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또다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Copernican revolution)'이기도 하다.  


 현대의 다른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강조하고 싶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수단을 실제로도 수단으로, 목적은 실제로도 목적으로 놔두어야지 둘을 뒤죽박죽 섞지 말자고 결심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것의 목적이라는 서구의 종교와 인문주의 전통에 진심을 다하자고 결심해야 한다. 진심을 다하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그 전통에 찬동은 해야 한다. 지금은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다시 인간에게 윗자리를 돌려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0/160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고통은 인생의 최악이 아니다. 최악은 무관심이다. 고통스러울 때는 그 원인을 없애려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감정도 없을 때는 마비된다(p29)... 창조적인 화가의 자세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자기 나무나 꽃, 풍경을 보는 화가는 나무가 예쁘냐 아니냐에는 관심이 없다. 나무의 이름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훨씬 더 마음에 두는 것은 나무를 남김없이 직접 경험하는 것, 그 나무의 본질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무를 보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0/160


 순전히 개념으로만 인지할 경우 그 나무는 개성이 없으며 그저 '나무' 종 중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나무가 추상의 대변인에 그치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하게 인식할 경우 추상이 없다. 나무는 완전한 구체성과 더불어 그것만의 유일성을 띠게 된다. 그럴 경우 세상엔 나와 인연을 맺고 내가 바라보며 응답하는 이 한 그루의 나무만 존재한다. 그 나무가 나의 고유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나 미래에 산다. 하지만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만이 존재한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64/135


 에리히 프롬은 그 첫째로 눈 앞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것을 강조한다.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른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진실(眞實)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창조성이 필요하며, 창조성에 바탕을 을 둔 긍정하는 태도는 '사랑'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사랑은 인간을 목적으로 긍정하며, 수단으로 착취당하면서 발생하는 부정적 감정(증오 등)을 대신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대규모 인간소외를 조장하는 현대사회 문제의 해결책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현재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감성과 지성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인간 전체를 재발견해야 한다. 혹은 내가 좋아하는 표현을 써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을 재발견해야 한다. 나는 정신과 몸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p33)... 현대의 윤리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떠안아야 할 두 번째 과제는 창조적 인간이 되어 수비와 수용의 태도를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성이란 하나의 태도, 하나의 성격, 인간과 세계를 대하는 하나의 자세로서 창조성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4/135


  사고와 감정으로 자기 경험의 현실성을 확신하고 그것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용기와 믿음이 없다면 창의성도 없다. 따라서 창의적 자세를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기와 믿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둘을 장려해야 할 것이다...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최고의 대답은 이렇다. 창의성은 보고 (혹은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대답하는 능력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64/135


 나는 여기서 사용한 긍정이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싶다. 사랑은 삶과 성장, 기쁨과 자유의 긍정과 같은 뜻이므로 당연히 악, 그러니까 부정, 죽음, 강제는 사랑할 수 없다. 분명 주관적 감정은 신나는 흥분의 감정일 수 있고, 흔히 이것을 의식적으로 '사랑'으로 이해한다. 당사자는 그것이 사랑이라 믿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주관적 경험은 내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8/135


 에리히 프롬은 사회적으로 권위주의적 체제를 부정적인 제도로 해석한다. 프롬의 관점에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은 신(神)에 부여된 권위에 더해 자본(資本)이라는 우상을 '물신(物神)'으로 만들고 인간소외의 현실을 은폐시키는 부정적 도구다.  소외된 인간이 느끼는 결핍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은폐시킨다.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는 '소비자 주권'이라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는 '국민 주권'을 통해 개인이 주도권을 갖는 양 호도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기에 현대인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 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맞닿아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지성과 감성, 관능의 가능성을 모두 갖춘 자아를 긍정할 깊은 감각을 키울 만큼 개인을 지지하지 못했다. 개인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생산과 이윤의 요구에 복종하라고 강요한 청교도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유산은 파시즘이 대두할 조건을 마련했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63/135


 인간은 '소비하는 인간(호모 컨슈멘스 homo consumens)'으로 변해버렸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고 수동적이며 날로 더해가는 끝없는 소비로 텅 빈 마음을 보상하려 한다. 과식, 구매, 음주가 우울증과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메커니즘과 관련해서는 수많은 임상적 사례가 존재한다(p101)... 최대 소비에서 최적 소비로 이행하는 것은 생산패턴의 극적인 변화가 될 것이며 나아가 뇌를 세척해 탐욕을 점점 더 부추기는 광고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올 것이다(광고의 제한과 공공 부문 생산의 증가는 국가가 개입하지 않으면 거의 생각할 수가 없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02/135


 인간은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 때문에 다양한 이유로 불안과 소외감을 느낀다. 이 시스템이 날로 커져가는 경제적, 관료적 거인을 만들어내며, 그 거인과 마주 선 개인은 작고 무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개인은 날이 갈수록 시회의 사건에 적극 참여할 수 없으며, 중간 시민계급에서 그 아래 시민계급에 이르는 폭넓은 계층에 커다란 불안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09/135


 인간은 최고의 자산, 즉 경제적/기술적 진보에 쓰이는 도구가 된다. 존재가 아니라 소유해 쓰이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동기에서 활동적인지가 중요하지 않고 결과가 중요하다(p124).... 수동성의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소비하라는 강제, 소비하는 인간이 되라는 강제다. 소비하는 인간은 내면이 공허하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안으로 불어넣어야 한다... 실제 그의 분주함과 게으름은 같은 것이다. 즉 내면 활동성의 결핍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25/135


 정치적 수동성에서도 똑같은 것을 목격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척하며 거기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선거와 이런저런 후보에 대해 열을 올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에 무관심하며 완벽하게 숙명론적이다.... 활동적인지 않은 민주주의, 가난한 로마 시민들이 서커스나 검투 경기를 볼 때나 요즘 사람들이 경마를 볼 때와 똑같이 수동적인 관중의 자세를 취하는 민주주의가 무슨 민주주의란 말인가? 물론 그렇게 된 데는 TV 같은 기기의 역할이 크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25/135


 저자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문제점 해결을 위해 잠시 현재에 머물 것을 권유하며,. 'Laissez faire'라는 시장방임주의 대신 'Let It Be'를 말한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소비가 아닌, 자신가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바쁨에 휩쓸려가지 않고 자신의 내면과 진실을 바라볼 것을 말하는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작은 것으로부터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프롬의 주장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고도 단순하기에 감동과 신선함은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은 행동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작은 결핍이 오늘날의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하게 된다. 이와 함께 서양 기독교가 낳은 자본주의라는 현대의 병폐를 동양의 선(禪)으로 넘으려는 내용 안에서 현대 사상의 큰 흐름을 확인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나는 수동성을 의식하고 이 수동성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깨달음이다. 다음 걸음은 진정한 활동성의 연습이다. 아마도 그 시작은 한번 가만히 앉아 바라보려는, 들어보려는, 명상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26/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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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씨가 말하였다. "세금이란 관부(官府)의 물건입니다. 공께서는 절도사이시니 먼저 세금을 내시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아랫사람들을 통솔하시겠습니까? 또 혼자서만 이정(里正)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세금을 내어 초달(楚撻, 매섭게 달고 치는 것)을 면하였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어떤 사람이 주행봉에게 유세하였다. "공의 얼굴에 글씨가 새겨 있으니 아마도 조정의 사자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걱정이니 청컨대 약으로 그것을 없애시오." 주행봉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한(漢)에 경포(?布)가 있었는데, 영웅이 되는 데는 방해되지 않았다 하니 내가 무엇을 부끄러워하겠소?"

황상이 말하였다. "근래의 왕조에서는 대부분이 진실로 믿고 제후들을 대우하지 아니하니 제후들 가운데 비록 충절(忠節)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길로 말미암지 못하였다. 제왕 된 사람은 다만 그 신의를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찌 제후가 마음으로 귀부하지 않을까 걱정하겠는가?"

"도적들로 하여금 스스로 서로 까발리어 고발하게 하여서 그 고발한 재산의 반을 그에게 상으로 주고, 혹은 친척이 그들[도적]을 위하여 자수하게 하면 그 무리들의 패거리들을 논죄(論罪)하고 그 자수한 사람을 사면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도적은 모일 수 없을 것입니다."

1년 시간 동안에 그의 직무를 살피시어 만약에 과연 능히 알맞게 감당할 수 있으며 그의 관직이 이미 높다고 한다면 평장사(平章事)로 제수하시고, 아직 높지 않다면 조금씩 바꾸어 승진시키고 권지(權知)의 일은 예전처럼 하게하십시오. 만약에 알맞지 않는다면 그들의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것을 거두시고 그 천거한 사람에게 책임 지우십시오.

무릇 정치를 하는데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신의를 두텁게 하는 것 만한 것이 없으며 신의가 진실로 드러난다면 전지(田地)는 넓어지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고, 전지가 넓어지면 곡식이 많아지고 곡식이 많아지면 이를 백성들에게 쌓아 두는 것은 마치 관부에 쌓아 두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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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인간이 ‘소비하는 인간’, 완전한 소비자가 되기 시작했고, 이런 인간상이 새로운 종교적 비전의 성격을 띤다는 사실이다. 이 비전에서 천국은 모두가 매일 새 물건을 살 수 있는, 바라는 모든 것을 살 수 있고 이웃보다 조금 더 많이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거대한 백화점이다. 이런 완전한 소비자의 비전은 사실상 세계를 정복한 새로운 인간상이다. 정치 조직이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인간은 공허감을 느끼고 이 허전함을 상징적으로 채우기 위해 다른 사물,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물로 자신을 채워 마음의 공허와 쇠약을 극복하려 한다. 불안하거나 우울한 기분이 들면 무언가 구매하거나 냉장고를 열어 평소보다 더 많이 먹으려 하고 그러고 나면 약간 덜 우울하고 덜 불안해진 모습을 확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수동성의 결과는 무엇일까?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누가 봐도 확실하며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바로 소비하라는 강제, 소비하는 인간이 되라는 강제다. 소비하는 인간은 내면이 공허하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안으로 불어넣어야 한다. 수동성 탓에 실제로는 공허하지만 꽉 찼다는 허울을 선사할 물건으로 자신을 채워야 한다. 세계를 지배한다고 잘난 척하는 어른임에도 그는 젖을 달라고 우는 영원한 젖먹이다. 실제 그의 분주함과 게으름은 같은 것이다. 즉 내면 활동성의 결핍이다.

정치적 수동성에서도 똑같은 것을 목격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척하며 거기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선거와 이런저런 후보에 대해 열을 올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에 무관심하며 완벽하게 숙명론적이다. 어떤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며 그 후보가 이기면 정말로 스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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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사마광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에 주의 세종(世宗, 후주의 2대 황제인 곽영)과 같이 한다면 인(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의 몸을 아끼지 않고 백성들을 아꼈으니 만약에 세종과 같다면 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무익(無益)한 것으로 유익(有益)한 것을 폐기한 것이 아닙니다.

무릇 현명한 사람을 나아가게 하고, 불초(不肖)한 사람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그 재주를 거둬들이기 위함인데, 은혜로 구휼하고 진실하게 믿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묶기 위함이고, 공로를 이룬 사람에게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그들의 힘을 다 쏟게 하기 위함이며, 사치한 것을 버리고 쓰는 것을 절약하는 것은 그 재물을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고, 때에 맞추어 부리고 거둬들이는 것을 적게 하는 것은 그 백성들을 커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 재주 있는 사람이 이미 모여지고, 정치적인 일들이 이미 잘 다스려지며, 재물의 쓸 것이 이미 충분하고, 사민(士民)이 이미 붙어있기를 기다리고, 그런 다음에 들어서 이를 사용하면 공로는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무릇 공격하여 빼앗는 도리는 반드시 그 가운데 쉬운 것을 먼저 처리하는 것입니다. 당(唐)과 우리는 경계를 맞댄 것이 거의 2천리나 되는데, 그 형세는 쉽게 시끄럽게 됩니다. 이를 시끄럽게 하는 것은 당연히 아무런 대비가 없는 곳에서 시작하여야 하는데 동쪽을 대비하고 있으면 서쪽을 시끄럽게 하고, 서쪽을 대비하고 있으면 동쪽을 시끄럽게 하면 저쪽에서는 반드시 분주하게 다니며 이를 구원할 것입니다.
분주하게 다니는 사이에 그들의 텅 빈 곳과 알찬 곳 그리고 강한 곳과 약한 곳을 알게 되고 그런 다음에 알찬 곳을 피하고 텅 빈 곳을 치며 강한 곳을 피하여 약한 곳을 치는 것입니다. 아직은 반드시 대규모로 거병하지 말고 또 경무장한 군사들로써 이들을 시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황상이 시중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경들은 불상을 훼손(毁損)한다고 의심하지 말라. 무릇 부처는 선한 도리를 가지고서 사람을 교화하는 것이니 진실로 선에다 뜻을 두면 이것이 부처를 섬기는 것이다. 저들 구리로 만든 모양이 어찌 이른바 부처이겠는가? 또 내가 듣기로는 부처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데 있다 하니 비록 머리나 눈이라도 오히려 버려서 보시(布施)하는데 만약에 짐의 몸이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다면 역시 아까워 할 것이 아니다."

능히 사람을 알고 공정한 사람을 선발하여 재상(宰相)으로 삼고, 백성들을 아끼며 하소연 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수령(守令, 태수와 현령)으로 삼으며, 재물을 풍부하게 하여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금전과 곡식을 관장하게 하고, 원래의 정서를 알 수 있고 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형옥(刑獄)을 관장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폐하께서는 다만 명당(明堂)에서 팔짱을 끼고 그들의 공로와 허물을 보아 상을 주거나 벌을 준다면 천하가 어찌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하겠습니까? 왜 반드시 군주의 존귀함을 내려 신하의 직분을 대신하며 귀한 지위를 낮게 하여 천한 일을 친히 하시니 마침내 정치를 하는 근본을 잃는 일이 없겠습니까?"

황제가 고평에서의 전역(戰役)23을 통하여 비로소 그 폐단을 알았는데, 계해일(12일)에 시중을 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무릇 군사는 정병(精兵)을 만들기에 힘써야지 많게 하기를 힘쓸 것이 아니고, 지금 농부 100으로 갑사(甲士) 한 명을 기를 수 없는데 어찌 백성들의 기름진 것을 빼앗아 이러한 쓸데없는 물건을 길러야 하겠는가? 또 건장하고 나약한 것이 구분되지 않는데 무리들에게 어떻게 권고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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