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데트의 육체는 별로 좋지 못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녀는 살이 쪄 갔다. 그렇게도 풍부한 표현이며 애절한 매력이며 놀란 듯 꿈꾸는 듯하던 시선도 그녀의 첫 번째 젊음과 더불어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녀가 스완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된 것은, 말하자면 이처럼 스완이 오데트를 가장 덜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는 예전에 느꼈던 매력을 다시 찾아내려고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번데기 아래 살고 있는 것은 여전히 오데트였으며, 여전히 덧없고 포착할 수 없는 앙큼한 의지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스완이 그녀 마음을 붙잡기 위해 예전과 똑같은 열정을 기울이기에 충분했다.

스완은 모든 사람 가운데서도 유독 자기에게만 그날 피에르퐁에 갈 권리가 없는 것은, 바로 자기가 오데트에게 있어 남들과는 다른 어떤 사람, 즉 그녀의 연인이기 때문이며, 이 보편적인 자유 통행 권리를 제한하는 것도 그 노예제도 중 한 형태, 그에게는 그렇게도 소중한 사랑의 형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행복해했다.

오데트가 사는 세계는, 그가 그녀를 그곳에 두느라고 시간을 보내고, 어쩌면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무섭고 초자연적인 세계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슬픔도 발산하지 않는 현실 세계가 아닐까! 그가 지금이라도 글을 쓸 수 있는 이 테이블이며, 지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이 음료수며, 그가 감사하는 마음만큼이나 호기심을 품고 찬미하며 바라보는 이 모든 물건들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 물건들은 그의 몽상을 흡수하면서 그를 몽상으로부터 해방해 주는 동시에, 물건 자체는 반대로 몽상으로 풍요로워져 만질 수 있게 실현해 보여 줌으로써 그를 흥미롭게 하고, 그의 시선 앞에서 입체감을 띠며 동시에 그의 마음을 진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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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도시들 1 - 도시의 탄생과 정보 기술 케임브리지 세계사 5
노먼 요피 외 지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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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도시화란 사람들이 모이고 사회적 계층이 나뉘는 과정을 말한다. 정치적 측면에서 도시는 다양한 사회적 분파의 다양한 관심사가 서로 충돌하고 협상하는 가운데 발달했다. 통치자(중간 계층의 정치 지도자 포함)와 백성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도시에서는 대규모 노동력 동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새로운 산업이 발달했고, 기술 혁신과 규모의 경제가 이를 뒷받침했다. 사회적 측면에서 도시는 기존의 혈연 중심 관계를 약화시켰다. 전통적 인간관계는 더 높은 권위 아래 복속되었고, 새로운 최고 권력에 의해 노역과 세금 의무가 부과되었다. 도시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면서 도시민의 정체성도 새삼 발달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정착지와 주변 환경은 도시 구조에 걸맞게 변해갔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544


  케임브리지 세계사 5 <고대의 도시들 1 : 도시의 탄생과 정보 기술 Cambridge World History Vol. III>는 신석기 혁명 이후 세계 각지에서 출현한 고대 도시문명을 다룬다. 농경 문화는 많은 산출량에 비례하는 노동 투입을 요구했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도시는 내부에서 계급과 분업을 발생시키고, 외부와는 배후지와는 생산물을 주고 받으며 문명권을 바꾸어 나갔다. 이 같은 측면에서, 저자는 도시는 고대 문명의 결과물이자 출발점이라 규정한다.


 도시국가는 단지 도시 하나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자원과 인력을 공급하는 상당한 규모의 배후지를 거느렸으며, 배후지는 사회/정치적 조직에 의거해 도시에 결부되어 있었다. 배후지와 도시로 구성된 많은 도시국가가 있었고, 이들은 커다란 하나의 문화권에서 "대등정치제(peer-polity)"로 공존했다. 상호 전쟁을 통해 그중 한 도시국가가 전체 문화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차지한 헤게모니는 흔히 변화되었고, 이후 도시 국가의 자치 체제가 무너지고 더 큰 규모의 영토국가가 들어선 뒤에는 헤게모니 자체가 "붕괴"되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63


 최초의 도시가 부상한 이후 도시 네트워크의 형성과 해체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로부터 기원전 제2천년기 중엽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치 환경이 근본적 변화를 겪기 이전까지는 도시 네트워크 체제가 유지되었다. 도시 체제가 작동하면서 부와 정치 권력이 엘리트 계층의 손에 집중되었다. 경제 부문은 갈수록 차등이 심화되었고 효율성이 높아졌다. 사람들이 도시로 들어왔다가 다시 시골로 되돌아가기도 했고, 시골의 통제는 갈수록 강화되었다. 과거의 정체성은 변형되었고 새로운 도시 정체성이 발달했다. 세기를 거듭하는 동안 도시가 만들어낸 풍경 또한 변화를 계속했다. 정치적 관행과 이데올로기가 발달했을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은 건축물도 새롭게 들어섰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468


 <고대의 도시들 1>의 전체 주제는 고대 도시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건축', '문자'  그리고 '종교'의 조합이었다. 도시를 이루는 하드웨어인 '건축'과 소프트웨어인 '정보 전달 수단'과 컨텐츠인 '종교'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된 요소임이 본문에서 확인된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종교'는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하루하루 변화하는 날씨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기후는 농경 문화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기후에 따라 적합한 거주 형태가 결정되었고, 날씨에 따라 행사가 결정되었다. 거주 형태에 따라 건축물이 들어섰고, 농사를 위해 행사가 진행되었다. 건축물이 정(靜)적이라면, 의례는 동(動)적이었다. 또한, 주기에 따라 달라지는 의례는 건축물의 배치에 영향을 주고 고대 도시는 만들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고대 도시에서 '종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모든 것이었다.


 도시에서 권력 표현의 핵심은 기념비적 건축물과 그를 둘러싼 공간이었다. 기념비적 건축물 위주로 도시 설계가 이루어졌고, 의례 행사가 건축물에 숨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의례 행사는 영원한 동시에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p224)... 초기 문명의 두드러진 혁신이었던 도시는 신앙 체계에서 비롯되었다. 도시는 곧 신앙 체계가 물리적으로 구현된 것이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225


 고대 도시의 전형적 구조는 밀집된 주거 구역과 개방된 공간 혹은 건축물들이 몇 차례 번갈아가며 구성되는 식이었다. 이와 같은 구성 방식은 행사를 개최하는 데 필수적이었다(p208)... 행사에 사용되는 특별한 물품은 흔히 멀리서 가져왔다. 중요한 물품은 전문 수공업자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행사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통치자나 엘리트 계층에게 후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사회의 지도층에 속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209


 행사의 핵심은 이동이었다. 행사와 기념식을 위해 건물과 통로가 조성되었고, 그에 따라 이동 경로가 정해졌으며, 사람들이 이동 과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전달받을 수 있도록 설계가 되었다. 도시 공간을 이용한 행사와 그 의미는 주민의 의식에 각인되었다. 이외에 다른 지역을 오가는 것도 또 한 가지 이동의 유형이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214


 도시의 외관에 건축물이 토대가 되었다면, 도시의 체제 유지를 위한 기반은 문자(文字 letter)였다. 이미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사회적 불평등은 이 시기에는 더욱 확대되었고, 사회적 계층화가 상당 정도로 진척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계층 별로 자신의 역할이 고정되면서 일은 점차 전문화, 분업화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보편적인 문자가 사용되며, 고대 도시 특성의 한 축을 담당한다.


 고대 도시를 운영하려면 모든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체제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야만 이질적 집단들을 서로 연결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대개의 도시는 전문 행정 관료 체제를 동원했다. 도시에는 갈수록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점차 질서도 강화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워낙 가까이에서 상호 의존적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소요되는 물량과 행정 관리를 인간의 기억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전문화된 기록 관리(record- keeping) 수요가 생겨나게 되었다. 문제는 도시를 구성하는 인력과 필요한 물자의 흐름을 추적하고 조정하는 일이었다. 도시의 등장과 함께 위계질서와 통제 체제는 더욱 확고하고 정교해졌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386


 도시화 과정은 어느 한 공간에 주민이 몰려드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관습의 근본 구조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참여의 장(field)으로 사람들을 이끌어내고, 말하자면 그 새로운 장에서 참여자들이 새롭게 규정되는 동시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둘째는 획일화다. 획일화는 도시화 과정의 핵심이다. 권력은 기호(signifier)와 의미(signified) 사이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는 다양한 권력 기관(제도)을 통해 바로 그 공간을 파고든다. 권력의 목적은 유통되는 의미를 규정하는 것, 그리고 허용 가능한 담론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311


 케임브리지 세계사 5 <고대의 도시들 1>에서는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는 농경문화의 요구에 맞춰 기후가 적합한 지역에 도시가 형성되었음을 고대 이집트,  중국, 동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잉카 문명을 통해 보여준다. 이들 문명 모두 신(神) 중심의 권력 구조와 함께 왕, 귀족, 엘리트 계층, 농민 등 서열화된 계급사회의 면을 보인다. 또한, 의례(儀禮)를 통해 이들은 권위를 입증하고 권위를 만들어갔으며, 권위를 사용해 건축물을 만들어 권위를 강화하고, 강화된 권위로 체제를 유지하고자 문자를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자를 통한 정보 독점이 그들의 체제를 굳히는데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대인들의 삶 역시 오늘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신석기 혁명기 이후 인류는 적어도 주제면에서는 같은 고민을 수천 년 동안 반복해오고 있는 셈이다. 


 도시의 성장을 정치적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친족 기반 집단의 지도자들이 연맹이나 의회를 형성하여 분쟁을 조정했고, 본인의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들을 이끌고 동맹이 체결된 곳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정치적 연맹체에서 단일한 지도자가 출현했고, 사람들이 모일수록 그들의 권위는 더욱 높아져갔다. 이를 근거로 농업의 집약화, 대규모 토목 공사, 군사 원정 등을 조직할 수 있었고, 전쟁 포로를 잡아 와서 도시에서 노예로 쓸 수 있었다. 사원은 새로운 정치 현실에 신성(神聖)한 면모를 더하는 기능을 잠당하기 위해 생겨났을 것이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481


 고대의 도시들 속에서 우리는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이 구성한 '물질문명-시장경제-자본주의'의 틀을 떠올리게 된다. 농작물과 농기구 생산, 생산물 보관을 위한 회계시스템 등에서 우리는 1,2,3차 산업의 물질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도시-주변부'와의 교환에서는 시장경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아직 자본주의의 싹은 이미 트고 있었는데, 이들의 발화는 다음 편 <고대의 도시들 2  : 권력과 제국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시가 형성되는 과정을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유통 관계가 중요했는데, 도시 안에서 사람들이 생산한 농산물 혹은 수공업품을 서로 교환하는 시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형성되기 전, 생산과 교환은 사회 및 정치적 관계와 긴밀히 얽혀 있었다. 그 관계에 따라 초기 시장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통제되었다. 따라서 논쟁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초기 도시가 등장할 때 이미 정치적 협상 및 정치권력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 같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545


 도시에서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 개념이 출현했던 증거도 있다. 바로 "시민(citizen)" 개념이다. 기원전 제3천년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엘리트 계층과 노동자 계층을 막론하고 기관에서 보유한 배급 명단에는 출신 도시가 기록되어 있었다. 출신 민족 명칭보다는 출신 도시 명칭이 당시 사회에서 더 보편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553


마야 도시의 구성 의도를 해석한 설득력 있는 견해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마야인은 멀리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길들여지지 않고 위험해 보이는 성스러운 공간(동굴, 언덕 등)을 ‘포착‘ 내지 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도시 중심에 가져다 놓고 엘리트 계층의 통제 아래 두고자 했다. 인간의 재주로 만들어낸 건축물을 자연적이면서도 영원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언덕은 언제가 그곳에 있었지만, 왕이나 엘리트 계층의 주도로 다시 만들어진 언덕은 오래된 것인 동시에 새로운 곳이었다. - P135

제1천년기에 이미 사회의 계층화는 중앙의 통치자로부터 지방이나 특정 지역 단위까지 보편화되어 있었다. 비문을 통해 지역 엘리트 계층 또한 의례로써 권위를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힌두교의 통치 기술과 토착 애니미즘 신상을 혼합하여 왕국의 수도를 성지로 만들었고, 그곳이 의례 행정의 중심이 되었다. 성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의례용 건물 건축이었다. - P187

고대 중국에서 주요 도시의 종말은 대개 경제적 이유보다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왕조가 바뀌거나 제국이 탄생하면 도시는 새로운 사이클로 접어들었다. 이전의 도시에서 개발된 어떤 부분들은 새로운 혁신을 거쳐 유지되었다. 무엇보다 문자가 바로 그러한 사례였다. 상나라의 문자 체계와 필사자들은 정복 왕조 주나라에 의해 그대로 채택되었다. 주나라는 중국의 더 넓은 지역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도시를 건설했으며, 그 과정에서 문자도 보급되었다. 문자는 정치, 종교, 행정, 군사, 문화 생활은 물론 도시 바깥에서도 사용되었다. - P300

다른 도시들이 파편적으로 자연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였다면, 콘코와 티와나쿠의 정치권력은 인간과 곡물과 가축의 생존에 핵심이 되는 자연 과정의 일부를 해석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의례 관습 덕분이었다. 그들의 의례 행위는 자연환경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핵심적 자연 현상을 영적 존재로 이해했다. 자연의 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사회적, 공간적, 우주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데 성공한 집단은 월등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기원후 500년경부터 이들은 엘리트 계층으로 대두되었으며, 이후로는 티와나쿠의 기념비적 건축물 주변에서 살았다... 기념비적 건축물과 석상이 나타내는 것, 즉 압축 모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자연 현상을 움직이는 작동의 주체로서의 조상신이었다. - P458

도시에서 사원은 가장 중요한 시설물이었다. 사원은 다양한 문화적 행위가 거행되는 구심점으로, 대중이 참여하는 의례는 물론 농산물이나 수공업품의 생산도 사원에서 이루어졌다. 도시의 통치자는 사원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이와 같은 관계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p555)... 성벽은 다양한 관점에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성벽을 건설한 목적이 적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지, 도시민이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통치자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는지, 주변에서 도시가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는지 등이 관심 분야였다. - P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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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놓고 말해서 당신이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리고 잠재적인 적이 이처럼 많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어떠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선거운동을 최대한 사려 깊고 성실하게,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전개해야 합니다.

공직에 입후보하면 친구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일반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당신은 친절과 호의, 오랜 친분, 이용가치, 타고난 매력으로 친구들의 호감을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거에서는 우정을 일상생활에서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보자에게는 호의를 보이거나 동료를 만들어주는 사람은 모두가 친구입니다.

사람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친구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지지할 거라고 생각하는 후보가 있다면, 그보다 바보 같은 생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유권자에게 시간과 공을 들이지 않고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기적적인 능력과 명성, 업적이 있어야 합니다.

직접 하든 아니면 친구들의 힘을 빌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이 당신의 대의에 동참하도록 힘쓰십시오. 그들과 대화하고 지지자를 보내 당신이 그들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리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광장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가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을 따르는 무리의 규모가 커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당신을 따라 광장으로 향하는 모습은 모든 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유권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그들을 알아봐주고, 인간적이고 관대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또 시간을 내서 유권자를 만나고 자신을 알려 나가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만큼 그들을 기쁘게 하는 데 필요하다면 무슨 말이든 해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열심히 하다보면 당신의 좋은 점들이 친구들을 통해 퍼져나가 그저 건너들을 때보다 더 많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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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5-31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로마의 공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정말 공동체에
도움이 되고 헌신하는 마음에
출마했다지요.

그 시절의 대의는 사라져 버
리고 오로지 당선을 노리는
모리배들의 경연장이 된 현
실이 참 비루해 보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31 23:35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오늘날 정치현실이 적지않게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공화정 시기의 정치는 달랐을까 하는 의문도 던져 봅니다. 우리가 접하는 많은 기록에서는 공화정 시기의 로마를 황금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남은 많은 이들도 자신보다 공동체를 위하는 모습 속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사의 대부분이 제정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공화정을 미화하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선거에 이기는 법>에도 오늘날의 혼탁함에 못지 않은 권모술수가 적지 않게 서술되어 사람 사는 곳은 비슷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개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실감하게 됩니다...

바람돌이 2022-06-01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투표하고 왔는데요. 오늘 같은 날 의미심장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일듯 싶네요. ^^

겨울호랑이 2022-06-01 21:33   좋아요 0 | URL
오늘 투표율은 역대 최저인듯 하네요... 이것 또한 의미가 있겠지요.... 바람돌이님 오늘 애쓰셨습니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에 국제 무역의 거대한 발전은 레알 은화가 세계 각지로 대량으로 확산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당시국제 무역이 도달한 수준이 유지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대량의 레알로 대표되는 유동성이 시장에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만일 레알이 거부되어 유통량이 감소한다면, 국제 무역은 급격한 쇠퇴를 감수해야 했다. 이와 같은 점은 당시 외관상모순적인 공고문들이 오락가락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각국은 처음에는 스페인 악화가 시장에서 국내 양화를 구축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레알을  금지했다가도, 나중에는 특히 동양 국가들과의 무역 활동이 빈사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면서도 국내 화폐를 보호하기 위해 국내 화폐와 레알의 교환 비율을 조정해가며 결국 레알을, 적어도 특정한 레알을 슬며시 다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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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대중의 취미에 아부하지 않거나 익숙한 상투어를 쓰지 않아서 조금만 대담한 문체를 사용해도 대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독창적인 작가들이 있는데, 스완이 베르뒤랭 씨의 노여움을 산 것도 같은 이치였다. 이들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스완에게서도, 그를 뱃속 검은 사람으로 믿게 한 것은 바로 그가 쓰는 언어의 새로움이었다.

오데트의 존재로 인한 동요와 얼마 전부터 그를 떠나지 않는 그 열기 어린 거북함은, 자연 감상에 필수 배경인 고요와 안락을 빼앗고 있었다.

오데트가 많은 남자들 눈에 매력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그들이 그녀 육체에 느끼는 매력 탓에 그 역시 그녀 마음 구석구석까지도 완전히 지배하고 싶다는 고통스러운 욕구를 느꼈다.

그녀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의 크기를 알리고자 애썼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기쁨은 그의 사랑이 지속되는 한 상처 받기 쉬운 그를, 질투의 발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었다.

스완은 갑자기 심한 아픔을 느꼈다. 마치 육체의 아픔이기라도 한 것처럼 스완의 생각은 그 아픔을 줄일 수 없었다. 아니, 차라리 단순한 육체의 아픔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의 생각과는 무관해서 생각을 아픔에 고정하고 아픔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아픔이 일시적으로 멈추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 아픔은 생각 자체였으므로 단지 기억만 떠올려도 되살아났다.

그녀는 창문 두드리는 소리를 분명 들었던 것이다. 스완은 이 말에 한 조각 정확한 사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불시에 기습당한 거짓말쟁이가 꾸며 내야 하는 거짓말에 어떤 사실을 집어넣고 거짓말과 함께 어우러지게 하면, 아마도 ‘진실’인 듯 보일 거라고 생각하며 안심하는 그런 것이다.

오데트가 흔히 하던 거짓말은 그렇게 결백하지 않았고, 만일 탄로나면 이런저런 친구와의 관계에서 엄청난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을 숨기는 데 활용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거짓말을 할 때면, 겁에 질려 자신을 방어할 만큼 충분히 무장되지 않았다고 느꼈고, 또 성공을 확신할 수도 없었으므로 잠을 자지 못한 몇몇 어린애들처럼 피로해져서는 그만 울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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