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면 용감하다
이두호 지음 / 행복한만화가게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74 ― 만화쟁이가 되고 싶으면 먼저 사람이 되자
 : 이두호, 《무식하면 용감하다》


- 책이름 : 무식하면 용감하다
- 글ㆍ그림 : 이두호
- 펴낸곳 : 행복한만화가게 (2006.3.2.)
- 책값 : 9800원



 (1) 우리가 걷는 길


 만화를 그리는 이두호 님은 이제 ‘만화쟁이’ 아닌 ‘교수님’입니다. 스스로 ‘교수’라는 이름보다 ‘만화가 선생’이라는 이름이 더 반갑다고 하는 이두호 님입니다마는, 만화쟁이가 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날이 올 줄은 거의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이제는 으레 교수가 되고 있는 사진쟁이들이지만, 사진쟁이가 대학교에서 ‘사진학과 교수’가 될 줄 알았던 사람은 거의 없었으리라 봅니다. 그저 사진을 찍는 사람이었을 뿐이고, 사진을 찍어 무슨 밥벌이가 되느냐 여겨졌을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림 그리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테며, 글쓰는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세상이 문화와 삶을 바라보는 틀이 아주 더디지만 하나둘 넓어지면서, 다 다른 자리에서 제 깜냥껏 애쓰는 사람들 목소리가 조금씩 스며들고 있습니다.


.. “공모전에 갔다 오냐?” 풀죽은 모습으로 겨우 대답을 하자 선생님이 물었다. “이리 와 앉아 봐라. 그래, 어떻드나?” “부끄럽습디더. 다른 애들 그림은 크기도 하고 다 잘 그렸는데 제 그림은 쪼매나고 못 그렸고 보기도 싫고 낯 뜨거워 죽겠습디더.” “왜 낯 뜨겁드나?” “지 그림이 너무 초라해서예.” 남무오 선생님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니 그림에 손질해 준 적 있었나? …… 한 번도 없지?” “예.” “거기 일등 한 그림 봤제? 그거 걔가 그린 것 같더나?” “정말 잘 그렸습디더.” “아니다. 내 보니까 니가 젤 잘 그렸어! 니 그림은 니가 다 그린 거 아이가! 니 그림이 진짜로 제일 잘 그린 기다! 그러니까 그 그림에 대해 신경 쓰지 마라. 상 받고 안 받고는 한 개도 안 중요하다.” ..  (22쪽)


 그런데 이와 같이 다 다른 목소리가 스며드는 크기는 얼마쯤일까요. 다 다른 목소리가 우리 삶터 곳곳에 스며들기는 하는데,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들은 어떤 매무새일까요. 우리 스스로 다 다른 목소리를 얼마나 잘 듣고 있는지요.

 말로는, 또 글로는 다 다른 목소리를 높이 여긴다고 내세우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는 하나도 안 바뀐 채 살아가지는 않나요. 우리 스스로 다 다른 목소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매무새라면, 아이들을 초중고등학교에조차 안 보낼 수 있는 한편, 대학교라는 데에 굳이 보낼 까닭이 없다고 여기면서, 이런 생각을 생각이 아닌 삶으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구태여 학원에 안 보낼 수 있습니다. 집에서 어버이 스스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웃집 어른한테 배우도록 할 수 있고, 다른 고장 어른한테 배우도록 아이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억대 연봉 받는 회사원이 되기를 꿈꾸는 우리 어버이라면, 아이들을 제도권 입시지옥에 빠져들도록 내밀게 됩니다. 학원에서 영어니 수학이니 논술이니 가르치도록 등을 떠밀고 맙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못하게 꽁꽁 틀어쥐면서 교과서와 참고서와 문제집에만 머리를 파묻게 합니다. 대학교 들어가는 그날까지 ‘네 푸른 날을 버리라’는 터무니없는 어버이 욕심을 아이한테 짓눌러 집어넣습니다.


.. 내 기억으로 나는 어머님을 거역한 적이 거의 없다. 어떤 결정을 할 때도 이게 어머님이 기뻐하실 일인가를 먼저 떠올리곤 했다. 그러니 못된 짓은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님이 얼마나 속상해 하실까를 생각하면 도저히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었다 … 우리 동네 건너편에는 피난민 판자촌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우리동네 형편이 난민촌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어둠에 잠긴 마을을 내려다보면 망망한 검은 바다 위에 반딧불 하나가 깜박깜박 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 집이었다. ‘아, 어머니 우리 어머니!’ 다른 집들은 기름을 아끼느라 불을 꺼 놓아 동네 전체가 깜깜했지만, 어머님이 내가 올 시간에 맞추어 불을 켜 놓고 기다리시는 우리 집은 늘 환했다. 마치 등대 같았다. 배가 바른 길로 들 수 있도록 인도하는 등대 말이다. 그 불빛을 보면 언제나 가슴속이 아주 환하고 따뜻해졌다. 어머니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주무시는 법이 없었다 … 내가 일곱 살쯤이었을 때 동네에 매촌이라는 공용 종이 있었다. 한 40살쯤 되었는데, 마을의 궂은일은 다 맡아서 했었다. 우리 또래 애들한테도 꼬박꼬박 인사를 했는데, 내가 지나가면 ‘도련님 나오셨습니까’라고 인사하곤 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께서는 나한테 매촌이 종이기는 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셨다. ‘오냐’ 하지 말고 ‘예’라고 존칭을 쓰라고 했고, ‘매촌아’ 하고 이름도 막 부르지 않도록 나한테 교육을 시켰다 ..  (37, 42, 177쪽)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삶입니다.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2009년 3월 19일 하루는 딱 한 번일 뿐입니다.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열다섯 살 나이는 딱 한 번 거쳐 지나갈 뿐입니다. 열세 살도, 열여섯 살도, 열아홉 살도 한 번일 뿐입니다. 스무 살이나 스물두 살이나 스물다섯 살이 두 번 찾아올까요?

 세상을 참다이 살아가는 길을 뒤늦게 깨달아 나이 예순에도 젊음을 누리기는 하지만, 나이 열일곱에는 열일곱에 걸맞는 푸름을 누리고, 나이 스물일곱에는 스물일곱에 걸맞는 젊음을 누려야 할 우리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월은 한 번이요 공부는 언제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랑말랑한 머리일 때 시험성적을 더 잘 낼 수 있다고 합니다만, 이와 마찬가지로 말랑말랑한 머리일 때 세상경험을 더 치러내면서 더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나거나 거듭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영어를 가르치면 영어를 더 잘할 수 있듯이, 어릴 때 우리 말을 올바르게 가르치면 우리 말을 잘못 쓰는 법이란 없으며, 어릴 때 착하고 바른 마음이 깃들도록 이끌면 아이들이 어긋날 일은 거의 없습니다.

 나이에 맞는 길은 언제나 한 번뿐이요, 하고픈 일은 언제가 되든 아주 넉넉하고 신나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이 마흔에도 대학생이 될 수 있고, 나이 쉰에 대학생이 된다고 나무랄 사람이 없습니다. 외려 늦깎이로 공부할 때 더 잘해 내고 훌륭히 치르는 사람을 보는 우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 남 선생님과 유명수 선생님이 술을 마시다 의견충돌로 다투신 적이 있었다. 유명수 선생님이 내가 재주가 있다면서 서울로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하신 모양이다. 그러자 남 선생님은 완강히 반대하셨다. 유명수 선생님이 당신은 왜 아이의 앞길을 막으려 하느냐고 따지자, 남 선생님은 두호가 천천히 단계를 밟아가면서 커야지, 당장 돈 몇 푼 생긴다고 보낼 수는 없다고 하셨다 … 세월이 지난 다음 생각해 보니, 당시 내 그림은 기교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지만 깊이가 없었다. 더 치열하게 작업해서 주제에 천착해야 했는데 그걸 하지 못했다. 아무도 내게 깊이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해 주지 않아, 내 그림에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  (53, 56쪽)


 그림이 좋아 그림길로 가겠다는 이들은 어떤 어려움을 치러야 한다 할지라도 어릴 적부터 그림길을 걷습니다. 글길을 걷든 사진길을 걷든 똑같습니다. 종교길을 걷든 철학길을 걷든 학자길을 걷든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옳은 공부길이 아닌 돈바라기 공부길이거나 이름바라기 공부길일 때에는 다릅니다. 옳은 그림길이나 옳은 글길이 아닌 돈바라기 그림길이나 이름바라기 글길일 때에는 다릅니다.

 스스로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는 길이었을 때에는 수많은 가시밭길이 제 삶을 가꾸어 주는 좋은 길입니다만, 스스로 돈과 이름 따위를 꿈꾸며 걷는 길이었을 때에는 수많은 가시밭길이 가시와 같이 몸에 꽂히거나 박히면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가시들은 뒷날 내 이웃들이 뾰족뽀족 찔리도록 합니다. 나 스스로 못 느끼지만 이웃들은 피를 흘리며 아프게 되는 가시가 내 몸뚱이에 촘촘히 박혀 있게 됩니다.


.. 이 집을 찾아갈 때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 댁에서 밥을 맛있게 먹을 때는 주린 배속에 먹을 게 들어가니 행복한 기분마저 든다. 그러나 밥숟가락을 놓는 순간부터 자괴감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단지 밥을 얻어먹기 위해 남의 집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창피해지는 것이다. 모멸감에 가까운 그 느낌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 참담함이었다. 나는 배고픔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안다. 굶주림은 사람에게서 염치를 앗아가고 이성을 마비시킨다 … 목이 메었다. 우리의 가난도 목이 메었고, 이 가난을 함께 견디는 친구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도 목이 메었다. 우리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꾸역꾸역 입에 빵을 들이밀었다. 눈에서는 괜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  (74∼76쪽)


 아름다움을 찾아 길을 걷는 사람은 돈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이 걷는 길에는 돈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많든 적든 언제나 알맞춤하게. 그래서 아름다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늘 가난을 옆에 끼고 살면서도 가난을 흐뭇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가난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를 뼈속 깊이 고맙게 느낍니다. 있으면 있는 만큼 누리거나 나누고, 없으면 없는 대로 누리거나 나눕니다.

 이와 달리 아름다움이 아닌 돈을 찾아 길을 걷는 사람은 틀림없이 돈을 움켜쥡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거머쥐지 못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움켜쥐거나 거머쥘 수 없는 넋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껍데기와 몸뚱이를 돈으로 처바르며 곱게 보이고자 애쓰지만, 겉치레 예쁜 매무새는 오래 버티기 어려울 뿐더러 스스로 짐지어내기에도 벅찹니다. 무엇보다도 속알맹이 아름다움이 아닌 겉치레 예쁨이기 때문에, 제 주머니에 돈이 아무리 많이 넘쳐도 많은 줄 느끼지 않습니다. 더 가지려 하고 더 누리려 합니다. 혼자서만. 이웃한테 나누려는 마음은 쥐뿔만큼도 없는 가운데. 죽는 날까지 돈굴레와 이름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그 좁은 굴레가 아주 너른 세상이라도 되는 듯 잘못 알기 마련이고. 나중에는 잘못 아는 줄조차 느끼지 못하고.

 아름다움을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따로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어도, ‘가난 = 하늘나라 들어가는 열쇠’임을 삶으로 곰삭이며 어깨동무를 합니다. 돈을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수없이 하느님 말씀을 듣고 또 들었어도 ‘가난 = 어린이 마음 = 하느님 마음’인 줄을 깨닫지 못합니다. 지식으로는 알아도 몸으로는 모릅니다. 지식은 돈과 같이 넘치지만, 사랑은 하나도 없고 믿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2) 내가 걷는 길


 저는 대학교를 잠깐 다니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처음부터 안 들어갔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잠깐 몸을 담근 일도 여러모로 세상을 보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얻은 무엇이 있는 만큼 잃는 무엇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짧지 않은 여러 해에 걸쳐 더 너른 세상을 더 다부지게 두 다리로 디디면서 지낼 수 없었으니까요.

 옆지기는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졸이고 옆지기는 중졸인 셈인데, 고등학교를 사이에 그만둔 옆지기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왜 나는 이렇게 고등학교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눌려 지냈으며, 그 굴레를 떨치고 일어나며 떳떳하고 당차게 살아갈 힘을 못 내었는가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때 고등학교를 떨쳐냈다면 훨씬 더 이 땅을 사랑할 길을 찾았을 테며, 더더욱 이웃을 어깨동무할 길을 찾았으리라 보거든요. 다만, 그 길을 못 갔기 때문에 그 길대로 갔으면 좋았으리라는 꿈을 가끔 꾼다고 하여도 지금 걷는 제 길을 더 힘껏 가자고 다짐합니다. 못 간 길을 아쉬워할 겨를에 지금 가는 길을 더 즐겁고 힘차게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 만화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나서 어떤 만화가가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선은 싫증을 내지 않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우리 나라 역사물이 좋겠다 싶었다. 옛날이야기나 역사, 오래된 물건들을 좋아했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 고단하고 어렵게 살던 사람들,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휘말려 어쩔 수 없는 고통을 겪지만 바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애쓰는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 추한 사람들, 양반, 노비, 비렁뱅이, 기생, 농민, 화적, 보부상,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이 다양하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 보고 싶었다 … 편집자가 부탁하는 것은 거절하고 역사물만 그리겠다고 우겼으니, 아무개는 이제 배가 부른 모양이라는 빈정거림도 감수해야 했다 … 처음 독대를 등장시켰을 대 왜 이렇게 못생기게 그렸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편집장도 원고를 받아들고 하는 말이, “이게 주인공인가요? 왜 하필 주인공을 못생기게 그렸습니까?” 하고 물었다. 내가 답하길, “못생긴 놈이 잘생긴 놈을 이기면 더 재밌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못생긴 사람이라고 세상에 좋은 일 못하라는 법도 없고, 잘나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중요한 것은 만화 내용에 어떤 캐릭터가 근본적으로 만느냐가 우선적인 것이고, 또한 못생긴 것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캐릭터를 멋있게 잘 그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매력 있는 인물을 그리는 게 중요하다 ..  (117∼134쪽)


 둘레에서는, 그러니까 아버지라든지 피붙이라든지 저를 아끼고 걱정해 주시는 여러 분들은 ‘아직 늦지 않았으니 대학교 졸업장’을 따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 졸업장이 없으면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면서, ‘어른이 하는 말이니 들으라’고들 말씀합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참말 저를 걱정해 주시는 ‘어른’이라 한다면, 졸업장 없이도 이 나라 이 땅에서 아름답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애써 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졸업장 있는 사람만 높임을 받는 이 나라 이 땅이 아니라, 졸업장 없는 어느 누구이든 제 솜씨와 재주와 깜냥으로 아름답고 싱그러이 일하고 놀고 어울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셔야 하지 않느냐고.

 우리가 서로 똑같은 사람으로서 사랑스럽고 거룩하다면, 사람으로 보아야지 졸업장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맨몸뚱이 사람으로 보아야지 돈주머니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속에 깃든 마음과 넋을 읽어야지 얼굴과 몸매를 읽어서는 안 됩니다.


..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놀란 사실 중 하나는, 평생 그림을 그려야 하는 만화가를 지망하면서도 기본적인 그림 실력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만화가를 지망한다면 그림의 기초는 확실하게 다져져 있는 상태에서 기술적인 문제들을 고민해야 하는데, 뜻밖에도 기초 실력이 탄탄한 학생이 드물었다 …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면 많다고 줄여 달라는 부탁을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기성 만화가들은 대개 하루 종일 작업을 한다. 마감이 다가오면 몇날 며칠 밤샘도 한다. 이미 일정 수준에 이른 그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아직 한참 실력을 연마해야 할 학생들이 과제조차 힘겨워 하면, 어떻게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따라잡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나은 작품을 내놓아야 하는데 말이다 ..  (266∼267쪽)


 가끔 ‘국졸이면서 대학 교수가 되었다’느니 ‘고졸이면서 대학 교수가 되었다’느니 하는 신문기사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깟 가방끈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런 어이없는 기사를 쓰느냐 싶은데, 사람이 할 줄 아는 재주와 나눌 줄 아는 슬기로 ‘교사’가 되든 ‘교수’가 되든 해야지, 가방끈이 길면서 재주와 슬기 없는 사람이 교수 되는 일을 꾸짖을 줄 알아야지, 가방끈은 있되 재주도 슬기도 갖추지 않는 이가 함부로 초중고등학교 교사일을 맡는 일을 가로막을 줄 알아야지 …….

 우리 아이를 보면서 걱정이 많이 되는 대목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훌륭하고 아름다이 ‘교사라 하는, 하늘이 내려준 거룩한 일’을 맡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교사 = 쇠밥그릇’으로 아는 분 또한 그지없이 많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에서, 우리 아이뿐 아니라 이웃 아이들이 사람된 그릇을 익힐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살가운 벗을 사귀며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나눌 수 있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체벌이 아닌 폭력이 버젓이 이루어지는 우리 나라요, 교육이 아닌 입시만 판치고 있는 우리 나라요, 어버이들 얕은 욕심에 따라 찌들고 무너지고 아파하는 아이들이 넘치는 우리 나라입니다. 이런 가운데 이 나라 이 땅에서 조용히 머물면서 오순도순 살고픈 작은 꿈을 어떻게 ‘학교에서 보내는 긴 나날’ 동안 다치지 않게 할는지는 알 노릇이 없어요.


.. 지적한 장면들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일부러 넣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진행상 꼭 필요했기 때문에 들어간 장면들이다. 표현수위도 어느 누가 보아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스포츠신문의 독자는 성인들이다. 신문이라는 특성상 아이들이 볼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은 해야 하지만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작품에서 이 정도 표현을 못한다면 어떻게 작품을 하겠는가? 열심히 그림을 그려야 할 시간에 작품에 대한 기본 이해조차 못하는 사람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처지가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 대체 내가 무슨 일 때문에,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지루한 조사가 계속되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소리를 듣고 있으니 만정이 떨어졌다. 대한민국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는 내가 초라했다. 조사가 끝나고 내가 물었다. “내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할 말이 있으면 하십시오.” “내가 지금 몇 시간 와서 조사를 받았는데, 여기 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태 만화를 그리면서 내 만화를 한 번도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내 만화를 보면서 컸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에게도 조금도 거리낌없이 보여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일로 와야 한다는 게 환멸스럽습니다.” … 전화는 며칠이 지나서야 걸려왔다. “혹시 신문사에서 연락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는데요.” “이 선생님의 〈째마리〉가 기소되었습니다.” “…….” “검찰청에 와서 서약서를 써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서약인데요?” “신문연재 만화를 청소년에 유해하지 않게 그리겠다는 서약서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여태까지 그린 만화를 다 부정하란 말인가? 화가 치밀어올랐다. “못 쓰겠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런 세상에서 만화를 그리는 나 자신만이 아니라 만화가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가 없는 세상에 가서 만화를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 202년 4월, 5년이나 질질 끌었던 재판이 무죄로 판명이 났다. 정말 지리하고 분통터지는 세월이었다. 이 기나긴 세월 동안 만화가들의 창작 의욕은 뿌리째 흔들렸으며 자존심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 작가인 내가 봐도 눈살 찌푸려지는 작품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작품에 대해 간섭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간섭과 규제를 하다 보면 끝이 없고, 규제를 받는 환경에서는 제대로 된 작품도 나올 수 없다 ..  (232∼234, 239, 249쪽)


 저와 옆지기는 법이 없는 삶을 꿈꿉니다. 우리 스스로 법에 매이지 않으면서 살고자 합니다. 평등법이 있다고 하여 평등을 지키려는 삶이고 싶지 않습니다. 평등법이 없어도 평등 그대로 녹여내며 살아갈 뿐입니다. 평화법이 없어도 평화를 즐기고 나누며 살아갈 뿐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있다 한들 이 따위 법이란 지키지 않을 생각인 한편, 생각조차 할 값어치가 없다고 느낍니다. 옳지 않은 집시법에 매여야 할 까닭이 없고, 우리 몸을 망가뜨리는 예방주사나 의료보호법을 따를 쓸모가 없다고 봅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나라에서 못박거나 벌금을 매긴다고 해서 쓰레기를 안 버리는 우리 삶이 아닙니다.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우리 마음을 다치게 할 뿐더러, 우리 터전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쓰레기를 안 버립니다. 헤프게 쓰고 넘치게 즐기다가 마구 버리지 않는 우리 삶입니다만, 처음부터 헤프게 쓸 돈이 있지 않게끔 주머니를 가볍게 합니다.

 석유를 비롯한 지구자원이 걱정이 되니, 자가용을 몰지 않을 뿐더러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걷습니다. 1회용품이란 쓸 일도 없지만 처음부터 쓰지 않게끔 수저와 도시락통을 챙기며 다닌다든지, 가방이나 주머니에는 언제나 장바구니가 한둘쯤 들어 있습니다. 1회용품이 쓰이는 자리에 처음부터 아예 안 갑니다. 큼직한 할인마트에서 싸구려로 사들이는 물건이 없으니 집에 냉장고를 모실 까닭이 없고, 책읽기와 이야기나누기로도 하루해가 짧은 만큼 텔레비전을 들일 까닭이 없습니다. 손으로 빨래하는 기쁨을 빼앗기기 싫으니 세탁기를 쓰지 않는 가운데, 걸레 빨아 무릎 꿇고 마루와 방을 훔치는 즐거움을 놓치기 싫으니 청소기를 쓰지 않습니다. 이보다, 애먼 전기를 이런 데에서 흘려보내는 일은 마음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 철저히 작품 위주로, 예술지향주의로 갈 사람은 가고 그것을 접목해서 상업적으로 갈 사람은 또 그렇게 가면 된다. 그것을 한번 느껴 보지 못하고 상업적으로 가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나의 이러한 생각을 정부의 만화 관계자에게 말하고 제안을 했다. 만화축제나 전시에 비용을 낭비하지 말고 많은 젊은 작가들을 외국에 보내 주자고.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을 보내는 것은 당장의 가시적 성과가 눈에 드러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만화가들의 생각이 바뀐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  (303∼304쪽)


 3000원짜리 고무신 한 켤레로 한 해 동안 즐겁게 걸어다닙니다. 구멍난 양말을 아무렇지 않게 신고 다닙니다. 많이 해진 가방을 틈틈이 기우면서 메고 다닙니다. 너무 오래 타서 고장난 자전거를 손질하고 매만지며 살금살금 타고 다닙니다. 굴러다니는 비닐봉지를 곱게 접어 가방에 챙겨 놓고 여러 해에 걸쳐 되씁니다. 길바닥에 널리는 일수명함을 주워 책갈피로 삼습니다.

 가난해서 아끼며 살자가 아닙니다. 가난하지 않아도 사람이 살아가는 바른 길이라고 느끼니 아끼며 살자입니다. 아끼며 살기에 나눌 수 있습니다. 아끼며 살기에 노상 즐겁습니다. 아끼며 살기에 허튼 데에 마음 빼앗길 일이 없고, 얕은 데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아끼며 살기에, 내 삶뿐 아니라 옆지기 삶과 아이 삶을 사랑할 가장 아름다운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주 환하고 밝게 느끼면서 하루하루가 언제나 새롭고 싱그럽습니다.


 (3) 만화쟁이 발자취 《무식하면 용감하다》


 이두호 님이 만화를 그리며 살아온 발자취를 담은 이야기책 《무식하면 용감하다》를 읽습니다. 글쟁이들이 글쓰며 살아온 발자취는 아주 흔하게 나와 있고, 그림쟁이와 사진쟁이가 살아온 발자취 또한 어렵잖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어쩐지 만화쟁이 발자취를 찾아보기란 너무 힘듭니다. 만화평론 하는 이들이 만화쟁이 삶을 살펴보고 낸 책은 있어도, 만화쟁이 스스로 이야기를 풀어낸 책은 아주 드물어요. 이웃나라 만화쟁이 데즈카 오사무 님 이야기책이 우리 말로 옮겨지기는 해도, 우리 만화쟁이 스스로 엮어내는 이야기책은 어인 일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 책보를 가지고 가서 모래를 퍼다가 학교 운동장에 씨름판을 만들기도 했다. 하루 종일 백사장에 있어도 놀거리는 무궁무진했다. 뛰어놀기도 지치면 가만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래에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은 언제나 표정이 풍부했다. 하늘의 구름만 보아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갖가지로 모양이 바뀌는 구름은 얼마나 다채로웠던가.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부드럽게 흘러가는 강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잘 때도 있었다. 모래밭은 따스하고 아늑했다 ..  (12쪽)


 만화를 그리던 분들이 대학 교수가 되기도 하는 마당에, 이런 털털하고 수수한 이야기책이 못 나오는 까닭이 무엇인가 싶어 아쉽습니다. 만화쟁이 삶은 만화쟁이 스스로 펼쳐 보여야 할 텐데, 만화쟁이 스스로 펼쳐 보이지 못하니 안타깝습니다.

 그만큼 만화쟁이 삶은 팍팍하고 고단하다는 뜻이라 할 텐데, 그 팍팍함과 고단함이 ‘없으리라 생각’하며 만화쟁이 길을 걸었던 분은 없지 않았을는지요. 그리고 그 팍팍함과 고단함이 있기에 더욱더 만화라는 한길을 당차고 꿋꿋하게 걸을 수 있지 않았을는지요.

 잘나서 쓰는 글이 아니고, 못나서 못 쓰는 글이 아닙니다.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쓰고, 똑똑하면 똑똑한 대로 쓰면 됩니다. 잘난 척이 아니요 못난 척이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한 사람이 어떻게 삶을 꾸리면서 내 일을 즐겨 왔음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덧바를 이야기 없고 덜어낼 이야기 없습니다. 고스란히 들려주는 이야기로 숨김없이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여러 테두리에서 생각하노라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우리한테 더없이 알뜰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책입니다. 그런데, 이두호 님 이야기책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만화쟁이 한길을 담은 책을 넘어, 한 사람이 제 넋과 얼을 다부지게 지키면서 걸어온 길을 애틋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책입니다.


.. 나는 어디를 가든지 눈에 띄는 책이 있으면 우선 사 놓는다. 신기하게 이렇게 사 둔 책은 반드시 어디에선가는 써먹게 된다 … 내 작품에는 아버지들이 술 마시는 묘사가 아주 실감나게 잘 되어 있다. 우리 아버지가 술 드시는 걸 늘 봤기 때문이다. 리얼리티가 저절로 살아난다고 할까. 작품을 할 때는 열과 성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가의 경험이 작품에 녹아들어야 좋은 작품이 된다. 창작을 하는 사람은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는 이유가 이러한 데 있다 … 지금은 모르는 단어를 컴퓨터로도 검색할 수 있어 편리하지만, 종이로 된 사전은 그 나름의 맛이 있다. 컴퓨터로 검색하면 찾고자 하는 단어만 뜨지만 종이를 넘기면 그 주변의 단어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앞뒤 페이지도 들춰보게 되어 우연찮게 마주치는 단어들이 많다. 마치 감자나 고구마를 거두어들일 때처럼 한 단어를 찾으면 그와 연관된 많은 단어들이 줄줄이 달려 올라오는 것이다 ..  (150, 152, 172쪽)


 만화를 좋아하기에 만화쟁이 이두호 님 작품을 좋아했고, 이두호 님 삶과 만화와 길이 담긴 《무식하면 용감하다》를 좋아합니다. 만화에 담긴 사람들 삶을 좋아하기에, 이두호 님 만화에 담긴 사람들 삶을 좋아했고, 《무식하면 용감하다》에 담긴 만화쟁이 한 사람 삶을 좋아하게 됩니다.

 책을 덮으며, 이 책에서 이두호 님이 우리한테 들려주고 싶던 당신 길과 생각이 무엇이었을까를 가만히 되짚습니다. ‘만화쟁이에 앞서 사람이 되자’는 당신 길이 아니었을까 싶고, ‘만화를 그리면서도 내가 사람임을 잊지 말자’는 당신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4342.3.1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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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솜털 1
오자와 마리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삶이 바로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이 바로 만화
 [살가운 만화 43] 오자와 마리, 《민들레 솜털》



- 책이름 : 민들레 솜털 (1권∼ )
- 글ㆍ그림 : 오자와 마리
- 옮긴이 : hiyoko
- 펴낸곳 : 북박스 (2008.10.24.∼ )
- 책값 : 한 권에 3500원씩


 아귀힘이 세어지며 한손으로 책을 잡아채어 입으로 가져가는 아기는, 머잖아 책은 ‘먹을거리’가 아닌 ‘읽을거리’임을 알아채리라 믿습니다. 다만, 아직은 손수건이며 옷이며 연필이며 밥그릇이며 숟가락이며 오로지 입으로만 가져갑니다. 저도 살아 보겠노라 발버둥을 치는 셈인지, 몸부림을 치는 셈인지 모릅니다만, 아기니까, 아기라서 그렇다고 느낍니다.

 아기를 안고 아기랑 함께 보다가 지루해져서 바닥에 팽개쳐 둔 만화책을 아기가 꼬물꼬물 기어가다가는 덥석 집어들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으로 덥석 뭅니다. 이빨도 없는 주제에 우걱우걱 씹기를 좋아합니다. 그 만화책은 ‘아빠며 엄마며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아기 침이 범벅이 되어도 내버려 둡니다. 책한테 더없이 미안한 노릇이지만, 아기가 즐겁게 놀이감으로 삼으니, 이런 대로 보람이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지난 2월 18일 서울 나들이를 하며 들른 만화책방에서 《민들레 솜털》이라는 새로 나온 만화 1권과 2권을 장만했습니다. 이 만화책은 저로서는 재미있게 여기는 터라 아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놓으면서 옆지기한테도 읽어 보라 건넵니다. 옆지기는 그다지 재미있다고 느끼지 않았다면서, 그저 그렇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빠랑 엄마랑 좋아하는 만화가 다를 테지’ 하면서 서운한 마음을 달랩니다. 그냥 그저 그럴 뿐인가, 너무 뻔하게 흐르는 줄거리인가, 그림결이 썩 내키지 않은가 …… 여러모로 헤아려 보면서, ‘어쩌면 나나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만 좋아할는지 모르겠구나’ 싶은 한편, 《민들레 솜털》을 그린 분이 좀더 발돋움할 앞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어떤 문화며 예술이며 공연이며 마찬가지이지만, 한 자리에 머무는 법이란 없습니다. 한 가지 틀에 매여 있으란 법은 없습니다. 그예 똑같이 흘러가는 글과 그림과 사진도 많으나, 나날이 조금씩 새로워지면서 거듭나는 글과 그림과 사진도 많아요. 만화 《민들레 솜털》을 그린 오자와 마리 님 책을 여러 해에 걸쳐 여러 작품을 보아 오면서, 이분은 이분 나름대로 남다른 그림결을 잘 간직하는 가운데, 이분 아니면 펼쳐 보일 수 없는 이야기를 만화로 담아낸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크게 돋보이거나 널리 도드라지지는 않습니다만, 언제나 한결같은 자리에서 꾸준함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려 하고 있어요.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는, 아주 수수한 동네사람만이 ‘오자와 마리’ 님 만화에 나오는 이들이고, 이들은 돈이 많거나 이름이 높거나 무언가 뛰어난 재주가 있거나 하지 않습니다. 골목길을 거닐면서 으레 스쳐 지나가는 동네사람이 만화에 나오고, 역사며 문학이며 학문이며 어느 자리에서 제 이름 석 자를 돋을새김할 구석이 없어 보이는 이웃사람이 만화에 나옵니다. 어쩌면, 로또복권 같은 데에 뽑히지도 않으나 이런 복권을 아예 사지도 않는 털털한 사람들이 만화에 나온다고 할까요. 앞에 있지 않으나 뒤에 있지도 않고, 왼쪽에 있지 않으나 오른쪽에 있지도 않은 사람, 얼핏 보면 냄새도 맛도 빛깔도 없으리라 여길 수 있습니다만, 이러한 모습과 매무새야말로 고즈넉한 냄새요 맛이요 빛깔이라 할 만한 사람이 만화에 나온다고 할 수 있어요.


.. 그때 옛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학교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민들레를 따서 입원 중이던 엄마 병문안 갔을 때, 창밖을 바라보며 엄마가 ‘언젠가 토마가 어른이 되면 저 민들레 솜털처럼 자유로운 세상으로 날아가겠지’라고 했던 말이. “난 안 갈 거야. 계속 엄마 곁에 있을 거니까.” “가도 돼. 미국이든, 아프리카든, 토마가 원하는 곳이라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꽃을 피우는 걸 엄마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토마가 어디 있든, 엄마는 언제나 토마를 응원할 거야. 그걸 잊지 마.” ..  (2권 14∼15쪽)


 오자와 마리 님 다른 만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완전판 8권으로 마무리)을 한 해에 걸쳐 보는 동안(1권부터 8권까지 모두 나오는 데에 꼭 한 해가 걸려서), 처음에는 ‘아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음악이라며, 그 음악을 언제 들려주려고 하는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5권 6권 7권째 넘기면서, 그리고 마지막 8권을 덮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란, ‘세상에서 가장 흔한’ 노래이며, ‘세상에서 가장 손쉽게’ 듣는 노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만한 아름다움’이 깃든 노래라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임을, 믿음은 믿음일 뿐임을, 나눔은 나눔일 뿐임을 이야기하는 오자와 마리 님 만화라고 할까요. 겉꾸밈이나 겉치레가 아니라, 우리 사는 모습이 고스란히 노래요 춤이요 글이요 이야기임을 보여주는 오자와 마리 님 만화라고 할까요. 멀디먼 나라에서 찾을 즐거움이 아닌, 바로 우리가 선 이 자리에서 즐거움을 찾자고 손을 내미는 오자와 마리 님 만화라고 하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짝사랑해도 사랑이요, 힘을 내어 털어놓아도 사랑이며, 털어놓았는데 그이가 손사래를 쳐도 사랑입니다. 돈 잘 버는 일자리를 얻든, 돈 못 버는 일자리를 얻든, 제 땀을 기꺼이 바칠 만한 일자리를 얻으면 그때부터 누구나 제 삶자락을 아름다이 가꿀 수 있습니다. 바깥밥을 사먹어야만 맛이 아니며 선물이 아니며 잔치밥이 아닙니다. 집에서 된장찌개나 나물무침으로 차린 단출한 밥상으로도 얼마든지 맛이요 선물이요 잔치밥입니다. 백만 원짜리 옷만 따뜻하지 않고, 손뜨개 옷 한 벌도 따뜻합니다. 몇 만 원짜리 십자가를 벽에 걸어 두어야 하느님을 모실 수 있지 않고, 나무토막 하나를 서툴게 깎고 다듬어 벽에 걸어 두어도 하느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삶이 바로 노래이고 노래가 바로 만화임을, 삶이 바로 기쁨이요 기쁨이 바로 만화임을, 삶이 바로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이 바로 만화임을, 부드러운 붓끝으로 보여주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다는 생각이 드니, 오자와 마리 님 다른 만화책에도 하나둘 손을 뻗치게 됩니다.

 《니코니코 일기》라든지 《퐁퐁》이라든지, 그리고 이번에 새로 나온 《민들레 솜털》이라든지.


.. “하루키, 밥 안 먹으면 천국에 엄마가 슬퍼한다? 엄마는 하루키가 이 세상에 태어나길 그 누구보다 기다렸단 말이야.” “정말?” “그럼! 아, 맞다 그게 어딨더라? 아, 여기 있다! 이것 봐, 하루키. 이건 하루키가 꼭 지킬 걸 엄마가 써 놓은 노트야. 지금부터 형이 엄마 대신 읽어 줄 테니, 엄마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밥은 남기지 마세요♡ 엄마는 하루키가, 음, 하루키가 쑥쑥 자라는 모습을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고 있답니다.’라는데? 알았어, 하루키?” “응! 알았어! 잘 먹겠슘다!” …… “형아.” “응?” “오늘도 읽어 줄 거야? 엄마 노트?” “그래. 음, 에헴, ‘밤늦게 자지 말 것.’” “그게 다야?” “음, ‘일본 속담에 잘 자는 아이는 쑥쑥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고 있는 동안 성장호르몬이 활발히 움직여서 뼈와 근육이……’라는데?” “……(쌔근)” ..  (1권 59∼63쪽)


 방이 갑자기 조용해져서 아기 쪽을 바라봅니다. 딸랑이를 손에 쥐고 입으로 씹으면서 꿍얼꿍얼대던 아기가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아서.

 아기는 노란 베개에 새겨진 곰돌이한테 잠깐 꽂혀 있다가 바닥에 굴러다디던 종이조각 하나를 씹고 있습니다. 그런데 낯빛이 좀 얄딱구리합니다. 기저귀를 만져 보니 물컹. 똥을 누었구나. 똥을 누고 조용해진 셈이로군.

 물을 덥혀 엉덩이와 잠지를 닦아 주고 새 기저귀싸개와 기저귀를 댑니다. 이제 또 한 번 기저귀 빨래를 해야겠군요. 아직 하늘에 해가 걸려 있으니, 저 햇볕에 기저귀싸개와 기저귀가 보송보송 마를 수 있도록. 아침부터 바람이 무척 찬데, 너무 늦지 않게 옆지기랑 아기랑 다 함께 바깥마실도 잠깐 다녀와야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우리한테 아름다울 노래를 찾아서. (4342.3.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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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야기 1부 내 어머니 이야기 1
김은성 글.그림 / 새만화책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엄마한테 선물하고 나란히 누워 읽을 만화책
 [살가운 만화 42] 김은성, 《내 어머니 이야기 (1부)》



- 책이름 : 내 어머니 이야기 (1부)
- 글ㆍ그림 : 김은성
- 펴낸곳 : 새만화책 (2008.12.1.)
- 책값 : 13000원


 (1) 재미있게 나눌 우리 삶자락 이야기는


 처음에는 아기 얼굴 오른쪽 눈가에 살짝 생채기가 났습니다. 아기가 자면서 혼자 간지럽다고 긁으면서. 그런데 이 생채기에 딱지가 앉아 떨어질 무렵 또 긁어서 다시 덧나고 거듭 덧나다가는 차츰 볼과 귀로 오돌도돌한 녀석이 번지더니 온 얼굴 가득 벌겋게 되어 버립니다. 이웃에서는 이 모습을 보며 태열이니 아토피이니 하고, 일산 식구들은 얼른 병원에 가자고 채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식구는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아기가 제 얼굴을 긁지 않도록 하면서 엽록소물을 만들어 바르고, 생협에서 파는 아기 화장품을 살짝살짝 발라 줍니다. 나무숯물을 탄 물로 자주 얼굴을 닦아 주면서 하루하루 기다리는 동안,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엄마 밥차림을 바꾸기로 합니다. 우리 세 식구는 아빠(저) 일 때문에 여러모로 돌아다닐 일이 많고, 일산 옆지기 식구들 사는 집에 가서 여러 날 머물면서 옆지기가 폭식을 하는 때가 잦아서, 이 모든 흐름이 아기한테 이어지지 않았느냐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옆지기는 오롯이 생채식만 하기로 하고 줄기푸성귀와 뿌리푸성귀에 김하고 미역만 먹으려 합니다.

 애 아빠도 함께한다면 좋을 테지만, 이렇게 생채식만 하자면 도시에서는 푸성귀 값이 장난이 아니라 애 엄마만 하기로 합니다. 우리가 시골 살림이라면 조그마한 텃밭 하나로 모든 푸성귀를 거두어 먹을 텐데, 다른 집에서도 비슷비슷한 걱정을 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옆지기 식구들 사는 일산으로 전철을 타고 가는 길에 우리 아기를 들여다본 어느 할배가 그러더군요. “저런, 애기 저럴 때는 물 좋고 공기 좋은 데 가면 금방 낫는데.”
 





..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1907), 함경도 어느 마을에 한 여인네가 살고 있었다. 열여섯 살에 시집와서 3년 만에 막 첫딸을 낳은 상태였다. 그로부터 3년 뒤 둘째 딸을 낳았고, 둘째 딸을 낳은 4년 뒤 4대 독자 아들을 보았다. 홀시아버지와 어린 시누이 둘, 남편과 자꾸 불어나는 아이들을 거두며 살았다. 그래도 농토는 넉넉한 편이어서, 다른 집들이 하는 양식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지만, 장정 하나 없는 집에서 넓은 농토를 남편과 함께 직접 경작도 하고 일꾼을 쓸 때는 일꾼들 밥도 해 주느라 쉴 새가 없었고, 조상님 모시기도 소홀할 수 없는 노릇이라 여인네는 제삿날이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북새통 속에서 여인네는 애를 계속 낳았는데 아들 낳은 지 6년 만에 넷째 딸을 낳았고, 넷째 딸을 낳은 지 4년 만에 다섯째 딸을 낳았다. 그러자 애들 다섯에 시아버지, 시누이 둘, 남편, 여인네까지 열 식구가 되었다. 여인네는 열 식구 뒷바라지에 죽은 조상들까지 수발하며 살았다. 그 힘든 삶에도 여인네는 지치지 않았고, 착실한 남편과는 금슬 좋게 살았다. 그런데 그 여인네도 당해 내기 힘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아버지 모시기였다 ..  (7∼9쪽)


 인천에 있는 생협 매장에는 날푸성귀가 몇 가지 들어와 있지 않아, 이곳에서 고를 수 있는 만큼 골라 장만한 다음, 하는 수 없이 ㅇ마트로 나들이를 갑니다. 날푸성귀야 가까운 저잣거리에서도 장만할 수 있으나, 저잣거리 날푸성귀는 유기농이 아니라서 발길을 끊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유기농이든 유기농이 아니든 똑같은 먹을거리가 아니냐 생각하는 분이 많고, 곡식이 먹고 마시는 물과 바람과 흙이 일찌감치 더럽혀져 있는데 풀약과 항생제와 비료를 안 친 곡식이라고 더 나을 구석이 있겠느냐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더욱이, 세상이 더러우니 어른도 아이도 ‘좀 더러워진 먹을거리를 먹으면서 몸에서 견디어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어느 한편으로 보면 이와 같은 말씀은 틀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제도권 학교에서 따돌림과 괴롭힘과 입시지옥이 가득하여 아이들이 아이답게 자라기 어려운 형편이라지만, 동무를 사귀며 사회살이를 익히자면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꼭 입시지옥에다가 교과서 외우기로 치닫는 제도권 학교를 다녀야만 사회살이를 익힐 수 있을까요. 또래 동무는 제도권 학교 울타리가 아니면 만나거나 사귈 수 없을까요. 제도권 바깥 또래 동무라고 하여 모두 좋지 않겠습니다만, 제도권 안쪽 또래 동무라고 하여 꼭 반갑고 살가운 동무를 만나리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어느 자리에 서든 사람과 사람으로 만날 수 있으면 되고, 또래 동무라고 하여도 나이나 밥그릇만으로 따지기보다는 마음자리와 생각자리로 서로를 살피고 헤아릴 때 한결 사이좋게 지내면서 다 함께 북돋울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저한테 또래 동무들은 얼마나 있고 얼마나 살가우며 얼마나 오붓한지를 돌아봅니다. 이 동무들은 꼭 그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만나게 되는 동무들이었는가 헤아려 봅니다. 동무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동안 ‘우리가 어느 학교를 나왔었고 어느 대학교까지 다니거나 그냥 고등학교까지만 마쳤는가’는 하나도 큰일이 아닐 뿐더러 생각하지도 않음을 떠올립니다.

 우리한테는 어떤 이름이 그리 큰일이 아님을 곱씹습니다. 우리한테는 얼마쯤 돈이 있어야 할 터이나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되씹습니다. 우리한테는 어느 만큼 힘이 있어야 할 테지만 힘만 있다고 밀어붙일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돌아봅니다.

 삶을 가꾸고 싶어 더 나은 밥을 찾고, 삶을 아름답게 여미고 싶어 한결 나은 일자리를 찾으며, 삶을 즐거이 나누고 싶어 좀더 반가운 벗을 찾습니다. 밥이든 옷이든 집이든, 동무든 사랑이이든 이웃이든, 나를 나답게 꾸리고 우리를 우리답게 이끌어 주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 “그래! 고생 오래 했네!” “그래도 내 한 열 살 정도 될 때부터는 고생을 아이 했어! 우리 오빠가 취직하면서 집이 확 피기 시작했지.” “근판이는 어떻게 됐어?” “일본이 망하이까 남선으로 도망 나왔지. 근판이한테 당한 사램들이 근판이 집이 몰려들어 기둥을 도끼로 찍고 집이 불을 놓았대.” 그랬더이 어디 숨었다가 확 나오더래. 그 질로 도망 나와서 삼팔선을 넘어 남선까지 온 거야. 남선 나와서도 한 고을을 해먹다가 산이 내란이 일어나서 막는다고 하다 죽었대.” “토벌대를 하다가 죽은 모양이구먼!” “근판이 얘기는 그리지 마라. 그 자손들이 보면 뭐이라 그러겠니야? 자손들이 보면 자기 아버지 얘긴 줄 그답 아지. 아버지가 나쁜 일을 해서 그런지 자손들도 잘못됐어. 정식이는 큰 병 만나서 죽고, 문식이는 죽지는 아이 했지만 병이 많아서 고생하고 살아. 문식이 아들도 마흔도 안 됐는데, 풍이 지나가고.” “그러니까 어떤 집이 잘 되려면 조상 때부터 덕을 쌓아야 해.” ..  (73∼74쪽)


 지지난주쯤, 국민학교 적 동무한테서 밤 늦게 전화가 오며 “야, 한번 보자.”고 해서 부랴부랴 옷 갈아입고 나가 두 시간쯤 밤술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 집이야 아기가 아직 많이 어리지만, 동무녀석은 벌써 여섯 살 되는 아이가 있는데, 녀석은 자기 가게 일 때문에 일요일에도 늦은때까지 선배들하고 술잔을 부딪혔다고 합니다. 동무녀석한테 선배 되는 분들은 거의 모두 집안이 있을 테고 집식구가 늦게까지 잠 못 이루고 기다릴 텐데, 동무녀석은 가까스로 그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저를 찾았다지만, 그분들 남은 식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좀 서글픕니다. 술자리라 하여도 식구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술자리를 마련할 수 없는가 싶고, 늦게까지 웃고 떠들고 놀아야 한다면 온식구가 다 함께 어울릴 수 있게끔 놀 수 없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삶을 돌아보면, 도시에서 회사일이니 무슨 일이니 하면서, 늦도록 밖에서 ‘다른 사람 만나는 데에 시간을 쓰’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파김치가 되어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한테는 시간을 거의 못 쓰’게 되고 말지 않느냐 싶습니다. 집안살림과 집밖살림이 다르거나 나뉘어야 할 까닭이 없을 텐데, 우리 스스로 똑 금을 그어서 아예 다르게 꾸리고 아예 다르게 살아 버리지 않느냐 싶습니다.

 집안일을 집 바깥에서 이야기하기 꺼리고, 집밖일을 집 안쪽에서 이야기하기 꺼리지는 않는가요. 아니, 이렇게 주고받을 까닭이 없다고 느끼지 않는가요. 있는 그대로 만나고 꾸밈없이 사귀는 삶보다는, 겉을 치레하거나 꾸미는 삶으로 나아가지는 않는가요. 우리가 집에서 아이 키우는 이야기만 하여도 밤새 수다를 떨어도 그치지 않을 터이고,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사는 이야기만 하여도 밤늦도록 이야기를 이어도 끝나지 않을 터이며, 이웃집과 어울리는 이야기만 하여도 이틀 사흘 이어도 이야기는 넘치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도시 삶터에서는 우리 스스로 우리 이야기를 잊게 됩니다. 잃고 맙니다. 내놓고 되고 뒤로 젖히고 맙니다. 우리 얼굴이 없고 우리 모습이 없으며 우리 삶이 없습니다.
 



.. 그 무렵에 오징어 꾸들꾸들하게 말린 걸 처음 봤는데, 그걸 가지고 댕기면서 먹지도 않고, 가지고 댕기다 버렸어. 먹을 줄도 모르고, 먹어 봤더이 이상하고. 그래도 엄마가 우리를 혼내지도 않고. 우리가 어떤 때 입이 출출하다 하면 독아지서 배랑 과질이랑 꺼내서 가지다 주더라고. 그기 도화선이 언니 시집갈 때 큰상으로 가지온 음식들인 거야! 그때는 속상해서 안 먹고 놔뒀던 거지! 그거 먹으면서 우리 엄마가 얼매나 눈물을 흘리는지 몰라. 우리 오빠도 도화선이 언니는 못사는 집이 시집 보냈다고, 나중이 돈 벌어서 옷감이랑 끊어 보낼 때 꼭 도화선이 언니 것도 챙겨서 보내! 아무튼 도화선이 언니 시집 보낼 때 우리 집이 재난이야. 그러더이 귀동녀 언니 시집 보낼 때는 집 분위기가 얼매나 좋은지! 꽃이야..  (105∼106쪽)


 지난주에,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소설쓰는 공선옥 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에 함께했습니다. 옆지기와 아기는 집에 있고 혼자만 다녀오는데, 아이 둘 키우는 아주머니가 아이는 애 아빠가 보기로 하고 당신은 즐겁게 나들이를 나오는데 얼마나 홀가분하고 훨훨 날아다닐 듯했는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즐거웠다고 합니다. 애 아빠는 애 엄마가 하루 쉬게 하려고 회사일을 하루 쉬었다고 하더군요. 애 아빠 되는 그분은 얼마나 자주 이렇게 ‘애 엄마 쉬게 하기’를 해 주셨는지 모릅니다만, 하루 내내 아이 둘을 붙잡고 놀고 돌보고 밥해 먹이고 빨래하고 씻기고 집 치우고 하노라면 …… ‘아이 키우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으랴 싶어요.

 사람은 모든 일을 몸소 겪어내야만 알지는 않으나, 겪어서 받아들이는 앎과 책이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앎이란 사뭇 달라요. 굴막에서 굴 까는 일을 하루 내내 해 보고 가게에서 사먹는 굴맛과, 굴막조차 모르고 굴 까는 사람이 있는 줄 모르며 그저 마트에서 값싸게 사먹는 굴맛은 같을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어버이를 둔 사람이 밥집에서 밥 한 그릇 받아먹을 때하고, 농사일은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밥집에서 밥 한 그릇 받아먹을 때는 똑같을 수 없습니다. 여남평등이든 양성평등이든 지식과 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매무새하고, 집안일과 아이 키우기를 몸소 겪어 보고 나서 ‘평등’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매무새는 한동아리일 수 없어요.

 이러는 동안 우리한테는 늘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날마다 새 이야기가 나오는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면서 ‘새 수다꺼리’가 샘솟기도 할 터이나, 이러한 새 수다꺼리는 채 하루가 가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잊혀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닥이며 꾸리는 삶에서 얻고 느끼는 ‘새 수다꺼리’는 하루 한 주 한 달 한 해뿐 아니라 당신 아이한테까지 물려주며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면서 늘 새삼스러워집니다.


.. 우리 집이 내 일고여덟 살 때 제일 못살았다고 했잖아. 그래서 서당 갔다와서 숙자랑 나랑 보릿져 먹고 막 웃었다고 했지 않아. 그래도 우리 오빠 재혼하고는 집이 밥이 없은 적이 없어. 새 며늘 들였다고 음식을 갖춰서 먹는 거지. 부잣집이서 귀하게 자란 일산 시이는 굉자이 사랑을 받았어. 추운데 짐치를 뜨러 가도 우리가 가야 하는 줄 알았어. 일산 시이가 아깝아서. 새 며늘 들어오고 오빠가 좋아하이까 우리도 얼매나 좋으 줄 모르고, 우리 엄마, 아버지도 얼매나 좋아하는지! … 우리 엄마도 그렇기 며느리를 애껴. 한 번은 동네 어느 집냥이란 그 남편이 손님질을 왔어. 그래서 일산 시이가 떡을 반죽했는데, 반죽이 질게 돼서 떡을 찔 수가 없어. 그래서 귀동네 언니가 동네 방앗간이 가서 방아를 다시 찧어 와서, 떡을 해서 밥을 해서 내오이, 손님 밥상 내온다는 기 오밤중이야. 그 일을 잘하는 우리 엄마가 얼매나 갑갑했겠어. 그래도 며늘에게 뭐이라고 안 해. 일산 사이가 일을 해 본 적이 없어도 맘은 참 착해. 그 시이 들어오고부터 우리 집이 잘 됐으이, 얼매나 좋은 시이야 ..  (109∼111쪽)


 잠깐 숨을 돌리며 지난 몇 해를 돌아봅니다. 혼자서 동네 도서관을 꾸리다가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살면서 꾸리던 삶은 아주 크게 달라지면서, 더 많이 더 널리 돌아다니지 못하게 되기도 했지만, 이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새롭게 디딜 수 있던 동네가 있었고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난 8월에 아기가 태어나며 움직임은 더 줄어들었으나, 아기와 함께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도 오히려 세상을 더 넓게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는 한편, 딱히 더 많은 사람을 못 만나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이야기’를 이웃하고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저 스스로도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기를 한손으로 가슴에 안고 걸어다닐 때에는 사진찍기가 힘들고 번거로워서 혼자 맨몸으로 다닐 때하고 견주면 더 멀리 마실을 못 갈 뿐더러 몇 장 못 찍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장을 찍더라도 더 속깊이 찍도록 매무새를 고치게 되고, 아기와 함께 있기 때문에 한결 홀가분하게 찍을 수 있는 사진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아기 사진’ 찍기를 몸으로 배우게 되고, 아기 사진을 가까이에서 날마다 수없이 찍는 하루하루가 쌓이는 동안 ‘오늘 사진이 어제와 다르도록’ 하는 손길과 눈길을 익힙니다. 책 읽을 겨를을 내기 어렵지만, 책 하나를 손에 쥐어도 ‘허튼 책은 금세 알아채게 되는 눈썰미’를 익히기도 합니다.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는 삶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테지만, 하나를 잃었다기보다 하나를 새로 만나며 그 하나를 좀더 곰곰이 들여다보고 껴안는 몸짓을 녹여낸다고 해야 알맞지 싶습니다.

 문득, 집안살림이 퍽 쪼들리고 고달프고 괴로운 이들이 당신 삶 또한 쪼들리거나 고달프거나 괴롭게 생각하지 않는 일이 떠오릅니다. 제 살림살이 또한 꽤 쪼들리고 고달프고 괴롭다고 할 만한데, 제 삶은 우리네 골목 이웃과 마찬가지로 그리 쪼들리지 않고 고달프지 않고 괴롭지 않습니다. 일이 버겁고 벅차 눈물이 핑 돌 때가 잦으나, 이렇게 눈물이 핑 돌기 때문에 삶이 재미있습니다. 일이 쏟아지고 넘쳐 어깨와 팔다리가 빠질 노릇이지만, 이렇게 온몸이 쑤시기 때문에 삶이 보람있습니다. 잠깐이나마 다리 쭉 뻗고 드러누울 겨를이 없어 살이 쪽 빠지는데, 이렇게 살이 쪽 빠지기 때문에 삶이 튼튼하고 싱그럽구나 싶습니다. 이리하여 제 옷주머니에는 돈이 거의 없습니다만, 제 생각주머니에는 이야기가 꽉꽉 들어차 있어, 푸고 또 퍼내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2) 만화책 《내 어머니 이야기》


 지난 설 명절을 앞두고 만화책 《내 어머니 이야기》를 장만했습니다. 이번에 1부가 첫 권으로 나와 2부를 기다리는데, 1부 이야기는 만화잡지 《새만화책》에 꾸준히 실렸습니다. 만화잡지에 실리는 동안 다 보았지만, 이렇게 낱권책으로 나온 판은 또 남다르기에 즐겁게 따로 사들입니다.


.. “오오, 좋은 말들도 많다.” “엄마, 내 만화가 들어 있는 잡지책이 왔어.” “어디 좀 보자!” “어때?” “알았다. 이렇기 시시콜콜한 걸 다 적는 기 만화로구나! 그래도 속에 있는 소리는 다 했네! 그런데 방이 어쩌구저쩌구해서 니 오빠가 보면 뭐이라고 아이 할라나! 하기사 뭐 작가 맘이다. 지 맘대로 하는 기 작가지.” “맞았어. 작가 마음이야. 이 사람 비위에도 맞고 저 사람 비위에도 맞고, 그렇게 다 맞게 할 수는 없어.” “그래도 내가 남편이 아인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챙피스러워! 니 오빠가 보면 뭐이라고 그러겠어.” “엄마, 그건 실제 얘기가 아니고 꿈 얘기잖아. 엄마보고 그렇게 생각할 사람 하나도 없으니까 신경쓰지 마.” “난 남자를 아이 좋아하는데…….” ..  (141∼142쪽)


 옆지기한테 만화책을 건넵니다. 옆지기는 방바닥에 아기와 나란히 드러누워 책을 받들고 읽습니다. 아기도 만화책에 눈길을 보냅니다. 그러나 아기한테는 그리 재미가 없는 듯합니다. 빛깔이 없어서 그런가? 그림이 너무 작고 글이 많아서 그런가? 이 만화책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빽빽하게 들어찬 ‘글맛’이 제맛이니, 엄마가 읽어 주어도 아기한테는 아직 재미가 있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

 마땅한 소리이지만, 대여섯 달밖에 안 된 아기가 책읽는 재미를 알 수 없겠지요(그러나 아기로서는 지 엄마 아빠가 맨 보는 책이니 저도 재미를 붙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저 뭔가 그림이 있으니 까르르 웃기도 하면서 들여다볼 뿐 아니랴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옆지기는 이 만화책은 아기와 나란히 누워서 읽기보다, 옆지기 어머님하고 나란히 누워서 읽었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왜냐하면 책이름이 “내 어머니 이야기”이듯, ‘어머니 삶을 돌아보는 만화’는 아이가 지 엄마 삶을 돌아볼 만한 나이가 되어야 함께 읽을 수 있을 테니까요.
 





.. 보정집 할머이는 결혼하구 얼매 안 돼 남편이 죽었는데, 둘이 결혼해서 한 번 자 보지도 못한 거야! 옛날이는 그런 일이 많았어! 다 어릴 때 결혼하이까 결혼하구 1,2년 있다 자는 부부도 많았지! 그러구선 다시 시집을 안 갔으니 평생 남자하고 한 번 자 보지도 못한 거야! 그래 가지고는 여자들끼리 모였을 때면 보지다 솔바울 차고 이런 거야! ‘내 보지를 봐라. 처여 보지를 봐라.’ 어렸을 때 그기 얼매나 웃깁던지 ..  (54쪽)


 나중에 우리 어머니한테 이 만화책을 보여 드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에는 우리 아기가 커서 이 만화책을 볼 수 있도록 남겨 두고, 돌아오는 어머니 태어난날에 선물로 이 만화책 하나 새로 장만해서 슬며시 건네 드리려 합니다. (4342.2.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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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식탁 1
시무라 시호코 글.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사랑과 그리움과 애틋함을 만화 하나에 소롯이
 [살가운 만화 41] 시무라 시호코, 《여자의 식탁 (1)》



- 책이름 : 여자의 식탁 (1)
- 글ㆍ그림 : 시무라 시호코
- 옮긴이 : 김현정
- 펴낸곳 : 대원씨아이 (2008.5.15.)
- 책값 : 4200원



 (1)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는 눈골목 사진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아침, 모든 일을 젖혀 놓고 사진기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옵니다. 오늘은 모처럼 장갑까지 끼고 나옵니다. 설마 싶어서 두툼한 겉옷을 챙겨 입습니다. 모자를 눌러쓰며 눈발을 막고 사진기는 겉옷 안에 넣어 눈이 맞지 않게 하면서 뒤뚱뒤뚱 뜀박질을 합니다.

 창영동 골목집에서 배다리 철길다리 밑으로 지나 경동으로 건너갑니다. 늘 다니면서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았던 골목 모습을, 오늘은 눈발 날리는 모습으로 새롭게 담습니다. 경동을 지나 율목동으로 접어들고, 다시 경동으로 건너온 다음 용동으로 넘어가고, 용동에서는 인현동으로 건너서 은행에 들러 돈을 찾고, 지하상가를 거쳐 찻길을 가로지른 다음 동인천 〈대한서림〉 옆을 스쳐서 내동을 살짝 바라보다가 전동 삼치골목을 쳐다봅니다. 삼치골목은 가게마다 간판갈이를 하느라 부산합니다. 시에서 관광특구로 지정하며 간판을 새로 다는 듯합니다.

 부지런히 발을 놀려, 내동과 전동과 송학동1가가 만나는 무지개문(홍예문) 앞에 섭니다.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 뒤 무지개문 밑에 서고, 이 길에서 사고가 많아 걱정이라 한다면 이리로 자동차가 못 다니게 하면서 이곳을 ‘근현대 문화역사 체험 마을 특구’로 삼아도 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송학동1가 골목길을 지나 북성동3가로 접어들고, 중국사람들 살림집을 하나둘 넘겨보면서 북성동2가로 접어들고, 중국인거리에서 허물어져 가는 공화춘 건물 앞에 서서 잠깐 고개를 숙인 뒤, 선린동 해안동성당 앞에 닿습니다. 선린동 해안동성당 맞은편에 자리한 해안동성당 교육관은 시 지정 문화재라고 하는데, 이곳 또한 또다른 시 지정 문화재인 공화춘 건물과 마찬가지로 그예 썩어들며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 “참지 않아도 돼.” “그치만.” “그래.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구나. 하지만, 난 정말로 괜찮아. 이쿠가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모른 척할 순 없어. 아빠랑 할머니가 반대해도 엄마가 설득할게. 그러니까, 다음에 친엄마와 만날 기회를 만들자.” ..  (14쪽 - 수영 클럽의 아이스크림)


 눈발이 멎을까 싶어 쉴 새 없이 걷고 달리고 사진을 찍습니다. 엉덩방아도 찧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북성동2가 골목 안쪽에 옛날 그대로 남아 있는 우물터를 스치고 지나간 다음, 관동2가로 접어들었고, 관동2가에 멋들어진 텃밭을 꾸리는 집 앞에 어느새 새로 생긴 울타리를 물끄러미 바라다봅니다. 이곳 관동2가에는 나이트며 가라오케며 단란주점이며 잔뜩 있어서, 인천시에서 ‘역사문화의 거리’라고 붙인 이름이 남우세스럽기도 한데, 아무래도 그 술집에서 체한 사람들이 쓰레기를 텃밭에 함부로 버리는 듯합니다. 집임자는 텃밭에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높직하게 울타리를 쌓았고 경고글까지 붙여놓습니다.

 중앙동2가를 지나고 중앙동3가와 관동3가를 지난 다음, 신포동에서 머뭇거리다가 송학동3가로 거슬러 갑니다. 다시 내동을 지나면서 내동 성공회성당 앞을 지나갈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하고, 지하상가를 건너서 답동성당 옆으로 지나갑니다. 답동성당을 옆으로 끼는 샛길에 늘 자동차가 두 줄로 서 있어서 다니기 나빴는데 지지난달에 시에서 드디어 거님길 공사를 해서, 걸어다닐 때 차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도록 바뀌었습니다.

 다시 율목동으로 들어서면서 머잖아 사라질 인천시립도서관을 옆으로 흘깃 바라본 다음, 율목공원으로 들어갑니다. 율목공원 들머리에서 길에 염화칼슘 뿌리는 할아버지를 보고는 “고생 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나이를 제법 많이 먹은 은행나무한테도 인사를 하고 나서, 율목동 안쪽 고즈넉한 집자리, ‘개조심’ 푯말이 붙은 마당가에서 서성이면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부랴부랴 신흥동2가 골목을 누비고, 다시 율목동과 유동과 경동이 엇갈리는 골목을 지납니다. 인천시에서 밀어붙이는 산업도로 공사터 옆을 지나는 길을 마지막으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 ‘본심을 알 수 없어서 타인이 무섭다는 말은 자주 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 정말로 바깥출입을 안 하게 되면서, 넌 이제 이대로 평생 틀어박혀 사는 건가 생각했거든. 하지만 다행이야. 마음이 편하다는 이유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선 안 된다는 걸 겨우 깨달았구나. 넌 다시 한 번 타인과 마주할 용기를 갖고 있었어.’ ..  (26쪽 - 호밀 100%의 호밀빵)


 집으로 돌아오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손은 꽁꽁 얼어붙었으나 등판에는 땀이 줄줄 흐릅니다. 속옷을 모두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아침에 신나게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모두 155장을 찍었습니다. 얼마 못 찍었습니다. 밥을 먹고 다시 마실을 나가야겠어요.

 아침부터 눈밭 골목길을 후들거리는 다리로 누비면서 몸이며 손발이며 고단하기 짝이 없지만, 눈구경을 하기 어려운 오늘날, 모처럼 눈발이 그치지 않고 흩날리는 이런 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눈구경이 어려우니 눈온 모습은 덜 찍거나 안 찍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아무리 우리 세상이 이렇게 뒤바뀌고 있다고 하여도, 어렵게 만나는 눈송이인데,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송이를 냠냠하면서 비알진 골목에서 미끄럼도 타며 놀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어서 오거라. 볼일은 끝났니?” “네. 저기,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오시면 같이 우리 집에 안 갈래요? 유부초밥 다 같이 함께 먹어요.” …… ‘난 단순하니까 괜찮아. (열심히 한 상이야) 그러니까 분명 또다시 힘을 내서 달릴 수 있어.’ ..  (56쪽 - 운동회의 유부초밥) 






 생각해 보면, 오늘은 아기와 옆지기가 집에 없으니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아기와 옆지기가 집에 있으면, 밥하고 빨래하고 뭐하고 하느라 바깥마실은 엄두도 못 냅니다. 아기와 옆지기가 한동안 처가에 가서 지내고 있으니, 보일러가 얼지 않도록 틈틈이 인천집으로 돌아와서 손보고, 고양이한테 밥 주고 하는 사이사이, 눈골목 사진도 찍고 밤골목 사진도 찍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기와 옆지기가 함께 있는 집에서는 아기와 옆지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여덟아홉 가지 곡식으로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면서는, 밥그릇과 찌개그릇을 사진으로 담고, 빨래 널어 놓은 옥상마당을 드문드문 사진으로 담습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할 때에는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고, 골목길 마실을 할 때에는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좋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으며, 자전거 타고 마실을 다니면 또 자전거 타고 지나다니는 길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살아가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깁니다. 살아가는 발자취가 고스란히 사진이 됩니다. 삶과 생각과 모습이 온통 사진으로 아로새겨집니다.


.. ‘난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과자는 맛있고 예쁘고, 다만 너무나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78쪽 - 일요일의 다과회 마카롱)
 





 오늘 눈골목 사진은, 그동안 봄 여름 가을 사이에 신나게 다니던 곳을 다시 찾아가면서 담았습니다. 이제까지 봄 사진과 여름 사진과 가을 사진은 수두룩하게 있으나, 겨울 모습을 말할 만한 사진이 없어서 짝을 이루어 놓지 못했는데, 오늘 다리힘이 쪽 빠지도록 돌아다니면서 비로소 마무리가 지어집니다.

 사진을 한 장 두 장 찍는 동안, 제 어릴 적, 이 골목 저 골목을 뛰어다니면서 놀던 일이 떠오릅니다. 골목길 동무들하고 놀던 일이 떠오르고, 중고등학생 때 시험공부로 밤늦게까지 붙들어매는 학교가 싫어서 주말이면 하염없이 골목길을 걷고 또 걸어서 다니던 일이 떠오릅니다.

 1992년에도 이 길을 걸었는데 그때나 이제나 마찬가지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1985년에도 이 골목에서 놀았는데 그때나 이제나 다르지 않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1982년과 1981년에 엄마 손을 잡고 신포시장과 송현시장과 신흥시장을 다녔지, 하고 떠올립니다. 이제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 2019년에 이 골목을 다시 거닐 수 있을지 모르고, 2029년에 아이와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 예전에 살던 집 둘레를 거닐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1981년이나 1992년은 그리 까마득한 옛날 같지 않은데, 2019년이나 2029년이 우리 앞에 다가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까마득한 앞날 같습니다. 그때까지 이 골목이, 우리 골목집이, 이웃 골목 삶터가 하나도 안 남아 있을 듯합니다. 오늘 하루 동안 담은 사진에만 남고 그예 없어져 버릴 듯합니다.
 





.. ‘상처 입힐 것 같아서 무섭다고 말하면서 히로야 오빠가 씻은 딸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히로야 오빠가 보물처럼 다룬 딸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 있지. 웃을 거 같아서 말하지 못했지만, 변신해서 인기를 얻는 것보다, 누군가를 사귀는 것보다, 난 사실은 이게 처음으로 하고 싶었던 것 같아. 지금 빠져 버린 ‘사랑’이라는 걸.’ ..  (100∼102쪽 - 히로야가 씻은 딸기)


 사진을 찍는 동안 등과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습니다. 손가락이 얼고 발가락이 얼었습니다. 그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저는 ‘사라져 가는 우리 고향’을 사진으로 담을 마음이 없는데, ‘잊혀져 가는 우리 옛 도심지’를 사진으로 찍을 생각이 아닌데, ‘추억이 되어 버린 우리 골목길’을 사진으로 박아 놓을 뜻은 없는데.

 사진에 하나둘 찍힐 때마다 ‘이야기’로 헤아리고 있습니다만, 다른 분들한테는 그저 ‘기록’이나 ‘추억’으로 느껴지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살아가는 발자국이며 살아온 손때인데, 낡은 집이고 ‘주거환경개선을 해야 하는 낙후된 지역’으로만 느끼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 ‘이젠 다 싫어. 알바 가는 것도 싫어. 시시한 공부도 싫어. 타카하시에게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싫어. 이젠 모든 게 다 싫어, 싫다고. 싫어. 싫어. 싫어.’ ..  (111쪽 - 종이박스 속의 말린미역) 






 눈을 쓸고 쓰레기를 치우는 몽당빗자루에 깃든 사랑을 사랑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이 몇 사람한테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쓸고 일곱 시에 쓴 다음 아홉 시에 또 쓰는 골목집 아주머니와 할머니들 손자취를 곱새길 수 있는 넋이 몇 분한테 살아 있을지 궁금합니다.

 사랑하니까 찍는 사진이고, 사랑하기에 찍을밖에 없는 사진이며, 사랑을 바치며 찍게 되는 사진인데.

 같이 살고 싶어 찍는 사진이고, 함께 살고 있으니 찍는 사진이며, 오순도순 모이고 어우러지면서 엮어내는 사진인데.


 (2) 사랑에 빠진 삶, 사랑을 그리는 삶, 만화 《여자의 식탁》


 만화책 《여자의 식탁》을 읽습니다. 지난해 8월에 아기를 낳은 뒤 다섯 달 동안 만화가게에 들르지 못해 그사이 새로 나온 만화는 하나도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그제 어렵사리 만화가게 나들이를 하면서 잔뜩 사들였는데, 마침 지난해 5월에 처음 옮겨졌다고 하는 《여자의 식탁》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4권까지 나왔고, 아직 줄거리와 맛을 알 길이 없기에 1권만 먼저 사서 읽습니다.


.. ‘처음으로 남자에게 안기면서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의 시간과 씁쓸한 첫사랑’ ..  (180∼182쪽 - 버스 정류장)


 그린이 ‘시무라 시호코’ 님은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서 사람들이 부대끼면서 어울리는 이야기를 ‘먹을거리 하나’에 따로따로 담아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책이름이 《여자의 식탁》이구나 싶은데, 밥상머리 먹을거리는 새삼스러운 요리이지만은 않습니다. 초콜릿 하나이기도 하고 딸기 한 송이이기도 합니다. 스파게티 한 접시이기도 하고, 운동회 때 먹는 유부초밥이기도 합니다. 차멀미를 막아 줄까 싶어 씹는 민트껌일 때가 있고,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혼자 대학교 다니며 알바하여 공부할 돈을 버는 아이가 고향 부모님이 보내 준 말린미역일 때도 있습니다.

 학교 앞 분식집 떡볶이와 순대로 옛생각을 되새기기도 하듯, 청어 한 접시나 삼치 한 접시로 옛사람 만나던 일을 떠올리기도 하듯, 눈물 젖은 막걸리 한 사발이나 도시락 한 그릇으로 어린 날 집식구와 옛동무를 그리워하기도 하듯, 《여자의 식탁》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먹을거리에 모든 삶이 담기고 모든 이야기가 스미며 모든 우리 발자취, 곧 우리 생활문화역사가 있음을 찬찬히 보여줍니다. 군더더기 없는 그림결에 부드러운 흐름으로 우리 마음결을 사로잡고 눈길을 촉촉하게 해 줍니다.

 사랑이란 시끌벅적한 사랑만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사랑이라면 누구한테나 마음속 깊은 데에 조용히 소담스레 보듬고 있기도 하다고 들려줍니다. 사랑이기에 옛사랑과 새사랑 가리지 않고 언제나 내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일으켜세우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곳에 튼튼하게 살아 있어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귀엣말을 합니다. (4342.1.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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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 마음을 담은 그릇
호연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도자기’와 ‘만화’에 담은 아름다운 마음
 [살가운 만화 38] 호연, 《도자기》



- 책이름 : 도자기
- 글ㆍ그림 : 호연
- 펴낸곳 : 애니북스 (2008.5.13.)
- 책값 : 14500원



 (1) 우리 아기한테 쏟는 마음


 동네에서 무슨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도서관에 찾아와서 우리 집 옥상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 싶다고 하기에, ‘그러마’ 하고 올라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옥상에서 둘레를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살림집까지 들어간 듯합니다. ‘우리 집에 들어가겠다’고 여쭙지 않았으며, ‘살림집에 들어가 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버젓이 다른 사람 집에 들어갔고, 집에서 더위를 식히며 무거운 몸을 가누고 있던 옆지기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옥상이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고 둘러대었다는데, 텅 빈 옥상이 아니라, 창문과 대문이 따로 있는 집이 한쪽에 있고, 문간에는 신발이 여럿 놓여 있으며, 더워서 열어 놓은 대문 안쪽으로는 여러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보이는데, ‘집이 아닌 옥상’으로만 여긴다는 대목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참 딱한 사람들이구나, 그렇게 하면서 무슨 공연이니 예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러면서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않을 수 있나, 그런 마음으로 자기들 공연이나 예술에 무얼 담는다고, 그 영상 장비에 무슨 그림을 담는다고.


.. “난 우리 아버지가 새 같다고 생각했어요. 나랑 눈을 잘 안 맞추거든요.” ..  (32쪽 / 청화백자 매화 대나무 무늬 병)


 오늘도 그지없이 더운 하루입니다. 창문을 모두 열고 자리에 앉아 도서관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흐릅니다. 부채질을 하지만 부채질을 멈추면 다시 땀이 흐릅니다.

 틈틈이 낯과 손을 씻어 보지만, 씻을 때만 잠깐 시원한데, 수도물도 뜨뜻미지근입니다.

 아침나절 옥상마당에 널어 놓은 이불은 햇볕을 아주 듬뿍 머금고 있고, 빨래는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바싹 마릅니다. 다시 한 번 낯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빨래 한 점을 합니다. 손과 발은 물이 닿아 땀이 조금 식혀지지만, 빨래 하는 몸은, 등줄기로는 땀이 흐릅니다.


.. “개구리다!” “위험해.” “어, 이 자식 더워서 안 움직이냐.” “죽은 척하는 거야.” …… “나 시골 가서 개구리 봤다.” “난 두꺼비도 밟아 죽였어. 타이어에 펑.” ..  (70쪽 / 청화백자 매화 대나무무늬 연적)


 이렇게 더운 여름날 아기가 태어난다면, 아기 어머니도 힘겹고 아기도 힘겨울 텐데, 아기가 나올 무렵은 조금 선선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반가우랴, 고마우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오늘처럼 더운 날씨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기는 더위를 느끼며 태어나, 이 세상은 이렇게 더운 여름임을 느껴야 할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 살림집에서는 전기 먹는 살림살이 거의 없고, 자동차도 없으며,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도 없지만, 우리가 이런 물건을 안 써도 이웃사람 모두가 이 물건을 아주 흥청망청 쓰고 있기 때문에, ‘남 탓’을 할 일이 아니라 ‘함께 껴안을 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기는 이 모든 짐을 두 어깨에 얹어놓으면서 태어납니다. 만만하지 않은 세상임을 알아가게 됩니다. 서로서로 나 몰라라 하는 세상임을, 자꾸자꾸 쓰고 버리기만 하는 세상임을 느끼게 됩니다. 버려지는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가는 헤아리지 않는 세상임을, 이리하여 자기 꿈을 펼치면서 살아가기에는 몹시 막혀 있는 세상임을, 참된 공부를 바라고 아름다운 일을 하며 즐거운 놀이를 함께 하면서 땀흘리는 보람을 느끼고 싶어도 늘 벽에 부딪쳐야 하는 세상임을, 한 해 두 해 자라는 동안 몸으로 배우겠지요.


.. “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숙사의 아침밥을 받아.” “부지런하군.” “다시 자. 아침에 누룽지 퍼 온 통 안고.” “맙소사.” “점심때 일어나서 그걸 먹고 수업 가.” “으엑 비위생.” …… “이거, 호연 너가 예전에 말했던 인화문이지?” “엉? 음. 누룽지 무늬네, 누룽지.” ..  (106∼108쪽 / 분청사기 인화무늬 장군)


 우리 두 식구는 우리 나름대로 아기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집임자가 이 해묵은 집을 아주 조금 손질해 주겠다고 해서, 월요일에 창문샤시 하나 덧달아 주고, 작은 방 벽에 압축단열재를 붙여 준다면, 그나마 덜 시끄럽고 모기하고도 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공사만 마치면, 바로 창문마다 긴천을 두껍게 달아 빛이 새어들지 못하게 막을 생각입니다. 바닥에 깔 이불이나 담요는 모두 마련했습니다. 가위와 실도 가까운 곳에 두었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누런쌀 십 킬로그램도 주문해 놓았으니, 두 달쯤은 집에만 있어도 밥을 해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틈틈이 저잣거리 나들이를 얼른 하면서 날푸성귀 장만을 해야겠지만.

 가장 큰 일이라 한다면, 옆지기도 옆지기이지만, 제가 혼자서 아기낳이를 거드는 한편, 똥오줌 받아내고 땀 닦아 주고 밥 차려서 먹여 주기를 한 달 가까이 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집안을 쓸고닦는 일, 밥벌이 하는 일, 또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을 모두 해내야 하는 대목.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지치거나 마음을 놓아 버리게 되면 안 되는 아이낳기입니다. 둘 모두 몸을 잘 간수하면서, 꼭 알맞춤하게 움직이고 일손을 나누고 마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 ‘내가 어릴 적,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화장하여 남은 재를 본 적이 있다.’ … ‘와, 정말 희다.’ ..  (136쪽 / 분청사기 물고기 무늬 편병)


 살림집에서 누워 있던 옆지기가 도서관으로 내려옵니다. 너무 덥고 허리가 아프고 배도 아프다고 합니다. 아기가 나온 뒤에도 이렇게 더우면 어떻게 누워 있어야 하느냐 걱정을 합니다.

 저도 걱정입니다. 더운 날, 더운 집, 더운 몸이 되어서 이 어려움을 견디어 내야 한다니 참 걱정입니다. 씻는들, 부채질을 한들, 작은 선풍기 하나 돌린들, 더위를 얼마나 털어내면서 아기를 안아 줄 수 있을지 근심입니다.

 더욱이, 아기가 나오면 석 주 동안은 빛을 보면 안 되는데, 창문을 닫고 긴천을 드리워 놓으면 여름날 방은 훨씬 후덥지근할 테지요. 갓 태어난 아이는 밝은 빛을 보면 눈이 다칩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텔레비전과 셈틀을 가까이하기에 눈이 많이 나빠져서 안경을 많이 낀다고 하는데, 이런 탓도 틀림없이 있지만, 처음 세상에 나올 때 병원에서 나오다 보니, 병원에서 눈부시게 켜 놓은 불빛에 눈이 다칩니다(병원에서는 아기와 함께 아기 어머니도 센 불빛 때문에 눈이 다치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아무래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아기 어머니 위로 불을 환히 밝힐 뿐 아니라, 수많은 ‘(아기하고) 낯선 사람들’이 시끄럽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아기가 나온 뒤, 탯줄로 쉬는 숨을 마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 다음 탯줄을 자르고, 탯줄을 자르고 나서 아기는 어머니 곁에서 죽 지내야 합니다.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아기를 낳은 뒤로 한 주에서 열흘까지 그대로 누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몸을 움직이면 아기 어머니는 엉덩뼈가 뒤틀립니다. 아기 낳은 뒤 몸을 함부로 움직여서 엉덩뼈가 뒤틀리면 등뼈도 뒤틀리고, 젊은 날에는 그럭저럭 버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어머니는 허리아픔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누운 채로 똥오줌을 누어야 하고, 옆에서 이를 받아 주고 닦아 주는 도움이가 꼭 있어야 합니다.


.. “18세기 전반 조선각병 같던 내 몸이 18세기 후반 각병이 되었구나.” “호연아.” “저리 가. 너랑 이젠 안 마셔.” “나, 이번 달 군대 가는데.” “그럼 마셔야지.” ‘내 몸은 이제 떡메병으로 치닫고 있다.’ ..  (263∼264쪽)


 그렇지만, 우리가 집이 아닌 병원에서 아기를 낳으려 한다면, 이 모든 터전을 제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집은 기찻길 옆 집이라서 기차소리로도 시끄럽지만, 병원 시끄러움은 이와는 또 다르게 클 뿐더러, 지나치게 밝고, 자꾸 아기 어머니를 움직이게 하며, 아기와 아기 어머니 모두 고요하며 느긋하게 쉬도록 마음을 써 주지 못하는 얼거리입니다. 그러니, 소중한 아기를 낳으려 하면서 병원에 갈 수 없습니다. 병원에 갈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 “새들은 나한텐 절대 안 오면서 나무한텐 잘 가요.” “빨리 안 써?” “아, 나무한테는 자석이 있는 것 같아요! 새 끌어들이는 자석!” “다 튄다, 욘석아.” ..  (349∼350쪽 / 청자 상감 구름 학 무늬 매병)


 병원이라는 곳에서 아기낳기를 ‘돈벌이’나 ‘일거리’가 아닌 ‘한 목숨한테 바치는 마음 기울임’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새 목숨은 병원이라는 데가 아니라, 자기 어버이와 함께 살아갈 집에서 낳아야 함을 헤아릴 수 있다면, 나라 정책도 어느 만큼은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병원이나 나라한테 무엇인가를 바라기 어렵습니다. 바란다는 꿈을 안 꿉니다. 사회 얼거리나 틀거리가 벌써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며, 사람들 생각과 느낌 모두 ‘아기와 아기 어머니한테 참답게 마음을 쏟는 일’이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습니다. 아기를 낳으면 돈 얼마 주고 한다는 정책이 아니라, ‘아기낳기란 무엇인가’부터 헤아려야 할 텐데. 아기를 낳은 뒤 아기한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가 아니라, ‘아기가 살아갈 우리 땅 우리 터전이 얼마나 아름다울까’부터 살펴야 할 텐데.


 (2) 만화책 《도자기》에 담긴 마음


 네이버 웹툰에 실리던 《도자기》가 지난 5월에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널리 사랑받는 웹툰이 곧잘 만화책으로 묶이곤 하는데, 정작 책으로 묶인 웹툰 가운데에는 ‘인터넷만화 빛깔’을 제대로 못 살린 판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굳이 종이로 찍어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드는 책도 꽤 있습니다(제가 보기로는).

 《도자기》는 인터넷만화로만 실리던 때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책으로 나오기’를 바랐고, ‘책으로 나온’ 뒤에는 인터넷만화 때 못지않게 두루 사랑받고 있습니다.


.. “말씀 너무 재밌었어요. 선생님 경험담들요. 저는 고고미술사학과의 일들을 만화로 그리고 있는데요, 선생님의 경험을 그려도 좋을까요?” “…… 응, 그래 …….” “이 교수님, 저 만화 그리고 있답니다. 도자기에 관해서 말예요.” “그래?” “…….” ‘만화라서……일까.’ ..  (46∼47쪽 / 백자 철화 끈무늬 병)


 만화에 자주 엿보이는데, 그린이 호연 님이 하는 ‘고고미술사학과’ 공부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고 합니다. 뜻도 모르는 채 끝없이 외워야 하는 한자와 한자 이름에다가, 교수가 파헤치는 갈래에 따라서 연구학설이 다르고, 보고서와 시험범위는 끝도 없을 뿐더러, 도자기를 만화로 담아내는 그린이 뜻을 헤아려 주는 스승(교수)은 보이지 않고.


.. ‘옛 도공들은 동심이 가득했나 보다.’ ..  (96쪽 / 신발 모양 토기)


 그렇지만 호연 님은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하는 공부가 아니었고, ‘많은 이들이 보는 자리에 선보였다’고 하지만 뽐내 보이려고 그린 만화가 아니었습니다. 좋아하는 공부요 즐기는 만화입니다. 만화 어느 대목에서도 그린이 스스로 “공부가 좋았어요” 하고 말하거나 “만화가 즐거워요” 하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만, 만화를 보는 동안 호연 님 이분은 자기가 파고드는 공부를 참 좋아하고 이렇게 공부하는 자기 삶을 만화로 담아내는 일을 무척 즐기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도자기와 하나가 되어, 도자기가 처음 태어나던 그때 그 ‘도공’은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꿈꿉니다. 도자기를 배우는 지금, 자기가 죽고 사라질 먼 뒷날까지도 죽지 않고 남을 도자기(자기가 빚은 도자기)를 들여다볼 그때 그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오늘날을 어떻게 헤아려 보게 될까를 꿈꿉니다.


.. “뭐 해?” “토기에 내 일상을 붙여, 먼 후대까지 알릴 거야.” ..  (99쪽 / 토우 장식 긴 목 항아리)


 반가웠던 일은 반가웠던 마음을 잊지 않고 만화로 녹여냅니다. 슬펐던 일은 슬펐던 마음을 놓지 않고 만화로 곰삭여냅니다. 기뻤던 일은 기뻤던 마음을 잃지 않고 만화로 되살려냅니다. 아팠던 일은 아팠던 마음을 흘려보내지 않고 만화로 차곡차곡 담아냅니다.

 사진을 하려면 사진과 함께 살고, 글을 쓰려면 글과 함께 살아야 하듯, 호연 님은 만화와 도자기 공부를 하면서 만화로 사는 한편 도자기 공부로 함께 삽니다. 이 삶이 따로 떨어지지 않은 채 하나로 묶였고, 하나로 묶인 ‘만화와 도자기’는 어엿한 이야기 보따리가 되어, ‘외로운 사람(18쪽)’들 마음에 살며시 다가가며 ‘좋은 마음동무로 어깨동무를 하는 손길’로 뻗어나갑니다.


.. “여러분, 이 상이 어느 나라 건지 맞춰 볼래요?” “신라요!” “백제요!” “고구려요!” (하하, 귀여워) “자, 다들 정답이에요. 이 보살상은 고구려 것도 백제 것도 신라 것도 돼요. 그런데, 여러분 세대는 앞으로 논술이 매우 중요해요. 그러니까 글 쓸 때, 고구려 것이라고 쓰면 10점, 신라 거라고 쓰면 20점, 백제 거라고 쓰면 50점, 삼국시대 것이라고 쓰면 100점입니다. 자, 그럼 다음 걸 볼까요.” … (보살님은 100점짜리 논술답안지셨군요. 사람들은 어떤 큰 오해를 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  (164∼167쪽 / 분청사기 조화구름무늬 대접)


 우리 나라 대학교에는 ‘고고미술사학과’도 있고 신문방송학과도 있으며 동양사학과도 있습니다. 에스파냐말을 다루는 학과가 있고 유고슬라비아말을 다루는 학과가 있으며 네덜란드말을 다루는 학과가 있습니다. 농학과가 있고 사회복지학과가 있으며 한국어교육과가 있습니다. 수많은 학과가 있습니다.

 만화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 있으며 글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호연 님은 고고미술사학과 공부를 하면서 만화를 즐겼습니다. 이 나라에서 대학생으로 있는 분들이라면 네덜란드말을 공부하면서 글을 즐길 수 있고, 농학 공부를 하면서 사진을 즐길 수 있겠지요. 꾸려 가는 삶에 따라 얻게 되는 이야기가 다르고, 얻게 되는 이야기가 다른 가운데 벗과 함께 나눌 생각이 넓어집니다. (4341.8.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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