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톰의 슬픔
테즈카 오사무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17 ― ‘좋은’ 진보를 꿈꾸면 ‘좋은’ 만화를 읽어야
 : 데즈카 오사무, 《아톰의 슬픔》


- 책이름 : 아톰의 슬픔
- 글 : 데즈카 오사무
- 옮긴이 : 하연수
- 펴낸곳 : 문학동네 (2009.1.21.)
- 책값 : 8500원


 (1) 책, 책읽기, 책삶


 장마비가 끝없이 내릴 듯하더니, 어제 하루는 말끔히 개면서 날이 몹시 무더웠습니다. 집안 창문을 모조리 열어 놓아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아쉬우나마 바람 한 점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밤새 후덥지근한 가운데 모기는 법석을 떱니다.

 이런 더운 날, 어른들은 차가운 보리술이나 얼음커피를 떠올릴 테고, 아이들은 차가운 얼음과자나 팥얼음물이나 콜라를 떠올릴까요. 더위를 이기거나 견디면서 내 마음밭 살찌울 책 하나 읽겠다고 나설 어른이란, 또 어린이란 얼마나 될까요.


.. 뻔뻔스럽게 국민을 탄압하는 악랄한 권력자와 정치가조차도 태연한 얼굴로 ‘숲은 소중하다’, ‘동물을 보호하자’, ‘생명을 존중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가차 없이 독극물을 흘려보내고, 끊임없이 살인병기를 개발하고 제조하지요 … 혹시 인류는 어제도, 또 오늘도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리 달에 착륙하고 우주정거장을 건설한다 해도 환경 파괴와 전쟁을 멈추지 않는 한 인류는 ‘야만인’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 국가권력이 ‘정의’라는 이름 하에 국민들에게 휘두른 폭력의 실상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린 작품이 《아돌프에게 고한다》입니다  … 전쟁터에서는 어디로 도망치든 결국 공포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탈출구는 없습니다. 그것이 지진이나 해일과 같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괴물이라는 점이 가장 참혹한 것입니다 … 수많은 나라가 저마다 ‘정의’를 내걸고 전쟁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정의’란 참으로 편리한 말이어서 국가의 수만큼, 혹은 인간의 수만큼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거창한 ‘정의’의 속뜻은, 노인부터 순진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참한 살육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16, 18, 41, 53∼54쪽)


 아기 기저귀를 빠는 동안은 조금 시원합니다. 찬물을 만지기 때문입니다. 더운 날에는 아기를 여러 차례 씻깁니다. 이제 기저귀를 떼야 하니 아랫도리를 벗기거나 속옷만 한 벌 입혀 놓는데, 오줌을 가리기 앞서까지는 온 방바닥이 오줌바다가 됩니다. 그만큼 기저귀 빨랫거리는 줄지만, 하루에 열 번 남짓 걸레질을 해야 합니다. 기저귀 열 번 빨기보다 걸레 열 번 빠는 일이 한결 수월합니다.

 어른 두 사람이 아기 하나한테 매여 쩔쩔맨다고 할 텐데, 이렇게 쩔쩔매는 동안 엄마든 아빠든 제 마음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어질어질 해롱해롱 아슬아슬 간당간당입니다. 아기를 어르고 달래는 사이 어느새 밥때가 다가오고, 밥때가 다가와 밥을 차려 놓으면, 아기는 제가 숟갈질을 하겠다며 한손으로 꾹 움켜쥐고 밥을 다 헤집어 놓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떠먹여 주면 고개를 도리도리 젓거나 엉금엉금 내뺍니다. 한 숟갈 먹일 때마다 몇 분씩 걸립니다. 이렇게 하루 온통 바쳐 씨름을 하며 지치는 엄마 아빠가 책을 펼치기란 대단히 힘든 노릇. 뒷간에서 똥을 눌 때, 이제 지쳐 잠자리에 드러누우며 잠깐 책을 집어들지만, 겨우 잠들었다 싶은 아기는 금세 다시 깨어나 응애응애거리니 이마저도 몇 쪽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먹고살기 바쁜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농사일이나 공장일로 고단한 일꾼은 일꾼대로, 또 장사하기 벅찬 장사꾼은 장사꾼대로, 그리고 집에서 아기하고 씨름하는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한국땅 사람한테 책이란 머나먼 님, 아니 멀디먼 남입니다.


.. 겉보기에 평화로운 사회 속에서 하루하루 안락하게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이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의 내면에까지 뿌리내린 것입니다 … 일본의 군부와 정보기관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영상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정책을 편 것이겠지요. 우리 세대는 고스란히 그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전쟁에 흠뻑 빠져 버린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애니메이션 제작에 힘써 온 것은, 군국주의가 남용한 영화의 효용을 거꾸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의 눈망울에 꿈과 희망을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  (29∼30, 44∼45쪽)


 아이가 책을 읽자면 어버이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아이가 바르고 착하게 크자면 어버이가 바르고 착하게 커야 합니다. 아이가 튼튼하고 씩씩하자면 어버이가 튼튼하고 씩씩해야 합니다.

 아이는 어느새 어버이를 따라 합니다. 좋은 모습이든 궂은 모습이든 따라 합니다. 아이는 엄마 아빠 모습을 보며 절구질 시늉을 하고, 숟갈질 시늉을 하고, 빨래 비빔질 시늉을 하며, 방바닥 걸레질 시늉을 합니다.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습니다. 어젯밤 오늘밤 그젯밤 …… 요 며칠 사이 우리 동네 사람이나 우리 동네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깊은밤에 술에 절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그제와 그끄제에는 경찰차가 와서 주정뱅이를 끌고 갔고, 어제는 ‘아마 그제나 그끄제 끌려갔구나 싶은’ 주정뱅이가 ‘x같으면 신고해!’ 하면서 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오늘밤이라기보다 새벽나절 너덧 시에는 어떤 젊은 사내와 계집이 술에 절은 소리로 악을 쓰며 싸웁니다. 저와 옆지기는 이 소리에 흠칫 놀라 잠에서 깨는데, 아기도 이런 소리에 놀라서 깰까 걱정입니다. 조용할 때에는 그지없이 조용한 골목동네이지만, 동네사람이든 딴 곳 사람이든 술에 절디전 사람들이 때때로 부리는 못난 짓이 고스란히 아이한테 옮을까 걱정입니다. 낮에는 동네 할매들이 우리 집 옆에 붙어 있는 정자에서 소주잔치를 으레 벌이며 갖은 욕을 늘어놓는데, 이런 소리도 우리 아이뿐 아니라 우리 동네 다른 아이한테 조금도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어버이 된 사람으로서, 이런저런 주정뱅이 소리가 아닌, 동네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제법 많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동네 곳곳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팔랑거리는 소리와, 바닷가에서 큰배가 뚜우 하고 울리는 소리, 그리고 빗소리 봄이 가는 소리 여름이 오는 소리 들을 받아들이고 느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대로만 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그저, 아이 앞에서 엉뚱하거나 엉망진창인 소리가 되도록 덜 가닿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이 세상에 ‘한심한 아이’나 ‘나쁜 아이’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딱지가 붙은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정신이 궁핍한 것입니다 … 우선 부모의 생활이 완전히 규격화되어 있지요. 빡빡한 하루 일과 속에 어린이를 적당히 끼워맞추는 게 다반사입니다 … 부모가 특별한 지위나 힘을 지닐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저 대세를 좇아 학력사회만 추종하며 자녀가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설령 주류에서 조금 밀려난다 할지라도 자녀와 함께 자기 가정만의 가치관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가요? ..  (58, 65∼66쪽)


 곰곰이 헤아려 보면, 제가 헌책방마실과 골목길마실을 꾸준히 잇는 까닭은 제 마음과 몸을 살찌우며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옆지기와 아이를 함께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책 그대로 꾸밈없이 바라보고 껴안고 싶어서, 새책방마실뿐 아니라 헌책방마실을 함께하며 책사랑 마음을 즐거이 가꿉니다. 헐어도 책이요 번쩍거려도 책이거든요. 이천 원짜리라 해서 나쁘거나 이만 원짜리라 해서 좋거나 하지 않는 책입니다. 더 넓은 길이라 하여 사람이 다니기에 좋은 길이 아니며, 더 큰 집이라 해서 더 살기 좋은 집이 아닙니다. 수수한 살림살이며 갖가지 꽃그릇이며 꽃풀나무이며, 제 눈길과 매무새를 고이 지키도록 도와주고 되돌아보도록 이끕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장만하는 책들과 골목길마실을 하면서 찍어 놓는 사진들을 떠올려 봅니다. 모두 저 혼자 좋아서 보는 책이며 찍는 사진이라 하겠습니다만, 또 이 책과 사진을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만, 그저 옆지기와 아이와 나란히 즐기고 맛보며 함께할 수 있으면 흐뭇하다고 여깁니다. 이 책들처럼 아빠와 엄마가 살고 있으며, 이 사진들처럼 아빠와 엄마는 세상을 들여다봅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는 가운데, 제 깜냥껏 어버이를 느낄 테고 동네를 느끼며 세상을 느끼리라 봅니다. 이 자람길에서 책은 아이한테 길동무가 될 수 있고, 골목길 사진은 아이한테 길눈이 될 수 있습니다.


..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더라도 일본의 역이나 빌딩 등 도시의 구조는 도저히 노인이나 장애인을 배려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 모든 사람이 살기 좋은 사회란 곧 모든 생물이 살기 좋은 사회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 아무리 일본인의 후각이 발달했다지만 도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코가 둔감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뒷골목 가게의 맛있는 라면 냄새는 금방 맡아도, 사계절이 변화하는 자연 속의 미묘한 향기는 알지 못합니다 … 정치인들이 더 많은 벌레와 생물들의 이름, 그리고 그것들의 서식지와 수명, 먹이까지 상세히 안다면, ‘이 공원에는 무슨 나무를 심어서 이런 새들이 찾아오도록 해야겠다’는 식의 녹색행정을 펼쳐, 숲과 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푸른 도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정도도 한낱 꿈으로 여겨야 한다면 너무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닌, 이룰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  (81, 86, 132쪽)


 옆지기나 저나, 우리 아이가 더 많이 배우거나 알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두 사람 스스로 더 많이 배우거나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옳다면 그 한 가지 옳은 길을 가면 넉넉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우며 남다른 한결 옳고 바람직한 길이 있다 해서 반드시 그 길로만 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길을 가되, 우리 둘레에 어떤 이웃이 어떻게 애쓰고 힘쓰는가를 헤아리거나 껴안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책읽기를 이어갑니다. 고단하고 지치는 하루하루이지만, 다문 몇 쪽이라도 펼치고자 하며, 미처 못 읽어낼 책이라 하여도 ‘이런 책은 다른 사람이라도 볼 수 있도록 사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란 우리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동네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이든, 눈을 뜨려 하고 생각을 열려 하며 마음을 넓히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이한테 내밀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조촐하게 동네도서관을 지켜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2) 만화, 만화책, 만화쟁이


 만화쟁이 ‘데즈카 오사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주 드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데즈카 오사무 만화 가운데 무엇을 보았나요?” 하고 여쭈어 본다면, “글쎄요…….” 하고 뒷통수를 긁적이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 이름나고 널리 읽힌 《우주소년 아톰》마저 첫 권부터 끝 권까지 찬찬히 펼쳐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이 그린 《붓다》를 스무 해쯤 앞서 ‘고려원미디어’에서 우리 말로 옮겨서 펴낸 적이 있음을 아는 분은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1960년대 우리 나라 과학잡지에 ‘아톰’ 해적판이 이어실린 적이 있기도 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은 일본 역사를 다룬 만화를 곧잘 그리기도 했고, 《밀림의 왕자 레오》라든지 《사파이어 왕자》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작품 이름을 댄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텔레비전 만화영화로 보았다’고 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있기는 있어도 이 만화들이 무엇을 보여주려 했고, 무슨 생각을 나누려 했으며, 아이들한테 이런 만화영화를 선물해 주고자 한 만화쟁이 속내를 헤아리는 분은 거의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 어린 시절, 나는 다카라즈카라는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였던데다가 막 전쟁에 돌입한 시기였기 때문에 결코 좋은 시절은 아니었습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곁엔 늘 자연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마음껏 뛰놀던 산천과 초원, 한없이 빠져들었던 곤충채집은 지금도 생생한 추억으로 빛을 발하며 내 몸과 마음 깊숙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 필명인 ‘오사무(治蟲)’도 실은 ‘딱정벌레’에서 따온 것이지요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네마다 숲과 들판이 있어서 아이들은 골목대장과 함께 해가 저물도록 그 환상의 왕국에서 뛰어놀 수 있었습ㄴ디ㅏ. 그곳은 우주기지였고, 탐험대가 찾아나서는 비밀스런 땅이었으며, 끝없이 공상이 퍼져나가는 미지의 장소였습니다 … 이제까지 나는 미래사회를 다룬 만화를 많이 그려 왔지만 우주 저편까지 날아가는, 혹은 작은 벌레 속까지 파고드는 상상력의 기반은, 내 안의 ‘자연’이었습니다 … 맹렬한 비판의 폭풍 속에서도 만화를 그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로봇의 격렬한 싸움을 그린다 해도 내 만화의 주제는 항상 자연에 뿌리를 둔 ‘생명의 존엄’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  (11∼13쪽)


 ‘데즈카 오사무’라는 이름은 무척 널리 알려져 있었음에도, 정작 데즈카 오사무 님 작품이 제대로 나라안에 나온 적은 거의 없습니다. 2000년을 조금 넘어선 때에 학산문화사에서 ‘데즈카 오사무 전집’ 비슷하게 예닐곱 가지를 옮겨냈고, 솔출판사에서 한 가지를 옮겨냈습니다. 그러나 이 ‘데즈카 오사무 전집’ 비슷한 만화책들은 몇 해 지나지 않아 거의 모두 절판이라는 길을 걷습니다. 이제는 《우주소년 아톰》 24권, 《블랙잭》 22권, 《도로로》 4권, 이렇게 찾아볼 수 있는 가운데 ‘데즈카 오사무 초기 걸작집’ 네 권을 겨우 만날 수 있습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이 세상을 떠난 지 스무 해가 되는 2009년 올 1월에 나온 산문모음 《아톰의 슬픔》이라는 책에서 글쓴이 데즈카 오사무 님이 여러 차례 되뇌는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우리 말로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지 않느냐 싶고, 《불새》는 한 번 나왔으나 이 또한 금세 판이 끊어졌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만화영화 《밀림의 왕자 레오》나 《사파이어 왕자》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할 텐데, 정작 ‘만화영화로 그려지던 첫 만화책’을 살펴볼 수 없는 대목은 몹시 안타깝습니다.

 우리 문화 눈높이가 이만큼밖에 안 되며, 우리 만화 눈높이도 더 뻗어나가지 못하는 모습이라 할 텐데, 곰곰이 따져 보면,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만 이렇게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나라안 숱한 만화쟁이 작품을 찾아보기도 퍽이나 어렵습니다. 부천에 만화책 다루는 도서관이 한 곳 있기는 합니다만, 이곳을 뺀 다른 여느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찾아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요?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할 뿐 아니라, 훌륭한 만화책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네 도서관 사서 가운데 ‘만화를 만화 그대로 받아안을’ 만한 생각그릇을 갖춘 분은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습니다. 국립이든 공립이든 시립이든, 또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이든, ‘알찬 만화이든 재미난 만화이든 차곡차곡 갖추는 일’에는 어느 사서나 선생님이나 젬병이 아니냐 싶습니다.


.. 나는 자연과 인간성을 외면한 채 오직 진보만을 추구하며 질주하는 과학기술이 사회에 얼마나 깊은 균열과 왜곡을 가져오고 얼마나 많은 차별을 낳는지, 또 인간과 모든 생명에게 얼마나 무참한 상흔을 남기는지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 아톰도 인간들 사이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왕따’였습니다. 하지만 소신 있게 행동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때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악당에게도 용기 있게 맞서는 아이로 그렸습니다. 물론 만화 속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본래 어린이들에게는 그런 에너지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 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고, 매미가 울고, 강에는 물고기가 헤엄치던 자연, 그것은 그대로 우리들의 일상이었고, 벌레와 새와 어린이가 공존하던 세계였습니다. 자연을 ‘추억’으로도 소유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타인의 아픔과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친다는 것은 무척이나 모순된 일이 아닐까요? ..  (22, 27∼28, 57쪽)


 엊그제 잠깐 들렀던 헌책방에서 만화책 《불새》 일본판 하나를 만났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데즈카 오사무 님 숱한 만화책은 ‘번역이 안 된 탓’인지 모르나, ‘일본판으로 웬만한 작품이 거의 다 들어와’ 있은 듯합니다. 제가 만난 《불새》 일본판인 《火の鳥》에는 한국 책방에서 팔았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글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주제에 전철길에 이 만화를 다 보아 냈는데, 퍽 예전 작품인 《불새》에는 톤을 하나도 쓰지 않습니다. 그림자며 옷이며 모두 펜끝으로 마감합니다. 그린이 손길이 무척 많이 갔구나 싶은 한편, 이렇게 펜질로 모든 그림을 그려내는 작품은 톤을 쓰는 작품하고 얼마나 다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톤을 쓰면 안 좋고 톤을 안 쓰면 좋다가 아니라, 펜질만으로 된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조금 더 찬찬히 만화에 빠져들기도 하고, 그림을 한 번 더 지그시 바라보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저한테는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 느낌이, 꼭 김수정 님 예전 만화를 보는 느낌이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길을 다 다른 생각으로 만화를 그렸습니다만, 제 마음으로 스며드는 느낌은 한동아리입니다. 그래서, 한 해에 한 차례씩 김수정 님 만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롭게 다시 보고 있는데,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또한 한 해에 한 번쯤 우리 집 책꽂이 앞에 선 채로 죽 보아 내곤 합니다.

 재미가 있기도 하지만 재미만 있지 않은 만화요, 이야기가 있기도 하지만 이야기만 있지 않은 만화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만화이지만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한 만화 또한 아닌, 김수정 님 작품이고 데즈카 오사무 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애니메이션에서 전쟁을 묘사할 때도 제작자의 메시지를 담는다면 괜찮지만, 전쟁을 단순하게 묘사하기만 하는 것은 엄청난 죄악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 나에게도 세 명의 자식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는 지금의 평화와 자유를 지켜 주고 싶습니다 ..  (62∼63쪽)


 아이를 낳기 앞서도 만화책을 즐겨 장만하며 차곡차곡 갖추었고, 아기를 낳은 뒤에도 만화책을 즐겨 보면서 하나하나 갖춥니다. 저 스스로 만화를 좋아하니까 꾸준하게 만화를 즐깁니다. 뒷날 우리 아이가 여러 갈래 온갖 만화를 스스로 살피면서 아이 깜냥껏 마음을 채우고 덥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장만해 놓습니다. 세상 어느 책이 안 그러겠습니까만, 그때그때 장만해 놓지 않으면 이내 판이 끊어지며 사라집니다. 새책방에서든 헌책방에서든 보이는 그때그때 집어들어 주머니를 털지 않으면 나중에 눈물만 질금질금 흘리거나 입맛만 다셔야 합니다.

 책값에 돈을 쓰는 일을 힘들거나 아깝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이런 책 저런 만화를 차근차근 장만해 놓으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 하나는 있습니다. 참말, 우리네 도서관에는 왜 만화책이 없는지, 또 도서관을 꾸리는 분들은 왜 만화책을 갖출 생각을 못하는지, 그리고 왜 어른들은 만화를 깔보거나 ‘돈 되는 사업’으로만 여기는지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그림은 그림이고 사진은 사진이며 춤은 춤이고 노래는 노래이듯, 만화는 만화입니다. 수학은 수학이고 과학은 과학이며 영어는 영어이듯, 만화는 만화입니다.

 만화는 우리 꿈을 담아내는 문화예술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화는 우리 생각과 삶을 보여주는 문학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화는 우리 마음을 쉬게 하거나 우리 마음을 살찌우는 마음밥 가운데 하나입니다.


.. 도시의 구조 자체가 이러했기에, 일본인들은 내 마을 주변의 생명과 자연환경을 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런데 왜 우리는 수십 년 동안 도시 공간과 자연을 격리시키려 안간힘을 쓰게 됐을까요? … 일본 고유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서구의 도시를 억지로 흉내내다 보니 심각한 왜곡과 불균형이 생겨 결국 자연환경까지 해치게 된 것이 아닐까요? … ‘여유’는 인생의 꽃입니다. 나는 여행을 할 때 여러 마을의 뒷골목을 둘러보곤 합니다. 그곳에는 다양한 인생의 향기가 스며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판자로 엮은 담이나 처마 밑, 도랑, 집과 집 사이의 공간에 특별한 매력을 느낍니다 … 무미건조한 빌딩숲을 거닐며 행복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뒷골목을 걷다 보면 여러 가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어 즐겁습니다. 그것이 곧 놀이인 것이지요 ..  (122∼124쪽)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만화쟁이를 한 사람, 또는 한 직업인, 또는 한 문화인, 또는 한 문화예술인으로 섬기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박재동 님이 《인생만화》, 《밥보다 만화가 더 좋아》, 《만화 내 사랑》 같은 글모음(또는 글그림모음)을 내고, 이두호 님이 《무식하면 용감하다》를 냈지만, 만화쟁이로서 당신 삶을 글로 펼쳐 보이는 분이 몹시 드뭅니다. 또한, 딱히 책으로 내주려 하는 흐름도 옅구나 싶고, 애써 책으로 나온다 한들 두루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머리통 굵은 어른은 어른대로 만화를 만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니, 만화쟁이가 쓴 글을 읽지 않습니다. 어릴 적 만화를 보았던 이들은 이런 이들대로 당신들 만화 삶을 어른이 된 뒤에까지 잇지 못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만화를 좋아하는 분들은 ‘일찌감치 판이 끊어져 다른 여러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운 만화쟁이’가 된 탓이 있기는 하나, 만화쟁이가 쓴 글을 잘 안 읽습니다. 다른 숱한 만화책을 보기에만 바쁩니다.

 이런저런 까닭이 겹치고 맞물리면서, 데즈카 오사무 님 글모음 《아톰의 슬픔》은 그리 눈에 안 뜨이는 책이 되고 맙니다. 2006년에 나온 《어머니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다》도 그렇고, 2002년에 나온 《만화가의 길》도 매한가지였습니다. 






 (3) 《아톰의 슬픔》이라는 책은


 올 1월에 데즈카 오사무 님 글모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뻤습니다. 이모저모 알아보니 그동안 두 차례 다른 글모음이 나온 적이 있는데, 두 번 모두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쳤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언론매체나 비평가 눈길과 손길을 거의 못 탔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책은 여느 새책방 책꽂이에 제대로 못 꽂히기도 했겠지요. 만화책 전문가게에 열 몇 해 동안 꾸준히 들르고 있습니다만, 제가 들르는 만화책 전문가게에도 데즈카 오사무 님 글모음이 꽂힌 모습을 못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데즈카 오사무’를 모르니까, 또 안다고 해 보았자 기껏 ‘아톰’이라는 이름뿐이니까 그럴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기껏 아톰만 안다 할지라도, 만화책이나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일’이 없었다면, 데즈카 오사무이든 와사무이든 와사비이든 무슨무슨 책을 냈다 해서 딱히 눈여겨보지 않으리라 봅니다.


..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월급봉투를 받으면 내 책값을 따로 빼서 만화책을 사주었습니다 … 게다가 내 경우엔 어머니가 만화책을 소리내어 읽어 주었던 것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 50년 전에(1930년대에) 자식에게 만화책을 읽어 준 어머니는 굉장히 유별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읽어 주는 방식이 그야말로 걸작이었지요. 등장인물마다 캐릭터 별로 목소리를 바꿔 가며 연기하듯 재미있게 읽어 주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숨죽이며 감동해서 울먹일 정도로 ..  (34∼35쪽)


 어릴 적 만화영화로 《우주소년 아톰》을 볼 때면 언제나 눈가가 촉촉하게 젖곤 했습니다. 저는 아톰 만화를 ‘눈물을 흘리며’ 보았습니다. 다른 분들은 으레 ‘공상과학’이니 ‘미래세계’니 하고 말씀하지만, 저한테 아톰은 공상과학도 미래세계도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바로 ‘오늘 내 둘레 삶터 이야기’였습니다. 아톰이 사는 무대가 먼 앞날이라 하지만, 무대와 과학기술을 빼놓고 보면, 언제나처럼 우리 둘레 여느 사람들 삶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이는 《사파이어 왕자》와 《밀림의 왕자 레오》를 만화영화로 볼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느끼기로, 데즈카 오사무 님은 한낱 우스꽝스런 만화감이나 공상을 퍼뜨리려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품이 따뜻하고 넉넉한 큰형이나 큰아저씨와 같았습니다.

 《돈 드라큐라》를 보건 《미크로이드 S》를 보건 《노만》을 보건 《아야코》를 보건 늘 매한가지입니다. 헌책방에서 때때로 데즈카 오사무 님 그림이 들어간 일본 어린이책을 만날 때면 으레, ‘우리 나라에서도 이렇게 만화쟁이들이 널리 사랑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가운데, 우리 나라에도 ‘눈물을 흘리며’ 볼 수 있는 만화쟁이가 더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요정 핑크》라든지 《달려라 하니》라든지 《번데기 야구단》이라든지 하는 만화책은, 벌써 몇 백 번이 넘게 보고 또 보아, 책이 퍽 낡고 닳았습니다. 이 만화책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자아내는 밝은 만화로 여기고들 있으나, 저한테는 웃음과 눈물이 함께 감도는 만화입니다. 어쩌면,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많이 나는 만화일 텐데, 보고 또 보면서도 새롭게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마음에 메마르거나 지쳤을 때, 마음이 팍팍해지거나 힘이 빠졌을 때, 이런 만화책들을 넘기면 어느새 눈물샘이 솟아나면서 기운샘까지 솟아나곤 합니다.


.. 생명이 없는 곳에 미래는 없습니다 … 생명이란 더없이 소중하며 인생은 결국 단 한 번뿐이라는 것, 그리고 인류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생명이 자연에는 가득하며 그들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더불어 지구는 인류는 물론, 모든 생명에게 반드시 필요한 별이라는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성심성의껏 이야기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 당연한 사실에 대한 감동을 몇 번이고 곱씹게 하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 거듭 말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풍요로운 자연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 일본은 그 좁은 땅덩이에 골프장만 수없이 많은데, 한 20∼30개 정도는 없애서 달을 볼 수 있는 초원을 만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  (14, 56, 133쪽)


 데즈카 오사무 님은 《아톰의 슬픔》에서 끝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뻔히 다 알 만한 이야기라고 느낀다고 하면서도 굳이 그런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하고 거듭 되뇝니다. “쓸모없는 것, 멀리 돌아가는 것, 예정된 길에서 벗어나 잠시 딴짓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풍요로운 앞날이 보이지 않습니다(168).” 하고.

 1989년에 세상을 떠난 데즈카 오사무 님이니, 이 책에 실린 글은 스물 몇 해나 묵은 글입니다. 그런데, 1980년대 일본 모습이나 2000년대 한국 모습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외려, 이 글모음이 2009년에 옮겨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삶터를 더 찬찬히 굽어살피면서 받아안을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전국적으로 교통망이 발달해 각지의 간선도로가 그물망처럼 교차하고, 그 결과 지역산업이 발전하지만 모든 지방도시들이 정형화되어 엇비슷한 도시 구조를 지닌 특색 없는 모습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반면 개발로 인해 자연림이 더욱더 파괴되어 일본 전역에서 절반 가량의 삼림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171쪽).” 같은 말은 우리 나라에도 어김없이 들어맞습니다. 아니, 우리 나라가 더 뼈저리게 느낄 대목입니다.

 천성산을 뚫는 굴을 생각해 보셔요. 북한산과 속리산에 구멍을 내며 찻길을 내려는 정치꾼과 공무원을 헤아려 보셔요. 국립공원에 함부로 케이블카를 놓으려 하는 사람들을, 또 수없이 많은 골프장을 짓는 개발업자를 보셔요. 그러나, 진보를 말한다는 신문마저도 ‘골프 기사와 골프채 광고’를 아무렇지도 않게 싣습니다. 끝없는 아파트 광고를 그야말로 끝없이 싣고 있습니다. 먹고살기 힘들다 하지만, 이 광고 저 광고 가리거나 솎으면 돈 한 푼 못 번다고 하지만, 우리 삶터를 망가뜨리거나 흔들거나 괴롭히는 ‘나쁜 부자 회사’ 광고를 꼭 받아내어 신문을 내야 하는지 퍽 궁금합니다. 우리 마음과 삶을 착하고 곧은 쪽으로 이끌면서, 착하고 곧게 살아가는 사람한테서 푼푼이 달삯을 받으며 신문사 살림을 꾸릴 수 없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 내가 만화를 그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화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 나는 지금 한창 유행하는 만화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 인기도 한때라는 생각에 슬며시 웃음을 짓고 있으면 실제로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 나는 재미있는 만화가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재미에 바탕을 두지 않고 유행만을 좇는 만화는 결국 세월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유행은 늘 바뀔 것이고, 그에 영합하는 만화는 그때마다 곧 사라질 것입니다 … 어린이들은 진실한 메시지에는 반드시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물며 꿈을 심어 주는 재미있는 메시지라면 얼마나 눈을 반짝이며 좋아할까요? ..  (156∼159쪽)


 책을 꼭 읽어야만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만화를 꼭 보아야만 따뜻하거나 아름다운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좋은’ 진보를 이룩하거나 갈고닦으려 한다면, 우리 손으로 ‘좋은’ 책을 알아내고 우리 눈으로 좋은 줄거리를 읽어내며 우리 마음으로 좋은 넋을 받아들여 우리 몸으로 좋은 삶을 꾸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따뜻한’ 진보가 되고자 한다면, 넉넉한 진보가 되고자 한다면, ‘따뜻함’과 넉넉함을 담뿍 담아 놓고 있는 좋은 만화책을 좋은 매무새와 눈썰미로 하나하나 알아보면서 즐길 줄 아는 느긋함과 틈이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은 일본사람이지만, 훌륭한 만화쟁이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밭이 더없이 따뜻하고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입니다. (4342.7.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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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7-17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스카 오사무가 일본 만화의 신이고 좋은 만화를 많이 그렸지만 한편으론 일본 만화가(애니메이션 작가)들을 혹사시킨 주범이기도 하지요.일본에서 tv만화를 활성화시키기위해 리미티드 기법과 초 저가 납품으로 만화가들을 혹사시켰다고 라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비판한적이 있지요.
근데 동인천 배다릿골 책방은 언제 여시나요.몇달전에 가봤는데 오전이라 그런지 문이 잠겨 있더군요.^^

숲노래 2009-07-18 05:19   좋아요 0 | URL
그런 비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비판받을 대목은 비판받을 대목이나, 만화를 그리는 한 사람 마음과 매무새를 돌아보는 테두리에서 이 책을 만난다면, 우리 스스로 얻을 이야기가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

배다리에 있는 곳은 '책방'이 아닌 '도서관'이고, 금토일에만 열어 놓습니다~

appletreeje 2013-06-22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좋고 아름다운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
 
여자의 식탁 5
시무라 시호코 글.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09 ― “먹기 전에 진부한 아수라장 좀 벌여도 될까?”
 : 시무라 시호코, 《여자의 식탁》 5권


- 책이름 : 여자의 식탁 (5)
- 글ㆍ그림 : 시무라 시호코
- 옮긴이 : 김현정
- 펴낸곳 : 대원씨아이 (2009.6.15.)
- 책값 : 4200원



 (1) 밥하기와


 엊저녁에 불려놓은 누런쌀로 아침에 밥을 합니다. 옆지기는 당근을 썰어 밥에 얹습니다. 다시마도 굵직하게 잘라 함께 얹습니다. 아주 여린 불로 밥을 끓입니다. 몇 분쯤 지나 보글보글 소리가 나고 밥 익는 냄새가 온 집에 퍼집니다.

 요사이 우리처럼 가스불로 냄비에 밥을 해먹는 분이 얼마나 될까 모르겠습니다마는, 전기밥솥이나 압력밥솥 밥보다 냄비밥이 훨씬 맛이 있으면서 영양소도 부서지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곰곰이 떠올리면, 제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에 3학년인가 4학년 때에 학교에서 실과 시간에 밥하기를 가르쳤고, 그무렵에는 한 달에 한 번쯤 학교에서 밥잔치나 먹기잔치라고 해서 우리가 손수 밥하고 반찬하고 하면서 서로 돌려먹기를 하곤 했습니다. 김수정 님 만화 《오달자의 봄》에는 주인공 달자와 펑순이네가 학교에서 밥해서 대접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즈음도 학교에서 이런 실과 수업이 있는가 궁금한데, 초등학교에서는 초등학생 나이에 맞추고 중학교에서는 중학생 나이에 맞추며 고등학교에서는 고등학생 나이에 맞추어 밥하기와 반찬하기를 가르치면서, 어버이 손을 빌지 않고도 살림을 꾸리도록 해 주어야지 싶습니다. 또한, 밥하기를 넘어 청소하기와 빨래하기도 가르치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몸과 마음이 오롯이 튼튼한 사람으로 커야 아름다우며, 어느 누구도 밥을 안 먹고 못 살며 옷을 안 입고 못 사는 한편 잠을 안 자고 못 사니까요.


.. ‘왜 (내가 만든) 이 케이크에 대해 말하지 못했을까? … 그 애 (엄마가 만든) 케이크가 더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만들어 준 케이크를 먹는 평범한 어린애가 더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짠맛이 섞인 케이크를 먹으면서 ‘엄마, 빨리 와’라고 중얼거렸다’ ..  (16∼18쪽)


 어릴 적 일을 되새기면 학교에서 밥하기를 가르치기 앞서, 누구나 집에서 밥하기를 배웠습니다. 밥하기를 배운 다음에는 어머니 일을 거든다며 밥하기를 손수 해 보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밥물을 안치고 끓이지는 못하고, 조리로 돌 고르기를 여느 때에 꾸준하게 하고 나서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밥을 끓였습니다. 우리 집은 압력밥솥을 썼는데, 압력밥솥 추가 치치치 소리를 내며 춤을 추는 내내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다렸고, 다 되어 뜸을 들이고 나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 때 느낌이란!

 그때 학교에서 선생님이 ‘밥할 줄 모르는 사람?’ 하고 물어 보았다고 떠오르는데, 이렇게 물을 때 손을 든 아이는 두엇쯤?

 요즈음 아이들도 밥하기를 어느 만큼은 할 수 있지 않으랴 싶기도 합니다. 전기밥솥은 단추만 누르면 되거든요. 그렇지만 밥물을 맞출 줄 모르는 아이도 많고, 고작 단추 한 번 누르면 되는 밥하기조차 못하는 아이도 많을지 모릅니다. 세탁기도 단추 하나면 끝이지만 단추 한 번 못 누르는 사람이 제법 되거든요.
 





.. “저기, 왜냐고 해도, 일단은 설날 요리의 기본이고, 게다가 오빠도 엄청 좋아하는 거고.” “그래, 남편도 아이도 아버님도 어머님도 다들 좋아해. 근데 난 안 좋아하거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난 평소 때 식사도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가족들이 좋아할 만한 것만 만들고 있어.” “그거야 다들 그런.” “그런 거야?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난 애가 생기는 바람에 일찍 결혼해 그대로 주부가 되어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잖아. 대체 나란 인간은 뭔가란 생각이 들어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주체성 없는 여자라니.” ..  (24쪽)


 낮에 생협에 가서 인절미를 삽니다. 집에서 홀로 아이를 보고 있을 옆지기가 인절미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저도 배가 고파 몇 점 먹을 생각입니다. 옆지기는 인절미를 반참 삼아 함께 밥을 먹자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한 밥에다가 인절미를 반찬으로 삼아 늦은낮밥을 먹습니다. 옆지기는 인절미를 조금씩 끊어 잘근잘근 씹은 다음 아기한테 먹이고 당근 섞은 누런밥 또한 잘근잘근 씹어서 아기한테 먹입니다. 아기는 날름날름 잘 받아먹습니다. 저와 옆지기도 인절미 조금에다가 밥을 먹으니 배가 부릅니다.

 생협 인절미는 2600원이었는데, 생협 아닌 여느 떡집에서는 2000원쯤 받습니다. 적어도 600원은 비싸게 사먹는 셈이라 하겠습니다만, 허튼 쌀로 짓지 않은 떡이요, 농사지은 사람이며 다루어 파는 사람이며 고르게 도움이 되니까 600원을 더 썼다고 해서 아쉽지 않을 뿐더러 즐겁습니다. 게다가 세 식구가 2600원으로 한 끼니 배부를 수 있습니다.

 세 식구가 떡과 밥으로 늦은낮밥 먹는 모습을 사진으로 몇 장 남깁니다. 아기는 열 달째로 접어든다면서 어엿하게 걸상에 앉아 손바닥 장난을 치면서 밥술을 낼름낼름 받아먹는데, 아직은 이런 어린 날을 떠올릴 만큼은 아니겠지만, 나중에 커서 제 어릴 적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 새삼스럽다고 느낄 테지요. 밥자리 사진을 찍으면서 괜히 웃음이 납니다.


.. “이 집, 후르츠 샌드위치가 정말 맛있어. 여기저기 먹으러 다녀 본 내가 장담하는데, 아마 최고일 거야. 봐, 저 두 사람(나를 차고 딴 여자 만나는 놈하고 짝꿍)도 먹고 있잖아. 훗, 내가 알려준 가겐데.” “언니, 진정해.”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왔어, 언니. 일단 먹고.” “음, 먹기 전에, 후타바, 나, 진부한 아수라장 좀 벌이고 와도 될까?”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자기를 차고 다른 여자랑 재미있게 노는 녀석한테 아무 말 없이 따귀를 한 대 때리고 다시 아무 말 없이 제자리로 돌아와서 후르츠 샌드위치를 맛나게 먹는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생은 여태까지 후르츠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거나 맛있다고 느껴 보지 않았지만, 바로 이때부터 자기도 맛있게 먹고 싶어졌다는 생각을 한다.) ..  (75∼78쪽)


 그러고 보니, 제가 어릴 적에는 밥먹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일이 없습니다. 다른 동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삿날에도 사진을 찍지 않았고, 밥먹을 때에도 사진을 찍지 않았으며, 골목에서 놀 때에도 사진을 찍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찍는 때는 입학식과 졸업식과 ‘좋다는’ 데 놀러간 날입니다. 여느 자리 여느 때에는 사진을 찍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여느 자리 여느 때 이야기는 그날그날 잊어버린 삶이 아니었을까 싶고, 여느 우리 삶은 굳이 돌아볼 값어치가 없다고 여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된 분들로서는 아이와 함께 ‘좋다는’ 데로 데리고 가서 비싼 바깥밥을 사먹이면 ‘당신들로서도 뿌듯하고 아이들로서도 좋아하겠지’ 하고 생각할는지 모르는데, 또 이렇게 생각할 아이도 많을 텐데,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형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형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돈 잘 버는 작은아버지가 제 국민학교 3학년 때(1984년) ‘뷔페’에 데려간다며 오늘은 아침부터(또는 낮밥부터) 굶고 있으라 했지만, 형과 저는 배가 너무 고파 라면 세 봉지 끓여 형이 두 봉지 제가 한 봉지 먹고 국물에 밥까지 잔뜩 말아 먹었어요(‘뷔페’가 어떤 곳인지 이날 처음 알았고, ‘뷔페’라는 이름도 이날 처음 들었습니다. 그러니 라면국물에 밥까지 말아 배 띵띵 부르도록 먹었습니다). 그러고 저녁에 작은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오셨는데 ‘라면에다가 밥까지 말아먹었다’는 얘기를 듣고, ‘이런 촌놈들!’ 하면서 웃었습니다. ‘뷔페집에 가면 얼마나 맛있는 게 많은데 그런 걸 먹어!’ 했고, 뷔페집에 가서도 ‘고기 많이 먹으라!’고 했지만, 우리 눈에는 고기보다는 여느 때에는 구경할 수 없던 바나나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두 눈이 왕방울처럼 동그래져서 바나나만 한 접시 가득 채워 여러 번 먹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작은아버지는 또다시 혀를 끌끌 찼지만, 그런 혀끌끌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나나와 배와 능금만 다섯 접시쯤 먹었던가?

 생일 때라고 뭐 으리으리한 집을 바란 적이 없었고, 저는 크림 들어간 케익은 몸에 맞지 않아 먹지 못한데다가, 잡채 한 접시와 약밥 몇 점이 있으면 좋았습니다. 혀가 짧아 매운 반찬이나 김치는 잘 삭이지 못하면서도, 늘 먹는 밥이면 다 좋았습니다.
 





 (2) 밥먹이기와


 1995년에 부모님 집을 나와 신문사지국에 들어가 먹고살며 일한 뒤로는 언제나 밥을 했습니다. 딱히 밥을 잘하지 않았으면서도 밥당번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어리니 형들이 귀찮은 일을 시킨 셈일 텐데, 군대에 갔다 온 다음에는 호텔조리학과를 다니고 군 취사병으로 있었던 선배가 여러모로 가르쳐 주어 하나씩 익히면서 함께 밥당번을 맡았습니다. 신문사지국을 그만두고 출판사에 들어가 일하던 때에는 한 해 동안 함께 살던 형들을 먹이려고 밥을 했고, 형들이 장가가며 따로 나가면서는 혼자 먹을 밥을 혼자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집에 냉장고를 들였습니다만, 냉장고가 있다고 해 보아야 냉장고에 넣어둘 만한 먹을거리란 딱히 없었습니다. 그 뒤 첫 혼인을 하고 나서도 밥하기는 제가 맡은 일이었습니다. 혼인살이를 접고 충주 산골마을에서 일할 때에는 밥을 내처 얻어먹었는데, 오랜만에 남이 해 준 밥을 얻어먹어서 그런지 바늘방석에 앉아서 먹는다는 느낌이었고, 제가 먹고픈 대로 조금 모자라게 먹을 수 없었으니 속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먹여 주는 분으로서는 더 먹여 주고플는지 모르지만, 먹는 저로서는 덜 먹고 덜 쓰면서 몸을 다스리고 싶었습니다. 고향마을로 돌아와 새 혼인을 살아가는 그러께부터는 다시 제 밥을 제가 합니다. 얻어먹기가 끝나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를 노릇이었으며, 가깝든 멀든 누군가와 함께 먹을 밥을 마련하는 일은 날마다 새로우면서 즐겁습니다. 똑같은 밥차림이라 하여도 날마다 새로운 밥차림이요 언제나 따뜻하게 새로 하는 밥입니다. 똑같이 밥상을 받아도 날마다 고맙게 새로 먹는 밥이요, 이 고마움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 ‘엄마가 집을 나간 것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언니가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 그것은 2월의 쌀쌀한 아침. 난방도 켜지 않고 멍하게 앉아 있는 아빠 모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빠, 엄마는?” “어, 아아, 잠깐 어디 갔어?. 아마 곧 돌아오겠지.” “거짓말.” ‘어느새 옆에 와 있던 언니가 중얼거렸습니다. 아빠 손 밑에 있는 종이가 이혼신고서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도 이제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역시 제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역시 우린 글렀습니다. 엄마한테 버림받은 구제불능 우리들.’ “풉, 아하하하하하, 왠지 한심해. 기껏 잡아 온 모시조개가 전부 모래투성이라니. 우린 정말 바보야.” ..  (52∼53, 61∼63쪽)


 그렇다고 제가 밥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못 됩니다. 그저 저 먹을 만큼 할 뿐이요, 제 밥그릇과 옆지기하고 아기 밥그릇까지는 맡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힘이 들어 드러누워 꼼짝을 못하고 있으면 옆지기가 쌀을 불리고 밥을 합니다. 집에서 지짐이도 하고, 가끔 과자도 굽습니다. 생협에서 토막닭을 사서 집에서 몇 번 튀겨서 먹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먹을거리를 장만한다는 일은 내 배를 채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저잣거리 마실을 하며 하나둘 들여다보고 살피는 일이 바탕이 되고, 저잣거리 마실을 하는 동안 쌀이며 다른 먹을거리이며 어떻게 그곳까지 가고 나는 그곳에서 어떻게 장만하는가를 돌아보는 일이 됩니다. 돈 몇 푼 치르면 얼마든지 사다 먹을 수 있는 밥이 아닙니다. 돈이면 다 되는 밥차림이 아닙니다. 집에서 안 차리고 돈 주고 밖에서 사먹어도 그만인 삶은 아닙니다.

 먹는 즐거움만으로 꾸리는 삶은 아니되, 먹는 즐거움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내 삶은 부질없는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먹는 즐거움을 헤아리고 싶으니 밥하는 즐거움을 헤아리고 싶고, 밥하는 즐거움만큼 밥해 먹이는 즐거움을 헤아리고 싶으며, 내가 다루는 먹을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길러서 내 손까지 오는가를 헤아리고 싶습니다.


.. “난 말이죠, 옛날에 이거에 푹 빠져서 마구 먹어댔던 적이 있는데, 엄청나게 살이 쪄서 이러다간 남편이 바람 피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우리 그인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죠 … 미안해요. 사실은 괜찮아요. 좀더 먹는다고 해도. 제대로 각오가 돼 있다면.” ..  (127∼129쪽)
 





 책을 한 권 사서 읽을 때에도 늘 그렇거든요. 저하고 옆지기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책이나 ‘새책방에서 잘 팔리는’ 책에는 눈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을 만한’ 책이냐 아니냐를 무엇보다 따집니다. ‘우리가 읽기 힘들어도 우리 아이나 우리 도서관에 찾아올 사람한테 도움이 될’ 책이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우리 모자란 살림으로도 기쁘게 사 주어 글쓴이와 출판사한테 도움되도록 할’ 책이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이런 책읽음새를 고스란히 밥하기와 밥먹기에 맞춥니다. 빨래하기와 치우기에 맞춥니다. 사람을 만나거나 사귈 때에도 똑같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비손을 할 때이든, 뒷간에서 똥을 눌 때에든, 아기를 씻길 때에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즐거웁고자 읽는 책이지, 우리 스스로 더 많은 지식을 얻고자 읽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즐거웁고자 차려서 먹는 밥이지, 우리 스스로 배만 부르면 그만으로 먹는 밥이 아닙니다.


.. “얘, 이게 뭐니?” “받았어.” “누구한테?” “스가이네 엄마.” “스가이? 친구니?” ‘아니야. 오늘 잠깐 얘기만 한 거야. 왕따당하는 애랑 엮이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하잖아. 어쩔 수 없으니까. 잊자. 잊어버리자.’ “자.” “아.” “먹을 거지? 네가 받아온 어야. 마멀레이드가 아주 맛있네.” (덥석. 오물오물오물) ‘쓰다. 이게 이런 맛이었나? 이게 이렇게 쓴맛이었나? 이렇게.’ (이튿날 학교 가는 길에서) “안녕, 스가이.” ‘우와, 하야시 패가 봤나? 노려보고 있을까? 우와, 우와, 너무 무서워. 하지만 난 그 마멀레이드를 맛있게 먹고 싶은걸. 제대로 맛있게 먹고 싶어.’ ..  (144∼148쪽)


 제 어린 날, 어머니가 늘 우리를 불러 밥상 차리기를 거들도록 하고, 수저를 놓게 하며, 반찬그릇을 놓고 치우게 했으며, 설거지라든지 여러 가지를 돕도록 한 일이 더없이 고맙다고 느낍니다. 귀찮은 심부름이 아니라, 어머니한테 얻어먹는, 또는 받아먹는 밥그릇 하나가 고마운 만큼, 얼마든지 자잘한 심부름을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찌개를 끓이시는데 뭐 하나 빠져 있다 하면 얼른 저잣거리나 가게로 달려가 후다닥 사 왔고, 옆에서 물끄러미 구경하는 일도 즐거웠습니다. 어머니가 저한테 칼자루를 쥐어 준 적이 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으나, 어설픕니다만 제 칼질은 어머니 곁에서 빤히 지켜보던 칼질이요, 밥차림이요, 반찬 손질이요, 설거지요, 뒷마무리입니다.


 (3) 만화책 《여자의 식탁》 다섯째 이야기


 만화책 《여자의 식탁》 다섯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앞선 네 가지 이야기 못지않게 다섯째 이야기도 뭉클뭉클합니다. 아니, 앞선 네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고 느끼면서 뭉클뭉클합니다. 어쩌면, 1권보다 2권이, 2권보다 3권이, 3권보다 4권이, 4권보다 5권이 한결 무르익은 그림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1권부터 5권까지 한결같이 애틋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조금 어리숙하면 어리숙한 대로 좋고, 아주 빈틈이 없으면 빈틈이 없는 대로 좋습니다.

 먹을거리 하나에 얽힌, 또는 먹을거리 하나마다 깃든 우리네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저 수수하게 풀어놓는 《여자의 식탁》은, 세상에 이름나지 않고 둘레에서 따로 알아주지 않는 수수한 사람들 삶자락마다 웃음과 눈물이 얼마나 넘치도록 많은가를 보여줍니다. 《서양골동 양과자점》 같은 작품은 이런 작품대로 아름답고 재미있고 뜻이 있을 텐데, 꼭 이처럼 뭔가 돋보이거나 남다르거나 톡톡 튀거나 멋스러워 보이지 않는 여느 먹을거리 하나라 하여도 ‘다 다르면서 모두 애틋하면서 언제나 가슴이 찡한 삶’임을 보여준다고 할까요.
 



.. “응? 웬일이냐? 카나에. 이런 곳에.” “아, 아뇨, 그냥.” “조심해라. 얼마 전 이 부근에 치한이 나왔다더라.” “아, 그래요?” “훗, 하긴. 너라면 걱정할 거 없냐?” “아, 아니, 농담이야, 농담.” “핫, 아뇨,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웃지 마. 웃지 말아 줘. 제발. 웃지 마.’ “풉.” ..  (174∼176쪽)


 1권부터 4권까지 보는 동안, 그리고 이번에 나온 5권을 보는 내내, 나아가 앞으로 나올 6권부터 꾸준히 새로 그릴 작품까지, 그린이 시무라 시호코 님은 ‘아무것도 아닌 먹을거리 하나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 우리 이야기’라는 말을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여느 사람들 흔하고 너절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 사랑스럽고 눈물겹고 웃음짓는 재미난 이야기’라는 말을 건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린이가 여자요, 나오는이도 여자이니, 좀더 찬찬히 이 만화를 말하자면 “여자가 차린 밥상”이 아닌 “여자가 하루하루 꾸려 나가는 삶”이라 할 만합니다.

 열네 살 처남한테 ‘나중에 여자친구를 사귈 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한번 보라’고 건네 보기도 했는데, 온통 남자 목소리가 판을 치고 영화며 연속극이며 책이며 강의며 학문이며 정치며 오로지 남자 목소리가 넘실거리는 이 땅에서 우리 마음을 고즈넉하게 다스리면서 허물없이 어깨동무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돌아보고 싶다면, 만화책 《여자의 식탁》을 곰곰이 두어 번쯤 읽어 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섹스는 상대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난 날 위해서 했다. 욕망을 느껴 주길 바랐다.’ ..  (182∼184쪽)


 책을 한 번 덮고, 또 한 번 본 다음 덮고, 다시금 보고 나서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둘레에도 “또다른 ‘여자의 식탁’으로 빚어낼 이야기는 늘 넘치고 있지만, ‘여자의 식탁’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눈길이 없고 찾아보려는 손길이 없으며 귀기울여 들으려는 귓길이 없는 가운데, 머나먼 딴 나라로 넋과 얼을 팔아치우고 있다”고. 앞으로 어느 누가 되든, “내 어머니 밥상”과 “내 동생 밥상”과 “우리 아버지 밥상”과 “우리 할머니 밥상”과 “내 남편 밥상”과 “우리 오빠 밥상” 같은 이야기를 솔솔 풀어낼 수 있기를 꿈꾸고 싶다고. (4342.6.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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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퐁 Pong Pong 3 - 완결
오자와 마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착한 사람, 착한 만화, 착한 웃음과 눈물
 [살가운 만화 47] 오자와 마리, 《PONG PONG》



- 책이름 : PONG PONG (1∼3)
- 글ㆍ그림 : 오자와 마리
- 옮긴이 : 서수진
- 펴낸곳 : 대원씨아이 (2008.9.15.∼2009.4.15.)
- 책값 : 한 권에 4200원씩



 (1) 착한 만화 즐기기


 만화책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밤이 새는 줄 모르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합니다. 서로 좋아하는 만화가 비슷하거나 겹치면 여러 날 지치지 않고 이야기나무를 심기도 합니다. 그런데 둘레에 만화 좋아하는 분들이 많기는 하여도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분은 생각 밖으로 그리 안 많고, 순정만화를 좋아한다고 하여도 제가 즐기는 순정만화와 그분들이 좋아하는 순정만화가 어느 만큼 벌어지기도 합니다.

 나라안 만화로는 김진, 원수연, 박연, 황미나, 김혜린, 강경옥 들을 즐겨 보았습니다. 나라밖이라기보다 일본 만화로는 오사무 야마모토, 준코 카루베, 니노미야 토모코, 미츠하시 치카코, 오자와 마리 들을 즐겨 보고요. 이 가운데 미츠하시 치카코 님 작품은 나라안에 제대로 옮겨지지 않아 거의 헌책방에서 일본판으로 만나 책장을 넘기는데, 일본글을 읽을 줄 몰라도 그림결로도 따뜻함과 수수함을 넉넉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글은 그 나라 글을 따로 익히거나 번역책을 읽어야 하지만, 사진과 그림과 만화는 그 나라 글을 모르고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함께하면서 즐길 수 있다고 할까요.


..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뜻하고, 완전 데이트하기 딱 좋네. 이런 날, 이런 냄새 나는 사내놈들 틈바구니에서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왜 하필 하고 많은 학교 중에 이런 남학교에 왔나 몰라. 이런 산속에선 땡땡이쳐 봐야 할 일이라곤 나물 캐기밖에 없을 텐데.’ ..  (1권 10쪽)


 다만, 순정만화를 그리며 나라안에서 손꼽히는 분들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즐기지는 않습니다. 저한테는 저대로 좋아하는 만화가 있기 때문인데, 어떻게 보면 딱히 ‘순정’만화를 즐긴다기보다, ‘착한’ 만화를 즐겼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란마 1/2》이나 《도레미하우스》 같은 만화를 보면서도 이야기가 퍽 착하다고 느끼면서 좋아했는데(어찌 이 만화들이 ‘착하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만화란 누구나 저 보고픈 대로 보고 느끼고픈 대로 느끼기 나름이라는 말씀을 올립니다), 저로서는 착하지 않은 만화에는 그리 눈길이 끌리지 않습니다.

 《로버트 크럼의 아메리카》 같은 작품은 퍽 눈여겨볼 만하다고 느끼면서 즐겨 보기는 했지만, 좀 뾰족뾰족하다고 해야 할까, 어지럽다고 해야 할까,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얼마나 뒤틀렸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니 그 느낌 그대로 만화를 그릴밖에 없었을 텐데, 한 번 덮고 난 뒤로는 다시 들추지 않습니다. 《따끈따끈 베이커리》는 얼핏 느끼기에는 착할 듯 보였지만, 정작 권수를 더해 가면서 짓궂고 억지스러운 대목이 많아 그리 내키지 않았습니다. 이와 견준다면 《딸기 100%》가 한결 나았다고 보는데, 야자와 아이 만화 가운데 《NANA》가 퍽 많이 사랑받고 있지만, 저한테는 《NANA》나 《파라다이스 키스》보다 《내 남자친구 이야기》와 《천사가 아니야》가 훨씬 사랑스럽고 즐거웠습니다. 






.. “미안해. 오오시마. 내가 가서 설명할게. 단장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지금 바로.” “아냐, 됐어.” “그치만, 그동안 팀을 꾸리고 열심히 애쓴 건 넌데.” “우리 모두지. 모두가 같이 노력한 거잖아.” ‘아아. 바로 이 미소야.’ ..  (1권 41쪽)


 생채기를 남기는 줄거리를 다루기 때문에 ‘착하지 않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두 갈래만이 아니기 때문이요, 세상을 둘로 가른다 할 때에도 ‘까망과 하양’으로만 가를 수 있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흥미 님이 그린 《디스》나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우리 집》은 ‘그림감을 무엇으로 잡든 그림결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서 따스함과 수수함은 사뭇 달라짐을 보여줍니다. 송채성 님이 그린 《취중진담》도 그렇습니다. 《쉘 위 댄스?》나 《미스터 레인보우》도 그렇고요. 가난, 아픔, 외로움, 성 정체성, 푸대접, …… 세상을 가르는 수많은 잣대를 만화로 다루든 사진으로 다루든 글로 다루든, 우리가 받아들여 삭여내기 나름입니다.

 그예 뾰족뾰족하게 마주할 수 있으나, 거울처럼 튕겨낼 수 있습니다. 그지없이 넉넉하게 품에 안을 수 있으며, 스스럼없이 껴안을 수 있습니다. 모르는 척 흘려보낼 수 있는 가운데, 깨닫지 못하며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맨발의 겐》처럼 아주 투박하면서도 거칠게 ‘전쟁과 평화’를 담아낼 수 있지만, 《머나먼 갑자원》이나 《도토리의 집》처럼 참으로 부드러우면서 살가이 ‘전쟁과 평화’란 무엇인가를 넌지시 느끼도록 할 수 있어요.


.. “후유코 누나는 했어요?” “어?” “노력요. 토고 선배한테 왜 좋아한다고 말 안 해요.” “그야, 예쁜 앨 좋아하니까. 그리고 약해져 있을 때를 이용하는 건 솔직히 안 내켜. 대학 준비로 바쁘기도 했고.” “그건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억지로 고백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아서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포기하고. 그런 건, 무지 꼴사나워요.” ..  (1권 71∼72쪽)


 《게임방 소녀와 어머니》 같은 작품을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우리 깜냥껏 재미난 틀을 마련한다면 몹시 애틋하면서 맑은 웃음을 티없는 눈물과 함께 선물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린이가 3권으로 너무 짧게 끝내 버린 대목이 아쉽지만, 한국 만화밭으로는 3권까지 그린 대목이야말로 놀랍다 할 수 있어요. 권수가 늘어날수록 재미가 떨어져 이제는 더 안 보지만, 《알바고양이 유키뽕》 같은 일본 만화는 참 놀라웠습니다. 나라안에도 《납골당 모녀》를 그린 강현준 님이 《cat》을 그렸는데, 집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이 꽤 많으면서도 이렇게 재미와 웃음이 톡톡 묻어나게끔 살뜰히 그리는 만화쟁이는 너무 없습니다. 바라보는 눈이 굳었다고 할까요, 느끼는 가슴이 닫혔다고 할까요.

 그렇다 하여 ‘착한’ 만화를 그리는 분들은 바라보는 눈이 말랑말랑하고, 느끼는 가슴이 열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착하게 그릴 줄만 알고 알맹이가 없는 만화도 많으니까요. 그린이 스스로 우리한테 할 말이 있는 가운데 착하게 엮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흐뭇하면서 즐거운 만화, 두 번 세 번 거듭 들여다보며 즐기는 만화가 된다고 봅니다.

 《빈곤자매 이야기》라든지 《빈민의 식탁》 같은 작품이 이런 얼거리에 걸맞는 ‘착한’ 만화입니다. 《여자의 식탁》도 돋보이는 착한 만화이며, 같은 이름으로 된 책이 많은데, 이와시게 타카시 님 《흐르는 강물처럼》도 눈여겨볼 작품입니다. 《내 마음속의 자전거》 또한 따뜻함과 넉넉함과 살가운 들을 듬뿍 담으며 우리한테 ‘야무진 알맹이에 책장 넘기는 재미’를 한껏 북돋우는 작품입니다. 자전거 만화를 좋아하는 분들은 《내 마음속의 자전거》와 함께 《스피드 도둑》도 좋아하지만, 저는 《스피드 도둑》은 그리 내키지 않아요. 지나치게 ‘싸움을 붙이’고, ‘서로를 너무 미워한’다는 느낌이 짙으며, ‘더 세고 튼튼하고 커야’지 좋은 듯하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 ‘역시, 오타쿠틱해. 그래도 좋아. 그냥 좋아. 이유 없이 좋아.’ ..  (1권 83쪽)


 애장판으로 다시 나와도 널리 사랑받는 《아기와 나》 같은 작품 또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착한’ 만화입니다. 《최종병기그녀》를 그린 다카하시 신 님 작품 《좋은 사람》은 책이름부터 ‘착한’ 이야기를 담은 만화라고 보여주는데, 처음부터 ‘할 말’과 ‘보여줄 이야기’가 뻔히 드러났어도 기쁘게 읽었습니다.

 우라사와 나오키 님 《야와라》도 얼핏설핏 느끼기로는 ‘착한’ 쪽으로 흐를 듯했지만, 이 또한 《스피드 도둑》처럼 ‘더 크고 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플루토》를 볼 때에도 기쁨이나 반가움보다다는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느낍니다(틀림없이 《플루토》를 아주 좋아할 분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또한 저는 그리 좋아하지 않고, 잘 그리지도 못했다고 느낍니다). ‘아톰’에서 밑생각을 따오는 대목이야 그린이 자유입니다만, 테즈카 오사무 만화에서 ‘아톰’은 그냥 그런 ‘로봇’이 아니에요. 테즈카 오사무 만화에서 ‘아톰’을 비롯한 수많은 주인공에 어떤 마음과 넋이 담겼는가를 읽어내어야만, 또 느껴야만, 또 내 삶으로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아톰을 따왔다’고 스스럼없이 밝힐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붓다》며 《불새》며 《뱀파이어》며 《노만》이며 《미크로이드 S》며 《아야코》며 《넘버 7》이며 《블랙잭》이며, 테즈카 오사무 님 만화에 남달리 스민 사랑과 믿음을 읽어내지 않고서 섣불리 ‘아톰’을 불러오는 일은, 우라사와 나오키 님은 당신 이름만으로도 사랑을 두루 받고 있지만, 스스로 어줍잖은 이름값을 좀더 높이려는 얕은 손길이라고 느낄 뿐입니다.


.. “상대팀 치어리더는 우리와 달리 전부 여학생들로만 구성되어 있대. 우리 팀이 이기지 못하는 건 아마 그것뿐일 거야! 하지만 여장을 하면 틀림없이 그것도 문제없어! 적어도 관객을 웃기는 건 우릴 테니까!” ..  (1권 116쪽)


 《아기공룡 둘리》뿐 아니라 《아리아리 동동》이라든지 《일곱 개의 숟가락》이라든지 《소금자 블루스》라든지 《볼라볼라》라든지 《꼬마 인디언 레미요》라든지 《쩔그렁쩔그렁 요요》라든지 《미스터 점보》라든지 《오달자의 봄》이라든지 《자투리반의 덧니들》이라든지 《홍실이》라든지 《1남3녀 막순이》라든지 《날자 고도리》 같은 작품에 한결같이 흐르는 구수한 사랑과 뜨거운 눈물이란, 내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을 느끼고 네 가슴속에 살아숨쉬는 하느님을 만나는 반가움입니다. 이러한 반가움이 없이 그리는 만화라면 겉보기로는 착해 보이는 만화이지만, 속살은 하나도 착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백성민 님 만화를 날카롭고 무섭다고도 하던데, 《장산곶매》와 《삐리》와 《장길산》과 《백범일지》 들에 흐르는 붓질은 더없이 반갑고 기쁜 봄비와 같습니다. 《노을》이나 《부자의 그림일기》를 비롯한 ‘한국현대문학 단편선’ 같은 오세영 님 만화는 얼마나 따뜻하며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착한’ 만화였던가요. 우리 삶터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잡아채는 손길만이 아니라, 우리 삶터 구석구석을 골고루 따스하게 보듬는 손길이기 때문에 이 같은 만화를 그릴 수 있습니다. 지난날 이희재 님이 《간판스타》와 《제비전》과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그리던 손길도 이렇게 따뜻했고, 이상무 님이 그린 《포장마차》도 이와 같이 부드러웠습니다.


.. “남자를 좋아해?” “아니. 그건 아냐. 그래서 밤새 고민했는데, 아마 너니까 좋아하는 걸 거야. 넌?” ..  (1권 192쪽)


 이런저런 까닭 때문에, 저로서는 요즈음 한국 만화를 그리 즐기지 못합니다. 그나마 《내 어머니 이야기》 같은 작품이 나오고, 《옥상에서 보는 풍경》 같은 작품도 나오며, 《꽃》과 《노근리 이야기》 같은 작품도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말 한 마디 넣지 않아도 가없는 사랑과 기쁨을 ‘착하게’ 그려낸 에리히 오저 님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지, 아니 한국땅에 걸맞게 그려낼 누군가가 없을지 궁금합니다. 《아즈망가 대왕》이나 《요츠바랑!》처럼 꾸밈없이 우리 삶자락을 담아낼 만화를 아끼고 붙잡을 붓질은 언제쯤 이 나라에서 다시 꽃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길창덕 님처럼 단출한 붓질로, 윤승운 님처럼 시냇물 같은 붓질로, 또 김동화 님처럼 꽃잎사귀 같은 붓질로 착한 마음을 나누고파 하는 만화는 언제쯤 우리 삶터에서 제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2) ‘오자와 마리’가 바라보는 삶터


 착한 만화를 떠올리며 더듬다 보니 새삼 송채성 님 만화가 생각나고 그립습니다. 둘레에 아는 분들한테 가끔 송채성 님 작품을 선물해 주곤 하는데, 모두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고 “순정만화잖아?” 하면서 “난 순정만화 안 보는 줄 알면서 왜 이런 책을 읽으라 해?” 하면서 싫어했지만, 막상 만화를 다 보고 나서는 “이런 순정만화도 있구나.” 하면서 “다른 작품 더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송채성 님은 이승사람이 아닙니다. 지난 2004년 3월에 저승사람이 되었습니다. 벌써 다섯 해가 지났으니 세월 참 빠르구나 싶은데, 착한 만화를 떠올릴 때마다, 또 《퐁퐁(PONG PONG)》 같은 만화를 만날 때면, 어김없이 송채성 님 만화가 그립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송채성 님이 더 오래오래 살면서 당신 만화밭을 일구었다면, 당신 깜냥껏 《취중진담》을 그리고 《쉘 위 댄스?》처럼 두고두고 명작이라 할 만한 작품을 또 하나 낳을 수 있었을 텐데 싶습니다. 일본에서 오자와 마리 님이 《퐁퐁》을 그린다면, 한국에서 송채성 님이 ‘뭐뭐’를 그린다고 나란히 놓을 수 있었을 테고요.


.. “아, 새가 오네요?” “예. 전에 여기서 가게를 했던 사람이 매일 쌀이랑 빵부스러기를 창가에 올려놨던 모양이에요. 참새랑 개똥지빠귀가 지금도 잊지 않고 찾아오죠. 그래서 저도 예전 주인처럼 빵부스러기를 주고 있어요.” “멋지네요. 잘 먹었습니다. 커피, 정말 맛있었어요.” “또 오세요.” ‘엄마의 뜻밖의 일면을 알게 됐다. 재즈바에 있는 자그만 창문.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바구니에 있는 창문이라 낮에도 어두침침하고 별 의미 없는 창이라고 생각했는데, 의미는 있었구나. 엄마도 남몰래 작은 정원같이 안정되고 조용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을 거야.’ ..  (2권 28∼30쪽)


 만화 《퐁퐁》은 ‘남자로 태어났으나 성 정체성은 여자’인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이런 이야기는 꽤 많다 할 수 있는데, 《방랑소년》도 같은 그림감을 다룹니다. 아쉽다면, 《방랑소년》은 권수를 거듭할수록 어영부영 실마리가 흐려지면서 재미가 떨어집니다.

 아직 우리 세상이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이 좀더 오래도록 길게 펼쳐지지 못하나 싶곤 합니다. 막힌 세상에서는 막히지 않은 꿈을 꾸기도 하지만, 막힌 틀에 매인 채 뾰족뾰족이로 에돌고 마는 사람이 꽤 많거든요. 고달픈 삶이기에 으레 고달픔을 얼굴 가득 담아낸 채 살잖아요. 고달픈 삶이기에 더더욱 홀가분함과 기쁨을 온몸 가득 펼치면서 살지 못하고 말입니다.


.. “오늘 시간 더 있어요?” “있어. 뭐 하고 싶은데?” “저기.” “말로 해. 눈앞에 있으니까.” “그, 그럼, 거, 걸으면서 얘기하기.” “나야 좋지만, 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냐?” “예?” “얼굴이 빨개.” “아, 아픈 건 아니에요. 그건 아마, 아마.” “라면을 먹었기 때문에?” “예? 아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건 제가 선배를 좋아히기 때문이에요.” ..  (2권 77∼80쪽)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진 《퐁퐁》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낱권으로 하나하나 넘어갈 때마다 주인공 ‘라이조’는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듯, 한 계단 두 계단 마음이 자라납니다. 조금씩 내 몸과 마음을 또렷하게 깨닫고, 차근차근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다짐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채 살아갈는지, 내 꿈을 접은 채 세상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는지, 겉과 속을 하나로 모둔 채 살아갈는지, 세상 이끌림이 아니라 내 꿈대로 살아갈는지 찾아나섭니다.

 그러면서 부딪힙니다. 맨땅에 머리를 박듯, 달걀이 아닌 맨주먹으로 바위를 치듯 박고 넘어지고 까지고 긁힙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딪히면서, 다치면서, 아파하면서 ‘어린이’에서 ‘푸름이’를 거쳐 ‘어른’ 한 사람이 돼요.

 나를 속이지 않으며, 남을 속이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면서 남을 사랑하는 길을 찾습니다. 나를 믿으면서 남을 믿는 마음이 무엇인가 느끼고, 내 몸과 마음이 하나되도록 하면서 내 삶터에서 나 스스로 아름답고 내 이웃과 함께 모두가 아름다울 자리가 어떠한가를 배웁니다.


.. “난 이렇게 미키랑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걷는 게 좋았어.” “맞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손을 잡으면 항상 꼬옥 마주 잡아 왔었지?” “응, 이런 식으로.” “그래 맞아. 나도 그게 좋았어.” “그건 내가, 어릴 때부터, 항상 길의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기분이었기 때문일 거야. 미키랑 있으면 길 가운데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그래서 이 손을 절대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근데 그건 역시 날 속이는 짓이었어. 마음 한구석에선,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미안해.” “하지만, 너한테 마음이 설렜던 거나, 네 덕분에 실연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거, 그리고 널 좋아했던 건, 결코, 거짓이 아니었어.” “응, 알아.” ..  (2권 155∼157쪽)


 《퐁퐁》 3권 마지막을 보면, 주인공 ‘라이조’보다 훨씬 늦게 제 삶과 모습을 느끼고 찾은 ‘토고’ 선배가 속으로 한 마디를 읊습니다. “다시 한 번 너를 만나 다행이었다.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라고.

 착한 만화 《퐁퐁》은 바로, 그린이 오자와 마리 님이 읽는이 우리 모두한테 마음을 건네고파 내놓은 작품입니다. 그린이가 건네고픈 마음이 사랑이었을는지는, 또는 믿음이었을는지는, 또는 다른 마음이었을는지는, 읽는이인 우리 스스로 헤아리고 곱씹고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3)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며


 저는 만화책을 볼 때면, 되도록 잠자리에서 홀로 조용히 보고자 합니다. 또는, 하루일을 마치고 보리술 한 병을 구멍가게에서 사다 마실 때 혼자서 고즈넉하게 보고자 합니다.

 웃음이 터져나올 때 누구 눈치를 안 보고 거리낌없이 웃고 싶거든요. 울음이 솟아날 때 누구 눈치 아랑곳 않고 스스럼없이 울고 싶거든요.


.. “그래서, 답은 나왔어요?” “아니.” “선배는, 뭐든 흑백으로 나눠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군요?” “맞아. 옛날부터 그랬어. 답이 안 나오면 잠을 못 자는 편이었지.” “그럼 역시, 제 존재 자체가 선배한테는 이해되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전 평생 회색이었으니까.” ..  (3권 18∼19쪽)


 실컷 웃게 하고 마음껏 울게 하는 만화는 책상맡에 한 해쯤 올려놓고는 하는데, 이렇게 올려놓으며 날마다 겉그림을 바라보고 때로는 선 채로 한 번 다시 넘기고 나서는 후유 하고 한숨을 쉽니다. 이 만화를 그린 분이 앞으로 어떤 새 작품을 내놓을지 기다려지면서 한숨이 나오고, 앞으로 이분을 비롯해 다른 분들이 다른 새 작품을 내놓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이 나옵니다.


.. “탈의실에 유니폼 준비해 놨을 거야.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올까? 남성용이든 여성용이든 입고 싶은 걸로 입어.” “예. 예?” “고등학교 때 치어리더복 입었었지? 신문에서 봤어.” “아, 그건 그냥 연출로.” “이쪽이야. 이게 여자 거고, 그 옆이 남자 거.” “농담 아니었어요?” “참고로 이건(내가 입은 옷은) 남자 거. 여자 걸 입을 때도 있지만, 거의 이걸 입어. 난 트랜스젠더거든.” “…….” “점장님은 개인을 존중해 주시지.” “여긴, 회색이라도 괜찮군요.” “회색?” “세상은 흑과 백만 인정해 주는 줄 알았어요.” “기왕 중간색을 지칭할 거면 흑과 백 사이보단 홍과 백 사이가 예쁘지 않겠어?” “홍과 백?” “장밋빛깔. 바로 그 입술색 말야.” ..  (3권 28∼30쪽)


 보고 또 보고 다시 보면서 지난날 느낀 벅참과 설렘을 새삼스레 받아들이는 일은 즐겁습니다. 아마 언제까지나 이 마음이 고이 이어갈 수 있다면 참말 기쁠 테지요.

 그런데 오늘 하루 제 마음에 스며든 좋은 ‘착한’ 만화 하나는 갑작스레 뚝 하고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 하나가 나오기까지 그린이는 그동안 숱하게 습작을 했습니다. 다른 작품도 꾸준히 그리는 가운데 비로소 ‘즐겁고 반갑고 기쁘고 좋은 착한’ 만화 하나가 제 품에 안깁니다.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를 그린 카루베 준코 님이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를 그린 다음, 《푸른 하늘 클리닉》을 그려내듯, 그리고 또다른 작품을 빚어내려고 애쓰고 있듯,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과 《니코니코 일기》를 그린 오자와 마리 님은 《퐁퐁》을 마무리지으며 《민들레 솜털》을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을 다시금 끝내면 또다른 작품으로 우리한테 살그머니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고인 물이 아니니까요. 어느 누구든 흐르는 강물 같은 사람이요, 흐르는 사랑을 널리 나누어 주면서 새로운 사랑을 새삼스레 가슴에 담으면서 기다리니까요.

 착하며 아름다운 만화 《퐁퐁》을 더 오래오래 책상맡에 놓으며 거듭거듭 즐길 수 있습니다만, 또다른 착하며 아름다운 만화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책꽂이에 보기 좋게 꽂아 놓은 다음, 저부터 스스로 새로운 만화길을 찾도록 기지개를 켜야겠습니다. (4342.5.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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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2 - 다시 페르세폴리스로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최주현 옮김 / 새만화책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바보 어른’이 아닌 ‘숨쉬는 참사람’으로 거듭나다
 [살가운 만화 45] 마르잔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2》


- 책이름 : 페르세폴리스 2
- 그린이 : 마르잔 사트라피
- 옮긴이 : 최주현
- 펴낸곳 : 새만화책 (2008.4.15.)
- 책값 : 12000원



 (1) 한국을 못 보는 눈은 이란을 못 본다


 만화책 《페르세폴리스》 1권은 2005년 10월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2권은 세 해가 거의 지난 2008년 4월에 나옵니다. 2005년 10월에 1권이 나온 뒤로 곧 2권이 나온다고 했으나 그 ‘곧’은 한 달 두 달 늦어지고 미루어지고 하다가 한 해 두 해가 되었고, 비로소 2008년 4월에 마무리가 됩니다.

 이토록 늦어진다면 출판사는 살림이 괜찮은가 걱정이 되고, 자칫 2권이 빛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모두 사라지지 않느냐 근심이 되었습니다. 한두 권짜리가 아닌 열 권 스무 권 넘는 긴 만화가 때때로 ‘번역을 그만’하면서 더 안 나오는 일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다시 나오기는 하지만, 《피아노의 숲》 같은 만화도 꽤 오랫동안 뒷권이 안 나와서 ‘설마 그 어중간한 가운데 이야기가 끝나 버렸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 “너희들 그거 알아? 이란에는 크리스마스가 없어…….” “스키 타러 간다고? 좋겠다!” “별로, 그저 그렇지 뭐.” “이란의 새해는 3월 21일이고, 그 ……” “나는 앙시에 갈 건데, 알프스랑 별로 안 멀잖아. 우리 만나도 되겠다.” ..  (18쪽)


 만화책 《페르세폴리스》는 한국 만화밭에 퍽 낯설게 느껴질 만한 책입니다. 이야기도, 만화결도, 그린이 고향나라도 모두 낯설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배울 수 있는 ‘이란’이라는 나라는 고작 ‘석유가 많이 나는 중동에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들은 이란사람이 이란말을 쓰는지 무슨 말을 쓰는지 배우지 않습니다. 나라안에는 ‘이란말’을 가르치는 대학교가 꼭 한 곳 있습니다만, 이 이란말을 가르치는 대학교에서조차 ‘이란이라는 나라에 이란말이 따로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한 학년에 고작 서른 학생뿐이고, 이 가운데 몇몇은 얼마 다니지 않고 그만두니, 몇 천에 이르는 ‘그 학교 대학생’이라 해서 이란말을 가르치는 학과를 눈여겨보거나 곰곰이 들여다볼 일은 없어요. 또한, 이란말을 배웠다고 하여 이란 대사관에서 일할 수 있느냐 하면, 아니면 이란 문학을 우리 말로 옮기는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아니올시다’이곤 합니다.

 저는 네덜란드말이라는 바깥말을 한동안 배웠는데, 이 학과에서 배울 때까지, ‘안네 프랑크’가 네덜란드사람인 줄 몰랐고, 일기를 네덜란드말로 쓴 줄도 몰랐습니다. 이제는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네덜란드말에서 우리 말로 옮긴 딱 하나 있는 번역책’은, 이 학과 교수인 김영중 님이 옮긴 판입니다. 다른 번역책은 ‘독일 번역판을 한국말로 옮기’거나, ‘일본 번역판을 한국말로 옮긴’ 책일 뿐입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도 제법 많이 읽었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작품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이분은 스웨덴사람이라 모든 문학을 스웨덴말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분 작품을 우리 말로 옮긴 분들은 ‘독일 번역책을 우리 말로 옮기’거나 ‘일본 번역판을 우리 말로 옮기기만’ 했지, 제대로 된 ‘스웨덴판 번역책’은 아주 드뭅니다(저는 딱 한 권 가지고 있습니다. 1982년에 종로서적에서 옮긴 《말괄량이 삐삐》는 판권에 스웨덴책에서 곧바로 옮겼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 루시아의 가족은 이란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매일, 나를 알고 싶어하는 삼촌이나 고모네에 초대되었다. 나의 독일어 실력은 아주 기본적이었고, 그들의 독일어는 독특했다. 불어권의 스위스에서 4년을 보낸 한 사촌이 내 통역자 역할을 자청하며 즐거워했다. 우린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학교 친구들이 좋아하는 전쟁이나 죽음과 같은 주제에 대해선 한 번도 다루지 않았다 ..  (22쪽)


 우리는 이란이라는 나라를 거의 모릅니다. 그리고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무엇 하느냐고 여깁니다.

 우리는 네덜란드라는 나라 또한 거의 모릅니다. 굳이 알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네덜란드 지식은 거의 겉핥기일 뿐, 제대로 된 네덜란드 지식을 아는 사람이란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국가대표 축구팀을 이끈 감독 몇 사람이 네덜란드사람이었으나 이이들 이름을 ‘네덜란드말’로 적거나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 ‘영어 투로 읽고 말했’습니다. 이분들 스스로 네덜란드말이 아닌 영어만 쓰기도 했지만, 우리 나라에 버젓이 네덜란드말을 가르치는 대학교가 있음에도, 그 학교에서는 통번역 학생을 길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있다 하여도 사회나 나라에서 안 씁니다.

 우리 나라에서 쓰이는 바깥말은 오로지 영어입니다. 다음은 일본말입니다. 그리고 중국말과 프랑스말쯤입니다. 독일말과 러시아말이 더러 쓰여도 그렇게까지 잘 쓰이지 않습니다. 중남미 문학을 읽자면 스페인말을 북돋워야 하고, 서양 옛 문화와 역사를 헤아리자면 그리스말이나 이탈리아말도 키워야 할 테지만, 이와 같은 바깥말을 골고루 가르치는 배움틀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뿐더러, 애써 배워도 써먹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 우리가 아무리 이란 삶과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샅샅이 살펴서 올바르게 안다 한들, 한국땅에서는 그예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지식부스러기가 될 뿐입니다.


..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고, 나의 과거를 없애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의식이 그걸 다시 불러왔다. 급기야 국적을 속이기까지 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어느 파티에서, “넌 어디서 왔어, 마리-잔느?” “난 프랑스인이야.” “아, 그래? 프랑스인치곤 재미있는 억양이구나.” 당시엔 이란은 ‘악의 전형’이었고, 이란인이라는 것은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었다. 거짓말하는 게 그 짐을 지는 것보다 더 쉬웠다 … 그리고 저녁에 집에 와서 나는 할머니의 말씀을 떠올렸다. ‘언제나 네 존엄성을 잃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 ..  (45쪽)


 생각해 보면, 이란 삶과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바로 꿰뚫는 눈길만 쓰레기 대접이지 않습니다. 한국 삶과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올바로 헤아리는 눈길 또한 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나 나라나 정부에서는, ‘올바른 눈길’과 ‘곧은 매무새’와 ‘착한 마음’을 바라지 않거든요.

 돈 잘 버는 매무새를 바라고, 돈을 바라보는 눈길을 바라며, 돈을 키우는 마음을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도 더 많은 돈을 바라는 데다가, 더 많은 돈을 준다 하면 얼씨구나 하고 달겨듭니다. 집도 돈이요 학교도 돈이요 옷과 밥도 돈이며, 사람 또한 돈으로 재고 따집니다.

 돈이 되는 일이면 붙잡고, 돈이 안 되는 일이면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들여다보는 기사거리만 언론매체에서 다루고, 사람들이 적게 들여다보는 기사거리는 언론매체에 실리는 법이 없고, 실려도 코딱지 만한 자리를 겨우 얻습니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 한들, 아무리 아름다운 이야기라 한들, 한국 사회뿐 아니라 한국에 사는 우리 스스로 아끼지 않습니다.


.. “그래도 이곳은 테헤란 북쪽이지. 남 테헤란의 가난한 동네로 가 보면 거의 하나같이 무슨무슨 순교의 거리로 불린단다. 사람들은 왜 8년 동안 전쟁을 했는지 잊어버렸어. 왜 그들의 아이들이 죽었는지. 이번 전쟁은 전적으로 이란과 이라크 양쪽 군대를 파괴하고 재정비하려는 것뿐이었지. 이란 군은 1980년대에 중동에서 가장 강성한 군대였고, 이라크 군은 이스라엘에게 현실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으니까. 서구는 이 두 편에게 무기를 팔았고, 우리는 이 우스운 게임에 말려들어갈 만큼 멍청했던 거고. 아무런 명분 없는 8년 간의 전쟁이라니. 그래서 정부는 길 이름을 순교 어쩌구 하는 것으로 바꾸어,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거야. 아마도 그들은 이 부조리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요, 하지만 다른 것도 있었어요. 오후에 텔레비전에서 자기 자식들의 죽음으로 기쁨이 충만했다는 어머니들을 봤거든요. 그게 신앙심에서 나온 건지 거짓인지, 난 모르겠어요.” “어느 정도는 둘 다일 수 있을 거야. 10년 동안 그 순교자들이 별 5개짜리 천국에 산다고 믿게 하려고 했잖아! 그동안 전쟁은 지옥 같았거든! 네가 알았다면 ……. 정전 직전 몇 달 동안은 가장 참혹했단다.” “이야기해 줘요, 아빠, 듣고 싶어요.” ..  (103쪽)


 우리 스스로 아름답게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착하게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슬기롭게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어깨동무하며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같은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기운을 얻습니다. 비정규직뿐 아니라 정규직도 길거리로 내몰리는 가운데 다부지게 싸움을 맞아들인 아줌마 아저씨들은, 스스로 부딪히고 피가 터지고 머리가 깨지면서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당신 스스로도 ‘이제부터는 바보가 되지 않’고자 다짐하고, 당신들이 낳아 기르는 ‘아이들 또한 바보가 되지 않으면서 살아가기’를 꿈꿉니다.

 아주 적은 숫자라 할지라도, 찬밥 대접이 되고 푸대접이 되고 똥대접이 되는 사람들이 밑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세상을 깨닫습니다. 당신들 스스로 돈바라기 삶자락에 매여 톱니바퀴로 굴러가기만 하던 얼거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당신들을 돕는 손길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지만, 스스로를 스스로 돕습니다. 남이 도와주는 당신들 삶이 아니라, 스스로 돕는 당신들 삶입니다.


.. 쿠웨이트 이민자들은 알아보기 쉬웠다.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을 겪은 이후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이란인들과 달리, 그들은 최신형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그들을 접했던 것은 어느 여름날 거리에서였다. 이 기분 나쁜 일을 쿠웨이트를 잘 아는 삼촌에게 말하자, 이렇게 말해 주었다. “여느 아랍 국가들이 그렇듯, 쿠웨이트에서는 워낙 여성의 권리가 박탈되어 있어서, 밖에서 콜라를 마시며 걷는 여자는 그들에게 매춘부로 보일 수밖에 없단다.” ..  (170쪽)


 만화책 《페르세폴리스》에 나오는 주인공 또한, 스스로를 스스로 돕습니다. 1권에서는, 또 2권에서도 어느 만큼 이야기가 흐르는 동안, 주인공은 ‘얼토당토않은 곳에서 내빼려’고만 했습니다. 벗어나려고만 했고, 잊으려고만 했습니다.

 스스로를 잊고, 제 식구와 동무를 잊고, 제 고향과 나라를 잊으려 했습니다.

 어디론가 떠나면 길이 열리리라 믿었고, 이곳만 아니면 꿈을 펼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자로 태어난 몸은 이란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사회며 세상이며 여자는 사람이 아닌 이란 터전이었기 때문에, 《페르세폴리스》 주인공이 괴로운 나날을 보낸 일은 아주 마땅했다고 느낍니다.


.. “할머니.” “아이구, 얘야! 무슨 일 있니?” “할머니, 너무 끔찍해요.” “그 머리에 쓴 우스꽝스런 천쪼가리는 좀 벗으면 안 돼? 나를 밀실 공포증에 시달리게 한다니깐!” “왜? 뭐가 그렇게 끔찍해?” “그거야? 네가 ‘끔찍하다’는 게? 어이구! 괜히 겁먹었네. 난 또 누가 죽은 줄 알았지.” “난 레자(지금 남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우리 이혼해야 될 것 같아요.” “내가 심장이 안 좋다는 걸 너도 알잖니! 그깟 이혼으로 그렇게 울어? 잘 들으렴! 나도 이혼했어. 55년 전에. 그 시대엔 아무도 결혼을 깨지 않았어. 하지만 난 언제나 짜증나는 남자랑 사는 것보다 혼자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고 생각한단다!” “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첫 결혼은 두 번째를 위한 연습장이란다. 다음 번엔 더 만족스러울 게다. 그렇게 우는 거 보니, 아마도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다! 꼭 지금 당장 레자에게 이야기해야 하는 법은 없어. 시간을 갖고 잘 생각해 보고, 정말 그를 원하지 않으면 그때 떠나라! 이가 썩었으면 뽑아내야지!” ..  (183쪽)


 그래도 주인공한테는 슬기로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슬기롭게 키운 할머니가 있습니다.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던 주인공은 아버지와 어머니, 또 할머니한테서 기운을 얻습니다. 아니, 벼랑으로 굴러떨어진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용을 쓰며 다시 기어오르는 기운을 스스로 내게 됩니다. 또는, 그 벼랑으로 다시 올라가기보다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가시밭길이라 하더라도 제 나름대로 새 길을 뚫어 보고자 다짐하게 됩니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당신 꿈을 붙안고 살면서 당신 아이를 길렀고, 당신 아이는 또 당신 아이대로 스스로 꿈을 붙안고 살면서 당신 아이를 낳아 이 아이한테도 스스로 제 꿈을 찾아서 펼치도록 기릅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딸이 됩니다. 태어난 해와 곳은 모두 다르고, 겪고 치러야 할 고비는 저마다 달랐지만, 바라보는 곳은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찾고 스스로 일으키고 스스로 가꾸는 삶으로 아름다운 곳을 바라보는 세 사람 눈길은 언제나 한 자리에 있습니다.


 (2) 숨쉬는 어른이 되어 가는 《페르세폴리스》


 만화책 《페르세폴리스》에는 이야기가 아주 많이 실려 있습니다. 만화라는 틀을 빌었으나, ‘이야기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빼곡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페르세폴리스》를 제대로 읽어내자면, 그림은 그림대로 넘겨보면서 글은 글대로 꼼꼼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어느 한 가지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어느 한 가지에 매여서도 안 됩니다.

 숨을 쉴 수 없도록 막힌 곳에서 태어나 자라야 했던 그린이 숨결을, 칸 가득 채워진 깨알 같은 글씨를 또박또박 읽어 나가면서 한 쪽 두 쪽 더디게 넘기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면, 하루는 치과에 들러야 했는데, 수업이 예상 밖으로 늦게 끝났다. 갑자기 확성기에서 어떤 목소리가 울렸다. “파란 옷 입은 여자 분, 뛰지 마세요! 파란 옷을 입은 여자 분! 뛰지 마십시오! 야! 거기 파란 옷! 뛰지 말란 말야!” ‘나?’ “아가씨, 왜 뛰는 겁니까?” “너무 늦었어요! 버스를 잡아야 한다구요.” “아, 그렇지만, 당신이 뛸 때 당신의 뒤쪽이 움직이잖아요. 어떻게 말해야 하나. 적나라하다는 거죠!” “그럼 당신들이 내 궁둥이를 쳐다보지 않으면 될 거 아냐!” 내가 너무나 소리를 크게 질렀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체포하지도 않았다 … 정권은 잘 알고 있었다. 집을 나서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 ‘내 바지가 충분히 긴 건가? 베일이 잘 씌워졌나? 화장한 게 너무 진한가? 나를 채찍으로 때리면 어쩌지?’ 들을 던지는 사람은, 더 이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나의 사상의 자유는 어디 있지? 나의 언론의 자유는? 내 삶은 살 만한 걸까? 정치범들은 어떻게 된 걸까?’ ..  (150∼151쪽)


 1969년에 태어나 어린 나날을 보내다가 전쟁 불길에서 몸을 빼내어 유럽나라에서 지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여러 해를 보내면서 뼛속 깊이 아픔과 생채기를 받지만, 이 아픔과 생채기를 스스로 다시금 우뚝 서려는 눈물로 삭이는 이야기가 담기는 만화 《페르세폴리스》입니다.

 주인공은 더는 내빼지 않고자 이란으로 돌아왔지만, 다시는 내빼지 않으려고 다시 이란을 떠납니다. 주인공한테는 자기가 어디에 발을 붙이고 있느냐보다도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훨씬 큰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버지만큼이라도 튼튼해지자면, 할머니만큼이라도 당찬 사람이 되자면, 아직은 너무 어리고 철없는 풋내기임을 깨닫고 ‘더 배우’려고 새 길을 나섭니다.


.. “20일 동안 난 그가 영웅이라고 생각했는데!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그 번지르르한 빈말들을 봐! 자기 부인에게 말 한 마디 하게 놔두질 않잖아! 아, 이란 남자들이라니!” “그런 말 마! 이건 이란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야. 남자들은 모두 다 그래. 2년 전에 스페인 외교관이랑 사귀었는데, 겉보기엔 나은 것 같았지만 속은 다 똑같더라.” “여기선 모든 법이 남자들 편이잖아! 만약 어떤 남자가 15명의 여자 앞에서 여자 10명을 죽인다 해도, 누구도 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릴 수 없어. 왜냐하면, 살인 사건에 대해서 우리 여자들은 증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 게다가 이혼할 권리도 남자들에게 있어. 설령, 남자가 이혼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에 대한 권리는 남자들에게 있지! 어떤 종교인이 이 법을 정당화시키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남자는 씨앗이고, 여자는 그 씨앗이 자라는 땅이래. 그러니까, 아이는 당연히 아빠에게 속한다는 거야! 믿을 수 있니? 난 더 이상 못 참겠어! 이 나라를 뜰 거야!” ..  (187쪽)


 그러나 주인공은 아버지만큼이나 할머니만큼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주인공 스스로도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 또래가 이란에서 사람다움을 간직하면서 살아가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깨닫고 익히면서 살아나갑니다. 할머니는 할머니 또래가 이란에서 사람됨을 잃지 않으면서 뿌리박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부딪히면서 배우고 살아왔습니다. 주인공은 주인공대로 고향나라 이란이 볼썽사나운 꼬락서니로 나뒹굴기를 바라지 않는 한편, 이란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디딘 지구라는 땅떵어리에서 저마다 볼썽사나운 꼬락서니가 아닌, 아름다운 몸짓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란 남자만 얼간이가 아니라 스페인 남자도 얼간이요 프랑스 남자도 얼간이입니다. 그러면 한국 남자는 어떻겠습니까. 일본 남자는? 중국 남자는? 미국 남자는? 아니, 남자와 여자 울타리를 넘어 이 땅에 발딛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어떻게 제 삶을 꾸리고들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다움을 스스로 즐기며 이웃과 넉넉히 나누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고운 목숨임을 깨닫듯 이웃 또한 고운 목숨임을 깨닫고 있을까요.

 입에 발린 평화만 외치는 우리는 아닌가요. 겉치레 자유와 민주를 들먹이는 우리는 아닙니까. 껍데기 평등과 생태를 내세우는 우리는 아니온지요.


.. “너희들 그거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걔는 자기 나라나 부모 얘긴 절대로 안 해.” “당연히 그렇겠지! 전쟁을 겪었네 하는 거 다 거짓말이야. 그게 다 관심을 끌려고 그러는 거라구.” “어쨌든 걔 부모도 걔한테 관심이 없는 게 분명해. 아니면 왜 애를 혼자 외국에 보냈겠어?” “너희들, 입닥쳐! 아니면 내가 닥치게 해 줄까! 나는 이란인이고 그게 자랑스럽다구!” “쟤, 완전 돈 거 아냐?” ..  (46∼47쪽)


 다시 ‘페르세폴리스’로 돌아온 《페르세폴리스》 주인공은 고향나라 이란을 사랑합니다. 고향나라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고향나라가 어처구니없이 굴러떨어지거나 비뚤어지거나 얼빠진 모습으로 치닫는 일을 슬퍼합니다. 고향나라 사람들이 제 넋과 얼을 잃고 스스로 바보가 되어 가는 모습을 가슴 아파합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이란사람’인 스스로가 더 단단해지고 따뜻해져야겠다고 느낍니다.

 우리 사는 이 땅에서도, 우리가 우리 고향나라를 더욱 사랑한다면, 아니 참다이 사랑한다면 오늘날과 같이는 살아가거나 정치꾼을 뽑거나 입시지옥을 붙잡고 있거나 돈벌이에만 눈이 벌건 채로 억눌려 있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고향마을 사람을 사랑한다면, 아니 아름다이 사랑하는 마음결이라면, 다른 이 얘기를 하기 앞서 우리 스스로 제 삶을 고치고 키우고 북돋우며 날마다 새로워지고 애쓰리라 봅니다. 어린이였던 ‘마르잔 사트라피’는 《페르세폴리스》 2권을 거치며, 드디어 어른이 되었습니다. (4342.4.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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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09-04-1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만화책이 있었는지 오늘에야 알았는데
참... 멋진 만화책이네요... ^^

따뜻한 4월인데 '잔인한 4월'이란 말에 공감하게 되는 날이라서
님 블로그 찬찬히 보고 있습니다

다시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책은 정말 훌륭한 친구네요.

잘보고 갑니다 ^^

숲노래 2009-04-14 14:50   좋아요 0 | URL
만화책 전문가게를 가지 않고는, 좋은 만화를 놓치게 된답니다~~
ㅠ.ㅜ
 
어시장 삼대째 21 - 노르웨이의 어프로치
하시모토 미츠오 지음 / 대명종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따끔하면서 아름다운 만화 하나
 [살가운 만화 44] 미츠오 하시모토, 《어시장 삼대째 (21)》



- 책이름 : 어시장 삼대째 (21)
- 그림 : 미츠오 하시모토
- 글 : 마사하루 나베시마, 카즈토 쿠와
- 옮긴이 : 편집부
- 펴낸곳 : 대명종 (2008.10.30.)
- 책값 : 3800원



 (1) 그림과 말 하나마다 따끔한 만화


 띄엄띄엄 끊일 듯 이어지면서 나오는 만화책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덧 25권까지 옮겨진 만화로, 이 만화를 처음 알게 되어 1권부터 읽어 오는 여러 해 동안 ‘틀림없이 만화는 훌륭하지만, 널리 사랑받을 수 있을까? 글쎄, 아무래도 더 번역을 안 하고 사라질 듯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만화책을 스물세 권째 장만한 만화가게에서도 이 만화가 ‘새로 나올 때’ 딱히 돋보이는 자리에 올려놓고 알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서 어느 한 번도.

 그러나 이 만화는 여러 해 동안 숨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돋보이는 자리에 올려놓지 않아도 꾸준히 사랑받을 만한 만화로 여겼는지 모르고, 그렇게 구석진 자리에 꽂혀 있어도 소리 소문 없이 사랑하는 손길이 가 닿았는지 모릅니다.


.. “이건 트롤이라는 녀석이지. 북유럽 민화에 나오는 요정이라고 할 수 있네. 숲과 산속에 살면서 사람을 골리기도 하고 돕기도 하지. 어린아이들을 좋아하고, 자연과 요정에 경의를 표하는 인간들에게 행운을 준다고 하더군.” “요정…이요? 그런데 별로 귀엽진 않네요. 좀 음침한 느낌.¨ …후후, 그렇지만 이 트롤은 노르웨이사람들에겐 무척 사랑받는 특별한 존재라네. 그걸 알고 나니 나도 귀엽게 느껴지더군.” “그래요?” “우리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이 트롤은 노르웨이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상징이라네.” ..  (10쪽)


 아기를 낳아 기르느라 만화책을 제대로 돌아볼 겨를이 없던 지난 반 해 동안, 이 만화, 끊일 듯 이어지는 만화 《어시장 삼대째》가 21, 22, 23권이 잇달아 나와 있었습니다.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렀구나 싶고, 그렇게 긴 세월을 까맣게 잊고 살았구나 싶으며,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그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만화가 꾸준히 나오고 있었는데 몰라봤다 싶어 미안합니다.

 가방이 다른 책으로 무겁고 살림돈은 바닥을 헤매고 있으나, 기꺼이 세 권을 집어듭니다. 서울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에 꺼내어 읽을까 하다가 그만둡니다. 다른 만화와 달리 《어시장 삼대째》 같은 만화를 전철길에서 읽다 보면 그만 눈물이 주르르 흘러서 남우세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두 번 겪고 나서는 《어시장 삼대째》는 반드시 집에서, 그리고 잠자기 앞서와 새벽에 일어나서만 펼칩니다.


.. “그럼 여기선 그 자연산 연어를 먹지 않나요?” “자연산 연어를 먹어요?” “제가 이상한 말을 한 건가요?” “자연산 연어를 먹는 건 곰뿐이에요! 당신 곰인가요?” “고, 곰? 이해가 안 가네. 양식 연어는 잘 먹으면서 자연산 연어는 왜 곰의 먹이로 생각하는 거지?” … “하하하, 여기서도 낚시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잡은 연어를 먹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연산 연어는 시장에 나오질 않습니다. 모두가 먹는 연어는 이런 팜(양식장)에서 키운 것들이죠.” “왜죠?” “야생의 곰이 야생의 연어를 먹는 건 자연계의 섭리죠. 인간이 거기에 개입하면 그 균형이 깨집니다.”..  (33, 50쪽)


 어느새 스물다섯 권째 나오는 《어시장 삼대째》인데, 책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어시장에서 삼대째 일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어시장 이야기가 나오며, 물고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시장에서 다루는 물고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요, 일꾼도 한두 사람이 아니니, 적어도 100권쯤은 너끈히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루는 사람에 따라 200권도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다만, 이렇게 권수를 늘릴 수는 있다고 하여도 깊이와 너비를 고루 갖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땀을 쏟아야 할 뿐 아니라, 이 하나에 온몸과 온마음이 깃들어야 합니다. 땀방울이 바쳐지지 않는 만화는 우리한테 눈물방울을 뽑아낼 수 없습니다.


.. “여기선 모든 양식장에서 사용되는 먹이를 국가기관이 엄격히 조사해서 허가한 것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먹이는 열처리로 살균하고 항생물질 등의 약품도 전혀 들어가질 않습니다 …… 인간이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다.” … “또 이 지역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입니다. 그 비와 녹은 눈이 암벽을 통해 풍부한 미네랄을 품은 다음 흘러내려 항상 신선한 바다를 유지시켜 줍니다.” ..  (43, 48쪽)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또는 할머니 어머니 나, 또는 할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세 집안에 걸쳐서 이어오는 중간도매상을 하는 ‘삼대째’는 만화책이 25권에 이르도록 어시장에서 ‘새내기’나 ‘풋내기’ 소리를 듣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도 새내기요 풋내기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런 생각은 바로 ‘언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로 이어집니다. 처음 보는 물고기가 있으면 꾸지람을 듣더라도 만져 보고 여쭈어 보고 손수 사들여서 끓이거나 저며 보거나 삶아 보거나 구워 보거나 합니다. 먹어 보지 않고서는 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몸으로 배우는 물고기에서, 머리로 배우는 물고기로 나아갑니다. 물고기 맛을 알고 잘 다룬다고 하여 훌륭한 일꾼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욕심에 따라서 바다밭이 말라 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필 줄 알아야 하는 한편, 가게 매출을 올리자면서 아무렇게나 사들이거나 다룰 수 없습니다. 나아가, 고기잡이하는 사람들 삶을 껴안고, 나라밖 고기잡이 참모습을 돌아보면서, 주인공이 사는 일본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되짚습니다. 어시장 삼대째인 자기 스스로도 어떤 삶을 꾸려야 하는가를 돌아봅니다. 이리하여, 22권을 보면, “전 제 아이에게 풍요로운 바다와 생선 문화를 남겨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 아이가 어시장 사대째가 되어 주길 바라구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전 그걸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137쪽)” 하고 당차게 외칩니다.


.. “이 신문기사를 보면 유엔에서 국민이 풍요롭게 사는 나라의 랭킹이 나왔는데, 노르웨이가 6년 연속 1위를 차지했어.” “그래요?” “그런 노르웨이사람들의 오락이라면 자연과 접하는 것이라는군. 여가를 즐기기 위해 숲의 오두막에서 불편한 생활을 하거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즐긴다고 하네.” … “지금까지 노르웨이 연어에 유해물질과 약품이 남아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답니다.” “만약 발견되면 그 양식업자는 바로 라이센스가 취소되고 영업정지를 당하게 됩니다.” ..  “난 여기에 와서 다시 노르웨이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느꼈네. 이곳 수산업의 대단한 점은, 정부와 국민과 학교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야.” … “불필요한 인공구조물로 꽉 찬 일본의 해안선과는 다른 자연 그대로의 피욜도, 모두가 협력해서 미리 자연을 보호하고자 과감하게 금어 조치를 내리는 정부, 제가 여기서 느끼고 본 것은 모두 자연과 공존하려는 수산업의 현주소였습니다.” ..  (64, 69, 79, 84쪽)


 이어가려는 마음은 가꾸는 마음입니다. 지키려는 마음은 바로 이곳 이때에 즐기려는 마음입니다. 물려주려는 마음은 고마워하는 마음입니다. 나누려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만화로 들려주는 어시장 이야기는 어시장 사람들이 어떻게 바다와 우리 삶터를 사랑하는 길을 찾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만화 바깥 우리들로서는 우리가 저마다 발딛고 선 자리에서 어떤 이웃과 어떤 매무새로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한테 즐거울 길을 찾느냐 하는 물음표입니다.

 혼자만 잘 살겠다는 밥그릇 지키기가 아닙니다. 나와 이웃 모두 잘 살자는 밥그릇 가꾸기입니다. 혼자만 배부르면 된다는 밥그릇 지키기가 아닙니다. 나와 이웃이 다 함게 즐거웁되 배곯는 사람이 없도록 하자는 밥그릇 보듬기입니다.


.. “이 낡은 목조 건물이 수산선진국의 최첨단 연구소?” “이 건물은 전통 있는 무역상의 창고를 개축한 겁니다. 13세기에 지어진 한저 상인의 집이 지금도 레스토랑과 선물 가게로 사용되듯이, 우리는 낡은 건물을 소중히 여기죠. 좀 불편해도 수리하면서 사용하자는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오래된 건물이 많이 남아 있었네요. 전부 다시 짓는 우리완 다른 느낌입니다.” ..  (66쪽)


 《어시장 삼대째》 22권을 보면, 어시장 사대째가 될 어린이 입을 빌어, “전 소용없단 생각이 들어요. 일본에서 MSC는 확산될 수 없어요. 아까 그 사람들 앞이라 말은 안 했지만, 생산자의 의식이 강해도 소비자의 인식이 낮은데 효과가 있을까요? 아저씨도 본 적이 있잖아요. 마트나 수퍼에서 도시락이나 우유를 살 때, 모두 안쪽에 있는 유효기간이 긴 걸 찾잖아요. 금방 먹을 거고 마실 건데, 그것 때문에 많은 음식과 우유들이 버려지고 있어요. 언젠가는 그 일들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게 될걸 알면서도 그러죠. 그런 일본에서 MSC 따윈 무시될걸요.(111∼112쪽)” 하고 따끔한 한 마디를 합니다. 이 어린이 말에는 22권이 끝나고 23권이 되도록 뾰족한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나오기 어렵지 않으랴 싶습니다.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일본이라고 하여도, 깨우친 생산자만큼 따라가는 소비자가 많지 않음은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깨우치지 않는 생산자도 아직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는 어떠할까요. 우리 나라에서 깨우친 생산자는 얼마쯤 될까요.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깨우친 소비자는 또 얼마쯤 될까요.

 우리는 어느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일는지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느 자리에 서도록 이끌고 있는 어른일는지요. 우리는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즐기는 사람일는지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즐기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는 어른일는지요.


 (2) 그림과 말 어느 자리나 애틋한 만화


 《어시장 삼대째》는 어느 한편으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만화입니다. 그러면서 ‘홀가분’하게도 하는 만화입니다. 권수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고 새로 나오는 만화를 집어들어 펼치면, ‘이 권수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겠지’ 하고 헤아리게 되고, 꼭 그 헤아림대로 줄거리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다 알 만한 이야기가 펼쳐져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웃음을 빼는 대목은 그리 안 많으나 곳곳에서 웃음이 묻어나도록 엮여 있는 한편, 눈물을 빼는 대목이 참으로 많습니다.

 슬픈 눈물이 아닌 아름다운 눈물로, 괴로운 눈물이 아닌 기쁜 눈물로.


.. “어이가 없군. 내가 이런 녀석에게 졌다니 한심해. 삼대째, 자넨 맛으로만 생선을 보나?” “왜 화를 내시는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곰치를 요리해 주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거야! 내 말을 모르겠으면 오토메에게 물어 봐!” ..  (168쪽)


 만화를 넘기며, 또 만화를 덮으며 생각합니다. 그린이와 글쓴이는 어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기에 이렇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하고. 그린이와 글쓴이 어버이는 어떤 분이었기에 이런 마음결을 담아내도록 아이들을 돌보고 키울 수 있었을까 하고.

 고되고 벅찬 삶을 겪어냈다 하더라도 그 고되고 벅참을 짜증이 아닌 사랑으로 펼쳐 보이는 힘이 반갑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삶을 맞아들였다 하더라도 그 기쁨과 고마움을 지루하거나 어설픈 붓끝이 아니라 애틋하며 싱그럽게 담아내 보이는 기운이 좋습니다.

 어려움은 어려움대로 껴안고, 수월함은 수월함대로 부둥켜안는다고 할까요. 슬픔은 슬픔대로 힘이 되고, 기쁨은 기쁨대로 빛이 된다고 할까요.


.. “하지만 시어머니도 유미코 씨보다 더 곰치를 무서워하고 싫어하셨습니다. 그래도 유미코 씨를 위해, 귀여운 손자를 위해 곰치를 손질하고 요리했던 겁니다.” ..  (184쪽)


 삶이 묻어나는 만화이기에 즐겁게 장만하여 읽습니다. 삶이 배어든 만화이기에 깊은 맛을 느끼며 읽습니다. 삶이 삭여진 만화이기에 둘레에 널리 알리면서 읽습니다. 삶이 곧 만화로 다시 태어났기에 책꽂이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 두고 도서관 손님들한테 읽힙니다.


.. “찰가자미국이 정말 맛있는 걸 알겠네요.” “삼대째는 드시지도 않았는데…….” “이시쿠라 씨 얼굴이 무지 편해졌거든요.” … ‘왜 이렇게 먼 기억까지 생각나는 거지? 이 맛은 그저 맛있기만 한 게 아니야! 그리움이야!’ ..  (130, 134쪽)


 그러고 보면 우리한테는 동해와 남해와 황해가 있습니다. 골골마다 냇물이 흐릅니다. 바다물고기와 민물고기가 고루 있습니다. 바닷가마을마다 어시장이 있고 갖은 물고기가 우리 밥상에 오릅니다. 그렇지만, 바다 이야기가 만화로 그려지는 일이 드뭅니다. 어시장 이야기가 만화로 담기는 일이 드뭅니다. 고기잡이 삶이 만화로 새로 빚어지는 일이 드뭅니다. 물고기 하나를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싸안으면서 사랑으로 바라보는 만화를 구경하기란 아주 힘듭니다.

 늘 곁에 있어도 모르는 우리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언제나 함께 있어도 알뜰히 여기지 않는 우리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한결같이 이웃으로 있으나 한결같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뭐가 그리 바쁘신 우리들인지, 뭐가 그리 알아야 할 일이 많은 우리들인지, 뭐가 그리 다른 큰일이 많은 우리들인지, 뭐가 그리 대단한 우리들인지 알 노릇은 없습니다만.


.. “이시쿠라 씨는 요리사라서 내가 모자라지만, 찰가자미 요리는 자신이 있거든요. 찰가자미 요리를 못하면 시집을 못 간다고 할머니가 가르쳐 줬죠.” “유코도 할머니를 좋아하는구나.” “예, 어릴 때 부모님이 일 때문에 바빠서 할머니가 절 돌보셨어요. 내 찰가자미 요리는 우리 할머니 솜씨랍니다.” ..  (100쪽)


 어제 하루와 오늘 하루,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을 우리 아이가 먼먼 뒷날 “우리 할머니 사랑이에요”나 “우리 할아버지 사랑이에요” 하면서 두 손 모두어 내밀 그 자리에 깃들 무엇은 어떻게 자리매겨질까 슬며시 궁금해집니다. 그때까지 아이를 사랑으로 알뜰살뜰 보듬어야 할 테고, 그때까지 어버이 된 몸으로서 아프지 말고 튼튼히 잘 살아야겠지요.

 아이와 함께 즐거울 길을 찾으면 삶은 즐겁고, 아이와 같이 아름다울 길을 살피면 삶은 아름다워진다고 느낍니다. 만화책 《어시장 삼대째》는 1권부터 21권에 걸쳐, 그리고 22권과 23권과 24권과 25권에서도, 또 앞으로 나올 수많은 뒷권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길을 당신들 나름대로 고이 엮어내어 보여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만화를 호수가 빠지지 않도록 잘 챙겨서 모아 놓고, 다가올 앞날을 기다립니다. 아이가 스스로 이 만화를 끄집어 내어 읽을 그 앞날을. (4342.3.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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