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숲 18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손희정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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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일곱 살 푸름이가 비로소 찾은 ‘내 소리’
 [책읽기 삶읽기 22] 이시키 마코토, 《피아노의 숲 18》



 ‘이치노세 카이’라는 열일곱 살 난 푸름이가 피아노 하나에 온넋을 실어 살아내는 이야기를 담은 《피아노의 숲》 18권이 우리 말로 나오다. 일본에서는 벌써 19권이 나왔다. 만화책은 하루가 아닌 한 시간조차 아닌 퍽 짧은 동안 금세 읽어내고야 만다. 어릴 적에도 늘 그랬다. 주마다 나오던 만화잡지가 없이 다달이 나오는 만화잡지만 있던 1980년대에 국민학생이었던 꼬맹이는 새 만화잡지가 나와 우리 동네 문방구에 들어오는 날에 맞추어 형하고 돈푼을 차곡차곡 그러모아 후다닥 달려가서 사곤 했다. 자칫 조금이라도 늦으면 동이 날까 걱정하면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늘 달음박질이다. 같은 동네 다른 동무들이 벌써부터 나와서 사 갔을는지 모르니까.

 문방구에 닿아 가쁜 숨을 그대로 헉헉거리며 “아저씨 《소년중앙》 나왔어요?” 하고 여쭈고, “이제 막 들어왔단다.” 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직 잉크 냄새가 가시지 않은 새책을 품에 안고 다시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갈 때 느낌이란.

 다달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화잡지는 언제나 그날 다 읽어치운다. 형은 동생보다 공부가 늦게 끝나니, 동생은 먼저 형보다 읽어치우는데, 형이 보기 앞서 한 번 다 보고, 형이 한 번 다 본 그날 다시 한 번 더 본다. 형은 동생이 다 보기를 기다린 뒤 다시 한 번 보고, 동생은 또 형이 다시 한 번 더 보고 나서 다시금 더 본다. 하루 사이에 세 번을 본다.

 이튿날이 되어도 다시 보고 또 본다. 여러 날 같은 만화책을 보고 다시 보고 거듭 보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는 핀잔과 꾸중을 쏟아낸다. 내가 어머니이더라도 이럴 만하다. 딸아이 키우는 아버지로서 지난날을 생각할 때에, 내 딸아이가 나만 한 나이가 되어 만화책에 이렇게 흠뻑 빠져 지낸다면 더없이 골이 아플 테지.


.. ‘생각났어. 나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길 바라고 피아노를 치는 거였어. 그러니까 나스트루이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도 즐거워. 그걸 잊고 조금 경직이 됐었어 ..  (187∼188쪽)


 만화책 《피아노의 숲》은 열일곱 살 푸름이 이치노세 카이가 오로지 피아노 하나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빛깔 고운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이야기는 어느덧 폴란드에서 쇼팽을 기리며 마련한 콩쿠르에 주인공 카이를 비롯한 여러 푸름이가 나와서 피아노 연주를 뽐내는 대목에 이른다. 아직 2차 연주이고 마지막 3차 연주가 남았으니 열 권쯤은 더 나오지 않으랴 싶은데, 1권부터 18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말하는 줄거리는 오직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길 바라”며 피아노를 치는 삶.

 조연으로 나오는 ‘슈우헤이’가 보여준 연주를 놓고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은 “저는 슈우헤이의 심사에는 참가하지 않아서 그의 음악을 즐기기만 했습니다. 큰 실수는 없지 않았습니까(144쪽)?” 하고 말하면서, 슈우헤이네 아버지 마음속을 읽듯이 속으로 ‘뭐야, 이 아마미야라는 남자는. 자식의 성장보다 점수가 더 신경이 쓰이는 건가. 뭐, 콩쿠르니까 그런 건 이해하지만.’ 하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피아노의 숲》이 막바지에 이르며(어쩌면 이 콩쿠르가 끝나도 만화를 더 이어나갈는지 모른다만) 콩쿠르에서 누가 1등을 하고 2등을 하느냐에 눈길이 흩어질 법도 하지만, 그린이 이시키 마코토 님은 ‘등수야 어떻게 나오건’ 고작 열예닐곱이나 열대여섯밖에 안 된 푸른 넋들이 선보이는 피아노란 ‘손가락 놀림이 빼어난 재주 부리기’보다 ‘얼마나 가슴을 사로잡으며 아름다이 노래를 즐길 줄 아느냐’를 바라보아 주기를 꿈꾸는 셈이라고 느낀다.

 슬픈 일인데, 한국땅에서 이만 한 나이인 푸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이만 한 나이인 한국땅 푸름이들 가슴에는 무엇이 꿈틀거리면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가.

 《피아노의 숲》 18권은 조연인 슈우헤이한테 눈길을 맞춘다. 슈우헤이는 열일곱 해를 살아온 끝에 비로소 ‘피아노 소리는 내가 내는 거야. 그건, 나만의 음색, 즉 지금까지의 17년, 내가 살아온 증거, 나만의 소리다(84∼85쪽)’ 하고 깨닫는다. 자잘한 잘못을 저지르지만 슈우헤이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 템포가 빠른가? 지금 미스터치였나? 하지만 이 소리는, 이 소리는 내 소리야. 지금 이 소리를 놓치면 나는 …….’ 하고 이를 악문다.

 그래, 참 좋은 대목이다. 괜찮은 이야기를 조연 슈우헤이를 빗대어 보여준다고 깨닫는다. 그런데 이 아이 슈우헤이는 열일곱이다. 거듭거듭 돌아본다. 우리 나라에서 열일곱 살이라면 한창 대학입시 때문에 목이 졸린 슬픈 목숨이다. 기껏해야 바짓단을 줄인다든지 치마를 짧게 줄인다든지 하는 데에 목이 매여 있을 뿐, 스스로 제 넋을 꽃피울 아름다운 길을 찾지 못한다.

 《피아노의 숲》을 다시 한 번 읽는다. 18권 첫머리를 보면, 주인공 카이가 슈우헤이네 아버지랑 슈우헤이가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 정말 귀족 같다(24쪽).’고 느낀다. 만화 《피아노의 숲》에서 주인공인 카이는 귀족이 아니다. 버려진 아이라 할 만하다. 숲에 버려진 아이라 할 텐데, 카이는 버려졌다 할 만하든 아니든 숲에 저처럼 버려졌다 할 만한 피아노하고 살가이 사귄다. 숲에서 피아노하고 한몸이 되었고, 숲과 카이라는 아이는 온통 하나였다. 숲이 카이이고, 카이가 숲이며, 숲이 피아노이고, 피아노가 숲이었다.

 조연 가운데 하나인 ‘아담스키’라는 푸름이는 마음속으로 슈우헤이한테 말을 건넨다. ‘좋아, 아마미야. 실수를 두려워 하지 마. 지금 너는 청중에게 네 마음을 전하고 있어(109쪽)!’ 아담스키 입을 빌어 마음으로 건넨 이 말마디란 바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라 할 만하다. 사진예술이라 한다면 초점이 어긋나거나 살짝 흔들렸다 할지라도 사람들 가슴을 뭉클하게 움직이는 이야기를 건넨다. 그림과 만화 또한 매한가지이다. 글에서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좀 틀리거나 엉성하더라도 글을 읽는 사람들 가슴에 무언가를 찌르르 하고 울릴 수 있느냐 없느냐인 셈이다. 그림이나 만화 결이 적잖이 엉성하다 할지라도 줄거리와 이야기가 아름답다면 사람들을 웃기거나 울린다. 그림이나 만화 결은 뛰어나다 할지라도 줄거리나 이야기가 없거나 어설프다면 사람들은 등을 돌린다. 이런 그림이나 만화는 딱히 볼 값어치가 없다. 빼어난 재주를 보고자 그림을 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뛰어난 솜씨를 우러르자며 만화를 읽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피아노의 숲》 18권을 덮으며 19권을 기다린다. 19권째에는 누가 나와서 어떤 푸른 삶을 보여주려나. 이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열예닐곱 푸르디푸른 나날을 시멘트 감옥과 같은 학교에서 시험 문제 풀기에 꽁꽁 묶여 있느라 숨막히는 판인데, 나라밖 폴란드에서 펼쳐지는 꿈결 같은 맑은 누리 이야기를 19권째에는 어떻게 담아서 나누어 주려나. (4343.10.31.해.ㅎㄲㅅㄱ)


― 피아노의 숲 18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손희정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10.10.27./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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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고다씨 이야기 1
오자와 마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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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8



따뜻한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 이치고다 씨 이야기 1

 오자와 마리 글·그림

 정효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0.10.25.



  이웃을 믿을 수 있는 삶이란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동무를 사랑할 수 있는 삶 또한 몹시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풀과 나무를 아낄 수 있는 삶도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누군가를 믿는 삶도 아름답고, 누군가한테서 믿음을 받는 삶도 아름답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삶이나 누군가한테서 사랑받는 삶도 아름답습니다. 누군가를 아끼는 삶이든 누군가한테서 아낌받는 삶이든 더없이 아름답구나 싶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아낌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믿거나 사랑하거나 아끼자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넋은 참다워야 하고 내 말은 고와야지 싶습니다. 착한 마음과 참다운 넋과 고운 말로 즐겁게 살아갈 때에 비로소 누군가를 믿거나 사랑하거나 아낄 수 있다고 느낍니다.


  만화책을 고를 때면 언제나 꿈과 사랑을 떠올립니다. 나 스스로 꿈을 그릴 만하고 사랑할 만한 작품을 즐겁게 사들여서 읽자고 생각합니다. 나부터 기꺼이 사랑하는 작품을 기쁘게 읽어 곁님하고 나란히 읽을 뿐 아니라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뒷날 고이 물려주자고 생각합니다.



- “너, 설마 전엔 고양이였니?” “아, 응. 어떻게 알았어?” “바로 오늘 아침에 들었거든.” “뭐, 말하자면 길긴 한데. 내 고향은 지구와는 다른 공간이야. 사람들은 더 이상 육체라는 그릇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다툼도 기아도 없느 평화로운 세계.” “천국?” “아니. 아마 우주 어딘가의 진화한 혹성일걸.” (19∼20쪽)



  오자와 마리 님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 첫째 권을 봅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만화를 보면서 내 삶을 스스로 얼마나 착하게 꾸리는가를 돌아봅니다. 참다운 사람길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차분히 실린 만화를 읽으면서 내 삶은 내가 얼마나 나다우며 참다웁게 일구는가를 곱씹습니다. 고운 넋을 고이 건사하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펼치는 만화를 ‘둘레에서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들 하나도 못 느낀’ 채 받아들이며 내 삶을 내 손으로 곱게 어루만지는가를 헤아립니다. 《이치고다 씨 이야기》는 오자와 마리 님이 새롭게 선보이는 새로운 꿈과 사랑과 아낌이 듬뿍 배었다고 느낍니다.


  ‘이치고다 씨’라는 이름은 만화 주인공 ‘이온’이 달삯을 내며 살아가는 자취방에 홀로 덩그러니 있던 ‘인형’이자 ‘이 인형에 넋을 담아 목숨을 잇는 다른 별 사람’ 이름입니다.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던 이치고다 씨는 평화롭지 못한 지구별에 어느 날 문득 찾아들면서 메마르거나 팍팍한 모습을 숱하게 마주합니다. 때때로 착하며 고운 사람을 마주할 때에 “고양이는 말하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지만, 그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26쪽).” 몸뚱이는 고양이이면서 사람이 하는 말을 하니까, 사람들은 ‘괴물 고양이’라며 놀랍니다. 고양이가 늙어서 죽을 무렵 이치고다 씨는 새로운 몸을 찾아 어느 회사원 아가씨가 어릴 적에 애틋하게 갖고 놀다가 잊어버리고는 내팽개친 인형으로 스며듭니다. 그런데 이 회사원 아가씨는 그저 사탄이라느니 무어라느니 떠들면서 뒤도 안 돌아보며 내빼기만 할 뿐입니다. 이러다가, 텅 빈 삯집에 만화 주인공인 이온이 들어왔고, 이온이라는 젊은 사내는 ‘인형이 말을 하건 춤을 추건’ 딱히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스스럼없이 받아들입니다.


  몸이 인형인 이치고다 씨가 “나……, 안은 텅 비었을 텐데.” 하고 말할 때에, 이온이라는 젊은 사내는 “아니야, 이치고다 씨의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잖아(36쪽).” 하면서 따뜻하게 어루만질 줄 압니다. 이리하여 인형에 몸을 맡긴 이치고다 씨는 “맞다. 이온한테도 가르쳐 줄게. 내 비장의 수화. 나는·당신을·좋아·해요. 내일 데이트에서 해 봐(54쪽).” 하면서 제 마음을 살포시 드러내기도 합니다.



- “기껏 수화 가르쳐 줬는데, 쓸 기회가 없었네.” “응, 하지만 뭐, 급할 거 없잖아?” “그래.” ‘이 아인 어리버리하지만, 중요한 건 파악하고 있어. 뭐가 중요하고 뭐가 필요한지.’  (77쪽)



  한국이든 일본이든 날마다 새로운 만화가 수없이 쏟아집니다. 날마다 수없이 쏟아지는 만화를 찬찬히 돌아보면, 으레 치고박으며 다투는 이야기라든지 끝없이 빨려들어가는 풋사랑 이야기라든지 조금 전문가 티를 내는 이야기(이를테면 ‘요리 만화’나 ‘법을 다루는 만화’ 같은)입니다. 따뜻한 품을 보여주거나 너른 사랑을 나누거나 고운 가슴을 열어젖히는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보지 못합니다.


  우리 삶이 몹시 힘든 나머지 만화를 그리는 분들로서도 따뜻한 품보다는 피 튀기는 다툼판을 그릴밖에 없다 할 만합니다. 내 삶이든 네 삶이든 무시무시한 도시에서 살아남자면 그악스레 엉겨붙거나 모질게 잡아뜯어야 하니까, 이런 굴레에서 홀가분한 채 참사랑과 참믿음과 참아낌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할 만합니다. 돈 없이는 못 산다 하니까 고운 가슴을 섣불리 열어젖힐 수 없겠지요. 나로서는 고운 가슴을 스스럼없이 열지만, 맞은편에서는 뭐 이런 바보 멍텅구리가 다 있나 하면서 금세 등을 치거나 후리기 일쑤잖아요.



- “이치고다 씨도 고향이 그리울 텐데 나만 가는 것도 미안하고, (내가) 시골에서 돌아왔는데 (이치고다 씨가) 집에 없으면 엄청 충격받을 것 같아. 내 고향 보고 싶지 않아?” (89쪽)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 첫째 권을 보면서 싱긋빙긋 웃습니다. 활짝 웃거나 까르르 웃을 일은 없습니다. 가슴이 저릿하거나 짠할 일도 없습니다. 그예 빙그레 웃으면서 한 장을 넘기고 두 장을 넘깁니다.


  만화라는 틀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따뜻한 품으로 감싸며 따뜻한 삶을 그리는 작품이 있다 한다면, 문학 가운데 시와 소설이라는 틀에서는 어떠한 작품이 따뜻할까 하고 되뇝니다. 예술이라는 사진 가운데 따뜻함을 곱다시 펼치는 작품으로 무엇이 있을까 가늠해 봅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어깨동무하며 읽는 그림책 가운데에는 누구 작품이 따뜻한 손길로 피어나는가 하고 갸우뚱갸우뚱 짚어 봅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 문화에서, 우리 터전에서, 우리 사회에서, 우리들은 얼마나 ‘따뜻함’ 한 마디를 간직하면서 사랑하는 나날인지 궁금합니다.



- “슬슬 가야지. 누나가 걱정하겠다.” “정말 그 누나를 좋아하는구나.” “당연하지.” “그럼 누나 결혼도 축하해 줘.” “좋은 사람이면 축하해 줄 거야.” “진짜지?” “그럼.” ..  (113∼114쪽)



  해마다 가을녘이면 스웨덴에서 뽑는 노벨문학상 이야기로 슬며시 시끌벅적합니다. 이제 한국 문학쟁이 가운데에서 노벨문학상 받는 이가 하나쯤 태어나야 하지 않느냐고 들썩입니다.


  어쩌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국 글쟁이 하나쯤 있어도 괜찮겠지요. 나라밖으로 한국 문학이 이쯤 된다며 떵떵거리거나 자랑하고 싶을는지 모르지요. 한국에서도 노벨문학상을 받는 분이 태어난다면 이분 문학뿐 아니라 여러모로 한국 문학밭이 한껏 부풀어오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2010년 노벨문학상이건 2000년 노벨문학상이건 1990년 노벨문학상이건 무슨 대수일까 잘 모르겠습니다. 2020년 노벨문학상이든 2030년 노벨문학상이든 무엇이 대단할까 알 노릇이 없습니다.


  노벨문학상이 아닌 다른 숱한 문학상 가운데 하나라도 꼭 받아야 할는지요. 문학상이 아닌 이런저런 상장을 하나쯤은 걸쳐야 문학다운 문학이라 손꼽을 수 있나요.


  만화책을 놓고도 무슨무슨 상을 주곤 합니다. 그런데 무슨무슨 상을 받은 만화 작품이야말로 온누리에 가장 빛난다든지 가장 아름답다든지 가장 사랑스럽다든지 가장 거룩하다든지 가장 훌륭하다든지 하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겠습니까.


  만화이든 문학이든, 시이든 소설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모두 똑같습니다. 내 가슴에 사랑과 꿈을 심을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삶을 따뜻하게 즐기면서 나 스스로 따뜻한 사람으로 거듭나면 아름답습니다. 동무와 이웃하고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하루로 이끄는 책이라면 반갑습니다.



- “그보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야.” “뭐어? 충분히 수상하잖아. 역시 반대야.” “그냥 질투 아니고?” “당연하지! 아냐. 그런 녀석한테는 누나가 아까워. 누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이 못 돼.” ..  (133쪽)



  날마다 내 몸을 따뜻하며 넉넉하게 채워 주는 고마운 밥 한 그릇과 같은 고마운 만화책을 헤아립니다. 날마다 아침에 새로 쌀을 씻어서 냄비에 불을 넣어 밥을 하는 마음으로 책 한 권을 돌아봅니다. 나부터 이 삶터에서 우리 살붙이하고 먼저 따뜻하게 얼싸안으며 사랑스럽게 잘 살아가자고 생각합니다.



- “음. 행복해.” “맛있어?” “응. 먹어 볼래?” “마음만 받을게.” ..  (156쪽)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하고 나눌 수 있는 한 가지라면, 아마 한 가지뿐일 테고, 바로 사랑입니다. 돈이나 이름값이나 권력을 살붙이나 이웃이나 동무하고 나눌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사랑을 담은 만화책을 읽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사랑 이야기를 만화로 누린 뒤, 모레에 찾아올 먼 앞날에는 이 사랑 이야기를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언제나 기쁩니다. 4343.10.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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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집 평화 발자국 3
이승현 글 그림 / 보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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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에는 돈 좋아하는 사람만 남으라 하자
 [만화책 즐겨읽기 7] 이승현, 《파란집》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던 때에도 신문을 읽지 않았습니다. 이때에도 우리 살림집에는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1995년에 고향 인천을 떠나 서울로 들어와 홀살이를 처음 할 때에는 신문사 지국에서 먹고잤습니다. 날마다 신문을 돌리며 날마다 열세 가지 아침신문(스포츠신문 두 가지랑 경제신문 하나까지)을 읽었습니다. 신문배달 일꾼으로 지내던 삶을 마감하고 책마을 일꾼으로 바뀐 1999년 여름부터는 내가 돌리던 신문을 받아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 신문을 영 보아 주기 힘들다고 느껴 끊을까 말까 망설이면서 차마 끊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신문배달 일꾼으로 여러 해를 살았거든요. 사람들이 신문을 끊으면 ‘신문사 본사’가 아닌 ‘신문사 지국’이 피를 봅니다. 신문사 본사는 ‘독자 구독료’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신문에 나는 광고 값’으로 움직이는 신문사입니다. 독자 구독료는 신문사 지국이 살아가는 돈입니다. 그나마 신문사 지국은 〈조선일보〉이든 〈한겨레〉이든 지국을 차릴 때에 신문사 본사에 몇 천만 원에서 몇 억 원에 이르는 돈을 냅니다. 독자 구독료 가운데 꽤 큰몫을 본사로 보냅니다. 신문사 지국으로서는 기자가 받는 달삯보다 훨씬 적은 돈을 독자 구독료에서 떼어 일삯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지국장쯤 되어야 그럭저럭 ‘살림을 꾸릴 달삯’이 될 뿐, 총무라 하여도 신문배달 달삯으로는 살림을 꾸리지 못합니다. 여느 일꾼들은 달삯이 몹시 적습니다. 지국에서 먹고자는 일꾼이 가장 잘 받고, 알바 대학생이 둘째로 받으며, 아줌마가 셋째로 받고, 중·고등학교 알바생이 넷째로 받으며, 초등학생이 막째로 받습니다. 똑같은 부수를 돌리더라도 받는 일삯이 꽤 크게 벌어집니다. 이렇게 계급을 두어야 지국장은 조금이나마 돈을 더 챙길 수 있고, 신문에 넣는 광고종이는 오로지 지국 몫인데, 이 몫은 으레 지국장이 다 챙깁니다. 이리하여, 신문 독자가 신문을 끊으면 지국은 벌이가 하나 줄 뿐 아니라 본사에 벌금을 물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신문배달을 그만두던 1999년까지 〈한겨레신문〉에서는 지국이 본사로 ‘독자 한 사람이 신문을 끊을 때마다 5만 원’씩 물도록 했습니다. 거꾸로, ‘지국에서 독자 한 사람을 늘리면 본사에서 5만 원’을 줍니다. 조·중·동이라 일컫는 신문사 지국은 이 ‘벌금이자 성과금’이 더 센 줄 압니다. 이런 형편을 아니까, 신문에 실리는 글이 영 못마땅해도 지국 일꾼들 살림살이가 걱정스러워 신문을 끊지 못했는데,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다가 서울을 떠나 시골집으로 살림을 옮기던 2005년에 이르러 겨우 신문을 끊습니다. 이때부터는 어떠한 신문도 보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은 1994년부터 끊습니다. 텔레비전 있는 집에 찾아갈 때라든지 밥집에서라든지 옆지기 어버이 댁에서만 방송을 봅니다. 있으니 같이 보는 셈인데, 신문을 읽던 지난날이든 더러더러 방송을 함께 봐야 하는 오늘날이든,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루는 이야기란 언제나 도시사람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도시사람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거의 모두 서울사람 이야기에 머뭅니다. 부산이나 대구 이야기라든지, 서울하고 가까운 인천 이야기라든지, 다른 도시 이야기는 참말 찾아보기 아주 어렵습니다. 신문과 방송은 95%가 서울사람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서울이라는 큰도시에서 제법 잘 사는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낍니다.

 만화책 《파란집》을 읽습니다. 만화대사 한 줄조차 없으나 만화책 《파란집》을 읽습니다. 만화책 《파란집》은 보는 만화가 아니라 읽는 만화입니다. 그림을 가만히 보고 넘기는 만화책이 아니라, 그림에 서린 이야기를 읽는 만화책입니다.


.. 희망을 안고 파란집에 끝까지 남았던 영혼들께 바칩니다 ..  (그린이 말)


 만화책 맨 앞쪽에 그린이 말이 깃듭니다. 만화책 《파란집》은 서울 용산에서 잿더미가 되고 만 가난하고 가녀린 사람들 삶을 담았다고 합니다. 아마, 서울 용산에서 철거민이라는 이름이 붙어 쫓겨나거나 죽어야 했던 사람들 삶만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가만히 헤아리면 서울 용산뿐 아니라 온나라 곳곳에서 쓸쓸하고 슬프게 쫓겨난 모든 가난한 사람들 삶터와 삶자락을 담았다고 해야 한결 알맞을 테지요.


.. 아내가 열이 나 아팠습니다. 그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라고 지나쳤는데, 오늘 제가 열이 펄펄 끓습니다. 제 몸이 아프니까 그제야 아내의 아픔이 이해가 됩니다. 왜 그때 좀더 관심을 갖고 잘 보살펴 주지 못했을까 후회가 되었습니다 ..  (그린이 말)


 만화책 맨 뒤쪽에 그린이 말이 다시 깃듭니다. 그린이는 늦쟁이라 할 만합니다. 제때 깨닫거나 알아채거나 보듬는 삶이 아니라 느즈막히 깨닫거나 알아채거나 보듬는 삶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도 느즈막히 헤아린다면 고맙지요. 느즈막히는커녕 죽는 날까지 못 헤아리는 바보스러운 사람이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데요. 대학교까지 나온들, 대학원까지 다닌들,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온들, 옳고 바르며 착하고 참된 삶을 살피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요.

 《파란집》이란 서울 용산에만 있지 않으며, 서울 용산에만 있을 턱이 없습니다. 게다가, 서울 용산 이야기는 그럭저럭 서울 한복판에서 살던 사람들 이야기라 신문에도 나고 방송에도 납니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한 줄로조차 안 다루는 온나라 곳곳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삶이 매우 많습니다. 이 많은 아픈 삶을 그려 주는 이는 드물고, 이 숱한 가난한 울음과 웃음을 고이 담아 주려는 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습니다.

 만화책 《파란집》을 보고 읽고 곰삭이고 되뇌고 돌아봅니다. 자그마한 내 살림집에서 올망졸망 오순도순 알뜰살뜰 지내던 사람들은 ‘더 커다란 돈’을 노리는 사람들 손아귀에서 생채기를 잔뜩 받은 채 쫓겨납니다. 재개발은 서울 강남 같은 데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데, 아주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값싼 땅을 아파트로 바꾸어 비싸게 팔아야 큰돈이 되지, 비싼 땅 아파트를 허물어 다시 지어서는 큰돈이 되지 않습니다. 재개발업자라든지 정부 건설 부서에서는 ‘땅값하고 집값이 싼 가난한 동네’를 이 잡듯이 뒤집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살림살이로 아기자기하며 아름다이 살아가는 동네일수록 재개발 값어치가 클 뿐 아니라 ‘이렇게 아기자기하며 아름다이 살아가는 동네란 늘 개발 반대 목소리가 불거지는 곳’이니 얼른 밀어내려고 합니다. 권력자한테는 돈이 큰 값어치일 뿐 아니라, 민주와 평화와 통일을 소담스레 나누는 공동체 또한 얄궂은 걸림돌이니까요. 돈은 돈대로 벌면서, 사랑스러운 작은 동네를 허물어야 검은 꿍꿍이를 언제까지나 이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갈 데가 없어 버티던 작은 사람들은 이슬이 됩니다. 또는 잿더미가 됩니다. 일자리가 없어 도시로 몰려들던 사람들은, 더 큰 도시로 찾아오던 사람들은 작은도시로든 시골로든 돌아가지 못합니다. 도시로 찾아와 일자리를 찾던 어버이가 낳아 키우던 아이들은 시골을 모릅니다. 시골로 갈 마음을 품기 어렵습니다. 치고박고 다투어야 하는 도시에서 내 작은 살림 꾸릴 뿐 아니라 ‘셋집에서 집임자로 거듭나기’를 꿈꿀밖에 없습니다. 똑같이 집삯을 내더라도 도시에서 일자리를 붙잡으며 도시에서 버티려 할 뿐, 시골 논밭을 일구며 스스로 벌고 스스로 쓰며 스스로 살아가는 땀맛과 손맛을 찾으려 하지 못합니다.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크루트라고 하나, ‘일자리를 알음알이 해 준다’는 여러 가지 매체가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마다 대학생 일자리를 걱정해 줍니다. 그런데 이런 일자리이든 저런 일자리이든 하나같이 도시에서 펜대를 붙잡거나 기계 손잡이를 붙잡는 일자리입니다. 쟁기와 낫과 삽과 호미를 드는 일자리란 없습니다. 시골에서조차 농업고등학교란 사라졌는데,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농사꾼 가르치는 학교는 없고, 농사꾼 가르치는 교과서 또한 없습니다. 게다가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 안 쓰면서 거름을 만들고 땅심과 밥심을 살리는 교과서란 아예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신문 귀퉁이라든지 방송 끄트머리에라도 실리지 않습니다.

 만화책 《파란집》은 도시에서 아프게 살 수밖에 없는 아픈 사람들 생채기를 살뜰히 그렸습니다. 그래요, 도시에서는 ‘파란빛’ 집이겠지요.

 그렇다면 ‘푸른빛’ 집이란 없으려나요. 하늘과 바다는 파란 빛깔입니다. 땅(흙)은 누런 빛깔입니다. 하늘(파랑) 기운과 물(파랑) 기운을 받으며 땅(누렁) 기운을 얻어 자라나는 새 목숨 풀·꽃·나무·열매는 푸른 빛깔입니다. 재개발 보상금이나 이삿돈은 그야말로 코딱지돈이라 할만큼 적은데, 이 적다 하는 돈은 도시에서는 적을지라도 시골에서는 적지 않습니다.

 꿈을 꿉니다. 저는 ‘파란집’ 꿈보다는 ‘푸른집’ 꿈을 꿉니다. 큰숲에 깃들던 작은 집에서 살던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 살림집은 바로 푸른집이었습니다. 재개발 보상금으로는 도시에서 새 살림집을 마련하기 힘들지만, 시골에서는 새 살림집을 넉넉히 마련하여 조용하고 오붓하며 신나게 살아갈 수 있답니다. 도시 한켠 가난한 골목동네를 싹 쓸어내어 재개발을 할라치면, 그래요 다 떠나 주지요. 다 옮겨 주지요. 한 동네 사람들 통째로 시골로 옮겨 가지요. 도시에서는 돈있고 힘있고 이름있는 사람들끼리 잘 살아 보라지요. 버스기사랑 전철기사도 가게 장사꾼도 청소부도 전기회사 일꾼도 헌책방 사장님도 택배기사도 모두모두 시골로 옮겨 주지요. 국회의원 대통령 재벌총수 의사 판사 검사 같은 분들만 도시에 덩그러니 남아 스스로 잘 살아 보라고 하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시골에서 스스로 땅을 일구며 스스로 작은 집에서 서로서로 벗삼으며 마을잔치 즐기며 살아갈 테니까, 가멸찬 분들은 도시에서 300평짜리 아파트를 지어 떵떵거리며 살아가라지요. 도시에서는 파랗디파랗 아파트를 높디높게 올려세우며 살라 하고, 시골에서는 푸르디푸른 살림집을 살붙이들 어우러질 만큼 조그맣게 마련하여 살아가면 되지요. (4343.10.27.물.ㅎㄲㅅㄱ)


― 파란집 (이승현 글·그림,보리 펴냄,2010.1.20./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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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0-2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사 지국은 〈조선일보〉이든 〈한겨레〉이든 지국을 차릴 때에 신문사 본사에 몇 천만 원에서 몇 억 원에 이르는 돈을 냅니다라고 하셨는데 조중동은 그렇다고 언젠가 PD수첩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한계레까지 그럴줄은 몰랐네요.

숲노래 2010-10-27 12:44   좋아요 0 | URL
제가 일하던 한겨레 서울 아무개 지국은, 어느 날 이런저런 회계정리를 하다가 문득 영수증을 보고 알았는데, 2천만 원을 내셨더군요. 그때에는 신문사 지국을 여는 데에도 경쟁이 많아 꽤 목돈을 내야 했습니다만, 한겨레신문 지국을 차리려는 이들은 신문이 잘 되기를 바라며 기부금처럼 낸다고 생각했다고 들었어요... 어찌 되었든 다 '장사'이니까 이런 돈을 받을밖에 없어요...
 
어제 뭐 먹었어? 1
요시나가 후미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는 만화를 읽으며
 [만화책 즐겨읽기 6] 요시나가 후미, 《어제 뭐 먹었어? (1∼3)》



 글책을 읽을 때에는 밑줄을 긋습니다. 그림책이나 만화책이나 사진책을 읽을 때에는 밑줄을 그을 수 없습니다. 글책을 읽으며 빈자리에 느낌글을 몇 줄 끄적인 다음 앞이나 뒤쪽 흰 종이에 쪽수를 적어 놓습니다. 나중에 다시 펼칠 때에 이 책을 읽으며 받은 느낌이 어떠했는가를 살필 수 있도록. 그림책이나 만화책이나 사진책을 읽을 때에는 느낌을 적바림할 빈자리가 없습니다. 책 앞이나 뒤 하얀 종이에 쪽수를 적은 다음, 이 옆에다가 느낌을 적바림합니다.

 만화책 《어제 뭐 먹었어?》를 이태 만에 다시 펼칩니다. 2008년에 1권이 나온 《어제 뭐 먹었어?》를 곧바로 사서 읽은 다음 2권이나 3권은 더 사지 않고 책시렁에 얌전히 모셔 두었습니다. 이태 앞서 이 만화를 본 다음 뒤엣권을 더 사고픈 마음이 들지 않아 더 안 사기도 했으나, 이 만화책을 놓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고이 묵혔습니다.

 새롭게 읽는 만화는 늘 새롭습니다. 예전에 열 번을 읽었든 백 번을 읽었든 언제나 새롭습니다. 줄거리를 떠올리며 ‘이제 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지?’ 하고 어림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예전에 읽을 때에는 놓친 그림이나 구석을 곰곰이 헤아리기만 합니다. 노상 새로 읽는 책으로 자리하는 만화입니다. 글책을 읽을 때이든 사진책을 읽을 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뭐 먹었어?》 1권을 다시 읽으며 ‘느낌이 와닿는 대목’에서 한동안 눈길을 멎은 다음 책 앞쪽 흰 종이 자리를 들여다봅니다. 책을 다시 읽고 덮기까지 모두 네 차례 눈길이 멎고, 네 차례 눈길이 멎은 쪽수를 헤아리니 이태 앞서 이 책을 읽으며 눈길이 멎을 때하고 똑같습니다.


.. ‘흠, 저녁 준비는 정말 대단해. 일을 깔끔히 마무리지었을 때나 느끼는 보람을 하루에 한 번은 맛볼 수 있으니. 이 뿌듯함 속에서 오늘 하루를 마무리지을 수 있을는지.’ ..  (13쪽)


 첫째, 《어제 뭐 먹었어?》는 밥하기를 즐기는 아름다운 마음을 살뜰히 그립니다. 밥하기는 숱한 살림일 가운데 하나이며 몹시 커다란 살림일입니다. 옷도 때 맞춰 잘 빨아야 하고 이부자리도 느긋해야 하는데, 끼니때에 끼니를 잘 챙기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밥하기를 살뜰히 그리며 아름다운 살림임을 보여주는 작품은 드뭅니다. ‘요리와 맛’을 다루는 작품만 쏟아지는 오늘날이거든요.

 그런데 《어제 뭐 먹었어?》에 나오는 밥하기란 ‘요리와 맛’이 아닌 ‘여느 살림꾼 삶자락’이기는 하나,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값이 더 싼 먹을거리’를 ‘마트’에서 삽니다. ‘마트에 들어오는 먹을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공산품 먹을거리’에 어떤 성분이 깃들었으며, 어떤 화학 양념과 물질이 스몄는가를 살피지 않아요. 더군다나, 일본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널리 잘 퍼진 생활협동조합 물건은 한 차례조차 안 씁니다.

 만화를 보는 분들이 눈여겨보는지 모릅니다만, 다카하시 신 님이 그린 《좋은 사람》이라는 작품을 보면, 이 만화 주인공 아가씨는 먹을거리를 살 때에 언제나 ‘생협 목록’을 들여다봅니다. 딱 한 번인가 두 번, 이 그림이 나오는데, 다카하시 신 님이 남달리 생각하여 ‘생협에서 먹을거리 장만하기’를 그렸다 할 수 있으나, 일본에서는 조금 생각있게 사는 사람뿐 아니라 여느 사람한테까지 ‘공산품 아닌 생협 물건’을 써야 하는 줄 퍽 널리 퍼져 있다 할 만합니다.

 생협 물건이 마트 물건과 견주어 ‘아주 비싼’ 값이 아닐 뿐더러, 생협 물건이 더 값쌀 때가 있기도 합니다. 아니, 더 값싸다 해야 옳겠지요.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안 쓴 능금 한 알을 1500원에 파는데, 굵고 소담스러운 능금 한 알 또한 1500원을 웃돌기 일쑤입니다. 생협 소시지하고 마트 좋은 소시지, 생협 세겹살과 마트 좋은 세겹살 값은 그닥 안 벌어집니다.


.. “대형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면 많이 벌기야 하겠지. 하지만 죽도록 일에만 매달려야 할 테니 시급으로 치면 편의점 알바비 정도일걸. 난 적당히 벌면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 이거야.” ..  (15쪽)


 둘째, 《어제 뭐 먹었어?》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뜰히 그립니다. 만화를 옮긴 분은 “적당히 벌면서”라 적었습니다만, 한자말 ‘적당’을 넣은 이 대목은 자칫 잘못 읽힐까 걱정스럽습니다. 이 대목은 “난 알맞게 벌면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쯤으로 옮겨야 했을 텐데요. 잘못 읽으면 “적당히 벌면서”는 “대충 벌면서”처럼 되고 맙니다.

 그나저나,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 돈만 왕창 번들 무슨 보람과 재미와 기쁨이 있겠습니까. 《어제 뭐 먹었어?》를 보면 주인공이 동성애를 하건 말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건 머리방에서 일하건 남다르지 않습니다. 막일을 하건 교사로 일하건, 대통령으로 일하건 시장으로 일하건 다를 구석이 없어요. 저마다 내 꿈을 알맞게 키우며 내 삶을 알맞게 누릴 수 있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 “사장님은 손님들한테 자기 부인이랑 자식들 얘기 한다구. 왜 난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해 입 닫고 살아야 하는데……?” ..  (57쪽)


 셋째, 《어제 뭐 먹었어?》는 수수하게 살아가는 재미와 멋을 수수하게 그립니다. 자랑이 아니요 떠벌임도 아니지만 감출 일이라거나 숨길 일 또한 아닌 삶입니다. 돈이 제법 있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며 감출 일이 아닙니다. 돈이 하나도 없다 해서 숨길 일이 아니나 떠벌일 일 또한 아니에요. 그저 똑같이 사랑스러운 우리 삶입니다. 그예 한결같이 고운 내 삶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내 살붙이입니다. 우리가 아끼는 우리 벗님이자 이웃입니다.

 몸이 아픈 옆지기를 걱정하면서 옆지기가 아픈 몸으로도 늘 즐겁고 사랑스레 살아갈 수 있기를 비손하는 얘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몸이 튼튼한 옆지기라면 몸이 튼튼해서 좋다는(몸이 여리다면 몸이 여려서 여린 대로 좋다는) 얘기를 오순도순 나눌 수 있습니다. 내 사랑이 가서 닿는 삶이고, 네 사랑이 와서 닿는 삶이에요.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는 삶이랍니다.


..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두렴. 어머니는 네가 게이나 범죄자여도 네 전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말야!” ‘……. 어머니한텐 내가 범죄자하고 동격이로군.’ ..  (156∼157쪽)
 

 넷째, 《어제 뭐 먹었어?》는 꾸밈없이 어우러지는 빛깔을 그립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꾸밈없이 어우러지면 됩니다. 꾸밀 때에는 어우러지지 못합니다. 꾸미니까요. 꾸미기에 숨겨지니까요. 꾸미기에 허울을 뒤집어쓰고 마니까요.

 이렇게 네 가지로 알차면서 재미난 작품 《어제 뭐 먹었어?》라고 느낍니다. 그림결은 깔끔하고 줄거리나 이야기에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어느 하나 빠지지 않아요. 어느 구석이든 허술하지 않습니다. 참 잘 그린 만화라고 생각합니다. 널리 사랑할 만하고 두루 사랑받을 만합니다.

 다만, 저는 이 만화책은 1권 하나로 넉넉하다고 느낍니다. 1권 하나를 보았어도 즐겁다고 여깁니다. (4343.10.24.해.ㅎㄲㅅㄱ)


― 어제 뭐 먹었어? (1∼3) (요시나가 후미 글·그림,노미영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08∼2010/5000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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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비치는 언덕길 : 바닷마을 다이어리 3 바닷마을 다이어리 3
요시다 아키미 지음,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수수하게 살면서 곱고 착한 이야기
 [책읽기 삶읽기 18] 요시다 아키미,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



 《이브의 잠》이나 《바나나 피쉬》나 《러버스 키스》라는 만화책을 그렸다는 요시다 아키미 님이 새롭게 그리는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가운데 3권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을 보다. 이분 다른 만화책도 보고 싶은데 만화책방에 갈 때마다 사야지 사야지 하다가는 잊고 만다. 아직 다른 만화책들은 판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내가 더 까먹지 않는다면 즐겁게 장만해서 읽을 수 있겠지.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요시다 아키미 님이 새롭게 그리는 책에 붙인 큰이름인데, 일본글로는 ‘海街diary’로 적는다. 그러면 이 이름을 한글로 옮길 때에는 ‘바닷마을 일기’나 ‘바닷마을 이야기’나 ‘바닷마을 편지’쯤으로 옮겨야 알맞은데, 엉뚱하게 ‘다이어리’라 적고 만다(이 나라 만화책 출판사 편집자 마음씀이 아쉽다). 일본사람은 워낙 영어를 일본말인 듯 여기며 함부로 자주 쓰지 않는가. 그러나 일본뿐 아니라 한국 또한 영어를 참 쉽게 쓴다. “열린 마음”이나 “너른 마음”이라 말할 줄 아는 오늘날 한국사람은 퍽 드물다. 으레 “오픈 마인드”를 주워섬긴다. 몇 해 앞서부터 시월 끝무렵에 한국방송국(KBS 아닌)에서 벌이는 책잔치 이름은 “책잔치”가 아닌 “북쇼”이다.

 만화쟁이 요시다 아키미 님은 ‘바닷마을 일기’를 어느덧 세 권째 그린다. 첫째 권은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2009.5.)이고, 둘째 권은 《한낮에 뜬 달》(2009.12.)이며, 셋째 권은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2010.10.)이다. 앞으로 몇 권까지 더 그릴는지 모른다만, ‘바닷마을 일기’는 일본에서 ‘카마쿠라’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복닥이는 삶을 담아낸다. 언뜻 보기에 아무 이야기가 없을 듯하다 여길 수 있고, 썩 재미난 일이 없다 생각할 수 있는, 참 작은 시골마을(또는 작디작은 도시이거나 시골 읍내쯤) 사람들 여느 삶을 수수하게 보여준다. 우리로 치면 우리 식구가 살아가는 신니면 산골마을 이야기라 할 만하고, 전라도 고흥군 풍양면 바닷마을 이야기라 할 만하다. 이 작디작은 시골마을 사람들이 하루하루 벌이는 자그마한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 ‘바닷마을 일기’이다.

 일본 만화라서 자잘한 대목을 잘 들여다보며 알뜰살뜰 만화 하나로 엮는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한국 만화라서 자잘한 대목은 들여다볼 생각 없이 더 잘 팔리거나 더 눈길을 끌거나 더 남다르다 싶은 이야기에 휩쓸린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삶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내 집에 텔레비전을 안 들여놓고 내 살붙이와 동무랑 오순도순 지내는 맛을 안다면, 살붙이와 동무랑 복닥이며 하루를 빠르게 보내는 삶으로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눈물과 웃음이 있는가를 깨닫는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재미있거나 아름답거나 거룩하거나 놀랍거나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는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저마다 마음속에 품는 짝사랑 하나로도 끝없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가슴에 차츰차츰 커 가는 또다른 사랑과 믿음 또한 그지없이 깊은 이야기로 여미기 마련이다. 어른들이 나누는 사랑은 어떠할까. 어른들이 하루하루 꾸리는 삶은 어떠한가. 아이들이 학교 안팎에서 배우거나 놀거나 일하거나 어울리는 삶은 어떠하겠는가.

 날마다 일기를 꼬박꼬박 적어 보는 사람은 알 테지. 한 해 삼백예순닷새 일기 가운데 똑같이 적바림하는 일기란 나오지 않는다. 날마다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고 생각할지라도 날마다 똑같은 낱말과 말투로 똑같은 이야기를 똑같은 글자수로 적바림하는 일이란 없다. 나 스스로 똑같다 잘못 생각할 뿐, 어느 하루조차 똑같을 수 없다.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한달지라도 날마다 날씨가 다르며, 날마다 마주하는 사람이 다를 뿐 아니라, 날마다 마주하는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라든지 보내는 겨를은 다르다. 햇살이 드리울 때하고 비가 쏟아부을 때가 다르다. 옷장에서 꺼내어 입는 옷이 다르다. 빨래를 할 때에 드는 품이 다르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이야기가 다르며, 텔레비전 구경을 좋아한다면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이야기 또한 다르다.

 바닷마을 일기 셋째 권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을 가득 채우며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 같은 말마디를 하나하나 되씹어 본다.


- “어쩔 수 없지. 그런 부분까지 다 좋아했던 걸 테니까.” (19쪽)
- ‘길지 않았지만 친구들도 생겼었고, 산도 강도 깨끗하고, 마을도 사람들도 다정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 오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가족 따윈 바라지 않았다.’ (24∼25쪽)
- ‘유아, 눈치 채고 있었구나. 병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게 된 유야. 나서서 허드렛일도 챙기고, 혼자서 잠자코 재활 연습을 하고. 강하구나. 게다가 자상하기까지 하다. 뭐니,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50∼51쪽)
- “그저 행복해지고 싶다는 건데 그럼 안 되니?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게 보통 일인 줄 알아? 병 때문이라고 머리로는 이해해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75쪽)
- “응. 곱게 유카타도 차려입었어.” “유카타라.” “그에 비하면 우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고.” “어쩔 수 없잖아. 우리 집 배는 고기잡이 배니까 차려입으면 불편하다고. 슈퍼 비닐봉지나 들고 있고. 딱 아줌마네.” “하지만 과자가 없으면 아쉬우니까.” “피부도 까맣고.” “어쩔 수 없잖아. 밖에서 뛰는 축구부니까.” (86쪽)
- ‘지금쯤 유아도 어딘가에서 이 불꽃을 보고 있을까? 그 아이와 함께. 유아의 다리에 대해 알면서도 사귀는 걸 테니 분명 좋은 아이겠지. 유야의 다정함과 배려는 다른 모두에게도 평등하게 향해 있던 거구나.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었더. 유아는 잘못한 게 없어. 내가 멋대로 착각했을 뿐. 하지만 그 아이를 향한 유아의 마음은 역시 조금은 특별한 거겠지?’ (94∼95쪽)



 만화책을 보면서 잘 그린 그림이라서 집어드는 일은 거의 없다. 더없이 멋진 그림이구나 싶어 집어드는 만화책이란 아예 없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림책을 볼 때에는 참 잘 그렸구나 싶은 책을 사들 때가 있기도 하다만, 그림만 잘 되어 있을 때에는 몇 번 넘기기 힘들다. 솜씨만 빼어난 그림이라면 벽에 걸어 놓고 오래오래 두고두고 바라보기 어려우니까. 내 마음을 건드리는 만화나 그림이어야 즐겁게 넘기고 다시 넘기며 우리 딸아이한테까지 물려줄 만하니까. 내 삶을 밝히거나 빛내는 고운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이거나 그림책일 때에 비로소 기쁘게 장만하여 우리 집 책꽂이에 예쁘게 꽂아 놓으니까.

 요시다 아키미 님 만화를 보면서 이분 만화결이 빈틈이 없다거나 예쁘장하다거나 맛깔스럽다거나 하고 생각해 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결인지 아닌지조차 느끼지 않는다.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이든 《한낮에 뜬 달》이든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이든 수수하게 붙인 책이름부터 마음을 사로잡는다. 도시사람 뻔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시골사람 자잘한 이야기로 스며들어 엮은 줄거리가 내 마음을 얼싸안는다. 작은 사람들 작은 이야기를 살가이 보듬는 만화쟁이 마음씨를 느끼며 고맙다고 느낀다.

 따지고 보면, 만화결이 훌륭하다고 이 만화책을 사지 않듯이 글솜씨가 빼어난 작품이라 해서 이 글책(문학책이든 인문책이든 예술을 다루는 책이든)을 사지는 않는다. 토박이말을 잘 살린 작품이라 해서 뛰어나거나 즐겁거나 아름다운 문학이 될까? 현대문학에서 손꼽힌다 하는 작품이라 하여 멋지거나 재미나거나 고운 문학이 될까? 노벨문학상을 탄다 한들, 이상문학상을 탄다 한들, 아쿠타가와상을 탄다 한들 무엇이 다르려나. 훌륭하기에 상을 받는 작품이 되기도 하지만, 상을 받은 작품이 내가 읽어서까지 빛깔 곱거나 아리따운 삶으로 녹아드는 이야기이지는 않다. 나는 내 마음을 따스하고 넉넉하게 일구는 데에 길동무가 될 좋은 이야기 담은 책 하나를 만날 수 있으면 흐뭇하다.

 조용하거나 한갓지다 느낄 수 있고, 들뜨거나 두근거린다 느낄 수 있는, 차분하면서 따사로운 말마디를 거듭거듭 되뇌어 본다.


- ‘산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지도 몰라.’ (104쪽)
- “유야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안 순간, 실은 나 조금 안심했어. 혹시 유야랑 스즈가 사귀게 되어서 그런 두 사람을 계속 곁에서 봐야 한다면, 나 분명 속상해서, 속상해서 …….” (107쪽)
- ‘어쩐지 이상하다. 1년 전에 만약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언니와 ‘자매’가 되는 일은 없었겠지. 마찬가지로 요시노 언니나 치카 언니와도 ‘자매’가 될 수 없었을 거다. 옥토퍼스(축구단)의 친구들도 감독님도 만날 수 없었다. 만약 아빠가 암으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그 야마가타의 작은 온천 마을에서 또다른 ‘가족’과 지금도 살고 있었겠지. 진학에 대해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이 달콤한 간식도 먹거나 …….’ (128∼129쪽)
- ‘그때 언니는 잠자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봈다. 딱히 슬퍼하거나 하지 않은 채, 그렇지만 무언가 알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133쪽)
- “그리고 그 ‘정말 소중한 것’은 누가 봐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74쪽)
- “사과하시더라구. 지금껏 못난 딸이 붙들고 있어서 미안했다고. 솔직히 마음이 편치 않았어. 날 원망할 때가 훨씬 편했어. 부부는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그분들은 나처럼 도망칠 수도 없을 테니까.” (179쪽)
- ‘마음의 병을 앓는 아내와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앙금처럼 쌓여 앞으로도 절대 지워지지 않겠지. 나는 그걸 계속 지켜볼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에게도 그의 아내에게도 불만을 쌓아 가는 나 스스로에게도 짜증이 났다. 그래도 행복했던 그 시간들. 그건 대체 뭐였던 걸까?’ (183∼184쪽)


 좋은 문학이란 무엇일까. 고운 문학이란 무엇인가. 맑은 문학이나 밝은 문학, 또는 기쁜 문학이나 예쁜 문학이란 어떤 모습이려나. 참된 문학이나 착한 문학을 생각해 볼 수 없나. 내 좋은 삶을 꿈꾸며 좋은 문학을 찾거나 즐기면 어떠하려나. 내 고운 삶을 일구려는 매무새로 고운 작품 하나 어깨동무한다면 내 삶은 어떻게 거듭날까. 착한 넋 착한 이 착한 말 착한 꿈 착한 삶으로 이어지는 착한 만화를 생각하며 하루하루 보낸다면 내 몸은 어떻게 달라질까.

 제법 사랑받으며 읽히는 만화 ‘바닷마을 일기’일 테지만 아주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리라 본다. 꽤 두루 팔리기도 만만하지는 않으리라. 어쩌면 ‘바닷마을 일기’를 그린 요시다 아키미 님은 당신이 그리는 이 만화를 100만 사람이나 1000만 사람이 읽고 가슴 뭉클히 받아들여 주리라 바라지 않겠지. 10만이 아닌 1만 사람일 뿐이더라도, 1만조차 아닌 1천 사람이나 1백 사람일지라도, 가슴으로 따뜻하게 껴안아 줄 고운 벗을 기다리지 않을까 싶다. 그린이가 먼저 스스로 착한 사람으로 살면서, 읽는이 또한 스스로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곱고 맑은 온누리에서 즐거이 어깨동무할 보금자리를 바라 마지 않겠느냐 싶다. (4343.10.16.흙.ㅎㄲㅅㄱ)


―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 (요시다 아키미 글·그림,이정원 옮김,애니북스,2010.10.20./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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