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톰의 철학
사이토 지로 / 개마고원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싸움판에서 길어올린 평화꽃
 [헌책방에서 만난 책 6] 사이토 지로, 《아톰의 철학》



- 책이름 : 아톰의 철학
- 글 : 사이토 지로
- 옮긴이 : 손상익
- 펴낸곳 : 개마고원 (1996.8.20.)


 (1) 평화를 사랑하는 아톰


 일본에서고 한국에서고 널리 사랑받거나 알려진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만화책으로는 1951년부터 그렸고, 만화영화로는 1963년부터 빚었다고 하니, 아주 놀라운 작품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우주소년 아톰〉이 제대로 읽히거나 올바로 읽혔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거의 ‘저패니메이션 앞잡이’쯤으로 읽힌다든지 ‘전쟁에 진 일본사람들한테 꿈과 사랑을 심어 준 만화’쯤으로 이야기하고 그칩니다.

 〈우주소년 아톰〉을 제대로 보았다거나, 제대로가 아니더라도 차분하게 만화책 한 권 만화영화 한 편을 보았다면, ‘저패니메이션 앞잡이’라든지 ‘전쟁에 진 일본사람들한테 꿈과 사랑을 심어 준 만화’라는 말은 섣불리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소년 아톰〉을 비롯한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작품은 ‘저패니메이션’이라든지 ‘전쟁에 져서 시름하는 사람한테 꿈을 심는’ 흐름하고는 사뭇 동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만화를 사랑해서 만화를 그린 데즈카 오사무 님이요, 전쟁을 싫어해서 싸움박질은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한결같이 만화로 담은 데즈카 오사무 님입니다.


.. ‘로봇이니까, 동물이니까’라는 차별로 경계선을 긋는 어리석음에 대해 데즈카는 비판한다 …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에서 출발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왜 서로 미워하고 죽여야만 하는 걸까. 진정으로 지켜야 할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단호히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미래의 로봇 이야기를 통해 데즈카는 계속 묘사했던 것이다 … 데즈카는 〈마짱의 일기장〉부터 마지막 작품인 〈네오 파오스트(1988)〉에 이르는 모든 작품에서 철저하게 전쟁을 부정한다. 또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지배하는 것을 부정한다. 따라서 그의 만화가 생명의 소중함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  (18, 23, 59∼61쪽)


 만화 〈우주소년 아톰〉에 나오는 ‘아톰’은 몇 가지 장치가 있습니다. 아톰은 일곱 가지 숨은 힘이 있다고 하는데, 아톰이 내는 힘은 10만 마력이지만, 100만 마력이나 200만 마력 힘을 뽐내는 로봇하고 싸워도 거뜬히 이깁니다. 어느 로봇이나 전자두뇌하고 인공지능이 있으나, 아톰한테만큼은 다른 로봇한테 없는 ‘사랑하는 마음’과 ‘슬퍼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슬퍼하는 마음은 곱게 어우러지면서 슬기로 거듭납니다.

 무엇보다 아톰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로봇이요, ‘나쁜 일을 할 수 없’는 로봇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로봇을 만들 때에도 비슷하게 만들기는 하는데, 아톰을 만들 때에는 더 빈틈없이 ‘거짓말 못하도록’ 만들고 ‘나쁜 일 안 하도록’ 만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사람들은 ‘거짓말 못하는 아톰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안 믿기 일쑤입니다. 게다가 ‘나쁜 일 할 수 없’는 아톰을 자꾸자꾸 싸움판으로 끌어들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나쁜 짓 저지르는 전쟁무기와 전쟁로봇을 끊임없이 만들어 모진 뒤탈이 생기니, 이 뒤탈을 아톰이 마무리해 달라고 바랍니다. 아톰 또한 로봇이기에 제아무리 ‘싸움꾼 로봇’이라 할지라도 ‘동무 로봇’을 망가뜨리거나 죽여야 할 때에는 몹시 괴롭고 슬픕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아톰이 다른 로봇을 부수면서 얼마나 슬퍼하는가를 헤아리지 못하거나 깨닫지 않습니다.


.. 그러나 버려졌다고는 해도 그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로봇)이지, 원래부터 전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아니었다. 나중에 나온 로봇만화들은 이 ‘출생의 비밀’을 무시하고 전사의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다 … (만화 〈뱀파이어〉에서) 이 연설은 계속 이어진다. 그는 인간들에게 “원시인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옷을 입는 것도 그만두고, 돈을 없애고, 회사도 학교도 없애 버리자고 주장한다. 어처구니없는 주장임에는 틀림없지만, 언뜻 공감을 느끼게 하는 내용 같지 않은가? 통제되고 관리되는 사회의 억압에 인간들은 진저리를 치고 있다. 야수가 뭐가 나쁜가. 그것이야말로 ‘생명 그 자체’라는 주장이 오히려 매력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  (22, 101쪽)


 《아톰의 철학》이라는 책은 아톰과 같은 로봇을 만든 뜻을 잘 읽습니다. 아톰은 사랑받도록 하려고 만든 로봇입니다. 아들을 교통사로 잃은 텐마 박사가 제 아들로 삼으려고 만든 로봇이 아톰입니다. 아톰은 나중에 ‘사람이 저지른 잘못을 풀어 주는 원자력 로봇’이라는 뜻으로 오차노미즈 박사가 새로 붙인 이름 ‘아스트로 보이’를 줄인 ‘아톰’일 뿐, 제 이름은 텐마 박사 아들과 같은 이름 ‘토비오’입니다.

 그러니까 아톰은 ‘아톰’일 때에는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을 벗삼고픈 넋을 느긋하게 누리지 못합니다. 아톰은 ‘토비오’가 되어야 비로소 사람들 싸움판과 시끌벅적한 도시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호젓하게 제 삶을 누릴 수 있어요.

 돈도 좋아하지 않고 이름값도 바라지 않으며 1등이나 경제성장 따위란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 아톰입니다. 착한 사랑을 바라고 따순 믿음을 꿈꾸며 너른 손길을 아끼는 아톰입니다. 모진 짓을 하는 나쁜 사람일지라도 목숨은 건져 놓아야 한다고 여기는 아톰입니다. 누구한테나 목숨은 보배롭다고 느끼는 아톰이에요. 사람이든 로봇이든 함부로 죽여서 안 될 뿐 아니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아톰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길을 걸어야 하고, 목숨을 선물받은 누구나 이 고마운 목숨을 아끼면서 사랑해야 한다고 여기는 아톰이에요.


.. 생명을 구하고 구할 수 없고 하는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생명과 마주할 수 있는 것, 눈앞의 타인에게 순수하게 동화되어 가는 태도 그 자체가 휴머니즘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사랑과 공감의 연대감도 휴머니즘이 아닐까 … 블랙잭은 엄청난 보수를 요구하는 것으로 오히려 명예욕이라든지 출세욕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잡념에서 자기 자신을 해방시킨다. 성장도, 생명을 가지고 노는 악마도 되지 않았기에 깨끗한 것이다 … 인간의 마음을 탐구해 보고 거기에서 진심어린 삶에 대한 열정을 찾아냈을 때 허무적인 블랙잭의 눈에도 언뜻 ‘부드러운 빛’이 머무는 것이다 … 한계가 있는 생명이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살며 삶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 아니냐고 말한 불새의 첫 메시지를 ..  (128, 131, 186쪽)


 생각해 보면, 《아톰의 철학》 같은 책부터 옳게 읽힐 때에 〈우주소년 아톰〉 또한 옳게 읽히리라 생각합니다. 데즈카 오사무라 하는 일본 만화쟁이를 왜 일본에서 그처럼 높이 우러르거나 섬기는가를 참다이 살펴야 합니다. 벌써 1960년대부터 대단한 만화영화를 빚기도 했고 미국으로 만화영화를 팔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돈벌이나 이름값으로서 데즈카 오사무 만화가 빛나지 않습니다. 데즈카 오사무 만화는 1950년 〈정글 대제〉부터 1989년 〈아돌프에게 고한다〉까지 한결같은 목소리로 ‘전쟁 싫어 평화 좋아’ ‘미움 싫어 사랑 좋아’를 이야기한 작품이기 때문에 빛납니다. 자그마치 마흔 해 동안 쉬지 않고 ‘사랑 만화’를 그린 데즈카 오사무 님이기 때문에 그토록 빛나는 별입니다.

 다만, 데즈카 오사무 님은 사랑과 평화를 아끼나, 일본을 비롯한 뭇 나라들은 사랑과 평화를 아끼지 않습니다. 온통 미움과 돈과 싸움뿐입니다. 기계 물질문명에 자꾸 찌들기만 합니다. 크나큰 도시가 더 커지기만 하며 자연을 짓밟습니다. 이리하여 데즈카 오사무 님은 슬픈 삶터에서 슬프게 울면서 따순 넋을 고이 건사하려는 ‘레오’를 ‘아톰’을 ‘사파이어’를 ‘블랙잭’을 ‘도로로’를 하나하나 그려서 선보입니다.


 (2) 평화를 모르는 아이들


 일본 만화 《맨발의 겐》이나 《농농 할멈과 나》를 보노라면 아이들끼리든 어른들끼리든 싸움박질하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일본 소설 《엄마 없는 아이와 아이 없는 엄마와》를 읽을 때에도 싸움이 잦은 일본 아이들 삶을 어렵잖이 헤아립니다. 어린 날 국민학교에서 이순신 전기를 읽을 때에도 허구헌날 전쟁놀이를 하던 아이들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 또한 어린 날 이야기로만이 아니라 삶으로도 늘 전쟁놀이를 즐겼고, 온통 싸움판이었다고 느낍니다.

 아이들끼리도 툭탁툭탁 싸움이 그치지 않고, 어른들은 무시무시한 몽둥이와 방망이를 들고 돌아다니며 윽박지르거나 두들겨패기 일쑤였습니다. 골목마다 담배 꼬나문 깡패가 버티면서 돈을 울궈내곤 했습니다. 혼자 골목을 다니다가는 동네 깡패라든지 학년 높은 선배란 사람들이 주먹질을 하거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요사이도 뒷골목에 동네 깡패가 어기적거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요사이는 푼돈을 노리는 깡패는 거의 사라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치안이 나아져서 깡패가 사라졌다기보다 더 큰 돈을 노리며 놀음놀이판으로 옮겨 갔기에 자취를 감춘다고 느낍니다. 더욱이, 이제는 맞돈을 안 갖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요. 카드만 챙기는 사람이 많으니 주먹다짐으로 족치더라도 건질 국물이 없을 만합니다.


.. 흥미진진한 전개를 바탕으로 하는 데즈카 만화의 스토리는 변화가 풍부한 구도와 격렬한 움직임, 그리고 이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스피디한 장면 연출의 신선함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 1951년 《소년》에 〈무쇠팔 아톰〉의 전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톰대사〉가 연재되었고, 1952년 4월호부터는 〈무쇠팔 아톰〉이 본격 등장해 16년 간이나 연재된다. 1954년에는 《소녀클럽》에 〈리본의 기사〉가 등장한다. 소녀만화 장르에 처음으로 제대로 골격을 갖춘 스토리 만화가 탄생된 것이다 ..  (16∼17쪽)


 지난날 아이들 삶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1700년대나 1600년대나 900년대나 500년대 아이들 삶을 헤아려 보고 싶습니다. 그때에도 아이들은 싸움박질과 싸움놀이로 하루해를 보냈을는지 궁금합니다. 돌을 던지고 나무몽둥이를 휘두르는 싸움박질과 싸움놀이를 그토록 재미나게 즐겼는지 궁금합니다.

 오늘날은, 또 앞으로는 돌을 함부로 던진다든지 나무작대기를 아슬아슬 휘두른다든지 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도시에서는 주워서 던질 만한 돌을 찾기도 힘들 뿐더러, 나무작대기가 어디 있습니까. 제 어릴 적에는 돌이나 나무작대기는 아주 흔해서 새총도 고무줄만 있으면 쉬 만들었고, 야구방망이 없으면 마땅한 나무막대를 어디에선가 주워서 쓰곤 했습니다. 작은 돌멩이랑 나뭇가지로도 야구놀이를 했습니다. 흙바닥에서 돌을 굴려 땅따먹기라든지 돌치기를 합니다. 드물게 아스팔트를 깔아 놓은 데가 있으면 큰돌을 쥐고 아스팔트 바닥을 죽 그으면 하얗게 금이 그려집니다. 아스팔트를 깔아 자동차를 세우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돌멩이로 아스팔트 바닥을 죽죽 긋는 모습을 보면 놀라자빠지겠지요. 길을 다 망가뜨린다며 돌을 던지며 내쫓겠지요. 흙바닥은 흙바닥대로 금을 긋기 좋고, 아스팔트는 또 아스팔트대로 까만 바닥에 하얀 금이 재미났습니다.

 동네 나무도 타고 학교 나무도 탑니다. 학교 동상에 올라타며 놀기도 하고, 나즈막한 5층짜리 아파트 옥상에 몰래 올라가 놀기도 합니다. 꾸중을 듣건 말건 처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놀기에 바쁘고 놀기가 즐거우니, 나중에 꾸중을 들어 눈물콧물 쏙 빼더라도 금세 잊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이가 아빠한테 날이면 날마다 꾸중을 들으면서도 잔뜩 어지럽히는 놀이를 하든 자리에 누운 아빠 배나 무릎에 올라앉든 하는 모습도 매한가지라 할 만하겠군요.


..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발표된다는 기약도 없는 만화를 매일매일 그려 나갔던 데즈카. 만화를 그리는 것도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던 전쟁이란 상황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만약 또 전쟁이 일어나 자유롭게 만화를 그릴 수 없는 사회가 된다면 큰일이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가 이 젊은 만화가를 열정적으로 만화에 매달리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 목숨을 걸고 탈주했으면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엔 다시 훈련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도망친다는 건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강제력을 전쟁은 가지고 있다. 반역자 비국민으로 낙인찍히거나 또는 린치를 당해 죽을 각오가 없는 한 탈출구가 없는 세계, 그것이 전쟁이다 ..  (45, 48쪽)


 치고박으면서 다투는 이야기를 그리는 만화나 영화를 자주 보면, 저절로 치고박으면서 다투는 삶에 젖어듭니다.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나 영화를 즐겨 보면, 시나브로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삶으로 촉촉히 젖습니다. 치고박으면서 다투는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은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이야기를 따분해 하기 마련입니다.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은 치고박으면서 다투는 이야기가 못마땅하거나 거북하기 마련입니다.

 전쟁놀이란 참 용합니다. 서로서로 맞선 동무를 죽이려고만 들지, 내가 먼저 죽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맞붙은 동무를 죽여야 내가 산다고 여기지도 않는데다가, 서로서로 맞붙은 동무를 죽이면서도 죽이는 줄을 느끼지 않습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쉽게 죽여야 그럴듯한 장군이라도 되는 듯 우쭐거립니다. 죽음이나 죽임이 무언지를 깨닫거나 헤아리지 않습니다. 다치거나 죽어 꼼짝을 못하는 아픔이 어떠하고,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 살붙이는 어떠한 마음일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쪽(아군)하고 저쪽(적군)이 왜 서로를 미워하면서 싸우는지를 살피지 않아요. 전쟁놀이는 그냥 두 편으로 갈라 치고박아야 하는 싸움판일 뿐입니다.


.. 데즈카는 단 한 번도 젊은 세대에게 ‘전쟁이라는 것은 이렇게 엄청난 것이다. 그런 것도 전혀 경험하지 못한 너희들은 편안히 잘도 지내는구나’라는 식의 훈계 따위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만화라는 그릇에다 ‘마음’을 담아서 생명의 소중함(인간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포함해서)을 호소했고, 생명을 위협하는 악과 계속 싸웠던 것이다 … 사명감에 들떠 자기주장만을 만화에 가득 채우는 방식을 이 스토리 만화의 창시자는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품의 주제에 작가가 오히려 얽매여 버린다면 재미있는 만화는 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나 보는 쪽에서도 ‘만화는 자유로운 것이어야 한다’고 데즈카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  (61, 64쪽)


 이제 요즈음 아이들은 예전처럼 전쟁놀이를 몰려다니면서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몰려다닐 겨를이나 땅이 아예 없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집집마다 틀어박혀서 싸움판과 같은 전쟁게임을 합니다. 아주 멋진 무기를 마음껏 휘두르면서 숱한 목숨을 거리낌없이 죽이고 베고 없앱니다. 미국 폭격기가 높다란 하늘에서 미사일과 폭탄을 쏟아부으며 ‘누가 죽고 어떤 집이 무너지는지’는 하나도 모를 뿐더러 생각조차 않듯, 전쟁게임을 즐기면서 전쟁이란 참말 무엇인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몰려다니며 전쟁놀이라도 하면, 때때로 다치고 엎어지고 깨지고 울고 하면서 가끔이나마 아프기라도 하지요. 오늘날은 아예 아파할 일이 없고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으며 함께 아파하거나 걱정하는 동무가 없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전쟁게임은 숫자로 실적을 올립니다. 숫자로 점수를 쌓습니다. 정치며 사회며 시민단체며 숫자를 셉니다. 숫자 아닌 사람을 마주하거나 숫자 아닌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평화를 배우지 못하고, 평화를 느끼지 않으며, 평화를 가까이하는 삶이 아닙니다. 어른들 또한 평화를 가르치지 못할 뿐더러, 새롭게 꾸준히 평화를 배우는 일이 없습니다. 어른들은 버스를 타든 자가용을 몰든 회사에서 일하든 집에서 살림을 꾸리든 평화를 느낄 틈이 없고, 평화를 느낄 틈을 마련하지 않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목매다는 숫자를 아이들한테 고스란히 물려줍니다. 사랑이 없고 믿음이 없으며 평화가 없는 채 살아가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아무런 사랑도 믿음도 평화도 물려주거나 이어주지 못합니다.


 (3) 《아톰의 철학》이란 ‘살아가는 생각’


 번역책 《아톰의 철학》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은 1996년에 한글판이 나왔는데, 1996년에는 〈우주소년 아톰〉을 둘레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이름으로 완전번역이 제대로 된 해는 2001년입니다. 2001년에 1쇄를 찍은 《우주소년 아톰》 완전번역은 모두 23권이고, 2010년에 2쇄를 찍습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작품을 두루 살피기 어려운 때에 나온 《아톰의 철학》이기도 하지만, 지난 1996년에 《아톰의 철학》을 한글판으로 옮긴 한국 만화쟁이 손상익 님은 ‘일본 만화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아톰의 철학》은 번역이 썩 안 좋습니다. 일본 만화는 몹시 싫어하면서 일본 현대만화를 마무리지었다 하는 데즈카 오사무 님 이야기책을 옮겼으니, 더 마음과 사랑을 쏟기 어려웠겠구나 싶습니다.


.. 데즈카 오사무의 사망 소식을 내가 처음 안 것은 1989년 2월 9일 저녁, 도쿄의 이케부루코역의 신문가판대 속보를 통해서였다. 그때 나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선 채로 그 기사를 다 읽었다 ..  (11쪽)


 일본 만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자유입니다. 한국 만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자유입니다. 그런데 일본 만화이기에 싫어할 까닭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한국사람이라 한국 만화를 더 좋아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만화를 아름답다 여기며 사랑하고 싶습니다. 따스한 만화를 따스하다 느끼며 아끼고 싶습니다. 좋은 만화를 좋다고 살피며 껴안고 싶습니다.

 한국사람이 그린 한국 만화라지만 터무니없이 엉터리인 작품이 꽤 많습니다. 일본사람이 그린 일본 만화 가운데 놀랍도록 슬기로우며 아름다운 작품이 무척 많습니다.

 한국사람이기에 세계문학을 즐기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인 가운데 세계문학을 즐길 노릇입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좋은 만화’를 이웃 일본에서 찾아볼 만합니다. 온누리에서 사진문화가 앞선 프랑스나 미국에 가서 사진을 배우고, 일본 또한 사진문화가 드높기에 일본으로 가서도 사진을 배우듯이, 온누리에서 만화문화가 남다르며 빼어난 일본땅 일본 만화를 잘 살피고 가누면서 훌륭한 작품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땅에서 한국 만화쟁이가 알뜰살뜰 일군 훌륭한 만화라면 일본이건 프랑스건 미국이건 스스럼없이 내놓으면서 나누어야겠지요.


.. “그림만 잘 그리는 것으론 안 됩니다. 그림 실력은 다소 처지더라도 아이디어나 재밌는 소재를 생각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도 처음엔 그림을 잘 못 그렸지만 부단한 연습을 통해 이를 극복했습니다.” … “당시(1940년대 첫무렵) 사회상은 미술 등의 예술활동에 대해 ‘국가생산성과 번영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없는 비국민적 행위!’로 간주했던 탓에 저는 숨어서 만화를 그리다시피 했어요. 그렇게 그렸던 중학교 때의 작품이 3천 장 정도 됩니다.” … “지금의 젊은 만화가들 가운데에도 미술의 기본 실력을 갖춘 사람은 몇 안 되는 형편이지요. 실력도 갖추지 못하고 무턱대고 그림만 좋아한다고 해서 데생 실력이 연마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 때문에 기초를 다시 공부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타고난 재주로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그린다든가 만화스토리를 짜놓고 ‘나도 만화만은 훌륭한 솜씨를 갖췄어.’라든가 ‘내 그림은 정말 뛰어났어.’라며 나르시즘에 빠지는 작가가 많아 걱정입니다.” … “만화가들의 표현에 관한 자체 규제가 강화되자 이에 따라 ‘재미없는’ 만화가 넘쳐나게 됐지요.” … “어머니는 ‘만화와 의사 중 어떤 것이 좋아?’라고 물었죠. ‘그야 만화가 좋지요.’라고 대답했더니 ‘그렇다면 만화가가 되는 것이 어때?’라고 흔쾌히 말씀하시더군요. 제게 있어 만화가를 택했다는 것은 돈을 벌어 집안을 편하게 해 주겠다는 뜻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  (221, 224, 227, 229, 232∼233쪽 / 〈만화신문〉 만나보기 기사 1987.1.1.)


 만화책 《우주소년 아톰》은 ‘사랑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넋’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야기책 《아톰의 철학》은 ‘아톰(데즈카 오사무)이 사랑하며 살아간 아름다운 넋이 무엇이었을까’를 헤아리는 이야기동무입니다.

 이론책이나 지식책이 아닌 이야기동무와 같은 책 《아톰의 철학》입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를 요리 파헤치거나 저리 뒤적이면서 학문으로 따지고 드는 책이 아닙니다. 만화를 사랑한 삶이 무엇이고, 만화라는 문화와 매체로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고파 했는가를 함께 즐기자는 이야기책입니다. 무시무시한 전쟁과 폭력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사랑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면서 살아온 한 사람 발자국을 톺아보자는 삶책입니다.


.. 우리들도 버티고 서 있어야만 한다. 제멋대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여 떨어뜨리는 것도, 어려움에서 도망쳐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도 막고, 우리들은 생명 그 자체가 가리키는 길로 걸어가야만 한다 ..  (142쪽)


 평화로운 누리에서도 평화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슬프며 고단하고 괴로운 누리에서도 평화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따스하며 넉넉한 터전에서 사랑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메마르고 차가우며 모진 터전에서도 사랑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 가슴이 평화라면 평화꽃을 피웁니다. 내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열매를 맺습니다. 내 꿈이 평화라면 평화꽃을 아낍니다. 내 빛이 사랑이라면 사랑열매를 보살핍니다.

 나와 내 짝꿍과 내 아이 모두 평화와 사랑을 아끼는 삶을 보듬는 하루를 보내고 싶습니다. 내가 선 시골자락 조그마한 집에서 조용하면서 호젓하게 평화와 사랑울 누리는 삶을 일구며 하루를 즐기고 싶습니다. (4344.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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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농할멈과 나
Mizuki Shigeru 지음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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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있는 만화, 이야기 깃든 삶
 [만화책 즐겨읽기 18] 미즈키 시게루, 《농농 할멈과 나》



 국민학교 5학년이던 1986년 8월과 10월과 12월, 중앙일보사에서 내던 〈소년중앙〉이라는 잡지에서 낱책부록을 하나씩 딸려 베풀었습니다. 8월에는 《세계 귀신 100가지 이야기》를 베풀고, 10월에는 《세계 요정 100가지 이야기》를 베풀며, 12월에는 《요정의 세계는 어떨까?》를 베풉니다.

 귀신과 요정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담은 세 가지 낱책부록은 그때부터 오늘까지 고이 건사해 놓습니다. 언제나 책꽂이 아주 좋은 자리에 꽂아 놓았으며,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읽었고, 이 책을 펼친 날은 꿈자리가 무섭기는 하지만 온갖 부푼 꿈으로 생각날개를 펼쳤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이던 1986년부터 얼마 앞서까지 이 ‘귀신 그림’과 ‘요정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을 뿐더러, 누구인가 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난 2009년 여름, 《만화 공화국 일본여행기》를 읽으며 비로소 이 ‘귀신 그림’과 ‘요정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알아챕니다. 일본 돗토리에서 나고 자라며 만화를 그린 ‘미즈키 시게루’ 님 작품이었습니다. 돗토리라는 곳은 미즈키 시게루 님 ‘귀신 그림’이랑 ‘요정 그림’으로 커다랗게 ‘만화마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본에서는 만화를 문화로뿐 아니라 삶으로 여기면서 고운 이야기 뿌리를 내리고,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만화를 문화로나 삶으로나 여기지 못하면서 만화 하나로 고운 이야기 뿌리를 못 내린다고 느낍니다.


- “게게, 어디 갔었어?” “엄청 찾았잖아.” “요나고까지 도너츠 먹으러 간다.” “도너츠? 그게 뭔데?” “무지 맛있는 거래.” “맛있는 거?” “친구 말로는, 외국사람들이 먹는 꼭 튜브처럼 생긴 과잔데 그게 혀가 녹을 정도로 맛있다는 거야.” “한 개 3전.” “10전 있으니까 세 개 살 수 있어.” “그럼 기차는 어떡하구. 요나고까지 5리(약 2킬로)나 되는데.” “걸어가자!” “좋아!” (141∼142쪽)


 만화책 《농농 할멈과 나》를 읽습니다. 《농농 할멈과 나》는 귀신과 요정 이야기를 만화로 담은 미즈키 시게루 님이 어떠한 어린 나날을 보냈는가를 담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귀신과 요정 이야기를 누구한테서 들으며 컸고, 당신한테 귀신과 요정 이야기를 들려주던 ‘농농 할멈’은 귀신과 요정 이야기를 어떠한 넋과 마음으로 알려주었는가 찬찬히 되새깁니다.

 농농 할멈은 어린 미즈키 시게루 님한테 차분한 얼굴과 목소리로 노상 이야기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줄 알면 큰일나는 거야(20쪽).” 하고. 눈에 보이기에 더욱 잘 살피면서 사랑하거나 마음쓸 줄 알아야 하고,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한결 잘 살피면서 사랑하거나 마음쓸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 “특히 고양이는 요사스러워서, 살아 있을 때부터 미물이거든. 십 년 이상 묵은 고양이는 꼬랑지가 갈라지면서 불여우가 된단다.” “불여우!” “어떤 뼈건, 모두 흙으로 돌려줘야 하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혼백이 영영 이승을 떠돌게 돼.” (20, 43쪽)
- “계속 도망칠 건가? 그런 상처를 입고 어두운 곳만 찾아다닐 게 가엾어서 그래. 아직 젊으니 인생 다시 시작해 봐. 어머니 눈물짓게 하지 말고.” (126쪽)
- “그럼 치구사를 데려가지 말라고 말해 주면 안 돼?” “그건 안 된다.” “맨날 나쁜 짓만 하지 말고 가끔은 착한 일도 좀 해 봐.” “인간이란 참 자기 멋대로야.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해 돌아가는 줄 안다니까.” (158쪽)


 미즈키 시게루 님이 어린 나날을 보내던 무렵은 “쇼와 6년(1931년)” 즈음이고,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인 그때에 “소년들은 매일같이 싸움에 빠져 살았다(3쪽).”고 합니다. 하기는, 1931년 그무렵 일본은 일찌감치 한국땅을 식민지로 삼았고, 중국이며 동남아시아며 식민지로 잡아먹으려고 온힘을 기울였습니다. 군대를 크게 북돋았고, 아이들한테 착하고 바른 넋보다는 치고받는 다툼을 즐기도록 이끌었어요.

 생각해 보면, 이런 끔찍한 나날이어야 하던 일본 제국주의 회오리바람에서 조금은 비껴난 시골마을에서 농농 할멈하고 함께 크며 ‘자연이랑 사람하고 벗삼는 귀신과 요정’ 이야기에 눈길을 둔 셈입니다. ‘그림이야기(만화)’를 신나게 그리며 어머니와 동무들한테 읽히던 미즈키 시게루 님은 대단하다 할 만합니다. 어쩌면 농농 할멈은 귀여운 ‘게게(미즈키 시게루 님을 부르는 귀여운 이름)’가 전쟁놀이에 휘둘리지 말고, ‘그림이야기꾼’으로 크기를 바라면서 조용히 뒷배를 한 멋쟁이인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데즈카 오사무 님 또한 일본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깃발을 드날리던 때부터 만화를 신나게 그려서 어머니하고 동무들한테 읽혔어요. 데즈카 오사무 님 어머님 또한 데즈카 오사무 님이 전쟁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말고 ‘네(데즈카 오사무)가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렴’ 하며 기운을 복돋았습니다. 일본 만화밭에서 큰 기둥이라 할 두 분은 ‘평화로운 나날이던 때’에도 평화를 사랑하는 한편, ‘평화롭지 못한 전쟁통이던 때’에도 평화를 사랑하면서 만화를 그린 셈입니다. 일본 만화밭 큰 기둥 두 분 곁에는 훌륭한 할머니와 아름다운 어머니가 있은 셈입니다.

 “인간이란 참 자기 멋대로야.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해 돌아가는 줄 안다니까(158쪽).” 같은 이야기는 도깨비가 미즈키 시게루 님한테 들려준 말일 뿐 아니라, 미즈키 시게루 님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지면서 한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떠한 매무새로 살아가야 아름다운가 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멋대로 군대를 만들고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키며 함부로 ‘여린 이웃과 나라’를 들볶는 짓이란 얼마나 몹쓸 일이며 나쁜 짓인가를 되새기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 (그로부터 일 년.) “마쓰는 왜 안 와?” “홍역으로 죽었다.” “홍역으로?” “2∼3일 됐어.” (이렇게 첫사랑을 잃었다.)  (24쪽)
- “너, 아까 내가 귀신인 줄 알았지?” “아, 아니.” “거짓말 안 해도 돼. 어차피 곧 귀신이 될 텐데, 뭐.” “아가씨, 무슨 그런.” “난 버림받았어. 도쿄에도 가까운 병원이 있는데, 이런 먼 시골까지 보내 버렸잖아. 다들 내 곁에 있기 싫은 거야. 할머니도 돈 준대서 붙어 있는 거잖아.” “그게 뭐 어쨌단 거야?” (93쪽)
- “맞죠, 할머니?” “저, 그건 말이다.” “그래서 나 죽는 건 슬프지만 이제 무섭지 않아요.” “시게루의 그림이야기처럼 신비한 섬을 모험하러 가는 것 같아서 하나도 무섭지 않은걸. 나, 시게루한테 ‘십만억토’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162쪽)

 



 1986년에 〈소년중앙〉 낱책부록으로 귀신 이야기 요정 이야기 만화책을 곁달아 주기 앞서부터 미즈키 시게루 님 작품은 한국땅에 퍽 자주 ‘무단도용(몰래 훔쳐 그리기)’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미즈키 시게루 님 작품임을 밝히지 않았고, 일본 만화쟁이한테 저작권삯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미즈키 시게루 님 작품을 한국 아이들한테 보여주면서 돈을 벌었어요.

 한국 어른들은 몰래 훔쳐 내놓는 책으로 돈은 벌지만, 정작 이러한 만화 작품에 무슨 얼과 넋이 스몄는가를 이 나라 아이들한테 심거나 나누는 데에는 젬병이었습니다. 아이들한테는 ‘더 재미있는 만화’나 ‘더 뜻있는 작품’이나 ‘더 알찬 이야기’나 ‘더 잘 그린 그림’보다 ‘더 사랑스러우’면서 ‘더 믿음직’한 삶을 보여주어야 하는 줄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워낙 무시무시한 군사독재였기에 이렇게 할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댄다면, 오늘날에는 어떠한 나날이라 아이들한테 ‘꿈과 사랑 이야기를 살포시 담는’ 만화나 문학이나 그림이나 이야기를 베풀지 못한다 할까요.

 이 나라 아이들한테는 박찬호·박세리·박지성·김연아·박태환으로 이어지는 운동선수 이야기들만이 꿈이어야 하고 사랑이어야 하는가 궁금합니다. 이 나라 아이들한테는 더 돈을 벌거나 더 이름을 얻거나 더 힘이 세지는 일이 아름다운 삶이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나라 아이들은 모조리 대학생이 되어야 하는데, 더군다나 손꼽히는 ‘서울에 있는’ 몇몇 대학교 학생이 되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삶을 사랑하면서 다 다른 이야기꽃을 피우는 꿈을 보듬도록 이끌지 못해도 괜찮은지 궁금합니다.


- “염불이나 해 주는 걸론 이젠 먹고살기가 힘들어졌어. 그래서 오늘부터 시게네 집에 간다.” “우리 집에서 살 거야?” “그래.” “신난다. 그럼 매일 밤마다 요괴 얘기 들을 수 있겠네.” (30쪽)
- “어허, 잠깐 나를 없애도 되겠어?” “신동이 다시 5점짜리 꼴찌로 돌아가면 창피할 텐데. 전보다 훨씬 더 바보 취급 당할걸.” “정말 그렇겠네.” “지금 이대로 신동 대접받는 게 좋잖아. 이 나라는 시험만 잘 보면 팔자가 피니까 말야.” “하긴 그래. 시험 한 번 잘 봤다고 대접이 확 달라졌으니. 인생은 실력이 아냐.” (59쪽)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4대강 반대’나 ‘국가보안법 없애기’나 ‘한미자유무역협정 막기’ 같은 일을 큰힘 모아 하자고 외치곤 합니다. 다른 한켠에서는 ‘미국은 우리 나라를 먹여살린 고마운 나라’라 외치거나 ‘연봉 얼마 아파트 얼마 자가용 얼마’ 같은 이야기를 외칩니다.

 우리 어른들은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아이들 앞에서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농사짓는 즐거움부터 빨래하고 밥하는 기쁨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붙잡은 일거리를 당신 딸아들한테 스스럼없이 물려줄 만한지 아닌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온 집안 사람들이 다 함께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사람한테도 보람과 웃음꽃 나누는 놀이감을 톺아보지 않아요.

 미즈키 시게루 님은 《농농 할멈과 나》에서 1930년대 첫무렵 일본에서도 “시험만 잘 보면 팔자가 피니까 말야(59쪽).” 하는 이야기를 곁들이는데, 한국 또한 2011년이 되어도 이런 흐름은 매한가지이거나 더 슬프게 뒤틀린 채 뿌리내렸습니다. 아이들이 참답고 착하며 고운 슬기를 빛내도록 하는 배움터가 아니라, 아직까지 자율학습과 0교시와 보충수업과 두발단속 따위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야 하는 슬픈 배움터입니다. 핀란드 배움터가 어떠하고 스웨덴 배움터가 어떠하며 영국 배움터가 어떠하다고 떠들기 앞서, 이 나라 아이들이 학교라는 데가 참다운 배움터 노릇을 하도록 애쓰지 않아요. 시험성적 잘 나오도록 하는 학원에 아이들을 보낼 뿐입니다. 교과서 달달 외우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어린이문학을 한 이원수 님은 1969년에 내놓은 《시가 있는 산책길》(경학사)이라는 책 머리말에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좀더 나은 것, 좀더 바른 것만을 갈망하며, 그러므로 해서 일생을 고독한 나는, 내 소망과 내 기쁨을 시나 소설이나 동화를 통해 발표하고 외치고 그 속에서 사랑과 미움을 노래해 왔다.”고 밝힙니다. 이원수 님은 “아동문학을 내 꽃동산으로 생각해 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결로, 미즈키 시게루 님한테는 만화가 꿈과 기쁨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만화로 빚은 ‘꽃동산’입니다.


- “대부분은 그렇지만 인연이 있는 사람의 마음에 조금씩 남는 법이거든. 하지만 조금 있으면 그 무게에 익숙해지게 돼. 걱정할 건 없다.” “흐음.” “몸은 음식을 먹고 커다래지지. 사람의 마음은 여러 영혼이 보태지면서 성장한단다. 시게루도 어렸을 적부터 많은 것을 보고 만지면서 컸지. 돌에는 돌의 혼이 있고, 벌레에는 벌레의 혼이 있거든. 그런 수많은 혼들이 들어와 보태 줘서 시게루가 이렇게까지 큰 거란다.” (202쪽)
- “하지만 농농할머니가 별로 나쁜 짓은 안 한다고 그랬어. 자기 마음이 비치는 거야. 무섭다고 생각하면 무서운 얼굴이 되고, 무섭지 않으면 부드러운 얼굴이 된대.” (239쪽)



 누군가는 만화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이라면, 누군가는 사진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입니다. 글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을 이룹니다. 노래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을 일굽니다. 농사짓기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을 이루고, 작은 가게 하나로 이야기 꽃동산을 일굽니다. 자전거를 몰거나 청소부 일을 하거나 우유랑 신문을 돌리며 이야기 꽃동산을 가꿉니다. 아이를 가르치거나 살림을 하면서 이야기 꽃동산을 보듬습니다.

 내 삶을 찾는 데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삶을 아끼는 데에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내 삶을 살찌우는 데에서 이야기가 자라납니다.


- “앞으론 평화주의로 가려고 해.” “평화주의?” “그게 뭔데?” “계급을 폐지하는 거야?” “대장이 명령하고 부하가 따르고 하는 건 이제 안 한다. 동네 대장도 다 없애고 싶지만, 뭐 어려운 일 있을 때 얘기 상대 정도로나 생각하고, 앞으론 다들 하고 싶은 거 하며 놀아. 뜀박질이든 딱지치기든 개무시도 없어. 갓파랑도 맘대로 놀아도 돼.” “그럼 질서는 어떻게 잡을 건데?” “안 잡으면 어때.” “옆동네에서 전쟁 걸어 오면 어떡하고?” “그땐 그때 생각하자. 맨날 모여 군사훈련이나 하는 건 시간낭비야. 우린 본래 신나게 놀기 위해 모인 거잖아.” (398∼399쪽)


 우리는 이 땅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즐거이 어깨동무하려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동무랑 이웃을 믿고 좋아하며 함께 일하거나 놀려고 태어났습니다.

 돈을 벌려고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이름을 드날리려고 태어날 아이는 없습니다. 기운센 장사나 우두머리가 되려고 태어나야 할 아이는 없어요.

 따순 한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넉넉한 한 사람으로 자라납니다. 고운 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착한 한 사람으로 지냅니다. 슬기로운 한 사람으로 꿈꿉니다. 살가운 한 사람으로 사랑합니다.

 《농농 할멈과 나》는 온삶을 걸쳐 만화쟁이 한길을 걸어온 한 사람 밑바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밝힌 곱고 멋스러운 ‘옛이야기’입니다. 보드라운 삶이야기요, 예쁘장한 꿈이야기입니다. (434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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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소년 9
시무라 타카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은 ‘우물 개구리’가 아닙니다
 [만화책 즐겨읽기 17] 시무라 다카코, 《방랑 소년 (9)》


 저마다 예쁘게 살아가고 싶은 아이들입니다. 저마다 꿈을 꾸고 싶은 아이들입니다. 이제 여자축구는 남자축구 못지않게 눈길을 끌거나 사랑을 받을 만하다 싶으나, 여자가 축구를 한다 할 때에 뱀눈으로 보는 사람은 아직 많습니다. 여자가 권투를 하거나 격투기를 한다 할 때에도 비슷합니다. 언제나처럼 떠도는 도깨비 같은 말이란 ‘그러다 시집 어떻게 갈래?’입니다.

 남자로 살아가는 저는 으레 듣는 물음이 이렇습니다. ‘당신 그렇게 살면서 어떻게 식구들 먹여살릴래?’

 집식구는 남자가 집안기둥이 되어 홀로 벌어먹여야 할까 궁금합니다. 남자는 오로지 바깥일을 도맡고 여자는 오직 집안일을 도맡으며 살아야 하나 궁금합니다. 다 함께 바깥일에 힘쓰고 모두 다 집안일을 북돋우며 즐거이 살아가면 아름답지 않나 생각합니다.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쓴 “큰숲 작은집” 이야기책을 읽으면 집안일이건 집밖일이건 식구들이 모두 힘을 쏟아 함께합니다. 워낙 사람 숫자가 적은 외딴 멧골집에서 살아가니까 이렇게 할밖에 없다 말할 수 있으나, 참말 이렇게 꾸리는 살림살이가 동양이든 서양이든 ‘가난하고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삶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역사책이나 인문지리책에 ‘가난하고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삶이 적힌 적이 없기에 종잡기는 어렵습니다만,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에서 엮은 “민중자서전”을 읽다 보면, 없는 사람들은 돈이 없다뿐 사랑이 있고 마음이 있으며 가슴이 있습니다. 사랑과 마음과 가슴으로 서로를 보듬거나 돌보거나 어루만집니다.


.. “얘(친구)는 단순한 취미 생활이야. 이 녀석(동생)은 여자가 되고 싶어한다구. 그렇지?” (13쪽)


 만화책 《방랑 소년》 9권을 읽습니다. 한 권 두 권 호수를 채울 때마다 아슬아슬한 금에서 오락가락하는 만화책 《방랑 소년》입니다. 책이름부터 ‘방랑’이라 적었기 때문일 테지요.

 이 만화책에 나오는 두 주인공 슈이치(남자)와 요시노(여자)는 서로 같은 꿈을 서로 다르게 품으며 살아갑니다. 먼저, 슈이치와 요시노는 ‘내가 태어나며 받은 성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슈이치는 여자로 살고픈 남자아이요, 요시노는 남자로 살고픈 여자아이예요.

 한자말로 적으니 ‘방랑’입니다만, 이제 막 중학교 1학년에 들어선 이 아이들로서는 섣불로 홀로 서기 어려운 나이와 넋과 삶인 까닭에, 망설입니다. 갈팡질팡합니다. 오락가락합니다. 흔들립니다. 떠돕니다. 헤맵니다. 무엇보다 가슴이 아프고 쓸쓸합니다.

 이 아이들하고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를 들어 주거나 들려주는 어른이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아이들 마음을 읽어내어 따숩게 껴안거나 얼싸안는 어른 또한 만나기 어렵습니다.

 왜 이 아이들이 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나요. 왜 이 아이들 꿈을 놀림감으로 삼으며 따돌리거나 꾸짖거나 못마땅해 하기만 하나요.

 착하며 아름답게 살아가고픈 길에 선 아이들입니다. 속마음을 숨긴 채 겉치레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저마다 다 달리 태어난 몸과 마음을 곱게 건사하면서 예쁘게 북돋우고 싶은 아이들입니다. 맑은 눈망울과 밝은 눈빛으로 이 땅에서 씩씩하게 한길을 걷고픈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한참 흔들리며 슬프고, 눈물을 짓지만,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가 아니지만 똑똑이도 아닙니다. 그냥 한 사람입니다. 사랑스러운 목숨을 포근히 보듬는 한 사람입니다.


.. ‘난 말하지 못했어. 슈이치는 당당했다.’ ..  (36쪽)


 어른들은 아이들을 제도권 울타리에 가두어 놓으며 흐뭇해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넣다가는 초등학교에 보내고, 중·고등학교에서 입시공부만 하다가는 대학교에 들어간 다음, 돈 잘 버는 회사를 찾아 사무직 일꾼이 되기를 바랄 노릇이 아닙니다. 이 다음 길은? 뻔하지요. 시집장가 잘 가서 아이 둘쯤 낳아 효도 하기.

 이 땅 아이들은 어떠한 길을 걸어야 할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땅 아이들이 걸어가며 즐길 가장 아름다우며 빛나는 길을 헤아려야 합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같은 길을 걷도록 내모는 오늘날 어른들 사회 얼거리가 아이들한테 얼마나 고되고 괴로우며 슬픈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씩씩하게 크도록 길동무가 되어야 할 어버이요 어른입니다. 아이들이 튼튼하게 살도록 옆지기가 되어야 할 어버이면서 어른입니다. 훈계를 늘어놓거나 설교를 하는 사람은 어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닙니다.


.. “집에도 설 자리가 없는 느낌?” “누나가 학교에 안 갈지도 몰라요. 나도 이제 가기 싫어요. 나만 보건실로 끌ㄹ려가고, 나만 엄마가 데리러 왔어요. (여자아이) 치즈루랑 요시노는 (남자 옷을 입고 왔어도) 아무도 비웃지 않았는데, 나만 비웃음을 당했어요.” ..  (46∼48쪽)


 새벽녘 쉬가 마려운지 깬 아이가 다시 잠들지 못하고는, 훨씬 이른 새벽부터 깨어나 일하는 아빠 곁으로 살금살금 걸어옵니다. 아이는 언제나 아빠 곁에 붙어서 아빠가 무얼 하는가 가만히 바라보다가는 고 모양새를 저도 따라합니다. 고 모양새를 아이가 따라하는 모습을 슬쩍 바라볼라치면 아이는 상긋 웃습니다. 아이는 엄마 곁에서도 엄마가 하는 양을 따라합니다. 할머니가 마실을 오면 할머니 매무새 또한 따라합니다. 아이는 둘레 어른들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제 교과서로 삼습니다. 제 앞길로 삼아요.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른들은 누구나 느끼기 마련이면서 누구나 못 느끼기도 하는데, 아이한테는 아주 좋은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이나 학교나 대안학교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제 어버이하고 둘레 어른이 도움이 됩니다. 아이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는 학교를 다니며 길들 뿐입니다. 아이는 집에서 배우고 마을에서 배웁니다. 아이는 집과 마을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집과 마을에서 사랑과 믿음을 익힙니다. 아이는 학교를 다니며 머리통만 굵어지다가는 깊은 생채기를 받는 가운데 스스로 좁은 우물(제도권)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립니다.

 참다이 가르치며 배우는 가운데 살아갈 길은 모두 집에 있습니다. 그냥 집이 아닌 살림집에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밥을 하며 옷을 기우고 빨래를 하며 집 안팎을 쓸고 닦아 치우는 모든 살림살이에 아이를 가르치며 배우는 참살길이 깃듭니다.

 아이들은 제 먹을거리를 제 손으로 키우는 땀을 알아야 하는 한편, 제 먹을거리를 손수 밥상에 차리는 품을 알아야 하고, 제 밥상을 제 손으로 치우는 겨를을 알아야 합니다. 밥과 옷과 집이 하늘에서 똑 떨어지거나 돈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뿐더러, 내 손과 몸둥이로 이루어 내는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참살길을 밝히며 보여주어야지, ‘돈 벌 길’이나 ‘이름 높일 길’이나 ‘힘 쌓을 길’을 보여주거나 이 길로 떠밀면 안 됩니다.


.. “선생님을 모셔 올까?” “그냥 보건실로 갈게. 카나코한테 말해 줘.” (같은 반 남자아이가 슈이치를 보며 지나가듯이 말한다) “너 바보지?” (슈이치는 고개를 떨구며 보건실로 가는 길에 생각한다) ‘바보인가? 바보지, 뭐.’ ..  (83∼86쪽)


 내 아이는 딸아이로 태어나도 좋고 아들아이로 태어나도 좋습니다. 내 아이는 딸아이로 살아도 좋고 아들아이로 살아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내 아이는 그예 내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고운 목숨 예쁘게 일구는 삶이면 즐겁기 때문입니다. 착한 삶이냐 참다운 삶이냐 어여쁜 삶이냐를 눈여겨볼 일입니다. ‘계집아이처럼 군다’든지 ‘수줍음을 탄다’든지 하는 빛깔은 아무것 아닐 뿐더러, 따숩게 받아들이면 넉넉합니다. 내 아이가 학교성적이 처진다든지 달리기가 느리다든지 눈이 나쁘다든지 책을 잘 안 읽는다든지 하면 어떻습니까. 사랑스러우면서 씩씩하고 다부지게 자라나면 훌륭합니다.

 《방랑 소년》에 나오는 슈이치는 9권에 이르러 드디어 홀로 설 자리를 찾으려 하는데, 참으로 이 아이가 홀로 설 만한 자리는 어디에도 안 보인다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학교라는 곳이, 제도라는 곳이, 사회라는 곳이, 어느 만큼 답답하며 무시무시한가를 몸소 깨닫습니다.

 누가 바보일까요? 누가 바보인가요? 바보는 왜 있어야 하고, 바보라는 낱말은 왜 태어났을까요? 예부터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라 했습니다. 누가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일까요? (4343.12.14.불.ㅎㄲㅅㄱ)


― 방랑 소년 9 (시무라 다카코 글·그림,설은미 옮김,학산문화사,2010.10.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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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괴동 1
모치즈키 미네타로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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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3권 느낌글은 따로 쓸 생각이기 때문에, 1권과 2권 이야기만 적바림합니다.) 



 손 쓸 수 없는 바보스러운 누리
 [만화책 즐겨읽기 10] 모치즈키 미네타로, 《동경괴동東京怪童 (1∼2)》



 기계가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이곳입니다. 기계가 아닌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는 이 누리입니다. 기계가 아닌 아이들이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라는 이 나라입니다. 기계가 아닌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며 꽃과 열매를 맺기에 비로소 먹을거리를 얻는 우리 터전입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 가르치고, 기계가 아닌 사람이 어우러지는 이 마을입니다.

 그렇지만 이곳 이 터 이 자리를 돌아볼 때에는 사람이 잘 안 보입니다. 온통 기계투성이입니다. 사람이 다루는 기계라 하지만,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맨 기계들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마을이라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누리에 자리하는지 아리송합니다.

 이제 와서 헤아린다면 퍽 우스운 이야기요, 이 우스운 이야기마저 사람들은 차츰 잊는다고 느끼는데, 예부터 한겨레 사람들은 ‘마음이 따스하며 사랑이 깊은 겨레’라 일컬었다고 합니다. 이웃을 아끼며 서로를 포근히 보살피는 겨레라 했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곰곰이 헤아리면서 우리네 역사를 거슬러 봅니다. 참말 이 말이 맞을까 싶기도 하지만 틀리지도 않으리라 느낍니다만, 정치권력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따스하거나 사랑 깊은 사람은 드물었다고 느낍니다. 정치권력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서로 이웃 나라나 겨레하고 싸움을 벌였고, 파벌을 이루었으며, 농사짓는 사람들 삶하고 동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사람들을 신분으로 가르고 계급으로 나누었습니다. 많이 배우거나 많이 가지거나 많이 누리는 사람들치고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모습은 퍽 드물었다고 느낍니다. 적게 배우거나 못 배운 사람들, 적게 가지거나 못 가진 사람들, 적게 누리거나 못 누리는 사람들한테서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모습을 마주한다고 느낍니다.

 배고픈 거지는 임금님이나 사대부한테서 밥 한 그릇 얻지 못합니다. 배고픈 거지는 임금님 사는 궁궐은커녕 궁궐 둘레로 발을 들이지조차 못합니다. 사대부 으리으리한 집 대문을 두드리지도 못합니다. 배고픈 거지는 당신하고 비슷한 가난한 사람들 살림집 문을 두드리며 밥 한 그릇 얻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배고픈 사람이 돕고, 마음 아픈 사람은 마음 아픈 사람이 돌봅니다.

 지난날 이 나라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는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하며 밑바닥이었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너나 없이 밑바닥인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고 도우며 사랑하는 가운데 따스함과 넉넉함이 꽃피었다고 느낍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너나 없이 배가 부를 뿐 아니라 돈이고 이름이고 힘이고 많이 움켜쥘 뿐더러 많이 누리기 때문에, 따스함이랑 넉넉함을 잃는구나 싶습니다.


- “그래, 넌 사실밖에 말 못하지. 많이 힘들 거야. 하지만 이게 현실이야.” “저 나무, 싫어. 여전히 죽고 싶은 기분이야. 내 인생은 엿 같아.” “그렇지 않아. 다 왔다.” (1권 50∼51쪽)
- “나도 알아. 다들 이유가 있다는 것쯤은! 나도 나쁜 뜻은 없어. 입이 더러운 건 내 병이야. 하지만 약으로 낫는다며.” (1권 63쪽)
- “그림에도 자주 나오잖아. 고흐도 저 측백나무가 있는 풍경을 자주 그렸어.” “고흐. 더 잘 듣는 약을 줘. 다 토했더니 효과가 없잖아. 물리요법으로는 해결 안 나는 병이라니까.” “바보한테 듣는 약은 없어. 그야 네 병은 생각한 것을 숨김없이 다 입 밖으로 뱉는 증상이긴 하지. 하지만 결국 네멋대로 사람을 바보 취급 하고 있는 것뿐이잖아. 자신의 미숙함을 자각하는 인간은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법이야. 본인은 원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다들 마음속의 부담을 가지고 있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무리하게 살지 말고 솔직하게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 아마도 그 방법밖에 없을 거야.” (1권 87∼88쪽)



 만화책 《동경괴동》을 생각합니다. 모두 세 권으로 마무리된 작품이고, 일본책에 붙은 이름은 “東京怪童”입니다. “도쿄에 사는 괴물 아이”라는 뜻입니다. “도쿄에 사는 끔찍한 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볼썽사납거나 못 말린다거나 짜증스럽거나 미친 아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 일본 도쿄에서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정신병원과는 또다른 정신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들은 더욱 따순 손길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1권과 2권을 가만히 보다가는, 3권이 나온 뒤 1권과 2권을 다시금 넘기며 생각합니다. 이들 “도쿄 괴물 아이”를 보살피거나 돌보거나 아픔을 씻어 주겠다는 사람들은 ‘기계와 다를 바 없는 도시에서 겉모습을 감춘 채 지식을 높이 쌓아올린 사람’들입니다. 학문으로 파헤치고 돈을 들여 좋은 시설을 갖추어 놓습니다. 그러나, 학문이든 시설이든 옳고 바르게 건사할 줄 아는 어른은 얼마나 되려나요. 참말로 마음과 마음으로 “도쿄 괴물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어른은 몇이나 있으려나요.

 입으로 내뱉는 소리가 아닌, 마음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어른은 어디에 있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마음이 보여주는 모습을 읽을 줄 아는 어른은 얼마나 있을는지요.


- “이 목소리는 하시? 그런 거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게 그 애라고?” “이 감촉, 역시 우리 애야. 엄마인 난 감각으로 알겠어.” “당신은 지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안 잤잖아! 머리가 이상해진 거야!” “하시가 돌아왔다구요!” “이렇게 기분 나쁜 괴물이 우리 애라니. 그리고 그 애는.” (1권 111쪽)


 사람은 한손에 한 가지를 쥡니다. 한손에 두 가지를 쥐지 못합니다. 먼 옛날 옛적 이야기를 떠돌리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 만한 이야기요, 누구도 모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한손에는 한 가지만 쥡니다. 한손에 사랑을 쥐었으면 돈을 쥐지 못합니다. 한손에 돈을 쥐었으면 사랑을 쥐지 못합니다. 한손에 이름값을 쥐었으면 믿음을 쥐지 못합니다. 한손에 믿음을 쥐었기에 이름값을 쥐지 못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사람들은 한손에 사랑이나 믿음을 쥐지 않습니다. 한손에 두 가지 다 쥐려 하면 못 쥐는 만큼, 한손으로 사랑하고 믿음을 함께 쥐려 하다가 그예 놓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한데, 왼손에는 사랑을 쥐고 오른손에는 믿음을 쥐면 놓칠 일이 없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한손에 책만 쥐어야지, 이 한손으로 책과 지식을 함께 쥐려 하면 둘 모두 놓칩니다. 책하고 지식은 사뭇 다를 뿐더러 한동아리가 될 수 없는데, 숱한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에 자꾸만 지식을 움켜쥐려 합니다. 책을 책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면 넉넉하고, 책 하나로 내 삶을 따숩게 돌아보면 흐뭇하지만, 이 흐름을 옳게 새기지 못합니다.


- “전에는 모두가 날 이해해 주기를 바랐지만, 하지만 지금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무시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난 나의 이 인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겠으니까 적어도 나를 그냥 내버려 뒀으면 하는 것뿐이에요. 지금은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요.” (1권 159쪽)
- “넌 입만 열면 사랑해 줘, 사랑해 줘, 나를 사랑해 줘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 사랑받고 싶단 생각만 하느라 다른 사람 일은 아무래도 좋은 거지? 사랑만 받을 수 있다면.” (1권 184쪽)



 아이들은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들은 몸이 아픈 줄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바랍니다. 아이들은 멋진 옷이나 예쁜 집이나 빠른 차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말을 섞을 벗을 기다립니다. 아이들은 비싸구려 손전화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몸소 보고 배울 뿐 아니라 즐거이 함께 살아가고픈 어른을 꿈꿉니다. 아이들은 대학교나 유학 따위를 꿈꾸지 않으며, 변호사나 판검사나 의사 같은 어버이를 꿈꾸지 않습니다.


- “그건 ‘너희’는 애초에 이상한 사람이고, 너는 사고로 머리에 이물질이 남아 있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하는 거야? 내가 왜 이런 멍청이를 상대로 잠시라도 말을 꺼냈을까.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넌 네 머리 때문이 아니야. 너라는 인간 자체가 저질인 거잖아!” (2권 15∼16쪽)
-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래, 하지만, 그건 병이 아니라도 다들 그런단다.” (2권 155쪽)



 적잖은 어버이들은 당신들이 돈을 조금밖에 못 벌어 당신 아이들을 더 따스히 돌보지 못하는 줄 잘못 알기 일쑤입니다. 당신들이 한 달에 70만 원밖에 못 번다 한들 아이들이 당신들한테 서운하다고 느낄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값싼 튀김닭 한 마리 사 주지 못한다 해서 아이들은 하나도 싫어한다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다른 동무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식은밥에 김치쪼가리 하나일지라도 밥상 앞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울 살가운 어버이를 바랍니다. 자가용으로 학원이나 학교까지 태워다 주는 돈 많은 어버이가 아니라, 두 다리로 걸어가느라 한참 걸리지만, 서로 손을 따숩게 꼬옥 잡으면서 얼굴을 마주보는 가운데 이야기꽃 피울 줄 아는 어버이를 기다립니다.

 어려운 일이란 한 가지도 없습니다. 하나같이 쉬운 일입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 할 때에 학교버스나 자가용 따위에 태울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아이랑 함께 학교에 가면 됩니다. 아이랑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더 사랑할 줄 아는 어버이라면 아이를 굳이 학교에 안 보내겠지요. 어른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까닭은, 어른들이 바깥에서 돈을 벌 뿐 아니라 ‘어른 스스로 하고픈 일과 놀이’ 때문이니까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배우지, 학교에서 교과서랑 교사한테서 배우지 않아요.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에 독도가 있다는 지식을 갖추어야 나라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내 동네에서 식구들이랑 조용히 살아가면서 넉넉히 나라사랑을 합니다.

 더 아낄 줄 아는 어버이라면 애써 도시에서 살아갈 뜻이 없습니다. 어른들부터 온몸 가득 자연을 껴안으면서 자연스러운 넋을 북돋울 때에 아이들 또한 온마음 가득 자연을 보듬으면서 자연스러울 얼을 살찌웁니다. 아이들한테는 ‘자연그림책’을 사다 주어 읽히지만, 정작 어른들부터 자연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어른들부터 자연을 헤아리는 책 한 줄 못 읽으며 지냅니다. 아이들이 자연을 알고 느껴야 한다면 어른들 또한 자연을 알고 느껴야 하는데, 막상 어른들은 자연하고는 등을 진 채 더 큰 도시에서 더 많은 돈벌이에 얽매입니다.


- “부장님, 병 때문에 불감증에 걸린 환자 있댔죠? 누가 더 나을까요?” “무슨 그런 질문을 해. 나도 이 나이까지 이 일에 모든 것을 바쳐 왔어. 물론 다른 인생도 있을지 모르지만, 행복인지 불행인지는 남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잖아?” (2권 193쪽)


 만화책 《동경괴동》을 새삼스레 생각해 봅니다. 일본 도쿄라는 곳은 한국 서울하고 매한가지입니다. 두 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이랑 꾸리는 삶은 다르다지만, 두 곳은 서로 한몸과 같다 할 만합니다.

 일본 도쿄 아이들은 티없이 맑으며 사랑스러운 아이로 크기보다는 괴물 아이로 크고 맙니다. 한국 서울 아이들 또한 해맑게 빛나며 어여쁜 아이로 자라기보다는 괴물 아이로 자라고 맙니다.

 학교 건물이 너무 큽니다. 도시가 너무 큽니다. 한 학년 학급 수가 너무 많습니다. 학급마다 아이가 너무 많습니다. 교사들이 한 학교 모든 아이들 이름조차 ‘외우지’ 못합니다. 아이들 숫자가 너무 많으니 ‘이름 외우기’를 해야 하는데, 이름조차 못 외우는 판에 아이들 삶과 아이들을 둘러싼 삶과 삶터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시골학교가 한결 낫다고는 말하기 힘듭니다. 다만 가장 학교다운 학교라 할 때에는 한 동네나 마을에 하나씩 아주 조그맣게 꾸리는 학교입니다. 교장이나 교감이나 교무주임 같은 자리는 따로 없이, 오로지 아이들 삶을 헤아리는 교사만 있는 학교일 때에 비로소 학교란 이름이 어울립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참다운 ‘배움터’ 노릇을 하겠지요.

 배우는 터전이어야지 가두는 터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살아가는 터전이어야지 옭죄는 터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지고 보면, 도쿄이든 서울이든 아이들도 너무 많이 득시글대지만, 어른들부터 지나치게 많이 복닥거립니다. 알맞게 얼크러지고, 살가이 어우러지며, 따숩게 얼싸안을 때에 아름다운 삶터입니다.


- 우리보다 더 손 쓸 수 없는 사람이 있는지, 난 알고 싶어졌어.” (2권 198쪽)


 더 손을 쓸 수 없도록 망가지면 어찌 될는지 모릅니다. 더 손을 쓸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만, 자꾸자꾸 바보스러운 길에 붙들리다 보면 내가 바보인지 내가 사람인지 내가 기계인지 내가 돌멩이인지 내가 멍텅구리인지 내가 이웃인지 내가 목숨붙이인지 내가 나무인지 내가 컨베이어벨트인지 헷갈리다가 그만 고꾸라집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사람다이 살아가며 사람다운 사랑을 나누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나 스스로 어린이임을 느끼고, 어른들은 당신 스스로 어른임을 깨달아, 우리 둘레에서 피고 지는 꽃을 알아채고, 우리 둘레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를 알아보며, 우리를 둘러싼 바다와 흙과 하늘과 바람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언제나 고마운 하루이고, 늘 새롭게 빛나는 하루이며,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하루입니다. 고맙게 보내며 즐거운 하루이고, 새롭게 빛내며 알찬 하루이며, 사랑스레 누리며 오붓한 하루입니다. “도쿄 괴물 아이”들은 시설 좋은 병원에서는 그저 괴물 소리를 듣는 아이로 늙어 버립니다. (4343.12.13.달.ㅎㄲㅅㄱ)


― 동경괴동 (1∼2) (모치즈키 미네타로 글·그림,이지혜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10/4200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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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숲의 아카리 6
이소야 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책사랑과 책방사랑과 사람사랑
 [만화책 즐겨읽기 16] 이소야 유키, 《서점 숲의 아카리 (6)》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6권이 새로 나왔습니다. 1권부터 5권까지 즐겁게 읽었기에 6권도 즐겁게 집어듭니다. 다만, 4∼5권에 이르며 조금 느슨해졌나 하고 느꼈기에 6권을 집을 때에는 살짝 망설입니다.

 6권에서는 얼마나 탄탄하며 짜임새있게 ‘책과 책방과 사람’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지 궁금합니다. 6권에서 책과 책방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싱그러이 담지 못한다면 앞으로 7권이 나오든 70권이 나오든 굳이 장만할 까닭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 6권에서는 ‘작은 책방 사장’으로 일하다가, 그만 ‘큰 책방한테 밀려 문을 닫고’ 말아, 나중에 ‘큰 책방 계약직 일꾼’으로 들어가서 잡지 부서를 다루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작은 책방이 끝내 문닫고 말았을 때에 몹시 서운하며 가슴이 아팠을 테지만, ‘내 책방’이 아니라 ‘다른 사람 책방’에서 일하는 몸이 되더라도 ‘책방을 사랑하는’ 삶이기 때문에 언제나처럼 즐거이 일하려 했답니다. 그러나, 즐거이 일하려던 이녁은 큰 책방 정규직 부서지기가 기운을 꺾는 말을 일삼아 그만 ‘자리를 지키며 매출이 떨어지지도 올라가지도 않게끔만 일을 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책방이라는 일터가 아니라도 이런 모습은 퍽 흔하리라 봅니다. 내 일과 내 일터를 아울러 사랑하며 즐기는 사람이 있으나, 일이든 일터이든 돈벌이로만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우리 터전이든 일본 터전이든 저마다 제 삶을 사랑하여 돌보는 나날보다는 더 크거나 많은 돈을 벌어들여 한껏 신나게 돈을 쓰는 나날로 탈바꿈한다고 느낍니다.


- “아르바이트 직원을 혹사시키면서까지 페어를 열고, 미미하게 매출을 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 “맞아요. 페어는 직원이 알아서 기획하고 있다구요. 무엇보다 우린 하루하루 주어진 작업을 처리하는 것만도 벅차요.” “음, 제가 하는 건 좋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요?” (29쪽)
- ‘(나는) 남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것에는 엄청 서툰 사람이야. 오히려, 전부 혼자 해도 되는 거라면, 그게 훨씬 마음 편해. 그럼, 저 사람들은 왜 서점에서 일하지? 책을 풀어놓을 뿐이면 다른 소매점에서 일해도 되잖아?’ (31쪽)



 누군가 책방에서 일자리를 얻어 일을 한다면, ‘책방에서’ 일하는 뜻과 보람이나 값이 남달리 있어야 합니다. 어디에서든 ‘일하는’ 뜻이나 보람을 찾을 수 있겠지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돈을 벌어 집식구 먹여살리’면 넉넉하다 여길 수 있겠지요.

 저로서는 자동차 만드는 공장이라든지 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며 ‘돈만 벌어 집식구 먹여살리는’ 일은 하나도 달갑지 않습니다. 입에 풀을 바르지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할 판이고, 내 입만이 아니라 내 집식구 입을 떠올린다면 참말 아무 일이든 붙잡으려 할 노릇이라 할 텐데, ‘아무 곳에서든 돈만 벌어’ 집식구를 먹여살릴 때에, 내 집식구는 이러한 삶을 달가이 맞아들일 수 있나 모르겠습니다. 더 가난할 수밖에 없거나 더 쪼들릴 수밖에 없더라도, 마음이 무겁거나 힘들지 않은 곳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일제강점기에 도시에서 살아가자면 무슨 일을 해야 했을까요. 오늘날 서울이나 부산에서 사랑하는 짝꿍을 만나 살림집 마련하여 살자면 무슨 일을 찾아야 할까요. 손꼽히는 대학교를 나온다 해서 마땅한 일자리 하나 만만하지 않다는데, 이러한 요즈음 젊은이들은 어디에서 어떤 일거리를 헤아려야 좋을까요. 연봉 높으며 정년 지켜 주는 사무직 일자리만 찾기 때문에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셈 아닌지요. 내 삶을 따스하며 포근히 꾸리도록 도와주는 일자리는 안 찾는 오늘날 젊은이가 아닌지요. 오늘날 젊은이를 키워 낸 어버이부터 돈으로 셈하는 살림살이는 북돋울지라도 마음으로 돌아보는 살림살이는 못 살찌운 셈 아닌지요.

 책방이라면 서울 종로에 있어도 책방입니다. 서울 용산이나 강동에 있어도 책방입니다. 불광동 안골이든 인헌동 옆골이든 어디에서든 책방은 책방입니다. 매장이 천 평을 넘어야 책방이지 않습니다. 매장이 두 평이라도 책방입니다. 갖춘 책이 십만 권이나 백만 권이어야 책방이지 않습니다. 갖춘 책이 이천 권이나 이백 권이어도 책방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집식구는 날마다 불고기를 먹든 피자를 먹든 열 몇 가지 김치를 먹든 해야 즐거운 밥차림이 아닙니다. 날마다 나물밥에 김치 한 조각 먹더라도 즐거운 밥차림입니다. 하루에 서너 끼니를 먹고 참까지 곁들여 먹어야 기쁜 밥차림이 아니요, 하루에 한두 끼 가까스로 챙겨 먹더라도 기쁜 밥차림입니다.


- “그건 뭐 하는 거야?” “아, 이렇게 아침과 밤에 잡지에 손을 올려 보면 몇 권이 팔렸는지 대충 알아.” “우와, 각각 두께가 다른데?” “응, 뭐, 매일 진열하다 보면 대강 감으로 알 수 있어.” “그렇게 하면 뭐가 편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애정이야. 하루하루의 노력이 쌓이는 거지.” (44쪽)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6권에서는 살짝살짝 ‘이 일을 왜 이렇게 하느냐 마느냐 하는 이야기’가 아닌 ‘이 일을 하루하루 즐기는 사랑에 담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사랑하니까 읽는 책이고, 사랑하니까 책방을 조그맣게 손수 열어 꾸리며, 사랑하니까 책방에서 사람들한테 내가 사랑하는 책을 보여주어 사서 읽도록 이끕니다.

 그래요, 사랑하기에 서로 만나 조촐하게 살림을 꾸리며 살아갑니다. 사랑하기에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더 너른 품으로 더 살가이 보듬습니다. 사랑하기에 더 잘난 일자리나 더 이름난 일자리나 더 거룩한 일자리보다, 나와 내 살붙이와 내 이웃 모두한테 아름다우며 즐거울 일자리를 찾습니다.


- “있잖아요, 전에 일했던 점포에 ‘책은 싫어’해도 ‘서점을 좋아’해서, 내내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만약 타사이 씨가 ‘서점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49쪽)


 물고기를 좋아하지 않으나 배와 바다를 좋아해서 바다로 나아가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내가 물고기를 안 좋아할 뿐, 내 동무와 이웃과 살붙이가 물고기를 좋아한다면 나로서는 내가 안 좋아하는 물고기라 하더라도 즐거이 낚아올리고 손질해서 밥상에 차립니다. 옳지 않으면서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삶이 아니라, 옳다는 테두리에서 내가 달가이 여기든 달갑잖이 여기든 마음으로 아끼는 가운데 할 일을 찾는 삶입니다.


- “오늘 말이야. 스오도(서점)에 갔었어. 치프도 봤어.” “뭐라고?” “여성과 임산부한테도 친절한 매장이 돼 있던걸?” “여자는 여자에게 친절한 매장을 만들려고 하지.”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 서점은 백화점 안에 있는 점포의 특성상 여성의 비율이 높아서가 아닐까? 만약 남자가 많은 장소라면 다른 식으로 꾸몄을지도 몰라.” “이상하게 편드는군.” “내가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해? ‘임신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힘드니까 잡지 매장에 육아서적을 놔두면 안 되겠어?’라고. 그러자 자기는 ‘귀찮아’라고 대답했지. 그걸 치프는 당연한 것처럼 쉽게 해 버렸으니까, 당연한 건 아닐지 모르지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손님도 바보가 아니니까. 타사이서점도 그런 곳이었어.” (50∼52쪽)


 책을 사랑하면서 책방을 사랑하지 않기 힘듭니다. 책과 책방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힘듭니다. 아니, 책을 사랑하기에 저절로 책방을 사랑하고, 책방을 고이 사랑하기에 시나브로 사람을 사랑합니다.

 다만, 사랑하는 모습은 누구한테나 똑같지 않습니다. 아무개는 이렇게 사랑하고 저무개는 저렇게 사랑합니다. 이이는 이런 빛깔로 사랑하고, 저이는 저런 내음으로 사랑합니다.

 참다이 사랑할 때에는 다 다른 사람을 다 달리 바라볼 줄 알면서 사랑합니다. 착하게 사랑할 적에는 다 다른 삶을 다 달리 껴안을 줄 알면서 사랑합니다. 곱게 사랑할 무렵이라면 다 다른 넋을 다 달리 헤아릴 줄 알면서 사랑합니다.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6권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1권부터 5권까지 오는 동안 서점 숲에서 ‘일하는’ 아카리였고, 서점 숲에서 ‘부잊히고 넘어지며 배우는’ 아카리였는데, 차츰차츰 서점 숲에서 ‘사랑하는’ 아카리로 거듭납니다. 이 사랑이란 남녀 사이 애틋한 마음을 느끼는 사랑이기도 하지만, 내가 붙잡은 내 일과 일터를 아끼는 사랑이기도 하며, 내 둘레 사람들이 나와 함께 이곳에서 일하며 서로를 보듬는 가운데 다 함께 착한 삶터로 가꾸고픈 사랑이기도 합니다.

 책방은 자그마한 책방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책방 또한 가게이지만, 가게로만 있는 곳이 책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커다란 책방일 때에도 가게로만 있는 책방이 아니라, 책방으로서 책방이 있는 가운데, 사람과 삶이 어우러질 수 있다면 아름답습니다.

 우리 나라 커다란 책방은 얼마나 책방답거나 삶터다운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 같은 이야기는 한낱 만화책 이야기일는지 모릅니다. 꿈으로만 꾸고, 꿈으로만 마주하는 사랑인지 모릅니다. 잘 팔리는 책만 더 잘 팔려 더 돈이 되도록 더 마음을 쏟는 책방 얼개를 내려놓고, 두루 사랑할 책을 두루 나누며 두루 넉넉할 수 있게끔 나아가는 책터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4343.12.12.해.ㅎㄲㅅㄱ)


― 서점 숲의 아카리 (6) (이소야 유키 글·그림,설은미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0.11.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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