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 이야기 1부 내 어머니 이야기 1
김은성 글.그림 / 새만화책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엄마한테 선물하고 나란히 누워 읽을 만화책
 [살가운 만화 42] 김은성, 《내 어머니 이야기 (1부)》



- 책이름 : 내 어머니 이야기 (1부)
- 글ㆍ그림 : 김은성
- 펴낸곳 : 새만화책 (2008.12.1.)
- 책값 : 13000원


 (1) 재미있게 나눌 우리 삶자락 이야기는


 처음에는 아기 얼굴 오른쪽 눈가에 살짝 생채기가 났습니다. 아기가 자면서 혼자 간지럽다고 긁으면서. 그런데 이 생채기에 딱지가 앉아 떨어질 무렵 또 긁어서 다시 덧나고 거듭 덧나다가는 차츰 볼과 귀로 오돌도돌한 녀석이 번지더니 온 얼굴 가득 벌겋게 되어 버립니다. 이웃에서는 이 모습을 보며 태열이니 아토피이니 하고, 일산 식구들은 얼른 병원에 가자고 채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식구는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아기가 제 얼굴을 긁지 않도록 하면서 엽록소물을 만들어 바르고, 생협에서 파는 아기 화장품을 살짝살짝 발라 줍니다. 나무숯물을 탄 물로 자주 얼굴을 닦아 주면서 하루하루 기다리는 동안,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엄마 밥차림을 바꾸기로 합니다. 우리 세 식구는 아빠(저) 일 때문에 여러모로 돌아다닐 일이 많고, 일산 옆지기 식구들 사는 집에 가서 여러 날 머물면서 옆지기가 폭식을 하는 때가 잦아서, 이 모든 흐름이 아기한테 이어지지 않았느냐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옆지기는 오롯이 생채식만 하기로 하고 줄기푸성귀와 뿌리푸성귀에 김하고 미역만 먹으려 합니다.

 애 아빠도 함께한다면 좋을 테지만, 이렇게 생채식만 하자면 도시에서는 푸성귀 값이 장난이 아니라 애 엄마만 하기로 합니다. 우리가 시골 살림이라면 조그마한 텃밭 하나로 모든 푸성귀를 거두어 먹을 텐데, 다른 집에서도 비슷비슷한 걱정을 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옆지기 식구들 사는 일산으로 전철을 타고 가는 길에 우리 아기를 들여다본 어느 할배가 그러더군요. “저런, 애기 저럴 때는 물 좋고 공기 좋은 데 가면 금방 낫는데.”
 





..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1907), 함경도 어느 마을에 한 여인네가 살고 있었다. 열여섯 살에 시집와서 3년 만에 막 첫딸을 낳은 상태였다. 그로부터 3년 뒤 둘째 딸을 낳았고, 둘째 딸을 낳은 4년 뒤 4대 독자 아들을 보았다. 홀시아버지와 어린 시누이 둘, 남편과 자꾸 불어나는 아이들을 거두며 살았다. 그래도 농토는 넉넉한 편이어서, 다른 집들이 하는 양식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지만, 장정 하나 없는 집에서 넓은 농토를 남편과 함께 직접 경작도 하고 일꾼을 쓸 때는 일꾼들 밥도 해 주느라 쉴 새가 없었고, 조상님 모시기도 소홀할 수 없는 노릇이라 여인네는 제삿날이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북새통 속에서 여인네는 애를 계속 낳았는데 아들 낳은 지 6년 만에 넷째 딸을 낳았고, 넷째 딸을 낳은 지 4년 만에 다섯째 딸을 낳았다. 그러자 애들 다섯에 시아버지, 시누이 둘, 남편, 여인네까지 열 식구가 되었다. 여인네는 열 식구 뒷바라지에 죽은 조상들까지 수발하며 살았다. 그 힘든 삶에도 여인네는 지치지 않았고, 착실한 남편과는 금슬 좋게 살았다. 그런데 그 여인네도 당해 내기 힘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아버지 모시기였다 ..  (7∼9쪽)


 인천에 있는 생협 매장에는 날푸성귀가 몇 가지 들어와 있지 않아, 이곳에서 고를 수 있는 만큼 골라 장만한 다음, 하는 수 없이 ㅇ마트로 나들이를 갑니다. 날푸성귀야 가까운 저잣거리에서도 장만할 수 있으나, 저잣거리 날푸성귀는 유기농이 아니라서 발길을 끊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유기농이든 유기농이 아니든 똑같은 먹을거리가 아니냐 생각하는 분이 많고, 곡식이 먹고 마시는 물과 바람과 흙이 일찌감치 더럽혀져 있는데 풀약과 항생제와 비료를 안 친 곡식이라고 더 나을 구석이 있겠느냐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더욱이, 세상이 더러우니 어른도 아이도 ‘좀 더러워진 먹을거리를 먹으면서 몸에서 견디어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어느 한편으로 보면 이와 같은 말씀은 틀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제도권 학교에서 따돌림과 괴롭힘과 입시지옥이 가득하여 아이들이 아이답게 자라기 어려운 형편이라지만, 동무를 사귀며 사회살이를 익히자면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꼭 입시지옥에다가 교과서 외우기로 치닫는 제도권 학교를 다녀야만 사회살이를 익힐 수 있을까요. 또래 동무는 제도권 학교 울타리가 아니면 만나거나 사귈 수 없을까요. 제도권 바깥 또래 동무라고 하여 모두 좋지 않겠습니다만, 제도권 안쪽 또래 동무라고 하여 꼭 반갑고 살가운 동무를 만나리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어느 자리에 서든 사람과 사람으로 만날 수 있으면 되고, 또래 동무라고 하여도 나이나 밥그릇만으로 따지기보다는 마음자리와 생각자리로 서로를 살피고 헤아릴 때 한결 사이좋게 지내면서 다 함께 북돋울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저한테 또래 동무들은 얼마나 있고 얼마나 살가우며 얼마나 오붓한지를 돌아봅니다. 이 동무들은 꼭 그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만나게 되는 동무들이었는가 헤아려 봅니다. 동무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동안 ‘우리가 어느 학교를 나왔었고 어느 대학교까지 다니거나 그냥 고등학교까지만 마쳤는가’는 하나도 큰일이 아닐 뿐더러 생각하지도 않음을 떠올립니다.

 우리한테는 어떤 이름이 그리 큰일이 아님을 곱씹습니다. 우리한테는 얼마쯤 돈이 있어야 할 터이나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되씹습니다. 우리한테는 어느 만큼 힘이 있어야 할 테지만 힘만 있다고 밀어붙일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돌아봅니다.

 삶을 가꾸고 싶어 더 나은 밥을 찾고, 삶을 아름답게 여미고 싶어 한결 나은 일자리를 찾으며, 삶을 즐거이 나누고 싶어 좀더 반가운 벗을 찾습니다. 밥이든 옷이든 집이든, 동무든 사랑이이든 이웃이든, 나를 나답게 꾸리고 우리를 우리답게 이끌어 주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 “그래! 고생 오래 했네!” “그래도 내 한 열 살 정도 될 때부터는 고생을 아이 했어! 우리 오빠가 취직하면서 집이 확 피기 시작했지.” “근판이는 어떻게 됐어?” “일본이 망하이까 남선으로 도망 나왔지. 근판이한테 당한 사램들이 근판이 집이 몰려들어 기둥을 도끼로 찍고 집이 불을 놓았대.” 그랬더이 어디 숨었다가 확 나오더래. 그 질로 도망 나와서 삼팔선을 넘어 남선까지 온 거야. 남선 나와서도 한 고을을 해먹다가 산이 내란이 일어나서 막는다고 하다 죽었대.” “토벌대를 하다가 죽은 모양이구먼!” “근판이 얘기는 그리지 마라. 그 자손들이 보면 뭐이라 그러겠니야? 자손들이 보면 자기 아버지 얘긴 줄 그답 아지. 아버지가 나쁜 일을 해서 그런지 자손들도 잘못됐어. 정식이는 큰 병 만나서 죽고, 문식이는 죽지는 아이 했지만 병이 많아서 고생하고 살아. 문식이 아들도 마흔도 안 됐는데, 풍이 지나가고.” “그러니까 어떤 집이 잘 되려면 조상 때부터 덕을 쌓아야 해.” ..  (73∼74쪽)


 지지난주쯤, 국민학교 적 동무한테서 밤 늦게 전화가 오며 “야, 한번 보자.”고 해서 부랴부랴 옷 갈아입고 나가 두 시간쯤 밤술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 집이야 아기가 아직 많이 어리지만, 동무녀석은 벌써 여섯 살 되는 아이가 있는데, 녀석은 자기 가게 일 때문에 일요일에도 늦은때까지 선배들하고 술잔을 부딪혔다고 합니다. 동무녀석한테 선배 되는 분들은 거의 모두 집안이 있을 테고 집식구가 늦게까지 잠 못 이루고 기다릴 텐데, 동무녀석은 가까스로 그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저를 찾았다지만, 그분들 남은 식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좀 서글픕니다. 술자리라 하여도 식구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술자리를 마련할 수 없는가 싶고, 늦게까지 웃고 떠들고 놀아야 한다면 온식구가 다 함께 어울릴 수 있게끔 놀 수 없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삶을 돌아보면, 도시에서 회사일이니 무슨 일이니 하면서, 늦도록 밖에서 ‘다른 사람 만나는 데에 시간을 쓰’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파김치가 되어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한테는 시간을 거의 못 쓰’게 되고 말지 않느냐 싶습니다. 집안살림과 집밖살림이 다르거나 나뉘어야 할 까닭이 없을 텐데, 우리 스스로 똑 금을 그어서 아예 다르게 꾸리고 아예 다르게 살아 버리지 않느냐 싶습니다.

 집안일을 집 바깥에서 이야기하기 꺼리고, 집밖일을 집 안쪽에서 이야기하기 꺼리지는 않는가요. 아니, 이렇게 주고받을 까닭이 없다고 느끼지 않는가요. 있는 그대로 만나고 꾸밈없이 사귀는 삶보다는, 겉을 치레하거나 꾸미는 삶으로 나아가지는 않는가요. 우리가 집에서 아이 키우는 이야기만 하여도 밤새 수다를 떨어도 그치지 않을 터이고,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사는 이야기만 하여도 밤늦도록 이야기를 이어도 끝나지 않을 터이며, 이웃집과 어울리는 이야기만 하여도 이틀 사흘 이어도 이야기는 넘치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도시 삶터에서는 우리 스스로 우리 이야기를 잊게 됩니다. 잃고 맙니다. 내놓고 되고 뒤로 젖히고 맙니다. 우리 얼굴이 없고 우리 모습이 없으며 우리 삶이 없습니다.
 



.. 그 무렵에 오징어 꾸들꾸들하게 말린 걸 처음 봤는데, 그걸 가지고 댕기면서 먹지도 않고, 가지고 댕기다 버렸어. 먹을 줄도 모르고, 먹어 봤더이 이상하고. 그래도 엄마가 우리를 혼내지도 않고. 우리가 어떤 때 입이 출출하다 하면 독아지서 배랑 과질이랑 꺼내서 가지다 주더라고. 그기 도화선이 언니 시집갈 때 큰상으로 가지온 음식들인 거야! 그때는 속상해서 안 먹고 놔뒀던 거지! 그거 먹으면서 우리 엄마가 얼매나 눈물을 흘리는지 몰라. 우리 오빠도 도화선이 언니는 못사는 집이 시집 보냈다고, 나중이 돈 벌어서 옷감이랑 끊어 보낼 때 꼭 도화선이 언니 것도 챙겨서 보내! 아무튼 도화선이 언니 시집 보낼 때 우리 집이 재난이야. 그러더이 귀동녀 언니 시집 보낼 때는 집 분위기가 얼매나 좋은지! 꽃이야..  (105∼106쪽)


 지난주에,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소설쓰는 공선옥 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에 함께했습니다. 옆지기와 아기는 집에 있고 혼자만 다녀오는데, 아이 둘 키우는 아주머니가 아이는 애 아빠가 보기로 하고 당신은 즐겁게 나들이를 나오는데 얼마나 홀가분하고 훨훨 날아다닐 듯했는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즐거웠다고 합니다. 애 아빠는 애 엄마가 하루 쉬게 하려고 회사일을 하루 쉬었다고 하더군요. 애 아빠 되는 그분은 얼마나 자주 이렇게 ‘애 엄마 쉬게 하기’를 해 주셨는지 모릅니다만, 하루 내내 아이 둘을 붙잡고 놀고 돌보고 밥해 먹이고 빨래하고 씻기고 집 치우고 하노라면 …… ‘아이 키우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으랴 싶어요.

 사람은 모든 일을 몸소 겪어내야만 알지는 않으나, 겪어서 받아들이는 앎과 책이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앎이란 사뭇 달라요. 굴막에서 굴 까는 일을 하루 내내 해 보고 가게에서 사먹는 굴맛과, 굴막조차 모르고 굴 까는 사람이 있는 줄 모르며 그저 마트에서 값싸게 사먹는 굴맛은 같을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어버이를 둔 사람이 밥집에서 밥 한 그릇 받아먹을 때하고, 농사일은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밥집에서 밥 한 그릇 받아먹을 때는 똑같을 수 없습니다. 여남평등이든 양성평등이든 지식과 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매무새하고, 집안일과 아이 키우기를 몸소 겪어 보고 나서 ‘평등’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매무새는 한동아리일 수 없어요.

 이러는 동안 우리한테는 늘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날마다 새 이야기가 나오는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면서 ‘새 수다꺼리’가 샘솟기도 할 터이나, 이러한 새 수다꺼리는 채 하루가 가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잊혀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닥이며 꾸리는 삶에서 얻고 느끼는 ‘새 수다꺼리’는 하루 한 주 한 달 한 해뿐 아니라 당신 아이한테까지 물려주며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면서 늘 새삼스러워집니다.


.. 우리 집이 내 일고여덟 살 때 제일 못살았다고 했잖아. 그래서 서당 갔다와서 숙자랑 나랑 보릿져 먹고 막 웃었다고 했지 않아. 그래도 우리 오빠 재혼하고는 집이 밥이 없은 적이 없어. 새 며늘 들였다고 음식을 갖춰서 먹는 거지. 부잣집이서 귀하게 자란 일산 시이는 굉자이 사랑을 받았어. 추운데 짐치를 뜨러 가도 우리가 가야 하는 줄 알았어. 일산 시이가 아깝아서. 새 며늘 들어오고 오빠가 좋아하이까 우리도 얼매나 좋으 줄 모르고, 우리 엄마, 아버지도 얼매나 좋아하는지! … 우리 엄마도 그렇기 며느리를 애껴. 한 번은 동네 어느 집냥이란 그 남편이 손님질을 왔어. 그래서 일산 시이가 떡을 반죽했는데, 반죽이 질게 돼서 떡을 찔 수가 없어. 그래서 귀동네 언니가 동네 방앗간이 가서 방아를 다시 찧어 와서, 떡을 해서 밥을 해서 내오이, 손님 밥상 내온다는 기 오밤중이야. 그 일을 잘하는 우리 엄마가 얼매나 갑갑했겠어. 그래도 며늘에게 뭐이라고 안 해. 일산 사이가 일을 해 본 적이 없어도 맘은 참 착해. 그 시이 들어오고부터 우리 집이 잘 됐으이, 얼매나 좋은 시이야 ..  (109∼111쪽)


 잠깐 숨을 돌리며 지난 몇 해를 돌아봅니다. 혼자서 동네 도서관을 꾸리다가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살면서 꾸리던 삶은 아주 크게 달라지면서, 더 많이 더 널리 돌아다니지 못하게 되기도 했지만, 이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새롭게 디딜 수 있던 동네가 있었고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난 8월에 아기가 태어나며 움직임은 더 줄어들었으나, 아기와 함께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도 오히려 세상을 더 넓게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는 한편, 딱히 더 많은 사람을 못 만나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이야기’를 이웃하고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저 스스로도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기를 한손으로 가슴에 안고 걸어다닐 때에는 사진찍기가 힘들고 번거로워서 혼자 맨몸으로 다닐 때하고 견주면 더 멀리 마실을 못 갈 뿐더러 몇 장 못 찍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장을 찍더라도 더 속깊이 찍도록 매무새를 고치게 되고, 아기와 함께 있기 때문에 한결 홀가분하게 찍을 수 있는 사진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아기 사진’ 찍기를 몸으로 배우게 되고, 아기 사진을 가까이에서 날마다 수없이 찍는 하루하루가 쌓이는 동안 ‘오늘 사진이 어제와 다르도록’ 하는 손길과 눈길을 익힙니다. 책 읽을 겨를을 내기 어렵지만, 책 하나를 손에 쥐어도 ‘허튼 책은 금세 알아채게 되는 눈썰미’를 익히기도 합니다.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는 삶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테지만, 하나를 잃었다기보다 하나를 새로 만나며 그 하나를 좀더 곰곰이 들여다보고 껴안는 몸짓을 녹여낸다고 해야 알맞지 싶습니다.

 문득, 집안살림이 퍽 쪼들리고 고달프고 괴로운 이들이 당신 삶 또한 쪼들리거나 고달프거나 괴롭게 생각하지 않는 일이 떠오릅니다. 제 살림살이 또한 꽤 쪼들리고 고달프고 괴롭다고 할 만한데, 제 삶은 우리네 골목 이웃과 마찬가지로 그리 쪼들리지 않고 고달프지 않고 괴롭지 않습니다. 일이 버겁고 벅차 눈물이 핑 돌 때가 잦으나, 이렇게 눈물이 핑 돌기 때문에 삶이 재미있습니다. 일이 쏟아지고 넘쳐 어깨와 팔다리가 빠질 노릇이지만, 이렇게 온몸이 쑤시기 때문에 삶이 보람있습니다. 잠깐이나마 다리 쭉 뻗고 드러누울 겨를이 없어 살이 쪽 빠지는데, 이렇게 살이 쪽 빠지기 때문에 삶이 튼튼하고 싱그럽구나 싶습니다. 이리하여 제 옷주머니에는 돈이 거의 없습니다만, 제 생각주머니에는 이야기가 꽉꽉 들어차 있어, 푸고 또 퍼내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2) 만화책 《내 어머니 이야기》


 지난 설 명절을 앞두고 만화책 《내 어머니 이야기》를 장만했습니다. 이번에 1부가 첫 권으로 나와 2부를 기다리는데, 1부 이야기는 만화잡지 《새만화책》에 꾸준히 실렸습니다. 만화잡지에 실리는 동안 다 보았지만, 이렇게 낱권책으로 나온 판은 또 남다르기에 즐겁게 따로 사들입니다.


.. “오오, 좋은 말들도 많다.” “엄마, 내 만화가 들어 있는 잡지책이 왔어.” “어디 좀 보자!” “어때?” “알았다. 이렇기 시시콜콜한 걸 다 적는 기 만화로구나! 그래도 속에 있는 소리는 다 했네! 그런데 방이 어쩌구저쩌구해서 니 오빠가 보면 뭐이라고 아이 할라나! 하기사 뭐 작가 맘이다. 지 맘대로 하는 기 작가지.” “맞았어. 작가 마음이야. 이 사람 비위에도 맞고 저 사람 비위에도 맞고, 그렇게 다 맞게 할 수는 없어.” “그래도 내가 남편이 아인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챙피스러워! 니 오빠가 보면 뭐이라고 그러겠어.” “엄마, 그건 실제 얘기가 아니고 꿈 얘기잖아. 엄마보고 그렇게 생각할 사람 하나도 없으니까 신경쓰지 마.” “난 남자를 아이 좋아하는데…….” ..  (141∼142쪽)


 옆지기한테 만화책을 건넵니다. 옆지기는 방바닥에 아기와 나란히 드러누워 책을 받들고 읽습니다. 아기도 만화책에 눈길을 보냅니다. 그러나 아기한테는 그리 재미가 없는 듯합니다. 빛깔이 없어서 그런가? 그림이 너무 작고 글이 많아서 그런가? 이 만화책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빽빽하게 들어찬 ‘글맛’이 제맛이니, 엄마가 읽어 주어도 아기한테는 아직 재미가 있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

 마땅한 소리이지만, 대여섯 달밖에 안 된 아기가 책읽는 재미를 알 수 없겠지요(그러나 아기로서는 지 엄마 아빠가 맨 보는 책이니 저도 재미를 붙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저 뭔가 그림이 있으니 까르르 웃기도 하면서 들여다볼 뿐 아니랴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옆지기는 이 만화책은 아기와 나란히 누워서 읽기보다, 옆지기 어머님하고 나란히 누워서 읽었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왜냐하면 책이름이 “내 어머니 이야기”이듯, ‘어머니 삶을 돌아보는 만화’는 아이가 지 엄마 삶을 돌아볼 만한 나이가 되어야 함께 읽을 수 있을 테니까요.
 





.. 보정집 할머이는 결혼하구 얼매 안 돼 남편이 죽었는데, 둘이 결혼해서 한 번 자 보지도 못한 거야! 옛날이는 그런 일이 많았어! 다 어릴 때 결혼하이까 결혼하구 1,2년 있다 자는 부부도 많았지! 그러구선 다시 시집을 안 갔으니 평생 남자하고 한 번 자 보지도 못한 거야! 그래 가지고는 여자들끼리 모였을 때면 보지다 솔바울 차고 이런 거야! ‘내 보지를 봐라. 처여 보지를 봐라.’ 어렸을 때 그기 얼매나 웃깁던지 ..  (54쪽)


 나중에 우리 어머니한테 이 만화책을 보여 드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에는 우리 아기가 커서 이 만화책을 볼 수 있도록 남겨 두고, 돌아오는 어머니 태어난날에 선물로 이 만화책 하나 새로 장만해서 슬며시 건네 드리려 합니다. (4342.2.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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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식탁 1
시무라 시호코 글.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사랑과 그리움과 애틋함을 만화 하나에 소롯이
 [살가운 만화 41] 시무라 시호코, 《여자의 식탁 (1)》



- 책이름 : 여자의 식탁 (1)
- 글ㆍ그림 : 시무라 시호코
- 옮긴이 : 김현정
- 펴낸곳 : 대원씨아이 (2008.5.15.)
- 책값 : 4200원



 (1)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는 눈골목 사진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아침, 모든 일을 젖혀 놓고 사진기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옵니다. 오늘은 모처럼 장갑까지 끼고 나옵니다. 설마 싶어서 두툼한 겉옷을 챙겨 입습니다. 모자를 눌러쓰며 눈발을 막고 사진기는 겉옷 안에 넣어 눈이 맞지 않게 하면서 뒤뚱뒤뚱 뜀박질을 합니다.

 창영동 골목집에서 배다리 철길다리 밑으로 지나 경동으로 건너갑니다. 늘 다니면서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았던 골목 모습을, 오늘은 눈발 날리는 모습으로 새롭게 담습니다. 경동을 지나 율목동으로 접어들고, 다시 경동으로 건너온 다음 용동으로 넘어가고, 용동에서는 인현동으로 건너서 은행에 들러 돈을 찾고, 지하상가를 거쳐 찻길을 가로지른 다음 동인천 〈대한서림〉 옆을 스쳐서 내동을 살짝 바라보다가 전동 삼치골목을 쳐다봅니다. 삼치골목은 가게마다 간판갈이를 하느라 부산합니다. 시에서 관광특구로 지정하며 간판을 새로 다는 듯합니다.

 부지런히 발을 놀려, 내동과 전동과 송학동1가가 만나는 무지개문(홍예문) 앞에 섭니다.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 뒤 무지개문 밑에 서고, 이 길에서 사고가 많아 걱정이라 한다면 이리로 자동차가 못 다니게 하면서 이곳을 ‘근현대 문화역사 체험 마을 특구’로 삼아도 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송학동1가 골목길을 지나 북성동3가로 접어들고, 중국사람들 살림집을 하나둘 넘겨보면서 북성동2가로 접어들고, 중국인거리에서 허물어져 가는 공화춘 건물 앞에 서서 잠깐 고개를 숙인 뒤, 선린동 해안동성당 앞에 닿습니다. 선린동 해안동성당 맞은편에 자리한 해안동성당 교육관은 시 지정 문화재라고 하는데, 이곳 또한 또다른 시 지정 문화재인 공화춘 건물과 마찬가지로 그예 썩어들며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 “참지 않아도 돼.” “그치만.” “그래.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구나. 하지만, 난 정말로 괜찮아. 이쿠가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모른 척할 순 없어. 아빠랑 할머니가 반대해도 엄마가 설득할게. 그러니까, 다음에 친엄마와 만날 기회를 만들자.” ..  (14쪽 - 수영 클럽의 아이스크림)


 눈발이 멎을까 싶어 쉴 새 없이 걷고 달리고 사진을 찍습니다. 엉덩방아도 찧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북성동2가 골목 안쪽에 옛날 그대로 남아 있는 우물터를 스치고 지나간 다음, 관동2가로 접어들었고, 관동2가에 멋들어진 텃밭을 꾸리는 집 앞에 어느새 새로 생긴 울타리를 물끄러미 바라다봅니다. 이곳 관동2가에는 나이트며 가라오케며 단란주점이며 잔뜩 있어서, 인천시에서 ‘역사문화의 거리’라고 붙인 이름이 남우세스럽기도 한데, 아무래도 그 술집에서 체한 사람들이 쓰레기를 텃밭에 함부로 버리는 듯합니다. 집임자는 텃밭에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높직하게 울타리를 쌓았고 경고글까지 붙여놓습니다.

 중앙동2가를 지나고 중앙동3가와 관동3가를 지난 다음, 신포동에서 머뭇거리다가 송학동3가로 거슬러 갑니다. 다시 내동을 지나면서 내동 성공회성당 앞을 지나갈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하고, 지하상가를 건너서 답동성당 옆으로 지나갑니다. 답동성당을 옆으로 끼는 샛길에 늘 자동차가 두 줄로 서 있어서 다니기 나빴는데 지지난달에 시에서 드디어 거님길 공사를 해서, 걸어다닐 때 차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도록 바뀌었습니다.

 다시 율목동으로 들어서면서 머잖아 사라질 인천시립도서관을 옆으로 흘깃 바라본 다음, 율목공원으로 들어갑니다. 율목공원 들머리에서 길에 염화칼슘 뿌리는 할아버지를 보고는 “고생 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나이를 제법 많이 먹은 은행나무한테도 인사를 하고 나서, 율목동 안쪽 고즈넉한 집자리, ‘개조심’ 푯말이 붙은 마당가에서 서성이면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부랴부랴 신흥동2가 골목을 누비고, 다시 율목동과 유동과 경동이 엇갈리는 골목을 지납니다. 인천시에서 밀어붙이는 산업도로 공사터 옆을 지나는 길을 마지막으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 ‘본심을 알 수 없어서 타인이 무섭다는 말은 자주 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 정말로 바깥출입을 안 하게 되면서, 넌 이제 이대로 평생 틀어박혀 사는 건가 생각했거든. 하지만 다행이야. 마음이 편하다는 이유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선 안 된다는 걸 겨우 깨달았구나. 넌 다시 한 번 타인과 마주할 용기를 갖고 있었어.’ ..  (26쪽 - 호밀 100%의 호밀빵)


 집으로 돌아오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손은 꽁꽁 얼어붙었으나 등판에는 땀이 줄줄 흐릅니다. 속옷을 모두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아침에 신나게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모두 155장을 찍었습니다. 얼마 못 찍었습니다. 밥을 먹고 다시 마실을 나가야겠어요.

 아침부터 눈밭 골목길을 후들거리는 다리로 누비면서 몸이며 손발이며 고단하기 짝이 없지만, 눈구경을 하기 어려운 오늘날, 모처럼 눈발이 그치지 않고 흩날리는 이런 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눈구경이 어려우니 눈온 모습은 덜 찍거나 안 찍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아무리 우리 세상이 이렇게 뒤바뀌고 있다고 하여도, 어렵게 만나는 눈송이인데,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송이를 냠냠하면서 비알진 골목에서 미끄럼도 타며 놀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어서 오거라. 볼일은 끝났니?” “네. 저기,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오시면 같이 우리 집에 안 갈래요? 유부초밥 다 같이 함께 먹어요.” …… ‘난 단순하니까 괜찮아. (열심히 한 상이야) 그러니까 분명 또다시 힘을 내서 달릴 수 있어.’ ..  (56쪽 - 운동회의 유부초밥) 






 생각해 보면, 오늘은 아기와 옆지기가 집에 없으니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아기와 옆지기가 집에 있으면, 밥하고 빨래하고 뭐하고 하느라 바깥마실은 엄두도 못 냅니다. 아기와 옆지기가 한동안 처가에 가서 지내고 있으니, 보일러가 얼지 않도록 틈틈이 인천집으로 돌아와서 손보고, 고양이한테 밥 주고 하는 사이사이, 눈골목 사진도 찍고 밤골목 사진도 찍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기와 옆지기가 함께 있는 집에서는 아기와 옆지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여덟아홉 가지 곡식으로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면서는, 밥그릇과 찌개그릇을 사진으로 담고, 빨래 널어 놓은 옥상마당을 드문드문 사진으로 담습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할 때에는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고, 골목길 마실을 할 때에는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좋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으며, 자전거 타고 마실을 다니면 또 자전거 타고 지나다니는 길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살아가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깁니다. 살아가는 발자취가 고스란히 사진이 됩니다. 삶과 생각과 모습이 온통 사진으로 아로새겨집니다.


.. ‘난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과자는 맛있고 예쁘고, 다만 너무나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78쪽 - 일요일의 다과회 마카롱)
 





 오늘 눈골목 사진은, 그동안 봄 여름 가을 사이에 신나게 다니던 곳을 다시 찾아가면서 담았습니다. 이제까지 봄 사진과 여름 사진과 가을 사진은 수두룩하게 있으나, 겨울 모습을 말할 만한 사진이 없어서 짝을 이루어 놓지 못했는데, 오늘 다리힘이 쪽 빠지도록 돌아다니면서 비로소 마무리가 지어집니다.

 사진을 한 장 두 장 찍는 동안, 제 어릴 적, 이 골목 저 골목을 뛰어다니면서 놀던 일이 떠오릅니다. 골목길 동무들하고 놀던 일이 떠오르고, 중고등학생 때 시험공부로 밤늦게까지 붙들어매는 학교가 싫어서 주말이면 하염없이 골목길을 걷고 또 걸어서 다니던 일이 떠오릅니다.

 1992년에도 이 길을 걸었는데 그때나 이제나 마찬가지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1985년에도 이 골목에서 놀았는데 그때나 이제나 다르지 않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1982년과 1981년에 엄마 손을 잡고 신포시장과 송현시장과 신흥시장을 다녔지, 하고 떠올립니다. 이제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 2019년에 이 골목을 다시 거닐 수 있을지 모르고, 2029년에 아이와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 예전에 살던 집 둘레를 거닐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1981년이나 1992년은 그리 까마득한 옛날 같지 않은데, 2019년이나 2029년이 우리 앞에 다가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까마득한 앞날 같습니다. 그때까지 이 골목이, 우리 골목집이, 이웃 골목 삶터가 하나도 안 남아 있을 듯합니다. 오늘 하루 동안 담은 사진에만 남고 그예 없어져 버릴 듯합니다.
 





.. ‘상처 입힐 것 같아서 무섭다고 말하면서 히로야 오빠가 씻은 딸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히로야 오빠가 보물처럼 다룬 딸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 있지. 웃을 거 같아서 말하지 못했지만, 변신해서 인기를 얻는 것보다, 누군가를 사귀는 것보다, 난 사실은 이게 처음으로 하고 싶었던 것 같아. 지금 빠져 버린 ‘사랑’이라는 걸.’ ..  (100∼102쪽 - 히로야가 씻은 딸기)


 사진을 찍는 동안 등과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습니다. 손가락이 얼고 발가락이 얼었습니다. 그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저는 ‘사라져 가는 우리 고향’을 사진으로 담을 마음이 없는데, ‘잊혀져 가는 우리 옛 도심지’를 사진으로 찍을 생각이 아닌데, ‘추억이 되어 버린 우리 골목길’을 사진으로 박아 놓을 뜻은 없는데.

 사진에 하나둘 찍힐 때마다 ‘이야기’로 헤아리고 있습니다만, 다른 분들한테는 그저 ‘기록’이나 ‘추억’으로 느껴지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살아가는 발자국이며 살아온 손때인데, 낡은 집이고 ‘주거환경개선을 해야 하는 낙후된 지역’으로만 느끼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 ‘이젠 다 싫어. 알바 가는 것도 싫어. 시시한 공부도 싫어. 타카하시에게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싫어. 이젠 모든 게 다 싫어, 싫다고. 싫어. 싫어. 싫어.’ ..  (111쪽 - 종이박스 속의 말린미역) 






 눈을 쓸고 쓰레기를 치우는 몽당빗자루에 깃든 사랑을 사랑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이 몇 사람한테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쓸고 일곱 시에 쓴 다음 아홉 시에 또 쓰는 골목집 아주머니와 할머니들 손자취를 곱새길 수 있는 넋이 몇 분한테 살아 있을지 궁금합니다.

 사랑하니까 찍는 사진이고, 사랑하기에 찍을밖에 없는 사진이며, 사랑을 바치며 찍게 되는 사진인데.

 같이 살고 싶어 찍는 사진이고, 함께 살고 있으니 찍는 사진이며, 오순도순 모이고 어우러지면서 엮어내는 사진인데.


 (2) 사랑에 빠진 삶, 사랑을 그리는 삶, 만화 《여자의 식탁》


 만화책 《여자의 식탁》을 읽습니다. 지난해 8월에 아기를 낳은 뒤 다섯 달 동안 만화가게에 들르지 못해 그사이 새로 나온 만화는 하나도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그제 어렵사리 만화가게 나들이를 하면서 잔뜩 사들였는데, 마침 지난해 5월에 처음 옮겨졌다고 하는 《여자의 식탁》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4권까지 나왔고, 아직 줄거리와 맛을 알 길이 없기에 1권만 먼저 사서 읽습니다.


.. ‘처음으로 남자에게 안기면서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의 시간과 씁쓸한 첫사랑’ ..  (180∼182쪽 - 버스 정류장)


 그린이 ‘시무라 시호코’ 님은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서 사람들이 부대끼면서 어울리는 이야기를 ‘먹을거리 하나’에 따로따로 담아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책이름이 《여자의 식탁》이구나 싶은데, 밥상머리 먹을거리는 새삼스러운 요리이지만은 않습니다. 초콜릿 하나이기도 하고 딸기 한 송이이기도 합니다. 스파게티 한 접시이기도 하고, 운동회 때 먹는 유부초밥이기도 합니다. 차멀미를 막아 줄까 싶어 씹는 민트껌일 때가 있고,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혼자 대학교 다니며 알바하여 공부할 돈을 버는 아이가 고향 부모님이 보내 준 말린미역일 때도 있습니다.

 학교 앞 분식집 떡볶이와 순대로 옛생각을 되새기기도 하듯, 청어 한 접시나 삼치 한 접시로 옛사람 만나던 일을 떠올리기도 하듯, 눈물 젖은 막걸리 한 사발이나 도시락 한 그릇으로 어린 날 집식구와 옛동무를 그리워하기도 하듯, 《여자의 식탁》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먹을거리에 모든 삶이 담기고 모든 이야기가 스미며 모든 우리 발자취, 곧 우리 생활문화역사가 있음을 찬찬히 보여줍니다. 군더더기 없는 그림결에 부드러운 흐름으로 우리 마음결을 사로잡고 눈길을 촉촉하게 해 줍니다.

 사랑이란 시끌벅적한 사랑만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사랑이라면 누구한테나 마음속 깊은 데에 조용히 소담스레 보듬고 있기도 하다고 들려줍니다. 사랑이기에 옛사랑과 새사랑 가리지 않고 언제나 내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일으켜세우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곳에 튼튼하게 살아 있어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귀엣말을 합니다. (4342.1.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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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 마음을 담은 그릇
호연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도자기’와 ‘만화’에 담은 아름다운 마음
 [살가운 만화 38] 호연, 《도자기》



- 책이름 : 도자기
- 글ㆍ그림 : 호연
- 펴낸곳 : 애니북스 (2008.5.13.)
- 책값 : 14500원



 (1) 우리 아기한테 쏟는 마음


 동네에서 무슨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도서관에 찾아와서 우리 집 옥상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 싶다고 하기에, ‘그러마’ 하고 올라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옥상에서 둘레를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살림집까지 들어간 듯합니다. ‘우리 집에 들어가겠다’고 여쭙지 않았으며, ‘살림집에 들어가 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버젓이 다른 사람 집에 들어갔고, 집에서 더위를 식히며 무거운 몸을 가누고 있던 옆지기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옥상이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고 둘러대었다는데, 텅 빈 옥상이 아니라, 창문과 대문이 따로 있는 집이 한쪽에 있고, 문간에는 신발이 여럿 놓여 있으며, 더워서 열어 놓은 대문 안쪽으로는 여러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보이는데, ‘집이 아닌 옥상’으로만 여긴다는 대목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참 딱한 사람들이구나, 그렇게 하면서 무슨 공연이니 예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러면서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않을 수 있나, 그런 마음으로 자기들 공연이나 예술에 무얼 담는다고, 그 영상 장비에 무슨 그림을 담는다고.


.. “난 우리 아버지가 새 같다고 생각했어요. 나랑 눈을 잘 안 맞추거든요.” ..  (32쪽 / 청화백자 매화 대나무 무늬 병)


 오늘도 그지없이 더운 하루입니다. 창문을 모두 열고 자리에 앉아 도서관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흐릅니다. 부채질을 하지만 부채질을 멈추면 다시 땀이 흐릅니다.

 틈틈이 낯과 손을 씻어 보지만, 씻을 때만 잠깐 시원한데, 수도물도 뜨뜻미지근입니다.

 아침나절 옥상마당에 널어 놓은 이불은 햇볕을 아주 듬뿍 머금고 있고, 빨래는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바싹 마릅니다. 다시 한 번 낯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빨래 한 점을 합니다. 손과 발은 물이 닿아 땀이 조금 식혀지지만, 빨래 하는 몸은, 등줄기로는 땀이 흐릅니다.


.. “개구리다!” “위험해.” “어, 이 자식 더워서 안 움직이냐.” “죽은 척하는 거야.” …… “나 시골 가서 개구리 봤다.” “난 두꺼비도 밟아 죽였어. 타이어에 펑.” ..  (70쪽 / 청화백자 매화 대나무무늬 연적)


 이렇게 더운 여름날 아기가 태어난다면, 아기 어머니도 힘겹고 아기도 힘겨울 텐데, 아기가 나올 무렵은 조금 선선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반가우랴, 고마우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오늘처럼 더운 날씨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기는 더위를 느끼며 태어나, 이 세상은 이렇게 더운 여름임을 느껴야 할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 살림집에서는 전기 먹는 살림살이 거의 없고, 자동차도 없으며,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도 없지만, 우리가 이런 물건을 안 써도 이웃사람 모두가 이 물건을 아주 흥청망청 쓰고 있기 때문에, ‘남 탓’을 할 일이 아니라 ‘함께 껴안을 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기는 이 모든 짐을 두 어깨에 얹어놓으면서 태어납니다. 만만하지 않은 세상임을 알아가게 됩니다. 서로서로 나 몰라라 하는 세상임을, 자꾸자꾸 쓰고 버리기만 하는 세상임을 느끼게 됩니다. 버려지는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가는 헤아리지 않는 세상임을, 이리하여 자기 꿈을 펼치면서 살아가기에는 몹시 막혀 있는 세상임을, 참된 공부를 바라고 아름다운 일을 하며 즐거운 놀이를 함께 하면서 땀흘리는 보람을 느끼고 싶어도 늘 벽에 부딪쳐야 하는 세상임을, 한 해 두 해 자라는 동안 몸으로 배우겠지요.


.. “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숙사의 아침밥을 받아.” “부지런하군.” “다시 자. 아침에 누룽지 퍼 온 통 안고.” “맙소사.” “점심때 일어나서 그걸 먹고 수업 가.” “으엑 비위생.” …… “이거, 호연 너가 예전에 말했던 인화문이지?” “엉? 음. 누룽지 무늬네, 누룽지.” ..  (106∼108쪽 / 분청사기 인화무늬 장군)


 우리 두 식구는 우리 나름대로 아기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집임자가 이 해묵은 집을 아주 조금 손질해 주겠다고 해서, 월요일에 창문샤시 하나 덧달아 주고, 작은 방 벽에 압축단열재를 붙여 준다면, 그나마 덜 시끄럽고 모기하고도 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공사만 마치면, 바로 창문마다 긴천을 두껍게 달아 빛이 새어들지 못하게 막을 생각입니다. 바닥에 깔 이불이나 담요는 모두 마련했습니다. 가위와 실도 가까운 곳에 두었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누런쌀 십 킬로그램도 주문해 놓았으니, 두 달쯤은 집에만 있어도 밥을 해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틈틈이 저잣거리 나들이를 얼른 하면서 날푸성귀 장만을 해야겠지만.

 가장 큰 일이라 한다면, 옆지기도 옆지기이지만, 제가 혼자서 아기낳이를 거드는 한편, 똥오줌 받아내고 땀 닦아 주고 밥 차려서 먹여 주기를 한 달 가까이 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집안을 쓸고닦는 일, 밥벌이 하는 일, 또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을 모두 해내야 하는 대목.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지치거나 마음을 놓아 버리게 되면 안 되는 아이낳기입니다. 둘 모두 몸을 잘 간수하면서, 꼭 알맞춤하게 움직이고 일손을 나누고 마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 ‘내가 어릴 적,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화장하여 남은 재를 본 적이 있다.’ … ‘와, 정말 희다.’ ..  (136쪽 / 분청사기 물고기 무늬 편병)


 살림집에서 누워 있던 옆지기가 도서관으로 내려옵니다. 너무 덥고 허리가 아프고 배도 아프다고 합니다. 아기가 나온 뒤에도 이렇게 더우면 어떻게 누워 있어야 하느냐 걱정을 합니다.

 저도 걱정입니다. 더운 날, 더운 집, 더운 몸이 되어서 이 어려움을 견디어 내야 한다니 참 걱정입니다. 씻는들, 부채질을 한들, 작은 선풍기 하나 돌린들, 더위를 얼마나 털어내면서 아기를 안아 줄 수 있을지 근심입니다.

 더욱이, 아기가 나오면 석 주 동안은 빛을 보면 안 되는데, 창문을 닫고 긴천을 드리워 놓으면 여름날 방은 훨씬 후덥지근할 테지요. 갓 태어난 아이는 밝은 빛을 보면 눈이 다칩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텔레비전과 셈틀을 가까이하기에 눈이 많이 나빠져서 안경을 많이 낀다고 하는데, 이런 탓도 틀림없이 있지만, 처음 세상에 나올 때 병원에서 나오다 보니, 병원에서 눈부시게 켜 놓은 불빛에 눈이 다칩니다(병원에서는 아기와 함께 아기 어머니도 센 불빛 때문에 눈이 다치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아무래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아기 어머니 위로 불을 환히 밝힐 뿐 아니라, 수많은 ‘(아기하고) 낯선 사람들’이 시끄럽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아기가 나온 뒤, 탯줄로 쉬는 숨을 마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 다음 탯줄을 자르고, 탯줄을 자르고 나서 아기는 어머니 곁에서 죽 지내야 합니다.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아기를 낳은 뒤로 한 주에서 열흘까지 그대로 누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몸을 움직이면 아기 어머니는 엉덩뼈가 뒤틀립니다. 아기 낳은 뒤 몸을 함부로 움직여서 엉덩뼈가 뒤틀리면 등뼈도 뒤틀리고, 젊은 날에는 그럭저럭 버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어머니는 허리아픔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누운 채로 똥오줌을 누어야 하고, 옆에서 이를 받아 주고 닦아 주는 도움이가 꼭 있어야 합니다.


.. “18세기 전반 조선각병 같던 내 몸이 18세기 후반 각병이 되었구나.” “호연아.” “저리 가. 너랑 이젠 안 마셔.” “나, 이번 달 군대 가는데.” “그럼 마셔야지.” ‘내 몸은 이제 떡메병으로 치닫고 있다.’ ..  (263∼264쪽)


 그렇지만, 우리가 집이 아닌 병원에서 아기를 낳으려 한다면, 이 모든 터전을 제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집은 기찻길 옆 집이라서 기차소리로도 시끄럽지만, 병원 시끄러움은 이와는 또 다르게 클 뿐더러, 지나치게 밝고, 자꾸 아기 어머니를 움직이게 하며, 아기와 아기 어머니 모두 고요하며 느긋하게 쉬도록 마음을 써 주지 못하는 얼거리입니다. 그러니, 소중한 아기를 낳으려 하면서 병원에 갈 수 없습니다. 병원에 갈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 “새들은 나한텐 절대 안 오면서 나무한텐 잘 가요.” “빨리 안 써?” “아, 나무한테는 자석이 있는 것 같아요! 새 끌어들이는 자석!” “다 튄다, 욘석아.” ..  (349∼350쪽 / 청자 상감 구름 학 무늬 매병)


 병원이라는 곳에서 아기낳기를 ‘돈벌이’나 ‘일거리’가 아닌 ‘한 목숨한테 바치는 마음 기울임’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새 목숨은 병원이라는 데가 아니라, 자기 어버이와 함께 살아갈 집에서 낳아야 함을 헤아릴 수 있다면, 나라 정책도 어느 만큼은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병원이나 나라한테 무엇인가를 바라기 어렵습니다. 바란다는 꿈을 안 꿉니다. 사회 얼거리나 틀거리가 벌써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며, 사람들 생각과 느낌 모두 ‘아기와 아기 어머니한테 참답게 마음을 쏟는 일’이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습니다. 아기를 낳으면 돈 얼마 주고 한다는 정책이 아니라, ‘아기낳기란 무엇인가’부터 헤아려야 할 텐데. 아기를 낳은 뒤 아기한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가 아니라, ‘아기가 살아갈 우리 땅 우리 터전이 얼마나 아름다울까’부터 살펴야 할 텐데.


 (2) 만화책 《도자기》에 담긴 마음


 네이버 웹툰에 실리던 《도자기》가 지난 5월에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널리 사랑받는 웹툰이 곧잘 만화책으로 묶이곤 하는데, 정작 책으로 묶인 웹툰 가운데에는 ‘인터넷만화 빛깔’을 제대로 못 살린 판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굳이 종이로 찍어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드는 책도 꽤 있습니다(제가 보기로는).

 《도자기》는 인터넷만화로만 실리던 때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책으로 나오기’를 바랐고, ‘책으로 나온’ 뒤에는 인터넷만화 때 못지않게 두루 사랑받고 있습니다.


.. “말씀 너무 재밌었어요. 선생님 경험담들요. 저는 고고미술사학과의 일들을 만화로 그리고 있는데요, 선생님의 경험을 그려도 좋을까요?” “…… 응, 그래 …….” “이 교수님, 저 만화 그리고 있답니다. 도자기에 관해서 말예요.” “그래?” “…….” ‘만화라서……일까.’ ..  (46∼47쪽 / 백자 철화 끈무늬 병)


 만화에 자주 엿보이는데, 그린이 호연 님이 하는 ‘고고미술사학과’ 공부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고 합니다. 뜻도 모르는 채 끝없이 외워야 하는 한자와 한자 이름에다가, 교수가 파헤치는 갈래에 따라서 연구학설이 다르고, 보고서와 시험범위는 끝도 없을 뿐더러, 도자기를 만화로 담아내는 그린이 뜻을 헤아려 주는 스승(교수)은 보이지 않고.


.. ‘옛 도공들은 동심이 가득했나 보다.’ ..  (96쪽 / 신발 모양 토기)


 그렇지만 호연 님은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하는 공부가 아니었고, ‘많은 이들이 보는 자리에 선보였다’고 하지만 뽐내 보이려고 그린 만화가 아니었습니다. 좋아하는 공부요 즐기는 만화입니다. 만화 어느 대목에서도 그린이 스스로 “공부가 좋았어요” 하고 말하거나 “만화가 즐거워요” 하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만, 만화를 보는 동안 호연 님 이분은 자기가 파고드는 공부를 참 좋아하고 이렇게 공부하는 자기 삶을 만화로 담아내는 일을 무척 즐기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도자기와 하나가 되어, 도자기가 처음 태어나던 그때 그 ‘도공’은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꿈꿉니다. 도자기를 배우는 지금, 자기가 죽고 사라질 먼 뒷날까지도 죽지 않고 남을 도자기(자기가 빚은 도자기)를 들여다볼 그때 그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오늘날을 어떻게 헤아려 보게 될까를 꿈꿉니다.


.. “뭐 해?” “토기에 내 일상을 붙여, 먼 후대까지 알릴 거야.” ..  (99쪽 / 토우 장식 긴 목 항아리)


 반가웠던 일은 반가웠던 마음을 잊지 않고 만화로 녹여냅니다. 슬펐던 일은 슬펐던 마음을 놓지 않고 만화로 곰삭여냅니다. 기뻤던 일은 기뻤던 마음을 잃지 않고 만화로 되살려냅니다. 아팠던 일은 아팠던 마음을 흘려보내지 않고 만화로 차곡차곡 담아냅니다.

 사진을 하려면 사진과 함께 살고, 글을 쓰려면 글과 함께 살아야 하듯, 호연 님은 만화와 도자기 공부를 하면서 만화로 사는 한편 도자기 공부로 함께 삽니다. 이 삶이 따로 떨어지지 않은 채 하나로 묶였고, 하나로 묶인 ‘만화와 도자기’는 어엿한 이야기 보따리가 되어, ‘외로운 사람(18쪽)’들 마음에 살며시 다가가며 ‘좋은 마음동무로 어깨동무를 하는 손길’로 뻗어나갑니다.


.. “여러분, 이 상이 어느 나라 건지 맞춰 볼래요?” “신라요!” “백제요!” “고구려요!” (하하, 귀여워) “자, 다들 정답이에요. 이 보살상은 고구려 것도 백제 것도 신라 것도 돼요. 그런데, 여러분 세대는 앞으로 논술이 매우 중요해요. 그러니까 글 쓸 때, 고구려 것이라고 쓰면 10점, 신라 거라고 쓰면 20점, 백제 거라고 쓰면 50점, 삼국시대 것이라고 쓰면 100점입니다. 자, 그럼 다음 걸 볼까요.” … (보살님은 100점짜리 논술답안지셨군요. 사람들은 어떤 큰 오해를 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  (164∼167쪽 / 분청사기 조화구름무늬 대접)


 우리 나라 대학교에는 ‘고고미술사학과’도 있고 신문방송학과도 있으며 동양사학과도 있습니다. 에스파냐말을 다루는 학과가 있고 유고슬라비아말을 다루는 학과가 있으며 네덜란드말을 다루는 학과가 있습니다. 농학과가 있고 사회복지학과가 있으며 한국어교육과가 있습니다. 수많은 학과가 있습니다.

 만화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 있으며 글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호연 님은 고고미술사학과 공부를 하면서 만화를 즐겼습니다. 이 나라에서 대학생으로 있는 분들이라면 네덜란드말을 공부하면서 글을 즐길 수 있고, 농학 공부를 하면서 사진을 즐길 수 있겠지요. 꾸려 가는 삶에 따라 얻게 되는 이야기가 다르고, 얻게 되는 이야기가 다른 가운데 벗과 함께 나눌 생각이 넓어집니다. (4341.8.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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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세트 - 전2권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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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태어났으면 살인자가 되었을까?
 [살가운 만화 37] 마츠모토 타이요, 《ZERO (1∼2)》



- 책이름 : ZERO (1∼2)
- 글ㆍ그림 : 마츠모토 타이요
- 옮긴이 : 김완
- 펴낸곳 : 애니북스 (2008.6.20.)
- 책값 : 한 권에 8000원씩



 (1) 사랑 없이 사람을 만나는 우리들 오늘날


.. “그보다 아저씨, 저 눈 좀 봐. 시합이 다가오면 늘 저래. 살이 빠져서 그런가? 이젠 익숙하지만. 기분 나쁜데. 살인자의 눈.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사람 꽤나 죽였을 거야, 저 양반.” ..  (1권 127쪽)


 만화책 《ZERO》에 나오는 ‘고시마’는 권투선수입니다. 경기를 한 번 치러서 이기면 영웅으로 대접을 받고 어마어마하게 돈방석에 앉는 ‘프로’ 권투선수입니다.

 권투선수 ‘고시마’는 뒤에서 밀고 있는 부자가 있습니다. 부자는 고시마와 붙는 경기를 한 번 꾀할 때마다 고시마한테 퍽 많은 돈을 내어주지만, 부자가 손에 쥐는 돈은 훨씬 많습니다. 고시마와 붙는 선수한테도 많은 돈을 내어줄 테지만, 이렇게 쓰는 돈은 자기(부자)가 벌어들일 돈하고 견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 “이 세계에선 제로니 뭐니 불리며 우상처럼 숭배 받지만, 링을 내려가면 어떨 것 같아? 너한테 뭐가 남냐? 아무것도 없지.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냐?” “관 둬. 아라키. 내가 당신에게 배운 거라면 사람 때려눕히는 것뿐이야. 난 그걸 충실히 지켜 왔다고 생각하는데.” ..  (1권 206∼207쪽)


 권투선수가 다른 세상에 태어났다면, 그러니까 옛날에 태어났다면 무슨 일을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군대를 이끄는 군간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군간부가 되자면, ‘씨가 좋은 어버이’한테서 태어나야 합니다. 낮은자리 사람 집안에서 태어나 보았자, 부역이니 전쟁이니 끌려가서 칼받이(요즘은 총받이지만, 옛날에는 칼받이였지 않으랴 싶습니다)로 스러지지 않았을는지요. 힘 잘 쓰는 놈이니 ‘양반집에서 막 부려먹는 돌쇠’가 되지 않았을는지요. 스스로 무엇인가 뜻을 품었다면, 산속으로 들어가 화적패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거의 모든 여느 사람들 삶이 그러했듯이, 농사꾼이 되어 부지런히 땅 갈고 밭 일구면서 흙과 함께 살아가며 식구들과 오순도순 살아갔을까요.

 오늘날은 싸움 잘하는 일도 ‘짭짤한 돈벌이’가 됩니다만, 이를테면 적어도 깡패가 되어 동네에서 돈 뺏는 짓이나마 할 수 있고(하긴, 옛날에도 깡패는 있었겠지요), ‘운동경기가 된 격투기’ 선수로 뛸 수 있습니다. 요사이, 권투는 시들해지고 킥복싱과 케이원과 프라이드와 유에프시처럼 피 튀기고 관절 꺾으며 쓰러진 선수를 마구 밟거나 까부수어도 되는 ‘격투기’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으니, 처음부터 아예 격투기 선수가 되고자 싸움박질을 배우려고 땀흘리는 사람도 생겨납니다.

 ‘하늘이 내려준 단단하고 무시무시한’ 주먹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날에는 그렇게까지 기를 쓰고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하지 않더라도 ‘맞선이를 반죽음으로 몰아넣도록 두들겨패는’ 운동경기를 뛰면서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왜 자기 수명을 깎아먹으려 들지? 상대만 잘 고르면 앞으로 5년은 지킬 수 있는 타이틀인데!” “그렇게 지킨 챔피언 벨트, 죽을 때 배에 두르고 관에 들어갈까? 하하하.” ..  (1권 158쪽)


 그런데, 돈으로 움직이는 세상, 돈이 으뜸이 되는 세상에서는 무엇이든지 ‘내기’를 하고 ‘겨루기’를 해야 합니다. 한 배에서 나고 자란 형제 사이에서도 누가 젖을 더 많이 빨아먹느냐를 겨루어서 이겨야 좀더 잘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을 탁 열어 놓고 스스럼없이 사귈 동무는 없어도 되는 가운데, 혼자서 우뚝 선 다음 자기 뒤치닥꺼리를 맡아 줄 아랫사람을 부리면 되는 세상으로 빠르게 바뀝니다. 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르면서 ‘더 잘 싸워서 더 옆사람을 밟고 올라서는 인간병기’로 거듭납니다. 어버이는 또래 이웃을 살피면서 당신들 아이가 얼마나 ‘이웃 또래를 잘 죽이거나 무찌르면서 더 높이 올라설 수 있는가’를 따지며 북돋우고 채근하고 기름을 칩니다.

 “돈도 있는” 세상이 아니라 “돈만 보는” 세상이 깊어가는 이 땅에서는, 이제 교과서와 책과 종교지도자 말씀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이 푸대접’을 다루지 않을 뿐더러 ‘농사꾼과 노동자가 되도록 이끌지 않는’ 이 나라로서는, 살결빛이 다르고 몸차림과 얼굴이 다르며 몸 어느 한 군데가 아프거나 절뚝거리는 사람들은 손쉽게 따돌릴 뿐더러 괴롭혀서 아예 일어설 수 없도록 밟아 버리고 있는 이 겨레한테는 눈에 아무것도 뵈지 않습니다.

 눈이고 마음이고 머리고 몸이고 돈만 들어차 있으니 사랑이 깃들 수 없어요. 입이고 어깨고 팔다리고 돈으로만 채워져 있으니 믿음이 스며들 수 없어요. 귀고 가슴이고 손발이고 돈으로만 발라 놓고 있으니 나눔이 자리할 수 없어요.


.. “토라비스는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그래야 해요.” “네?” “서두르지 않으면 고시마 씨에게 잡아먹힐걸요.” ..  (2권 55쪽)


 언뜻 보기에는 앞을 내다보고 가는 길 같지만, 조금도 앞을 내다보는 길이 아닌 삶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위를 올려다보며 가는 길 같지만, 하나도 위를 올려다보는 길이 아닙니다. 문득 보기에는 크고 높고 많은 무엇인가를 붙잡는 길 같지만, 어느 하나 크거나 높거나 많은 무엇인가하고는 멀어져만 갈 뿐입니다.

 이가 아프고 다리가 저리고 재채기가 나오면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병원에 갈 줄은 압니다. 그렇지만 생각이 더러워지고 가슴이 텅 비며 얼과 넋이 비뚤어지고 있음에도 ‘마음이 아픈’ 줄 깨닫지 못할 뿐더러, ‘마음앓이’를 어느 곳 누구한테서 고치거나 다스릴 수 있는가는 조금도 모르는 한편, 고칠 생각을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그만이고, 인터넷을 열면 넉넉하고, 자가용 시동을 넣으면 끝이며, 카드를 긁으면 걱정이 사라집니다.


 (2)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살아갈 앞날


.. “옛날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해?” “응?” “이 주먹은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그래, 고시마. 누구보다도 강하고 아름다운 이 주먹 말이다. 꽉 쥐어 보렴. 이 안에 신이 있단다.’ ..  (1권 117쪽)


  만화책 《ZERO》에 나오는 권투선수 ‘고시마’는 경기 날짜를 받고 네모난 싸움판에 오를 때, 비로소 자기가 살아가는 맛을 느낍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고시마가 듣고 보고 배우고 익힌 모두는 ‘네모난 싸움판에 올라 더 빨리 더 힘껏 눈앞에 있는 녀석을 무너뜨리는 일’ 하나였습니다.

 고시마는 손에 낫이나 호미를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옆에서 고시마 손에 낫이나 호미를 들려 보려고 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고시마는 연필이나 종이나 지우개를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웃에서 고시마 손에 연필과 종이와 지우개를 들려서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고시마는 자전거에 몸을 싣고 제 고향나라 고향땅을 실컷 누벼 본 적이 없습니다. 고시마한테 자전거를 내어주면서 몸소 자기가 발딛고 선 이 땅을 헤아려 보도록 가르친 사람은 없습니다. 고시마는 걸레나 도마를 손에 쥐어 보지 못했습니다. 고시마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손수 가꾸거나 갈무리하고, 자기가 먹고 마시는 밥거리를 손수 마련하여 살아가는 법을 듣지도 보지도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고시마한테는 실과 바늘도, 물과 비누도, 망치와 못도 스스로 겪어 보도록 마음을 써 주거나 도와주려 했던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딱 한 사람, 고시마 두 주먹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돈을 불러들일 수 있는가’를 알아보고 이 두 주먹을 더욱 세고 튼튼하게 키울 줄 아는 재주꾼 하나만 곁에 있었습니다.


.. “씨앗.” “응? 무슨 소리냐, 고시마?” “아라키가 버렸던 내 꽃 말야. 씨를 받아둘걸 그랬어.” “내가 버린 꽃?” “그럼 또 꽃이 필 거 아냐.” ..  (2권 116쪽)


 오래오래 담금질을 하던 권투선수 고시마는 조금씩 꽃봉우리를 틔웠고, 활짝활짝 꽃을 피워올렸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자기 스스로도, 또 이웃들조차도 고시마 마음에 씨앗 하나 여물게 하는 길을 찾게 하지 않았습니다. 꽃은 필 줄 알지만 열매는 맺을 줄 모르는 마음이 되고 만 고시마입니다. 이러니, 고시마는 꽃이 핀 다음, 꽃을 툭툭 꺾습니다.

 꽃이 피는 까닭은 열매를 맺으려 하기 때문인 줄을 모르니까. 그리고 열매를 맺어서 자기(꽃나무)가 이 열매를 먹지 않고 남한테 주는 줄을 모르니까. 더욱이 열매를 남한테 기꺼이 내어주어 냠냠짭짭 맛나게 먹힌 다음, 씨앗 하나 남아서 꽃나무가 태어난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꽃나무로 자라게 되는 줄을 모르니까.


.. “응? 아라키. 우리 약속했잖아. 옛날에 한 약속, 잊어버렸어? 망가지지 않는 장난감.” ..  (1권 47쪽)


 고시마 마음에 심겨진 ‘돈과 이름과 힘을 얻는 주먹’은 잘 담금질이 되어서, 고시마를 키워 준 적잖은 사람들한테 셀 수 없이 많은 돈을 선사해 줍니다. 고시마 스스로도 죽는 날까지 쓸 수 없을 만한 돈을 모읍니다.

 그런데, 그날 그때(권투선수로서는 은퇴를 할 나이인 서른을 조금 넘어서는 때)까지 ‘돈버는 재주’ 하나만 익힌 고시마한테 앞으로 나아갈 삶이란 무엇이 될까요. 이제 고시마 스스로도 자기 몸이나 나이가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수 없게 됨을 깨닫게 되는 날, 고시마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자기한테 딱 한 가지 있는 재주인 ‘주먹으로 사람 때려눕혀서 돈버는 일’을 더는 할 수 없게 됨을 깨달은 다음부터, 고시마한테 남은 삶은 무엇이 될까요.

 어릴 적부터 ‘이웃사랑’을 말이나 동화책 가르침으로만 배우는 아이들이, 뒷날 큰돈을 벌고 높은 이름값을 얻는다고 해서 이웃사랑을 베푸는 일이란 없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수십 억, 수백 억, 수천 억 부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 부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이웃사랑을 이루려고 자기 재산을 기꺼이 내놓았다고 하는 이는 없습니다. 부동산 수십 채로 앉은자리에서 떼돈을 벌어도 세입자한테 달삯을 깎아주는 부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난하게 살던 김밥할머니가 온삶 바쳐 모아 놓은 몇 억 원을 내놓았다는 소식은 드문드문 들리지만.

 어린 날부터 영어를 배우고 한문을 익히며 시험점수 높게 받아서 외국어고나 과학고에 들어간 다음, 나라에서 손꼽는 몇몇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는 아이들이, 대학교를 모두 마치고 나서 어떤 일자리를 찾게 될까요. 이 아이들은 일자리를 찾은 다음 어떤 사람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면서 살아갈까요. 이 아이들이 법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재벌회사 사장이 되고 의사가 되고 뭐가 되고 하면서, 이 아이들이 우리들한테 보여주는 모습이란 무엇인가요.


.. “고시마란 놈은 말이다, 타카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어.” ..  (2권 178∼179쪽)


 옆나라 일본에서 1991년에 나왔던 만화  《ZERO》가 2008년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지난 1991년, 일본사람들은 이 만화 《ZERO》를 재미나게만 보았을는지, 가슴에 바늘로 콕 찔렸다는 느낌으로 보았을는지,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는 마음으로 보았을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 뒤 열일곱 해, 2008년 한국에서 《ZERO》라는 만화를 볼 분들은 재미나게 볼는지, 짜릿하게 볼는지, 뭐야 이거? 하면서 집어던질지, 송곳으로 어딘가를 후비고 있다는 느낌으로 볼는지 궁금합니다. (4341.7.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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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가무연구소
니노미야 토모코 글, 고현진 옮김 / 애니북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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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나게 술 마시고 신나게 놉시다
 [살가운 만화 36] 니노미야 토모코, 《음주가무 연구소》



- 책이름 : 음주가무연구소
- 그림ㆍ글 : 니노미야 토모코
- 옮긴이 : 고현진
- 펴낸곳 : 애니북스(2008.4.10.)
- 책값 : 9000원



 (1) 술 한잔


 니노미야 토모코 님이 그린 만화 《주식회사 천재 패밀리》를 보면, ‘빵이 아닌 쌀로 만든 햄버거’를 만들어서 크게 사랑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이 만화는 1990년대에 그려졌습니다). 2000년대 첫머리쯤인가, 나라안에 있는 ㄹ회사에서 ‘라이스버거’를 처음으로 만들었다며 내놓았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이웃 일본에서는 진작 만들어서 팔고 있었는데, 한국땅에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가 마치 ㄹ회사에서 처음으로 만든 줄 잘못 알면서 퍼지고 ‘히트상품’으로 뽑히고 했구나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라이스버거’ 하나뿐이겠습니까만, 우리 스스로 우리 슬기를 빛내며 가꾸지 않으면서, 이웃나라 형편을 거의 모르는 여느 사람들한테 속임질을 하는 눈가리고 아옹이 먹혀들던 때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요즈음도 이런 눈가리고 아옹은 그치지 않습니다.


.. “움파♬” “룸파♬” “룸파 디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춤추기) 거리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춤을 추는 25세와 23세의 말 만한 처녀들. 부모님이 ‘결혼은 언제 하니?’라고 물어도 해결책이 없다 … 그것은 무더운 여름날의 일이었다. 그날도 나와 타나카 아츠코는 매우 썩고 있었다. 힘들게 술을 마시고 업된 기분으로 불꽃놀이를 하러 공원에 왔는데. 이게 뭐야! 왜 이래! “제길! 다 죽이자!” “그럴까요?” 공원커플 제거작전 개시! … “쓸데없는 일을 열심히 한다는 건, 의외로 즐겁네♡” “우울하거나 심심할 때 딱이네요♡” ..  (51∼54쪽)


 니노미야 토모코 님은 《GREEN》이라는 만화를 그려서, ‘도시 아가씨가 시골 농사꾼한테 시집 가는 이야기’를 선보이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노다메 칸타빌레》를 그리며 두루 사랑을 받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는 연속극으로도 만들어지고, 만화영화로도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나라안에 소개된 니노미야 토모코 님 만화를 보면, 언제 어디서나 ‘술 마시는’ 이야기, 또 ‘술 마시고 죽는(맛가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이참에 소개되는 《음주가무연구소》(1996년에 낸 작품)는 아예 ‘술 먹고 바보가 되어 해롱해롱 노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데, 《노다메 칸타빌레》에 나오는 ‘노다메’는, 술을 안 마시고 있어도 늘 술에 체한 듯하게 살아가는 사람, 바로 그린이 자기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보여주지 않느냐 싶기도 합니다.


.. “혹시, 술 마실 사람? 맥주 정도라면 괜찮을 거야.” “마실래!” “마실 거야!” “앗! 얘들아, 일은 어쩌고, 철야해야 되는데 맥주라니.”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는 항상 술을 입에 달고 살면서.” “그러고도 음주가무연구소장이라 할 수 있어요?” 그래, 나는 음주가무연구소장이었지. 나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에게, 적어도 즐거운 시간을.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말이야, 일하면서 술을 마시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잖아? 맥주 열세 병을 마시고도 이틀 정도 철야는 문제 없었잖아 … “우리 모두의 죽음에, 건배!” ..  (74∼75쪽)


 《음주가무연구소》를 그려낸 1996년이면, 니노미야 토모코 님 나이로 스물일곱. 만화에 나오는 ‘나(니노미야)’는 거의 스물다섯 나이. 일을 하면서(만화를 그리면서) 맥주 병나발을 열석 병을 까기도 했다는데, 가장 많이 깐 숫자가 열셋일 테지만, 여느 때에도 서너 병은 가볍게 깠다는 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 나이 스물다섯 때를 돌이켜봅니다. 그때 저는 신문딸배를 하고 있었고, 살림돈이 없는 가운데에도 책 사서 읽으랴, 보도사진 배우며 필름 사서 찍고 찾느랴 몹시 쪼들렸습니다. 이때, 후배라도 만나서 “형, 술 좀 사 줘.” 하는 말을 들을라치면, 주머니에는 천 원 한 장 없을 때도 잦아서 안절부절 못하곤 했습니다. 그나마 한 살 더 먹은 스물여섯 나이에, 신문딸배 일을 마치고 출판사에 들어가면서 살림이 피니, 후배들한테 술 사 주는 일은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판사라는 곳은 웬만한 일은 술자리에서 풀리고, 또 제가 한 일은 영업부 일이었기에, 날이면 날마다 사람들 만나서 술자리 지키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가난한 출판사들은 지은이 선생님한테 글삯은 제때 못 챙겨 주어도 술은 꼬박꼬박 챙겨 줍니다. 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그때 제가 일하던 곳은 근속 1년을 못 채우면 비정규직이었습니다)한테 달삯은 짜디짜서 한 달에 62만 원을 받으며 일했지만, 선배들이 술 하나는 아낌없이 사 주었습니다. 영업을 다니면 낮에도 술 마실 일이 잦았고, 낮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소주 한 병쯤은 가볍게 까곤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업을 뛰는 사람은 술 마시기가 일이 된 셈이니, 만화를 그리는 분한테도 만화 그리며 밤을 새워야 할 때, 옆에 술 한 병 끼면서 그리기가 일이 된 셈인지 모르겠네요.


.. “술 끊자! 자! 일하자, 일!” 나는 인간이 될 거야 … 그러나, 여전히 일은 되지 않고, 시간만 정처없이 흘러 흘러, 어시가 또 한 명 죽어 버렸다. 술이 없어도 악마는 악마인가? … “그럼요, 소장님은 악마예요. 뼛속까지! 그러니까 포기하고 쭉 들이키세요.” “그래요, 오늘은 갈 데까지 가는 겁니다.” “악마를 위해 건배!” 그러나, 아직 포기하지 앟는 나 … “에이, 그럼 안 돼요. 니노미야 씨는 무조건 취해야 돼요.” “왜 취하라는 거예요?” “음주가무연구소장님이니까!” “이미 그만뒀어요! 그런 멍청한 연구소 따윈! 하하하” “뭐 어때요? 멍청하면 멍청한 대로 즐겁게.” … 아아, 술주정뱅이란 정말 악마구나 … 결국, 금주를 해 봤자 평소와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120∼122쪽)


 그렇게 ‘술이여 내 사랑아’ 하던 스물여섯 나이에 한 아가씨한테 눈이 맞았고, 이 아가씨는 저한테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으며, 이 말을 들으며 여섯 달 동안 술을 끊기도 합니다. 술자리에는 가면서 술은 안 마시는 미련이로 살았습니다. 동무나 선배들은 술도 안 마시면서 왜 왔느냐고 채근대며 꿍얼댔지만, 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눈 맞았던 아가씨한테 채인 바로 그날부터 다시금 술 마시는 삶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동무와 선배들은 ‘녀석, 이제 제자리로 돌아오는군!’ 하면서 반겨 주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도 참 어리석은 짓이었는데, 조금 덜 마시거나 안 마시는 날을 만들면 되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싶더군요. 그러나, 제 성격에 조금 덜 마시기는 못했을 듯하고, 아예 마시지 않아야 몸이나 마음을 튼튼하게 지킬 수 있었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2) 만화니까, 만화 《음주가무연구소》


 장마가 아닌 무더위로 푹푹 찌는 날씨가 이어집니다. 요즘 같은 날씨이던 가난한 신문딸배였을 때는 보리차를 잔뜩 끓여 냉장고에 가득 채워서 끊임없이 마셨습니다. 출판사에 들어가 영업 일을 하던 때에는 낮에도 일터 아래층에 있는 구멍가게에 가서 깡통맥주 큰것 둘을 사서 한숨에 들이키고 일했습니다. 나중에 편집부로 자리를 옮기고부터는 낮에 술을 댈 수 없었습니다. 더위를 꾹꾹 참고 저녁에 풀어냅니다. 아무런 회사에 얽매이지 않는 몸으로 살아가는 지금, 너무 더운 날이면 동네 구멍가게로 달려가서 보리술 한 병 사서 밥을 안주 삼아서 마십니다. 이렇게 한 병 마시고 잠깐 드러누워서 숨을 돌린 다음, 번쩍 일어나 낯을 씻고 빨래 한두 점을 한 다음 웃통을 벗은 채 옥상마당에 나와 빨래를 널고 기지개를 켜며 해바라기를 하면 제법 시원합니다. 그렇다고 더위를 이겨내지는 못하지만, 낮에 마신 보리술 한 병은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아 주고, 무너지려는 몸을 붙잡아 줍니다.


.. “오늘 말이야, 엄청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뭔데, 대멀?” “거래처 중역이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인데, 하도 얄밉게 굴길래 그만 꽃병으로 내리쳤어. 그래서 10억 손해 봤지롱♡” ..  (209쪽)


 저녁까지 어찌어찌 버틴 다음, 저녁밥을 들면서 보리술 한 병이나 두 병을 걸치기도 합니다. 두 병까지 하면 너무 배부르거나 힘들고, 꼭 한 병이 알맞다고 느낍니다. 모자란 듯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조금 더 하고 싶지만, 이만큼만 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배를 슬슬 쓰다듬으며 책 하나를 끄집어내어 펼칩니다. 꼭 한 병만 마신 날은 한 시간 남짓 책을 읽다가 잠들 수 있는데, 두 병을 마신 날은 삼십 분 책을 들기에도 벅찹니다. 가게술은 이렁저렁 들이켜도 집술은 다르더군요. 집술로 한 병만 마시면 씻고 빨래하고 책 읽고 잠깐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할 수 있지만, 두 병이 되면 빨래하면서도 힘들고, 방바닥 훔치면서도 ‘아이구, 오늘은 걸레질 쉬고 싶네’ 하는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스물부터 스물아홉까지 젊은 날 너무 많은 술을 몸속에 넣었다가 빼낸 탓에 서른넷이라는 나이에도 몸이 고단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오래 즐길 수 있는 술을, 한창때 맛도 안 느끼면서 퍼부은 탓에, 좀더 맛깔스럽게 술을 즐기지 못하고 입가심으로 끝내지 않느냐 싶기도 합니다.


.. “난 이제 끝났어!” “나도 끝이야!” “나도♡” “오늘은 몸이 좀 무거워서.” “난 그만 할래♡” “좋아, 그럼, 한잔 하러 갈까?” “아얏호,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  (240쪽)


 만화 《음주가무연구소》는 ‘음주가무연구소’ 이야기와 ‘한잔 하러 갈까’ 이야기에다가 ‘우리, 결혼했어요’ 이야기를 묶습니다. 모두 만화쟁이 니노미야 토모코 님이 스물다섯 안팎이던 때 삶이 담깁니다.

 그래서 만화책을 신나게 처음부터 끝까지 후딱 읽어내면서 궁금해집니다. 니노미야 토모코 님은 이제 마흔 줄에 접어들었는데, 요즈음은 술 마시기를 어떻게 즐기고 있으신지. 지금도 병나발을 불면서 밤샘일을 하고 있으신지. ‘먹고 놀다가 죽자’라는 음주가무연구소장 다짐을 이어나가고 있으신지. 젊은 날과 달라졌다면 어떤 모습이 달라졌는지. 이런 이야기를 지금 형편에 맞게 또 한 번 그려 볼 마음은 있을는지.


.. “어떡하지, 마감 대문에 드레스 보러 갈 시간이 없는데.” “걱정하지 마. 너무 신경쓸 필요 없어. 도쿄에 가면 널린 게 드레스숍이잖아.” “그런가?” “그럼!” “그렇지.” 그리고 결혼식 3일 전 … “저, 죄송합니다. 이 드레스 지금 당장 필요한데요, 살 수 있을까요?” “네엣? 지금 당장은 좀, 저희 드레스는 모두 예약주문제라서요, 빨라도 한 달 정도 걸리거든요. 그런데 식은 몇 개월 후에 올리시나요?” ‘뭐시라고라?’ ..  (260∼262쪽)





 우리 나라에서도 술 마시는 사람들 이야기가 만화책으로 몇 번 나왔습니다. 먼저, 이상무 님이 그린 《포장마차》(자유시대사,1988). 그리고, 이은홍 님이 그린 《술꾼》(사회평론,2001). 다음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송채성 님이 남긴 《취중진담》(서울문화사,2001∼2002).

 《포장마차》는 가게술을 마시기 힘든 가난한 사람들이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잔에 눈물과 웃음과 기쁨과 슬픔을 쥐어짜내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술꾼》은 말 그대로 ‘술꾼’ 같은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취중진담》도 말 그대로 ‘술 들어간 몸에서 속에 감추어둔 생각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러고 보면, 《음주가무연구소》는 말 그대로 ‘술 퍼마시고 마음껏 놀자’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꾼다운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술 만화는, 꾼다운 만화다워 반갑고, 여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눈물과 아픔을 보여주는 술 만화는, 말 못하는 이야기를 꽁꽁 묻어둔 채 홀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어루만져 주는 만화로 반갑습니다. 서민 삶을 꾸밈없이 드러내어 보여주는 술 만화는, 서민들이 값싼 술 한잔에 이렇게 시름을 달래고 고단함을 씻어내며 조그마한 꿈 하나 품는구나 하고 헤아려 보게 해 줍니다. 그리고, 즐거우니 더 즐겁게 놀고 괴로우니 괴로움 떨쳐내고 놀자는 만화는, 어떤 일을 겪거나 부딪히게 되어도 앙금을 털어내고 홀가분해지자는 마음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 반갑습니다. 그러나 술맛을 모르는 이한테는 따분할 만화로 비춰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술을 즐기더라도 몸을 더 헤아려서 살짝살짝 드시는 분들한테는 좀 꺼려질 수 있을 테고요. (4341.7.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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