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니코 일기 2
마리 오자와 지음, 정혜영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조촐한 꿈, 그리고 조촐함을 좋아하는 사람
 [만화책 즐겨읽기 13] 오자와 마리, 《니코니코 일기 (2)》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던 때, 퍽 많은 골목집 할매와 할배와 아주머니 들이 크고작은 꽃그릇에 온갖 꽃과 나무와 푸성귀를 기르는 모습을 보며 즐거웠습니다. 멀리서 바라보거나 높은 데에서 내려다보면 도시 한켠 골목동네는 참 작고 꾀죄죄하며 볼썽사납다 할 만합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거나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면 도시 한복판 골목동네는 몹시 넉넉하고 아름다우며 따사롭다 할 만합니다. 십일월이라 하면 쌀쌀하다 못해 추운 날을 맞이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발이 휘날리기도 하는데, 이런 날씨에도 해바라기 알뜰히 키워 내어 소담스러운 노란 꽃송이를 구경할 수 있는 골목집이 있습니다. 골목집 꽃그릇에 배추포기 알차게 여문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이분들한테 배추값이 오르거나 말거나 대수롭지 않다고 느낍니다.

 멀리에서 누군가 찾아와서 구경하라는 꽃이 아닙니다. 대단한 도시농업을 하고 있으니 지식인들이 눈여겨보거나 활동가가 알아보라는 환경운동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들 삶입니다. 당신 스스로 좋아하는 삶이고, 당신 스스로 누리는 삶이며, 당신 스스로 일구는 삶입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거나 심으며 풀을 뽑아 돌보는 모습을 바라보면 몹시 가지런하고 정갈합니다. 누가 와서 보라고 논밭을 이처럼 돌보지는 않을 텐데, 시골버스를 타고 지나가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든 둘레 논밭을 바라볼 때마다 눈이 즐겁고 마음이 즐거우며 몸이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농사짓기를 경제활동지수라든지 농업생산지수라든지 하는 숫자로 재거나 따지는 이들한테는 이렇게 돌보든 저렇게 가꾸든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머리에 스며들지 않습니다.

 지식인이나 공무원이나 정치꾼이나 회사원이나 기자나 교사가 도시 삶터를 바라볼 때에는 ‘한 달 벌이’를 잣대로 삼습니다. 이이가 버는 돈이 많으면 잘산다 여깁니다. 이이가 버는 돈이 적으면 못산다 여깁니다. 이이네 집에 꽃그릇이 몇 개요, 꽃그릇마다 몇 가지 꽃이 피는가로 잘사는가 못사는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이네 집에 탱자나무가 몇 살이요 대추나무가 몇 살이며 배나무가 몇 살인가를 살피지 않습니다. 이이네 집 빨래대는 언제 세웠고, 얼마나 많은 빨래가 이 빨래대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말랐으며, 이 빨래대 둘레에 질그릇이 몇 놓였는지를 헤아리지 않아요. 공무원은 나무전봇대를 베고 시멘트전봇대를 박을 뿐입니다. 골목사람은 목아지와 몸통이 뭉청 잘린 나무전봇대에 수국을 심어 흐드러지게 피워 냅니다. 골목사람이 따로 무슨 꽃씨를 심지 않아도 나무전봇대 서던 자리에는 들풀과 들꽃이 뿌리를 내리기 일쑤입니다.

 내 삶은 누구한테 드러내려는 삶이 아니라 나 스스로 좋아하여 즐기는 삶입니다. 네 삶 또한 누가 들여다보거나 재거나 따질 삶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사랑하여 누리는 삶입니다.


- 이 아이를 맡기로 하면서 사랑을 포기했던 건 아니야.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했어. 애인이 생기면 어린아이라고 해서 거짓말을 하거나 얼버무리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자고. “저어, 니코, 언니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그래서, 올 크리스마스이브엔 그 사람과 데이트 하기로 약속했거든. 니코랑은 이브이브에 파티하자.” “이브이브?” “23일. 이브의 전날.” (53∼54쪽)


 만화책 《니코니코 일기》 2권을 읽습니다. 만화책 《니코니코 일기》는 한결 무르익은 ‘삶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결 무르익었다뿐, 아주 단단히 여물거나, 매우 튼튼히 뿌리내린 삶사랑까지는 아닙니다. 이제야 한결 무르익으며 참으로 신나며 보람찬 삶사랑입니다. 어떻게 이어가야 좋을지까지 살피지 못하는 한편, 얼마나 즐거운가를 느끼지 못하는데다가, 어느 만큼 아름다운가를 헤아리지 못하는 삶사랑이에요.

 그런데요, 아직 잘 모르거나 못 느낀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아직 어설프거나 어수룩하다 하여 사랑이 아니라 못박을 수 없어요. 어리석어도 사랑입니다. 모자라도 사랑입니다. 어줍잖아도 사랑이요, 어리둥절하더라도 사랑입니다. 설레면서 좋고, 씁쓸하면서 좋습니다. 달콤할 때뿐 아니라 쓰디쓸 때에도 좋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예 사랑이니까요. 사랑일 뿐이기에 언제나 좋습니다. 사랑임을 아니까 슬퍼도 좋고 기뻐도 좋습니다. 사랑을 하는 만큼 뜻을 이루어도 반갑고 뜻을 못 이루어도 고맙습니다. 이기거나 지려고 하는 운동경기가 아니듯, 얻거나 가로채려고 하는 사랑이 아니에요. 빼앗는다든지 사로잡으려는 사랑이 아니랍니다. 나와 네가 즐거우며 아름답고자 하는 사랑이에요.


- “24일에 만날 수 없다니, 갑자기 왜.” “아는 사람의 아이를 맡을 때, 그 아이에게 고의로 상처를 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어. 왜냐면 그 애는 친엄마의 사랑을 모르고 크면서 지금까지 충분히 상처받아 왔으니까. 난 그 애가 날 필요로 하는 동안은 그 애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결심했었어.” “24일은,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 애한테도 특별한 날이야. 우린 어른이니까 지금까지 그런 날을 얼마든지 지내 왔고, 얼마든지 특별한 날을 만들 수 있지만, 어린아이는 다르잖아?” (62∼63쪽)


 꽤 어설프기 때문에 여러모로 부딪힙니다. 참 어수룩한 탓에 이래저래 휘둘립니다. 퍽 멍청하거나 바보스럽다 할 만하기에 으레 헷갈립니다. 망설이거나 갈팡질팡합니다. 머뭇거리거나 조마조마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느낌이 좋아 사랑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느낌들이 썩 달갑지 않겠지요. 하루하루 살아내면서, 하나둘 치러내면서, 차근차근 느끼면서, 바야흐로 사랑이란 이런 맛이구나, 사랑이기에 이렇게 멋있구나 하고 받아들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동글동글한 사랑이란 없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또는 하나부터 백까지, 모가 없거나 티가 없는 사랑이란 없답니다. 아파하고 슬퍼하며 힘들어하는 사랑입니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며, 고단하다가 개운해지는 사랑입니다.

 니코 어린이와 케이 언니는 이제까지 살면서 참다이 누리지 못하던 사랑을 늦깎이로 누립니다. 늦깎이 사랑이지만 둘도 없는 사랑임을 차츰 알고, 늦깎이 사랑이건 꽃등 사랑이건 새내기 사랑이건, 어떠한 사랑이든 사람을 곱게 가꾸어 주는 줄 배웁니다.


- “전부 합해서 782엔. 한 달에 500엔씩 용돈을 받고 있는데, 만화잡지 사고 남은 돈을 모은 거예요.” (81쪽)
- “니코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 집에서 자랐으니까. 그날이 처음이었어. 가짜라도 엄마 아빠랑 셋이서 외출한 것 같은 기분.” (161쪽)



 그렇지 않나요. 한 달에 백만 원을 벌면 넉넉하지 않나요. 세 식구이건 네 식구이건 다섯 식구이건. 아니, 한 달에 오십만 원을 벌어도 알뜰하지 않나요. 오십만 원 가운데 사십만 원을 밥값으로 쓰고 십만 원을 방삯으로 쓰더라도 살뜰하지 않나요. 돈이 모자라면 손전화는 안 쓰면 되지요. 돈이 없으면 텔레비전이나 빨래기계나 냉장고는 치우면 되지요. 돈이 없으니까 자가용은 안 몰면 돼요. 돈이 없는 만큼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 됩니다. 돈이 없으니 아껴서 살아가면 되고, 돈이 없으니까 아파트 투자나 주식 투자 따위란 처음부터 아예 생각조차 않으며 살아가면 좋아요. 텔레비전을 안 보니까 연예인이든 연속극이든 운동경기이든, 이런저런 이야기를 안 나누어도 됩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우리 식구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겪은 일을 돌이키면 됩니다. 이웃과 동무랑 서로서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조곤조곤 이야기하면 됩니다. 우리 집 숟가락이 몇 있고, 너희 집 숟가락이 몇 있구나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됩니다. 우리 집 아이 기저귀 빨래는 몇 장 나오고, 너희 집 아이 기저귀는 몇 장이구나 하는 얘기를 하면 되어요.

 살림집 숟가락 갯수를 도표로 만든다든지 수첩에 적바림해 놓고 외울 까닭이 없습니다. 이름이나 나이나 태어난 해나 띠나 다닌 학교나 뭐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머리속에 안 담아도 됩니다. 그때그때 말문을 열고 언제라도 스스럼없이 말을 섞으면 그만입니다. 부침개를 몇 장 더 했으니까 접시에 담아 나누어 주면 됩니다. 고맙게 부침개를 얻어 먹었으니 접시를 돌려줄 때에 잘 익은 감알 몇 따서 아이한테 들려 보내면 됩니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몇 점 걸렸는가 세 보아도 즐겁습니다. 오늘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올 때에, 멧등성이를 멋들어지게 날아가던 누렁조롱이를 마주한 일을 어머어머 오늘 있잖니 하면서 조잘조잘 떠들어대어도 신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내 삶에 다 있습니다. 즐거운 일은 내 삶에 고루 있습니다. 고운 꿈은 내 삶에 알맞게 있습니다.


- 그러나 이 아이의 주위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온통 거짓뿐이었다. (156∼157쪽)
- 지금부터라도 관계는 얼마든지 쌓을 수 있는데, 미후유는 자신이 얼마나 아까운 걸 놓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158쪽)


 《니코니코 일기》 2권에 이르러 비로소 무르익는 삶사랑을 맛보는 케이 언니는 ‘아이를 낳는 아픔과 기쁨’이라든지 ‘갓난쟁이가 어린이로 거듭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돌보는 고단함과 보람’을 모릅니다. 그러나 ‘여덟 살 어린이가 아홉 살 어린이가 되는 결’하고 ‘아홉 살에서 열 살로 접어드는 고비’를 복닥이면서 갓난쟁이일 때에는 갓난쟁이일 때대로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꼬맹이였을 때에는 꼬맹이였을 때대로 어느 만큼 어여뻤으며, 오늘 여덟아홉 살 어린이는 이 나이대로 어찌어찌 아리따운가를 헤아립니다. 쉬 놓칠 뻔한 삶을, 아니 이제껏 생각조차 하지 못한 삶을, 어쩌면 앞으로도 꿈꾸지 못했을 삶을 고맙게 마주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고마운 하루하루임을 깨달으면서 더 보람차며 알차게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케이 언니 스스로 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케이 언니 둘레 사랑스러운 동무와 좋은 짝꿍한테 조촐히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케이 언니 둘레 사랑스러운 동무는 케이 언니가 왜 이렇게 촐랑대는지를 잘 알아챕니다. 케이 언니 둘레 좋은 짝꿍은 겉훑기로만 돌아봅니다. 사랑스러운 동무는 사랑스러운 여러 가지 얼굴을 모두 껴안습니다. 좋은 짝꿍은 틀림없이 좋은 짝꿍이기는 한데 속읽기까지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 “괜찮아.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돼! 이리 와! 케이 언니도 그렇게 할게. 지금부터 니코의 친엄마라고 생각할게!” “언니.” “엄마답지 못한 엄마라 미안해. 그래도 니코를 정말 사랑해!” (165쪽∼166쪽)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사는 딸아이 손을 잡거나 발을 잡거나 작은 몸뚱이를 껴안을 때에 ‘내가 이 아이 아버지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볼일을 봐야 해서 홀로 인천이나 서울로 마실을 가야 할 때에 시외버스를 타며 깡통보리술을 하나 톡 따곤 합니다. 홀짝홀짝 들이키며 가슴이 저밉니다. 글쎄, 가슴이 저미기 때문에 홀짝홀짝 들이킨다고 해야 옳겠지요. 오늘 하루 또 이렇게 떨어져 지내는 동안 아이는 아이대로 심심할 테고 엄마는 엄마대로 고단하겠다고 헤아리면서, 내가 집에 있는 동안 우리 살붙이하고 얼마나 따사롭거나 넉넉한 사람으로 지냈는가를 뉘우칩니다. ‘내가 참, 한 집안에서 지아비요 아버지임을 잊으며 살지 않았나.’ 하고 되새깁니다.

 만화책으로 다 보았고 거듭 보았으니 줄거리를 뻔히 알지만, 만화영화로 만들어 새롭게 나온 《블랙 잭》을 보면서 스르르 눈물이 흐릅니다. 〈어머니의 마음〉이든 〈기적의 팔〉이든 훤히 꿰는 줄거리인데, 다시 보고 또 볼 때마다 가슴이 촉촉히 젖어듭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 만화를 그려냈을까 곱씹으며 가슴이 뭉클합니다. 《니코니코 일기》를 2권째 차근차근, 한 장 두 장 천천히 넘기면서 오자와 마리 님은 어떠한 넋으로 이 만화를 담아냈을까 곰삭이며 가슴이 찡합니다.

 바로 사랑이겠지요.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일 테지요. 내 몸하고 나눈 피가 흐르는 살붙이라 해서 사랑인가요. 내 몸하고는 동떨어진 피가 흐르는 동무나 이웃이나 짝꿍이라 해서 사랑이 아닌가요.

 아이한테는 어머니 품처럼 보드랍고 포근한 살결은 없다 합니다. 그런데 내 어머니가 아닌 품이면서 어머니 품하고 똑같이 보드랍고 포근한 살결이 있습니다. 어머니 품하고는 사뭇 다르게 보드랍고 포근한 살결이 있어요. 내 어머니는 내 어머니대로 온누리에 꼭 하나만 있는 품으로 맞아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어머니가 아닌 사람 또한 이 땅에 꼭 하나뿐인 품으로 맞아들여요.


- “난 그 애와 함께 즐기려고 생각해. 그러니까 당신도 가끔은, 이 ‘가족’ 놀이를 함께 즐겨 주었으면 해.” (172쪽)


 꿈은 조촐합니다. 꿈인 만큼 조촐합니다. 꿈이니 조촐해요. 조촐하지 않을 때에는 꿈이 아닙니다. 조촐하지 않은 생각은 부질없는 허우적거림입니다. 조촐하지 않은 생각을 자꾸 품으면 덧없이 갈팡질팡해댈밖에 없습니다. 조촐함하고 등지며 살아가는 동안 사랑이나 믿음을 맛볼 수 없어요.

 니코 어린이는 엄마랑 아빠랑 니코랑 셋이 조촐히 나들이를 하는 삶을 누리고 싶어 했습니다. 케이 언니는? 케이 언니는 어떤 삶을 누리고 싶어 하나요. 아마, 케이 언니는 니코 어린이를 만나지 못했으면 좁은 도시에서 좁다란 속알맹이로 좁다란 돈을 벌면서 좁다란 집에서 좁다란 삶을 좋다란 나날에 허덕이며 좁다란 줄 모르고 좁다랗게 숨을 거두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케이 언니는 니코 어린이를 만나 ‘거짓 엄마’라는 허울이 아닌 ‘참 엄마’라는 삶을 누립니다. 케이 언니 삶을 참다웁고 아름다이 일구는 길을 넉넉히 맞아들입니다. 조촐함을 즐기는 삶을 새롭게 느끼며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케이 언니가 품는 꿈이란? ‘니코 어린이 가슴에 더는 생채기가 안 생기도록 지키는’ 일이 아니라 ‘니코 어린이와 케이 언니 두 사람 가슴에 사랑을 심도록 서로서로 좋아하는’ 삶입니다. (4343.11.4.나무.ㅎㄲㅅㄱ)


― 니코니코 일기 (2) (오자와 마리 글·그림,장혜영 옮김,대원씨아이 옮김,2002.9.30./판 끊어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코니코 일기 1
마리 오자와 지음, 정혜영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즐거한 삶, 그러니까 즐거움을 아끼는 사람
 [만화책 즐겨읽기 13] 오자와 마리, 《니코니코 일기 (1)》



 깊은 밤이나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오면 찬바람에 몸을 살짝 움찔합니다. 이 찬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노라면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어 즐겁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밤이나 새벽에 쉬를 눌 때에는 반드시 밖으로 나와 개울이 졸졸 흐르는 멧기슭까지 걸어가서 풀숲에 눕니다. 쉬를 누는 동안 별을 올려다보고, 찬바람을 쐬며, 더없이 깜깜한 모습을 즐깁니다. 시골길에는 거리등이 거의 없어 한길이라 해도 썩 밝지 않은데, 마을 몇 집 모인 곳하고 꽤 떨어진 우리 집은 그야말로 깜깜한 나라입니다.

 오늘은 새벽 네 시 이십오 분에 깨어납니다. 자다가 쉬를 눈 아이는 으레 꽁알꽁알 하면서 “아부지.”나 “어머니.” 하고 부릅니다. 얼핏 꽁알꽁알 소리를 들었으나 곧바로 잠에서 깨지 못했는데, 아이 엄마가 “아버지, 기저귀 갈아 주셔요.” 하고 말하는 바람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그래, 내가 일어나서 갈아 주어야 하는구나.

 집 바깥처럼 집 안도 깜깜합니다. 빛이라곤 한 줄기 없습니다. 손을 살며시 뻗어 아이 머리에 닿을 때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고는 바지를 천천히 내립니다. 오줌으로 푹 젖은 기저귀를 벗기고 베개맡에 미리 두었던 기저귀를 집어 갈아 줍니다. 아이랑 스물일곱 달째 살아가고 있는 만큼, 아무리 캄캄하건 어둡건, 또 눈을 뜨건 감건, 기저귀 갈기란 손쉽게 할 만합니다. 아이가 앞으로 언제쯤 ‘잠자리 기저귀’까지 뗄 수 있을까 궁금한데, 아이가 어른들 말을 제법 배운 뒤까지 잠자리 기저귀 갈기를 해야 하겠지요. 밤마다 이렇게 잠을 제대로 못 이루며 기저귀를 갈아야 하니 고단하지만, 아이 눈높이로 생각한다면 아이 또한 밤마다 오줌으로 젖은 기저귀를 차고 지내야 하니 얼른 갈아 주기를 바라는 한편 그때그때 잠이 깨겠지요. 몇 해쯤 지나야 아이는 밤이든 새벽이든 스스로 잠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쉬를 눌까 모르겠는데, 아이 스스로 밤이나 새벽에 잘 일어나 쉬를 눌 수 있다면, 그때에는 제 아버지처럼 마당으로 나오고 멧기슭으로 걸어가며 밤하늘 별밭 올려다보기를 즐기겠지, 하고 꿈을 꿉니다. 나중에 더 크면 혼자만 나올 터이나 아직 어릴 때에는 아버지를 불러 함께 멧기슭 풀숲에서 쉬를 누며 밤하늘바라기를 나란히 할는지 몰라요.


- “실은 아는 사람의 아이를 봄까지 데리고 있게 됐어. 지난주에 짐이 왔는데, 보니까 옷이 하나같이 다 작잖아. 부모란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었나 몰라.” “몇 살인데?” “8살. 초등학교 3학년이야. 전학 수속이다 뭐다 해서 일은 하나도 못했어.”  (22쪽)
-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머리가 아팠다.“너무 마셨군. 오랜만에 마셨더니만.” 니코는 이미 훨씬 전에 등교한 후였다. “앗, 교환일기다. 어디 볼까나?” ‘안 익숙해. 안 생겼어. 안 될 거야. 없어.’ ‘도쿄는 안 익숙해. 친구는 안 생겼어. 어른은 안 될 거야. 아빠는 없어.’ 그것이 대답. 자기혐오. (29∼31쪽)
-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혈연이란 게 과연 뭘까?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할까? 이 세상엔 사랑하지 않는 부모와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의 결합이 슬프도록 많은데. (62쪽)



 만화책 《니코니코 일기》 1권을 읽습니다. 오자와 마리 님 만화책 가운데 하나인데, 2002년에 처음 우리 말로 나올 때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2005년인가 2006년에 비로소 이 만화가 진작에 나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니코니코 일기》는 판이 끊어지고 말았으며, 얼마 앞서까지 너덧 해에 걸쳐 헌책방을 뒤지고 살폈으나 좀처럼 찾기 힘들었습니다. 지난주에 가까스로 한 질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품에 안은 《니코니코 일기》는 대여점에 있던 책입니다. 겉에 비닐을 싸며 테이프로 붙인 자국이랑 대여점 스티커랑 덕지덕지 있습니다. 2002년에 나온 책이니 여덟 해가 된 셈인데, 고작 여덟 해를 지났으나 테이프가 녹으며 비닐과 책 앞뒤에 테이프 삭은 자국이 남습니다. 책을 펼치기 앞서 이 테이프부터 떼어내야 합니다. 비닐과 겉종이에 붙은 테이프를 살그머니 떼어 이렇게 떼어낸 테이프를 한손으로 가만히 쥐어 비닐과 책에 톡톡 하고 대면서 테이프똥이 묻어나도록 합니다. 이러기를 책 한 권마다 오 분이나 십 분 남짓 합니다. 테이프를 많이 붙인 책일수록 테이프 떼는 데에 오래 걸립니다. 아주 단단히 붙은 ‘대여점 바코드 딱지’를 뗄 때에는 더 골이 아픕니다. 테이프 떼기를 하며 히유 하고 한숨을 쉬니, 옆에서 바느질을 하며 바라보던 아이 엄마가 한 마디 합니다. “대여점 책이라도 이 책을 살 수 있었으니 고마운 줄 알라.”고.

 옳은 소리입니다. 판이 끊어진 만화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을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고마운 노릇인데요. 우리는 헌책방이 있기 때문에 무척 아름다우며 멋진 책을 오래오래 곁에 둘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헌책방 일꾼이 땀을 흘려 주었기 때문에 아주 알차며 재미난 책을 두고두고 아끼거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모든 책을 빠짐없이 장만해서 읽을 수 없거든요. 누구나 놓치는 책이 있어요. 책방마실을 하면서 내 코앞에 있는 책시렁에 꽂힌 모든 책을 한눈에 알아내지 못합니다. 누리책방에 들어가 다람쥐로 콕콕 눌러 찾아보기를 한다 할지라도 못 알아보거나 못 찾아내는 책이 있습니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인터넷이든 모든 책소식을 빈틈없이 다루지 않아요. 언론 소개를 한 줄조차 못 받는 책이 대단히 많습니다. 언론 소개를 타는 책이라 해서 읽을 만하거나 훌륭하다 할 수 없어요. 언론 소개를 못 받는 책이라 해서 안 읽을 만하거나 안 훌륭하다 할 수 있나요. 더구나, 새로 나오는 만화책을 제대로 소개하는 매체는 한국땅에 한 군데도 없습니다.


- 나는 알고 있었다. 사실은 이 아이가 가장 상처받고 있다는걸. 모르는 척 지나치려 했었다. 더 이상 깊이 연관되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자신의 기분은 무시당한 채 어른들 편의대로 휘둘리며,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32∼33쪽)
- 네 주위의 어른들은 나를 포함해 하나같이 최악. 하지만 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어. 네가 생각한 네가 될 수 있어. 그러니까 어른이 되기 싫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35∼36쪽)
- “하지만, 하지만, 아이들은 엄마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아.” “어, 어떤 엄마라도?” (59쪽)



 만화책 《니코니코 일기》에 나오는 ‘니코’는 ‘코바코 니코’입니다. ‘니코’라는 이름은 우리 말로 하자면 ‘싱글’이라 합니다. ‘니코니코’라 하면 ‘싱글싱글’이거나 ‘싱글벙글’쯤 됩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 니코는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웃은 적이 없습니다. 즐겁게 웃은 날이 하루조차 없습니다. 니코 어린이는 제 어머니한테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제 아버지한테서도 사랑을 얻지 못했습니다. 니코 어린이를 낳은 어머니는 니코를 돌보지 않습니다. 니코와 말을 섞고자 하지 않습니다. 니코 어린이를 낳은 아버지는 제 씨앗으로 니코가 태어난 줄을 모릅니다. 니코 아버지 되는 사람은 제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랑 아버지랑 따스히 사랑해 주며 사랑을 물려받거나 받아먹으며 싱글싱글 웃으며 커야 할 니코인데, 정작 니코한테는 웃음기란 하나 없이 차갑고 메마르며 슬픈 삶을 보내며 ‘빛나는 여덟 살’까지 빛을 잃은 채 주눅만 듭니다. 계집아이라 해서 꼭 치마만 입고 예쁘장하게 차려입을 까닭이 없습니다. 사내아이라 해서 반드시 바지만 입고 거칠게 놀아야 할 까닭이 없어요. 니코는 계집아이이면서 예쁘장하게 차려입는다거나 치마를 입는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개구지게 놀거나 마음껏 뛰놀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있어도 있다고 느끼기 어렵고, 없으면 없으니 그만인 듯한 채 ‘니코를 낳은 어머니네 어머니(할머니) 집’에 얹혀서 살다가, 니코네 할머니가 저승으로 간 다음 맡아 줄 사람이 딱히 없어 ‘니코 어머니가 배우로 일할 때 심부름꾼(매니저) 노릇을 하던’ 케이라는 아가씨 집으로 갑니다. 케이라는 아가씨는 서른둘 나이로 혼자 살면서 만화 대본이나 연속극 대본을 써서 밥벌이를 고만고만하게 하는 사람.


- “메구미네 집은 절인데 해마다 산타 할아버지가 오신대. 그치만 우리 집엔 한 번도 오신 적 없단 말야. 할머니가 불교 신자라서.” “한 번도?” “한 번도!!”
- ‘오늘 엄마가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야”라고 말했다. 분해서 울지 않았다. 울고 싶었지만 참았다. 엄마는 예쁘게 꾸미고 나가 버렸다. 니코도 엄마 딸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케이 언니 딸로 태어나고 싶었어.’ (117쪽)
- 필사적으로 젖을 빠는 작고 귀여운 니코의 모습에, 미후유도 마치 그때만은 성모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142쪽)


 아이를 낳아 본 적이든 아이를 길러 본 적이든 없을 뿐더러 ‘어린 애들은 싫어’ 하고 말하던 사람이 아이를 맡아 기르며 함께 살아야 할 때에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합니다. 아니, 멀리 헤아리기보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면 되겠지요. 혼자 일만 사랑하면서 살다가 온갖 집안일을 다 치르는 가운데 아이를 낳아 아이랑 하루 내내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내 모습을 돌아보면, 《니코니코 일기》에 나오는 ‘케이 언니’가 어떤 마음과 매무새로 니코 어린이를 처음 맞이하고, 비로소 맞아들이며, 바야흐로 사랑할 수 있는가를 깨달을 만하겠지요.

 그래요, 사랑받아 오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물려주기 어렵습니다. 사랑을 받아먹으며 어린 나날을 보내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 스물이 되건 서른이 되건 마흔이 되건 예순이 되건 일흔이 되건, 따스히 사랑하는 손길을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한테 나누어 주기 힘듭니다. 어쩌면 ‘니코를 낳은 연예인 엄마’부터 당신이 어렸을 때에 살갑거나 따스히 사랑받은 적이 없을는지 몰라요. 니코 어린이를 맡기로 한 케이 언니라고 딱히 사랑받으며 자랐다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케이 언니는 당신 어머니하고 틈틈이 전화로 소식을 나눌 뿐더러, 틈틈이 고향으로 찾아가 어머니를 만나면서 마음과 몸을 쉬곤 합니다. 케이 언니한테는 마음쉼터 고향이 있고 마음쉼을 베푸는 너그러운 어머니가 있어요. 케이 언니는 시골집에서 따사롭게 살아가다가 도쿄라고 하는 ‘경쟁으로 피를 튀고 집삯이니 뭐니 하며 고단하기 짝이 없는 도시살이’ 때문에 ‘어린 애들은 싫어’ 하고 느끼도록 마음이 메말라 가고 말았으나, 서른둘 나이에 갑작스레 찾아온 ‘아이키우기’를 맞닥뜨리며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케이 언니 마음이 생채기투성이일 뿐 아니라, 케이 언니 또한 둘레 사람들한테 생채기를 입히며 살았음을. 이제부터 케이 언니 스스로 사랑받는 삶을 일구고 싶은 한편, 케이 언니 또한 스스로 당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가꾸고 싶음을.


- “네가 간다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순 거짓말!” “진짜야.” “흑, 히잉, 훌쩍, 으아앙.” (56∼57쪽)
- 잘렸다. 전화 한 통으로 깨끗이 잘리고 말았다. 아주 보기 좋게. (182∼184쪽)



 한 사람이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나날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우지끈 뚝딱 하고 거듭나지는 않아요. 크게 탈바꿈하는 모습이 새삼스레 보이는 가운데, 아주 찬찬히 거듭나는 모습이 더디게 보입니다. 사랑받는 즐거움과 사랑하는 즐거움을 아주 천천히 느끼는 케이 언니입니다. 그리고 케이 언니처럼 사랑받고 사랑하는 놀라움을 아주 빠르게 느끼는 니코 어린이입니다. 니코 어린이는 케이 언니보다 훨씬 빠릅니다. 왜냐하면 여덟 살이란 나이는 아주 어리다 할 만하지만, 니코 어린이한테는 온삶이 여덟 해예요. 이 여덟 해를 살아오는 가운데 니코 어린이 가슴에 ‘사랑’이란 이름표가 붙은 날이란 하루조차 없었어요. 삼백예순닷새를 여덟 번 보내는 동안 처음으로 맞이한 사랑이에요. 이 사랑에 흠뻑 빨려들밖에 없고, 이 사랑에 흠씬 젖어들밖에 없습니다. 놓칠 수 없고, 잃을 수 없으며, 잊을 수 없습니다. 잡고 싶으며, 누리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요.

 케이 언니는 어른입니다. 어른인 케이 언니는 사랑받아 온 삶이 있고 사랑을 못 받았던 삶이 있습니다. 슬픔도 겪지만 기쁨도 겪습니다. 슬플 때에는 담배를 태운다든지 술을 마신다든지 할 수 있어요. 풋사랑으로 그치더라도 사랑놀이를 하기도 하며, 택시를 타든 버스를 타든 내 주머니 돈으로 얼마든지 합니다. 니코 어린이는 누구한테서 돈을 얻어야 택시나 버스를 탈 수 있으며, 어른들처럼 홀가분하게 사랑을 한다든지 술을 마신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니코 어린이는 모든 일 모든 자리에서 빠르게 깨닫고 빠르게 몸을 맞추며 빠르게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케이 언니는 늘 나중에 깨닫고 비로소 알아채며 바야흐로 당신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느낍니다.


- “하지만 불쌍해. 즐거운 여름방학에 학원이나 다니고.” “그러게.” “같은 4학년이라도 날이면 날마다 놀고만 지내는 아이도 있는데. 요기!” “어른도!” (134쪽)


 모두 여섯 권으로 이루어진 《니코니코 일기》 1권은 이렇게 ‘사랑에 처음 눈 뜨는’ 두 사람 이야기를 영글어 냅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겪거나 느끼거나 받아먹을 수 없던 사랑을 처음으로 만난 니코 어린이하고, 이제까지 숱하게 겪거나 느끼거나 받아먹기는 했으나 사랑이 참다이 사랑이었다고 느끼지 못하던 케이 언니하고 알콩달콩 툭탁툭탁 벌이는 투박한 살림살이를 보여줍니다.

 참 그렇거든요. 저한테 옆지기라든지 딸아이를 갈음할 만한 사람이나 삶이나 사랑이 있으려나요. 곰곰이 따지자면 어딘가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딘가에는 내 모든 ‘삶 발자국’을 남김없이 훌훌 잊으며 조용히 떠나도록 이끄는 무언가 있을는지 모르지요. 그러면 우리 옆지기한테는, 또 이제 막 스물일곱 달째 살아가는 딸아이한테는 어떠할까요. 스물일곱 달째 살아가는 딸아이한테 제 아버지를 갈음할 만한 무언가가 있을 수 있으려나요.

 밥을 먹이고, 오줌기저귀 갈아 주고, 똥을 눈 밑을 닦아 주고, 머리 감기고 몸을 씻어 주며, 옷을 갈아입히고, 빨래를 하고, 밥을 하며, 방바닥과 집을 쓸고닦으며, 안고 어르고 업고 무등 태워 놀다가는, 팔베개를 하며 토닥토닥 가슴을 두드리며 새근새근 재우는 제 아버지를 갈음할 무언가가 있다면 어디에 어떻게 있으려나요.


- 나에게 이 아이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없어. 이 아이에게 나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듯이. 일에서도, 아무도 날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보이겠어. 언젠가 기무라 씨가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 주겠어. (194∼195쪽)


 누구한테나 즐거운 삶입니다. 그러니까 즐거움을 아끼는 삶입니다. 《니코니코 일기》를 이루는 두 사람, 니코 어린이와 케이 언니는 여덟 해 삶과 서른두 해 삶을 보냈지만, 이동안 제대로 즐겁다 느끼지 못하며 보낸 삶입니다. 바로 오늘, 여덟 살과 서른두 살 나이부터 즐거움을 참다이 깨달으며 새롭게 보내려는 삶입니다.

 니코 어린이는 갓난쟁이부터 사랑을 받으며 즐겁게 살았다면 더 나았을는지 모릅니다만, 여덟 살부터 사랑을 받으며 즐겁게 살아가도 나쁘지 않습니다. 케이 언니 또한 어린 나날부터 사랑을 받아먹으며 사랑내음 물씬 풍기는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살아갔어도 좋았겠으나, 서른두 살부터 사랑내음 물씬 나는 사랑스러운 어른으로 살아가도 아쉽지 않아요.

 언제 깨닫든, 언제 첫 실타래를 풀든, 언제 첫 걸음마를 떼든, 즐거운 삶임을 헤아리며 오순도순 손을 맞잡을 수 있으면 좋아요. 좋은 만화책이라면 첫 권부터 끝 권까지 차곡차곡 갖추어 모두 읽어도 즐거웁고, 짝을 잃어 딱 한 권만 읽을 수 있어도 즐겁습니다. 《니코니코 일기》 1권은 ‘처음 깨닫는 즐거운 삶’을 알차게 보여줍니다. (4343.11.4.나무.ㅎㄲㅅㄱ)


― 니코니코 일기 (1) (오자와 마리 글·그림,장혜영 옮김,대원씨아이 옮김,2002.8.15./판 끊어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큐 & 에이 Q 앤드 A 1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사랑받으려고 발버둥치는 만화는 따분하다
 [만화책 즐겨읽기 6] 아다치 미츠루, 《Q 앤드 A (1∼2)》



 아다치 미츠루 님 만화 《Q 앤드 A》를 올 2010년 9월에 장만했습니다. 지난 8월에는 아다치 미츠루 님 다른 만화 《크로스게임》 이어그리기가 17권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크로스게임》이 17권으로 끝나며, 곧바로 《Q 앤드 A》 1권이 나왔고, 이듬달 10월에 2권이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아다치 미츠루 님 만화를 보면서 자꾸 느끼는데, 아다치 미츠루 님 만화는 날이 갈수록 무언가 확 하고 가슴으로 쩌릿쩌릿 와닿거나 마음을 촉촉히 적시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무언가 말할라치면 어영부영 끝나고, 이제 좀 이야기가 된다 싶으면 지루하게 늘어지며, 사이사이 쓸데없이 ‘여자 엉덩이’와 ‘여자 가슴’ 그림을 그려 넣습니다. 일본에서 ‘소년 만화잡지’에 그리는 만화이기 때문에 ‘소년한테 고마운 선물(?)’을 한다는 셈으로 넣는다 할 텐데, 이러한 선물을 넣는 틀이 서른 해가 넘도록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만화쟁이 한길을 걸어온 마흔 해 삶에 걸쳐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만화를 그린다는 대목이 놀랍다 할 만합니다. 만화감은 그때그때 달라 언제는 야구 만화이고 언제는 권투 만화이며 언제는 달리기 만화(이번 새 작품 《Q 앤드 A》)라 할지라도 줄거리와 흐름과 만화결은 늘 같습니다. 아니, 오롯이 같다고는 할 수 없어요. 아다치 미츠루 님도 사람인 까닭에 해를 거듭할수록 차츰차츰 바뀌기는 합니다. 이를테면 1980년대 작품과 2000년대 작품에 나오는 계집아이 치마 길이가 바뀝니다. 얼굴 모양이나 몸매는 요즈음이 될수록 조금 더 몽글몽글합니다.

 그런데, 아다치 미츠루 님 만화를 즐겨읽는 분들은 ‘또 똑같은(이렇게 말하면 안 되니까, 또 거의 비슷한) 만화를 그렸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새로운 작품을 사들입니다. 새로운 작품을 사들여 읽으며 첫머리 1권에서는 ‘음, 언제나처럼 1권에서는 이제까지와는 뭔가 살짝이나마 다른 이야기를 펼치려는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이 채 사라지기 앞서 1권이 끝나고 2권으로 접어들 즈음이면 ‘그래, 아다치 미츠루 님 그림결이 어디 가나?’ 하고 느낍니다. 주인공 형제와 이웃집 자매(또는 이웃집 계집아이와 또다른 이웃집 계집아이)에다가 주인공한테 곁달리는 거의 빈틈없어 보이지만 언제나 주인공한테 져야 하는 참말 빈틈없는 조연 사내아이.


- ‘형을 데려오면 팀에 넣어 줄게.’ ‘뭐야, 너 혼자냐?’ ‘형은 어딨어?’ ‘형은?’ ‘여어, 형은 잘 지내?’ ‘안녕! 그 형 동생 맞지?’ ‘형한테 안부 전해 줘!’ (1권 22쪽)
- “6년 만에 만났는데 할 얘기가 우리 형 얘기밖에 없냐?” “아, 미안 미안. 그래, 6년 만이지. 이야, 그때는 진짜 너, …… 뭘 했더라?” (1권 58쪽)


 《Q 앤드 A》 1권과 2권을 내처 읽으며 생각합니다. 아다치 미츠루 님 작품이 새로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사서 찬찬히 챙겨 읽는데, 아다치 미츠루 님 작품 가운데 한 번 다 읽고 나서 다시 손을 대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는 작품은 없습니다. 저로서는 두 번이나 세 번쯤 되읽는 작품이 없습니다.

 굳이 예전 작품을 되읽기보다 새로 나오는 작품을 읽으면 되기 때문일는지 모릅니다. 주인공과 줄거리와 흐름과 그림결은 늘 매한가지이니까요. 데즈카 오사무 님 작품은 열 번을 읽었건 스무 번을 읽었건 틈틈이 되읽습니다. 만화영화로 나온 〈블랙 잭〉은 만화책 《블랙 잭》을 생각하면 참 못 그렸습니다. 그러나 만화영화로 나온 〈블랙 잭〉도 즐겁게 봅니다. 다시 보는 재미가 있고, 거듭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있어요. 다카하시 루미코 님 작품은 워낙 길기 때문에 《이누야사》라든지 《란마 1/2》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보려고 하면 엄두가 안 납니다. 그러나 사이에 아무 권수나 뽑아들어 보노라면 이때부터 끝까지 다시 보도록 잡아당깁니다. 기나긴 이어그리기를 하더라도 낱권 하나마다 알뜰히 마무리되는 이야기가 있고, 이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 삶이 오롯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아다치 미츠루 님 작품에도 이렇게 삶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푸름이이든 어른이든 저마다 알차며 아름다이 영글어 놓는 꿈이 있었습니다.


- “미안해.” “어? 아, 아아, 아냐.” “그래, 저런 오빠라도 진짜 없어져버리면 쓸쓸하겠지. 하물며, 큐짱처럼 좋은 형이라면.” “…….” (2권 18쪽)


 아다치 미츠루 님 예전 작품들, 그러니까 2000년대로 접어들기 앞서 그린 작품들, 또는 1980년대에 그린 작품들을 읽을 때에는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말마디에서 적잖이 깊거나 너른 삶을 느끼곤 했습니다. 지난날 작품을 읽을 때에는 책장을 빨리 넘기지 않았습니다. 무척 더디게 넘기며 그림결하고 말마디를 오래도록 곱씹으며 이야기에 빨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작품들은 책장을 꽤 빨리 넘깁니다. 이번에 새로 나오는 《Q 앤드 A》를 1권과 2권을 두 달에 걸쳐 장만해 놓고는 비닐조차 안 뜯고 책상맡에 놓았는데, 적어도 두어 권을 한꺼번에 읽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책장을 빨리 넘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화 이야기에 흠뻑 젖어들도록 이끌지 못하고, ‘다음 줄거리나 다음 사건은 어떻게?’ 하는 데로만 눈길이 쏠리기 때문입니다. 낱권 하나하나를 가만히 되새기면서, 이 한 권을 읽으며 뿌듯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어느새 이름값이 너무 높아진 탓일까요. 만화를 더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잃거나 잊었기 때문인가요. 제아무리 이름값이 높다거나 바삐바삐 새 작품을 그리는 분들일지라도 당신 작품을 그러모아 낱권책으로 하나 내놓을 때에는 으레 ‘새삼스레 고맙다’고 느끼며 더 고개숙이곤 하는데, 《Q 앤드 A》에서는 마치 부그러움을 잃거나 잊은 늙은이 같은 모습이 구석구석에 드러납니다. 예전에는 작품 사이사이에 ‘내 작품을 슬쩍 알리는 그림(그러니까 아다치 미츠루 님 만화라면 아다치 미츠루 님 다른 작품을 알리는 그림, 광고 그림)’이 귀엽다고 느꼈으나, 《Q 앤드 A》에서는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흐름에서 이런 광고 그림이 너무 자주 나오니 뻔뻔하다고 느낍니다. 더욱이 2권 68쪽이라든지 94∼96쪽이라든지 115∼119쪽이라든지 얼렁뚱땅 칸 잡아먹기를 하는 그림은 꽤 슬퍼 보입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고서는 만화를 그릴 수 없을 만큼 스스로 무너지는 셈인지요. ‘말 없이 그림 몇 장만으로도 주인공 마음을 보여주기’라든지 ‘넓은 자리에 그림을 거의 그려 넣지 않으면서도 깊은 맛을 드러내기’라든지는 이제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 갈고닦지 않는 셈인지요.


- “다친 곳 없어?” “아, 으응.” “내 라이벌은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거든. 감기 걸리지 마. 이도 열심히 닦아.” (2권 75쪽)


 만화 사이사이 깃들던 ‘썰렁하지만 빙긋 웃으며 마주하던 우스개’ 또한 자꾸 줄어듭니다. 누구나 나이가 더 들면 들수록 세상살이를 더 겪거나 부대끼면서 생각이 깊어진다든지 슬기를 길어올린다든지 하기 마련일 텐데, 《크로스게임》을 거쳐 《Q 앤드 A》로 오는 요즈음에는 ‘앙증맞게 보이려는 그림’은 있으나 ‘앙증맞으며 아기자기한 이야기와 삶’은 그예 수그러드는구나 싶습니다.

 그래도 읽을 사람은 읽고, 즐길 사람은 즐기겠지요. 좋아할 분은 좋아할 테고, 아낄 분은 아껴 주겠지요. 다만, 싱거우며 텁텁한 맛을 만화쟁이 스스로 좋아하신다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나, 싱거우며 텁텁한 맛을 자꾸자꾸 선보이다 보면 ‘인기’보다 ‘만화에 담는 사랑’과 ‘만화로 나누는 즐거움’이란 시나브로 옅어지다가는 아스라이 사라집니다. 만화를 그리는 분들은 연예인과 비슷하게 인기로 먹고산다고도 하지만, 인기란 그림을 더 귀엽게 그린다든지 계집아이 속옷을 자주 그린다고 찾아들지 않습니다. 다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 또한 ‘소년 만화’라 할 터인데, 다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에는 ‘계집아이 속옷 들추기’ 그림이 어느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계집아이 속옷을 자꾸 들춰 보이려 한다고 해서 조회수가 높아지거나 인기도가 높아지지 않습니다.

 《터치》는 ‘고전’으로 손꼽을는지 모르나, 《터치》나 《러프》나 《H2》처럼 손꼽는 고전 몇 가지를 뺀 다른 작품은 구슬픈 물거품이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이야기 있는’ 만화를 그릴 줄 알던 만화쟁이가 ‘이야기 없는’ 만화로 허덕이다가 그만 인기고 밥벌이고 만화고 뭐고 모조리 수렁에 휩쓸려 버리지 않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만화는 만화다운 길을 걸어야 하고, 삶은 삶답게 일구어야 합니다. 만화를 빚어 책이라는 그릇에 담는 일은 책을 하찮게 여겨서는 빛을 보지 못합니다. (4343.11.2.불.ㅎㄲㅅㄱ)


― Q 앤드 A (1∼2) (아다치 미츠루 글·그림,강동욱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10.9.15./4500원씩)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0-11-0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 만화는 언제나 청춘물인것 같더군요.그래서 안본 만화도 마치 언젠가 본듯한 느낌을 주네요^^

숲노래 2010-11-03 11:33   좋아요 0 | URL
'청춘물'이라기보다 '소년물'이라 할 만한데, 날이 갈수록 '힘이 딸리'고 있답니다. <쇼트 프로그램> 같은 멋진 만화는 이제 다시 못 그리시나 봐요..

아룡이 2010-12-31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아다치미츠루의 작품은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처음접한것은 크로스게임을 통해서이지만요..ㅋ
글쓴이께서 적어놓신 스토리가비슷해서 읽은작품은 다시안보고 신작을 읽는다고 하신점은
저로썬 굉장히 아쉽습니다. ㅎㅎ..
왜냐 하면 아다치미츠루의 작품
터치 러프 H2 미유키 등..
지금까지 작품하나에 4번~6번은 재탕했는데도
그때마다 느끼는점도 다를뿐더러
놀랍습니다.
사람이이정도까지 그림으로 이렇게 감정을 표현해낼줄아는구나..
작품에 푹빠졋단거죠~
뭐 매번나오는 개와.. 스타일이 비슷한점은 조금아쉽습니다만..(이번 QandA에서는 H2에서본 미호가 생각나더군요..)
누군가 한명이죽는거나 사고당하는점도 .. 어... 생각하자면 다똑같지만
똑같아도 정말 뭐랄까..말로는못할? 그런느낌의 책인거같네요 ㅎㅎ..
시간나시면 다시한번 읽어보시는게어떠한가요?
뭐랄까..지나가는사람의 주접..거리였습니다 ㅎ

숲노래 2010-12-31 06:10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제대로 못 읽으셨기에 굳이 댓글을 달아도 못 헤아리시리라 생각하지만
...

아룡이 님이 말한 대목을 느끼기에 아다치 미츠루 님 작품을 봅니다.
그런데 아룡이 님이 말씀하신 작품들은 다 '예전 작품'이지
'새로 내놓는 작품'이 아닙니다.

아다치 미츠루 님이 새로 내놓는 작품들은 자꾸만
'계집아이 속옷 들추기'에 지면을 더 많이 쓰면서
정작 만화작품으로 선보일 이야기하고는 동떨어지고 맙니다.

이런 쓸쓸한 대목을 비판하는 글입니다.
그럼.

2011-03-21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끝까지 읽진 않았어요.. ㅋ 근데요 저는 생각이 좀 달라서요 아다치 미츠루님의 작품들이 무언가 말할라치면 어영부영 끝나버리고 , 이야기가 좀 된다 싶으면 지루해지고 이 말씀에서는 이해가 되긴합니다. 예를들어 카츠 같은경우도 갑작스럽게 끝내버리는.. 참 아쉬웠어요 끝을 좀 다듬으면 어땠을까하고 이야기가 좀 된다 싶으면 지루해진다는건 찬성하지 않구요.. 어느 작품을 콕찝어 말씀을 안하셨기에 그럴수도 있지만요 제가 본 아다치미츠루님 잡품에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거의 받은적이 없어요. 가끔 야시꾸리한 장면도 어느 만화책에서나 나올수있는거구요 심하지도 않고 그것들마저도 센스로 느껴지네요. 곳곳에 센스있는 뭐랄까 다른 만화에서는 느낄수없는 웃음코드가 느껴진달까요 피식피식?ㅎ 아다치 미츠루님 작품보면서 다른 만화랑 정말 다르다고 느낀게 센스, 감정표현 이었어요.. 특유의 매력이 있죠 항상 작품이 거기서 거기 라고 생각할수도있을정도로 비슷한 작품을 그리는거라고 생각할수도 있고 그런점이 아쉬운부분이긴 합니다만 각각의 매력이 있달까.. 줄거리의 흐름이랑 만화결이 같은건 아쉽게 생각할수있지만 아다치 미츠루님 만화만의 매력? 이라고 생각이 들구요. 아다치 미츠루님의 만화결이 어디가나 하고 느끼셨다고 하셨는데 전 그점이 다행이라고 느껴지구요. 저한테는 정말 작가님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님의 경우 한번 읽은 작품을 다시 손대어 처음부터 다시 읽는 작품은 없다고 하셨는데... 이것도 사람마다 다른것같구요.. 저같은경우에도 몇작품을 3번이상씩은 처음부터 다시 봤거든요.. 글쓴이님의 의견도 존중합니다만 저의 생각은 이렇다는걸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위에 다른분에게 댓글다신거에서 말씀하신 새로 내놓은 작품에서의 속옷들추기?;ㅋ 에 지면을 더 많이 쓰면서 정작 만화작품으로 선보일 이야기하고 동떨어지신다고 하셨는데, q앤드a를 말씀하시는거죠? 저도 봣는데 제가 보기엔 그런장면때문에 이야기전개에 문제가 되는 느낌은 전혀 안들었습니다.. 이점에도 저와는 생각이 다르네요.. 그런장면이 심하게 들어가지도 않을뿐더러 그런것들 마저도 센스로 느껴졌구요. 그렇게 치자면 정말 이보다 심한 만화책들이 대부분입니다... 다그런건 아니지만 요즘만화들이 대부분 그런듯해요..

숲노래 2011-03-20 23:39   좋아요 0 | URL
요즘 만화들이 거의 모두 이와 같지는 않습니다.

'청소년 남자 독자 서비스'를 안 하면서 아름답고 재미있으며 알차게 엮는 신나거나 좋은 만화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서비스를 한다면서 막상 지면 잡아먹기에 지나치게 빠지고 마는 만화도 제법 많습니다.

아다치 미츠루 님 같은 분이 나날이 이런 곁다리에서 헤맨다면, 아다치 미츠루 님 스스로 그다지 좋거나 즐거울 대목이란 없으리라 느낍니다. 농담 따먹기로도 만화를 그릴 수 있으나, 늘 똑같은 농담 따먹기만을 한다면, 이러한 만화를 사서 읽는 사람 가운데에는 '이제 더 사랑할 수 없겠구나' 하고 느낄 저 같은 사람도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오래도록 아다치 미츠루 님 만화를 꾸준히 즐기던 사람으로서 이번 <큐 앤 에이>는 더없이 질 떨어지고 덜 떨어진다고 느낍니다.

그럼.

2011-03-21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요즘만화들이 거의 모두 이와 같지는 않습니다라는 대목은.. 그럼 아다치 미츠루님 작품이 요즘 만화들에비해 그런씬들로 지면을 잡아먹는다는 말씀이신가요? 정말 이해가 안가네요;;; 큐앤에이에서 그런씬들이 대부분많이 차지해 이야기흐름을 방해한다구요? 한권당 몇컷이 나오나 직접 보세요 많아봤자 6~7?컷이죠 요즘 만화들 노출도를 봐서는 비중과 정도가 심한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어딜봐서 그런 지면들에 의해 선보일 이야기랑 동떨어진다는거죠? 큐앤드에이에서 여주인공의 노출의 원인이 대부분 뭔지 아세요? 귀신인 형의짓이죠. 귀신을 요소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기위해 서비스적인 그런요소를 넣었다고는 생각이 안드나요? 정말 그씬들때문에 원래 얘기랑 동떨어졌나요? 그렇다면 님이 말씀하시는 아름답고 재미있으며 알차게 엮는 좋은 만화란게 뭔지 알고 싶네요.. 그런 장면 조금있다고 그런 말씀하신다면 요즘 만화책에서 나오는 서비스컷들은 뭔가요....... 나날이 이런 곁다리라니 뭘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거죠? 늘 똑같은 농담 따먹기라.. 뭘 두고 늘 똑같은 농담따먹기라고 말씀하시는거죠?; 예를 들어말씀하셔야 납득이가죠. 큐앤에이가 더없이 질떨어지고 덜떨어진다라는 말씀은 경솔하시네요. 이말씀에 욱했네요. 님말대로 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듯이 아다치 미츠루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으니까요.
현재 신간인 큐앤드에이
이제 시작한 만화를 가지고 그런 말씀하시는 근거가 납득이 안가네요. 아다치 미츠루만의 센스있는 전개랄까 다른만화랑 다른 특유의 전개와 중간중간 만화를 떠나 님이 말씀하신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친숙하게 느끼는 효과와 피식하게 만드는 유머이구요 이런 개그코드같은게 아다치 미츠루만의 요소로 매력이에요. 그리고 그림결이 항상 똑같다고 하시는데 예전에 비해 크게는 아니지만 나아졌구요 그만의 특유의 매력있는 그림체라 처음 이만화를 보는 사람은 꺼릴수있겠지만 원래 아다치미츠루님의 작품을 보던 독자들에게는 정겨운 그림체구요. 줄거리도 항상 똑같다고 하셨는데 스포츠를 요소로 자주 쓰긴합니다만 이번엔 다른작품들과 달리 심령적인 요소가 나온다는겁니다. 제말은 모두가 님처럼 생각하지 않으니까 막말씀하시지 않으셨음 한다는겁니다. 그렇게 대놓고 비난하실거면 납득할 제대로된 근거를 말씀하셨음하네요.
정말 궁굼하네요. 아다치 미츠루님의 작품을 정말 좋아하셨는지? 제대로 보신건지? 이번 신작이 대단하진않지만, 아다치 미츠루님만의 매력적인 표현법과 개그코드가 그대로 잘표현했고 특유의 그림체 때문에 더 정겹고 대부분이 그 매력에 아다치 작품을 좋아했기에 특유의 농담 즉 개그코드 , 그림체 가지고 뭐라하시는분은 거의없을텐데요 똑같은 스포츠소재와 비슷한 전개라면 납득하겠습니다만 -ㅅ-

숲노래 2011-03-21 07:24   좋아요 0 | URL
앞에서, 제가 쓴 만화이야기를 끝까지 읽지도 않았다고 밝히셨는데, 이 댓글은 제 글을 다 읽고나 썼는지 궁금합니다.

앞에 붙인 댓글에서도 적었지만, 재미있고 좋은 만화도 많으며, 재미없고 나쁜 만화도 많습니다.

아다치 미츠루 같은 분들이 '재미없고 나쁜' 만화로 기울어진다고 느끼니, 참 딱하고 안타깝기에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그러나, 아다치 미츠루 님이 초기명작과 달리, 요즈음 작품이 이렇게 기울어진다고 하더라도 '아주 따분하고 아주 나쁜' 만화라 할 수는 없으니, 이런 만화도 좋아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만화도 '그림'이기 때문에, 그림결을 놓고도 얼마든지 말할 만하고, '아다치 만화 매력'은 틀림없는 매력이나, 이 매력을 작가 스스로 살리는 길과 살리지 못하는 길이 있습니다. 더욱이, 아다치 만화는 똑같은 소재에 똑같은 줄거리에 똑같은 상황설정에 똑같은 마무리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 똑같아도 아다치 매력이 있어, 이제껏 훌륭히 이야기를 엮으며 사랑받았습니다. 약발이 다 되어서가 아니라, 이번 작품에서는 어딘가 모자라거나 어리숙한 모습이 참으로 자주 보이니, 이러한 대목은 아다치이든 어다치이든 쓴소리를 들으며 작가 스스로 당신 만화길을 차분히 돌아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독자는 이러한 대목을 읽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 알라딘서재에도 여러 가지 만화이야기를 걸치니까, 그 글이라도 찾아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주쯤 쓸까 생각하며 준비하는 만화이야기로 <게게게의 기타로>가 있는데, 이런 만화 또한 한번 찾아서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2011-03-2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제말은 그말이 아니라,, 님이 비판하는부분이 제생각과 다르다는건데요. 저는 고딩이 되서야 아다치 미츠루님 작품중 하나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왔었던 아다치 미츠루님의 작품들까지 찾아서보게 됬었죠.. 한마디로 푹빠졌었습니다.
왜냐면, 다른만화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기때문이었죠..
전 님 글을 첫 댓글후 다 읽었구요.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작품들 대부분이 똑같은 흐름과 설정에 비슷비슷한 전개와 스포츠라는 매번 같은 요소들이라는건 저도 공감합니다. 그런부분들이 참 아쉽죠. 이것빼고
님이 비판하신 부분들이 대부분 제가 느끼기엔 매력적인 부분들이네요.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대부분 그런점들때문에 아다치 미츠루님의 작품을 좋아하지않나 싶은데요? 색다른 표현법, 감정표현 등등. 님이 말씀하신 유머,즉 농담따먹기, 뻔뻔한광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씬, 서비스씬 등등 님이 비판하신, 안타깝게 느끼셨다는 그부분들이 그작가만의 하나의 개성,매력, 센스 라고 생각하시진 않으신가요? 님이 말한 그런요소들, 개그코드가 다빠진다고 칩시다.
아다치 미츠루님 작품같을까요? 빠졌다면 그만의 매력, 개성이 없어졌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아다치 미츠루 작품이라기엔 뭔가 부족하고 휑한 느낌이 들것같다는 생각은 안드시나요? 님이 쓰신 글 마지막에
"만화를 빚어 책이라는 그릇에 담는 일은 책을 하찮게 여겨서는 빛을 보지 못합니다." 이 구절.. 이 말로 뭘 말씀하시고 싶으셨던건가요?
아다치 미츠루 작가가 자신이 그리는 책을 하찮게 여긴다는 말씀이신가요?
일부로 그런 요소들을 집어넣어 자신의 작품을 가볍게 느끼도록함으로서 친근함과 함께 유쾌함을 유도한거라는 생각은 안드시나보죠?? 만화책이란건 대부분 가볍게 본다는걸 아실텐데요 물론 만화책을 무시하는건 아니구요. 결국 제가 하고싶은말은 아다치 미츠루님의 작품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요소들과 감정표현력에 매력을 느껴 아다치 미츠루님의 작품을 좋아한다는겁니다.

숲노래 2011-03-21 19:21   좋아요 0 | URL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님이 좋아하는 일도 자유고,
제가 비판하는 일도 자유입니다.
아시겠지요?

넓은 바다를 둘러보시고
만화라는 바다도 깊이 들여다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끝.

<네가 없는 낙원에서>라든지 <봄으로 가는 버스> 같은 만화책도
한번 읽어 보소서. <동경괴동>이라든지 <붉은 꽃다발>이라든지
<우리 집>이라든지 <여자의 식탁> 같은 작품도 보소서.

아다치 미츠루 만화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pive8 2011-05-16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쓴이는 너무 쉽게 단정짓는거 같고 쫌 편협하네요 일방적으로만 생각하네

물론 비판할수 있는부분이지만 '제 글을 제대로 못 읽으셨기에 굳이 댓글을 달아도 못 헤아리시리라 생각하지만' 이렇게 말한부분이라던지 약간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잇는듯

즉 비판의 강도가 약간 수위를 아슬아슬하다고 해야하나,,

숲노래 2011-05-16 05:27   좋아요 0 | URL
편협하고 일방적인 글을 써서 죄송합니다.
만화작품이 그다지 사랑스럽지 못하니
이런 글밖에 못 쓰고 마는군요 ^^

왜 이런 글을 쓰는지 잘 헤아려 준다면
이 글을 달리 느낄 수 있겠지요.
 
피아노의 숲 18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손희정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일곱 살 푸름이가 비로소 찾은 ‘내 소리’
 [책읽기 삶읽기 22] 이시키 마코토, 《피아노의 숲 18》



 ‘이치노세 카이’라는 열일곱 살 난 푸름이가 피아노 하나에 온넋을 실어 살아내는 이야기를 담은 《피아노의 숲》 18권이 우리 말로 나오다. 일본에서는 벌써 19권이 나왔다. 만화책은 하루가 아닌 한 시간조차 아닌 퍽 짧은 동안 금세 읽어내고야 만다. 어릴 적에도 늘 그랬다. 주마다 나오던 만화잡지가 없이 다달이 나오는 만화잡지만 있던 1980년대에 국민학생이었던 꼬맹이는 새 만화잡지가 나와 우리 동네 문방구에 들어오는 날에 맞추어 형하고 돈푼을 차곡차곡 그러모아 후다닥 달려가서 사곤 했다. 자칫 조금이라도 늦으면 동이 날까 걱정하면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늘 달음박질이다. 같은 동네 다른 동무들이 벌써부터 나와서 사 갔을는지 모르니까.

 문방구에 닿아 가쁜 숨을 그대로 헉헉거리며 “아저씨 《소년중앙》 나왔어요?” 하고 여쭈고, “이제 막 들어왔단다.” 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직 잉크 냄새가 가시지 않은 새책을 품에 안고 다시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갈 때 느낌이란.

 다달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화잡지는 언제나 그날 다 읽어치운다. 형은 동생보다 공부가 늦게 끝나니, 동생은 먼저 형보다 읽어치우는데, 형이 보기 앞서 한 번 다 보고, 형이 한 번 다 본 그날 다시 한 번 더 본다. 형은 동생이 다 보기를 기다린 뒤 다시 한 번 보고, 동생은 또 형이 다시 한 번 더 보고 나서 다시금 더 본다. 하루 사이에 세 번을 본다.

 이튿날이 되어도 다시 보고 또 본다. 여러 날 같은 만화책을 보고 다시 보고 거듭 보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는 핀잔과 꾸중을 쏟아낸다. 내가 어머니이더라도 이럴 만하다. 딸아이 키우는 아버지로서 지난날을 생각할 때에, 내 딸아이가 나만 한 나이가 되어 만화책에 이렇게 흠뻑 빠져 지낸다면 더없이 골이 아플 테지.


.. ‘생각났어. 나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길 바라고 피아노를 치는 거였어. 그러니까 나스트루이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도 즐거워. 그걸 잊고 조금 경직이 됐었어 ..  (187∼188쪽)


 만화책 《피아노의 숲》은 열일곱 살 푸름이 이치노세 카이가 오로지 피아노 하나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빛깔 고운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이야기는 어느덧 폴란드에서 쇼팽을 기리며 마련한 콩쿠르에 주인공 카이를 비롯한 여러 푸름이가 나와서 피아노 연주를 뽐내는 대목에 이른다. 아직 2차 연주이고 마지막 3차 연주가 남았으니 열 권쯤은 더 나오지 않으랴 싶은데, 1권부터 18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말하는 줄거리는 오직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길 바라”며 피아노를 치는 삶.

 조연으로 나오는 ‘슈우헤이’가 보여준 연주를 놓고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은 “저는 슈우헤이의 심사에는 참가하지 않아서 그의 음악을 즐기기만 했습니다. 큰 실수는 없지 않았습니까(144쪽)?” 하고 말하면서, 슈우헤이네 아버지 마음속을 읽듯이 속으로 ‘뭐야, 이 아마미야라는 남자는. 자식의 성장보다 점수가 더 신경이 쓰이는 건가. 뭐, 콩쿠르니까 그런 건 이해하지만.’ 하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피아노의 숲》이 막바지에 이르며(어쩌면 이 콩쿠르가 끝나도 만화를 더 이어나갈는지 모른다만) 콩쿠르에서 누가 1등을 하고 2등을 하느냐에 눈길이 흩어질 법도 하지만, 그린이 이시키 마코토 님은 ‘등수야 어떻게 나오건’ 고작 열예닐곱이나 열대여섯밖에 안 된 푸른 넋들이 선보이는 피아노란 ‘손가락 놀림이 빼어난 재주 부리기’보다 ‘얼마나 가슴을 사로잡으며 아름다이 노래를 즐길 줄 아느냐’를 바라보아 주기를 꿈꾸는 셈이라고 느낀다.

 슬픈 일인데, 한국땅에서 이만 한 나이인 푸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이만 한 나이인 한국땅 푸름이들 가슴에는 무엇이 꿈틀거리면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가.

 《피아노의 숲》 18권은 조연인 슈우헤이한테 눈길을 맞춘다. 슈우헤이는 열일곱 해를 살아온 끝에 비로소 ‘피아노 소리는 내가 내는 거야. 그건, 나만의 음색, 즉 지금까지의 17년, 내가 살아온 증거, 나만의 소리다(84∼85쪽)’ 하고 깨닫는다. 자잘한 잘못을 저지르지만 슈우헤이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 템포가 빠른가? 지금 미스터치였나? 하지만 이 소리는, 이 소리는 내 소리야. 지금 이 소리를 놓치면 나는 …….’ 하고 이를 악문다.

 그래, 참 좋은 대목이다. 괜찮은 이야기를 조연 슈우헤이를 빗대어 보여준다고 깨닫는다. 그런데 이 아이 슈우헤이는 열일곱이다. 거듭거듭 돌아본다. 우리 나라에서 열일곱 살이라면 한창 대학입시 때문에 목이 졸린 슬픈 목숨이다. 기껏해야 바짓단을 줄인다든지 치마를 짧게 줄인다든지 하는 데에 목이 매여 있을 뿐, 스스로 제 넋을 꽃피울 아름다운 길을 찾지 못한다.

 《피아노의 숲》을 다시 한 번 읽는다. 18권 첫머리를 보면, 주인공 카이가 슈우헤이네 아버지랑 슈우헤이가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 정말 귀족 같다(24쪽).’고 느낀다. 만화 《피아노의 숲》에서 주인공인 카이는 귀족이 아니다. 버려진 아이라 할 만하다. 숲에 버려진 아이라 할 텐데, 카이는 버려졌다 할 만하든 아니든 숲에 저처럼 버려졌다 할 만한 피아노하고 살가이 사귄다. 숲에서 피아노하고 한몸이 되었고, 숲과 카이라는 아이는 온통 하나였다. 숲이 카이이고, 카이가 숲이며, 숲이 피아노이고, 피아노가 숲이었다.

 조연 가운데 하나인 ‘아담스키’라는 푸름이는 마음속으로 슈우헤이한테 말을 건넨다. ‘좋아, 아마미야. 실수를 두려워 하지 마. 지금 너는 청중에게 네 마음을 전하고 있어(109쪽)!’ 아담스키 입을 빌어 마음으로 건넨 이 말마디란 바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라 할 만하다. 사진예술이라 한다면 초점이 어긋나거나 살짝 흔들렸다 할지라도 사람들 가슴을 뭉클하게 움직이는 이야기를 건넨다. 그림과 만화 또한 매한가지이다. 글에서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좀 틀리거나 엉성하더라도 글을 읽는 사람들 가슴에 무언가를 찌르르 하고 울릴 수 있느냐 없느냐인 셈이다. 그림이나 만화 결이 적잖이 엉성하다 할지라도 줄거리와 이야기가 아름답다면 사람들을 웃기거나 울린다. 그림이나 만화 결은 뛰어나다 할지라도 줄거리나 이야기가 없거나 어설프다면 사람들은 등을 돌린다. 이런 그림이나 만화는 딱히 볼 값어치가 없다. 빼어난 재주를 보고자 그림을 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뛰어난 솜씨를 우러르자며 만화를 읽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피아노의 숲》 18권을 덮으며 19권을 기다린다. 19권째에는 누가 나와서 어떤 푸른 삶을 보여주려나. 이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열예닐곱 푸르디푸른 나날을 시멘트 감옥과 같은 학교에서 시험 문제 풀기에 꽁꽁 묶여 있느라 숨막히는 판인데, 나라밖 폴란드에서 펼쳐지는 꿈결 같은 맑은 누리 이야기를 19권째에는 어떻게 담아서 나누어 주려나. (4343.10.31.해.ㅎㄲㅅㄱ)


― 피아노의 숲 18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손희정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10.10.27./4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치고다씨 이야기 1
오자와 마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8



따뜻한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 이치고다 씨 이야기 1

 오자와 마리 글·그림

 정효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0.10.25.



  이웃을 믿을 수 있는 삶이란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동무를 사랑할 수 있는 삶 또한 몹시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풀과 나무를 아낄 수 있는 삶도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누군가를 믿는 삶도 아름답고, 누군가한테서 믿음을 받는 삶도 아름답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삶이나 누군가한테서 사랑받는 삶도 아름답습니다. 누군가를 아끼는 삶이든 누군가한테서 아낌받는 삶이든 더없이 아름답구나 싶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아낌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믿거나 사랑하거나 아끼자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넋은 참다워야 하고 내 말은 고와야지 싶습니다. 착한 마음과 참다운 넋과 고운 말로 즐겁게 살아갈 때에 비로소 누군가를 믿거나 사랑하거나 아낄 수 있다고 느낍니다.


  만화책을 고를 때면 언제나 꿈과 사랑을 떠올립니다. 나 스스로 꿈을 그릴 만하고 사랑할 만한 작품을 즐겁게 사들여서 읽자고 생각합니다. 나부터 기꺼이 사랑하는 작품을 기쁘게 읽어 곁님하고 나란히 읽을 뿐 아니라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뒷날 고이 물려주자고 생각합니다.



- “너, 설마 전엔 고양이였니?” “아, 응. 어떻게 알았어?” “바로 오늘 아침에 들었거든.” “뭐, 말하자면 길긴 한데. 내 고향은 지구와는 다른 공간이야. 사람들은 더 이상 육체라는 그릇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다툼도 기아도 없느 평화로운 세계.” “천국?” “아니. 아마 우주 어딘가의 진화한 혹성일걸.” (19∼20쪽)



  오자와 마리 님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 첫째 권을 봅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만화를 보면서 내 삶을 스스로 얼마나 착하게 꾸리는가를 돌아봅니다. 참다운 사람길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차분히 실린 만화를 읽으면서 내 삶은 내가 얼마나 나다우며 참다웁게 일구는가를 곱씹습니다. 고운 넋을 고이 건사하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펼치는 만화를 ‘둘레에서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들 하나도 못 느낀’ 채 받아들이며 내 삶을 내 손으로 곱게 어루만지는가를 헤아립니다. 《이치고다 씨 이야기》는 오자와 마리 님이 새롭게 선보이는 새로운 꿈과 사랑과 아낌이 듬뿍 배었다고 느낍니다.


  ‘이치고다 씨’라는 이름은 만화 주인공 ‘이온’이 달삯을 내며 살아가는 자취방에 홀로 덩그러니 있던 ‘인형’이자 ‘이 인형에 넋을 담아 목숨을 잇는 다른 별 사람’ 이름입니다.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던 이치고다 씨는 평화롭지 못한 지구별에 어느 날 문득 찾아들면서 메마르거나 팍팍한 모습을 숱하게 마주합니다. 때때로 착하며 고운 사람을 마주할 때에 “고양이는 말하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지만, 그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26쪽).” 몸뚱이는 고양이이면서 사람이 하는 말을 하니까, 사람들은 ‘괴물 고양이’라며 놀랍니다. 고양이가 늙어서 죽을 무렵 이치고다 씨는 새로운 몸을 찾아 어느 회사원 아가씨가 어릴 적에 애틋하게 갖고 놀다가 잊어버리고는 내팽개친 인형으로 스며듭니다. 그런데 이 회사원 아가씨는 그저 사탄이라느니 무어라느니 떠들면서 뒤도 안 돌아보며 내빼기만 할 뿐입니다. 이러다가, 텅 빈 삯집에 만화 주인공인 이온이 들어왔고, 이온이라는 젊은 사내는 ‘인형이 말을 하건 춤을 추건’ 딱히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스스럼없이 받아들입니다.


  몸이 인형인 이치고다 씨가 “나……, 안은 텅 비었을 텐데.” 하고 말할 때에, 이온이라는 젊은 사내는 “아니야, 이치고다 씨의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잖아(36쪽).” 하면서 따뜻하게 어루만질 줄 압니다. 이리하여 인형에 몸을 맡긴 이치고다 씨는 “맞다. 이온한테도 가르쳐 줄게. 내 비장의 수화. 나는·당신을·좋아·해요. 내일 데이트에서 해 봐(54쪽).” 하면서 제 마음을 살포시 드러내기도 합니다.



- “기껏 수화 가르쳐 줬는데, 쓸 기회가 없었네.” “응, 하지만 뭐, 급할 거 없잖아?” “그래.” ‘이 아인 어리버리하지만, 중요한 건 파악하고 있어. 뭐가 중요하고 뭐가 필요한지.’  (77쪽)



  한국이든 일본이든 날마다 새로운 만화가 수없이 쏟아집니다. 날마다 수없이 쏟아지는 만화를 찬찬히 돌아보면, 으레 치고박으며 다투는 이야기라든지 끝없이 빨려들어가는 풋사랑 이야기라든지 조금 전문가 티를 내는 이야기(이를테면 ‘요리 만화’나 ‘법을 다루는 만화’ 같은)입니다. 따뜻한 품을 보여주거나 너른 사랑을 나누거나 고운 가슴을 열어젖히는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보지 못합니다.


  우리 삶이 몹시 힘든 나머지 만화를 그리는 분들로서도 따뜻한 품보다는 피 튀기는 다툼판을 그릴밖에 없다 할 만합니다. 내 삶이든 네 삶이든 무시무시한 도시에서 살아남자면 그악스레 엉겨붙거나 모질게 잡아뜯어야 하니까, 이런 굴레에서 홀가분한 채 참사랑과 참믿음과 참아낌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할 만합니다. 돈 없이는 못 산다 하니까 고운 가슴을 섣불리 열어젖힐 수 없겠지요. 나로서는 고운 가슴을 스스럼없이 열지만, 맞은편에서는 뭐 이런 바보 멍텅구리가 다 있나 하면서 금세 등을 치거나 후리기 일쑤잖아요.



- “이치고다 씨도 고향이 그리울 텐데 나만 가는 것도 미안하고, (내가) 시골에서 돌아왔는데 (이치고다 씨가) 집에 없으면 엄청 충격받을 것 같아. 내 고향 보고 싶지 않아?” (89쪽)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 첫째 권을 보면서 싱긋빙긋 웃습니다. 활짝 웃거나 까르르 웃을 일은 없습니다. 가슴이 저릿하거나 짠할 일도 없습니다. 그예 빙그레 웃으면서 한 장을 넘기고 두 장을 넘깁니다.


  만화라는 틀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따뜻한 품으로 감싸며 따뜻한 삶을 그리는 작품이 있다 한다면, 문학 가운데 시와 소설이라는 틀에서는 어떠한 작품이 따뜻할까 하고 되뇝니다. 예술이라는 사진 가운데 따뜻함을 곱다시 펼치는 작품으로 무엇이 있을까 가늠해 봅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어깨동무하며 읽는 그림책 가운데에는 누구 작품이 따뜻한 손길로 피어나는가 하고 갸우뚱갸우뚱 짚어 봅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 문화에서, 우리 터전에서, 우리 사회에서, 우리들은 얼마나 ‘따뜻함’ 한 마디를 간직하면서 사랑하는 나날인지 궁금합니다.



- “슬슬 가야지. 누나가 걱정하겠다.” “정말 그 누나를 좋아하는구나.” “당연하지.” “그럼 누나 결혼도 축하해 줘.” “좋은 사람이면 축하해 줄 거야.” “진짜지?” “그럼.” ..  (113∼114쪽)



  해마다 가을녘이면 스웨덴에서 뽑는 노벨문학상 이야기로 슬며시 시끌벅적합니다. 이제 한국 문학쟁이 가운데에서 노벨문학상 받는 이가 하나쯤 태어나야 하지 않느냐고 들썩입니다.


  어쩌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국 글쟁이 하나쯤 있어도 괜찮겠지요. 나라밖으로 한국 문학이 이쯤 된다며 떵떵거리거나 자랑하고 싶을는지 모르지요. 한국에서도 노벨문학상을 받는 분이 태어난다면 이분 문학뿐 아니라 여러모로 한국 문학밭이 한껏 부풀어오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2010년 노벨문학상이건 2000년 노벨문학상이건 1990년 노벨문학상이건 무슨 대수일까 잘 모르겠습니다. 2020년 노벨문학상이든 2030년 노벨문학상이든 무엇이 대단할까 알 노릇이 없습니다.


  노벨문학상이 아닌 다른 숱한 문학상 가운데 하나라도 꼭 받아야 할는지요. 문학상이 아닌 이런저런 상장을 하나쯤은 걸쳐야 문학다운 문학이라 손꼽을 수 있나요.


  만화책을 놓고도 무슨무슨 상을 주곤 합니다. 그런데 무슨무슨 상을 받은 만화 작품이야말로 온누리에 가장 빛난다든지 가장 아름답다든지 가장 사랑스럽다든지 가장 거룩하다든지 가장 훌륭하다든지 하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겠습니까.


  만화이든 문학이든, 시이든 소설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모두 똑같습니다. 내 가슴에 사랑과 꿈을 심을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삶을 따뜻하게 즐기면서 나 스스로 따뜻한 사람으로 거듭나면 아름답습니다. 동무와 이웃하고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하루로 이끄는 책이라면 반갑습니다.



- “그보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야.” “뭐어? 충분히 수상하잖아. 역시 반대야.” “그냥 질투 아니고?” “당연하지! 아냐. 그런 녀석한테는 누나가 아까워. 누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이 못 돼.” ..  (133쪽)



  날마다 내 몸을 따뜻하며 넉넉하게 채워 주는 고마운 밥 한 그릇과 같은 고마운 만화책을 헤아립니다. 날마다 아침에 새로 쌀을 씻어서 냄비에 불을 넣어 밥을 하는 마음으로 책 한 권을 돌아봅니다. 나부터 이 삶터에서 우리 살붙이하고 먼저 따뜻하게 얼싸안으며 사랑스럽게 잘 살아가자고 생각합니다.



- “음. 행복해.” “맛있어?” “응. 먹어 볼래?” “마음만 받을게.” ..  (156쪽)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하고 나눌 수 있는 한 가지라면, 아마 한 가지뿐일 테고, 바로 사랑입니다. 돈이나 이름값이나 권력을 살붙이나 이웃이나 동무하고 나눌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사랑을 담은 만화책을 읽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사랑 이야기를 만화로 누린 뒤, 모레에 찾아올 먼 앞날에는 이 사랑 이야기를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언제나 기쁩니다. 4343.10.30.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