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현, 효형출판, 2004

   한국의 빛나는 전통 문화라는 것이 오늘날에도 반드시 그대로 모방 답습되어야 한다는 정태적 피해 의식은 21세기의 어딘가를 달리고 있어야 할 건축가들의 발목을 잡아왔다. 기와 지붕과 처마 곡선미만으로 전통 건축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실제로 전통 건축을 제대로 본 적이 있었는지 자문하여야 한다. 용마루에서부터 죽죽 뻗어 내린 기왓골과 서까래의 박력을 본 적이 있는지, 막새 기와의 의미를 찾아본 적이 있는지 자문하여야 한다. 날아오르는 거대한 새의 날개 같은 처마를 처연하게 선으로만 해석하는 한 "조선 역사의 운명은 슬픈 것이다"라는 1910년대 이국인의 미의식에서 우리는 한 발도 더 나갈 수 없다.

   전통은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지 모양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전통 건축을 중국 건축과 다르게 만든 추동력은 '달라지겠다는 의지'다. 그것이 우리의 보편적 전통이다. 용솟음치는 창작 의지가 우리의 전통이다. 진경산수를 만든 힘이다. 전통 박물관은 꼭 기와집 모양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지금도 도포 자락을 휘날리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우리는 신라 시대의 금관을 조선 시대에 복제해 만들었다고 그것을 가치롭게 여겨 박물관에 들여놓지 않는다. 고려 시대의 청자가 조선 시대의 도공에게 강요되었다면 우리에게 백자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는 12세기의 어딘가에서 머물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밋밋해졌을 것이다.

 -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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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네트워크, 한겨레신문사, 2003

   '테러리스트' '강경파 이슬람근본주의자' 나는 내 이름 앞뒤에 늘 따라붙는 이 단골 용어들을 이스라엘이나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붙여 준 거룩한 '존칭'쯤이라 여기며 별로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일이 하나 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과 미국은 적합하지 않은 용어로 나를 불러왔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해온 가장 중요한 화두는 중용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일생 동안 '엄격'과 '관용' 한가운데 지점을 따라 걸어온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미국이 나를 '극단주의자'니 '근본주의자'니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건 어리석은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스라엘도 미국도 모두, 불법 침략자에 대항하는 일은 한 사회와 그 구성원이 지닌 가장 기초적인 권리이자 의무라고 가르쳐 오지 않았을까?

   자, 여기 나라는 개인을 놓고 보아도, 나는 법적 권리를 지닌 주체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침략해서 강점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의 한 주인이다. 만약 외국 군대가 한국을 침범해서 당신과 가족들을 쫓아냈고, 그래서 조국을 찾고자 투쟁해 온 당신에게 누가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면 어떨까? 마찬가지로, 조국 팔레스타인 땅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해 온  나를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트라 불러도 좋을까? 만약 그 대답이 "예스"라면, 나는 그 칭호들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명예로운 이름으로 간직할 것이다.

-263쪽

* 얼마 전에 이스라엘의 '테러'공격을 받아 죽은 팔레스타인 무장저항단체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아흐메드 야신의 글이다. 그의 글 속에서 '중용'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힌다. 그는 아름답고 명예로운 이름을 간직한 채로 죽었다. 사람들은 테러가 나쁜 짓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할 때 그가 '테러리스트'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함께 말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가 가는 길이 '중용'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더 나쁜 사람과 견주어 보며 '그래도 나는...'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자신이 중용을 지키며 산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아마 괴로워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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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철, 우리교육, 2004

   서른세 명의 제자들이 전해 준 사랑의 편지를 거의 다 읽을 무렵, 뜻밖의 전화가 왔다. 2년 전에 담임을 맡았던 제자 세 명이 생일이라고 축하 전화를 해 온 것이다.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해 나를 많이 힘들게 했던 아이들이다. 그 중 한 아이는 끝내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들과 번갈아 가면서 통화를 했는데 하나같이 울음 섞인 목소리다.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 담임하실 때 지각 많이 했잖아요."

   "지금은 지각도 않고 학교 잘 다닌다면서?"

   "그래서 더 죄송해요. 선생님 계실 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요."

   "괜찮아. 지금 잘 하면 되는 거지."

   "선생님 제가 정말 부끄러워요.. 선생님이 사랑으로 대해 주셨을 때 잘하지 못한 것이요."

   "그래, 그런 생각을 하다니 더욱 고맙고 장하구나."

   세상에 철부지 제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부끄럽다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또 있을까.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것은, 아이들을 다잡이하지 못하는, 얼치기 무능 교사의 오랜 기다림 때문이 아니었을까.

-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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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책세상, 2001년

   보수주의는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어는 문인에 의해 아주 적절히 지적된 바와 같이, '이념'이 아니라 '욕망'이다. 즉 사회를 굳건히 떠받치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 필수적인 신념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욕망이다.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많은 정치가들이 이 당, 저 당, 자신이 내세우는 신념과 관계 없이 집권당이라는 이유로, 또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당이라는 이유로 쉽게 야합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 정치가들은 자신들을 주로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데 매우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자의 신념 아닌 신념은 단지 자신의 기득권과 안락함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이 내용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보수주의는 욕망이므로 우리 모두는 그것을 갖고 있다. 우리 모두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다. 그냥 이대로 누워 있고 싶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나야 하고 공부하고 일해야 한다. 즉 변화해야 한다. 보수가 욕망이라면 변화는 고통이다. 어린 새는 별로 날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냥 어미 새가 물어다주는 먹이만 받아 먹으며 한평생 지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새는 어미 새에 떠밀려 날게 된다. 보수주의는 날고 싶지 않은 어린 새의 마음이다. 날개는 변화와 진보를 이루기 위한 힘이다. 어린 새가 날지 않으면 날개가 퇴보하듯이 보수는 정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곧 퇴보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보수는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싫든 좋든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보수주의는 결코 날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균형을 위해 진보라는 날개와 함께 어떤 날개가 필요한가? 아마도 그것은 '성찰'이라는 날개가 아닐까? 성찰은 진보를 막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완성되도록 돕는다. 성찰은 진보가 지금보다 더 나은 현실을 가져오도록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에 대해 숙고하며 미래의 부작용을 대비하게 한다. 그런데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는 성찰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자유주의에 대한 하나의 성찰이 되길 바란다.

11-13쪽, '들어가는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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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심상이최고야 > 진실에 대한 신념

    한국 현대사와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이념을 둘러싼 그 소용돌이 속에서 내가 살아가야 한다면, 어떤 삶을 마주했을까? 그 후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 가령, 6.25 전쟁,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 3.15 부정선거, 4.19혁명, 5.16 쿠데타, 군사 유신 독재 체제시절, 12.12 쿠데타, 5.18 광주 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 그 격동의 시기를 내가 살아나가야 한다면 나의 삶은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어떤 이념을 선택했으며, 군사 독재 시절의 모진 탄압속에서 과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로 표현하고 행동했을지 막연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 쉽게 생각을 접기엔 꽤 진지한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그런데 상상이 아니라 그 시절을 몸소 겪은이가 있다.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라는 제목과 잘 어울리는 '리영희'가 바로 그다.

   '리영희'.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뇌리에 지진이 날  만큼 혁명적이었다던 '전환 시대의 논리'라는 책을 들어본적도 없고,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이런 책을 접해본 경험이 없다. 다만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책이 90년대에 출판되었다는것 정도 알고 있다. 그를 처음 뵙게 된 것은 지난주 강연때였다. 10대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들의 연령층이 다양했다. 강연은 고은 시인이 지은 '리영희'라는 시를 함께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칠십을 훌쩍넘은 나이지만 새삼 놀라운 것은 그의 살아있는 눈빛과 예리한 통찰력이었다. '또렷하고 생생한 눈빛'. 최근들어 그렇게 눈빛이 또렷한 사람은 본적이 없는것 같다. 강연의 내용은 북한과 미국, 이라크 파병에 관한 선생님의 입장이었다. 늦은시간까지 이어진 강연이었지만 모두 너무 진지하게 세시간이 넘는 강연을 들었다. 늘 궁금했던것들. 한번쯤은 고민해봤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잡기엔 그냥 답답하기만 하고 너무나 막연한 그런 문제들, 가령 50년이 단절된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서로를 너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북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미국과의 종속관계는 어떻해 근절할 수 있는지?, 그리고 최근들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진보와 보수세력간의 갈등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들에 대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강연을 듣고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너무나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그런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했다. 강준만 교수님의 글은 수많은 인용으로도 유명한데, 리영희라는 인간의 삶을 1940년대부터 2000년대 지금까지 시대순으로 그가 쓴 책들과 현대사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접목시켜 잘 제시해 주었다. 

    강준만은 그를 가르켜 투명한 '인간 창'이라고 했다. 그의 그런 표현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1965년 베트남 파병때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이야기 한 언론인은 오직 리영희 한명뿐이다. 아홉번 연행에, 다섯번 구치소 수감, 두번의 기자직 해직과 두번의 교수직 해직. 그럼에도 그는 꿋꿋하게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섰다. 현실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 진실을 선택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진실을 알리는데 대쪽같은 신념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집에 걸려있다는 '휘호'가 생각난다. "눈길을 걸을때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존경할 만한 분을 만나게 되고 그의 글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오늘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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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30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