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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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내가 되고, 내가 일이 된 사람들이 있다. 이 책에서는 베테랑, 좀 더 오래된 말로는 ‘장인(匠人)‘과 비슷한 뜻이려나. 이 책에서 다룬 직업들은 세공사·조리사·로프공·어부·안마사·마필관리사·식자공·세신사·수어통역사·일러스트레이터·조산사·배우로 13명의 베테랑이 나온다.

베테랑은 아무나 될 수 없다. 단순히 한 분야에서 물리적인 시간을 오래 보낸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창 시절에 배운 ‘방망이 깎는 노인‘ 이야기가 떠오른다. 방망이를 빨리 만들어달라는 주인공의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예술 작품을 만들듯 노인 자신만의 기준으로 최고의 완성품을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 (그게 수필이었는지 소설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노동과 직업병 문제를 다루어온 르포 작가 희정은, 베테랑들의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저자는 몸의 관점에서 베테랑들의 일과 삶을 들여다보며, 책의 프롤로그에서 말한다. 노동이라는 것은 냉정해서 어떤 성과나 기술도 대가 없이 내주지 않았다고.

그것은 신체적인 고질병이다. 어떤 직업이든 직업병은 다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육체 노동인데 열악한 노동 조건 탓에 몸을 돌볼 여력이 없다 보니 그 문제는 더 심화된다. 그럼에도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성실히 살아온 베테랑들에게 저자는 귀를 기울인다.

세월히 흘러 전업이 생기고 일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면서, 그때 나를 놀라게 한 자부심이 놀랍도록 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회사에서 받은 부당함을 토로하다가도 "이 직업을 유지하는 데는 어떤 능력이나 기술이 필요한가요?" 라고 물으면, 표정이 슬며시 밝아졌다. - P8

자신을 최고라 자칭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저마다 최선을 다하여 지키는 선이 있다. 고객 앞에서 자신이 모르는 것은 없게 하고 싶었다. 망망대해 어디서든 빈 그물로 오는 일이 없는 자신을 믿었다. 수십 미터 하늘 위에서 목숨은 하나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그런 사람이지. 수저를 가지런히 놓는 자부심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 P10

노동이라는 것은 냉정하여 무엇이건 지키고자 한다면 몸을 움직여야 했다. 찰나의 성과도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기술도 대가 없이 내주지 않았다. 시간을 내놓은 베테랑들은 둥근 달과 함께 퇴근해야 했고, 굳은 살이 박혀야 했고, 눈물을 머금어야 했고, 살이 벗겨져야 했고,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오래 한자리에 붙박였다. - P11

"나뭇결을 헤아리며 거기에서 자기 인생을 읽는 사람이 목수이고, 철 덩어리가 어디가 아픈지 귀를 열다가 문득 거기서 세상 목소리를 찾는 사람이 엔지니어라고 생각하고 산다." 해도 티가 안 나는 그림자 노동 같은 일을 두고 "문지르고 닦다 보면 내 마음도 닦인다는 말을 좋아한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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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하게 2023-11-19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고 보니 리뷰는 아니고 간략한 책 소개 정도 되겠네요.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읽었던 책을 오랜만에 다시 대출해서 읽고 있다. 비슷한 주제들을 다룬 다른 책들과 엮어서 리뷰를 써보고 싶어서였다. 자세한 감상은 그때 써볼까 한다. 






"맞습니다! 바로 기술 덕분이지요. 제 기술로 정직하게 일해서 돈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사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거짓말하고 남 속이며 제 잇속 차리는 사람들, 참 많이 봤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제 두 손을 자랑스럽게 바라봅니다. 정직한 손! 저는 감히 제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순전히 제 기술로만 돈을 버니까요." - P68

실제로 그의 매장에 있는 구두는 대부분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탐이 날 만큼 멋진 구두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유 명장은 아직도 구두에 대한 아이디어가 쉼 없이 솟아난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사람을 만나서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는 기억력이 신통치 않아서 가족 전화번호니 뭐니, 외우고 있는 게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번 지나가면서 슬쩍 쳐다보기만 한 구두 디자인은 기가 막히게 생생하단 말이에요!" - P73

"평생 단 한 번도 이 일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어요. 구두 만드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요. 저는 이 일을 어떤 것과도 바꾸 생각이 없습니다. 서울대 졸업장하고도 절대 안 바꾸지요!" - P80

유 명장은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 윤이 나는 박달나무 망치를 들어 구두 밑창을 두드린다. 그러고는 이내 만족스러운 듯 혼자 미소를 짓는다. 두툼한 손에 박힌 굳은살, 하늘을 찌르는 자부심, 그리고 쉼 없는 정직한 노력이 유홍식 명장의 오늘을 만들었다.

지금도 어김없이 대한민국 성수동 한복판에서는 한 장인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이미 오래전,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기 전부터 스스로 명장이었던 한 사람이.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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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꾸준하게 > 이슬아 작가가 돌아왔다

작년에 이슬아 작가의 소설『가녀장의 시대』를 읽고 쓴 리뷰다. 바라던 바대로 드라마화가 결정됐고, 원작자가 직접 극본 집필을 한다는 소식도 저번에 들었다. 언제쯤 영상으로 볼 수 있을까 해서 조금 전에 찾아보니 내년이란다. 텍스트로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를 텐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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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인 공동저자 브라이언 헤어 ·버네샤 우즈는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협동·협력·친화력 등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다정함이라는 전략이 인류의 진화와 생존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두 저자는 서문에서 말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는 사라지는 것이 자연법칙이니 각자도생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라고. 오히려 자연은 친화력과 협력이 넘치는 세계라고. 물론 잔혹한 생존 경쟁도 자연계의 일면일 테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하고 만들어갈 능력이 있는 호모 사피엔스(인류)가, 생명체의 양면적 특성 중 어느 면을 더 강조하고 발전시켜야 할지에 대한 대답은 오래전부터 이미 명확하지 않을까.

다윈은 친절과 협력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구성원이 가장 많이 번성하여 가장 많은 수의 후손을 남겼다" 고 썼다. 다윈을 위시하여 그의 뒤를 이은 많은 생물학자도 진화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이상적 방법은 협력을 꽃피울 수 있게 친화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 P20

협력은 아주 오래된 전략이다. 수백만 년 전 떠다니는 박테리아로 존재하던 미토콘드리아는 더 큰 단위의 세포 속으로 들어갔고, 미토콘드리아와 더 큰 세포가 힘을 합치자 동물의 몸에 힘을 공급하는 배터리가 되었다. 우리 몸의 미생물 군집은 다른 기능도 많지만, 특히 우리 몸이 음식물을 소화하고 비타민을 합성하며 장내 물질을 생성하는 등 여러 기능을 수행하게 해주는데, 이 협력관계는 미생물군과 우리 몸에 공히 이로운 결과물이다. 개화식물은 대부분의 식물 종보다 늦게 발생했지만, 꽃가루를 옮겨주는 곤충과의 성공적 협력관계로 번성한 덕분에, 현재 우리의 정원을 지배하고 있다. - P21

사람(이 책에서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를 뜻한다)은 네안데르탈인처럼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작은 무리로 살다가 친화력이 높아지면서 100명이 넘는 큰 규모의 무리로 전환되었다. 뇌가 더 크지 않더라도, 협력을 잘하는 더 큰 규모의 호모 사피엔스 무리가 다른 사람 종 무리를 쉽게 이길 수 있었다.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 종은 갈수록 복잡한 방법으로 협력하고 소통했고 이로써 문화적 역량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 종은 누구보다 빠르게 혁신할 수 있었고 또 그 혁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다른 인류는 가망이 없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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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9-26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도 탄생된 듯합니다.
 


책 제목만 보고 '나 정치에 관심 없어' 할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다. 이건 여당이냐 야당이냐, 국민의 힘이냐 민주당이냐 정의당이냐,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는 책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는 여기에 안 나온다. 이건 아이와 엄마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 분투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다. '정치하는엄마들'이 이야기하는 정치는 권력 투쟁의 도구가 아니라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대화하고 타협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아이를 키울 생각이 없거나 결혼 생각조차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엄마들이 만든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은 말한다. '우리 모두가 엄마다' 라고. 그러니 성별·젠더, 결혼·출산 유무와 상관없이 나도 엄마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조성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지향하는 이 세대의 엄마들에게는 아이도 중요하고 자신도 중요해요. 그런데 (정부에서) 그것이 병행 가능한 구조로 만들고자 하려는 노력이, 그런 관점이 부족했다고 생각해요. 결국에는 비용을 지출하는 방식으로만 한 거죠. "너희가 아이를 안 낳아? 그럼 돈을 줄게." 근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체계를 만들었어야 해요. 공공성이 있는 체계를 만들고, 개인에게 부모가 될 시간을, 아이에게 부모를 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두 가지 관점에서 비용 지출이 돼야 하는데 그냥 어떤 행정을 했다, 이런 입법을 했다, 라는 생색내기 식에 그쳤기 때문에 지금까지 쓴 예산이 거의 낭비가 된 것 같아요. 보육 정책 경우에도 이미 너무 벌여놔서 손대기가 어려울 정도거든요. 안 쓰니만 못한 부분도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P308

이고은: 사실 저출산이 문제가 되는 건 ‘생산 가능한 노동 인구가 감소한다‘의 차원이잖아요. 저출산과 동시에 고령화도 함께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령 사회에 접어들면서 나이 드신 분들이 더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한다면 저출산이 과연 정말 문제일까, 하는 의문도 들어요. 그렇게 결과적으로 생산 가능한 인구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하면 저출산이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또 현재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면서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사회 구조라면 애 낳지 말라고 해도 낳지 않을까요. 지금 비출산을 선택한 사람들을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는 시선도 문제인 것 같아요. 결론은 저출산 문제는 인구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는 겁니다. 인간 삶에 대한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자연스럽게 저출산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까, 뭐 이런 나이브한. (웃음)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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