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라는 단위에 대해 『물결』2021년 여름호에서 한승희는 다음과 같은 대안을 소개한다. 인간 동물에게 적용할 수 없는 단어는 비인간 동물에게도 쓰지 않을 것. '암컷 원숭이 한 마리' 대신 '여성 원숭이 한 명'이라고 쓸 것. 한승희의 글에서 윤나리는 이렇게 말한다. "수를 세는 단위인 '명'은 현재 '(名)이름 명' 자를 쓰지만, 종평등한 언어에서는 이를 '命(목숨 명'으로 치환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아우르는 단위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44쪽)



조금 전에 책에서 이슬아의 글을 보기 전부터 나는 이미 '물고기'는 왜 물고기라고 불리는지 궁금했다. 분명히 아직 살아있고, 고기가 되지도 않았는데, '물'고기라니 너무 잔인한 말이라고. 그치만 '물고기' 대신에 뭐라고 불러야 하나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는데 '물살이'라는 말이 있었다니. 참 예쁜 말이다. 그래서 국어사전에 물살이를 검색해봤는데, 이미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낱말에 여러 뜻이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도 대부분 다의어다. '물살이'와 비슷하게 생긴 말로 '한해살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서 뜻을 찾으면 '봄에 싹이 터서 그해 가을에 열매를 맺고 죽는 일 또는 식물'이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비슷한 이치로 물살이가 지금은 물에서 사는 것 자체를 의미하지만, 여기에 뜻 하나를 덧붙여서 물에서 사는 동물을 넣어도 무방할 것 같다. 초록창에서 검색을 좀 더 해보니 고려대 국문과 신지영 교수도 자신의 칼럼에서 '물고기' 대신 '물살이'를 제안한다. 나도 내가 온라인상에서 '물고기'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을 땐 대신 '물살이'라는 말을 써야겠다. 다만 그렇게 쓰면 소통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물살이(물고기)'이런 식으로 괄호 치고 같은 말임을 표시해야겠지.


그런데 '물고기' 단어의 적절성과는 별개로, 내가 예전부터 강하게 문제 의식을 품은, 사람들의 취미가 있다. 바로 '낚시'라는 취미. 나는 비건이 아니다. 언젠가는 비건이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아직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여전히 고기를 먹고, 생선을 먹는 사람이라고 해도 '낚시'가 과연 생업이 아닌 취미가 되어도 되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었다. 고기를 먹는 사람이든 아니든 재미로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점은 우리의 보편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낚시를 취미로 삼는다는 점은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재미로 '물살이(물고기)'의 생명을 빼앗는 거 아닐까? 근데 그게 현대인의 건전한 취미 생활로 인정이 되고, 낚시를 소재로 한 방송이나 예능이 되는 건 문제가 아닐까. 그런 의문을 지닌 지는 10년도 훌쩍 넘은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낚시가 취미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앞으로는 바꿔가야 할 문화가 아닐까. 어쩌면 '물고기' 라는 이름 때문에 물에 사는 고기를 낚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하긴 옛날에는 사냥이 지배층의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취미였던 시절도 있었다. 어떤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는 문화가 결정한다. 앞으로의 문화는 비인간 생명을 더 존중하는 문화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마리'라는 단위에 대해 『물결』2021년 여름호에서 한승희는 다음과 같은 대안을 소개한다. 인간 동물에게 적용할 수 없는 단어는 비인간 동물에게도 쓰지 않을 것. '암컷 원숭이 한 마리' 대신 '여성 원숭이 한 명'이라고 쓸 것. 한승희의 글에서 윤나리는 이렇게 말한다. "수를 세는 단위인 '명'은 현재 '(名)이름 명' 자를 쓰지만, 종평등한 언어에서는 이를 '命(목숨 명'으로 치환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아우르는 단위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45쪽)


그리고 이 글귀에도 전적으로 지지한다. 다만 나 같은 경우는 '원숭이 한 명' 이렇게 쓰기보다는 한 원숭이, 두 원숭이 이런 식으로 쓸 것 같다. 사람은 '한 사람', '두 사람' 이렇게 쓰는데, 원숭이라고 '한 원숭이' '두 원숭이' 라고 쓰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이미 지금도 그렇게 쓰고 있기도 하고. 그 편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물론 어떤 표현은 자연스럽고, 어떤 표현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도 시대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옛날엔 '별로 좋다'라는 말이 자연스러웠지만 지금은 비문이 되었고, 원래는 부정적인 말에만 쓰였던 '너무'를 지금은 '너무 좋다'라는 말처럼 긍정적인 말에도 쓰는 것처럼. 그러니 '원숭이 한 명'이 지금은 이상해 보여도 종차별적인 언어를 바로잡으려는 이들의 노력으로 언젠가는 자연스러운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난 기꺼이 시대 변화를 따라갈 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좋아하는 이슬아 작가가 신간을 들고 돌아왔다. 이번엔 칼럼이다. 저자가 경향신문에서 연재하는 동명의 칼럼 시리즈를 책으로 엮었다. 웹에서 칼럼을 읽으면서 책이 나오길 소망했는데 드디어 책이 나왔다. 이슬아 작가의 인별그램을 팔로우하고 있어서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도서관에 신청해두었던 책이 이틀 전에 도착해서 그날 바로 빌려왔다. 당장은 재정이 넉넉하지 않으니, 일단 도서관에 신청해두고 나중에 사서 봐야지 했는데 책이 생각보다 일찍 왔다. 평균적으로 두 달 이상은 걸리던데 이번엔 한 달이 조금 안 돼서 소식이 왔다. 역시 이슬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책이다. 책 내용이 궁금한 사람은 아래 경향신문 링크에서도 볼 수 있다. 지금도 계속 연재 중인데 연재 주기가 대략 한 달에 한 번인 것 같다.


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o377


이 작은 책에서 나는 나와 같은 개인들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 "가난한 우리도 이 세계의 일부이고 책임 있는 구성원" 임을 믿으면서. 세계는 우리들의 총합이다. 우리가 하던 짓을 그만두기로 할 때 만들어질 커다란 정서를 상상해본다. 이는 전에 없던 과학기술과 정치의 지형을 만들 것이다.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말처럼 우리는 혼자 먹지 않는다. 음식 선택은 전염성을 지닌 행위다. - P17

지금은 없는, 그러나 여기저기서 나타날 수많은 시민의 얼굴을 상상하고 있다. 작가 강남규는 저서 『지금은 없는 시민』에서 ‘시스템주의자‘와 ‘의인‘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스템주의자는 "어떤 위기 상황을 극복할 책임은 시스템에 있으니, 자신에겐 뭘 요구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의인은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위기 상화아에서 누구보다 앞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의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길 좋아하는 동시에 시스템주의자처럼 말하길 좋아한다고 강남규는 통찰한다. - P17

그가 주목하는 건 시스템주의자와 의인 사이의 시민들이다.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공백의 영역에 시민들이 자리한다. 의인처럼 해낼 여유가 없는 시민들도 문제적인 시스템을 바꾸는 일에 동참할 수는 있다. 선의를 모으고 책임을 나누고 서로의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다. 서로에게 좋은 변화의 계기가 되는 시민의 존재와 그들 사이의 연쇄 작용을 희망한다. - P18

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우리 모두가 얼마나 굉장한 개인인지를 가르치곤 한다. 개인이 소비하지 않기로 한 선택들이 모여 기업과 정치와 과학을 들썩들썩 움직인다는 믿음을 학생들에게 쥐여준다. 자신의 선택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자아도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나쁜 건 자신의 선택이 아무한테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믿는 자기기만이다. 전지구인의 총동원이 필요한 이 시대에, 당신은 어떤 것을 그만두고 싶은지 궁금하다. 고기 먹기를 일단 멈춘 동지로서 당신을 기다리겠다. 나에게 없는 지혜가 당신에게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P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제 때 동맹휴학이 이렇게 많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이때의 정신이 광복 후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기의 동맹휴학으로 이어졌을 테다. 우리는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윤봉길 의사의 의거나,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 같은 독립전쟁 중심으로 막연히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모든 계층에서 일어났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원산총파업, 그리고 내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일제가 세운 삼림조합에 저항한 단천농민조합사건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기억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 폭이 넓다. 모든 독립운동은 숭고하지만, 이제는 학생·농민·노동자가 주체가 돼서 일으킨 항일운동도 영화로 많이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발생한 동맹휴학 건수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수치만 해도 404건이나 된다. 평균적으로 한 해에 50건의 동맹휴학이 일어났던 셈이다. 숫자상으로 볼 때 고등보통학교가 200건으로 가장 많았고, 보통학교가 192건으로 뒤를 이었다. 그런데 200건과 192건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보통학교는 일제의 ‘3면 1교‘ 정책에 따라 증설되어 1800여 개가 세워졌지만(1930년 기준), 고등보통학교는 기껏해야 42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1930년 말 기준). 보통학교는 고등보통학교에 비해 30배 이상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은 보통학교와 비교할 때 학교 수에 비해 상당한 양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거의 모든 고등보통학교가 동맹휴학을 한 번 이상씩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 P214

중요한 사실은 동맹휴학이 6·10만세운동을 기점으로 기조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6·10만세운동이란 1926년 6월 10일에 치러진 순종의 장례일을 기해 일어난 만세시위를 말한다. 6·10만세운동 이전의 동맹휴학이 주로 학내 문제에 불만을 제기하는 수준이었다면, 6·10만세운동을 거치면서는 식민지 교육 자체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6·10만세운동이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환기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란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에 의한 교육을 말한다. 다시 말해 식민지 교육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요구였다. - P215

동맹휴학의 변화는 저항의 양상이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것과 맞물리면서 이루어졌다.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동맹휴학은 양적으로 증가할 뿐만 아니라 동맹휴학 투쟁본부를 설치하는 등 이전에 비해 한층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투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곳이 6·10만세운동의 추진 세력 중 하나였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였다. - P2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이 단순히 우리 뇌에서 젠더 차이를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는 내용을 학술적으로 밝힌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에서 1, 2부까지는 그런 면이 두드러지지만, 두 저자들이 집필 의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3부 '젠더의 문제', 4부 '젠더 없는 세상'에서는 이 책이 단순히 자신의 연구를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쓴 책이 아님을 보여준다. 


1부와 2부에서 남성의 뇌, 여성의 뇌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음을 논한 두 저자들은 3부에서는 젠더 이분법의 환상을 깨고 그것이 남녀 개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에도 해를 끼치고 있음을 고발(?)한다. 그리고 4부에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기존의 젠더 시스템을 벗어난 대안을 제시한다. 단순히 대중적인 학술서(사실 그런 책도 좋아한다)일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재밌었고 감동적이기도 하다. 나 또한 저자와 같은 꿈을 꾼다. '젠더 없는 세상'을.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논지를 펼치는 1부와 2부도 정말 흥미로웠는데 학술적인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논문 같은 글은 아니고, 에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손방(문외한)인 분야 책을 이렇게 재밌게 읽은 건 동물행동학자인 최재천 선생의 책 이후 처음인듯하다. 언젠가 영어 실력이 좀 더 쌓이면 원서로도 읽고 싶다. 


리뷰를 상세히 쓰면 좋겠는데, 요즘 시간이 너무 없는 게 아쉽다. 내가 소개한 것보다 훨~~~~~~~~~~~~~~~~~~씬 재밌으니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북플 친구 중에 좋아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아직 책을 덜 읽었지만, 간만에 별점 만점을 줘야겠다.  

마침내 1990년대에 스펜스가 사람들은 남성적 특질과 여성적 특질의 ‘집합‘이라고 재시했다. 그녀는 1993년에 발표한 논문에 "남성과 여성은 자신의 성별에 대해 사회에서 기술되고 관행으로 여겨지는 과정관념에 따른 성 역할, 특성, 관심, 태도, 행동을 모두 보이지 않고, 그것들 중 일부만 보인다. 또한 다른 성별과 연관된 특성이나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라고 썼다. - P135

마찬가지로 여성과 남성의 말하는 방식 차이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차이는 성별이 아닌 지위의 차이를 보여준다. 여성과 남성 모두 높은 지위에 있으면, 눈을 맞추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끊는 등 ‘남성적‘으로 인식되는 태도로 이야기를 하고, 낮은 지위의 남성과 여성은 모두 이유 없이 미소를 띠는 등의 ‘여성적‘ 성향을 보인다. 여자든 남자든 학생들이 내게 보내는 이메일은 "조엘 교수님께"로 시작하고 공손하게 이메일의 목적을 쓴 후 "감사합니다"로 끝을 맺는다. 그것에 대해 나는 짧고 용건만 간단한 답을 자주 보낸다. 그렇지만 내가 총장에게 이메일을 보낸다면 학생들이 내게 하는 것만큼 예의를 갖춘 이메일을 보낼 것이다. - P138

이런 사례들은 맥락에 따른 적응을 젠더 차이로 돌리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남성과 여성이 다르게 행동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물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서로 달라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특정 젠더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할 때조차도, 여성 또는 남성이라는 스스로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기대가 우리의 행동을 ‘젠더화‘(‘gender‘를 동사로 사용하여 사회·문화적 성 규범에 부합하게 만든다는 의미 - 옮긴이)한다. - P139

사회심리학 연구들은 일단 성 고정관념이 뿌리를 내리면 그것이 변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밝힌다. 기존의 고정관념에 상응하는 세부 사항들만 지각하고 기억하며 그렇지 않은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정관념에 들어맞는 정보만 믿고 그렇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고정관념에 적절한 특성을 마주하면 그것을 성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예외라고 하거나 상황, 또는 개인차라고 치부한다. - P140

내가 꿈꾸는 세상에는 젠더가 없다. 성별만 있을 뿐이다. 성별만 있을 뿐이다. 여성, 남성, 또는 간성의 성기를 가진 인간들이 이 세계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누구는 인형만을, 다른 누구는 공만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은 둘 다를 택할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인간이 해도 되는 것이라면 당신이 해도 된다. - P2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립투사로만 알았던 이상설 선생. 수학자로서의 면모는 처음 알았다. 만일 그가 지금 시대에 살았더라면 평생 수학 연구에 일생을 바쳤을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에 관련 논문이 있는데 나중에 내가 읽어보려고 아래 링크에 첨부해둔다.


http://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Article.do?cn=JAKO200914064136210

서양의 과학 지식을 배우는 데 적극적이었던 이상설이 제일 좋아했던 분야는 과학의 언어인 수학이었다. 언어가 풍부할수록 정보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수준이 깊어지는 건 당연지사, 이상설이 1896년에 성균관장으로 부임하면서 교과과정에 서양 수학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했고, 1898년에서 1900년 사이에 《수리數理》와 《산술신서算術新書》라는 수학책을 썼던 건 과학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조치였다. 그야말로 이상설은 ‘근대 수학 교육의 개척자‘였다. 평생에 걸쳐 《기려수필羈旅隨筆》을 집필한 송상도(송상도(宋相燾, 1871~1946)라는 인물은 이상설을 수학에 관심이 많은 천재적인 청년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 P1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