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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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쿠바등 체 게바라는 신화적 혁명가로 추앙받는다. 불가능한 꿈을 이룬자로써, 흔한 게바라라는 이름에 `체`가 붙으면 그 흔한 이름이 신화속의 거대 신적존재로 탈바꿈 한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두개의 얼굴을 지녔었다. 하나는 체 게바라로서의 혁명가, 또 하나는 에르네스토 게바라로서의 휴머니스트. 혁명가가 지녀야 할 냉철하고 딱딱한 모습에 반하여 인간적이고 따뜻한 휴머니스트의 모습을 모두 지닌 게바라는 가히 신화적 인물로 떠받들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다. 체에서 에르네스토, 에르네스토에서 체로의 전환은 환골탈태쯤?

체는 열정적이었다. 자기가 맡은 일은 무엇이든 철저하게 처리했고 자기가 일을 맡게 되기 기다리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일을 찾아서 처리했다. 그의 열정을 보여주듯 이 책의 겉표지는 `빠알갛`다. 그의 그 열정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은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혈기왕성한 젊은 층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무엇이든 도전해보려고 하는 자세. 비록 현실에 충실하더라도 그 현실을 벗어난 꿈을 하나씩은 가져보려는 자세는 수동적인것을 거부하며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보다 큰 꿈을 가지는 것에, 평범한 삶보다는 극적인 삶, 흔히 말하는 `대박`을 터뜨리는 삶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이들이에게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현재 특히 젊은층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진보성향. 보수를 거부하고 진보를 떠받드는 현상을 체 게바라라는 한 사람의 공도 있었다고 표현한다면 과장일까?

체는 현실의 세계를 떠났다. `우리 모두 혁명가가 되자.` `우리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하지만 마음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고 외치던 그는 이제 우리의 현실 세계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우리들의 마음 속, 정신 속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리잡고 있다. 그는 비록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우리에게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 세계를 그렇게 살다간 체를 배워야 할 것이다. 괜히 할일없는 한 사람이 근 10년의 공을 들여 체 게바라의 인생역정을 그려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시대, 이념은 맞지 않더라도 그 의 열정적인 정신만은 증발시켜 흡수할 영양가가 너무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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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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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디언 하면 백인들을 습격하고 물건들을 약탈해 가며 무자비 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야만인이라고 알려진 경향이 있다. 물론 이것들은 고귀하신 백인들의 논리에 의해서이다. 사실은 정반대인데 말이다. 오히려 인디언들의 주거지를 약탈하고 이유없는 대 학살을 행한 백인 미국인들은 현재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에게 행하였던 일제시대 야만행위를 비난할 자격이 손톱만큼도 없다.

왜 현 상황도 그렇지 않은가. `미군장갑차 사건` 시대는 세계민주주의라며 그리고 명색히 세계경찰을 자처하고 나서는 나라에서 이같은 비행을 저질러 놓고도 나 몰라라 하는 시국인데 하물며 민주주의가 제대로 발전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미국민들에게 방해가 되는 인디언들에게는 어떠했겠는가?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미국인들의 야만행위와 그에대한 인디언들의 대처, 실정을 현장감있게 그려내었다. 평화를 신봉하는 인디언들에 반해 자기네들의 이익에만 반하면 무차별적학살도 서슴치 않는, 그네들을 학살하기 위해서라면 협상을 하면서도 조약을 파기하고 포로로 잡는 아주 저능적인 야만행위도 서슴없다. 과연 기독교를 신봉하며 `이 땅에 평화를 인간에게는 자비를` 외치는 사람이 맞는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나라 뿐아니라 이웃 몇몇국가에서도 반미감정이 심각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에만 치우친것은 무엇이든 극으로 달릴 위험성을 가지고 있듯 자칫 우리나라세어도 험악한 분위기로 내닫지 않을지 심히 걱정스러운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속에 오히려 이 책은 반미감정을 더욱 부추기고 합리화시키는데에 공조하지 않을지 조심스레 염려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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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황진이
김탁환 지음, 백범영 그림 / 푸른역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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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미인 황진이.황진이에 관한 구구한 설은 많지만 어느것 하나 신빙성을 가지기 힘들었던게 현실이었고 덕택에 우리는 황진이에 대해 알기보다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에 대한 성찰(?)에 갖은 노력을 했다. 예쁠까? 아냐아냐, 옛날에는 두리뭉실한 여인이 미인상이라 얼굴이 둥글넙적할꺼야. 아냐. 저번에 Tv에서 황진이 가상복구를 보니까 예쁘더라. 이 시대 늑대분들 말도 많고 호기심도 대단하다.

개인적으로 황진이에 관한 책이 나오기란 힘들리라 생각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설이고 그 설또한 양이 대단한 것은 아니라 한권의 책으로 엮자니 그 내용이 너무 빈약해 질것 같았다. 하지만 소설가 김탁환씨는 이것을 멋지게 극복했다. 이 책의 취지인 황진이에 대한 시선을 바로잡기에 대해서는 과연 이것으로 설득력이있을까는 의구심을 품게 했지만, 황진이가 마치 내 앞에서 자기가 살아온 시절에 대한 이야기, 한탄을 늘어놓는 듯한 구어의 문체에서는 마치 책 속의 대화상대로 내가 빠져드는듯 했다. 그리고 글 중간중간에 들어 있는 삽화는 그 시대 황진이를 생각나게끔 하기에 충분히 고상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아. 삽화를 그려넣으신 화가께서 나의 고향 출신이라 더 그런 맛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과연 황진이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되었을까요? (사실, 책이 평전이 아닌 소설형식에 자기 일생의 회고형식이라 어디까지 신빙성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소설의 특성상 황진이에대한 느낌은 오로지 그녀의 행동거지, 말투에서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 황진이는 시대의 구속을 싫어했다. 그녀는 여자라고 무조건 순종해야 하고 배움에대한 차별이 가해지는 사회의 구속성을 싫어했다. 그리고 한 곳에서의 구속을 떠나 유랑을 즐기곤 했다.

둘, 황진이는 거문고, 춤 등의 달인이었다. 사실 그 동안 `기생`이라고만 알았지 그녀가 무엇을 다루고 또한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했었다. 황진이라 해서 시, 서, 화, 거문고, 가야금 등등 모두 다 하고 다 잘할 줄 알았다. 그래도 적어도 가야금은 도중에 그만 두더군..음..음.

셋, 황진이는 독신(?)이었다. 그랬다. 역시 시대의 기생이고 그 절개 또한 대단했기에 함부로 몸을 내맡기지도 않았고 누구의 첩으로도 들어가지 않았을 뿐더러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낭군 역시 없었다.

순간적으로 나한테 이 책을 읽고 황진이에 대해 안것이 무어냐고 나에게 자문했을때 떠오른 답이다. 사실 별로 대단하게 황진이에 대해 알았다고 할 수 없다. 구속을 싫어했다는 것이 과연 황진이였는지 작가의 상상속의 황진이였는지는 알 수 없었고 나머지들은 황진이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어디에서나 알법한 내용이다. 이런 `득`의 사소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지니는 가치는 자칭(자=우리나라사람) 시대의 미인이라고하는 황진이에 대해 제대로 된 시선을 지니자는 의도와 그 뜻을 설파하기 위해 나타낸 멋들어진 글에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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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연의 - 상 - 강은 흐를수록 깊어진다
정인생 지음, 장순용 옮김 / 들녘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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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동양 사람이라면 아마 이 공자란 사람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공자가 누구요?`하고 질문을 던지면 또한 당황하지 않을 이가 거의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처럼 공자란 분은 널리 알려져 있고 세상에 많은 가르침을 설파한 분이지만 미처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로 공자에 대해 알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공자에 관련된 서적은 많지만 과연 그것을 정독하며 공자를 알아가리라 다짐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그만큼 힘들고 엄청난 노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형. 공자가 누구야?' `음. 공자. 훌륭한 분이지. 암.암.` 이정도로써 공자에 대한 인식의 테잎을 끊을려고 하는 부류였는데 문득 `공자연의`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산뜻한 표지 디자인부터 나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아무리 책의 내용이 뛰어나야 한다지만 디자인에 눈길이 먼저 가는것은 역시 어쩔수 없나 보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나는 매력적인 제목. `공자연의`. 연의라고는 삼국지연의밖에는 모르지만 그 하나 밖에 모르는 삼국지연의를 너무나 열열히 사모하는 입장으로써는 또 다른 연의가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설레임이다. 더군다고 `멀리할 수는 없고 가까이 하기에는 힘든 그대` 공자에 대해 연의형식으로 했다니 이 어찌 반가운 일이 아니겠는가?

요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란 말이 공공연히 있어왔다.공자사상의 고리타분함과 부패적현실유착성 등등 공자사상은 이제 없어져야할, 뿌리뽑아야 할 사상으로 치부되어 왔다. 아니, 그렇게 왔다기 보다는 그렇게 보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말이 옳겠다.

물론 공자사상이 현실과 너무나 큰 괴리를 보이며 그 융퉁성없는 모습을 나타내곤 한다. 책에도 있듯 공자 역시 그 당시 큰 융퉁성없이 너무 원칙중시를 한 모습이 보인다. 가령, 문지기가 공자에게 대피할 곳을 가르쳐 주자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군자는 문으로만 통해 가오.`하는 자칫 멍청해 보이는 태도뿐 아니라 자상백자가 일부러 의관을 갖추지 않고 공자를 접해 공자의 원칙중시성을 풍자하려고 한데에 있어 공자의 옹고집 또한 볼 수 있다. 이런 태도는 바쁘게 팽팽 돌아가는 현실의 팽이속에서는 도저히 접할 수 없다. 그 뻣뻣함은 되려 팽이를 멈추게 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탐대실이라 명명하고 싶다. 흔히 서양에서는 동양을 동방예의지국이라며 그 공자사상의 고매함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래서 서양에서 굳이 동양의 그 우수한 사상을 배워 기업에 적용하며 온갖 노력에 힘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국내에서는 오히려 이제 그것을 멸하려 하며 서양의 합리적 사고만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모든것은 그 밑바탕이 중요한 법이다. 서양의 밑바탕은 개인주의, 합리주의지만 동양의 바탕은 어디까지나 삼강오륜 등등을 위시한 유학이었다. 이제 그 바탕을, 자기 근본을 뿌리째 버리고 새로운 것만 추구하다보면 반드시 어느때에는 구토가 나게 마련이다. 그때서 다시 근본을 찾자고 또 소리칠 것인가?

새삼 온고지신을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록 공자사상을 버린다 할 지라도 먼저 자기자신을 알 필요는 있을 것이다. 자기사상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그 뿌리정도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어렵디 어려운 작업. 조금 쉽게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 `공자연의`일 것이다.현재 중국에서 공자를 강의할때 기초자료로 이 공자연의를 사용한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공자의 깊은 사상을 열거한 책이 아닌 그의 태어난 배경, 행동, 주변 상황등을 알 수 있게 해 주는데 있어서 이 책을 입문서로 꼽는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만, 공자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풀이하고 있지않고 간접적인 행동, 말, 상황등으로 제시하는 만큼 깊이 알기에는 큰 어려움이 많은 책이다. 고로 입문서가 가장 적당하리라 싶다.

지금 현 자신을 이루고 있는 그 사상의 바탕, 그 끝뿌리를 알고자 노력하는 모든분들께 그 출발점을 여기 이 <공자연의>부터라고 권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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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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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을 읽기 전에 참으로 부끄러운 사실이 있었다. 뭐 사실 생각해 보면 크게 부끄러울것도 아니지만, 이 책을 펴서 읽기 직전까지 난 이 책이 소설책인지를 몰랐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누가 말했다고 하길래, `음. 사회,정치분야 글이구나.근데 황만근은 누구지? 아직 신문에서도 본적이 없는데..`라고 단순히 생각 했을 뿐이었다. 그 생각에 아무런 살핌도 없이 책을 펼친 순간. 웬걸? 갑자기 소설이 틔어 나오지 않는가? 허허..

일단은 나의 초기 기대(?)와는 다른 장르를 뜻하지 않게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뭐, 워낙이 유명하니까. 여기저기서 모두들 그렇게 재밌다고 하니까, 소설이면 어떻고 사회분야면 어떻냐~ 책은 책이지.` 라는 비교적 낙관하며 읽기로 했다.

`소문난 잔치집에 먹을것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래도 소문난 책속에는 먹을거리가 많다는 나의 철학적논리의 굳건한 바탕으로 소문난 책을 맛봤다. 결과는? 옛말이 맞았다. 나의 철학이 무너진 순간이요, 옛 말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반성의 순간(?). 모든 부분을 저 멀리 밀쳐두고, 모두들 하나같이 얘기하는 이 한마디. `소설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나?`(어디에서인지 이런 글을 본듯하다.) 개인마다 취향이 있다지만 그래도 대중적 입맛에는 아주 순응적이었던 나에게, 이번만큼은 입맛에 크게 들지를 않았다. 재미없었던것은 아니었다. 물론 소설을 좋아하는 나인만큼 재미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극찬을 하던 만큼의 명성이 나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이 책이 그렇게 재밌다고 했을까? 자, 보물찾기 아니, 이유찾기 해봅시다. 시작~

매우 재밌다고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독자분들이 느끼는 재미있는 부분의 핵심 요체는 바로 소재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나도 책을 읽으면서 느낀것이지만 `허~ 참 이분 소재하나는 진짜 특별한것들 가지고 쓰셨네.` 그런 소재의 특별성은 읽는이의 관심을 촉발하기에는 더없이 좋다. 요즘 광고만 봐도 너무나 특별한것들은 물론, 오히려 무슨 광고인지도 모르게 하는 `특별성`을 선보이지 않는가? 그만큼 흥미유발은 그 자체의 흥미성보다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100점이다. 일반 생활속의 소설같으면서도 그 소재의 특별함. 이것이 아마 독자분들의 관심을 유도하였으며 더불어 큰 재미도 느끼게 해 준것이리라.(물론 나처럼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리고 한가지 더. 이 책은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남겨둔다. 작가 혼자서 `이건 모두 내 꺼~`하고 몽땅몽땅 해 치워 버리는게 아니다. `혼자서도 잘해요`가 아니라 `다 같이 해요`다. 추천인의 말대로 요즘, 특히 현실을 반영하는 소설에는 하나같이 작가가 그 구심점을 제시 해 버림으로써 독자에게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지만 그만큼 생각의 넓이를 제한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은 그저 물음을 던질 뿐이다. 절대 해답은 없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처럼 독자의 의견을 묻는다. 예시는 비약이겠지?

맨 처음 이 책을 읽기전의 부끄러움을 제시했었는데, 읽고 난 후에도 부끄러운것이 생겼다. 추천인의 말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독자는 재미있는 이야기 한판 즐겼다는 기분에 흐뭇해하며 책장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 독자는 성석제의 소설 안쪽으로는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하였다.` 뜨끔했다. 꼭 나보고 하는 말 같아서. 사실 처음에 `이 책은 소설이야.소설!`하고 너무 생각하면서 읽어서 일까? 이책의 현실연관성이나 사회비판성은 생각지도 않은채, `음 그런대로 재미있었다.`라고 느꼈었다. 추천의 말을 보고 부랴부랴 다시 읽어 앞서의 글들이 나올 수 있었다. 아마 이런 부끄러움에 진정한 재미를 느끼지 못한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언젠가 다시 시간나면 진정한 독자참여 소설을 대하는 기분으로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다짐, 이 글을 쓰며 한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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