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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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옳다. 찬성! 근데 법을 어떻게 따르지? 법전을 달달 외울까? 어째 그러기에는 좀 재미가 없다. 아니, 실은 머리가 그런 과부하에는 자신이 없단다. 그럼 여기서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Master Key. 바로 문화 이해다. 로마의 문화를 이해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뇌가 법전 외우느라 땀 뻘뻘 흘리는 수고를 덜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있음 법전 외워도 상관은 없다만.

동양의 기본문화는 무엇인가? 유교, 불교. 크게 두가지로 압축 가능. 이 압축된 두가지, 유교,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이 갖추어 진다면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동양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본질적 동의는 얻어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동양의 강의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그렇다면 서양에 관한 이해의 매개체로는 무엇이 가장 유력한 후보일까?

그 명단의 하나는 기독교. 나머지 하나의 명단 자리에는 `신화`가 차지하리라 믿는다.신화, 표면적으로는 `번개를 던지고, 삼지창으로 파도를 일으키고`하는 등. 만화같은 허무맹랑성이 주렁주렁 열려 있지만 그 속에는 서양인들의 공통된 기반 의식이라는 과육이 옹실몽실 자라고 있다는데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중요성을 등에 업고 있는 신화중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다.익히 알고 있듯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 흥미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읽기에는 난해한 면이 없잖아 있다. 그도 그럴것이 `아프로디테`,`퀴클롭스`,`에리뉘에스` 등과 같은 등장인물들은 기억하기는 커녕 발음만 해도 혀, 입 몸 다 꼬인다. 신화의 난해성에는 다름아닌 이런 단어들의 무차별 폭격에 겁을 쥐어 먹은 우리의 머리가 기인한 것이다.

이 난해성이란 벽을 조금이나마 부수고자 마련한 망치가 바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다. 기존의 인물중심, 연대기식 구성이 아닌 한가지의 테마를 중심으로 여러 신화들을 집록하는 방식. 예를 들어 `신발`에 관한 테마를 툭 하나 던져주고 그에 따른 신화만으로 전개해 나가는 방식. 이런 테마를 제시함으로서 우리는 그 난해하던 벽에 조금씩 조금씩 금을 내며 이해기반을 다지게 된다.기존의 신화 틀을 벗어 던져버린 아주 `멋진 놈`이 온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깊이가 너무 얕다. 한정된 두께 속에서 여러 테마로 구성하려다 보니 그 깊이가 얕아지는 것은 사람이 늙어가듯 피할 수 없는 한스런 일이지만 그래도 그 얕음을 바라보는 나에게는 아쉬움의 물기둥이 치솟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신화가 나와서 조금 알겠다싶으면 끝나버리고 이제 막 흥미진진해 질법한데 바로 결말로 폴짝 건너 뛰어버리고. 적어도 하나의 신화를 내보였으면 독자의 이해기반을 갖추기 위한 청사진 정도는 작가가 같이 고려해 주어야 한다.

`신화`의 건물을 세우는데 `인부`독자들에게 `사업계획서`만 턱 던져주면 어떻하나? `사업계획서 제 1장 애국가 제창. 동해물과 백두산이....` 이러면 `인부`독자들은 자연 힘들다. 결국은 다른 건설의 설계도를 찾아 뒤져야 하는 불편함으로 귀결 될 뿐. 이런 2중 수고를 덜기 위해서는 `감독관`작가가 `청사진과 설계도`쯤은 갖추어 줘야 한다. 적어도 기본 골격의 청사진이 제시되어야만이, 기초공사가 탄탄히 되어야만이 신화의 건물이 튼튼히 세워진다. 적어도 독자들에게 이 신화는 내용이 이런 것이란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어야만이 큰 테마를 이해 할 수 있다. 뒤에서 잡아줄터니 독자들은 안심하고 자전거를 배우라고 했던 작가의 다정한 말. 하지만 이왕 잡아 줄거면 좀 잘 잡아주지.

끊임없이 몰려드는 아쉬움의 물보라는 뒤로하더라도, 기존의 그 삭막한 일렬 종대식의 구성을 과감히 탈피한 테마중심의 서술에는 망설임 없는 박수의 갈채를 보낸다. 기존의 신화속에서 눈만 빙글빙글 하던분, 머리만 헤롱헤롱 하던 분. 그래서 신화와의 연(緣)을 끊었던 분들. 그런 분 들에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 연을 다시 잇게끔 만들어 주는 강력한 접착제가 될 것이다. 의심의 여지 또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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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8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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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를 덮은 지금. 나는 나도 모른체 또 해석의 메스를 양손에 쥐고 있다. 수술대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텍스트들. 살려주세요. 작가의 당부를 잊어 먹고 있었다. '저의 자식들은 겁이 많으니 제발 칼을 들이밀지 말아 주세요.` 부탁까지 하는데 들어주지.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 요즘, 산사람 소원도 안 들어주면 너무 인색하지 않은가? 그런데 솔직히 내 실력에 무슨 칼질인가, 한번 튕겨 본 것일 뿐.

<겨울나기>는 이외수 작가가 비교적 초기에 창작한 몇 편의 단편을 실어놓은 책이다. 정확히는 5편. 여기서 우리가 차렷!주목! 해야 할 것은 `초기`란 단어다. 새싹의 파릇한 내음이 느껴지는 초기란 단어.비록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일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진정한 작가 `이외수`를 만나 볼 수 있다. 세련된 다이아몬드가 처음에는 그토록 뭉텅한 돌뭉치였을 줄 누가 알았으랴. 처음 본연의 모습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는 무겁다. 비록 작가의 재기 넘치고 익살스런 문체에 힘입어 웃음을 던져주곤 하지만 그 웃음은 한 서린 웃음, 고독의 웃음이다. 대부분 작품들의 모태는 어렵고 곤궁한 한 예술가가 자기 내적자아를 찾기위해 고뇌하는 모습으로 나 역시 추측했듯 그 고뇌의 행로는 절대 순탄치 않다. 순탄했다면 애초에 고뇌할 필요도 없었다. 그 `순탄치 않음`이 `분위기 풍선`의 끈을 잡아 당겨 착 가라앉게 한다.

내면의 고뇌를 안고 있는 주인공들. 괴롭고, 외롭고, 적막한 자기를 벗어나기 위해 내면의, 자기만의 `굿 판`을 벌인다. 무한의 자아와 접촉을 위한, 무한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무던히 벌인다. `덩더쿵 덩더쿵`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굿 판은 절정에 치닫는다. 춤이 점점 격렬해진다. `덩더쿵 덩더쿵` 땀이 난다. 숨이 차오른다. 나른한 죽음의 빛이 보인다. `덩더쿵 덩더쿵. 덩더쿵 덩더쿵.` `쉬이~` 잠시 굿 판이 멎는다. 주위는 조용하다. 모든것이 적막의 담배를 뻐끔뻐끔 피고 있다. 마침내 육신은 자기자신들의 자아와 일치 되었으며 그 순간 굿 판은 막을 내린다.

우리는 시대를 너무 만만히 그리고 의식없이 살아오고 있다. `그냥 되는돼로 사는거지 뭐.` `돈만 좀 벌 수 있으면 양심정도야. 양심이 밥 먹여 주던?' 각자의 자아들은 점차로 설자리를 잃고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자기의 존재의식마저 점차로 잊어가고 있다. 거울 앞에 서보라. 얼굴만 비춰주는 편견의 여신, 손거울이 아닌 자기 전신을 비추어 주는 거울 앞에 당당히 서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삐까번쩍`한 옷들? `나 이뻐? 이쁘지?`하는 장신구들? `당신이 일류입니다.`라는 메이커들? 자기자신이 점점 옅어지고 있음을 발견하는 자, 몇이나 있을 것인가? 부끄럽고도 부끄러운 순간순간들.

우리도 이제 굿 판을 벌려야 할 때가 왔다. 비용은 걱정치 말자. 자신의 입지를 잃어버린 자아들이 자기 몸을 팔아서라도 굿 판을 마련해 놓았다. 이제 무당만 오면된다. 모두들 눈을 떠서 굿 판의 무당으로써 참여할 때가 왔다. 때가 왔다. 때가 왔다. 징을 울려라. 춤을 춰라. 굿 판을 벌려라. 덩더쿵 덩더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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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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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우연과 필연의 끊임없는 교차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이 필연인듯, 필연이 우연인듯 보이는 만화경 같은 거울의 시선속에서, 우리는 느끼지를 못하고 있을 뿐, 그 둘의 공존의 회오리 속에 어지러이 널부러져 산다. 빙글 빙글 어지러운 세상. 그 빙글 거리는 어지러움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을때 바람막이로 `휭` 나타나는 우리의 구세주 폴 오스터.

<거대한 괴물>은 작가의 가장 빼어난 대표작으로 꼽힌다. 나로써는 동일 작가의 <우연의 음악>보다는 진행의 흥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추리,탐정,논리의 설계도로 이루어진 그의 미로를 요리조리 빠져나오는 흥미, 그 미로의 통로마다 설치된 문을 열지 않고는 조바심으로 안달이 나는 기대감들, 그의 설계도는 여전히 하자가 없었다. 각각의 설계도에 따른 상대적 평가차이 였을 뿐 절대적 흥미면은 KS다. 혹 만족하지 못하면 AS도 될런지?..

<거대한 괴물>은 직역 그대로의 Giant Monster가 아니다. 처음 접할때 커다란 `고질라` 한 마리라도 나오려니 생각하면 작가 땀난다. <거대한 괴물>은 Giant Monster가 아니라 Leviathan이다. 토마스 홉스가 `개인을 삼켜버리는 거대한 권력`이라 말한 그 Leviathan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개인`이란 개개인이 자기 자신의 삶을 결정해 나가려는 의지로 변장을 했고 `거대한 권력`은 불확실특별시 세계구 성채에서 무수히 쏟아 붓는 우연의 포탄들로 변태를 했다. 의지와 운명과의 지루한 전쟁터. 멍한 머리도 대하다가는 포탄 샤워를 받기 딱 좋다. 조심하라.

전쟁터를 잠시 벗어나 보자. 길거리를 걷다 우연히 주운 돈으로 복권을 샀다가 `대박`을 터뜨리고, 서로 별 다른 호감이 없는 한 쌍의 남녀가 우연찮게 자주 마주치다 결국은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헤어졌던 애인이 어느날 갑자기 나의 가장 친한친구 애인으로 `쿵`하고 나타나는 일상생활의 일들. 우리는 이런 지극한 일상생활에서도 복병 `우연의 회오리`와 맞닥들인다. 버텨보려는 우리의 시도는 애처롭다. 조만간 버티던 우산은 뒤집혀 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괴물>은 그 위험한 복병에 철저히 자기만의 의지로 맞서 보고자 하는 인물의 삶을 나타내 준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리 또한 알게 모르게 그 괴물과 싸웠다는 것을 깨닫고 또 대부분이 벌써 그 괴물의 발밑에 두손들고 납작 눌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연 그 괴물의 발밑에 수장되어 서서히 썩어가는 것이 옳은 삶일까? <거대한 괴물>. 멍한 눈으로 흥미만 찾던 둔탁한 머리를 잘도 유인해 퍽!! 일격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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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개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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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들장미, 들개.. 그들이 토해내는 그 야릇한 이미지. 바로 야성미다. 화분속의 도도한 장미, 자기 집속의 평안함에 복이 겨워 항상 혀를 내두르는 집개들과는 달리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그 본연의 순수함. 우리는 그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본연의 순수함을 숭배와 찬양의 도마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한다. 그 순수란 위인이 숭배의 메뉴판에 오를 만큼 세상은 타락한 것일까? 때 묻은 것일까? 하던일 잠시 멈추고 곰곰히 앉아 재고해 볼 문제다.

얼마전 작가 이외수의 최근작을 읽고 적잖이 실망한 적이 있었다. 개인적 판단문제였지만 그도 유명세 만큼 상업성의 문에 힘차게 노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예전 작품을 살펴보기로 했다. 물론 `장수의 패배는 병가지 상사`란 개인적 화해 차원에서였다. 과거는 말해 주었다. 그때의 작가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의 전라(全裸) 그 자체라고, 또한 그의 산물 들개 역시 마찬가지라고.

작품 `들개`의 맛과 대동소이 한 것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렉싱턴의 유령`등을 들 수 있겠다. 머릿속을 맴도는 그 허무와 상실의 맛. 하지만 들개에는 좀 더 형이상학적인 아픔, 즉 고통이라는 향료가 추가됨으로써 그 맛은 달라진다.

세상이라는 상표의 짙은 회색 채찍과 버얼건 당근에 속박되기를 당당히 거부한 이들, 주인공과 한 꿰째째한 젊은 화가. 그들의 삶을 찾고자 하는 붕정만리는 너무 험난했다. 숨 조차 쉬기 힘들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를 찾고자 하는 귀소본능이 저 아득히 깊숙한 곳에 내재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세상`이란 기업의 너무나 충실한 직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끔 그 직원이길 거부하는 이를 보면 한심하게 여기곤 한다. `왜 저리 힘들게 살려고 하지?` 퀴클롭스집단에서의 인간은 `병신`이다.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귀소본능 운운하는 자는 `병신, 이단아`다. 시대가 그렇다.

그 `이단아`에는, 그 본능을 예술, 즉 자기 표현수단으로 승화시키는 자가 있었고 자아와 세상의 중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방황자가 있었다. 전자가 예술로서 자기완성의 경지에 입문한 젊은 화가이고, 예술의 순수함과 세상과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가 바로 주인공, 그녀이다. `내가 방황한다고? 천만에 난 확고한 의지가 있어!` 그녀가 반론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세상과도 어울릴수 없었고 자기 작품의 세계와 또한 어울릴 수 없어 하던 모습에서 그 방황의 자태를 느낄 수 있다. 변명의 요지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완성과 방황의 틈에 끼여 고통 받았다. 그들의 숨통이 조여지면 나의 목 또한 서서히 조여짐을 느꼈다. 이(異)차원적 공간에서 동시대적 동질감을 향유 할 수 있었던것은 나만이 아닐것이다.

이 작품을 `해석`이라는 칼로 도려내진 않을련다. 작가 또한 그것을 부탁한 터이다. 나는 그 칼을 내려놓고 그저 부드러이 쓰다듬기로 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가슴속에 느껴지는 그 촉감. 서로 어느 부분에서 만졌는가에 대한 차이로 그 느낌은 각각 다르겠지만 그래도 무엇이든 가슴으로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그 느낌은 가만히 가슴 속에 묻어 두면 된다. 그것이 진정 작가가 원하던 독자와의 교감이다. 그 느낌을 계속 묻어 두는한 작가와의 영원한 교감이 이루어 질 것이다.

들개.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온 좀처럼 만나기 힘든 손님이었다. 가능하면 빠르게, 빠르게 이 손님을 초대하자. 좀 더 순수하고 좀 덜 때 묻었을 때. 그러면 그 손님은 조용히 마음속의 찌들고 얽힌 실타래를 풀어 줄, 구원의 손길이 되어 줄 것이다.(단, 재촉하지는 말자.) 들개. `인간은 결국 완전한 혼자가 되기 위해 살고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의 음영속에서 다시금 손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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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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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대단한 작가다. 흔히 명성은 뛰어나나 그 명성에 비해 그 글은 터무니 없는 경우가 왕왕있는데 폴 오스터, 그는 아니였다. 난 지금 그를 최고의 이야기 꾼이라고까지 추켜 세워 주고 싶다. 출판사에게 잘보이려고? 서평담당자에게 잘보이려고? 절대 아니다. 내 주관, 내 판단으로 그는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그에 관한 여타 매스컴의 설명처럼 이 이야기도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을법한 이야기로 시작되어 그 뒤는 알수없는 읽는 이로 하여금 도저히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는 답답해서 견디지 못하게끔 만드는 마력이 있다.

우연의 음악. 이 우연이란게 우리에게 참 많은 의미를 준다. 주인공은 일상적인 평범한 한 사람으로 살아가다 어떤일을 계기로 점점 불운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는데 우연히, 아주 우연히 생면부지의 아버지로부터 거대한 유산을 받게 된다. 거기서 부터 주인공 나쉬는 우연히 만나는 도박청년꾼과 우연히 얽히게 되는 사건들 등등 모든 인간사란 우연의 필연성을 갖는다는걸 보여주기나 하듯이. 흔히 사람들은 운명이란걸 말하곤 한다. 자기 인생에 피할래야 피할수 없는 필연적 사건들을 사람들은 자기 팔자다, 운명이다라는것으로 대체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에서 정말이지 인생이란 우연의 연속이라고 느낄 수 있을것이다.

작가가 의도하고자 또는 의도하지는 않았더래도 이 책을 다 읽는 독자가 생각할수 있는 그 무언가는 바로 그 우연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다. 운명이라고만 하면 너무 수동적인 인간상일것이고 그저 우연이라고 하면 너무나 불확실한 그리고 그 역시 수동적인 삶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우연에 대한 결정을 함으로써 그 수동이란 의미를 능동으로 탈바꿈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쉬가 유산으로써 드라이브를 떠나버리는것, 도박에서 자기 모든것을 거는것, 탈출의 충동에도 자기는 자리잡고자 하는 결의 등등 그 결과야 어떻든 우리는 나쉬에게서 우연이란 수동의 의미보다는 그 확고한 결정에 능동적인 이미지를 보게 된다.

그렇다. 인생이란 그런거다. 자기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우연같은 사건들. 그 미래의 불확실성속에서 터지곤 하는 우연에 자기만의 확고한 의지만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우연이란 결코 불확실성의, 수동의 우연이 아닐것이란 말이다. 이렇게 정신없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그런 철학적개념까지 덧붙일 수 있는 그에게, 나 어찌 최고의 이야기꾼이라 칭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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