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악몽 - 유럽 판타지 단편선
알퐁스 도데 외 지음, 고봉만 옮겨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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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의 취향이란 너무나 다르다. 그치? 나 이 서평쓰기전에 먼저 올라와 있던 서평을 봤는데 별이 다섯개야~ 우와~ 그거 만점아냐? 만점!만점! 근데, 난 이거 빵점주고 싶어. 그 왜 있잖아~ 초등학생 받아쓰기 공책에 멋있게 예쁘장하게 그려져 있던 큰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밑에 밑줄 2개~ 이 책. 아마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쯤에 나와서 소개된걸꺼야. 기억나. 크리스마스와 전혀 관계없는 나도 그 명절(?)의 분위기에 버티다,버티다 휩쓸린 판이였지.우~ 살려줘. 그 때 막 이런 책이 나오니까 `앗! 이 책이다`싶더라고, 그래서 조금 기다렸다 돈모은뒤 사려고 했더니만 마침 그때 절판이었던가? 여튼 그런 비슷한 일때문에 안샀더랬어. 그러던 참에 이제서야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됐어. 근데 있잖아. 음..한마디로 별로였어. 약간 판타지풍의 소설인 만큼 독자에게 흥미를 줘야 하는데 난 흥미를 전혀 못 느꼈어. 흥미야? 너 어딨니?

이건 왠지 우리나라(하긴 우리나라만 그런것은 아니지) 상술의 특허품. 시즌맞춰 고객심리 유도하기 같았어. 왜 발렌타인데이에 자기도 모르게 초콜릿 먹고 싶고(받고 싶다고 해야 하나?) 화이트 데이에는 사탕먹고 싶고 기타 등등 정말 판타스틱한 상술있잖아. 그리고 이 책의 저자들 봐~ 너무 화려한 이름들이잖아~ 이름만 들어도 와~ 하게 되는 작가, 더군다나 크리스마스 시즌에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란 흥미로운 책이라니~ 울컥하는 마음에 구매하는 사람많겠지? 근데 히햐~ 세상에, 난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있길래 우와~ 이거 판타지풍으로 각색한거 보다 싶었는데, 왠걸~ `축약 성냥팔이 소녀`더군.아, 물론 판타지풍으로 아주, 아주 약간 섞어 놓았어. 하지만 그 큰 틀은 성냥팔이 소녀야, 소녀의 생명이 꺼져가는 그 장면만 약간 신비하게 그려 놓고 나머지는 줄여놓은 성냥팔이 소녀 그 자체인.. 그때의 그 황당함이란..그나마 `조지프 셰리던 르 파누의 악마를 만나다`정도가 판타지란 명찰을 겨우 붙일만 하고(아냐, 이건 솔직히 읽으면서 오싹하기까지 했으니까 붙일만 한게 아니고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편이 나을것 같아.) 나머지는 진짜 아냐. 몰라, 그거 내가 썼으면 졸작이라고 할걸? 유명한 사람이 쓰면 그 쓰여진 것도 유명해지는게 현실이지. 대중가요도 마찬가지잖아? 이름없는 가수가 부르다 그냥 조용히 사라진 노래, 요즘 삐까번쩍한 얘들이 다시 부르면 가요차트 1위도 거뜬하잖아? 아자 힘내자~ 대중문화!

결론은 전체적으로 별로였다는거야. 흥미롭지 못했어. 오히려 계몽적이였다고나 할까? 음, 그래 그게 맞는것 같아. 어린이들은 아니고 이제 어린이의 틀을 막 벗은, 청소년이 좋겠군. 청소년들에게 들려줄만한 계몽동화라고 하면 딱 좋을것 같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사람을 죽이다.`이건 딱 이지.정말 요즘 말로 `맞습니다, 맞고요`야. 계몽적 그 자체야. 유령이 등장한다는 그거 하나만으로 판타지에 분류되는건가? 음. 그건 내가 분류 안해서 모르지만 판타지 보다는 청소년, 아니 이건 `어린이를 위한 계몽동화- 사람을 죽이면 안돼요~`라고 라벨을 붙여주면 딱 좋을 것 같더라. 난 누가 이 책에 물어보면 이렇게 길게 설명은 못해니까 딱 한마디로 잘라 말해줄거야. `재미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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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 인간과 과학 1
앤드류 뉴버그.유진 다킬리.빈스 라우즈 지음, 이충호 옮김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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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평상시 나의 관념과 일치하는 듯해서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자, 다른 여러분들은 이 책을 왜 접하셨는지? 그리고 읽고나서의 그 감정기복은 어떠하셨는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어, 거기 모니터밖에 그냥 가려고 하는 분,잠깐 와서 마저 보고 가시지요.고등학교때 생물공부는 열심히 하셨나요? 음, 이과였다면 할수없이라도 좀 하셨을테고, 문과라도 기본 생물은 배우셨죠? 아,그런데 어떻하죠? 전 문과였고 배운 생물조차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군요. 나이도 별로 안됐는데 벌써 이래가지고 원, 더군다나 이 책은 앞에서 `뇌`에 구조와 기능에 대해 아주 간략히 설명해주죠. 아~ 이거 미치는줄 알았어요. 그 간략이란게 배워 제대로 익히고 있는사람에게는 다시한번 상기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영양제가 될터지만, 이거 배운거 다 까먹고 빈털털이인 나같은 사람에게는 독약이더군요. 무슨 독약요? 아 있잖아요, 잠!

뭐, 그래도 다행히 앞 몇장만 뇌에대한 구조와 기능, 기타 여러 신경반응들에 대한거고 그 다음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가던군요.전 여기서 부터 정신차리고 봤죠. 덕분에 두정엽이니, 후정엽이니 하면 헷갈리기도 했죠. 자~ 신이 뭘까요? 전 개인적으로 불교라 칭하고 있지만 솔직히 저의 머리는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어요. 왜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가? 과학으로 증명안되는 우주를 그냥 멋대로 신이 만들었다고? 결국은 우리 뇌세포가 살아있어서 생각하는거 아닌가? 그 뇌가 죽으면 그런 신적 존재 의미도 살아지는거 아닌가? 이런 기타 잡다한 생각에, 저로써는 한 종교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놈의 `이성`이란게 훼방을 놓더군요.

전 이런 기본입장에서 이 책을 잡았어요. 물론 읽기전에 이 책이 분명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해 주는 책일 것이라 생각했어요.어, 근데 그게 아니더군요. 기본적인 입장은 과학자의 입장인 만큼 무신론적 입장이였는데 뒤로 가면서 우리의 `실존체제`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있을것이라는 막연한 결과기대로 치닫더군요. 이것이 무얼의미 할까요?솔직히 이야기 하죠, 전 여기서 느끼거나 크게 얻은것이 없습니다. 책의 서두에 `필자가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지 독자분들은 모르실수도 있습니다.`하더군요. 제가 바로 그 독자분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무신론적 허무의 이야기였는지, 막연한 종교의 과학적 뒷받침이란 희망의 책이였는지.. 읽으실 여러분의 판단에 맡깁니다. 아, 다만 좀 지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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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개의 거짓말
라픽 샤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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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픽 샤미?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지은이다. 보통 지은이를 보고 책을 읽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나에게는 그 생소한 지은이의 책을 덜렁 사서 읽는 다는 거은 일종의 모험이였다. 과감히 모험의 길로 접어들기로 한 나. 그 길의 화려함에 먼저 반했고(책의 표지 디자인) 그 길의 한없음에 겁도 덜컥 났다.(책 두께) 어쨌든 이건 내가 할 이야기와는 다른 얘기다.

제목을 `천일가화`라고 붙여보았다. 물론 천일야화에서 따온것이고 100개의 `거짓말`이라는데서 `거짓 가`를 붙여 보았다. 당연히 그 1001개의 거짓말이라는데서만 `천일가화`란 간판이 내달린것은 아니다. 이 시대 누구라도 알법한 그 유명한 `천일야화`. 그 이야기의 길지 않으면서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못차리게 하는 흥미진진함은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 만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담은 주지 않으면서 흥미를 주는 것으로 해석하면 좋겠다. 천일 가화라 붙인것도 이 천일야화의 전처와 별반 다를게 없다는 생각에 감히 붙여 본것이다.

현재 나오는 출판물들은 지적 버라이어티(?) 사회의 무대에 맞추기 위해 그만큼 복잡하고 읽는 사람의 두뇌를 `팽팽` 돌게끔 만든다. 그런 현대의 상황속에서 단순하고 부담없는 글은 또다른 나름의 존재의의를 가진다. 복잡, 혼란, 자극에서 단순, 평온함으로의 회귀. 현재 심심치 않게 일곤하는 복고열풍, 자연으로 돌아가고자하는 현대인의 심리에 걸맞음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딱딱한 네모상자속의 텍스만으로 즐기는 현대인들이 그 때 그 시절 할머니의 옛이야기가 그립듯.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시대 진정으로 보존하고 가꾸어나가야할 문학의 한 분야가 바로 이 책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책을 덮으며 진짜 오랜만에 부담없이 머리를 즐기게 한, 뇌의 휴식시간을 준듯한 느낌을 받았다. 뭔지 모를 과거로의 향수를 더불어 일으키며 말이다. 하지만 아쉬운것은 바로 그저 이야기로만 끝맺을 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비록 부담없이 읽을수 있음의 중요함을 역설했지만 그래도 책장을 막상 덮었을때 가슴에는 어떤 의미가 남기를 바라는 것은 어쩔수 없나보다. 옛이야기를 여럿들은것 같은 향수의 감정만을 일으키고 훌쩍 끝나버린 그 모험의 길. 하지만 그 길은 뜻 깊었다. 라픽샤미의 그 많은 이야기 꾸러미 중 하나를 풀어 보았다는 그 기쁨. 그리고 오랜만에 과거로의 향수를 부드럽게 일게 해준데에 대한 감사의 마음.오랜만에 부담없이 책을 즐기고가 하는 분들께 적극 권장합니다. 외적으로는 두터워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결코 두껍지 않은 이 `1001개의 거짓말`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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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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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다치바나는 여기서 교양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전반 상식만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인간유산을 상속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 인간사회지식전반의 포괄적 안목을 기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명명했다. 그런데 그런 교양의 정의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면 뭐하나. 장담컨데 도쿄대생, 일본의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인간지식전반의 포괄적 이해는 커녕 인간이라면 갖추어야할 기본적 상식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의 학생이 그렇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글을 적고 있는 나까지도 포함해서..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교육 6년, 중등교육 3년, 고등교육3년 그리고 대학. 10년을 넘게 교육받아오며 결국 내 머리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없다`였다. 자질구레한 잡다한 지식은 있을 망정 정녕 이 시대 대학생이라 할 만큼의 체계적인 지식은 하나도 갖추어져 있는 것이 없었다. 다치바나는 교양이란 일반적 상식이 아닌 인간사회에 대한 포괄적 이해로부터 시작한다고 하는데, 일반적 상식조차 체계적으로 갖추지 못한 나로써 어찌 부끄럽지 않았겠는가.

책의 부류를 보고있자면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종(?)이 있다. 바로 흔히 말하는 `자기 계발서`이다. 게으르고 나태한 자기를 일깨워줄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매이다 보니 결국은 `이대로 하시오! 그럼 성공하오리다!` 라고 장담하는 자기 계발서에 손길이 가길 마련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내가 읽어왔던 자기 계발서의 감흥은 대체로 원론적이었다는 것이다. 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였다. 예를 들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가 지극히 원론적인 자기계발서의 표본이였다. 구체적 사례없이 그냥 누구나 중학수준이상의 글짓기 능력만 있으면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는, 이른바 충격없는 원론적 자기계발서였다. 이런 책들이 자기 계발서라고 불려지려면 읽는 독자들에게 자기를 계발 할 수 있는 `계기의 충격`을 가하는 것은 기본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를 진정한 이 시대 학도들의 자기 계발서로 적극 권장해 주고 싶다. `무언가를 배워야지 배워야지.`하고 생각은 있으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나태한 나에게 크나큰 충격을 가해준 이 책. 교육비판이라는 책의 부류를 떠나 `이 시대 학도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란 새로운 부류의 제목을 지어주고 싶다. 이 책을 읽고도 아무런 충격이 없다면 이미 대학생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이 책을 읽고도 동감만하고 행동이 없다면 더이상 학도의 길을 걸을 가치고 없다고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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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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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삶의 곧 일부이다.`,`산다는 것 그것 자체가 곧 바로 죽음이다.` 죽음에 관한 이런저런 유명한 표현들이 많다. 죽음을 찬미하는 시적표현도 있거니와 죽음 그 자체로 모든것은 소멸이다라는 지극히 리얼리즘적인 표현도 무수하다. 허나 누가 정녕 알겠는가? 결국 죽음이란 죽어봐야 아는데 안타깝게도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이 책의 시작은 한 중년부부의 죽음으로써 시작한다. 허나 흔히 생각하는 `죽음=끝`의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원제를 보면 `Being dead`다. 쉽게 말해 끝나지 않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그리고 죽음이 아닌 죽음 그리고가 낫지 않았을까?) 소설의 시작부터가 죽음이라.그리고 그것으로 소설이 시작한다.어째 좀 으스스하다.

중년부부의 죽음은 모든 죽음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한 방 펀치를 먹인다. 터져나온 뇌수, 인간의 모든 구멍에서 나오는 참기힘든 냄새의 노폐물. 그리고 그 노폐물을 양식삼아 살아가는 환경의 파수꾼들. 이런 작가의 아주 리얼한 죽음에 대한 직시는 죽음을 찬양하는 `기뻐하십시요. 드디어 괴로운 꿈에서 깨어나시게 되었습니다.` 라는 표현들에 대한 반어적 블랙유머였다.

그럼 과연 이런 죽음에 대한 직시적 관찰표현은 무엇인가?이 책이 죽음 그 자체만으로 내용을 꾸려 나갔다면 이 책은 인생회의적인 분위기에 더불어 그저그런 포스트모더니즘에 국한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희망은 없고 종교도 필요없다. 죽음은 그저 추한 화학적 분해일뿐이다.` 이런 암흑적 분위기에 휩싸이며 책을 덮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죽음은 희망이 있다. 마지막 중년부부의 죽은 모습에서 우리는 미약하나마, 허무하나마 인간생활에서의 작은 희망을 느낄 수 있다.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도 자기 아내의 발목이나마 잡을려고 하는 한 인간의 마지막 몸부림은, 비록 인생말로는 무상하더라도 그 무상한 인생속에서는 집착할만한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것을 보여준다.

죽음은 그러한 것이라면 과연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을 얻어야 할까? 이 책에서 작가는 `흔들기`라는 것으로 산사람의 죽은사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다.죽음은 추하다.하지만 산사람은 그 추함을 이 `흔들기`라는 의식을 통해 승화시켜 준다.그 흔들기의 뿌리가 죽은이가 천국으로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데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 갈망과 함께 죽은이에 대해 추억을 되살림으로써 그의 죽음을 암흑의 구렁텅이가 아닌 어스름 잿빛 애틋함으로 포장한다.

이 흔들기 의식의 완성은 책 중 `실비아`의 몫이였다.언제나 부모를 거부하고 연락조차 거의 두절하고 있던 실비아는, 죽음이란 매개체로 부모와의 단절의 끈을 잇게 된다. `죽음을 아직 인지 하지 못한 상태 → 불안한 심리 상태 → 부모의 죽음 인지 → 잠시간의 공황기 → 부모의 애상`이란 실비아의 행동구조는 `단절상태 → 접촉의 시도 → 접촉대상의 상실 → 해방감 → 흔들기 의식`으로의 구조로 연결된다. 이 모든것은 부모의 죽음으로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고 있던 실비아에게 자신의 젖니가 담긴 병을 발견함으로써 흔들기 의식의 완성으로 귀결된다. 실비아가 자신의 젖니가 든 유리병을 발견하고 취하게 되는 흔들기 의식의 태도는 우리에게 그저그런 감상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인간존재로써의 삶의 구심점을 비쳐주고 있다는데에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죽음`은 어둡고 침울,우울하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이 책의 작가가 흔들기의식을 그저 죽은 이들만 추모하자는 뜻에서 내세운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삶은 곧 죽음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태어나면서 곧 예정된 죽음의 행로.우리는 그 고독한 행로를 걸어야 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흔들기 의식`은 그저 죽은 사람의 추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써 곧 죽음으로 이르는 자기자신의 내면의식에 흔들기를 행함으로써 보다 긍적적이고 희망적인 삶, 곧 죽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우리가 실비아의 마지막 태도에서 죽음의 안타까움보다는 자기자신의 내면승격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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