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 - 인류 최대의 적
앤드루 스필먼 외 지음, 이동규 옮김 / 해바라기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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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 참으로 귀찮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 안그래도 더워서 있는 옷 없는 옷 다벗고 그것도 모자라 땀까지 줄줄 벗고 있는 그 때, 눈치없이 다가오는 그대여, 모기. 강제헌혈까지 시켜놓고 `쵸코파이`는 커녕 병원균만 잔뜩 주고 간다. 성인군자 인내심도 시험해 볼 만하겠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모기에 대해 `짜증` 이상의 생각은 지녀보지를 못했다. 그저 왱왱 거리며 날아가는 모기를 손으로 찰싹, 약으로 칙 죽이며 의미심장한 웃음만을 지었을뿐. 누가 이런 하찮고 작은 곤충에게 이런 정교한 구조와 정밀한 생활력을 기대했을까? 나 역시 손바닥 손에 찐뜩 납작해진 짜증나는 생물 이상으로 의미를 줘 본적이 없었다. 가끔씩 들리는 뇌염 소식에 조심하자는 생각정도까지만 했을 뿐.

엔드루 스필먼의 <모기>를 보고 있자면 입이 쩍 하니 벌어진다. 모기하나 때문에 지역경제가 저렇게 타격을 받고 모기하나를 퇴치하고자 저런 수고들을 벌였을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세계 최대 강국이라며 할 소리 못 할 소리 다 하는 미국도 이 조그마한 생물체에는 두손 두발을 들었단다. 과연 개미가 코끼리를 이기기도 하는가 보다.

<모기>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늘상 보아오던 집모기에서부터 다소 생소한 여러 모기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과 생태를 소개 해 놓았다. 그와 더불어 그 모기들이 옮기는 질병과 그 폐해들, 그 속에서 아둥거리는 인간의 모습까지 수록되어있다. 특히, 모기로 인한 질병의 원인을 모르는 속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행로들은 흥미롭기까지 했다. 의학소설류속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흥미의 혼합이라고 할까?

작은 고추가 맵더랬다. 이 작은 모기, 맵다 못해 쓰기까지 한 독종이였다. 그 동안 그저 나의 포획도구 `손`에 대한 희생양으로만 여기던 나의 흐리던 눈에 <모기>는 썩 괜찮은 안약과도 같았다. 다만 정녕 모기자체보다는 오히려 부수적 사건들에 초점이 맞춰진 듯한 점은 이 안약의 안타까운 부작용이었다.

우리, 이제는 당하더라도 알고 당하자. 아니 이제는 아니까 당하기 전에 예방을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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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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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Tv드라마를 보곤 한다. 사랑하는 두 남녀, 너 없으면 나 못 살아. 나 없으면 너 못 살아.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좋아해 그 둘은 결혼을 맘 먹는데, 하지만 왠걸? 알고보니 두 사람은 이복남매지간이란다. 풋. 이 대목에서 나는 그냥 웃는다. 복선없는 우연의 오남용.`3류 같으니`

허허, 그런데 어쩐 일인가? <달의 궁전>, 스토리만 놓고 보면 3류 표창장감이다. 전혀 연고가 없던 세사람이 어떤 일로 알게 되었는데 사실은 그들 모두가 가족지간인 3대라? 생각해보면 언젠가 Tv에서도 본 듯한 황당무계한 설정이다. 그 동안의 폴 오스터의 작품이 사건연계의 우연성으로 진행해 왔다면 이번에는 지나친 배경의 우연 설정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토리의 진행이 아닌 그 <달의 궁전>이라는 제목에서 의미가 돋아났다.

`달`, 한 때 인간은 달에게 참으로 순수했다. 보름달이면 소원을 빌고 달에서 방아 찧던 토끼가 그 소원을 들어주리라 굳게 믿던 마음. `엄마, 달보고 소원빌면 토끼가 들어줘?` `물론, 그렇고 말고.` 하지만 역시 인간은 불평의 화신. 왜이리 소원을 안들어 주냐며 기어이 따지러 갔다. 만나기만 하면 보자고 벼르고 올라 갔던 인간, 하지만 방아 찧던 토끼는 짐싸들고 이사갔는지 털끝하나 뵈지 않는다. 허탈해진 인간. 이왕온김에 `여긴 우리 정복지`라며 `탕`꽂은 깃발. 그 깃발과 함께 인간의 마지막 순수성도 `탕` 사라졌다.

<달의 궁전>의 시대배경은 인간 마음속에서 마지막 그 순수적 희망이 날아가버린 때로 시작한다. `드디어 인간이 달에 상륙했습니다. 세기이래 인간의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 대단도 하다. 마지막 희망의 꿈을 싹뚝! 잘도 잘랐으니. 토끼도, 달님도 없다는 걸 알고 멍한 그 때, 주인공 포그도 방황한다. 끝없는 방황의 구렁텅이. 이제는 희망도 없다.

<달의 궁전>의 묘미는 `방황`, 바로 거기에 있다. 지나친 우연의 설정으로 흘러가는 스토리이 꽁무니만 뒤쫓을것이 아니라 가끔 멈춰 이렇게 주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 필요에 의의가 있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인간들. 돌아와서 외양간이라도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극복처는 이제 없는 걸까?

물론 폴 오스터는 희망을 제시한다. `달의 궁전`에서 보았던 점괘.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 비록 주인공 포그가 달의 정복을 통한 상실의 때와 같이 방황했지만 결국 그 방황의 끝맺음은 달로서 이루어 졌다.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외치며. 결자해지라 했던가? 달로서 시작된 방황, 달로서 끝장을 본 것이었다.

단편적이고 개인적 편협한 시각에서 달의 의미만 부각했다. 하지만 솔직히 스토리 흐름은 별로였다. 포그가 자기의 아버지의 소설을 보며 뭔가 불완전 하다고 했던 말. 그 소설 속의 소설이 가지는 불완전함과 작품전반스토리의 완성도는 일치한다. 그저 기억나는건 작품전반에 아스라이 깔려있는듯한 달빛의 몽롱함. 더해, 버려졌던 `토끼의 절구`에 방아질을 할 몫은 이제 인간자신의 몫으로 낙착되었다는 생각 뿐. 더 이상 머리에 영양분을 공급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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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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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어느날 갑자기 제한된 공간, 제한된 자유속에서 구속당하며 살아야 되는 순간이 닥친다면 어떨까? `잔다르크`처럼 `내 한 목숨 바쳐` 그 상황을 때려 부술까? 아니면 `나 돌아갈래` 외치며 철로 위에서 자살이라도 할까? `설레 설레` 역시 어느쪽도 아니다. 시대가 아니꼬와도 나는 묵묵히 참으며 눌려 지낼게다. 아니면 나 자신도 아니꼽게 만들던지.

여기 나처럼 평범한 노선의 철마를 타고있는 사람이 있다. 오브프레드. 그녀는 자기의 모든 자유를 박탈 당한채, 심지어 자기의 이름마저 빼앗긴채, 이른바 `씨받이` 운명을 선고 받은 길리아드 제국의 평범한 여자다. 핵전쟁후 방사능 잔치에 휩쓸린 인간들. 그 잔치가 너무 흥에 겨운 나머지 팔, 다리, 눈 한짝씩 떼놓고 태어나는 풍류아(兒)들이 아닌 정상아들을 위해 씨받이가 필요하다나?

상황을 봐서는 `평범한`이란 단어가 낄 자리가 아닌듯 싶다. 철저한 계급구조하며 되돌아온 그, `남녀칠세 부동석`. 모든 언행들은 공자님이 봐도 삐질, 땀 한방울. 내가 들먹인 평범함이란 것은 상황이 상전벽해라도 그 속에서 묵묵히 순종하는 것을 가르킨다. 물론, 상황에 묵묵히 적응하는 것을 평범함으로 본다면 말이다.

누가 그랬더라? 아, 정신분석학자들이 그랬을 게다. `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미칠 가능성이 있다.` 맞는 말이다. 가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에 대해 나도 깜짝 놀라곤 하니까. `어머~ 나 미쳤나봐~.` 오브프레드도 인간인 이상 마찬가지. 아, 물론 그녀가 미쳤다거나 미칠것이라는건 아니다.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은 보편적 평범함을 벗어 날 수 있는, 일탈의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게 외적으로 표출되었을때에 우리는 의심의 눈길을 힐끗힐끗 주지만 이 시각 현재에도 모든 사람의 내부에는 일탈의 화산이 터질려고 부글거리고 있다. 일탈을 꿈꾸는 개적 자아들. 꿈은 이루어 진다나?

<시녀 이야기>는 그런 일탈과 존속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사람의 심리묘사가 참으로 탁월하다. 마음을 졸이는 스릴러 영화를 볼때의 긴장감을 기억하는가? 그런 긴장감이 여기에도 전혀 독하지 않게 스물스물 배여있다. 절묘히 녹아든 그 긴장감 속에서 독자는 자기자신과 긴장감의 조화를 느낄 것이다. 아, 그렇다고 `내 다리내놔~`하는 귀신 공포물은 아니니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후다닥~` 영화의 주인공이 탈옥을 시도하는 순간, 그 곳을 마침 걸어오는 교도관. `터벅터벅`. 동시에 호응하는 나의 몸. 심장은 콩닥콩닥 땀은 삐질삐질 `어떡해~ 못 보겠어.` 주거법을 무시하고 밤에 자기방을 슬그머니 나와 돌아다니는 오브프레드. 주인과 몰래 주거도시를 빠져나오는 오브프레드. 다시한번 콩닥콩닥, 삐질삐질. 동시에 땀에 절은 페이지들, 쭈글쭈글.

침소봉대, 과장? 솔직히 소설에서의 긴장감을 이토록 맛있게 접해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였다. 더군다나 환상문학 SF 식당에서 이런 맛난 음식을 준다는데에서는 당혹감마저 일게 했던 것이 나의 경험이요, 상황이었다. 그러니 `과장`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로 나의 경험을 일축해버린다면 섭섭할터다.

<시녀 이야기>, 페미니즘의 대가 `마가렛 애트우드`의 작품이란다. 하지만 나로서는 페미니즘을 느낄만한 냄새는 맡지 못했다. 나는 다만 그런 사상을 잠시 벗어나 오랜만에 집안에 걸터앉아 괜찮은 간식하나 즐겼다는 느낌 뿐이었다. 딱 거기까지였고 그것으로 난 큰 만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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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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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서 문득 어떤 시 한 구절로 시작하고 싶어진다. `왜 사냐면 웃지요.` 다같이 웃어 볼까? 풋.

`죽음. 죽는다. 세상과의 끝.` 죽음이란 단어가 가지는 그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그림자는 우리 얼굴을 짙게 드리우기 충분하다. 아니 넘치고 넘쳐서 주워 담기도 힘들다. 오죽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어가고 있다.`란 히스테릭한 말 조차 나왔으랴. 결국은 누구나 죽게된다는, 그리고 그 죽음이 한 번 밖에 없다는데에서 우리의 공포심은 극에 달하게 된다. 지금을 저장했다 죽어보고 불러오기가 되면 오죽 좋으랴만...

그 죽는다는 공포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역설적이게도 자기는 이제 영원히 죽지 않을거라고 믿게된다. 아니 믿게끔 자기 세뇌를 시킨다. 결국 자기도 죽을 거란걸 알고는 있지만 세뇌는 멈추지 않는다. `난 안죽어. 난 안죽어. 내가 죽으면 세상이 끝날걸?` 물론 그 세뇌는 하루가 갈수록 힘이 줄어든다. 한숨은 늘어난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내가 죽어도 세상은 팽글팽글 잘만 돌아간다.

여기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만하는 모리 교수가 있다. 결국은 모두가 죽을거라지만 죽음의 도착일을 선고 받았다는 것은 `모르는게 약이다.`란 명언과 기가막힌 조화를 이룬다. `당신은 2112년 3월 9일 3시 20분에 죽을 것이오. 추신, 저승사자 보냄.` 이런 `저승사자 팬레터` 받으면 제 정신지키기 힘들다.

하지만 모리교수는 제정신을 지킨건 물론이거니와 그 `팬레터`를 달게 받아들이는 심히 믿기 어려운 초월적 의지력을 보여준다. 얼마남지 않은 삶(항상 우리는 인생이 짧다고 불평하긴 하지만)을 비참하게 보내기 보다 그 나머지의 희소성을 더욱 뜻 깊게 보내려는 노력; 그동안 못 만나보았던 친구를 부르고, 토론회를 주최하고 음악을 즐기고.`하루24시간`이 땀 줄줄 흘리며 두손 두발 다 번쩍 들어버린다. 모리의 대단함은 전지전능하다는 `신`을 탄생시킨 이 죽음 앞에서도 너무나 태연히 자기 삶을 자근자근 꾸려나간다는데에 있는 것이다. 나는 과연 가능할까? 대답은 `of course not.` 그래서 대단하다고 하지 않는가?

이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모리와 그의 제자가 매주 화요일에 만나 그 들이 나누었던 대화를 담고 있다. 물론 모리는 시한부 삶을 언도받은 상태다. 처음 접하며, 나는 어딘가 아포리즘적이고 계몽적일것 같은 냄새에 코를 쥐어 막았지만 모리가 실존인물이라는데에서 가식적이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얼큰한 맛을 보았다.

청국장이 냄새는 독해도 그 맛은 특출하듯, 계몽적 냄새는 이 얼큰함의 맛을 당하지 못했다. 물론 청국장 냄새에 질겁부터 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만.하지만 다른 것은 제쳐두더라도, 구성, 내용, 흥미 다 제쳐두더라도 우리는 `모리`란 `얼큰한 국`에서 건져먹을 `건더기`가 무수할 것이라는 사실만은 부정 할 수 없을 게다.

죽음. 뵈기 싫다고 너무 멀리하고 혐오만 할 것은 아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 했다.비록 죽음과 맞닥드렸을때 이기지 못해도 패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를 알고 죽음을 안다면 백전백승은 못해도 백전백화(百戰百和)는 가능한 것이다.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죽음만 보면 `36계 줄행랑`부터 쳐버리는 지금의 우리들. 36계도 적을 알고 써먹어야 `계`란 명찰이 붙는것이다.

프로농구팀 모비스의 전 코치 `박승일`도 루게릭 병을 앓고 있단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있다한다. 더이상 모르는게 약이아니다. 죽음과의 조우. 이제는 도망갈 때가 아닌 화해할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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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브루스 질리 지음, 최준명 감역, 형선호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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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가려있던 그 인물 `장쩌민`. 그런데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베일에 싸여 있지도 않다. 중국은 그동안 꾸준한 개방화의 길을 걸어왔고, 그 결과 지난 날의 암흑 속 동굴에서 벗어나 드디어 `빛 본` 중국이 되었다. 그 중국의 손을 잡고 랄랄라 걸어나온 장쩌민 역시 태양아래 빛 보며 다닌다. 그 동안 나의 눈에만 베일이 드리워졌던 것을 뿐. 이제 슬슬 그 베일의 매듭을 풀어보자. 단, 개인적으로 매듭을 참으로 못 푼다.

장쩌민, 텐안민 사건이후 임시적 지도자에 불과할 것이라 여겨지며 불쑥 뛰쳐 나온 그. 자~ 주목하시라. 하지만 그런 주위의 우려어린 시선 속에서도 불구하고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까지 차지하며 명색이 아시아의 호랑이로 도약한, 더불어 아시아 최강 지도자의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던 그. 비록 현재는 서기 자리에서 물러 났지만 과거 그는 명실상부한 엘리트 국보급 지도자였다. 아, 물론 이제까지는 내 생각이 아닌 그 시대 사실과 주위 평가였다. 그럼 나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다들 왼쪽부터 매듭을 풀고 있어도 나는 내 생각되로 풀련다. 그래서 가끔 더 꼬이곤 하지만.

장쩌민은 흔히 유명한 지도자들이 지니는 `카리스마적 리더쉽`이 없다. 모든 일을 약간은 두리뭉실 다듬어 처리하는 모습. 요즘 영웅이라 불리우는 자들의 `불타는 카리스마`에 염증도 났던 차, 일방편도가 아닌 수렴형 자세는 심히 본받을, 칭찬, 존경할 바 이지만 장쩌민에게서는 오히려 그런면이 우유부단함으로 비쳤다. 장쩌민 역시 수렴형 정치 방식을 채택한다고 하나 사실 그가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비추어 줄만한 결단은 찾을 수 없었다. 보물찾기를 못하는 나 좀 골탕먹이려고 숨겨놓은지는 몰라도 결코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자기 결정이 아닌 후원자, 지원자의 떠밀림 정치였다. 수렴형이 아닌 수동형 정치였다. 단 몇가지 능동적인 면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누구에게 빌붙어야 밀려나지 않고 살아남겠는가하는 결정.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풍향계`였겠는가? 제 아무리 시대상황이라도 난 그런 풍항계는 질색이다. 우리나라에서 `철새` 좋아하는 분 별로 없는 것과 일맥상통, 대동소이.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 `본받을 위인자`라고 생각치 않는다. 자기의 앞길을 위한 기회주의적이고 이해타산적인 모습에서 나는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를 본 것이 아닌 속물에 찌든 한 사람의 범인을 보았다. 나라 배경이 그런것이라 죽어라, 죽어라 외쳐도 외쳐도 못들은 체 하련다. 싫다. 물론 비난만이 아닌 본받을 만한 점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본받을 점은 가지고 있다. 그런 면이 많고 커야만이 우리는 그를 위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실 평전이야 각 개인이 읽기 나름이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고 장쩌민에게서 진정 본받을 만한것을 캐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처럼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의 이런 면을 고려해 장쩌민에 대한 이 투덜거림은 <장쩌민>을 읽은 개인적 불평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책 <장쩌민>은 장쩌민의 정치인생을 역동적이고 과감하게 그렸다는 평전이였지만 솔직히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가끔씩 눈에 띄는 연결의 부자연스럼움, 번역문제는 나의 매듭풀기에 상당한 애로사항이였다. 더불어 짱쩌민 이전시대의 중국상황이나 장쩌민 시대의 큰 사건에 대해 사전지식이 없다면 조금의 고난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나는 매듭을 반쯤 풀었다. 사실 이렇게 투덜거렸어도 한 권의 책만으로 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기만이다. 이제 나는 나머지 반토막의 매듭을 위해 새로운 여정을 떠날 것이다. 찜찜하던 매듭을 다 풀지 못했다고 이 <장쩌민>을 비난할 것은 아닐게다. 사람이란 매듭이 쉬워보이지만 실상은 어렵다. 이 책으로 조금의 매듭이라도 풀어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 매듭이 조금이라도 풀렸다는 사실에 기뻐하자. 하지만 만족하지는 말자. 이제 나는 만족치 못한 마음을 안고 바쁜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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