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가슴으로 소통하라 - 변화와 소통, 포용으로 초일류를 이끈 이철우의 굼튼튼 경영
이철우 지음 / 더난출판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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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간 유통분야에서 한우물을 판 저자는 업계에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유통전문가로 정평이 난 인물로서 현재 롯데백화점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직중이며, 한국백화점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그의 주요 이력을 살짝 살펴 보자.

대학원 졸업후 상공회의소 산하 한국마케팅개발센터(현, 한국마케팅연구원)의 창립 멤버로 입사했다가, 1973년 봄 삼성그룹 회장실 '마케팅팀' 계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1976년 7월 롯데의 쇼핑센터사업부에 스카우트된 이래 줄곳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장, 롯데리아 대표이사, 롯데마트 대표이사 등을 거친 전형적인 롯데 유통맨이다.

 

롯데마트 대표로 부임하여 3.6.5 프로세스를 도입한다. 3개월에 걸쳐 실태를 조사하고, 6개월 동안 직원들을 새롭게 변화 시킨다면 5년 안에 반드시 롯데마트는 업계 1위와 견줄 수 있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경영 기법이다. 그는 공감대 형성을 위해 6개월이란 시간을 투자했다. 공감대 형성을 위한 해병대 입소 훈련은 그의 솔선수범 정신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가 실천하는 리더십을 살펴보자.

 

첫째, '현장'에서 모든 것을 찾는다.

둘째,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고, 함께 비전을 이루고자 노력한다.

셋째, '솔선수범'한다.

네째, '능동적으로 행동' 하고자 한다.

다섯째, '뚜렷한 목표와 책임의식'을 갖고자 한다.

 

그는 98년 롯데리아 대표로 취임하여 대박을 터뜨린다. 신구, 양미라, 김국진, 남희석 등을 등장시킨 코믹 CF, " 니들이 게 맛을 알아! " 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는 IMF 위기로 국내 경제가 매우 어려웠고, 맥도날드 같은 해외 유명업체들이 국내에 진출했을 때였다. 소위 태극기 마케팅을 구사했다. 롯데리아가 토종 햄버거업체임을 강조하면서 불고기버거, 김치버거,게살버그, 라이스버그 등 신제품을 잇달아 출시하며 업계 1위자리를 지켰다. 롯데리아의 사업 성격이 식품 제조이면서 식자재 공급임을 파악하고 대리점 점주들과의 미팅도 부지런히 하면서 윈 - 윈 전략을 펼쳤기에 오히려 신규 점포도 증가했다.

 

한편, 그의 태극기 사랑은 유별나다. 롯데리아 재직시엔 매장내에 사용하는 컵과 포장재에 태극기 도안을 넣었고, 매장 고객에게 미니 태극기를 주기도 했다. 또한 롯데마트 재직시는 모든 점포에 대형 태극기를 게양토록할 정도였다. 이는 그의 국가관에 기인한 것인데, 롯데백화점 직원들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주관하는 역사시험을 치르는 것이 의무사항이며 시험 결과는 승진 인사시 필수적으로 반영하고 있단다.

 

귤화위지(橘化爲枳)란 고사가 있다. 중국 회수 남쪽지방의 귤을 북쪽으로 옮기면 탱자가 된다는 것인데, 환경에 따라 사물이나 인간의 성질이 변함을 빗댄 말이다. 롯데백화점이 늦어도 2012년 세계 10대 백화점 반열에 오를 것이며, 따라서 10년 안에 해외 점포수가 국내를 추월할 것이라며 그는 글로벌 비즈니스 전개를 위해 언어실력, 문화실력, 그리고 열정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CEO들은 노력을 하되 더욱 현명하게 노력하는 사람, 똑같이 물을 긷더라도 꼭 필요한 곳에다 물을 길어 나를 줄 아는 사람을 찾는다면서 배움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배움의 의미는 넓고 깊다. 배운다는 것은 겸손하라는 것이며 소통하는 것이다. 말과 행동, 옷차림의 기본이 첫 째로 중요하고, 다음으로 자신만의 특성을 표출하는 것이 나의 가치를 포장하는 실력임을 배우게 되었다.

 

" 매장(賣場)안에만 머무르지 마라. 매장안에 몸과 마음을 매장(埋藏)하지 마라." (115쪽)

"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진정으로 건강한 서비스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143쪽)

 

잠바 차림의 매장 암행, 롯데리아 출시 상품의 시식 등 신격호 회장과의 일화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시 현금 확보에 주력하라고 지시한 신동빈 부회장과의 일화도 중간 중간 재미를 더해 주었다. 또한, 2008년 미쓰코시 백화점을 경영 통합하면서 일본 백화점업계 1 위로 등극한 이세탄 백화점의 "오카이바", 고객중심 경영 이야기는 이세탄의 성공스토리, [세상에 없는 트렌드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책을 한번 더 읽게 만들었다. 유통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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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 이시카와 다쿠지 지음, 이영미 옮김, NHK '프로페셔널-프로의 방식'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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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NHK의 유명 프로그램 [프로페셔널 - 프로의 방식]에 출연한 기무라 아키노리씨의 무농약 사과 재배 성공 스토리는 감동 그 자체였다. 그는 올해 나이 60세, 일본의 사과 생산지로 유명한 아오모리현의 농부이다. 농약을 전혀 사용치 않은 "기적의 사과" 때문에 그는 일본에서 유명 스타 못지 않는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왜냐하면, 무농약으로 사과를 재배한다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먹고 있는 사과는 개량종이다. 본디 사과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 산맥의 산기슰 일대에서 자라는 야생종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그 크기가 작아 크랩애플(꽃사과) 로 불리며 신맛과 떫은 맛이 강해 요리나 술재료로 사용되어 왔단다. 멘델의 유전 법칙이 알려진 후 품종 개량이 가속화되었고, 북아메리카 신대륙에서 개량된 종은 구대륙의 것보다 훨씬 크고 단맛이 강한 과일이다.

 

"不狂不及"이란 말이 있다. 미치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한다는 뚯인데, 기무라의 삶이 바로 무농약 사과 재배에 미쳐 있었다. 22 세에 결혼한 그는 아내 미치코가 농약을 살포하면 며칠씩 앓아 눕는 과민성 체질이어서 농약 살포를 줄일 방법을 찾고자 마을 서점을 돌다가 책표지에 "아무 것도 안하는, 농약도 비료도 전혀 안 쓰는 농업" 이라고 적힌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저서 "자연농법"이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이 책이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농작물이 자연의 산물이라기 보다 일종의 석유화학 제품이 되었다. 지금껏 사과 재배를 위해 봄부터 수확 전까지 10여 차례의 농약을 살포해 왔다. 책의 내용엔 귤 재배에 관한 상세한 기술뿐이었지만, 그는 후쿠오카의 자연농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독학을 시작했다. 사과에 대한 책은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그는 독학을 토대로 과수원의 농약 살포 횟수를 변경했다. 전엔 13회 정도 뿌렸지만, 과수원 4곳 중 처음엔 1곳만 무농약, 다음 해엔 2곳을 무농약, 그 다음 해엔 4곳 모두를 무농약으로 재배해 나갔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사과 수확이 전혀 없었다. 농약을 살포하지 않자 반점낙엽병이 번져 사과 나뭇잎이 누르게 변하면서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대개의 식물들은 잎의 엽록체가 광합성을 함으로써 꽃과 열매가 맺힌다. 따라서, 꽃이 피지 않으니 당연히 사과가 열릴리가 없다.

 

그의 집념은 대단했다. 잠을 자다가도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밭으로 나갈 태세였다. 안해 본 시도가 없었다. 밀가루로 풀을 쑤어 뿌리기도 하고, 술을 묽게 타서 뿌리기도 하고, 고추 냉이를 뿌리기도 하며, 심지어는 달걀 흰자를 뿌리기도 했다. 완전 코메디 시츄에이션이다. 이러는 가운데 사과 나무는 점점 상태가 나빠졌고 과수원은 벌레들의 천국이 되고 말았다.

 

5년 째 접어 들었다. 사과밭은 계속 악화되고, 주위에선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친구들도 그만 두라는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자 외면하고, 심지어 본가에서도 담을 쌓고 지냈다. 이때 붙여진 별명이 파산자를 뜻하는 "가마도케시"였고, 사람들은 그의 과수원을 "放置園"이라 불렀다.

 

새벽부터 과수원에 나가 벌레를 잡고, 식초를 나무에 뿌려 주었다. 과수농사가 어렵자 생활고 해결때문에 애지중지하던 트랙터와 트럭도 매각했다. 쌀농사를 하던 논도 빚때문에 남에게 넘긴 상태였다. 그러자, 그는 내면의 또 다른 자아로부터 "이젠, 그만 포기해"란 외침을 자주 듣는다. 생활이 더욱 힘들자 이젠 사과밭에서 기른 채소를 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쌀을 산다. 일곱 식구가 먹으니 쌀도 금방 없어진다. 그래서, 죽을 쑤어 먹었다. 한창 자라는 아이를 먹인다고 그의 아내는 거의 입에 대지도 않았다.

 

농사일를 못하는 겨울엔 도쿄로 돈벌러 갔다. 공원에서 노숙하면서 항구의 하역부, 공사장 잡부 등으로 돈을 벌었다. 장인도 산에서 캔 나무 줄기에서 채취한 애벌레를 낚시 가게에 팔아 돈을 벌었다. 그는 마치 조각배에 가족 일곱 명을 태우고 망망대해에 있는 심정이었다. 한 줄기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저녁에 이와키산에 올랐다. 달빛 아래 한그루의 나무가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처음엔 사과 나무로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도토리 나무였다. 농약을 살포하지 않아도 잘 자란 나무를 보고 그는 자연의 순리를 크게 깨달았다. 문제는 나무가 아닌 토양이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과수원에서 일부러 잡초도 제거 않고 곤충과 벌레도 그대로 두었다. 오히려 토양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콩을 심었다.

 

그는 무농약 재배에 대한 신념이 있었지만 생활비 때문에 야간에 돈벌이에 나섰다. 8개월 근무한 파친코에서 해고되자, 그는 번화가 카바레에서 일을 했다. 처음엔 화장실 청소로 시작했지만 이내 신임을 얻어 웨이터가 되었다. 어느날 지역 야쿠자로부터 폭행을 당해 그만 두기까지 3년간 그곳에서 근무했다. 이날의 폭행으로 그는 앞니를 잃었다. 지금도 그는 빠진 채로 지낸다. 옛 일을 잊지 않기 위해서란다.

 

폭행 사고후 그는 과수원에 전념했다. 사과밭에 콩을 뿌린지 3년, 농약을 멈춘지 8년이 되는 해에 마침내 사과 나무에 일곱 송이의 사과꽃이 피었다. 이 중 두 개의 사과가 열렸다. 1991년 가을, 태풍이 아오모리현을 휩쓸었다. 과수원 농가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뿌리채 뽑힌 사과 나무가 날라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사과 나무는 80퍼센트 이상이 멀쩡했다. 자연농법의 쾌거였던 것이다.

 

그의 사과 판매는 일반 유통 경로를 이용하지 않는다. 직접 주문을 받아 배송하는 진정한 의미의 산지 직송이다. 엽서나 팩스로 주문을 받아 주문자에게 직접 택배로 보낸다. 너무나 유명해 져서 생산량이 주문량을 따르지 못하는 상황이 수 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도 그의 주문 팩스는 끊이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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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희망, 미래 - 아시아의 빌 게이츠 스티브 김의 성공신화
스티브 김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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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아시아의 빌 게이츠"라고 추켜 세우지만 정작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스티브 김], 그의 한국 이름은 김윤종이다. 경영을 전공한 적도 그렇다고 배운 적도 없었지만 좌충우돌 식으로 부딪히며 체득한 경험으로 깨닫고, 그리고 항상 남에게 배우려고 노력했단다.

 

"김회장님, 미국에서의 성공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강연회에서 누군가 질문을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 아마, 미국이었다는 것이 첫 번째 요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얼마전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여 있던 상장법인 하이닉스의 전문경영인 공개모집에 응모했다가 불합리한 한국식 연고주의 때문에 인터뷰 한번 못해보고 보기좋게 낙방했던 탓에 이런 답변을 한 듯하다. 그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창업한 회사 파이버먹스가 첫 수주한 실적이 미항공우주국(NASA)였는데, 자신은 NASA와 전혀 연고가 없었음을 강조했다.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학연, 지연 풍토와 접대문화가 기업을 경영하는데 큰 부담으로 작용함을 꼬집고 있었다.

 

지난 2007년, 渡美한지 30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한 김윤종씨는 서울 장교동에서 1949년 11월에 태어나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후 엔지니어가 되어 미국의 대기업에 취직하겠다는 포부로 1976년 이민길에 올랐다. 수중엔 단돈 2천달러 뿐이었다. 1977년에 결혼한 아내를 위해 청소원, 창고지기 등으로 생활비를 마련하고 야간 대학원을 다니며 정보통신학 석사학위를 거머 쥐었다. 주경야독인 셈이다.

 

그는 미국 회사에 취직하여 잘 다니다가 회사의 모습에 실망을 한다. 회사의 주업무는 군 방위 통제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었고, 워낙 큰 조직이라 자신의 능력을 펼치기엔 너무도 정체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입사한 지 겨우 1년 반만에 이직을 결심한다. 지역 신문 구직광고를 보고 직원 30명의 통신 시스템 개발회사 페일로로 자리를 옮겨 광섬유 통신 시스템 개발에 진력을 다한다. 비록 규모가 작은 회사였지만 첫 직장의 연봉에 비해 두 배나 되는 5 만 달러를 받을 정도로 회사내에서 능력을 인정 받는다.

 

두번째 직장, 페일로의 월급쟁이 사장 딕 배스는 전형적인 마케팅 전문가로 기술에 대해선 감각이 부족했다. 그래서, 스티브 김은 친분이 있던 다른 회사 출신 엔지니어 3명과 의기투합하여 10 만 달러의 자본금으로 창업을 시도한다. 차고가 회사의 사무실이었다. 밥먹고 잠자는 시간 말고는 오로지 일만 했다. 밤낮으로 일한 1 년만에 시제품이 탄생했지만 창업자금 10 만불은 이미 동이 났다. 당시엔 벤처 캐피탈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투자자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딕 배스를 찾아 이를 상의했다. 딕이 회사의 15% 지분을 보장받고 영업과 마케팅 담당으로 참여하면서 30만 불의 투자자를 데려 온다. 이렇게 시작된 회사가 파이버먹스였고 첫 수주가 바로 NASA의 10 만불짜리 홈런이었다. 그의 회사는 6 년간 놀랄만한 고속 성장을 했다. 아라크 전쟁사태로 나스닥 상장이 연기되자 그는 최초 투자자들에게 25배의 이익을 남기는 회사매각을 결정한다.

 

파이버먹스의 창업에서 성공한 경험을 살려 그는 1993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컴퓨터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하는 회사 자이렌을 설립하여 3년만에 나스닥에 상장했다. 미국 국내외에 60여 개의 지사망을 거느리며 연간 매출 3억 5천만 달러를 달성한 후 1999년 프랑스의 세계적 통신회사 알카텔사와 인수합병을 맺고 20억 달러에 매각함으로써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랐다.

 

" 가난했기에 절대 실패할 수 없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기업 경영은 전쟁과 마찬가지입니다. 분기별로 실적이 나오고 미진할 경우 곧바로 주가에 반영되지요. 두 개 회사를 경영한 15년, 60분기 동안 단 한 번도 목표를 못 맞춰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베스트 세일즈맨"이라 부른다. CEO도 현장에서 발로 뛰어야 고객의 불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서, 1주일에 2 - 3개 지사를 방문했고 방문때마다 하루에 주요 거래처나 바이어 3 곳과 미팅을 약속했다고 한다. 부지런함은 역시 성공인의 덕목 중 하나임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나이 만 60세,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미국에서 "스티브 김 재단" 을 설립하고 장학사업을 시작하다가 2007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뒤 투자회사 SYK글로벌과 사회복지법인 "꿈,희망,미래 재단" 을 설립했다. 장학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연간 20억원을 쓰고 있다.

 

" 돈이 없어 공부를 중단해야 할 처지에 있는 학생 한 명을 도우면 사람 하나만 살리는 게 아니라 그 가족을 살리는 거니까요."

 

모교인 서강대 MBA 과정 초빙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향후 강의와 저술, 각종 강연에 주력할 계획이란다. 그의 성공스토리가 움추린 우리들의 어깨를 펴게 해준다. 그의 강연이 끝나자 힘찬 박수소리가 한동안 강연회장을 떠나질 않았다.

 

" 꿈과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면 반드시 보상이 옵니다. 제가 가진 것을 사회와 나누며, 미력하나마 '행복전도사' 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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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밀레니엄 북스 39
루쉰 지음, 우인호 옮김 / 신원문화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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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근대 소설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이광수의 [무정]이며, 비로소 한국 근대 문학의 장이 열렸다. 중국에는 루쉰이 있었다. 1918년 최초의 근대 소설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중국 문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루쉰은 1881년 중국 절강성의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 났다.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갑자기 집안이 몰락하는 불운을 당하기도 했다. 남경에 위치한 강남수사학당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가 강남육사학당으로 전학했고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의학전문학교를 자퇴하고 문예지 [신생]을 창간하려다 실패하고 1909년 귀국하여 학교 선생님이 된다. 이 책 첫머리에서 만나는 [자서]와 책말미의 작가연보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아Q는 未莊이란 마을에 살고 있는데 이름과 본적이 애매하며, 그의 행적도 분명치 않은 인물이다. 조씨집에 얹혀 지내며 집안의 허드렛일도 맡아서 한다. 기거는 동네 祠堂에서 해결한다.
그러나, 아Q는 자존심이 강해서 마을사람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며 또한 城內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경멸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나창파(부스럼으로 생긴 대머리)라는 신체적 결함이 있어서 대머리를 연상시키는 그 어떤 말에도 화를 내었고 심지어는 욕을 하거나 기운 약한 놈은 때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지막엔 그가 항상 당했다. 한마디로 동네에선 왕따 신세였던 것이다.

이런 아Q가 어느 날 마을 유력 인사인 조 나리에게 따귀를 맞고 난 후 유명해졌다. 이후 여러 해 동안 그는 우쭐거리는 행동을 했다. 그도 사람이기에 매우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거지 왕털보와 전 나리의 장남이었다. 전 나리의 아들은 서양학교에도 다녔고 일본 유학생 출신이라 그런지 변발을 짤라 버렸다. 그래서 아Q는 그를 양놈의 앞잡이라고 불렀다.

아Q가 한번은 女僧을 놀리면서 그녀의 볼을 꼬집고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바보인 그가 비로소 여자를 알게 된 사건이었다. 하루는 조 나리댁에서 하루 종일 쌀방아를 찧다가 식모인 오마에게 수작을 걸었다가 이 때문에 혼찌검을 당했다. 이 사건 이후 마을 사람들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마을 여자들이 아Q를 보기만 해도 도망치고, 남자들도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며, 술집에선 외상술도 주지 않았다. 더욱 심한 것은 친하게 지냈던 사당지기조차 자신을 내쫓으려는 것 같았다. 이젠 동네 날품일도 뚝 끊겨 버렸다. 할 수없이 그는 城안으로 들어갈 결심을 한다.

아Q가 다시 未莊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중추절 직후였다. 마을에선 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을 갖고 나타났기에 동네 여인들은 이 물건에 흥미를 느끼며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가 좀도둑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잠시 동안의 인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1911년 9월 14일, 조씨댁 나루터에 한 척의 배가 들어 왔다. 혁명당을 피해 몰래 들어온 성내의 실력자 거인 나리의 배였던 것이다. 아Q도 혁명당이란 말은 벌써부터 듣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혁명당을 무서워하기에 그는 막연히 혁명당이 자신의 편일 것으로 생각한다. 동네 인심은 나날이 안정돼 갔다.

아Q는 혁명당에 가입하려고 전씨의 아들, 가짜 양놈을 찾아간다. 그런데, 그날밤 조씨 나리의 집이 누군가에게 약탈을 당했다. 아Q는 자신을 내쫓은 조씨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리 만무다. 그는 약탈현장을 실컷 구경만 했다.

未莊 사람들 대부분 통쾌해 하면서도 두려웠다. 아Q도 마찬가지였다. 나흘 후 그는 조씨댁을 약탈한 장본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밤중에 체포된다. 조사중 그는 생전 처음 붓을 들고 서명 대신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형장으로 끌려 가면서 그는 구경꾼 무리속에서 오마의 모습을 발견한다. 총살형을 당한다.

여론에 의하면, 아Q의 죽음에 대해 미장에서는 별 이의가 없이 한결같이 "나쁜 놈"이라고 욕을 했다. 그러나, 성안의 여론은 반대로 나빴다. 그들 대부분은 총살에 불만이었다 한다.

루쉰은 어리석고 불쌍한 아Q를 통해 근대화 과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 민중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일본 유학 기간에 학업을 중단하고 문예지를 통한 계몽활동을 펼치려 한 그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그 필름을 본 뒤부터 의학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비록 체력이 튼튼하고 오래 산다 해도 고작 보잘 것 없는 본보기나 구경꾼 노릇만 할 뿐 아닌가. " (12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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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내일 - 쓰레기는 어디로 갔을까
헤더 로저스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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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헤더 로저스의 독특한 이력이 눈길을 끈다. 그녀는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그리고 영화제작자이다. 2002년 [쓰레기의 숨겨진 한살이(Gone Tomorrow : The Hidden Life of Garbage)] 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한 후 못다한 이야기를 이 책에 담고 있다.

 

미국 뉴욕시 남서부 끝에 위치한 프레시 킬스(Fresh Kills) 는 지난 53 년 동안 쓰레기를 묻어 온 매립지이다. 미국은 지구 자원의 30 %를 소비하며 전체 쓰레기의 30 % 를 생산하고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 1 인당 매일 2 킬로그램 넘게 쓰레기를 버리고 있다. 가히 미국은 세계 최고의 쓰레기 생산국임이 분명하다. 이 책은 생활쓰레기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고발하고 있다.

 

17 - 18 세기 미국 이민자의 대부분은 너무도 가난해서 거의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다. 음식찌꺼기는 밭으로 버려 밭에서 썩게 했다.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는 그대로 썩어 가거나 아니면 돌아 다니던 개, 너구리, 돼지 등의 배를 채워 주었다.

 

쓰레기가 생기기 전의 시대엔 사람과 짐승의 분뇨가 제일 큰 쓰레기였다. 똥은 기름진 흙을 만들어 주는 비결이었지만 도시에서는 毒이었다. 도시에서 만들어진 분뇨는 외곽의 농부에게로 자연스레 순환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이후 도시의 거주자들의 농작물 수요가 급격히 늘어 나면서 농부들은 흙의 건강을 유지하고자 비료에 의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농업의 첫 장을 열면서 이러한 순환 과정이 소멸되었다. 자연히 쓰레기 처리에 있어서 농촌과 도시의 불균형이 시작된 것이다.

 

남북전쟁은 엄청난 경제적, 기술적 변화를 이끌어 내었다. 대량 생산 시스템이 가동되면서 미국내의 쓰레기의 양과 질 모두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 났다.

戰後 1950 - 1960 년대에 합성수지 생산자들은 플라스틱을 양산하며 소비자들에게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1960년 플라스틱은 알루미늄을 누르고 미국 최대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미국의 쓰레기 변천사와 함께 늘어나는 쓰레기의 수거를 1950 년대 중반부터 민간업체로 이관하자 초기엔 마피아가 카르텔을 형성하여 뉴욕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독점적으로 처리하면서 고객들에게 엄청난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폭력조직 활동에 대한 경찰의 단속과 쓰레기 산업의 재편으로 1990년 대에 들어 마피아의 뉴욕 독점이 사라졌다. 이제 자치단체와 계약을 체결한 수거업체들은 매립지 확보가 골칫거리였다. 매립지 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처리해야 할 쓰레기 매립 용량은 크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 처리 조직들은 이제 새로운 지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버린 쓰레기가 순식간에 지구 남반부에 버려진다. 미국 내의 엄격한 환경 규제때문에 엉뚱한 곳에서 피해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쓰레기 처리 방법이 매립이나 소각에 의지했지만, 이것이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자 대안으로 쓰레기 재활용이 등장했다. 미국의 재활용시장에서 수거된 전자폐기물의 50 - 80 퍼센트가 중개인에게 팔리며, 중개인은 이를 개발도상국에 수출하여 폐기처분한다는 보고서도 있다. 중국 광동성 구이유시에서 이민노동자들은 山積한 컴퓨터 부품을 해체하고 녹이며, 나머지는 인근 논, 관개수로 또는 운하에 버리곤 한다. 이 지역의 지하수는 이미 오염되어 30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있다. 또한 버려진 휴대폰도 중국 어디에서나 플라스틱 부품에서 브롬계 난연제를 배출하여 지하수와 토양을 오염시키고 있다.

 

20 세기의 대표적인 쓰레기인 플라스틱은 결코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쓰레기이다. 재활용은 불과 5 퍼센트 미만이며, 버려지는 대부분이 해양에 불법 투기하고 있다. 이제 태평양은 바다가 아니라 플라스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바다에 가라앉은 플라스틱의 독성물질이 우리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정확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쓰레기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 비단 미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도 매일 쓰레기를 방출하고 있다. 일회용 컵, 생수 페트병 등 수 없이 많다. 남태평양 작은 섬의 주민들이 정체 불명의 쓰레기와 점점 높아가는 해수면때문에 밤 잠을 설친다면 이는 모두 우리의 잘못일 것이다. 분리 수거의 실천이 결코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고도의 산업화가 우리에게 남겨준 생활쓰레기는 결국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남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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