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요일 아침부터 서둘렀다. 하이퍼텍 나다에서 열리고 있는 오즈 야스지로 특별전 1회를 예매해 놓았기 때문. 동행인 후배 녀석은 먼저 도착해 있었고 표를 바꾸고 난 뒤 바로 입장, 김상경 석에 앉아 영화 '가을햇살'을 보기 시작했다. (하이퍼텍 나다엔 좌석마다 문화예술인 이름이 붙어 있다. 내 앞자리엔 귀여니도 있더라.;)

오즈 영화는 처음인데 생각보다 훨씬 즐겁고 유쾌했다. 7년 전 혼자 된 어머니와 함께 사는 딸의 이야기. 아야코는 결혼할 때가 되었지만 홀로 남을 어머니 걱정에 선뜻 결심을 하지 못한다. 죽은 아버지 친구들은 이에 어머니도 함께 시집을 보내기로 작당, 여차저차한 상황들이 벌어진다... 이야기는 아주 소소하다. 안정된 화면 속에 놓인 얌전한 이야기. 흐트러짐도 어긋남도 없다. 얼핏 촌스런 옛날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 굉장하다 느낀 순간. 어머니의 재혼 문제를 놓고 모녀지간의 갈등이 불거지던 장면에서, 확실히 영화 내의 공기 자체가 싹 바뀌었다. 엔딩을 보며,확실히 인생은 계절 같은 거구나, 새삼 깨달았다. 마지막 가을 햇살처럼 빛났던 어머니, 딸이 시집간 후 스러져가시겠지. 그러나 그때쯤이면 딸은 새 봄 같은 아이를 낳을 것이다. 흐름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지. 아, 6월 10일까지라니 시간 되는 대로 더 가서 챙겨봐야겠다.

2. 1시, 영화때문에 일식이 무지하게 먹고 싶었으나 갈만한 데를 못찾아 결국 베트남 국수를 먹으러 갔다. 사실 후배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반쯤 억지로 끌고 갔다. 베트남 쌀국수는 좋아하는 사람 반, 싫어하는 사람 반, 명백하게 갈린다. 으음, 굉장히 맛있는데 왜들 싫어하지. 식사 마치고 목적했던 간송미술관으로 출발.

3. 우리 나라 최고의 전통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은 1년에 두 번, 5월과 10월에만 전시를 한다. 이번엔 '겸재 정선'의 특별전, 입장료는 없다. 그탓인지, 일요일이라서인지 1, 2층 전시장은 바글바글, 그림 구경을 한 건지 사람 구경을 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리저리 밀고 끼어드는 사람들 때문에 몹시 불쾌했다.) 겸재의 화풍이 굉장히 다양했고, 또 금강산의 풍치가 몹시 아름다웠다는 인상이 남았을까. 사설 미술관답게 아담한 규모와 깨끗한 분위기가 그나마 마음을 달래주었다.

4. 이태준 생가는 두 번째 방문이다. 예전 모습 그대로  해놓고 차를 파는데 사람들이 제법 많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조용하고 청량한 분위기가 좋다. 좀 이르지만 냉미숫가루를 시켜먹으며 대화. 후배는 주로 대학원 진학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고 난 왜 요즘 소설은 재미있는게 없어, 푸념하고. 마루에 찻상을 놓고 앉아 시원한 바람 맞으며 담소했다. 당시 작가들 가운데 이태준을 가장 좋아하는데, 집 분위기 자체가 딱 그의 글 답다.

5. 예정에 없던 서울 성곽 방문. 성북동길은 의외로 볼 것이 참 많다.(그리고 의외로 부촌이기도 하고) '서울 성곽'은 예전에 '나는 달린다'에서 무철이랑 희야가 자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그 성벽이다. 올라가기도 쉽고 길 깨끗하고 조용하고, 산책코스로 그만. 드라마 흉내내어 성벽에 올라서려 했는데 높은데는 쉽지 않더라. 그래도 애써 올라 사진도 찍고 그랬다. 하하.

6. 마지막 저녁, 유명하다는 '금왕 돈까스집'에 갔다. 세상에, 번호표까지 받아야 하더라. 기사식당틱 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가족들 외식이 많았다. 예상대로 양은 이빠이 많았으나 맛은 생각보다는 별로. 그냥 학교식당 생각이 조금 났다. 아, 매스컴 많이 탔다고 믿으면 안돼. 특히 식당은.

7. 후배와 나, 돌아오면서 와, 오늘 우리 정말 많은 일을 했네, 스스로 감탄했다. 사실 일요일은 잠으로 보내기 쉬운데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도 있다니. 오오, 부지런해지자, 아자! ^^

 

* 오즈 야스지로 특별전 상영시간표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 6월부턴 KTF 카드 할인도 된대요~)

1회 11:40, 2회 1:40, 3회 4:00, 4회 6시 20분, 5회 8시 40분

5/31 : _____/ 안녕하세요 / 피안화 / 꽁치의 맛 / 가을햇살
6/01 : _____/ 초여름 / 바람속의 암탉 / 늦봄 / 동경이야기
6/02 : _____/ 피안화 / 초여름 / 동경의 황혼 / 외아들(9:00)
6/03 : _____/ 꽁치의 맛 / 늦봄 / 도다가의 형제자매들 / 이른 봄
6/04 : _____/ 꽁치의 맛 / 이른 봄 / 셋방살이의 기록(6:40) / 동경이야기
6/05 : 동경의 황혼 / 가을햇살 / 초여름 / 도다가의 형제 자매들 / 피안화
6/06 : 동경이야기 / 늦봄 / 바람속의 암탉 / 안녕하세요 / 동경의 황혼
6/07 : _____/ 셋방살이의 기록, 도다가의 형제자매들 / 오차즈케의 맛 / 태어나기는 했지만
6/08 : _____./ 바람속의 암탉 / 태어나기는 했지만 / 외아들 / 안녕하세요
6/09 : _____/ 태어나기는 했지만 / 오차즈케의 맛 / 셋방살이의 기록 / 바람 속의 암탉
6/10 : _____/ 외아들 / 안녕하세요 / 도다가의 형제자매들 / 오차즈케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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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휙휙 2004-05-30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뿌듯하겠네요!!!

digitalwave 2004-05-31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바삐 움직였구려. 이주내내 피곤해를 외칠 당신 모습이 그려지오. 하하하

H 2004-05-31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바쁘신 하루 보내셨네요.
그래도 뿌듯하실듯
 

개인적으로 목빠지게 기다려왔던,

1.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이 재출간됐다. ㅠ.ㅠ 표지와 가격만 바뀐 개정쇄란다. 드디어 내 손에! (지금은 상권 표지만 안 바뀐 상태)

2. C.S.I. 라스베가스 4시즌이 방영된다. 5월 17일 새벽 12시 25분 첫방. 시간대가 참으로 난감하긴 하지만, 그래도 고마울 뿐이다. 그리섬 반장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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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휙휙 2004-05-14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케이블과 DVD의 혜택을 맛보고 싶소~~

zooey 2004-05-14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SI는 공중파(MBC)에서 하오. -_-;

그루 2004-05-14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대는 정말정말 난감해요. ㅠㅠ; 금욜밤이 딱이었는디.

panda78 2004-05-14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시즌에서 턱수염을 기른 그리섬을 보시고 너무 놀라지마세요... ㅡ.ㅡ;;;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이 다시 나왔다니,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

비로그인 2004-05-14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S.I. 라스베가스 4시즌이 다시요?
그간 C.S.I.마이애미 시리즈 ..인내력을 시험하면서 몇 번 보긴 했었는데...
아~ 히딩크 감독을 닮은 그리섬 반장을 다시 볼 수 있겠군요...아자! ^^*

레이저휙휙 2004-05-1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요일 밤에 올리는 하영씨에게 두 가지 좋은 소식!
1. 새 게임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2. 하영씨가 없으니 단무지 없는 김밥이더군요 ㅎㅎㅎ
 

(직업상) 매일매일 알라딘 마을에 올라오는 마이리뷰를 둘러본다. 음, 오늘은 어떤 책에 어떤 감상이 붙었을까, 흥미진진. 오늘은 어떤 로맨스소설의 마이리뷰를 읽다가 재미있는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로설'. 아마도 '로맨스소설'의 약자인가 보다. 하하, 짧게 떠오르는 추억 몇 가지. 독자서평을 처음 접할 무렵, 난 로맨스 소설의 서평에 '여주' '남주'라는 단어가 하도 나오길래, 아니 왜 로맨스소설 주인공들 이름은 다 여주, 남주인 거야 투덜거렸다. 그게 '여주인공',  '남주인공'의 약자란 걸 몰랐던 거다. 얼마 후 스스로 깨닫긴 했지만.;  대학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친구랑 해남쪽으로 여행을 갔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교통편이 꼬이는 바람에 순천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터미널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무지하게 막히는 거다. 그때 택시 아저씨가 돌아보며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순대가 데모를 해서 길이 막히네요." 우리의 머릿속은 순간 백지상태. 에에, 순대가 떡볶이나 김밥하고 차별한다고 데모를 한단 말인가! 콰당. 물론 그때도 곧바로 그게 순천대의 약자란 걸 알게 됐지만, 당시에는 진지하게 (먹는) 순대가 데모하는 풍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했었다.; 대학 신입생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신학기 어리버리한 대학교 1학년, 선배들과 점심 먹고 어울리다가 한 여자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아, 피곤하네. 여관에 가서 한숨 자고 와야겠다. 난 속으로 헉, 대학생들은 낮에 쉬러 여관에 간단 말인가. 역시나 착각은 길지 않았다. 여기서 여관이란 여학생회관의 약자였던 것.;  하나 더 있는데 으, 이건 쪼끔 많이(?) 부끄러운 착각이다..(아, 생각해보니 약자는 아니네.) 전공이 국문학이라 고전문학 수업을 들었는데, <심생전>과 <이생규장전>을 비교분석하는 레포트를 쓸 일이 있었다. 보고서를 내기 직전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 엄청난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난 '심생', '이생'의 '생 生'이 진짜 사람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두둥. (~모씨, ~군 이런 뜻) 그렇게 생각했기에 삶과 죽음의 의미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구절을 레포트에 써버렸고, 제출 직전 수정하느라 애좀 먹었다. 그때 그대로 냈으면 정** 선생님한테 두고두고 씹혔을 거다. 크헉. ㅠ.ㅠ 지금 돌아보면 즐거운 추억들이지만. 으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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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5-13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럼 <허생전>도? @0@;; 크헉.
이건 전혀 재미있는 약자가 아니지만, 제가 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화장품 품평(?) 동호회에 들락거릴 때, 메베와 파데가 뭘까 고민했더랬죠.
물론 메이크업 베이스와 파운데이션 이었습니다. ^^;;;

sunnyside 2004-05-13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약자'의 추억.. ^^; 난 약(弱)자의 추억인가 했네요. 재밌네요. 순대가 데모를 ㅎㅎ

그루 2004-05-13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한 자와 리뷰와 남주 여주가 무슨 상관인지 계속 물음표 상태로 읽다가 순대가 나오고서야 이해... ^^;

비로그인 2004-05-13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이퍼 제목만 보고 <약한자의 슬픔이 깃든 추억>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지요..약자 제대로 몰랐다간 봉변(저의 경우입니다..)까지도 심심치 않게 당하죠...^^
그나저나 여행에서 돌아오시고 난 후에, 여행 사진을 몇 장 정도는 올려주실 줄 잔뜩 기대했었는데...저 대문 사진으만 만족하고 있답니다....흑~

zooey 2004-05-1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여행 사진 올려야 하는데; 게으름이 병일뿐이죠. ㅠ.ㅠ 조만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poptrash 2004-05-16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 선생님-> 정민 선생님은 아니겠죠 설마;
그냥 둘러보다가... 혹시나 해서요;

zooey 2004-05-2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정민 선생님은 아니시고, 정*봉 선생님이십니다. 흐흐. 근데 써놓고 다시 생각하니 정선생님이 아니라 장선생님 수업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원고를 펑크냈다. 얼마 뒤 나올 모 계간지에 '장르소설'에 대한 가벼운 글을 하나 써주기로 했는데, ........결국은 못쓰고 말았다. (*** 담당자님껜 정말 죄송.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진짜 죽고 싶다. ㅠ.ㅠ)

지난 주말 내내, 약속도 안 잡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도 쓸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개요가 떠오르고 필이 딱 꽂혀야 글을 쓸 수 있는 타입, 한번 감이 안 오면 절대로 풀리지가 않는다. 그럴 땐 억지로라도 자리에 앉아서 끄적끄적 썼다 지웠다 해야 실마리가 보이는데, 이번엔 정말 써지지가 않더라. 청탁 받았을 때 바로 처리할걸, 너무 오래 묵혀두었던 탓도 있다.

원고의 주제는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어떤 경로를 통해 내게 원고 청탁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SF/판타지/추리 소설을 몹시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 재미있으니까, 라고 답하면 무성의할까. 근데 그 이상의 답이 없다. 나는 그런 종류의 책들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얻는다. 대략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기억나지만.

추리소설이 제일 먼저였다. 초등학교 시절, 아주 얇은 문고본으로 나온 홈즈 시리즈가 있었다. 기억에 검은색 표지였던 거 같은데, 우리 집엔 없었고 친구네 집에 있어서 놀러갈 때마다 빌려서 열심히 읽곤 했다. 중학교 때는 단연 애거서 크리스티였다. 동네 상가 대여점에서 300원에 한권씩 빌려 읽었는데 빨간색 해문판 80권을 다 읽었을 때의 희열이란! (그시절 띄엄띄엄 골라 읽었던 자유추리문고가 훗날 이렇게 희귀해질줄 알았더라면 더 열심히 챙겨 읽었을텐데. ㅠ.ㅠ)

판타지를 만난 건 대학 때였다. 대학교 2학년 땐가 3학년 땐가, 도서관 서가를 뒤지던 나는 정말 우연히 <반지 전쟁>(예문판 3권짜리)을 발견했다. 톨킨이 누군지 이게 무슨 책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읽었고, 너무도 당연하게 단숨에 그 세계에 빠져들었다. SF가 제일 늦게 왔다. 읽기는 <파운데이션>, <로봇>, <듄> 시리즈를 먼저 읽었는데 진심으로 SF에 매료된 건 도솔에서 나온 SF  단편집 2권을 읽으면서였다. 흔히 SF의 세계를 처음 접한 독자들의 감정을 '경이감(Sense of Wonder)'라고 표현하는데, 진짜 그당시 내 감정이 딱 그랬다. 그 책을 읽고 아, 이런 종류의 소설도 있을 수 있구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기분. 그때부터 한권 한권씩 닥치는 대로 사서 읽으면서, 열악한 SF 출판 환경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누가 SF를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하면 화를 내는 평범한 SF 팬이 되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내가 이런 종류의 소설을 사랑하는 데에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 (음, 사실 설명 가능한-짐작가는 부분이 있긴 한데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쓸 기회가 있을듯.) 아, 사실 진짜 좋아하는 거에 대해선 뭐라 말을 보태기가 너무 어렵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 그저 그 사람 이름만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 아무 생각 안나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 원고를 못썼다고 애써 자위해본다. 변명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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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휙휙 2004-04-2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잘도 쓰면서 왜그랬소!!
하긴 너무 오래 묵혀두면 점점 짐이 커져서 결국엔 감당을 못하지요^^

zooey 2004-04-30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 잘쓰오. ㅠ.ㅠ 오늘 전화 와서, 결국 써주기로 했소. 이번 주말 또 저당잡혔음. 엉엉.(이번에도 못 쓰면 진짜 죽어야 할듯.;)
 

거의 모든 구기종목 관람을 즐기는 나지만 축구만은 별로라 2002년 월드컵 때도 거리에 나간 적 한번 없었다. 붉은 악마들이 모여 응원하는 걸 보면서 저거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군 하며,  약간은 시니컬하게 바라보았던듯 싶다. (이건 출신학교의 영향도 크다. 대학 때 워낙 비슷한 풍경을 많이 봐놔서.)

월드컵 때의 그 경험이 이후 확실히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쇼비니즘으로 번질 우려도 있으나.)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와 같이 즐기는 문화. 특정 집단 소속이 아닌 그 누구라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함께 모여 즐기는 축제의 경험. 여중생 사건 때의 촛불시위나, 오늘의 광화문을 보면서 새삼 떠올리는 생각이다.

같은 목적,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모였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모두 친구가 된다. 평소 같으면 무심히 스쳐갔을 시선이 따뜻해진다. 서로서로 촛불을 나누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낑기고 밀리지만 누구 하나 심하게 화내는 사람이 없다. 촛불을 들고 있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자연 경건하고 차분해진다. 수천, 수만 개의 촛불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뭉클,해질 수밖에. 모인 이유는 불행하나 어쩌면 축복일 수도 있다. 이런 날이 없었으면 더 좋았겠으나.

어린 아이부터 나이많은 어르신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 나와 같은 마음일 거야. 귀찮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나와 크게 상관없다는 이유로, 다시는 방치하지 않겠다는 다짐. 크게 어긋났지만, 역사는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나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쉽게 잊지도, 용서하지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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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흔 2004-03-14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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