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방향


 김남희・쓰지 신이치,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 - 삶의 속도를 선택한 사람들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그곳에서 느끼는 감흥의 기록이다. 평화와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통해 만나게 된 한국의 여행작가 김남희와 일본의 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는 국적과 성별과 나이를 떠난 교류를 통해 우정을 나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우정의 한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들이 관심을 품고 있는 주제에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이기도 하다. 함께, 동일한 시간의 여행이 아니라 동일한 장소에 대한 기억이 흐르는 기록이다. 두 사람은 부탄과 일본의 홋카이도와 나라, 한국의 강원도와 안동과 제주도와 지리산을 여행했고 그곳에서 느꼈던 생각들을 나눈다. 같은 곳에서 느끼는 두 사람의 생각의 차이가 질문들이 담겨 있다.

  쓰지 신이치는 슬로 라이프 개념을 제안한 학자로서 이들 두 사람의 여행에선 책제목처럼 삶의 속도와 행복의 방향이라는 이미지를 계속 상기시킨다. 여행을 떠나는 발걸음처럼 조용히 뒤따르는 행복이란 의미는 여행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수많은 질문을 통과해 더욱 확고히 다져진다. 이들의 지향점이 그들의 생애에서 드러나기에 어쩌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상가능하기도 하지만 여행 속에서 맞닥뜨리는 생각들의 잘 정리되어 나아가는 풍경을 글로써 만나는 감흥도 새롭다. 여기에 두 사람의 글의 차이가 확연하기에 스승과 제자의 문답같은 느낌도 더해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에 관한 정의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다.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지난 십 년간 세계를 떠돌며 살아온 내게 여행은 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었다. 내가 쌓아온 성 바깥으로 나가 그 성을 균열시키고 흔드는 만남에 나를 내맡기기. 그런 만남을 통해 새롭고 긍정적인 기운을 내 안에 가득 채우기. 그렇게 돌아와 이곳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 게 내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자 바람이었다.p8


  김남희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견고한 성을 굳이 균열시키려는 노력은 더욱 더 확고한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느껴진다. 갇혀 있지 않고 수용하면서 바람직한 생각들로 내 성을 더욱 견고히 만들어가는 것. 그래서 작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값을 몽땅 빼내 여행을 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여행을 통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쓰지 신이치의 권유로 가게 된 부탄에서부터 행복에 대한 의미를 되새긴다. 작은 나라이며 물자가 풍부하지 않지만 행복한 나라라고 거침없이 꼽는 쓰지 신이치의 말에 그 행복의 느낌을 얻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래 얼마나?”라는 꼬인 심정으로 부탄을 향했다는 작가. 마치 반대의 반대를 하듯 계속 부탄의 행복에 대해 의문을 거는 작가의 심경은 어떻게 달라질까.

   

“나는 그 ‘선택의 자유’라는 말을 별로 믿지 않아. 우리가 정말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고 있을까? 도대체 뭘 선택할 수 있는 거지?”

“저한테 행복이란 일상의 작은 것들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평화와 만족 같은 거예요. 오늘 내가 뭘 입을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 기분이나 날씨에 따라 입을 옷을 고르는 일에서도 행복을 느끼니까요. 부탄은 그런 기본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거잖아요.”

“규제가 없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아. 규제 자체가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고. 무엇을 규제하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행복해지는데 옷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그래도 전 전체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사고가 싫어요.”

“모든 사회는 집단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야. 개발이나 성장이라는 이름 안에서만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고.” p29


  선택의 자유를 중요시 여기던 작가는 부탄을 여행하고 그곳의 삶을 체험하면서 소비하는 삶에 대해 일과 놀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도. 물질적 성공이 아니라 나눔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관계맺음의 기술 또한 행복한 조건이라 생각해본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과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점점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점점 신이치 선생님의 말들과 겹쳐간다.

  여행을 하게 되면 느끼게 되는, 아니 일상을 살다 보면 느끼게 되는 회의감들은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이들을 만나다 보면 전환적인 생각으로 전개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의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어도 타인의 여행의 기록을 통해 이러한 마음을, 느낌을 전달받게 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우리 안에 일상이라는 평범함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몇 년 전부터 휩쓸었던 슬로 라이프의 삶은 우리나라에 와서는 그저 걷기와 웰빙 먹거리 열풍으로 이어진 느낌이었다. 이것이 함께, 다같이 살아가기가 전제된 삶의 여유와 행복의 다른 이름일 터인데 빨리빨리 문화가 슬로 라이프의 삶을 수용하는 방식은 자본을 벗어나지 못한 방식일까 생각했었다. 소비와 소유의 문화가 여전한 삶을 지배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이다. 나 혼자만 그렇지 않게 살아가기라 애쓴다 한들, 환경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가능할 리 없다.

  삶의 속도와 행복의 방향이 모두에게 같을 필요가 없음에도 한국적 삶은 그 라인을 너무나 친절하게 제시하여 주는 까닭에 이 라인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려 할 때면 힘이 든다. 그렇다고 그 방향대로 산다는 것 또한 지독한 허기를 안겨 준다. 두 작가들이 여행한 곳은 다수가 권위가 제시한 라인에 비켜가 있는 삶의 모습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은 소비와 소유에서 비켜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가치를 품고 실천하며 사는 이들이다. 그들이 자신의 행복의 방향을 정립하기까지 그들에게도 흔들림과 실패의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삶은 견고해졌고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행복의 방향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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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따라가면 안되나여?


오소희,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라오스편


 동남아시아 라오스에 발을 디딘 작가와 아이는 팍세에서 시작해 푸앙 프라방까지 북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라오스는 특별히 유명한 건물과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 아니지만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여행이란 관광과 더불어 휴식도 있으니 익숙하게 보게 되는 건물들보다 자연 속으로 향하는 마음들이 가득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작가 또한 라오스에서 라오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시작한다. 팍세의 자연은 배경으로 두고 팍세에 사는 사람, 참파삭에서 만난 사람, 비엔티안에서 만난 누군가들. 그렇게 라오스에 살고 있는 이들. 어쩌면 지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라오스의 자연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으로 뭉뚱그러져 보이기에 그곳의 사람들이 더 각인되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라오스를 방문한 것은 2006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처음 머문 곳이 남쪽의 팍세. 하지만 이곳에서 익숙한 한국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그리고 아이는 팍세의 공원에서 축구공을 차며 그곳의 아이들과 함께 뛰어논다. 처음엔 머뭇거리지만 힘차게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어른들 역시도 놀고 싶을 만큼의 기운들이 아이들에게서 넘쳐난다. 밤이 되어서도 공원에 있는 그 아이들은 노숙생활을 하는 고아들이었다. 작가는 먹을 것과 옷들을 아이들에게 해주지만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들은 야유가 떠나지 않는다. 아이들 역시도 경계와 주눅든 모습이 가득하다.


    거지의 정의가 ‘일하지 않고 구걸하여 연명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른 거지가 있을 수는 있어도 어린이 거지가 있을 수는 없다.

    아이들은 일하지 않고 또 구걸하지 않고

    어른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의 결핍이 곧 자신들을 향한 수치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채

    쇼핑센터 주변의 어른들은 낄낄대고 있었다. p26


  작가는 우연히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눠주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결국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을 떠난 엄마로서 이 아이들의 모습이 가슴에 깊게 새겨졌을 것이다. 그러며 생각한다. “비록 여행중이라 해도 지루한 일상 중이라 해도 바쁘더라도 가진 것이 넉넉지 않다 해도 ‘언제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숙이 선의를 가지고 관여할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p31)을”.

  팍세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다르게 생각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저 외국인 호구가 얼마만큼이나 아이들에게 하나 보자라는 듯한. 반대의 상황이라면 이들도 낯선 여행지에서 굶주리고 외로운 아이들을 위해 선의의 시선을 가지지는 않을까. 헤어지는 날 아쉬운 눈빛을 보내는 그 아이들은 또다시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곳에서 익숙하게 받아야만 하는 시선을 참고 견디며 아이들은 기억 속에서 저들에게 따스한 위안을 주던 두 여행객을 기억하며 살아가겠지.

  라오스 첫 여행지의 기억은 그래서인지 보는 이에게도 먹먹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 라오스의 여행에서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소제목 역시 ‘사람을 만나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작가가 느낀 라오스인들은 전반적으로 느긋하고 여유로운 성향이다. 그들이 4시에 만날 약속을 한다는 건 4시부터 그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는 뜻이라고. 아무도 미리 준비하거나 계획하지 않는다고. 중요한 건, 이것이다. 그래서 “더불어 걱정도 없지요.” 그들은 또한 묘비명을 쓰지도 않는다. 그들은 “사람이란 글로써 흔적을 남길 수 없는 존재”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장하지 않고 느리고 잔잔하다고 작가는 표현한다.


그것이 여행의 힘이겠지요. 여행이란, 의도적으로 길을 잃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행위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이들의 불우함으로부터 당신의 자리가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친다면 여행의 힘은 오래가지 못할 거예요. 당신보다 양적으로 더 우월한 자들은 세상의 저편에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이들의 존재가 쉽게 당신을 일으켜 세웠듯 그들의 존재는 또 쉽게 당신을 넘어뜨리겠지요. 당신의 질문은 그 너머에 있어야 해요. 내 삶은 어찌하여 훨씬 더 나은 조건 속에서도 초조해 하는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하는가. 쉽게 지치고 자신과 불화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에요. 진정한 여행의 힘, 그것이 주는 깨달음이란, 떠나 있을 동안만 당신을 부축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당신을 부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해요. p173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여행자에게는 항상 그 낯선 느낌으로 내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작가가 만난 사람들을 내가 만난 듯 그들의 삶을 함께 들여다보며 라오스를 횡단하다 보면 팍세에서 만난 그 아이들처럼 작가에게 이런 말을 건네게 될 것도 같다. “내가 당신을 따라가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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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일 수 있는 방법


오소희,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이 여행의 기록이 터키라는 건 부수적인 것 같다. 터키라는 나라는 동서양의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는 도시로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물론 전적으로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글이 아니라 여행에 대한 에세이기에 터키라는 도시는 여행을 떠난 작가의 감흥을 불러 일으켜주는 소재가 될 뿐이기도 할 것이다. 그 특유의 느낌과 기억을 제공해 주는 것. 그래서 작가는 터키라는 나라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고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에 따라 내가 행해볼 여행지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오소희 작가는 많은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을 쓰고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의 꿈을 심어준 작가이자 현재는 동화작가로 그 영역을 넓혀 글을 쓰고 있다.

  작가의 여행기가 책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은 ‘터키’라는 장소에 대한 매혹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책이 첫 출간되었을 시기에도 여전히 ‘여행’은 사람들에게 낭만적인 꿈이자 매혹이었으니까. 또한 터키 역시 대표적인 여행지로서 각광받는 곳이니까.

  여행기에서 장소가 부수적이 되는 것은 이 책이 여행을 한 ‘사람’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이 여행기에 대해 많은 반응이 인 것은 감성적인 문체와 더불어 어린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난 엄마의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직 어릴 뿐인 아이는, 한국말조차 서투를 듯한 아이는 낯선 땅으로의 여행에 엄마와 동참하고 때로는 엄마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더구나 세 살 아이는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잖은가. 이 모든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 특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강렬한 자극제가 됨과 동시에 희망과 열망의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이 말투는 희망적인 뉘앙스이지만 또한 비관적인 뉘앙스가 될 수도 있어 보인다. 이 글을 읽으며 엄마들은 희망을 꿈꾸었을까, 체념을 되새김했을까.

  여행을 좋아하여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여행을 두루 다녔다는 작가는 아이가 태어나서도 그 여행의 기억을 잊지 못해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을 선택한다. 어쩌다 한번의 경험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리다시피 하는 이 삶에 대해 사람들이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고 말한다.  “좋으니까요.”

  어쩌면 혼자서 하는 여행과 아직 어린 아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해야 하는 것과 해야 할 것과 생각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남과 동시에 자신의 아이와도 만나는 여행을 하게 된다. 다행히도 아이는 칭얼되지 않으며 엄마의 여행의 방식에 함께 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알아간다. 또한 작가 역시 낯선 이들과 부대끼면서 그 속에 아이를 둠으로써 한발짝 관조적으로 아이를 바라보기도 하며 ‘내 나라’에서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고 일깨운다.  


아이가 그 옛날 술탄의 삶에 관심이 없듯 오늘 구석에 핀 들꽃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생생하게 현재를 좇는 아이의 눈은 죽은 자의 흔적을 따라가느라 치열하게 피어나는 생의 에너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런 일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일어났다. 아이의 보폭은 좁고 일정은 늘어졌지만 아이는 그렇게 걷지 않았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작고 조용하고 낡은 것들이었다. p45


  여행이 가져다주는 매력은 그것일 것이다. ‘일상’이라는 잣대에서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생각들을 얻는 것. 그것은 감사한 일이며 어떻든 성장하는 일이다. 작가가 혼자서 하는 여행과 자신의 아들과 하는 여행의 차이는 무얼까. 아이 때문에 여행을 가지 못하는 ‘엄마’가 있고 아이를 위해 ‘여행’을 하는 엄마가 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아마도 조금이나마 누군가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그것을 ‘엄마’의 문제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되면 ‘나’는 잠재워야 한다는 사고, 문화의 영향일지 모른다. 작가가 말하는 대로 “좋으니까요”.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의 방식이 내가 좋은 것을 하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삶은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행복이란 경험의 수와 폭이 많을수록 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아침’이란 어휘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서울에서의 아침이란, 오로지 바쁨과 서두름 속으로 나를 채찍질하는 시계의 분침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아침은 눈과 코와 귀로 음미되고 스며드는 어떤 것이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것에 대해, 위대한 우주가 내게 또 한 번 손길을 내밀어준 것에 대해 저절로 마음으로부터 경배를 올리게 되는 정결한 순간인 것이다. 그 자애로운 우주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인간이 펼쳐놓은 잡다한 그물에 얽혀 허우적거리고 마냥 조바심냈던 나날들이 부끄러워진다. p210


  누군가의 눈엔 한없이 이기적인 엄마이자 생각이 모자란 엄마로 비쳐질 수도 있고 마냥 행복한 이의 가진 자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래서 어쨌든 이 작가에 대해서 이 글에 대해서 부러움과 시기가 공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어 우리 역시 선택할 수 있는 또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게 될 것이다. 삶의 방식은 내 것이지만 우리는 그 방식을 여러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다. 여행 역시도 타인의 여행의 기록을 통해 내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다. 마침 이 ‘엄마’의 여행의 선택에 대한 답변이듯 터키에서 만난 노부부의 삶에서 작가의 대답을 얻는다.


한 터키인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여행을 싫어한다고 대답했다.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이기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꿈은 이기적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 꿈이라는 것의 속성이 현실을 배반하기 때문에, 꿈꾸는 자를 얽어매고 있는 지독한 현실(생계나 가족 같은)에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기적이지 않기 위해 꿈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메운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후회가 남지 않는 것만이 더 나은 것일 것이다.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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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예방의 날에



 9월 10일. 세계 자살예방의 날에 대한민국의 자살예방책은 어디쯤에 있을까. 아니, 세계 1위의 자살공화국인 나라로서 하고 있는 것과 해야 할 정책이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자살예방의 날이 제정된 것도 인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 이 날의 취지일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건 없어 보인다. 자살의 이유는 우울증이기에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울증을 가볍게 볼 것이 아니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기사들만 넘치게 본 것 같다.

  우울증이 문제라면 왜 유독 한국인들이 이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리고 그 우울증이 자살로 연결되는가. 자살의 이유 역시 불행한 가족의 이유 역시 제각각이겠지만 어느 순간 대한민국의 ‘자살’의 나라라는 것은 죽어야 할 이유가 있는 나라, 죽기 좋은 나라라는 건 아닌가. 그렇게 되어 버리는 요소가 곳곳에 채이고 있는 자살의 나라.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라고 백만번 외친다 한들!


  여기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있다. 하야마 아마리. 그녀의 결심은 스물 아홉, 생일에 이루어졌다.


스물아홉 번째 생일, 이제 혼자만의 파티를 시작한다. 혼자인 건 괜찮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혼자였으니까. 그래, 괜찮다. p18

나는 스물아홉이다. 나는 뚱뚱하고 못생겼다. 나는 혼자다. 나는 취미도, 특기도 없다. 나는 매일 벌벌 떨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할 만큼만 벌고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내가 이렇게도 형편없는 인간이었나? 처음엔 물이 뜨겁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끓는 물에 들어온 개구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 것이다. p21


  그녀는 파견사원이고 애인에겐 버림받았고 뚱뚱하고 못생겼고 외톨이다. 그녀는 생일날 떨어진 딸기케이크를 먹으려 하다가 자신의 이 모습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그순간 그녀는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용기도 없다. 마침 텔레비전에는 라스베이거스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고 그녀는 라스베이커스의 풍경에 매료되고 만다. 죽기로 결심했기에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던 걸까.


너덜너덜한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나의 현실과 라스베이거스 사이에는 영겁의 간격이 있어 결코 닿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숨 쉬는 것과 똑같은 공기로 호흡할 수 있는 곳에 저런 세상이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암울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곳, 날마다 행복한 축제가 펼쳐지는 세계, 그곳은 지상낙원 그 자체였다. p44


  그 순간 그녀는 삶을, 죽음을 유예한다. 스물아홉의 마지막 날에 죽기로. 라스베이거스에서 최고로 멋진 순간을 맛본 뒤에 죽기로. 그래서 그녀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죽기 위한 계획을 실행한다. 무력하던 생일날 그녀에겐 목표가 생겼고 용기를 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돈이었으니,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애를 쓴다.

  일본인인 그녀는 파견사원이었는데 돈을 벌기 위해 그녀는 투잡을 띈다. 유흥가에서.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파견사원이기에 퇴근시간이 이르다는 점이었다. 파견사원이란 일종의 비정규직과도 같은데, 한국이라면 그게 가능할까.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정해진 퇴근 시간이 엄수되는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한국의 직장문화는 정말…. 한국의 퇴근 시간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눈치의 시간이다.

  외모에 자신도 없던 그녀가 돈을 더 벌기 위해 선택한 또다른 일이 유흥가의 호스티스라는 점이 놀랍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행동력이다. 이 일과 누드모델일도 하며 살도 빼고 점점 자신감을 갖는다고 해야 하나. 또한, 우연과 운들이 따라오는 것도 같았다.


외톨이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됐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무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외톨이인 것이다. p86 


  정말 그런듯이 그녀는 두 일을 하는 과정에서 외톨이라는 기분을 떨치고 새롭게 관계를 맺는 친구들도 생긴다. 그녀의 처절한 노력들이 치열한 그 기간이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한’ 결심이라는 걸 그녀는 잊지 않았고 드디어 서른번째 생일을 앞두고 라스베이거스 비행기에 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을 베팅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그녀의 20대도 끝나버렸지만, 그녀는 잠에서 깨어 제 손에 쥐어진 5달러 지폐를 보며 뭉클해진다. 그리고 다시 살기로 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왔을 이 5달러짜리 지폐가 갑자기 나를 뭉클하게 했다. 1년이라는 치열한 시간을 환전해서 여기까지 날아와 인생을 건 도박 끝에 5달러를 번 것이다. ‘……그래, 이긴 거야. 달랑 5달러지만 난 이긴 거야!’ p224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실화라고 한다. 일본의 실화수기로 2010년 출간됐다. 하지만 저자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가명인 ‘아마리アマリ’는 ‘나머지・여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죽음을 결심하고 죽음을 1년 유예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죽음을 위해 계획했던 일들을 목표로 삼으며 죽을 힘을 다해 살았고, 그리고 그녀는 변했다.  


삶의 목적을 알고 있는 미나코는 방향을 잃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발걸음이 너무 더디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눈앞의 목표는 너무도 선명하지만 삶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 이후의 시간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인생이란 바다는 목적이나 목표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한 항해를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신대륙을 찾아가는 범선은 타륜으로써 방향을 잡지만, 돛과 노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결국 미나코와 나는 각각 하나씩만 가지고 있는 셈이다. p146


  아마리의 실화를 읽다 보면 그녀의 인생은 판타스틱하다. 그 1년의 간극이 너무 크기도 하지만 현재의 그녀는 훨씬 더 변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이 개인의 삶이 갑자기 남달리 느껴지지 않는 건, 그녀가 진정 죽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그녀는 살고 싶은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었고 살고 싶은 이유를 찾은 것이다. 죽고 싶은 이유가 아니라 굳이 죽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죽고 싶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살고 싶다, 간절하게 살고 싶다는 다른 말이다.

  그녀의 얘기는 죽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만 뺀다면 화려한 라스베이거스에 가기 위한 청춘의 열정에 대한 기록으로도 읽혀진다. 치열하고 힘들었던 그녀의 날들이 잔잔하게 읽혀지는 것은 역시나 ‘실화’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삶에서 ‘결심’만 ‘생각’만 바꾼다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해 응원을 하면서도 약간은 허무해진다.

  지금 이 순간도 살기보다는 죽음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자살이 잠시의 힘겨움에 의한 충동이 아니라면 , 지속적인 상태에 의한 결정이라면 그들에게 그 상태를 지속하게 만드는 수많은 계기들은 도대체 어떤 ‘계기’가 되어야 전환될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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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지는가


   철학이 뭐 별건가? 삶에 대해 생각하는 자세이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좀더 비중을 두는 격언같은 것이라 말하면 안되는가? 철학자라고 철학을 공부한 이들만의 언어로 개념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만이 철학인가? 그것만이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논의되어야 할 높은 수준인가.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진다”


    이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었을 때 사실 나도 그랬다. 이 책은 너무 쉬운데라고. 그래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성평등지수가 높은 국가인 스웨덴에서 이 책이 성평등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도 놀랐다. 한 칼럼니스트가 “페미니즘의 기치를 교육받고 자란 스웨덴 고등학생에게 이 책의 내용은 좀 구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라고 했다는데 딱, 내 심경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난 생각하기를, 좀더 강하고 좀더 처절한 성차별적 상황을 보여주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나보다. 어쩌면 조금 더 포장된 말로 감싼 책을 원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으로 성평등에 대한 의식이 얼만큼 자리잡을 수 있을까 하면서도 가슴에 와 닿는 것보다 이론적인 말의 향연을 더 기다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진다”라는 한 철학자의 기사를 접하면서 내 생각이 짧았다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됐다. 페미니즘에 관한 한, 가장 쉬운 말로 해도 모자라기에 이 책만큼 적격인 것은 없구나라고.

  한편으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철학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삶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그러다 또 생각한다. 왜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여성적 사고라고만 생각하는 건가. 최근 급격히 증가된 혐오논쟁과 더불어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 또한 더욱 강건해지고 공고화되는 듯하다. 물론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늘 있어 왔지만. 아마도 이 부정적 인식의 전제에는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가 ‘여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치마만다도 거듭 이야기하듯이 페미니스트는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모든 성별’이지 결코 ‘여성만’이 아니다.

  아마도 여기에서부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강신주는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입장을 다루나, 아직 인간 보편까지는 수준이 안 올라갔다. 그래서 항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이해하는데 왜 이리 어렵게 느껴질까. 짧은 지식으로, 아니 짧은 지식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가,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 보편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내 이해가 일찌감치 철학적이지 못했거나 한없이 형편없거나 한 모양이다.


오늘날 젠더의 문제는 우리가 각자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돕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를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상상해보세요. 만일 우리가 젠더에 따른 기대의 무게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질까요? 각자의 진정한 자아로 산다면, 얼마나 더 자유로울까요? p37~39


  오히려 강신주 자신이 페미니즘을 폄하하기 위해 여성성을 더욱 강조하며 제한하는 듯하다. 기사 한 줄로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좀더 알아봐야지 하다가 참 마음이 가라앉는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지만 그의 철학은, 그의 책들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의 강의를 들었다는 사람의 트윗글, 교복은 입은 여학생에게 "담요 왜 둘러? 그런거 두르면 안이 궁금하잖아. 저 외국엔 성범죄 하나도 안 일어나. 다 벗고 다니거든.“

  저 말이야말로 나온 맥락을 따진다 해도 부정할 수 없이 강신주라는 철학자가 가진 기본 인식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그러니 이 말은 페미니즘 발언과 연계가 되면서 그가 말한 수준낮은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주장이라기보다 오히려 ‘남성’적 우월주의에 가득찬 시선이 담긴 의식의 표출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도대체 여성에게 참정권이 20세기에 들어온 것과 인간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발단이 된 그의 새로운 저서 철학 vs 철학을 읽어보지 않았다.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고픈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철학’에 대해 가지는 그의 입장이 허울가득한 텍스트적인 지식의 자랑이었던가. 삶의 의미와는 무관한. 그가 말하는 인문주의 시선이라는 것은, 그토록 편협적이었던가.


젠더는 대화하기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주제를 불편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짜증스럽게 여깁니다. 남자도 여자도 젠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꺼리며, 혹은 젠더 문제를 성급히 부정해버리려고 합니다. 현 상태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란 늘 불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p43


  한편으로는 강신주의 말에 동의도 된다. 페미니즘은 수준 낮은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페미니즘은 기본이니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데 대한 인식이니까. 그래서 이것은 기본 중에 기본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니까. 밥을 먹고 어떤 커피를 마실까를 생각하며 커피가게를 찾아가는가를 고려하는 문제가 아니니까.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가장 낮은 욕구의 문제이니까. 낮을 수밖에.


내가 남자와 동행하여 나이지리아 식당에 들어서면, 웨이터들은 매번 남자에게만 이나를 건네고 나는 무시합니다. 그 웨이터들의 태도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사회의 산물일 뿐이고, 나도 그들이 일부러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님을 알지만, 무언가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들이 나를 무시할 때마다 나는 투명인간이 된 기분입니다. 속이 상합니다. 그들에게 나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나도 똑같은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소한 일이지만, 때로는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픈 법입니다. p22~23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프다. 그렇다. 전문가, 학계로부터의 비판에 대해 “난 그들에 대해 전혀 생각 안 한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 50년 지나면 나만 남고, 그들은 아무도 안 남을 텐데”라고 말하는 한 철학가의 이 자만에 내 자존심은 상처입었다. 그의 철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는 건가. 나는 생존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그는 내 생존을 한없이 비웃고 있다. 저와 다른 수준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쓰죠? 그냥 인권옹호자 같은 말로 표현하면 안되나요?” 왜 안 안되느냐 하면,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은 전체적인 인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젠더에 얽힌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부정하는 꼴입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여성들이 배제되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 꼴입니다. 젠더 문제의 표적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이 문제가 그냥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콕 집어서 여성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세상은 지난 수백년 동안 인간을 두 집단으로 나눈 뒤 그중 한 집단을 배제하고 억압해왔습니다. 그 문제에 관한 해법을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그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p44


나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 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p52


  오우! 응고지와의 말을 듣다보면 어떤 철학자는 반드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 듯하다. 그리고 야심한 밤에 난 분노했다. 하지만 나 역시 반성하지 않겠다.


얼마 전에 나는 라고스에서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관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가 그 글을 읽고는 성난 글이었다며, 그렇게 성난 투로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성이 나니까요. 오늘날 젠더가 기능하는 방식은 대단히 불공평합니다. 나는 화가 납니다. 우리는 모두 화내야 합니다. 분노는 예로부터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노에 더해 내게는 희망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더 나은 자신으로 변하는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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