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의 아침
구본형 지음, 윤광준 사진 / 을유문화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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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아침을 맞지 않기 위하여



  잠에서 깨었을 때 마주하게 된 사물과 공간이 낯설 때, 어떤 느낌이 들까. 불안함과 당혹감일지 황홀함과 충만함일지 혹은 기대감과 신기함일 수도 있겠다. 어떤 경우라도 감정의 파장은 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마다 내가 절대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하나라면 참 슬퍼질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어떤 감정을 가지든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맞을 때마다 변하지 않는 일관된 감정만을 지속하게 될까 슬퍼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변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변화한다. 변화하지 않는 것들은 죽은 것이다. 1년 전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1년 동안 죽어 있었던 것이다. 만일 어제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난 24시간은 당신에게 있어 죽어 있던 것이다. p19


  슬퍼지는 이유가 이러했던 때문이었다. 어떤 경우라도 감정을 가진 상황이지만 그 감정에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활성화되지 않은 감정을 느끼는 나를 바라보는 기분.

  저자는 이 책에서 또다시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낯선 곳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때, 그 아침을 신선하게 받아들일 것을! 그 신선한 아침은 자기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그 자기 혁명을 위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 다음의 책이다. 전자의 책에서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면 이 책에선 변화에 대한 저항을 거두고 변화를 수용하려는 이들을 위한 첫걸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인간이 변화에 저항하게 된 이유는 많다. 저자에 의하면 33가지의 이유가 있다. 우선 변화 자체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기도 하고 불확실성, 의지부족 등등의.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욕망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라고 권한다. 그렇게 욕망을 찾아 떠나라고 말한다. 변화는 일상에서 자신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에 하루하루 자신의 시간을 넓혀가는 것이 바로 변화이자 자기혁명의 걸음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낯선 곳으로 여행하며 1주일간의 단식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기 위한 욕망의 목록을 작성했다. 저자는 이 딘식 경험과 욕망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소개하며 마침내 자기혁명을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변화에 대해 관대할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냥할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매일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변화, 왜 변화를 시작하려 했는지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성공적인 변화의, 자기혁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나를 잘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저 청중이나 관객으로 객석에 앉아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주인공인 음악회나 축구 경기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의 삶을 구경하는 증인이 될 수도 있지만, 자신은 한 번도 주인공이 된 적이 없다면 슬픈 일이다. 인류를 위해 한순간의 빛조차 된 적도 없다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삶의 길을 걸어오다가 나에게 이르러,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매료되는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었던 것인가? 미치지 못하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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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지음, 윤광준 사진 / 을유문화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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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별이 이룩하는 축복


  지금까지 몇 번의 개정판이 나온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IMF 당시를 휘감은 베스트셀러다. 누구랄 것도 없이 혼란과 울분과 자괴의 분위기에 듬뿍 젖어 있을 때, 분위기의 반전을 일깨운 책이다. 아마도 그 상황을 타개하기를 원하던 모든 이들의 마음이 이 책 속에서 희망을 발견했던 건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려는 의지가 남아 있던, 어떤 힘이라도 끌어 모으려던 사람들에게 건네진 ‘지푸라기’ 아니었을까.

  분명 IMF는 위기였고 상황의 변화는 연쇄적인 변화를 요한다. 그 변화의 방향과 농도를 찾아가는 것은 한편으론 개인의 일이다. 하지만 IMF 같은 상황에선 한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변화의 방향과 농도를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 때에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혁명적’ 변화를 역설했다.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은 그보다 더 ‘변화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그러나 변화에 대처하는데 주저하고 망설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변화의 방향과 농도를 찾는 방법을 얘기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IBM에서 경영혁신 팀장으로서 자신의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변화경영의 방법들을 여운있는 글로써 표현해낸다. 이 책 뿐만 아니라 저자의 책 전반이 자기계발서로 분류되지만 이 갖는 도식적인 글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마냥 선동적이지도 않고 누구나 쉽게 아는 것을 장황하게 떠들어 대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니가 잘 해야지”하는 식의 찍어 누르는 듯한 압력도 질책도 없다. “난 이렇게 잘했어”와 같은 자기 과시 또한 없다.

  깊은 생각과 깊은 공감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글들로 사람들이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킨다. 동시에 ‘변화’에 대한 의지를 가능케 하고 싶은 욕구를 증가시키며 의지를 독려케 해준다. 그런 힘이 조용히 파고드는 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미풍처럼 조용하고 잔잔하게 다가오는 글귀들이 많은 독서와 사색의 힘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려주며 다정한 이의 위로 같기도 하다.

  이 책이 1998년의 시간에 절대적인 힘을 가진 책이었다고 지금 읽는다고 해서 그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다르진 않다. 그때에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화두가 되고 있는 ‘변화’에 대해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역시 IMF 만큼의 격랑이 일고 있는 나라이고 세계이니까.

  여전히 변화는 ‘나’ 하나만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달라질 리 없는 사회에 나 혼자 변해서 이 세상에 맞춰가리라는 생각은 적극적인 생각인가. 아니면 패배주의적 생각인가. 기회주의적인 건가. 변화는 안팎으로 필요하다. 세상에 맞추어 변화하겠다는 것을 잘 생각하고 잘 골라내야 한다.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권력의 세상인지 아닌지를.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잘못된 깨달음으로 우리를 몰아간 것은, 우리를 기존의 체제에 묶어두고 통제하고 싶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이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과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때때로 우리 부모의 모습으로, 선생의 얼굴로, 직장 상사의 이름으로, 그리고 친구의 한숨 섞인 충고로 우리를 설득시켜 왔다. 그들의 말을 따르는 것은 어쩌면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무난한 처신이었는지도 모른다. p15


  우리의 변화는 나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를 같이 생각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선 ‘변화’의 긍정성은 상쇄될 뿐이다. 내가 변화해야 한다는 혁명적인 변화에의 욕구는 ‘내가 잘 살기 위해서’인 것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 나라도 잘 잘기 위해서’라면 변화의 종착역에 서 있을 때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나만 달라져서는 안되는 상황일 때, 우리는 진정 ‘변화의 대상’에 대해 ‘변화의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욕망이 반사회적일 때, 인간은 불행해진다.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통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개인이 가져야 할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주장한 홉스로부터 시작된 지배자들의 논리이다. 자율성이 없는 사회가 붕괴하는 것은 외부에서 눌러오는 욕망에 대한 압살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에 대한 통제와 관리는, 각 개인의 몫이다.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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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


이현석,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지의 아름다운 경관을 사진에 담고 그 속에 함께 풍경이 된 나를 사진 찍어오는 일이 여행의 시작에서 끝을 장식하는 외향이라면 여행에서 느끼는 모든 생각과 느낌들은 내향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외향보다 내향이 가득해서 책을 덮어도 시각적인 사진 한 장 없음에도 보이지 않는 의미의  끈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만 같다.

   


 길을 오래 걷는다면 비움은 미학의 차원을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됩니다. p6


  사색적인 이 여행의 기록들은 저자의 여행의 이유와 닿아 있을까. 배낭여행이 계속되면 배낭은 간소해질 수밖에 없는 이 당연함 속에 저자의 배낭은 가벼워졌고 그만큼 저자의 가슴은 채워졌다. 십 년의 시간 틈틈이 여행을 다닌 저자는 그곳에서 타인들을 만나며 생생히 살아올 때의 전율이 글들을 쓰게 했다. 현지에서 편지로, 엽서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전하기도 했고 고스란히 그때의 기록들을 서랍 속 노트에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떠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많은 사람들. 그들은 저자에게 사회와 문화와 역사에 대해 재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일상에 한정되어 갇힌 인식의 벽을 넘는 것, 그것이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의 느낌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생각들을 담은 책이기에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여행에 대한 풍경도 사진도 없다. 오직 그곳에 역사와 현재를 아우르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소제목 역시도 그곳에서 만난 이들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 그 자신,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보유)은 누군가를 잊어가는 일(망각)인 셈(p104)"이라 말하지만 그가 선택한 건 오롯한 기억의 틀 안으로 그들을 들이는 것이다.

  여러 모로 “이게 어떻게 여행책이야?”라는 누군가의 소리가 들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정도 장소에 대한 소개도 시간적 순서에도 의하지 않은 이 책이 오히려 가보지 못한 나라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그릴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더불어, 눈에 현혹되지 않은 채 나 역시 저자와 같이 어떤 것들, 삶에서 이루어지는 면면에 대한 재인식의 시간을 경험한다.

  가령, 스페인의 교역의 중심지이자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전파되어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문명의 충돌에 대해 생각한다. 그 대립의 시기와 이유를.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진 상황들에 대해 좀더 깊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부질없이’라고. 그것은 전쟁으로 이어져 각각 승패를 거듭하며 팔백 년을 이었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선 김병화박물관과 마주한다.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되어온 조선인들이 농업노동인력으로 일했고 김병화는 그 리더였다. 이 곳에서 저자는 우리의 ‘디아스포라’에 대해 가지는 협소한 사고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기에 적지 않은 이들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함부로 내뱉고 대한민국의 틀 안에서 훈육된 국가주의의 사고의 수준에서 행동하고 있다고. 수많은 침략을 당하는 역사에 우리나라 역시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있다. 더구나 남북으로 분단된 이 상황에서 더더욱 떠돌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들이 있지만 우리가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권력자들이 이들에 대하는 태도는 어떤가. 일상 속에서 사는 데 지장없기에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며, 그래서 저자에게는 일상을 벗어난 시공간에서 게으른 관념의 틀을 산산조각 내준 풍경을 잊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사하라의 사막 마을 시와에서 사구 넘어 사막의 지평선을 바라보는 저자는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노을이 절경인 풍경 앞에서,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규준과 척도에 대한 개념을 떠올린다. 또한 이것을 사회와의 연관성과 연결짓는다.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미담은 늘 숭고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환경이 가능성을 구속하고 있는 사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 ‘대단한 이들’의 뒤편에는 낙오된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렇게 잉여가 된 이들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환치되고 포장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지금 이곳에서 그들을 주목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기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 들개가 등짝을 맞는 일만큼이나 흔하고 쉽게 일어난다. 작은 사막 마을 안에서 한계를 가지고 살아온 삶은 다재다능하고 리더십도 있는 그가 더 넓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꺾었을지도 모르겠다. p77


  저자가 현지인들을 만나 그들의 생활 속에서 이끌어내는 사유의 면면을 보면 그것이 단지 ‘사유를 위한 사유’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것조차 철저하게 생활이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관념, 그것은 생활을 이끌고 생활 또한 관념을 이끌고 그렇게 서로가 맞물리기에 중요한 요소이다. 내 삶의 진정을 위한 사유의 여행은 저자의 여행 내내 계속된다. 저자가 소제목으로 기억하는 나라의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그를 생각 속으로 이끌어주는 현지인들이다. 그들은 그를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기도 하지만 그 나라의 삶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하며 어떤 때는 저자가 생각할 수 있는 포인트를 집어주기도 한다.

  저자가 여행한 나라들을 살펴보면 스페인, 우즈베키스탄, 홍콩, 베트남, 캄보디아 등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의도한 바는 아닐 지 모른다. 이들 나라들은 모두 전쟁을 겪었고, 사실 역사에서 그 어떤 나라도 전쟁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전쟁의 상처가 없는 나라는 없는 것이다. 그 전쟁의 기억에 대한 시간 차이가 있을 뿐. 전쟁의 대상이 다를 뿐. 같은 경험을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저자가 이것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그래서 저자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전장의 기억으로부터 인지된 폭력의 예감’을 생각한다. 불확실함 속에서 권력의 파괴성을 과거로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권력의 주체로 인해 폭력 또한 예측불가이므로 국가에 대해 자발적이 되고 만다는 것을.


역사는 살인사건처럼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피와 땀으로 얼룩진 근현대사라면 더욱 그렇다. p262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다르지 않던가. 저자와 마주친 사람들은 이 역사가 남겨놓은, 권력자들이 지져놓은 모순과 삶의 피폐성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그런 존재들은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나라의 역사, 사회적 배경을 떠올렸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거듭 생각했다. 나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른 나라의 여행객이 찾아오면 자신의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려 하지만, 그러나 정작 아름다운 풍경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 저자의 이 고민의 시간들은 아름다운 풍경이 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을 더욱 철저하게 보여준다. 그래서였던가? 사진도 없고 그들의 이름도 가명이 된 것은.


'연대와 동정의 차이‘를 들이민다든가, ’나눔과 봉사의 차이‘를 들이민다든가 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성에 경도된 스스로가 낳은 모순이 아닐까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여행 중이든 일상에서든 어디에선가 마주칠 수밖에 없는 구걸과 동정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쌓아온 논리는, 동정은 연대보다 열위에 있으며 계급을 고착시키는 반동적 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런 논리에 따라 구걸에 요지부동 무반응이었던 나는 현실의 ’고통‘들을 대면하면서 그것이 관념적으로 이성을 따르는 이의 어쭙잖은 형식이 아닌가를 의심했다. p283~284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기 전에, 어쨌든 생각과 고민은 인식의 확산을 한다는 점에서, 일단 문제를 인지한다는 점에서 대안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그것이 관념적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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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욕구는 한국이 싫어서


   올림픽에 각 나라의 선수단의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줄기차게 등장하는 피켓을 보며 ‘저긴 어디지?’ 하는 나라들도 등장한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나라가 있는데 가본 곳은? 조금이라도 아는 곳은? 참……. 80일간의 세계일주도 가능한 시대지만 내가 그것이 가능하지 못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이유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유가 있거나 없거나 세계를 누비는 사람도 많다. 이 세계는 수많은 나라에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만큼 여행, 다른 곳을 방문하는 일은 무한대로 일어날 일이다. 그 무한대 속에 역시나 증가하는 여행기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여행지에 대한 소개 책자가 아니라 순수 여행기, 여행에세이의 특징은 첫째 누가 썼느냐다. 그 글을 쓴 이가 아주 유명한 사람이거나 일반인이다. 너무도 당연한 걸. 그럼 일반인의 여행기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아주 특별하게 ‘여행을 떠난’ 이야기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여행기라 분류되는 여행의 에세이가 가진 차별성이 사실 없더라는 것이다.

   유명한 사람의 여행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의 여행이든 동경을 일게 만드는 여행을 떠나고 그 곳에서 자신의 감상을 가지고 그것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여행기가 하고자 하는 말은 늘 ‘나는 그곳에서 나를 찾았다’, ‘여행은 전환과 변화의 기회다’,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떠나라, 여행을 가보지 않고는 말하지 말라’. 뭐, 이런 이야기를 특별히 감상적인 문체로 글로 쓰고 있다.

   그 기록을 읽는 독자에게는 특정한 곳에 가기 위한 참고용이거나 대리만족을 얻기 위함이거나 유명하다니까, 베스트셀러라니까 하면서 책을 읽지만 가끔 타인의 여행기는 씁쓸한 만족을 남긴다. 여행기란 그래서인지 나의 여행의 기록이 아닌 다음에야 글쓴이들 자신의 힐링이 될 뿐 나의 힐링이 되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취향, 스타일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떠난 두 사람이 여행스타일이 맞지 않아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행기에 대한 감상 역시도 책들과 마찬가지로 스타일이 있으니까,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데도 어떤 글은 와닿고 어떤 글은 그저 그렇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스타일을 얘기하니 여행기에 대한 나의 취향은 여행에 대한 소개와 감상보다는 인문학이 가미된 책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곳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이야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어떤 여행기는 여행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오히려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을 결심하기 전의 이야기에 솔깃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한 기억에 남는 여행에세이 또한 흐릿한 이유가 될지 모른다.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탄생한 이야기일 것이지만 모두 그런 이야기를 향해 가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기억에 남는 여행에세이가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스페인 기행>이나 괴테의 여행기록처럼 문학작가들의 여행 기록은 인상적으로 남는다. 이들이 작가라는 점 때문인가 생각도 했지만 또한 시대적인 묘미도 있는 듯하다. 최근의 여행이 아니라 그들이 떠났던 시대의 느낌을 아울러 볼 수 있기 때문에. 읽은 여행책 중 좋은 느낌이었던 건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였다. 

작가도 낯선 이름이었고 처음 책을 쓴 사람이었지만 여행에 관한 책 중에서 다시 읽고 싶은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스타일을 내가 선호하나.

 가을이 되었고 축제의 향연이다. 폭죽소리와 음악소리가 땅을 울리며 귀로 전해지는데 같이 마냥 즐겁지가 않다. 여행을 맘속에 품지만 발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를 또 생각하지만 맘속의 그 열망이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 이유인 듯도 하다. 아주 강렬한 열망으로 여행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서도 미미하게 여행을 마음 속에 드리우고 있는 것은 여행이라기보다 그저 “떠남”에 대한 욕구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 떠오르는 책이 <한국이 싫어서>이다. 이 책은 소설책으로 문학적으로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문체며 전개방식이며 말들이 전혀 울림이 없었다. 그저, 책 제목만이 인상적이었다. 나의 스타일과는 역시 달랐다고 말하면 되겠다만 이 책이 그토록 열광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보면 나만큼 한국이 싫은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이 얘기에 공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이 떠남에 대한 욕구는 다른 이유 없이 한국이 싫어서이다. 그러니 여행에 대한 욕구와는 다른 종류의 욕구이다. 축제의 음악이 난무하는 현장에서도 이탈하고 싶은 마음 가득한데 이 난장판인 나라를 뜨고 싶은 마음이랴 오죽하랴. 한국의 뉴스가 들려오지 않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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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글엔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제목 때문에 라오스 여행기인 줄 알았다. 역시나, 라오스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작가가 라오스를 여행했고 그리고 라오스만의 특별함을 작가식대로 펼쳐내는 이야기인줄 알았건만 라오스는 어디로 가고 보스턴이 튀어나왔다. 찰스 강변의 오솔길을 걷던 보스턴, 뉴욕과 포틀랜드, 아이슬란드, 그리스 미코노스 섬과 핀란드,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이탈리아 토스카나, 일본 구마모토. 이 여행기에서 작가가 담아온 나라들이다.

  이 책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이고 해외에서 곧잘 머물렀던 작가의 경험을 담은 책이다. 이미 잡지에 기고한 에세이들을 다시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했던 그 시간의 경험이 지금보다 더 생생한 기억일 수 있겠다 싶긴 했다. 그런데 작가는 그때도 벌써 책으로 엮기 위한 글을 따로 써두고 있었다 한다. 참, 여러 면에서 놀랍다.

  온전한 여행의 느낌보다 조금 길게 낯선 나라에 머물며 여행자와 생활인의 느낌이 섞인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기억도 끄집어낸다. 작가의 대표작인 <노르웨이의 숲>은 그리스 섬에서 탄생했다. 또한 숲과 섬, 바다 등의 풍경이 가득한 곳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일상생활자로서 방문했던 장소에 대한 글도 상당하다. 던킨 도너츠 방문기와 더불어 스타벅스 비교하기, 재즈 클럽 ‘빌리지 뱅가드’ 및 레스토랑 방문기들이 그렇다. 자연을 보며 느끼는 감상과 이러한 현대의 공간을 마주하며 느끼는 감상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린 것은 아니다. ‘여행지에서 모든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라는 것이 나의 철학(비슷한 것)이다. p137


  그렇다고, 이 여행기에서 작가가 딱히 안 풀리는 얘기를 해 놓진 않았다. 작가의 철학 때문인지 작가의 여행에서 잘 안 풀리는 일들은 비켜간 건가 싶을 정도로 특별한 ‘사건’들이 있진 않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여행을 행하고 그곳을 감상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의 시선만이 담겨 있다.

  책의 제목이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인 만큼 라오스에 대한 인상이 기억에 남는다. 이 말은 작가가 일본에서 라오스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 갈아타는 경유지 하노이에서 들은 말이다. 라오스로 가기 위해 하노이에서 1박을 하던 중에 베트남사람이 물은 말, “왜 하필 라오스같은 곳에 가시죠?” 이 말에서 작가는 “베트남에는 없고 라오스에만 있는 것이 대체 뭐길래요?”라는 뉘앙스를 읽으며 라오스 여행의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그때까지도 이유가 없었지만, 가서 그 ‘무언가’를 찾겠다고. 그 질문은 작가에게 여행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었고 보다 더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라오스(같은 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베트남 사람의 질문에 나는 아직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라오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소소한 기념품 말고는 몇몇 풍경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 그곳에는 특별한 빛이 있고, 특별한 바람이 분다. 무언가를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다. 그때의 떨리던 마음이 기억난다. 그것이 단순한 사진과 다른 점이다. 그곳에만 존재했던 그 풍경은 지금도 내 안에 입체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p181~182


  작가가 여행한 시간은 지금보다 오래 전이지만 그 시간의 차이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곳에 가본 적 없고 작가 또한 재방문하지 않았으니 기억은 작가가 여행한 그 시간 속에 그곳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여행에 대한 생각은 그대로일까?

 

혼자서 낯선 땅을 여행 하다보니 단순히 숨을 쉬고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쯤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더랬다. p220


  사람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듯이 여행에 대한 생각 역시도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여행을 글로 풀어내는 방식도 감정도 차이가 있다. 작가의 여행기는 한창 노르웨이 숲이 아니라 <상실의 시대>로 번역되던 시절의 절정의 인기 시절의 글 몇편만을 기억하고 있는 터라, 생각했던 스타일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잔잔했다.

  전세계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풍이 불고 우리나라에서도 인기있는 대표 작가이기에 이 작가의 에세이도 많은 이들에게 관심이 증폭되었을 테다. 여러 여행기를 읽다 보니 이 작가의 여행기의 차별성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건, 그만큼 작가가 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수많은 여행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더불어 생각한다. 출판시장에서 여전한 열풍을 지속하기 때문에?

  이렇든 저렇든 항상 여행기의 결론은 이것인 것 같다. 자, 떠나라!

  하루키 역시 그렇게 끝맺는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면, 아무도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여행을 가진 않을 겁니다. 몇 번 가본 곳이라도 갈 때마다 ‘오오, 이런 게 있었다니!’ 하는 놀라움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행입니다.

여행은 좋은 것입니다. 때로 지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습니다. 자, 당신도 자리에 일어나 어디로든 떠나보세요. p26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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