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항해 - 감정 이론, 감정사史, 프랑스혁명
월리엄 M. 레디 지음, 김학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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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사고


  오랜 시간 감정은 이성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이성이 객관적이 분석적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에서 얘기되는 것과 달리 감정은, 그것 자체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거나 말했다.

  감정이 생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나아가 감정이 생각에서 발현된다고, 감정이 사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만난 『감정의 항해』는 격하게 반가운 책이다. 저자 윌리엄 레디는 역사학 및 인류학 교수이다. 또한 행동주의 심리학 연구소 펠로로서 감정을 개념과 감정연구에 관한 역사를 분석하며 감정에 관한 새로운 이론틀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역사학 전공자로서 ‘감정’의 연구에 역사를 활용한다. 그가 끌여들어온 역사적인 시기는 프랑스 혁명시기이다. 대체로 감정에 관한 연구는 심리학이나 인류학에서 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연구를 혁명시기와 접목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고, 어떤 이론이 전개될 것인지 상당히 흥미진진한데 저자의 지식과 사료의 활용으로 인간의 감정에 관한 연구가 또다른 접근으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크게 2부로 나뉘어 1부에선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룬다. 여기에서는 인류학과 심리학에서의 연구 내용과 함께 저자가 제시하는 감정의 이론틀을 제시한다. 2부는 프랑스 혁명시대의 감정을 저자가 제시한 이론의 틀과 함께 대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서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감정은 학습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심리학과 인류학에서도 어느 정도 견해가 일치되었다고 보고 있다. 저자의 이 주장의 이유는 이렇다.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감정 개념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감정 개념이 보편적이어야만 고통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는 모두 자유 속에서 살 자격이 있는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역사적 변화도 유의미해지고, 역사가 인간의 감정 구조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기록이요, 정치사회적인 질서를 그 감정 구조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기록이요, 정치사회적인 질서를 그 감정 성격에 합당하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의 기록이 된다. p9


  저자의 감정이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핵심적인 주장은 ‘인지’ 개념과 연관시켜 이야기된다. 감정은 상황에 대한 인지이며 인간은 특정 상황에 놓였을 때 목표가 정해진다고 본다. 그에 따라 생각 재료들이 활성화되고 그중 일부만이 의식에 입장하게 되는데 의식에 입장하지 못한 나머지 활성화된 생각 재료가 감정이다. 저자가 말하는 “이모티브imotive”는 바로 이 생각 재료를 활성화시키고 감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이모티브가 가지는 중요한 함의는 그것이 감정만큼이나 사회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가 개개 구성원의 감정을 장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감정의 의미가 변한다면 감정 역시도 변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 때문에 저자가 프랑스 혁명의 역사 속의 감정을 분석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특정 ‘감정’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어떤 영향으로 변화되는지를 이 분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감정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단순하게 생각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대한민국을 들끓는 ‘분노’라는 감정이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저자는 감정이 자유로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혁명시기를 구분하여 분석하면 감정체제에 대한 반응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자유로운 감정의 항해를 펼쳐나가야 국민들의 감정에 대해 오히려 경직을 강요함으로써 혁명으로 연결되었다고 본다. 감정 피난처란 “감정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전지대를 제공해주고 감정적 노력의 이완을 허용하는 의례, 공식 비공식 조직, 관계”라고 정의한다. 이 감정피난처는 기존의 감정체제를 뒷받침할 수도 위협할 수도 있는데 자유로운 감정의 허용이 이루어지지 않은 감정체제의 결과가 혁명을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의 감정을 유도한다고 했을 때 의도한 감정을 이끌어낼 수도 있지만 오히려 반대의 감정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혁명의 시기는 자유로운 감정의 발현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들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실 프랑스혁명은 이타애적인 개혁 제스처를 수단으로 하여 프랑스 전체를 일종의 감정 피난처로 변모시키려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감정이 무엇인지 오해하는 동시에 국가의 물리력을 투입하여 이타애와 박애를 확산시키려는 역설적인 시도가 전개되자, 1789년에 설계되었던 감정 피난처들은 4년 만에 공포정치라는 악성의 감정고통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p223~224


  감정이 감정체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감정의 항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가 프랑스 혁명시기의 정치가들의 편지나 연설문, 민사소송의 판결문 등의 사료를 통해 분석한 내용은 저자의 우려가 나타난다. 그 시대가, 사회가 억압하는 감정체제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제한적이고 길들여진 감정에 머물러 있는 것. 이것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과 같다. 감정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사고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누리지 못함과 같다. 감정이 사고와 다르지 않다면 감정을 규율하는 감정체제는 사고 역시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의 감정과 사고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 감정의 자유로운 항해는 결국 그 사회의 문화와 규율의 수준이 어떠한가가 관건이다. 그러나 또한 통제적이고 억압적인 감정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권력층의 입맛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감정이 자유를 누리는 인간들이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한다는 것을 감정의 항해를 보며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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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15.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p18~19


  성차별과 인종에 대한 편견이 크게 문제로 부각된다. 충격적인 일들과 함께 접하기도 하지만 coincidence와 같이 황당한 상황과 함께 전해지면 이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어두운 밤 외국 여성에게 다가가 coincidence의 발음을 어떻게 하는지 요청했다는 이 남학생에게 외국 여성은 밤9시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낯선 이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거절한다. 이에 남학생은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한다. 물리적 위협까지 느낀 이 여성은 경비원을 부르고 큰길로 나갔다. 마침 지나던 여학생들이 달려와 괜찮냐며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상황을 진정시킨다. 이 와중에도 남학생은 “영화를 보면 다 그렇다고, 외국인들은 다들 잡담을 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비상식적이고 이기적인 남학생의 행태만큼이나 나를 비탄에 빠지게 한 것은 두 여학생에 관한 것이다. 이 외국인 여성의 눈에는 남성이 마구잡이로 화를 내는 상황에서 두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거듭 사과를 하는 듯이 보였다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보였다고 했으니까. 이 상황에서 남학생이 자신을 ‘성추행범’ 혹은 그 이상으로 오해하는 듯해 격분했다라고 말을 했다면 차라리 이해가 더 쉬웠을 것이다. 저런 황당한 말을 하면서 잘못을 외국인 여성에게로 돌리며 제가 화를 계속 내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찰뿐이고, 그런 남학생에게 여학생들이 사과를 하는 맥락은 도대체 뭐인가? 이것은 너무나 익숙한, 자주 보아야만 했던 모습 아닌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남자친구에게 빌고 있는 풍경. 아무런 안면없이도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


 남자는 욕망과 그 욕망이 퇴짜 맞을지도 모른다는 노여운 전망을 함께 품고서 여자에게 접근한다. 분노와 욕망은 늘 함께 존재하며, 두 가지가 마구 뒤엉켜 한덩어리가 된 상태에서는 언제든 에로스가 타나토스로, 사랑이 죽음으로 바뀔지 모르는 위험이 존재한다. 가끔은 정말 말 그대로 된다. p46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다른 여자들이 자신에게 했거나 하지 않은 일을 갚아주기 위해서 엉뚱한 여자를 강간하거나 처벌해도 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p193~194


  한국의 대학교에서 일어난 이 ‘coincidence’ 사건에서, 외국인 여성은 러시아 출신, 이 학교 외국인 교수였다. 남학생은 이 여성이 교수임을 알았으면 달리 행동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라고 조언하였지만 이 교수는 학생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기로 했다. 이 학생의 행동이 “왜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를 교육하는 것”은 교수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나는 학생의 행동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밤 9시에 외진 곳에서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면서 낯선 백인 남성에게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일은 대중 매체에 보도된 사건들을–한국에서, 그러나 한국 외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남성의 불쾌한 접근을 여성이 거절했을 때, 그 여성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여성을 괴롭히거나, 여성을 폭행하는 사건들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강간 문화”라고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리 주장과 폭력을 제도화하는 사회 안에 배태된 여성혐오적인 문화인 것이죠. 

        -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페도렌코 올가 조교수의 공개서한 중(中)


   이 공개서한에 남학생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는 아직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교수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은 것은 매우 감탄스러운데 남학생 역시 그 감탄을 안다면, 제 잘못을 깊이 깨닫는다면, 다시는 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까. 의식 깊이 쟁여놓은 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정형과 폭력성을 완전히 소거시킬 수 있을까. 올가 교수가 지적한대로 외국인 남성이었으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남학생이 올가가 ‘교수’인 것을 알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올가 교수가 말하는 바대로 좀더 예의를 갖추어 질문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남학생의 의도는 정말 저 단어의 발음을 궁금해 했을까를 의심케 한다. 그의 이어진 반응이 그것을 보여주고 일단, 올가 교수가 이 학생의 접근에 불쾌함과 공포감을 함께 느꼈다는 점이다.

   이 기사를 보고 이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떠오른 것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남자에게 가르치는” 상황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리베카 솔닛의 이 책은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이런 차별적인 상황을 먼저 이야기하며 흥미와 공감을 이끌어 낸다. 그리하여 이 유사한 상황들에 웃음까지 나온다. 전세계적으로 같은 이 상황들, 현상들을 어쩌랴.

  수없이 세상은 변했고 수많은 이들이 사고방식이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도대체 그 ‘수많은’은 어느 정도를 이야기하는가. 이 남학생처럼 자기만의 사고방식에 갇혀 제 행동의 정당성을 폭력적으로 주장하는 상황을 반복해 맞닥뜨리게 되니, 이 세상의 페미니즘은 아직도 멀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성차별의식이 높아졌다고 말하는 동시에 반작용인지 여성혐오는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페미니즘을 여전히 여성도서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도 변화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페미니즘이 포함하고 있는 양성적인 개념을 외면하고 ‘여성’에 한정지어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은 인식의 전환은 이런 책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마치 금기의 도서를 보는 듯이 하지만,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그것이 리베카 솔닛의 장점이다. 유쾌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통찰력있게 상황을 간파한다. 수전 손택과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신화 속 등장인물 카산드라의 이야기에서도 보다 생각할 거리들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이 책은 짧다. 페미니즘의 개념 설명도 상당히 쉽다. 그녀가 주창하는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리베카는 설명을 아주 잘한다.


남성권리운동과 대중적으로 퍼진 숱한 오보들 때문에, 사람들은 요즘 성폭행 무고가 만연했다고 여기곤 한다. 집단으로서 여성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강간 고발이 진짜 문제라는 암시는 개별 여성을 침묵시키고, 성폭행에 관한 토론을 회피하게 만들고, 남성을 주된 피해자로 부각하는 도구로 쓰인다. p169~170


   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이 여성의 억압적인 상황과 여성성을 비하시키는 상황과 침묵의 세계에서 허덕이는 여성을 향한 정체성 정립이 주가 되고 있기에 흥미 유발이 안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페미니즘은 다 거기서 거기이니까,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새로운 담론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왜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를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만큼 아는데도 왜 여전히 현실은 이 모양인지 말해 줄 수 있지 않는가. 계속 들으면서도 무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리베카가 이야기하는 이 여성혐오와 폭력의 구조들에 대한 전개에 반론이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겠는가. 충분히 들을 의향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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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incidence


Synchronicity 리더란 무엇인가

- 싱크로니시티, 미래를 창조하는 리더십 내면의 길

조셉 자보르스키, 에이지21 , 2010.


 

 실검에 등장한 coincidence를 보면서 감정과는 별개로 떠올린 몇 가지 생각 중 하나는   Synchronicity였다. 의미의 차이가 있음에도 이 단어가 연상된 것은 한국번역본의 제목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coincidence의 발음을 빙자로 발생한 이 ‘우연한’ 사건을 보면서 단순한 우연의, 일회성이 아니라 사건 당사자의 내면에 깊이 잠재된 의식의 분출이라는 생각을 하며 홀로 경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 기사와 댓글들은 놓치지 않고 여기에 이 학교를 거론한다. 왜냐면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고 우리나라에서 이 최고의 지성, 서울대가 차지하는 위상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이 지성인이라며, 공부를 잘했네라며 사회에 나와서 어떤 꼴로 군림할까를 생각하다보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대한민국을 흔드는 이 난리의 중심을 잡고 줄줄줄 연달아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학력과 학벌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니까. 같은 꼴. 소위 엘리트라는 인간들의 저열함이 미래에까지 연장되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 비약인가. 연장될까봐 걱정이다가 더 적합한가.

  Synchronicity는 한국에서 「리더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 타인의 리더십을 생각하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누구라도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때가 있다. 내 자신에게도 리더십을 발휘해서 내 삶을 이끌어가야 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 책은 「미래를 창조하는 리더십 내면의 길」이란 부제가 붙었나보다. coincidence, Synchronicity, 리더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사실 이렇듯 간단하다.

  해괴망측한 리더와 그 리더십에 따라 삶이 나락을 치는 상황에서 리더의 역할과 자질에 대한 요구가 특히나 부각되는 이때, coincidence로 인해 이 책의 내용이 되살아나는 이런 우연이 놀라운 건, 이 책의 출발이 워터게이트사건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여느 리더십 역량책과는 다른 특이점을 보인다. 리더십은 무엇인가, 리더의 자질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며 첫째, 둘째, 셋째, 이런 도식화된 나열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외면’적 리더의 역량에 대한 것보다는 끊임없는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조건을 탐구해가는 여정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내용을 전개하기 위해 저자는 두 명의 대표적인 학자를 생각나게 한다. 한명은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전개시킴 칼 융이며 또다른 사람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내용적으로는 칼 융의 ‘동시성’을 형식적으로는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에 따라 서술하는 것이다. 

  칼 융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여기에는 우연한 가능성 이상의 뭔가가 작용하고 있다.”라고 동시성을 정의한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 우리에게 확실한 길을 알려주는 그런 순간들”에 딱 어울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동시성이 어떻게 리더십과 연결되는 것일까.

  저자는 변호사이다. 그는 한국의 박근혜 게이트보다는 덜 추악한 사건이라고 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겪으며 ‘리더’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은밀한 닉슨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리처드 닉슨이라는 사람의 진모를 헌법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터무니없이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이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속이 다 메스꺼릴 정도였다. 충격과 혐오감이 솟구쳤다. 나라 전체가 걱정스러웠다. 인격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나라를 이끌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 국민들이 느낄 공포와 불안이.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의 수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누구의 책임인가?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p54


  다행히 저자는 이런 ‘리더’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는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대통령의 거짓말에 경멸감과 환멸을 느낀다. 저자는 “권력을 남용하는 파렴치한 리더들과의 악순환 고리”가 문제라고 인식하며 촛불을 든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이런 상황을 바꾸지 못하리라는 무력감이 자신을 괴롭혔지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며 '진정한 리더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그는 철학자, 물리학자, 경영자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리더의 자질”에 대한 진실한 접근과 결론에 이른다.

  이 여행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이 여행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 ‘모험에의 부름’을 받은 것이라고 ‘소명’이라 생각한다. 조셉 캠벨은 영웅이 길을 떠나는데 그것은 영웅으로 하여금 그 길을 떠나도록 만드는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그 모험에 따라 영웅은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목적과 꿈을 찾고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이 영웅의 귀환의 패턴을 따라 길을 떠나고 역경을 겪고 결론을 찾고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저자가 찾은 리더는 어떤 것인가. 저자는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리더십이란 사람들이 내부에서 계속 현실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세상의 펼쳐짐에 참여할 능력을 키우는 그런 영역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리더십이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일이다. p19~20 


  이와 같이 저자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미래를 변하게 하리라 생각하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을 리더십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말한다. 변화를 주도하는 창조적인 리더십이 되기 위해서는 강한 헌신과 광대한 비전을 갖춘 리더십은 환경에 얽매인 리더십 조직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얘기한다. 특히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행동이 아니라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깊은 헌신, 애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용기를 북돋는다고 그리하여 실천으로 이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리더십을 위한 헌신의 노력의 과정엔 당연 어려움들도 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흔들리지 말고 내면의 부름에, 목소리에 따라 힘껏 나아가라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러더십에 대한 자질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끊임없는 내면탐구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전혀 별개의 일들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그것은 하나의 관계된 힘을 만드는 연결고리를 짓는다고 말한다. 얼핏 미래의 창조를 위해 열린 사고를 갖는 일은 더불어 순간순간의 일들에도 충실할 것을 주문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어느새 그것을 조직적으로 연결지어 미래를 창조하는 힘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면 말이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내적인 투쟁으로 채워진다. 이런 내적인 투쟁을 통해서 누적된 부담감을 극복해야만, 다시 펼쳐지는 생성적 질서의 흐름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 내적 투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글자 그대로 그것을 ‘겪는’ 것이다. 말하자면 함정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거기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다. 이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다. p234


  워터게이트로부터 충격받은 저자의 깊은 내면탐구와 미래 변화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간절한지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불투명하게 흩트려지는 융의 이론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사고방식이나, 내적인 진실성에 더 깊이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느낌, 내가 이해하는 명확성과는 별개로 약간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기대도 깃든 듯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잘못 이야기하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주의 기운”으로 이해될까 염려스러운 바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리더’의 자질엔 사명감도 포함하여 심리적인 ‘확신’, 그 역할에 대한 ‘확고한 믿음’ 또한 필요하리라는 것이다. 아니다. 최고로 간단한 말은 그냥 이럴 것 같다. “도덕적이어라, 끊임없이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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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 체한 여자


  

   이 책은 대표적인 페미니즘 사상가들의 ‘페미니즘 테제’에 대해 다룬다. 이들을 페미니스트라 불러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이들 여덟 명의 작가이자 사상가들이 당대 사회에서 펼친 페미니즘 논쟁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를 보여준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고 외쳤던 시몬 드 보부아르, 남녀의 성적 차이를 주목한 뤼스 이리가레, 페미니즘에 관해 과학적 시선을 도입한 샌드라 하딩, 페미니즘적 도덕심리 이론을 주장한 캐롤 길리건, 여성적 글쓰기를 제기한 엘렌 식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로서 페미니즘적 차이의 정치를 옹호한 아이리스 영, 급진적 페미니스트라 불리며 ‘퀴어’이론으로까지 확장시킨 주디스 버틀러,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정치경제학 담론을 제기한 줄리 그레이엄과 캐서린 깁슨.

  우리나라 여덟명의 학자와 교수들이 이들 페미니스트이자 사상가들 주장의 핵심과 문제, 비판, 대안을 이들 생애와 더불어 기술한 책이다. 이론이란 어떻게든 쉽게 이해하려 해도 지끈거리는데 각 사상가들의 사상을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고 이들 사상의 문제점과 다른 이들의 비판, 그리고 대안을 잘 설명하고 여러 생각거리를 잘 짚어주고 있다.

  결국 이 모든 핵심 테제들은 여전히 핵심적인 사항이다. 이들 페미니즘 사상가들의 치열한 논쟁으로 젠더 논쟁이 더 활발하게 확산되고는 있지만 그들 시대에 고민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주요한 논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답답한 일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뛰어넘어 함께 공존하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노력, 성적 차이가 차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믿음과 생각들이 이들이 이러한 테제를 생각하게끔 했을 것이다.


  끊이지 않는 논쟁.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도 없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맹목적으로 종속되어 논의가 전개되고 그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로 ‘여성의 존재’만한 것이 또 있을까.

  당혹, 분노, 좌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을 항해케 하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중구난방 확장되는 이야기 중에 제법 불편한 이야기들이 들린다. 쉽게 건너뛰지 못하고 시선이 머무름은 일차적으로 내 탓이긴 하지만 본질과는 다른 접근에 내 분노의 수위가 분산된다. 더 힘을 쏟고 모으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난제 앞에서 누군가 자꾸 문제를 희석시키는지. 이와중에도 어의없는 편가르기와 ‘어그로짓’에 재미들려 걸신들린 듯 하는 이들의 행태가 여당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대통령이 저질러 놓은 일이 하루하루 흘러 넘쳐 폭발할 지경에 이른 2016년 현재, 분명 지금 한국인의 관심은 대통령과 최순실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사건이 폭발한 시점부터 여러 날이 지나 감각에 무뎌질 때도 됐을지 모른다. 어디까지 해쳐 먹었니라고 할 건들은 반복적으로 종류만 다르게 해서 나타날 것이고 불통, 악랄함, 공감능력 결여를 넘어 무능과 멍청이, 칠푼이, 꼭두각시 대통령의 이야기는 더욱 축적되어 가고 알면서도 모른체한 인간들에게 또 속아 저런 것들에게 정권을 맡겨 아름답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 한 반푼이 국민이 된 상처가 결코 아물지 못할 트라우마로 남을 이 판국에.

  이 모든 것은 ‘여자’들이 설쳐서라니! 그래서 앞으로는 여자 대통령은 뽑아서는 안된다라니! 역시 여자는 안된다라니! 정권에 아부하고 또는 조종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이권에 매달린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수두룩하게 많은데, 왜 유독 특정한 ‘여성’ 정치인들만을 골라 잡아 여자라서 저 모양이고 여성가족부가 문제라는 말이 기승전-결로 이어질까. 대단하게도 이 세계를 뒤흔들고 말아먹는 역할을 담당한 건 남자들이었음에도 특정한 몇몇의 ‘악녀’들을 선정해 잘 굴러가는 나라와 남자를 망하게 했다는 오물은 ‘여성’에게만 지워진다.

  명백히 남성과 여성의 성차이는 있다.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이 고정된 이미지와 성차는 극복해야 할 문제가 되어왔으며 차별이 아닌 차이, 다름으로 인정하자고 흘러 왔다. 이 차이는 다름이지 능력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에.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힘’의 사회에서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공감’의 사회변화에 따라 여성적 특성을 요구하는 분야가 자본주의 사회에 더 요구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게서 ‘여성적 특성’을 요구하였나? 애당초 ‘여성’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딸’에 더 방점을 둔 선택이었고 호도였다. 아마도 아들이었으면 추종세력들에겐 더 좋았을 것이다.

  지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는 그 자신이 가진 성별 특성의 능력을 요구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무성적 존재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혼이기에 여성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기대한 바 없었다. 만약 그녀가 박정희의 딸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미혼이라는 점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데 장애로 작용했을 것이다. 왜냐, 한국사회는 ‘미혼 여성’은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로 더 정확한 말로 아직 ‘애’라고 생각하는 나라니까. 남자의 보살핌 속에서 그 역할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하니까. 그랬던 시절이 뻔한데 왜 새삼 ‘여자’란 탓을 하는가. 애당초 여자란 것을 알았음에도 ‘모른 체’ 했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말이다. 종로에서 빰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하듯 ‘여성’임에 대해서는 부차적으로 여기다가 왜 ‘여성’이라고 화를 내는 것인지. 문제를 일으켰으면 잘못된 행태에 대해 비난하고 비판해야 하는데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모든 일들이 설명된다는 듯한 말과 비아냥에 오히려 그동안 대통령이 저지른 짓이 묻힐까 안타까울 정도다.

  먼 나라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들었다. 거기에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오려는 시점이니까. 하지만 국정수행을 잘못했을 경우 나올 말은 여전히 ‘여자’라서 안 된다에서 ‘역시 여자라서 그것밖에’ ‘여자는 안돼’라는 말일 것이다. 국정수행을 잘못한 무수한 남성 대통령에게 ‘오, 남자라서 안 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개별적 존재로 보지 않고 여성 전체로 매도하는 이 습관적 여성 차별은 뼛속 깊이 DNA에 박혀 있는 것일까,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것일까.

  ’현대 여성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지금의 여성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똑같은 이야기가 몇백년, 몇천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현대 여성 페미니즘의 테제들‘이란 주제 하에서 논의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끔찍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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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색하고 정책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  : 문제는 정책이다


  일찍이 이 사회를 향해 “분노하라”고 외쳤던 스테판 에셀이 생각난다. 앞장서서 “분노”의 실천을 했고 그리고 “분노만으로는 안된다”며 대안을 제시했던 사상가의 목소리가 앞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언젠가부터 내 온 몸에 깃든 이 분노의 메시지를 나도 모르게 조금씩 흘리고 있을 때면 이내 핀잔을 듣곤 했다. 가끔은 그러한 반응에 더욱 당혹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정치’라는 게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취향의 문제를 떠나 ‘금기’가 되는 것을 수없이 겪었다. 취향의 문제이거나 혹은 성격의 문제로 취급당한 정치이야기는 한편으론 ‘시비거는’의 단어와도 동일했다. 어느 틈에 ‘정치’라는 이야기가 이런 다양한 단어를 함축하면서도 절대적으로 하나만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을까. 정치이야기는 곧 박근혜 비판으로 인식되는 현장은 세대가 다를 때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세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정말로 취향의 공동체 속에 진입하지 않는 이상 어느 자리에서나 정치 이야기는 불편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당연할 듯도 하다. 그 이야기의 정점은 대통령으로 이어지게 되어있으니까. 그렇다면 정치이야기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으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불편한 것이었을까.

  정치는 한 인간에 대한 호불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안녕을 위한 이야기라고 누누이 변명, 해명, 증명, 반박해야 하는 일은 참 답답하고 짜증나는 일이었다. 정치는 정책이며 제대로 된 ‘정책’에 대한 나의 욕구가 분노조절장애자로 성격이상자로 낙인찍히는 상황에서 차라리 속시원히 “그래 나 성격 더럽다!”라고 외쳤어야 했는데. 생각해보니 다 내가 잘못했다. 더 열내지 못한 것도 지친 것도.


 우리가 세계화에 종속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대다수는 무력감을 느끼고 체념하며 운명론자가 된다. 모든 희망을 잃고 정치에 무관심해지거나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다. 세계와 유럽에 종속됨으로써 빚어지는 해악을 인식하는 혹자들은 그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 즉 우리 프랑스를 탈세계화하고 탈유럽화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한다. 이것은 우리가 모면했다고 여기는 종속보다 고립과 폐쇄가 더 큰 해악임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3


  무력감. 체념. 오래도록 뼈에 깊이 새겨진 단어다. 원하지 않았음에도. “떠들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라며 자기계발에나 힘쓰라던 사람들 속에서 떠들기만 하는 자괴감을 느꼈던 것도 이제 와서 후회가. 더 실컷 떠들 것을.


  사회에서 인간은 “정책”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다. 담배값 인상 정책이 미치는 영향만 해도 정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니 정책은 정치와도 같다. 이것을 아는 이익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 결정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선 특정한 이익집단이 주무르는 정책들이 횡행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맞닥뜨리고 있다.

  스테판 에셀은 사회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분노하라 외쳤고 더 깊은 이해와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또한 포기하지 말라고도 했다. 연대, 연대, 연대! 그의 외침에 동감한 많은 이들이 나서서 분노했고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분노하고 포기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역시 정책이다. 스테판 에셀은 이 책에서 정치를 사랑하기 위한 13가지 제안을 한다. 웰리빙정책, 불평등문제, 교육, 실업, 소비정책, 청소년정책, 문화예술 등등 필요한 개혁과 문제들을 규명하고 해야 할 이루어야 할 정책들에 대해 제시한다. 특히 웰리빙 정책은 “양과 타산과 소유의 헤게모니에 맞서 우리는 대규모의 삶의 질 정책”으로 물질적 측면이 좀더 부각되는 웰빙과는 다르다. 그의 제안들은 물론 유럽이라는 사회, 금융위기 이후의 상황이라는 시기적인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맥락이고 소소한 것들 모두 우리 현실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 특정한 국가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잘 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이끌어낸 온갖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고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다.

 이제 우리 역시 “정책”에 대해 다시 환기해야 할 때다. 우리의 삶을 이끌 정책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것은 무엇인지. 여기, 스테판 에셀이 제안하는 정책들과 그것에 대한 메시지가 방향을 일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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