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이 필요할 때


쇼펜하우어 문장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훈, 2006.


 쇼펜하우어 하면 염세주의 철학자의 대표라 기억된다. 이 철학자의 문장론은 얼마나 다를까를 생각하며 책을 펼쳤는데, 상당히 간결하고 쉬운 글이었다. 자연적으로 철학자들의 책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부터 갖고 있던 것을 말끔히 씻어주듯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은 사색과 글쓰기, 독서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담고 있는 글이다. 더 정확히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집 <어록과 보유>에서 사색, 독서, 저술과 문체에 관한 부분만을 역자가 추려 제목을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이라 붙인 것이다. 명언처럼 명료한 생각의 전개가 돋보인다.

  쇼펜하우어는 사색하는 인생은 남다르다며 사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고, 누구나 공부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를 통해 사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사색이 단순한 신변잡기적 생각의 흐름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스스로 사색하는 정신은 나침반과 같고, 사색의 결과에서 얻어지는 것이 사상이라고 말한다. 단, 독서는 타인의 생각을 읽는 것이기에 독서보다 더 한발 나아간 행위가 사색이고 사상가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색을 통해 사상가가 되었다면 사상가의 언어는 어떠해야 하는가.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사상가의 글쓰기에 대해 말한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가능한 순수하고 명확하게, 간결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단순함이야말로 진리의 특징이며, 모든 천재들 또한 단순함을 사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아름다운 문체는 사상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 시대를 농락하는 사이비 사상가들처럼 문체를 통해 사상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문체는 사상의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졸렬한 문장이 탄생하는 원인은 문체가 졸렬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사상이 졸렬하기 때문이다. p105~106


   글쓰기는 생각하는 힘에서 나온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글쓰기는 글쓰는 기법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생각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렇기에 독서와 생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만 마냥 독서를 통해서 생각의 정리가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점은 극복해야 할 문제이긴 하다.

  쇼펜하우어는 사상가의 글쓰기와 문체를 이야기하면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헤겔의 저작물에 대한 비판을 제법 한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헤겔의 글은 ‘졸렬함’의 표본이 되는 모양이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점차 독일어의 문법 체계를 파괴하는 글쓰기 형태가 이뤄지는 것에 상당히 분개한다. 언어의 삭제와 왜곡된 용법이 언어의 의미를 침범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독일어의 핵심이랄 수 있는 완료형 시제의 삭제는 모국어를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야만어로 전락시키게 될 거라며 제대로 된 문법의 교육을 강조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러한 언어의 삭제가 글쓰기의 명료함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오로지 생각의 힘으로 이뤄내야 할 것을 문법의 삭제를 통해 행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표현을 정확하게 하는 힘, 즉 수단이야말로 모국어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힘과 수단에 호소할 때 비로소 사상은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으며, 작가의 미묘한 심리형태까지 정밀하고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아름답고 생기 있는 고전적인 문체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문장을 가리키는 말이다.p133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철학이라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사색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은 흔들림없이 명언처럼, 힘있고 강건했다. 그러나 언어와 문법의 당시의 글쓰기 체계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격앙되고 설명적이었다. 구체적인 단어와 문법체계를 들어가며 독일어의 문법 파괴 현상에 대해 지적하고 분석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사색과 글쓰기, 문체를 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색과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명확했다. 그렇기에 이 세 주제를 관통하는 작가의 사상 또한 깔끔하고 명쾌했다. 독서도 필요한 일이고 중요하지만 그것은 타인의 생각을 읽는 일이므로 쉬운 사색의 방법이다. 제 사상을 다듬는 일은 독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좀더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색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색을 통한 글쓰기는 명확한 사색을 통해 제 사상을 잘 정립함으로써 이뤄진다는 것이 쇼펜하우어가 전하는 문장론의 핵심이었다.

  독서가 타인에게 제 생각을 떠넘기는 행위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지금 시점에서 와닿는 것은 사색은 제쳐두고 독서에 매달리는 행위가 지극히 편안한 길만 가려는 방법이란 말 때문이기도 하다. 지극히 그 심정으로 독서에 매달리고 있었다. 독서가 가장 쉬웠어요. 그러나 지금은 내게 사색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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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상하군요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김정선 저, 유유, 2016.


  이 책의 핵심은 문장을 쓸 때의 주의해야 할 표현이다. 그런데 그런 가르침은 한쪽에 제쳐두고 함인주 씨와의 메일 내용이 더 흥미를 끈다. 함인주라는 작가의 존재를 확인해 볼 정도로 궁금했고, 메일의 내용이 더 끌렸다. 그렇게 난,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란 문구를 들어, 재밌고 기억나게 문장 표현을 다듬는 법을 알려주려는 저자의 핵심 내용보다 부분 내용에 더 집착하는 독자가 되었다. 사실 저자가 짚어 주는 내용들은 낯설지 않은 익숙한 내용이었다. 다만 고쳐지지 않을 뿐. 머릿속에 잘 정리된 교정본이 들어 있다 한들 문장쓰기 습관을 고치긴 쉽지 않다. 좋은 말로 습관이고 내 문장의 특성이라며 감싸고 있을 뿐인. 그래서였을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문장 다듬기의 실질적인 내용보다 메일 내용과 그들 만남이 더 생각난다. 그리고 애당초 이 글의 핵심 역시도 메일의 내용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실화인지, 허구인지를 생각지 않고 나중에서야 메일 내용은 허구였던가 생각했다. 메일은 교정 작업을 하는 저자에게 교정을 받은 번역가가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는 메일을 보낸 데서 시작한다. 형식적으로 답변하다가 메일의 주인공 함인주의 문장에 관한 질문이 지속되자 저자는 실제 교정작업지를 살펴보며 함인주의 문장을 분석하고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함인주는 카프가의 단편 「유형지에서」를 거론하는데, 끌림의 주된 요인이 이 부분이었다.


소설에 나오는 기계는 실제 비인간적으로 작동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기계가 이루는 세계에는 나머지가 없기 때문이겠죠. 조립을 끝낸 뒤에 볼트나 너트가 남는다면, 또는 부품은 만지 않더라도 빈자리가 남는다면 기계로서 작동할 수 없을 겁니다. 나머지를 갖지 않고 빈자리도 없는 기계는 이처럼 자기 완결적이라 치욕을 알지 못하죠. 치욕이란 스스로를 나머지나 빈자리로 여기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p124


  문장이 이상한지, 표현을 제대로 하도록 도와주는 문장 교열책을 들여다보는 이유 자체도 그것 아닌가. 내 문장을 갖고 싶은 이유, 내 문장이라 부를 글을 잘 쓰고픈 욕구. 그러나 문장의 어색한 표현이라 하며 밑줄 좌악, 빨간 줄 좌악 그어 수정하다 보면 그 문장들은 하나같이 동일한 문장이 되어 한곳에 집합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과장이겠지만 이에 대한 기억이 분명 있다. 학창시절 교편에서 한 원고를 두고도 문장을 교정하는 이에 따라서 수많은 문장으로 교정되어 나타난 기억. 교정자 각각은 자신만의 문장으로, 문장의 어미들을 수정해 놓았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함인주의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게 할 요소인 것이다.


언어가 개인의 것일 수 없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발화는 개인의 입을 통해 이루어지고 대부분의 문장 또한 개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니 말이나 문장에는 개인의 목소리가 들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에는 ‘개인의 목소리’가 들어 있지 않더군요. 선생님이 손보고 다듬는 문장은 분명 누군가 개인이 쓴 것이고 따라서 그 누군가의 목소리를 담고 있을진대 선생님이 손보고 다듬은 뒤에도 그 목소리는 그대로 살아 있는 건가요? p118

    

  글을 쓰는 개인이 자신의 문장을 수정하면서 점차로 자신만의 문장을 만들어 나가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선 타인이 쓴 말을 써보기도 하고 내 표현을 정확한 문장표현법어 맞추어 재단하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는 중에 타인에게라도 글을 보여줄라치면 쑥스러움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이 나라에서는 메일을 쓸 때조차 상대방이 메일의 오자를, 맞춤법을 확인하는 건 아닌가하는 강박에 시달린다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까, 이 글 속 문구처럼 ‘치욕’을 겪을까 전전긍긍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글쓰기에서 멀어지기도 할 것이고, 글쓰기가 즐거움보다 두려움이 되어 버릴 것이다.

 

기계적이라는 말은 반성과 회의를 모른다는 말이고 따라서 ‘자기’를 갖지 않는다는 말이니까요. 합의의 세계는 바로 이런 기계의 세계일 겁니다. 합의된 내용보다 형식을 그 생명력으로 삼음으로써 참여자들을 나머지로 만드는 세계 말이죠.

 말과 글 또한 합의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라면 ‘나’는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늘 치욕을 느껴야 하는 걸까요? 합의된 대로 말하거나 쓰지 않으면 내 생각이나 의도는 물론 느낌조차 표현할 수 없다는 치욕 말입니다. 끊임없이 말하고 쓰면서도 끊임없이 그 말과 글의 세계에서 나머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치욕……. p126~127


  내 문장을 갖는 일. 저자의 말대로 ‘최대한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좋을 일이지만 문장쓰기는 늘, 그렇게 문장표현이라는 굴레에 가려 내용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형식적 두려움, 그러니까 합의된, 기계적 세계를 탈피하는 일조차도 그것을 수없이 겪은 후에야 이뤄질 세계가 될 지 모른다는 것이다. 글이, 문장이, 이상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도 타인의 눈을, 손을 거쳐야만 비로소 인지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만큼 이미 인이 박혀 버린 내 표현과 문장들에 ‘치욕’을 찾는 일은 기쁜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양가감정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이 책이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많은 이들이 글쓰기에 갖는 관심을 반영한 것일 게다. 그 많은 독자들은 이 책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아쉬운 점은 교정과 교열에 관한 책임에도, 출판사가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책의 편집이, 글자체가 깔끔하지가 않다. a4에 쓴 글을 인쇄한 듯한 성의없는 출간으로 느껴졌다. 쓸데없이 페이지를 늘이는 책도 맘에 들진 않지만 최소한의 책의 외면도 생각지 않는 출판도 맘에 들진 않는다. 독자들에게 훨씬 더 읽기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편집이 그렇게도 이상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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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 풍경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유주환, 문학과지성사, 2014.

 

    한 해를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 스펙트럼을 경험하지만 2016년 한 해에 끝자락에 걸린 최고의 단어는 ‘자괴감’일 것이다. 그 자괴감을 아래로 내리고 오래도록 한국사회가 한국인에게 안겨준 감정은 모멸감이다. 자괴감마저도 모멸감 후에 오는 감정일 테니까. 모멸이 만연된 한국사회에서 이 책이 가져다 준 성과라면, 거듭된 모멸의 현장을 맞닥뜨리는 거랄까. 모멸은 모멸감을 낳는다. 거침없는 모멸의 현장은, 오래도록 한국사회가 그것을 당연시해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저자는 감정이란 일정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라 말한다. 그래서, 모멸감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모멸받지 않는 생을 위한 사회문화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저자는 “감정의 행복을 도모하는 문화”를 구상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저자는 모멸감의 기본적 속성과 그 감정의 뿌리인 수치에 대해 먼저 살펴보는데 수치심이 사회통합과 자아파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욕이 바로 이 수치심의 촉발제이다. 이 모욕이 삶과 인간관계를 왜곡하고 폭력하고 있는 사례에 대해 저자는 무수히 보여준다.

   이 모멸 만연 사회에 대해 누구나 같은 진단을 내릴 것이다. 한국사회의 경쟁구조. 불균형 시스템, 경제성장을 강조하지만 분배정의는 나 몰라라 하는 사회. 학력은 높지만 지성은 쇠퇴하는, 혹독한 경쟁에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이 그 원인이리라. 저자는 말한다. 사소한 차이들에 집착하면서 경쟁에 민감한 한국인은 그렇기에 모멸을 일상화한다.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제도와 문화도 모멸감을 준다. 열등한 집단에 대한 범주화, 비인격적 관료제도 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문자해고통보, 갑을관계 등등 모욕할 거리에 대해서 너무도 쉽게 찾아낸다. 무엇마다 ‘충’을 붙이며 비하하는 것에서도 그렇다.

   저자는 이것이 시민사회와 인권의식의 미성숙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너무도 ‘경제성장’ 위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늘 경제성장을 외치고 기치로 내걸지만, 언제 경제가 정말로 성장한 적이 있던가. 그러면서 늘 인권과 시민사회 문화의 성장에 대해 외면한다. 어쨌든 저자는, 우리 사회는 모욕의 실체를 규명하고 모멸감을 성찰하는 언어가 빈곤하다고 말한다.

 

수치심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서 유발되는 감정이라면, 모욕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따라서 수치심에는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섞일 수도 있지만, 모욕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욕감을 유발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 분노나 원한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p64

 

   언어가 생각과 문화를 담아낸다고 할 때 한국 사회에선 무형의 폭력에 대해 둔감하다. 한국인은 타인을 모욕하는 말을 쉽게 내뱉고 또한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과민하다. 과시적이며 인정 욕구 또한 강하다. 심지어 악플 반응에서 기꺼이 즐거움을 느끼려 한다. 갈수록 만면해지는 개인주의와 인종주의 또한 모멸을 가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모멸은 사람을 비하하는 것,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멸감을 느끼는 순간, 조롱과 멸시와 차별과 오해와 동정의 시선속에서 살인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존중해야 한다고 당연히 말하고 중요성을 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하여, 행복한 감정을 영위하고 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존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에게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자존감이다. 품위를 훼손당했다고 생각할 때, 목숨을 걸고 보복하거나 그것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친다. 아니면 삶의 의욕을 잃고 무기력 상태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났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는 사회를 가리켜,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이유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 또는 그럴 만한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다. p210

 

   자존감이 향상될 수 있기 위해서는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모욕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담론을 만들고 사람들의 성찰을 이끌어낸 운동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타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습관화된 문화에 대한 제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인간의 자존감이 정체성이 사회적 지위와 동급으로 삼는다면 자존심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렇기에 회복 탄력성이 강한 긍정적 자아존중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의 행복감을 우월감과 동일시하는 것도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마치 행복강박관념자인 듯 행복에 집착하고 살지만 그것을 잘 들여다보면 타인과 비교한 우월감을 행복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불행의 원천이 된다는 것일 인식해야 한다.

 

모멸감을 줄이려면 이러한 문화와 사회 풍토를 바꿔가야 한다. 가치의 다원화가 핵심이다.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여러 차원으로 틔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평범함과 비범함을 나누는 기준 자체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이라면 모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바탕과 존엄함에 눈을 떠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마다 지니고 있는 다양한 잠재력이 개발되고 꽃피울 수 있는 기회가 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면서 도전과 성취를 북돋아주는 관계와 공동체가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p305~306

 

   결국 개인의 노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 하나의 변화로 행복해줄 수 있기도 하다. 자신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다 그래 좋다. 그러나 언제나 무너질 수 있는 토대속에서 이 행복감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더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간다. 사회의 변화가 개인의 보다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모든 것은 사회다. 그 사회를 만든 것도 개개인의 사람이다. 다시 이 상호관계의 작용을 생각하며 ‘나 혼자’ 만의 변화가 아니라 함께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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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 (반양장) -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 연구
손병석 지음 / 바다출판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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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이라둔쿠스에게 박수를


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 :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 연구


정의로운 분노가 부정되는 사회는 고대 희랍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유인인 아닌 노예들의 사회다. p542


  오래도록, 이러한 상태에 놓인 사회에 살고 있다. 차라리 신화속 야만의 사회가 질서있고 더 정의롭게 느껴질 만큼이다. 분노란 정의롭지 못함에서 기인하다는 생각을 갖기에 분노의 긍정성에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그러나 사회는, 아니 정확히 권력은 체제에, 권력에 반한 분노를 평가절하하며 위험 요소로 ‘처리’한다. 그렇다. 권력에 의해 분노는 늘 처리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여 일어나라!

  

  『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은 제목 그대로 고대 희랍과 로마의 철학자들에게서, 신화에서 배우는 분노에 대한 연구다. 왜 수많은 인간 감정 중에서 분노를 끌어왔는가. 그것은 분노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통로이다. 물론 분노의 결과가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부당함에 대한 영혼의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부정의만 만연된다”는 점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다만 분노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자연적 분노로 보기는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분노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바가 저자와 같을 것이다. 통제를 벗어난 개인적 분노가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필수적인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 그러한 점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 책에서 이 자연스러운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서 고대의 철학자들의 책들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가 선택한 텍스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속 영웅,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와 에뤼뉘에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 학파에 관한 내용을 텍스트로 정한다. 이들 텍스트를 통해 분노가 무엇인지, 분노의 통제와 제거는 가능한지를 탐구한다.

  사회·정치적으로 ‘분노’의 발현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이 책을 들었지만 이것 외에 텍스트를 통해 신들과 영웅들의 ‘분노’를 보는 것도 충분한 재미가 있다. 가령 전쟁 중의 아킬레우스의 분노의 측면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본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전리품인 브리세우스를 빼앗기고 분노한다. 긴박한 상황에서 그 일에 대한 분노로 더 큰 문제를 초래하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현재의 눈으로 보건대 쪼잔한, 미친 x 소리가 나오게 하지만) 영웅시대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명예 박탈에 의한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그것이 비록 공동체 전체의 비극을 야기하게 되었긴 하지만 당시의 사회에서는 적합한 감정의 표출이라고 말한다.   

  잦은 분노를 하는 복수의 여신들의 분노에 대한 해석, 그리스 신화에서 악녀로 평가받는 메데이아의 복수에 대한 해석 또한 흥미있다. 최근의 신화해석이나 인문학 책들에서 메데이아에 대한 시선을 다르게 보는 것이 제법 있긴 하다. 이 책에서도 메데이아의 분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메데이아의 분노는 여성에게 남성과의 결혼은 불평등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여성의 불평등과 부자유에 대한 항변을 대변한다. 여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일생에 걸쳐 가정에서만 활동이 이루어진다. …메데이아는 여성의 목소리가 공적 영역에서는 침묵당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온전한 의미의 자율적이며 평등한 존재가 아님을 항변하는 상징적 인물인 것이다. p374


  이 책에선 사회·정치적 맥락에서의 분노와 개인적 차원의 분노의 결과에 주목하면서 공적인 영역에서의 분노의 긍정적 기능이 있음을 명확히 한다. 또한 감정이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특히 분노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대해(이러한 평가는 주로 세네카 학파의 주장이었다) 바로잡고 우리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향, 즉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으로 분노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분노는 잠들어 있는 공동체를 깨울 수 있는 계몽된 영혼의 외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회가 보다 더 나은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의 분노에 눈을 감거나 눈을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당한 분노에 눈을 감는 사회는 곧 그 사회의 불의와 부정 그리고 도덕적 타락을 용인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분노해야 될 때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p542


  지속적인 촛불혁명에서 나타난 바는 국민들은 분노해야 될 때 분노했다. 최대한 정의로운 분노를 구가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시 드러난 바는 국민들은 바르게 분노할 줄 아는데 ‘권력자’들은 이 분노를 이해하는 방식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답습해온 그대로의 사고로만 ‘분노를 바라보고 처리한다’.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끌어들이고 역시나 평가절하하며 ‘부정의한 분노’라는 ‘특정인의 분노’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그러니까 결국 분노에 대해 배워야 할 이들은 일반 국민들이 아닌 것이다.

  사회·정치적인 맥락에서의 분노의 의미에 대해 배우고 깨달아야 할 사람은 언제나 ‘권력을 쥔 자“의 몫이다. 그 권력을 국민이 주었다는 사실을 언제나 선거 기간에만 인식하는 이들에게 ’정치공학‘이 아니라 ’분노론‘에 대해 학습할 의무를 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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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인문학 - 감정의 프리즘: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
소영현 외 지음 / 봄아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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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민주주의


감정의 인문학 - 감정의 프리즘: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부정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희노애락의 인생사에서 ‘감정’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통제된다면 과연 인간은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에 대한 비난 역시도 존재한다. 어쩌란 말인지. 상투적이고 원론적인 말이 대안이 되겠다. “적당히”. 그 적당의 수준은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래저래 치이고 마는 ‘감정’인 까닭에 오히려 적절한 상황에서 기를 펴지 못한 감정들이 분출되거나 분출되지 못하여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게, 웃음도 눈물도 분노도 왜 그토록 타인의 눈치를 봐가며 학습된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건지. 감정의 자연스러움이 곧 진실이라면 이 비극적 감정의, 조작된 감정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이 책은 감정에 관한 인문학적 탐구다. 각기 다른 전공의 세 명의 저자들의 말대로 하면 ‘감성적 사회비평’이다. 이것은 위로와 공감에서 더 나아가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비평이란 얘기다. 저자들의 목적은 이것이니 독자로서의 나는 그들의 의도에 맞는 변화가 있는가를 살펴보면 되겠다.

  상당히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책에 대한 사전 정보없이 제목으로 끌렸고 책 표지도 매력적이었다. 새해 들어 ‘감정’에 대한 새삼스런 고찰을 하다 여지없이 생각난 책이다. 이래저래 생각해보니 인문학과 사회학이 가미된 글에 대한 호감은 내 개인적 취향이구나 싶다. 그러니 감성적 사회비평 역시도 취향 저격된 셈이다.

  감정의 가장 대표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를 중심으로 감정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겪는 일련의 상황들, 영화이거나 소설이거나, 점성술 등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모든 것이 감정을 탐구하는 자료가 된다.


감정에 대한 탐색은 단지 주체가 경험적으로 인지하는 신체적 반응이나 직관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의 관계론, 의식과 무의식의 작용, 표상된 것과 감춰진 것의 역학, 역사와 현재의 연계와 상호 간섭 방식, 욕망과 가치의 충돌, 윤리와 관습이라는 사회적 요소들이 다선적이고 중층적으로 관여하는 복잡계에 대한 총체적 탐색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p26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왜 감정에 대한 통제나 억압이 주로 이루어지는가, 자기계발서 속 감정에 대한 조언들은 왜 억제와 통제가 아니라면 특정감정에 대한 지향인가. 감정에 대한 교육은 그것만이 지향하는 특정한 방식이 있는 것인가. 어쨌든 ‘감정’을 표출하는 주체가 정말 ‘나’가 맞는가. ‘나’의 감정표출에 대한 권리도 없다면 타인의 ‘감정’에 대한 이해는 과연 가능한가. 감정의 주체가 되지 못해 나타나는 영향은 무엇인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감정 표현은 미숙하거나 유치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세상과 대면하기 위한 결의이자 선택이다. 감정의 ‘집단적 표현’이 곧 저항의 제스처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p26~27


  “‘가정폭력’은 가부장제 위계가 은폐할 수 없었던 구조적 폭력의 일면이자 한국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위계구조의 폭력적 분출(p58)”이다. 가정폭력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수치와 분노의 감정에서 보면 인종적-국가적-계급적-젠더적 차원의 위계적 폭력 구조가 연관된다. 사실 모든 감정의 면면에 계급과 성별이 가득 차 있다. 이에 대한 경험은 사실 너무도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갑을관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회에 만연한 갑질 속에 잘 드러난다. 또한 ‘남성의 화는 합리적인 분노‘로 ‘여성의 화는 성격이상’으로 치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위계에서 보듯이 사회는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막고 있다. 그것의 이득이 없지 않다면 적극적인 개선을 해나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한 분위기 형성을 보건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감정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관습화된, 위계적인 이 구조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 이것을 저자들은 “감정민주주의 실현”이라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결코 인간답지 않으며, 그런 위험사회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성자라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옹호라기보다는 인간성에 대한 패배주의적 탄식으로 다가왔다. p228


  어쩌면 너무나 익숙해서 그러려니 했던, 아니면 익숙하지만 그래서 불편했던 감정의 표현 방식들에 대해 저자들이 비평은 공감을 준다. 일상의 모든 감정들에 대한 명철한 탐구를 통해 감정의 민낯과 포장된 감정에 대해 가늠하게도 된다. 감정표출마저도 자유롭지 못한데 무슨 인간다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잃어버린 나의 인간다움이 통제된 감정교육만큼이나 억압되어 있구나를 생각하게끔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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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7-01-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일단 지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해서인지... 책 내용이 마음에 와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