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를 쓴다는 것


매혹의 러시아로 떠난 네 남자의 트래블로그, 서양수·정준오, 미래의창, 2015.


  긴 연휴가 시작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인천공항에는 무수한 인파가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이 나라를 떠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떠나고 있다. 그래, 그동안 너무도 지쳤다. 지난 겨울부터 봄까지 너무도 힘들었던 시간이다.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나라 때문에 아직 회복되지 않은 채 바짝 긴장된 몸과 마음. 이 기회를 맞아 힐링을 하고 돌아오면 5월엔, 5월엔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정권을 볼 수 있을까.

  

 “시베리아 자작나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여행은, 홀리듯이 가더라도 몸이 지쳐 돌아와도 다시 가고프다. 여기 네 남자가 떠난 러시아여행처럼, 여행에서의 잊지 못할 기억이 자꾸 불러댄다. 여행 책들의 결론은 한결같다. 어쨌든 떠나라!

  이 책은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네 명의 남자들의 러시아 여행기이다. 네 명의 남자들은 2008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난 인연으로 다시 한번 러시아를 떠난다. 갑작스럽게. 네 명이지만 두명만이 여행 서술을 담당하고 있고 그들이 방문한 러시아의 감상과 겪은 여행 에피소드를 곁들이고 있는 여행기다. 네 명의 왁자지껄한 여행의 일상이 담겨 있다.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경험을 통해 여행에 대한 욕구를 충독질하는 일이다. 가고자 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대한 인상을 타인의 경험을 통해 간접경험하며 절실하게 나도 여행을 가겠다는 마음과 그들이 예찬하는 장소 어딘가를 선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고 여행기 또한 넘쳐난다. 어떤 이는 여행을 가고 시리즈로 여행기를 발행하기도 한다. 세상에 여행할 곳은 너무도 많으니까 여행기는 사람들과 장소에 비례하여 기하급수적이 될 것이다. 그 많은 여행기 중에서 어떤 여행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내 여행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음을 감안할 땐 중요한 일일 거다.

  이 책의 특징은 뭐랄까. 편하게 읽히는 만담같다. 여느 여행기나 블로그에서 보듯 방문한 곳의 유명한 장소에 대한 소개와 그곳에 대한 인상이 담겨 있는데 이를 통해 “아, 나도 가고 싶어”라고 할만한 장소는 선뜻 와닿지 않는다. 그만큼 특정한 장소에 대한 묘사와 강렬한 인상을 담고 있진 않다.

 기억에 남는 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그들의 이력이다. 어떤 여행기는 “여행을 떠난 이유” 자체가 여행의 내용보다 차별화된다.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일인듯 ‘과감’하게 일상의 일들을 접고 떠난 이들의 여행기가 주를 이뤘다. 그들은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거나, 전세금을 빼거나, 전재산을 몽땅 들고서 여행을 간다. 그런 일들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로망이기에 그렇게 해서 떠난 여행이 어떤 매력으로 가득했는지, 그들이 후회를 하는지가 궁금해서 그들의 여행기를 보게 된다.

  그다음 작가나 학자의 여행기다. 그들은 학술적인 정보를 감상과 함께 섞어 준다. 문학가의 감상은 남다른 언어를 통해 특정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고 학자들은 그 지역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일반인들이 여행을 하지만 여행기를 쓰는 경우 저런 ‘과감한 행동과 이력’이 있어야 눈에 띄는 게 보통이다. 그런 점에서 이 네 남자의 여행기는 직장 생활하거나 공부하거나 일상을 누리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여행을 떠났다. 아주 특별할 것도 없이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그들의 기록을 책으로 만들었다. 아니다. 더 정확히는 여행을 가는 멤버를 영입하기 위해 ‘책으로 쓰자’는 아이디어가 먼저 나왔다. 어쨌든 보통의 사람들이 여행을 갈 때 하는 방법 그대로, 그 전날까지 일에 치여 있다가 날짜에 맞춰 허겁지겁 떠나는 여행이다. 그렇게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하고 또다시 휴가에 여행을 떠나는 그런.

  여행을 떠나는 일이나 혹은 여행을 가서 여행기를 글로 쓰고, 책으로 내는 건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여행기는 일상과 평범이 그대로 녹여있는 여행기이다. 여행을 하고 싶고 여행기를 쓰고 싶은 이들에게 새로운 욕망을 씌워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물론 몇 박 며칠의 휴가를 다녀온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고 해서 출판사해서 즉각 환영하며 출판해 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다른 책들과는 다른 ‘차별성’이 필요한 법이니까. 한편으로는 이들 네명의 독특한 이력이 한몫했다는 생각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우주비행사에 도전하기도 하고 공모에 당선되어 갈라파고스를 촬영하기도 하는 사람들, 이미 20대에 연해주 역사탐방단에서 시베리아 순례를 하던 이들 네 명. 그러나, 지금은 30대 직장인이거나 아직 공부중인 채로 지난 날의 여행의 기억을 마음에 품고 언제든지 그 여행 속으로 달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여행은 그리고 여행기는 정해진 누군가의 몫은 아닌 것이다. 누구든 도전하는 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긴 연휴를 앞두고 든다. 도전하고픈 연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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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4-2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모 항공사 광고에서 본 듯한 사람들인데 맞는지 모르겠네요.
이들의 이력이 여행서 출판에 한몫했다는 얘기가 의미있게 다가오네요. 많은 이들이 꿈꾸지만
여건이 허락해주지 않은 현실에 살짝
서글퍼지려하네요^^ 의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모시빛 2017-04-29 22:14   좋아요 0 | URL
동감이요. 서글픔...출판에 있어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저자 프로필이 우선하기도 한다더군요. 심지어 프로필이 70%라는 얘기도들은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즐겁게 열심히 책읽고 좋은 콘텐츠를 쌓아보자구요. 화이팅입니닷!
 


스트롱맨에겐 의식 정화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봄알람, 2016-08-02.


  “집에서는 안 그래요. 부드러운 남자에요.”

  집에서 부드럽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집에서는 안 그런데 왜 밖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는가. 어떤 행동은 집에서 하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밖에서 해서는 안되는 말과 행동이라는 것은 있다.

  여러 가지로 두 부부의 발언에 적잖이 놀라고 있다. 나랏일을 하겠다고, 큰일을 할 사람이라 자청하며 목소리 높이고 있는 누군가의 ‘언어’는 개인의 언어로서도 부적절하다. 하물며 한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 후보의 언어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투표일을 앞두고 뱉은 말들을 주워 담기 위해 ‘이해시키려’ 쏟아내는 말들은 오히려 앞의 언어가 ‘한번 삐끗’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 언어가 빠져 나온 통 속에는 동종의 언어가 가득함을, 언어통을 지배하는 ‘인식세계’의 수준이 어떠함을 드러낸다. 이 인식체계에서 주워 담은 언어통 속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같은 의미의 무한재생일 뿐이다. 그들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다. 이 책 작가의 말대로 이해란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니까.


생각해 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대화를 마치고 ‘이해시키느라 힘들었다’는 소리가 나온다면, 상대가 해야 할 이해를 도와주는 노력을 했는데 그게 힘에 부쳤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럼 힘을 키우면 될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계속 말하겠으나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잠깐, 이해가 누구 몫이어야 하는지는 짚어둡시다. ‘이해’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누가하고 있는지도 봅시다. p21


  “설거지를 어떻게…. 남자가 하는 일이 있고, 여자가 하는 일이 있다.

 남녀 일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다”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여성 비하, 성차별 발언이라며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자 아들은 “아버지는 집에서는 설거지, 청소, 빨래도 자주 하시고 라면도 잘 끓이시는 자상한 분”, 부인은 “빨래도 잘하고 설거지도 잘한다”라며 아버지를 두둔했다, 가 아니라 아버지가, 남편이 말한 것이 거짓말임을 밝혔다. 거짓말하는 대통령은 안된다면서 참 쉽게도 거짓말 하는 대통령 후보를 만난다.

  이 발언이 ‘여성혐오적 발언’이라고 사과하라는 요구를 받자 후보는 “스트롱맨이라서 웃자고 한 소리다” “센척할려고 한 소리다” 라고 변명했다. 웃자고 한 소리라는 말에 정작 웃을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하는 건가. 더 정색할 말이 이어진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말도 자당 후보를 향한 비판에 유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언어’를 구사한다. 아니 수습의 언어라고 해야 하나. 같은 통에서 꺼낸 말로 당 대변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설거지 발언은 이 시대 남성 심경을 대변한 것이다.”

  이 말이 여성혐오의 표현만이겠는가. 남성차별의 언어이기도 하다. “강한” “멋진”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여성을 폄하”하는 데 기대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강함의 진정성은 있는 것인가. 그 강함은 자립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여성을 비하하고서야, 여성을 깔아뭉개고서야 비로소 제 위치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여성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또한 그 속에는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성혐오”의 표현을, 행동을 감행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 이 잘못된 언어의 중심에는 결국 잘못된 전제와 잘못된 인식이 바탕에 있는 것이다.

  이 “강한”남성들의 세계관은 여성비하, 폄하 못지않게 남성 자신들의 비하와 폄하를 일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강한 남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여성혐오를 하용하면서 “남성적이지 않은 남자들”을 지적하고 걸러내 또한 차별하고 있음을 정녕 모르고 있는 건가.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 위해 행하는 행동이라는 데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다.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행하는 행동, 절대 바꾸고 싶지 않아 외면하는 행동 패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원히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그 인식세계다. 굳이 가부장제를 끌어 오고 싶지 않지만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얻어낸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스트레스와 공포를 주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여성집단”을 차별함으로써 이 무한 경쟁 사회에서 경쟁 대상을 줄이고 싶은. 정의와 평등의 언어가 아니라 혐오의 언어로 제 존재적 증명을 펴려는 그들만의 언어의 세계. 이 혐오의 언어가 ‘개인’의 언어가 아니라 점점 집단화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배제하려는 이유는 결국 제 것을 더 갖기 위한 발악이다. 한편으로 이 여성혐오의 언어는 물론 주욱 이 나라에서 이어져오고 잘 써먹어 온 말이다. 그러나 변화하지 못하는 소멸되는 언어로 만들지 못하는 건 헬조선 사회가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며, 특정한 권력이 그것을 더욱 부추기는 이유 아닐까.

  

 이 책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 다른 페미니즘 책보다 그렇게 흥미를 당기진 않았다. 최근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너무 쏟아져 나와서 비슷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분명, 환호할 정도의 공감이나 끄덕거림보다 뭔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문득, 한 대선 후보의 발언에 반응하는 내 언어가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별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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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사고와 말


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수전 손택·조너선 콧, 마음산책, 2015


 수전 손택을 알게 된 건 수전 손택의 글을 읽어서가 아니었다. 다른 이의 책을 읽는 중에 수전 손택의 이름과 글과 책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왔다. 마침내 난 수전 손택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고 그녀의 글을 읽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글을 읽고 나선 수전 손택의 생전에 더 많이 읽을 것을 후회했다.

  타인의 책에서 반복되어 나타났기에 수전 손택을 알게 된 처음엔 수전 손택의 글을 읽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은데 사실, 수전 손택의 책들은 책의 두께와 말의 무게에 긴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소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흥미롭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듯해도 다른 소설들에 비해 더듬거렸다.

  그에 비해 수전 손택의 사후에 나온 책들은 얼마나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가 생각하면 놀랍다. 이 책 또한 인터뷰 형식이라서인지 글이 쉬이 읽혀진다. 역시나 수전 손택의 말이고 생각을 담고 있는데도 그렇다. 어쩌면 질문과 답으로 이어진 형식은 나홀로 묻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간명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전 손택의 육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 글을 통해 생각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실제 목소리는 내가 느낀 것과 너무 달라 놀란 작가들이 몇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느낌과 수전 손택의 실제의 괴리가 얼마만큼인가 알고자 하는 걸까.

  옛 사진이란 것이 항상 그렇지만, 더구나 흑백사진에서 풍기는 느낌이란 것은 사람을 참 인상적이게 만든다. 수전 손택의 젊은 시절과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습게도 타인같지가 않다. 오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들여다본다. 안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면서도, 안다고 그렇게 느낀다.

  수전 손택의 일기에 남겨진 자신의 결점. 말이 많은 것이라는 일기가 생각난다. 말이 많다는 것은 수다스럽다는 것으로 통칭되는 경향이 강한데 그런 느낌은 없다. 하지만 글로 보는것과 또 다르니까. 1978년 파리에서의 12시간 인터뷰 전문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수전 손택의 말은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는데 “명료하고 권위적이고 직접적인 말투를 갖기 전에는 인터뷰 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 후의 인터뷰로 그 완성의 결과라고 한다. 인터뷰 당시의 호흡 그대로라고 하는데도 정말이지 명료하다. 삶에 대한 확고한 자기 생각이 없다면 말로 명료하게 나와지지 않는다. 마흔 다섯의 수전 손택은 완결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글을 쓰거든요. 일단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에요. 사실 글을 쓸 때는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하는 거죠. 대중을 경멸하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제가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린다는 건 내가 믿는 바로서―글을 쓸 때는 물론 실제로도 믿죠―그걸 전달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나 다 쓰고 나면 제가 다른 관점으로 옮겨 가기 때문에 더 이상 믿지 않는 생각들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훨씬 더 복잡해지죠……. 아니, 어쩌면 더 단순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그런 얘기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글을 쓰고 나면 전 이미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뒤랍니다. p177~178


  수전 손택식의 사고와 글쓰기는 내게 유사점을 느끼게 하면서도 상당한 거리감 또한 준다. 이것은 여전한 사고속에 머물러 자기확신이 없는 나와 수전 손택의 차이점일까. 또한 지성의 한없는 부족의 이유도 있겠다. 아무도 내게 인터뷰하자고 조르지는 않을 테지만 나 역시 수전 손택처럼 생각들이 좀더 명료해질 때까진 말을 남발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다. 하긴 자신이 ‘말’을 함으로써 그것이 공표되었기에 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낌으로써 일을 진행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반면 나는 내가 그것을 행한 이후에나 말을 해애 한다는 강박을 느끼긴 했는데, 그런 점에서 글은 또 다른 것 같다. 글이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도 같다. 말이란 조심스럽고 글또한 조심스럽지만 어떤 형태로든 모두가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일상은 생각의 연속이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잘 모르겠어요”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등등의 말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본다. 이것참 삶에서 내 확고한 생각하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라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야 할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전 손택처럼 지성을 바탕으로 한 강렬하고 열정적인 행동력이 주어진다면 참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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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힘


다시 태어나다-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잔 손택 /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이후, 2013.


 타인의 일기를 읽는 내밀함을 데이비드 리프는 허락했다. 자신의 글이 아니기에 결정이 쉬웠을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어머니의 일기엔 아들의 이야기가 필히 없을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자신의 이야기도 함께다. 어머니의 일기를 아들은 공개했다. 어머니는 이미 유명인이었고 어머니의 삶과 글, 생각은 어머니의 입과 글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일기란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과 형식을 갖게 되는데, 아들에게 어머니가 사망 전 일기의 존재를 알린 것을 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글을 읽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모든 면면들이 나타나는 것을 앎에도 아들은 어머니의 글을 출판했다. 그 자신, 어머니 수잔 손택의 아들이 아니라 저술가, 편집자로서 출간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보면 그만큼 많은 이들이 수전 손택의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아 보인다.

  이 책엔 14세부터 30세 때의 수전 손택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전생애에 걸쳐 일기를 썼고 그 기록은 많다는데 이 유년과 청춘의 시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자의식 강하고 지성적인 수전 손택을 만나게 된다. 아니면 그것은 그 나이 또래가 갖는 그런 감수성이라고 해야 할까. 좀더 깊고 처절한 감수성. 낙서처럼 끄적인 글귀 하나하나가 사춘기 소녀의 고뇌에 찬 외침이겠지만 어쩐지 그의 아들 말대로 자신감에 차 보인다. 또다른 표현, 자아도취라….

 어린 시절부터 수전은 많은 문학책을 읽고 그에 관한 생각들을 기록했다. 문학에 대한 감수성, 지성, 글쓰기에 대한 열망, 자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성적 정체성과 연애, 결혼에 대한 환멸 등등등. 수전 손택의 동성애 성향을 좀더 이르게 자각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이기에 결혼에 대한 환멸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당시 17세는 이른 결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가정이지만 결혼 생활이 서로의 갈등과 다툼으로 귀결되지 않았다면 수전 손택의 삶은, 생각들은 다르게 영향을 받았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지성과 감수성의 홍수 속에 가득찬 사람이구나 싶었다.


    “일기는 자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안을 제시한다.”  -1957년 12월 31일


  일기가 사실적 삶의 기록이긴 하지만 그 사실로부터 자신을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 수전의 이 고백엔 평생 수전에게 따라다니는 동성애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담겨 있다. 성정체성,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위해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 시절의 일기 속엔 가득 차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삶의 기록이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이해이고 대안의 제시라는 고민의 기록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 수전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사회는 이성애자를 정상으로 간주하고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것이라 간주하니까, 어린 소녀에게 그리고 결혼을 한 여자에게는 동성을 향한 연정들이 자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일기들엔 그러한 언어들이 해방구처럼 쏟아져 있다.


오르가슴의 도래와 함께 내 인생이 바뀌었다. 나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이야기는 적절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더 협소해졌고 가능성들은 봉쇄되었으며 그 덕분에 대안들이 명료하고 날카로워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무한하지 않다. 나는 무無다.

섹슈얼리티는 패러다임이다. 예전에 내 섹슈얼리티는 수평적이었다. 무한한 분화가 가능한 무한한 선이었다. 이제 내 섹슈얼리티는 수직적이다. 위로 올라가 넘어가 버린, 어쩌면 무無. p282


  수많은 일기를 썼다는 수전 손택. 그 일기들이 대안이라면, 그녀 스스로 만든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고백하듯이 그리고 보여주었듯이 글쓰기로 나타난다.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내 동성애와 연관이 있다. 나는 사회가 나를 향해 겨누고 있는 무기에 맞서기 위해 무기가 될 만한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게 내 동성애를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내 느낌이지만―일종의 면허를 발급해 준다. p286

 

  수전의 치열한 글쓰기가 동성애 욕망의 반동형성이라 생각한다면 약간 김이 새려 하지만 무엇이든 어떤 욕망은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반하여 형성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렇다고 그것이 전적으로 모두 동성애로 인해서는 아니기도 하고.

  어쨌든 수전에게 있어 이 동성애에 대한 욕망이 자신을 보다 새롭게 자각하고 인식하는 힘이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욕망을 사회가 바라보는 눈 사이에서 매우 적절히, 아니 그 자신은 괴로웠을지 모르지만, 조화시키고 있지 않았나 싶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성애자들이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늘 작가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측면으로 수전 손택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나의 글의 바탕이 실패한 연애 경험이었어라고 말하면 호기심과 김이 빠지는 것이 열렬한 투쟁가들에게 느끼는 더 큰 대의를 말하리라 생각해서인지 모른다. 사실, 더 큰 대의라는 말도 웃기거니와 모든 인간은 제 삶을 살아내는 거 자채에서 벌써 치열함을 내장하고 있다.

  또한 욕망에 좌절한 수많은 이들이 반사회적인 형태로 욕망을 해소하거나 좌절된 욕망에 대한 분노를 펴는 것을 생각한다면 수전 손택의 욕망의 해결 방법, 그 자신의 대안은 매우 긍정적인 형상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그랬다. 책을 한번 쓴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수전 손택은 수없이 달라질 수 있었던 또다른 요인이 여기에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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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


문학은 자유다 At The Same Time, 수잔 손택 , 이후, 2007.


  동시에At the same time와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을 보면서 나라면 이 책에 어떤 제목을 붙였을까 생각한다. 저자가 아니니, 편집자의 입장에서라도 말이다.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은 이 책이 문학 관련 내용이 가득찬 것으로 느끼게 한다. 반면 동시에라는 제목은 그 내용을 예상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이 책은 저자 수잔 손택의 마지막 생애에 쓴 평론과 연설을 모은 책이다. 소설가로 평론가로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수잔 손택의 글들이 빛을 발한다. 암투병 중에도 수잔 손택 자신이 직접 구상과 계획으로 쓰고 정리한 차례라고 한다. 총3부로 1부는 문학평론으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설,  2부는 미국의 9·11 테러 직후의 글과 포로수용소 학대 등 수잔 손택이 관심을 둔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글, 3부는 수잔 손택의 문학에 관한 연설들을 모았다.

 미국 편집자는 동시에를 한국 편집자는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한국판은 스스로 ‘소설가’로 불리기를 원했던 손택의 뜻을 담았다 했다. 미국판은 “이 책의 다양성과, 손택의 문학세계와 정치 활동, 미학과 윤리학, 내적 삶과 외적 삶의 분리 불가능성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라고 제목 선정의 이유를 밝혔다.

  미국 편집자의 말이 길어서가 아니라, 동시에라는 제목에 더 끌린 것은 수잔 손택에 대한 인상 때문이다. 수잔 손택은 평론가, 소설가, 에세이스트 등 작가로서 명성이 드높다. 하지만 수잔 손택은 또한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참여의식이 높고 실제 활동가였다. 그 활동가적인 사회참여의식을 생각하면 동시에란 제목이 수잔 손택의 모든 것을 더 적절하게 담는 느낌이다. 단지 수잔 손택이 쓴 글과 여러 뉴스, 타인의 글을 통해서 수잔 손택을 접할 수밖에 없는데, 수잔 손택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수잔 손택의 지적이고 활동적인 모든 면모가 부러움과 경외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수잔 손택의 글을 읽을 때면, 뭔가 모르게 떨린다.


자기 수양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타주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기준이 없는 문화(문화라는 단어는 표준적인 의미로 썼습니다.)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독자로서, 나중에는 작가로서 문학이라는 기획에 제가 몰두하게 된 것은 문학이 다른 자아, 다른 영역, 다른 꿈, 다른 언어, 다른 관심사에 대한 공감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p202


  수잔 손택 스스로 문학인이라 불리기를 원했다고 하는데 수잔 손택의 ‘문학’은 사회문제, 사회참여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소설가이든 평론가이든, 에세이스트이든 글을 쓰는 작가로서 수잔 손택의 활동은 끊임없는 사회활동의 연장선이자 상호작용이다. 수잔 손택의 문학관이 곧 그가 쓴 글과 유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저는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작가를 당연히 도덕적 행위자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작가에 대한 이런 개념은 나딘 고디머의 문학관과 제 것 사이의 여러 연결점 가운데 하나지요. 저는 나딘 고디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는데, 문학에 매달리는 소설가는 도덕적 문제를 고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어떤 것이 낫고 어떤 것이 나쁜가, 혐오스러운 것과 존경스러운 것은 어떤 것인가, 개탄할 일은 무엇이고 기뻐할 것은 무엇이고 인정할 것은 무엇인가. 직접적으로 생경하게 교훈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지한 소설가는 도덕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지요. p278~279


  수잔 손택에게 느끼는 동경이 그저 지식인으로서 활동가로서 그녀의 외적인, 보여지는 측면에 대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지만, 난 그녀의 삶 전체에 대한 동경에 빠져 있진 않다. 그녀의 삶은 오로지 그녀의 삶인 것이고 현재 세상에 있지 않은 작가라는데 대한 안타까움이 있을 뿐. 그 삶에서 느껴지는 열정에 대한 동경이 더 강하다고 할까. 그러나 이런 글들을 만나면 같은 생각을 마주할 때의 반가움, 통찰력 있는 예리한 시선, 거침없는 비판들에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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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7-04-0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 전인가 한 출판사가 주최가 되어 수전 손택의 <수전 손택에 관하여(REGARDING SUSAN SONTAG)>란 다큐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다큐를 통해 미처 몰랐던 수전 손택의 민낯이라고 해야 하나 일상을 보게 되었고 그 덕분에 그의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같아요. 간만에 저도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

모시빛 2017-04-07 23:23   좋아요 1 | URL
마침 수전 손택의 목소리가 넘 궁금하던 차였는데 이런 다큐가 있군요.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다큐를 보고 나면 글만 볼 때와는 느낌이 또다를 것 같네요. 막 설레지네요. 또 다른 이해의 문을 만난 것 같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큐를 꼭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