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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 동화집
실비아 플라스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아이를 위한 엄마의 동화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따스한 이야기라고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하지만, 실비아 플러스가 쓴 동화라는 걸 아는 순간, 약간은 생각이 달라진다. 아련함과 애틋함이 더해진다.

  실비아 플러스는 천재 시인이라고 불린다. ‘천재’ 그리고 ‘여성’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그녀는 1932년생이다. 그녀가 공부하고 완성하게 글을 쓰던 시기는 1950~60년대. 그 시기는 여성에겐 무엇이든 제한적이었고, 관대하지 않았던 시기다. 실비아 플러스는 시인으로, 동화 작가로, 소설가로, 화가로 다양한 방면에서 재능을 가진 예술가다. 그리고 천재적 재능을 가진 여성 예술가에게 익숙한, 우울증 그리고 자살. 실비아 플러스 역시 서른 살에 안타깝게도 비극적인 방법으로 자살한다. 그래서인지 실비아 플러스를 둘러싼 느낌엔 비운의 이미지가 한웅큼 떠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실비아 플러스는 아이들을 위해 <이 옷만 입을 거야> <체리 아줌마의 부엌> <침대이야기> 세 편의 동화를 남긴다. 그녀는 시인인 남편 테드와 결혼한 후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구상한다. 태어날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야기들을 구상한 그녀다. 내 아이에게 들려줄 동화를 지으며 기뻐하는 실비아 플러스의 모습을 생각하면 두 아이를 남겨두고 아이들이 있는 공간에서 아이들이 먹을 간식까지 챙겨두고 자살한 그녀의 행동의 간극이 놀랍다. 남편이 외도로 별거 한 이후 몇 개월만의 일이다. 그녀가 자살할 당시의 영국은 100년 만에 가장 혹독한 추위였다고 하고, 그녀의 아이들은 추위 속에 자주 아팠다 하고 그녀의 집엔 전화기도 없었다고 한다. 별거와 함께 두 아이를 키우며 힘들어 하던 속에 우울증까지 겹친 그녀의 선택은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이 옷만 입을 거야>는 일곱 형제의 막내 맥스 닉스의 이야기다. 어느날 배달된 상자 속엔 겨자색 옷 한 벌이 있었고 아빠 먼저, 이후로 형제들이 차례로 이 옷들을 입는다. 하지만 모두 이 겨자색 옷이 자신들이 하는 활동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며 차례로 다음 동생들에게 전달하고 엄마는 그 아이에 맞춰 매번 옷을 수선한다. 그리고 기다리던 시간, 드디어 맥스 닉스에게 전달이 되었다. 자기만의 정장 옷 한 벌이 갖고 싶은 일곱 살 아이가 여섯 형제를 거쳐 자기에게로 온 겨자색 옷을 소중히 하며 기쁘게 입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체리 아줌마의 부엌> 속엔 요정들이 등장한다. 체리 아줌마의 부엌은 마을에서 가장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공간이다. 하지만 냉장고, 세탁기, 토스터, 커피메이커, 거품기 등 가전제품들은 자신의 일보다 다른 이의 일들을 부러워한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부엌을 관장하는 소금 요정과 후추 요정은 다른 일을 ‘경험’하도록 해준다. 냉장고가 자두 타르트를 굽고 커피메이커는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달걀 거품기는 블라우스를 다리고 다리미는 와플을 만드는 등 그들은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후추요정과 소금요정의 아슬한 타이밍으로 일을 해결하면서 하루가 마감되지만 각각의 기기들은 그들 일의 소중함을 깨닫는 하루가 된다.

   <침대이야기> 속에는 온갖 재미있는 침대가 나온다. 주머니 침대, 간식 침대, 탱크 침대, 코끼리 침대, 높이 뛰어오르는 침대, 하늘을 나는 침대, 바닷 속을 가는 침대, 북극 침대 등 상상할수록 즐겁고 재밌는 침대 이야기에 푹 빠질 수 있다. 침대 맡에서 신기한 침대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은 온갖 상상의 나래 속에서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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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르, 사랑하고픈 나의 조국


봉주르, 뚜르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이 책을 읽었을 때 나의 놀람은, 호기심이 아니라 분명 놀람은, 변화였다. 아, 세상이 변하긴 했구나라는 것이었다.

  문득 달력을 보다 엊그제가 6.25였음을 알았다. 보지않고 듣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월의 25일에 대해 관련 다큐나 기사, 뉴스들을 접하지 못한 것 같다. 분명 어느 때고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 해도 들리고 보게 되던 때가 있었던 것을 보면 분명 내가 익숙해졌거나 기사들이 예년에 비해 덜했거나 한 것 같다.

  내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호국 보훈의 달이면 보훈과 관련한 독후감 쓰기, 그림그리기, 글짓기 대회 등이 열렸고 방학이면 주어진 주제에 따른 스크랩하기 같은 것이 있었다. 6.25 때의 사진이 가득찬 사진집이 방학과제용으로 따로 나오기도 했다. 그때에 읽어야 했던 책들은 북한 주민들은 모두 해골과 같은 모습에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책은 어쩌다 남한의 병원에 입원하게 된 기자가 병원식을 보고 자신을 위해 일부러 고급 음식을 내오는 것이 아닌지 놀라는 대목이 나온다. 기껏해야 된장을 푼 배춧국의 최고의 식사로 살아가는 북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점점 남한에 놀라고 동화되는.

  그런 식이었다. 읽었고 읽어야 했던 북한이 소재가 된 동화들은 어김없이 남한의 자유와 경제를 찬양했고 북한의 억압과 가난을 세세히 묘사했다. 개인의 성격마저도 북한 사람들은 포악한 것으로 묘사되었고 책에선 반공, 반공이 떠나지 않았다. 북한군인들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들이 늘어선 사진을 스크랩하며 반공과 멸공과 남한의 사상을 찬미하는 사진첩에서 사진을 오려 하얀 스케치북에 옮기며 ‘아, 잊지 말자 6.25!’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그대로 따라 써야 했던 내 어린 시절의 숙제들. 그런 책들만 읽고 그렇게 세뇌당하며 보내야 했던 나의 유년과 학창시절에 안타까움을 표한다. 지금은 아닐까. 더러 접하는 소식들에 의하면 지금도 여전한 부분은 있다.

  어쨌든 ‘봉주르, 뚜르’ 같은 책이 나왔고 이 책을 볼 수 있다는 게 좋다. 한국 사람이 프랑스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썼을까를 상상했는데 분단에 관한 이야기를 맞닥뜨릴 줄 몰랐다. 그리고 어릴 적 숙제로 만나야 했던 호국보훈용 책의 서술과 결말이 아니라서 좋았다. 소년의 호기심으로 이야기를 밀고 나가며 추리의 형식으로 풀어 나간 것, 소년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분단 현실을 잘 다룬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 이야기의 무대가 ‘프랑스’인 것이 마구 마구 공감이 되었다. 현재의 우리나라에서라면 북한 어린이를 만난다는 것이 쉬울 리도 없고 어른들의 등쌀에 교류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고 안타깝게도 제3국에서 두 어린이의 교류가 있는 이야기가 더 ‘안전하다’라고 느꼈다. 무엇에 대한 안전인지는 모르겠지만.........

  슬프고 먹먹함이 있었다. 인간의 감정을 제어하게 만드는 이 모든 사회구조. 그것을 뛰어넘는 봉주와 토시의 우정. 동화에 맞게 어른들이 떠드는 이념과 시선이 아니라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제3세계를 빌어 또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프랑스 뚜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과 그래서 더 환상같기도 한 느낌이 교차되었다.

  분단과 이민의 문제를 정치적인 것을 떠나 일상에, 사람의 마음에 파고드는 문제로 환기시키는 책이었다. 희멀건 배춧국이 아닌 소고기국을 주는 병원이 있어 잘 사는, 좋은 나라 대한민국이 아니라 의미있는 풍자에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고 허례와 같은 의식을 강조하지 않는 ‘사랑하는 나의 조국’을 만나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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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라 감당해낼 수 있는 잔혹함은 없다

  

 

 국수경 엮음, 2011.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버거운, 일상에서 도피하고픈 어른을 위한 것은 무엇이기에.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라는 제목은 그림형제의 동화에도 자주 붙이는 수식어다. 그림형제의 동화자체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고 그들 또안 여러 버전을 만들어 출판했다고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수많은 동화들에서 뽑아내어 엮은 책이다. 그래서 저자가 아니라 엮은이가 된다. 그 동화는 익숙한 내용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다. ‘잔혹’보다는 외설적이고 더 역겹다고 느껴진다. 이러한 형태로 이 책을 엮은 의도가 뭘까. 많은 분량을 담고 있지 않기에 이 책이 재빨리 읽히지만 읽고 나서도 재빨리 읽은 만큼의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재밌다는 느낌도 놀랍다는 느낌도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끔찍해라는 느낌도. 정확하게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먼저 그림형제의 전집을 읽은 탓도 있고 이야기의 끝에 붙여진 ‘교훈?’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동화들을 뽑아내어 이야기의 서술을 달리 하면서  차별점을 이 한줄의 교훈에 둔 듯하다. 하지만 이 교훈 때문에 오히려 나는 이 책이 가진 장점이 감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굳이 장점도 없다고 느껴지지만.

  예를 들어 이런 형태다. 백설공주 이야기에서는 “백설공주는 난쟁이들의 잠자리 시중을 들면서 이 집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금새 침실 기술에 능숙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난쟁이들과 백설공주는 즐거운 나날들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핵심은 “어리석은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라는 것. 개구리 왕자에선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참사랑은 추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하며 엄지공주로 알려진 엄지둥이의 사랑에서는 Small은 Beautiful이 아니라고 외친다. 신밧드의 모험에서 이끌어낸 한 줄은 또 어떤가. 세월이 흐르면 여자는 마귀로 변한다라는 것이다.

  엮은이의 한줄 교훈이 와 닿고 재밌기보다는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것에서 굳이 나쁜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점잖떠는 듯한 느낌도 받게 된다. 화장실에서 보는 낙서같기도 하고 도색 잡지류에서나 봄직하기도 하고 외설싸이트에나 올려져 하하, 호호, 낄낄거리기 위한 말같기도 하다. 어디에서든 인생의 깨달음을 얻을 사람은 얻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책들을 들이밀어도 깨달음이나 가슴치는 반성을 하지 못한다. 나쁜 짓을 하다가 누군가에게 들켜 강제로 난 이렇게 반성을 합니다를 급하게 외친 듯한 이 한줄 평들.

  이러한 교훈을 얻기 위해 이 책을 읽었을까.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라는 말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어른이라고 ‘잔혹을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해보면 안다. 위트도 아닌 설렁한 교훈 한 줄이 쓰여 있다고 해서 이 책이 인생의 교훈을 알려주는 책이 될 수 없듯이 어른들에게 쓸데없이 교훈을 들이밀지 말라. 온갖 나쁜 것들을 습득하게 하고 억지 깨달음을 주입시키지 말라. 잔혹함에 익숙해지면 어줍짢은 교훈의 말같은 것은 일찌감치 사라져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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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세계에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필요할까


 


  무수히 많은 동화들을 여러 버전으로 봐왔지만 그 모든 동화들은 안데르센 아니면 그림 형제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유년의 동화는 이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에 의해 길들여졌던 것이다. 나이를 먹고 요즈음 나오는 동화책들의 황홀한 그림과 예쁜 책들에 넋이 가면서 어쩌다 전집을 읽을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어느 게 안데르센 것이고 그림 형제 것인지를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하고 싶었던 건가.

 물론, 그림 형제의 동화들이 어린이용 동화와는 많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뭐가 이렇지라는 생각에 다시 표지를 확인하고서야 조그맣게 쓰인 ‘어른을 위한’ 이라는 글을 보았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느낌은 전적으로 저 글귀의 역할이었다. 그래도 전집이나 완역은 흥미를 돋운다. 빠지는 부분 없이 뭔가를 알게 된다는 기분. 작가의 원본을 보게 된다는 즐거움.

  빼곡하게 쓰인 여러 편의 글들을 읽으면서 동일한 패턴들이 지루하게 여겨졌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세상이기도 하다. 누구라도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고 진기하다고 하는 것들을 내밀거나 하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다. 공주님들은 사소한 이유들로 전리품이 된다. 새어머니는 늘 아이들을 귀찮아하고 괴롭히고 마녀들은 왜 그다지도 사람들을 이유없이 괴롭히는지. 이 이야기들이 작가들의 순수한 창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떠도는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각색한 것이라고 하니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 그런 형태로 전승되었을 테다.

  동화는, 동화여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 마음의 문제인가? 더 이상 동화 속 환상에 놀라울 일 없고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없으니 그림없는 동화책을 읽으며 하릴없는 지적질 속으로 빠져 버렸다. 이런 내가 안타깝지만 ‘어른을 위한’ 동화라잖아?

  동화는 굳이 어른을 위한 것일 필요가 없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을 그대로 읽으면 된다. 그것이 동화의 세계다. 교훈을 찾아야 하고 느껴야 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필요할까. 이야기의 수위가 다르다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바꾸면 그것은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가 되는 걸까. 이야기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데. 그래놓고 왜 그림 형제의 이야기들을 동화라고 굳이 붙일까. 동화는 아이들이 읽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정확하게 어학 사전을 들춰봤다. 동심(童心)을 바탕으로 하여, 어린이를 위해 쓴 산문 문학의 한 갈래라고 동화를 정의한다. 동화에는 환상과 아름다움의 세계가 펼쳐져 있고 그리고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된다. 아니 그것들을 읽어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가지치기로 보다 온화한 말로 이야기를 조정하는데 비윤리성은 굳이 어른들의 몫인가. 그것을 구분하는 것, 비윤리에 물들지 않고 이야기를 읽어내야 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벅차게 느껴진다. 요즈음처럼 급속도로 세상이 변하고 윤리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 ‘어른들을 위한’ 동화는 영화등급이나 시청등급의 다른 표현이지 어른들을 '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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