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어린 시절을 채워줬던 앨리스의 세상은 환상이었다. 모험 가득한 세상에서 앨리스처럼 살아보고 싶었던 그 시절에는 앨리스가 우상이지 않았을까. 세월이 지난 지금 앨리스는 낯선 얼굴을 하고선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아니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한다. 앨리스의 입에서 나오기에 어색한 말, 그런 말들을. 너만의 길을 그려 보라 하지만 이런 말들을 웃으며 전하는 앨리스가 어린 시절의 그 앨리스일까. 지금의 모습을 과거로 이어간다면 어린 시절의 앨리스는 어떻게 토끼 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을까.  꼬마 앨리스의 성장이 가짜처럼 보여서, 생기없는 인형처럼 보여서 방긋 웃으며 건네는 앨리스의 말들을 덮고 기억 속 앨리스를 꺼낸다.    


  그곳엔 앨리스보다 더 흥미를 돋우는 수많은 캐릭터를 만난다. 모두 말재간이 넘쳐나기에 앨리스가 왜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그 캐릭터들. 그러고보니 앨리스 덕분에 트럼프 카드가 친숙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수많은 동화책 속에서 왕과 왕비, 공주의 등장하는데 앨리스에서는 여왕이 등장하는데 무지 희화화되어서 흥미진진했던. 새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니 기억보다 앨리스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 열 살은 되었을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일곱 살.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다. 그 나이의 내가 지녔던 호기심과 모험심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보면 곳곳에 보이는 풍자가득한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며 읽고 보았던 건지 새삼 성인이 되어 보는 동화의 느낌은 참 새롭다. 어쩌면 어릴 적엔 이보다 훨씬 축소된 내용의 그림책을, 동화책을 읽었던 것일 게다. 이 책이 완역판이라고 하니까.

 

 모험을 멈추지 못한 앨리스의 겨울 여행은 거울 속으로의 잠입이다. 거울 나라로의 여행은 마치 수수께끼 가득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저자가 수학과 교수라는 사실, 그리하여 수학공식처럼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점이 더해지고 그 오묘한 말들의 조합들에 빠져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책장을 넘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루이스 캐럴. 본명은 찰스 도지슨. 오래도록 루이스 캐럴에 길들여져 옥스퍼드 대학교 수학 교수 찰스 도지슨이 앨리스를 탄생시킨 이름으로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그가 창조해낸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즉석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즐거이 들은 아이들 덕분에 책으로까지 출간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의미없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반복에 얼마나 즐거워하는지가 생각난다. 그런 점을 루이스 캐럴은 잘 캐치한 듯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전공과 잘 맞물리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앨리스를 따라, 앨리스인 것처럼 모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말발도 죽지 않은 일곱 살의 앨리스. 새삼 생각하니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라면 두려워하지도 이것저것 재지도 않은 채 하는 말에 귀기울이고 이상한 것을 이상타 말하며 정의감에도 불타오르는 앨리스와 같은 모습일 거라 싶다.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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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반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78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수비수가 되고 싶다


아몬드, 손원평, 창비, 2017-03-31.


  괴물에 대한 인상은 흉물스럽거나 기괴한 행동을 일삼거나 난동을 부리는 이미지로 각인된다. 괴물이라 불리는 <아몬드> 속의 괴물 윤재는 이러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약물에 취한 것처럼 힘이 없이 보인다. 과잉행동장애가 아니라 과소행동인데 이런 행동에 비해 생각은 과하게 넘쳐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의 한 기능이 한쪽으로 쏠린 듯이 소년은 많은 시간을 생각에 할애한다.

  하긴 ‘웃는다, 운다’ 또한 학습된 형태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감정의 예의를 오래도록 학습받아 왔으니 윤재 또한 그러한 교육을 엄마에게 받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 대해 분노, 슬픔, 기쁨 등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또한 개인차가 있고 윤재가 말하듯 어떤 상황에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곧 정의이고 바람직한 삶을 사는 것과 동일하지도 않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의학적으로 윤재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 이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윤재의 상태에 엄마도, 할멈도, 나아가 세상 모두가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같은 감정을 가져주기를 더 바라는 건가. 사실, 어떤 상황에 따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 지나간 후 아닐까. 그렇다면 감정보다 선행하는 것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는 ‘이성’의 영역이 더 작동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최근엔 ‘감정을 느껴서’ 일어나는 사건·범죄가 많다. 감정을 느끼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사건은 많지 않다. 사이코 패스들의 연속적인 범죄와 그들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시선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을 혐오하고 잠재적 범재자로 인식하게끔 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국 감정을 느끼지 않기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하지 않기에, 바람직한 사고를 상실하기에 범죄를 저지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화가 나서, 너무 사랑해서, 너무 짜증이 나서, 너무 기분이 나빠서 등등 사람들은 감정표현이 서투른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생각의 결여 아닐까.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건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감정불능자 괴물 윤재와 감정과잉자 괴물 곤이의 대립을 보고 있으면 탁구가 생각난다. 공격수와 수비수 간의 싸움에서 공격수가 이기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수비수의 지속된 방어에 공격수의 감정이 터져버리는 탁구 경기였다. 이 경기 이야기를 한 이는 수비수인 한국 선수가 방어만 하는데도 답답하지 않고 너무나 흥미진진했다고 말했다. 결국 무너져 버린 공격수와 달리 수비수는 마지막까지 침착했는데, 딱 윤재가 그렇다. 곤이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늘 같은 태도로서 대응하는 윤재에게 폭발하는 건 곤이다.

  내가 엄마라면 윤재를 어떻게 대할까 가정을 해보는데 그저 가정인데도 뭐가 막혀버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편도체에 이상이 오는 것인지 감정을 느끼는 일에 무뎌진다. 특별히 슬프고 즐겁고 우울하고 기쁘고 분노를 느낄 것 없는 상태. 이것은 살아가는데 특별히 장애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만. 처음부터 비정상이라는 틀로 가둬지게 되는 소년이라면 아무래도 삶을 대하는 방향이 달라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감정적인 동요가 되지 않는데 어려움이 있게 되나, 이런 저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감정을 얼마만큼 느끼든 사회를 살아가는 규율을 가르쳐주는 이의 방침이 소년, 윤재를 세상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감정불능’ 아이가 ‘이성 불능’이 되지 않도록 가르친다. 그런 엄마와 할멈이라는 존재가 윤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토대와 방향을 이끌어 주었다. 물론 도라가 등장해 동년배 여학생에 대한 호감을 느낌으로 인해 변해가게 되는 윤재를 드러냄으로써 도라의 역할을 부각시키긴 하지만 윤재의 성장과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토대는 엄마였다. 엄마의 두려움과 공포가 기우였다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한 엄마의 가르침이 윤재가 결핍 속에서도 세상을 보는 시선을 찾아갈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재는 그 가르침에 힘입어 세상을 보는 시선을 만들어 갔다. 결국 ‘어떻게, 무엇을’ 아느냐가 세상살이에 중요한 것 아닐까 싶다. 세상이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세상의 바람직함과 정의를 추구하지만 결국 제 아이에게는 이기를 쫓는 것을 보여주는 어른의 가르침만 아니라면, 수많은 이들의 아몬드에 이상이 온다 해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없는 사회가 될 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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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에 가고 싶다


위저드 베이커리, 구병모, 창비, 2009.

 

   이 책에선 빵냄새가 난다. 먹어보지 못한 빵이다. 이내 중독된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선두로 우리나라에도 판타지 동화가 급격하게 등장했다. 청소년 소설에서 판타지의 등장은 위저드 베이커리가 처음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로 위저드 베이커리가 가진 장르적 특성은 다양하다. 다양한 종류의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빵처럼 판타지, 미스터리, 호러가 가득하다. 그러고보니 이 빵이 만들어진 것이 벌써 10년 전이다. 10년 전 나온 이 빵은 요즘에 먹어도 전혀 옛날이야기 느낌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신선하고 풍부한 맛이 흘러나온다.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제목이 환상적인, 예쁘고 아름다운 느낌의 마법의 세계로 안내해줄 거란 이미지는 시작부터 착각이었다. 재혼 가정의 소년이 겪는 갈등이야기가 시작인 듯 보이지만 소년은 이전부터 더 잔인한 파장을 견디어 내는 중이었다. 소년이 겪는 일 또한 판타지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소년의 엄마는 자살했고, 자살 전 엄마는 소년을 낯선 길에다 버려두기까지 했다. 아빠는 재혼하고 새엄마와 의붓 여동생 무희와 함께 새로운 삶을 잘 살아갈 듯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소년은 새엄마와 지속적으로 갈등하고 마침내 어린 동생 무희의 성추행범으로 몰려 집을 뛰쳐나온다. 그를 성추행범으로 지목한 것이 동생 무희의 손가락이다.

  소년이 도망쳐 들어간 곳이 바로 ‘위저드 베이커리’다. 그곳엔 빵집의 분위기만큼이나 수상한 점장이 빵을 굽고 있다. 주문생산제다. 고객이 원하는 빵을 생산해낸다. 그 빵의 종류를 조금 살펴본다면 ‘악마의 시나몬 쿠키’ ‘체인 월넛 프레첼’, ‘부두인형’ ‘타임 리와인더’ 등이다. 이 빵들은 모두 마법의 빵이다. 고객의 욕망이 반영된 빵, 원하는 이를 사랑에 빠뜨리게 하거나 상대를 고통스럽게 만들거나 시간을 되돌리거나 하는 힘을 지녔다. 소년은 빵집에서 기거하며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인간들을 만난다. 점장은 도대체 이런 빵을 왜 만들어 내는가 싶지만, 점장은 제 욕망에 기인한 마법의 빵을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내린다.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은 채 소년은 이 빵집에서 위로와 충고를 얻는다. 언뜻 보기엔 소년의 집이나 빵집이나 기괴스럽기는 마찬가지지만. 소년이 선택하는 빵은 어떤 것일까. 이 다양한 빵 중에, 마법의 힘을 지닌 빵 중에서 소년의 욕망과 맞닿아 있는 빵은 무얼까. 삶의 위안을 얻게 된 빵집에서 소년은 계속 머무를 수는 있는 걸까.

  소년이 빵을 선택한 틈도 없이 점장은 소년에게 빵을 선물한다. ‘타림 리와인더’. 소년은 이 선물을 받아들고 어떤 시간으로 되돌아갈까. 소년에게 가장 힘든 시간의 어느날로 돌아간다면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면 그 시간은 언제가 될까. 무희가 자신을 지목했을 때일까. 이휘재가 나왔던 인생극장처럼 “그래 결심했어”의 순간, Y or N의 두 가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년이 빵을 먹으려는 순간은 역시 그 순간, 새엄마와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무희와의 일이 있던 그 순간이다. Y가 빵을 먹는 것에 성공한 경우 소년은 6살 때로 돌아가 새엄마와 아빠가 결혼하지 않도록 막고 부자가 함께 사는 것으로, N은 먹는데 실패한 경우로 아빠는 감옥에 새엄마와 무희와는 따로 사는 삶으로 결정된다. 소년은 어떤 삶을 원할까.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p200~201


  소년의 가슴 아픈 경험을 표면에 드러내면서 결국 작가가 말하고픈 빵의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었나 한다. 선택과 책임. 욕망에 대해서도 가져야 할 책임. 그렇기에 마법의 빵을 생산하면서도 잊지 않았던 ‘저주’를 걸어 두었을 것이다.

  지난날에 대해 떠올리는 때가 많다. 우습게도 되돌아가고픈 순간은 어찌나 많은지. 지금 내 삶을 과거의 결정탓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타임 리와인더를 먹는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까. 물론, 지금과 같은 결과를 알고 있기에 그 날엔 이미 알고 있는 결과를 가져온 선택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이 가져온 뒷날의 삶에 대해서는 또 지난 뒷날에 후회가 없을까, 책임을 전가하진 않을까.


긍정이나 부정, 자기가 바라던 어느 쪽의 변화든 간에 이것은 물질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계의 질서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마법의 이용 시 그 힘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p63


  그건 그거고. 소설 속 어른들의 선택과 책임은 분명 문제였다. 삶의 고통이 어떠했을 지 남의 고통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을 속인들의 특성이라고 치고, 소년을 버리고 자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한 엄마나, 새로운 가정을 꾸미면서 재혼 자녀에게 서슴지 않고 냉대를 행하는 새엄마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아들이 고통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빠나 그들이 행한 ‘결혼’으로 이어질 일에 대한 책임을 가지는 자세가 엉망이었다. 하나의 욕망만을 원하고 그 욕망에 따르는 책임은 지려 하지 않았던 결과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많은 일들이 행하는 잘못의 전형이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가끔, 위저드 베이커리에 들리고픈 욕망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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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워터십 다운을 향해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Watership Down 

리처드 애덤스, 사계절 2002.


    제법의 작가들이 출간을 거절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리처드 애덤스의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 역시도 그랬다. 그가 렉스 콜링스라는 편집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이야기는, 책으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작가만큼이나 책을 ‘보는’, 작가를 ‘보는’ 눈을 가진 이의 역할에 감사한다.

  그렇게 고전에 반열에 오른 <워터십 다운>의 작가 리처드 애덤스가 크리스마스에 사망했다. 그가 52세에 쓴 <워터십 다운>은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로 그가 환경 공무원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쓴 소설이라 한다. 이 작품에 대한 여러 출판사의 거절의 이유는 내용이 너무 길다는 것과 토끼들이 귀엽지 않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독자의 입장에선 이야기가 ‘너무’ 긴 줄 모르겠고 토끼는 귀엽기도 했지만 안타까웠다.   이야기는 모두 4권이다. 1부는 택지 개발로 인해 살 수 없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이야기, 2부는 토끼들에게 이상향이라 불리는 워터십 다운에 가는 과정, 3부는 에프라파 잠입 작전과 탈출담, 4부는 마을을 지키기 위한 에프라파 토끼들과의 싸움을 담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열한 마리의 토끼들이 새로운 집을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모험이라 불릴 수도 있지만 이 토끼들의 모험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모험 소설이 가지는 흥미진진함과는 다르다. 토끼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기에 추위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는 듯 열한 마리의 토끼들은 각각의 캐릭터가 확실하다. 그만큼 이야기 속에서의 역할들이 뚜렷하다. 예언능력을 가진 파이버, 지도력을 가진 헤이즐을 비롯하여 이름처럼 용맹스러운 빅웍, 이야기꾼 댄더 라이언, 지략있는 블랙베리, 굴 파기의 대가 스트로베리, 어리고 소심한 토끼 에이콘과 핍킨 등이 그렇다. 이들 토끼들은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며 위험을 헤쳐 나간다. 이 상황속에서 지도자의 역할, 헤이즐의 활약이 눈에 띌 수밖에 없지만 예언가인 파이버도 탁월한 이야기꾼인 댄더 라이언의 역할에도 눈이 간다.

  두 토끼의 역할이 다른 듯하지만 일종의 종교적·정신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파이버의 예언적이 능력은 샌들포드 마을의 위험을 감지하고 새로운 곳을 가야 한다는 계시를 전한다. 그리고 댄더 라이언은 토끼들이 힘들어 할 때, 지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때면 토끼들 사이에 전해지는 신화이야기를, 전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토끼들에게 힘을 북돋는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에게도 해당되는 것일 게다. 삶을 살아가는데 길잡이가 되어줄 신념과 그 신념을 강화시켜줄 믿음을 주는 이야기들 말이다.

  토끼들이 각자의 성격을 가지고 위험하고 불안한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리더 헤이즐의 역량 덕분이다. 헤이즐은 강압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아니다. 자신과 함께 하는 토끼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문제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 지를 잘 아는 리더이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한다고 할까. 단순한 여행이 아닌, 목숨을 걸어야 하고 유혈이 낭자한 전장의 여정에서 순간적인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헤이즐은 늘 고민하고 고뇌하며 적절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이러한 상태라고 한다면 헤이즐과 함께 하는 토끼들이 가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인들 상관없이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나라가 될 것이다. ‘어디’라는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이들이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가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더 나은 곳을 찾기 위해 나아간다. 위험한 곳 샌들포드를 떠나 공포가 법인 에프라파 마을을 지나 그들이 정착하게 되는 곳.

 토끼들이 조금 더 여정을 계속하고 정착할 마을을 찾게 되는 것은 ‘장소’를 찾기 위함이었지만 그 어느 곳이라도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서로에게 믿음을 가지며 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물리적으로 조금 더 나은 환경을 찾아가는 여정이 필요했던 것은 토끼들이 자신들이 민주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익히고 배워나가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토끼들은 자신들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길 위의 나날들을 보내는 과정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해결해야 할 일에 대한 역할을 잘 수행해 나가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임을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길 위에서 토끼들이 익힌 삶에 대한 자세가 정착해서도 이어질 것이다.

  토끼들의 모습을 통해 보다 나은 곳이 물리적 환경의 요소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제 저물어가는 2016년의 대한민국에 절실한 깨달음을 주게 할 열한 마리의 토끼이다. 특히 헤이즐의 지도력과 헤이즐의 진정한 조력자인 파이버의 관계는 국정농단이라는 이 유례없는 나라에 살게 된 대한민국 국민들의 눈을 정화시켜줄 것이다.

  토끼들이 나오는 우화, 어린이용 동화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 놀랄 것이다. 이 책은 토끼들의 생존의 이야기이며 정치와 체제에 관한 이야기이니까.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토끼들처럼 수많은 촛불들이 불을 밝힌, 뛰어난 국민들이 살고 있는 대

한민국이 2017년엔 새로운 나라로 정착할 수 있기를. 그리고 헤이즐과 같은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라스푸틴이나 한국판 라스푸틴이 아니라 파이버와 같은 조력자가 탄생하기를. 각각의 장점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이기를. 그렇게 할 수 있는 역할을 해 나가면 평안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기를.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 속에 리처드 애덤스는 이 모든 것을 심어놓고 한세기를 마감하고 사라졌다. 그의 영혼도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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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장할 인간들


프란체스코 다다모, 난 두렵지 않아요- 아름다운 소년, 이크발 이야기 


 

  검은색 자동차 한 대가 마을에 들어서서 차문을 서서히 내린다. 언덕을 오르는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간다. 네 다섯 번의 총성이 울렸고 빗속에서 열세살 아이의 핏물이 흘러간다.

  책 속에서 묘사된 이크발 마시흐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크발 마시흐에 관한 이야기에서 놀라는 점은 그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한 일보다 열세살 아이를 죽여버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범인은 모르지만 알 수 있는 이 일은 1995년 부활절에 파키스탄에서 일어났다. 이 후로 파키스탄의 아동노동에 대한 관심과 변화가 일었다.

  이 책은 노동운동가가 된 소년 이크발의 이야기다. 이크발의 생애에 대한 전기가 아니라 이크발을 회상하는 소녀를 내세운 동화다. 그렇기에 이 동화의 문체는 간결하고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솔직하다. 열세 살 이크발에 대해서 더 깊이 알 수 있지는 않지만 조용하게 이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는 동화 특유의 감성으로 다가갈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이크발이 어린 소년이고 이 책이 동화라서인지 이야기의 형식이 잔잔하고 동화적으로 흐른다. 이크발의 죽음 장면 역시도 생생한 묘사가 아니라 이크발과 함께 지냈던 한 소녀에게 또다른 소녀가 이크발의 소식을 전하는 편지로 대신한다. 같은 일을 겪은 아이가 자신들을 도와주고 또한 수많은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모습을 아이의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이크발은 네 살에 가족의 빚 때문에 카펫 공장에 팔려간다. 하루 1루피(25원)의 임금에 10시간 이상을 일했다. 이 공장엔 이크발 뿐만 아니라 많은 어린이들이 빚에 팔려와 하루하루 빚을 갚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며 열악한 환경에서, 학대를 받으며 일을 한다. 이크발은 함께 일하는 아이들에게는 달라 보였고 결국 공장을 탈출한다. 탈출을 한 후 이크발은 아동노동문제를 위해 일하는 운동가들의 연설을 듣고 불법 고용주를 신고하지만 오히려 공장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당연히 예상가능한 유착관계가 카펫 공장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에 퍼져 있던 것이다.


카펫 공장 주인들은 힘이 있어. 벽돌 가마 주인들도 그렇고. 고리대금업자들도 가만있지 않을 거고. 경찰은 그들을 보호하려고 하지. 너희들도 알잖니. 판사들은 못 본 척하려고 해.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온갖 협박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어. p161


  다시 이크발은 탈출한다. 그곳을 벗어나지만 이크발은 공장을 탈출한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 어린 소년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열악한 아동노동현장을 알리는 노동운동가가 된다. 아이들을 착취하는 이러한 환경은 개선되지 않고 이어지며 아이들은 온갖 학대에 시달리며 병에 걸린 채 노예와 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고 가진자들이 권력을 쥔 이들이 그들의 힘을 과시하는 상황에서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하겠지만 이크발은 열악한 공장들의 불법한 상황을 카메라에 담고 아이들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다음 몇 달 동안 이크발은 미성년자를 착취하는 열한 개의 다른 공장들 문을 닫게 하고 이백여 명의 어린이들을 해방시키는 데 공헌했다. 전선 본부는 고아원으로 변했다. 모두 같은 이야기, 비슷한 사연이었다. 시골 어딘가에 있는 멀고 먼 마을, 빼앗긴 수확물, 고리대금업자에게 꾼 돈, 노예 생활.

 “우리가 공격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고리대금업자들이에요.” 이크발이 말했다. “모든 게 다 그자들 때문이라고요.” p164


  이러한 이크발의 노력은 아니러니하게도 파키스탄보다 전세계를 울린다. 많은 이들이 이크발의 행동에 놀라워하고 응원을 보내며 또한 학대받는 아이들의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오로지 이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책임을 느껴야 하는 이들만 다른 생각을 갖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져야 할 것을 정당하게 가지는데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에 해가 되는 것만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아이에 대한 가증스런 배려도 없는 이들은 해야 하는 일보다 해서는 안되는 일을 지속하는데 늘 사로잡혀 있다. 그렇게 카펫 마피아로 불리는 카펫 공장주들은 결국 열세살 어린아이의 활동에 두려움을 느끼고 아이를 죽인다.

  이 일을 1995년 파키스탄이라며 시간적 공간적인 제약을 두어 보지만 그럼에도 생각할수록 할말을 잃게 만든다. 이크발의 활동 덕분에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이 증가하였고 아동 해방 운동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2016년의 지금도 완전히 뿌리뽑혀지진 않았지만 전세계 아동착취 상황에 대한 고발과 변화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애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동뿐만 아니라 장애인, 노인등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노동착취는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만 해도 수십년 노동착취를 일삼는 이들의 사건 소식이 등장하고 있다.

  나쁜 일이라는 것을 몰라서 행한 것이 아니라 나쁜 일임을 알면서도 내 이익에만 환장한 사람들이 벌이는 인간에 대한 착취. 인간을 소유물로만 도구로만 보는 이들의 결정은 문제를 일으키는 자신들에 대한 반성이 아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이크발의 살해다. 이크발이 사라진다고 해서 자신들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 해결되는 것도 아님에도 그들의 결정은 자신들에게 귀찮은 것을 파괴하는 것이 당연하듯 군다. 파키스탄에서도 범인을 알지만 ‘괴한’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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