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지 상승 중



   <나는 분노한다>는 신문사의 특별취재팀들이 엮은 책이다. 매일경제신문사는 분노의 시대 특별취재팀을 꾸려 한국사회의 분노의 모습들을 취재하고 이 책을 펴냈다. 다시 한번 확인, 매일경제신문사라고?

   한국인의 분노의 이유를 알기 위해 1,200명에 대한 국민의식조사와 설문조사, 통계조사, 국내외 전문가 인터뷰와 현장 취재를 전체 5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정리하고 있다. 1장 ‘행복이란 파랑새는 없다’는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살펴보는데 변화하는 행복지수, 지역차에 따른 행복지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2장 ‘돈이 있어도 즐길 수는 없다’ 중산층 역시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라는 것과 그것의 대표적인 이유가 ‘주택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장 ‘희망의 사다리는 왜 걷어차였나’는 희망보다는 분노가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의 모습에 관해 말하고 있다. 부자동네로 손꼽히는 강남의 분노와 세대갈등의 문제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4장 ‘전 세계를 뒤덮은 99% 분노 에너지’는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의 전 세계에 확산된 분노와 그 이유, 진화된 대응으로 맞서는 자본주의의 모습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5장 ‘국민이 바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은 분노에 대한 해법을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제시하고 있다.

  여론에서는 성격의 문제, 분노조절장애라고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있지만, 이미 느끼고 있듯이 이 분노는 ‘개인’의 ‘이상’ ‘비정상’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이 분노에 물들어 있는 상황인데, 그럼 모두가 이상한 분노조절장애 증상을 겪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국민 모두를 이상행동으로 몰아가는 요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인의 분노는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렵거나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한 경우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녀노소와 빈부의 격차를 넘어선 한국인의 공통심리로 굳어져가고 있다. 그 결과, 한국 사회 어디에나 분노가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고용・교육・복지분야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광범한 분노벨트가 형성돼 있다.

   여기에는 ‘아무리 정직하게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한국인의 머릿속에 각인된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 한몫을 한다.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굴절된 현실은 사람들을 경쟁적인 지대추구 행위로 몰아간다. 지대추구행위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로비 등 비생산적 활동을 펼침으로써 공공의 자원을 낭비하는 것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자기 이익을 위해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 p5~6


  빈곤이 가속화되고, 빈부 격차가 커지고, 노력해도 좌절감만을 얻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냉전체제의 경쟁의 승리자이다. 이 자본주의의 승리 이유는 행복을 추구하는데 적합한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이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빈곤하지 않고 잘 사는 삶이었을 텐데, 빈곤한 삶을 살고 그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경제적인 위기가 삶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행복’에 대한 새로운 지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돈이 있어도 즐길 수 없는 사회다. 교육비 등 ‘강요된 소비’에 묶여 여가비가 없고 여가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이것은 안정적이지 않은, 교육과 일자리가 연결되는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국가 시스템의 문제다. 또한 나라 전체가 ‘주거불안’을 겪는 상황도 문제이다. 집이 있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집값이 오른다와 집값은 꺼진다라는 이야기 속에 상반된 기대감이 분노를 더욱 재생산하는 요인이 된다.

  세계는 불평등, 불균형의 확대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월가점령’ 시위의 캐치프레이즈는 “나는 99%다”였는데 당연 상위 1%에 대한 쏠림, 지나친 불평등에 대한 것이었다. 전세계적인 이 분노를 진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해결책을 논의하는데 먼저 낙수효과였다. 이것은 부자들, 대기업이 돈을 잘 벌면 돈을 더 잘 쓰게 되고 그 돈이 빈곤층과 중소기업에게로 가서 소득양극화가 해소되고 경기가 부양된다는 생각이다. 당연, 실패했다. 그리고 선거와 맞물려 실행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복지공약을 제시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이렇듯 실패만 하게 되는 대안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 이 책은 두 가지를 든다.


 첫째, 위기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이유에만 관심을 쏟아보면, 누가 어떻게 오작동을 초래했는지에 대해서는 둔감해진다.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똑같은 실수가 반복될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둘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허점과 모순투성이’라고 아무리 헐뜯어봤자 부질없는 일이다. 중상주의나 공산주의는 아예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주도권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친 국가 자본주의, 기업 자본주의 등도 마찬가지다. 100%의 치유를 보장하지 못한다. 혹자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남유럽 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 또한 정도를 지나치면 붕괴를 앞당길 수 있다. 결국 해답은 균형 잡힌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다. p206


  자본주의를 넘은 공감자본주의를 해법으로 내세운다. 도대체 공감자본주의는 또 뭔가. 당연 무엇이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지만, 이 말도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문어체의 표현으로만 여겨진다.


사회 구성원의 합의와 공감을 전제로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낙오자도 인정할 수 있는 경쟁, 패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승부, 실패자도 수긍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주는 자본주의다.

 공감 자본주의는 경제적 약자 보호에 초점이 맞춰진 ‘온정적인 자본주의’, ‘인간미 있는 자본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고비용 저효율’ 사회를 ‘저비용 고효율’로 바꾸자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 예컨대, 공공기능을 강화해 주거, 교육비 등의 부담을 구조적으로 줄여주고, 공정한 룰에 따른 경쟁을 활성화시킴으로써 효율성을 증대시키자는 아이디어다. p265


   특별취재팀의 취재에 따른 이 대안 제시대로 본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권은 이 대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공감’이란 말은 한국 사회에서 갈피를 잃은 지 오래다. 타인에게 공감할 여유가 없다. 나 자신에게도 공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총체적인 난국에서 자꾸 ‘개인의 일탈’을 강조한다. 분노 게이지의 상승을 개인의 미성숙한 성향 탓으로 돌린다.


 사회 시스템 자체가 분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낳고, 그 폐해가 또 다른 폐해를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구조화, 집단화한 분노가 임계치를 넘어서면 한꺼번에 분출된다. 동서고금의 역사책에 숱하게 등장하는 교훈이다. p278


  최근, 정치·사회에 관한 책들은 문제의 원인과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이 천편일률적이게도 똑같다. 이토록 눈에 뻔히 보이는 문제라니 해답을 향해 바로 갈 수 있을 법도 한데, 여전히 답으로 가지 못하는 것, 그 총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원인과 비결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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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왕으로 배터지는 사회



정수복 외, 사회를 말하는 사회

 



 마치 재밌는 놀이마냥 한국사회가 가진 문제적 특징들을 잡아내고 그에 대해 분석한 책들이 증가했다. 책의 내용보다도 한국사회에 대한 그 명명들이 재미가 있어 도대체 어디까지 계속될까 궁금했던 참에, 이렇게 그 명명들을 다 모아 엮은 책이 나와 주었으니 이름하여 ‘사회를 말하는 사회’다.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 학자들이 한국사회에 대해 분석한 것을 주제에 맞게 총정리한 것이다.

  전문가들이라지만 쏙쏙 문제를 찾아내어 지칭하는 네이밍 센스가 재밌다. 하지만 이 모든 명명을 보고 있다 보면 정말이지 웃프다. 결국 한국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니까.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니까. 이런 곳에서 살고 있으니까.

  1장에선 ‘나는 항상 배고프다’는 제목 아래 소비사회, 자기절제사회, 낭비사회, 잉여사회, 하류사회, 탈학교사회, 허기사회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들에 부여된 사회의 특징들은 한국사회의 ‘결핍’에 관한 내용들이다. ‘나는 항상 배고프다’는 말은 히딩크가 축구를 하면서 성적과 승리에 대해 이야기한 이후로 더욱 회자되는 것 같지만, 이 사회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배가 고프게 만드는 사회인 것 같다. 소비사회이니까 더욱 더 소비를 하게끔 더욱 더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더욱 더 낭비하게끔 하고 잉여사회에 잉여자로 살게 함으로써 사회경제생활에 진입하지 못하는 결핍을 만들어내니 말이다.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타인과 비교하고 끊임없는 결핍으로 인해 허기를 느끼며 살고 있는 사회다. 그것이 경제적 결핍이든, 정신적 결핍이든 이 사회는 결핍이 만연한 사회다.

  2장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현대인들의 불안과 위험에 대한 분석이다. 많은 학자들이 현대 사회를 위험사회, 분노사회, 감시사회, 과로사회, 탈감정사회, 피로사회, 탈신뢰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를 위험사회라 지적한 울리히 벡은 위험에도 사회적 지위가 있어 사회적 약자들의 위험 지위가 낮다고 말한다. 돈과 지식과 정보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 현대사회는 감시사회인데  ‘감시’의 정당성은 판단하는 기준은 “감시하는 주체와 감시당하는 객체 사이의 ’관계‘이며, 특히 그 양측의 '힘의 관계’에 따른 것”이라 말한다.


 권력에 대한 감시가 정당성을 얻는 이유는 단순히 권력을 가진 이들 개인에 대한 책임감이나 도덕성의 차원이라기보다는 구조적으로 불균형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는 힘의 상태를 균형 상태로 맞추고자 하는 것이며, 따라서 감시는 일종의 ‘힘의 균형을 위한 사회적 장치’ 중 하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p85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적 ‘감시’는 정당성이 없다. 권력이 힘을 가지지 않은 자에 대한 이 빈번한 감시와 사찰의 사회다. 제 역할을 해야할 언론도 감시의 대상과 방향을 권력의 눈으로 보고 있는 사회다. 이러한 ‘역감시사회’가 정치적으로 독재이며 경제적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사회와 같다고 말한다.

  3장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승자독식사회, 격차사회, 부품사회, 주거신분사회, 팔꿈치사회, 영어계급사회, 절벽사회, 제로섬사회에 대해 말하다. 이런 특징은 공동체가 해체된 사회의 단면이다. 성공과 1등에 집착하는 사회, 승자만 계속 승자로 살아남는 사회다. 그래서 또한 이 사회가 부품사회라 불리는 이유를 안고 있다. 신자유주의 확산과 과도한 경쟁으로 각박하고 야박한 이 사회에서 안락한 노후는 보장되지 않고 1% 기득권 집단의 부속품으로 살아가고 있는.

  4장 ‘어느 날 차단되었습니다’는 분열사회, 네트워크사회, 단속사회, 루머사회, 무연사회, 싱글사회, 신 없는 사회에 대해 설명한다. 이들 사회는 온라인 상에서만 접촉하려는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해 조명한다. 현대사회는 네트워크나 사회관계망 서비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서로 접속하고 접촉하는 듯하지만 서로가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이러한 관계의 양상은 많은 문제와 모순을 안고 있다.


 글래드웰은 ‘강한 결속’과 ‘약한 결속’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소셜미디어가 소소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몰라도 중대한 사회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역부족이라고 주장한다. p201~202


  사회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 속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공생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데 오늘의 사회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경제적인 풍요와 정보의 발달, 생활의 편리가 있지만 결핍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과로하고 분노하고 피로하고 감시당하며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사회속에서의 우리들이 분노와 회한을 떨치고 자기 성찰과 자기 혁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보다 비판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그러고 싶지만, 그러기에 이 사회가 너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도대체 주렁주렁 나오는 이런 사회에서 무엇보다 해결해야 할지. 무엇에서 희망을 보아야 할지. 그럼에도 결국 답이 ‘나 자신’의 성찰이 되어야 하는 것은 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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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지 한다



 결국 그들이 정치라고 표현하던 것은 ‘지배’였고, 행정이라고 부르던 것은 ‘군림’이었음을 우리는 목격했다. 시대는 점점 암울해져 이런 지배와 군림에 저항하면 제재를 당하고 ‘가만있으라’는 전근대적 가이드라인도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부한다. ‘가만있지 않겠다’ 다짐하며 거리로 나서고 촛불을 켜든다. 그리고 주저하는 자신을 향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절규를 일깨운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할 때 빚어지는 가장 큰 비극은 악한 이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이들의 지독한 침묵이었다고.” p5~6


  더할 나위 없이 짜증이 났는데 표면적인 건 폭염이었다. 그리고 비가 온다는 기대감에 흐린 하늘을 보고 잠시 희망이 샘솟았다가 멀쩡한 하늘을 보고 다시금, 짜증이 몰려 올려 하고 있다. 표면은 무슨, 불쌍한 기후에 짜증을 전가하지 않기로 했다. 표면이든 내면이든 요 며칠의 이 짜증의 원인을 제목이 정확히 말해준다.


“대한민국은 왜 헛 발질만 하는가 -

정치와 행정이란 이름으로 지배하고 군림하는 저들에게 분노한다!”


  변상욱, 페이퍼로드, 2014.



  핫이슈의 홍수 속에 간간히 등장했다 사라진 ‘민영화’, 신공항 논쟁과 ‘아무 일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는 뜬금없는 결정, 더 뜬금없는 사드배치, 연이은 뜬금 대구공항 이전. 정치권에 대한 로비자금은 허구헌날 나오는 얘기고. 국민들의 희망의 전기를 위한 특별사면이 이뤄진다고 하고. 도대체 죄인을 사면하는 것이 무슨 희망이라고, 나오는 이들이야 뻔한 것을..........거기다가 날도 더운데 개, 돼지거리는 ‘교육부’의 관리까지. 연이어 온몸에 스팀을 높여 습도를 생성한다. 지랄도 풍년이라는 말이 새삼 생각난다. 엊그제 뉴스기사(2016.7.10)를 보다가 마우스를 확 집어 던졌다. 내 컴퓨터가 무슨 죄람.....

  청년수당이 5일만에 1천명이 지원해서 복지부가 수당 지급을 막을 것이라는 기사였다. 정부 부서 중에서도 가장 약한 부서 중의 하나로 꼽히는 복지부의 존재감 있게 일하는 뉴스를 접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청년활동지원사업(청년수당)은 서울시의 사업으로 주민등록 기준 서울에 1년 이상 거주한 만 19∼29세 가운데 주 근무시간 30시간 미만인 청년이면 신청할 수 있다. 대상자에게 최장 6개월간 월 50만원 활동비를 현금으로 주며 매달 활동계획서에 맞게 활동했는지 보고서를 내고, 주요 지출 내용을 첨부해야 한다. 대상자 선정 기준은 가구소득(건강보험료 기준)과 미취업기간(고용보험), 부양가족 수(배우자와 자녀)다.

  청년들의 취업난이 가속화됨에 따라 단기간이라도 안정된 생활과 새로운 활동 도약을 위한 지원으로 보이는 이 사업이 시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복지부가 "서울시가 사업을 강행하면 직권취소를 하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사회보장기본법 위반이란다. 때문에 서울시가 법을 위반하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시정명령, 취소·정지 처분, 교부세 감액 조치 등의 엄정한 법적 대응으로 맞설거란다.

  정부가 지자체의 복지사업을 장려하지는 못할 망정 막는 이 한심한 행태가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여러 뻘짓을 쳐다보는 중에서도 이 뻘짓을 보며 변상욱의 책제목이 딱 떠올랐던 것은 정부의 행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권력자의 지배와 군림에 대한 사실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외국의 사례를 비교하며 언론인인만큼 언론의 문제적 행태에 대해서도 꼬집으며 다양한 헛발질을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정부에 대한 ‘문제점’에 대한 이 책을 살펴보면 큰 틀이나 작은 틀에서나 이명박, 박정희 정권에 대해 가지는 비판은 한결같다. 이쯤되면 문제점에 대해 완전히 틀이 잡힌 정부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도 다르지 않다. 아주 오래도록 우리가 이 상황의 목격자이고 피해자이고 가해자이다.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지독한 선한 침묵자였기에.

  언론은 투표가 답이라고 하고 계속 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사회참여가 아니라 ‘투표’만 독려하는 것에 대해 꼬집는다.


 국민의 정치참여의 핵심은 투표참여가 아니라 정치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정치에 나서라 하지 않고 투표에나 나서라고 한다. 왜 국민에게 정치를 권하지 않는가? 이 문제는 정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부터 따져야 한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절차가 권력일까?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정치가 아니라 지배이다. 진정한 민주정치는 국민이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해 고루 나누는 것이다. p286


  투표를 해봐서 안다. 한때는 투표가 적극적인 참여라고 생각했었지만 ‘투표’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공정성이 의문시되기까지 하는 이때, 과연 투표가 답이 될 수 있을까. 저자의 말대로 ‘참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때다. 그런 점에서 개, 돼지 발언에 대한 파면 요구나 이 발언에 항의하며 최저임금 인상 시위도 적극적인 의사표현과 참여의 한 측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위하는 족족 연행되거나 시위 자체가 무산되긴 하지만. 정부의 헛발질이 반복되고 강도가 높을수록 ‘분노’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분노의 수위가 깊어지면 헛발질을 멈출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결과로 보고 싶은 날이다.


 연구진은 권력을 주면 3가지 변화가 발생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에 집중한다.’ ‘아래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둔감해진다.’ ‘자신과 측근들은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p16


  저자는 권력자가 헛발질하는 이유, 그러니까 여론이 따가워도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로 페이싱 효과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의미 있는 만남이었고 상대방과 소통이 잘 되었다고 착각하는 상태를 말한다.


 자기가 말을 많이 해 만족스러우면 당연히 상대는 말도 못하고 듣기만 해 만족스럽지 못한 게 뻔한데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착각하는 현상이다. 그러니 측근에게 둘러싸여 칭찬에 익숙한 권력자는 소통이 안 되고 자기 생각만 주장하며 실수를 거듭한다. p16


   이것이 모든 권력을 가진 이의 특징이라 할지라도 ‘권력’을 쥔 이에게도 ‘개인차’가 있음을 믿으며 그 믿음이 없다면 사회참여의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정치·사회 참여하는 민중들이 많을수록 권력자의 행태가 변화할 수 있으며, 그런 활동으로 ‘모셔야 하는 권력자’를 선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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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깊어진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깊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에 공평하게 적용되는 진리다.   p51

 

   

  시인으로 등단하여 문화평론가, 강사, 번역가, 방송구성작가 등 여러 직업을 경험한 조병준의 포토 에세이 <정당한 분노>는 ‘때로는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의 글에 매그넘의 사진이 실린 이 책에서 제대로 분노를 만날 수 있다.

  매그넘은 세계 각국 사진 작가들이 공동 운영하는 사진 에이전시라고 한다. 1974년 유명한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등에 의해 설립되어 전세계에 사진을 공급하고 있다. 매그넘의 사진들은 세계 각국의 산업, 사회, 정치, 재난, 전쟁 등의 사건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저널리즘 사진이다. 매그넘은 라틴 문학에서는 위대함이라는 의미를 총의 내포적 의미로 강인함을, 샴페인 양식에서는 축하의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이 책에선 이런 매그넘의 사진을 보는 기쁨이 있다. 물론, 사진의 내용이 기쁜 것은 아니지만.

표지는 체 게바라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체 게바라에 투여된 이미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이 책의 제목과 사진들과 글의 내용들을 짐작할 수 있다.

 

분노. 조심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단어에는 힘이 담겨 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분노가 얼마나 치명적인 부정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지,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성현들이 분노하지 말라고 가르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사람이 다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분노해야 할 때가 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을 때,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냉철해진 머리로 생각을 해도 그 분노가 정당한 분노일 때, 불의와 부패와 부도덕이 인내의 한계를 넘었다고 머리가 아니라 몸이 비명 지를 때, 그럴 때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때로는 인내가 아니라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 불의와 부패와 부도덕이라는 이름의 탱크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할 때, 약하디 약한 살과 피만 가진 인간이 그 앞을 막아설 수 있는 힘은 분노뿐이다. p13

 

   분노보다도 꽉 막힌 슬픔이 마구 흘러 들어온다. 사진도 글도 이 세상에 대해 그토록 슬프고 억울하고 아프게 살아간 이들에게 느껴지는 죄책감과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억울함과 슬픔이 무력감과 겹쳐진다. 한편,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동질감에 나름 위안을 가진다.

 

분노. 그렇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 800킬로미터의 길을 걷는 동안, 나를 채웠던 감정들 중의 가장 큰 부분은 분노였다. 처음엔 내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시작했다. 그리고 분노라는 이름의 에너지가 언제나 그러하듯, 그 분노는 부메랑처럼 내게로 다시 날아왔다. 나의 어리석음, 나의 편협함, 나의 허약함, 나의 탐욕스러움, 나의 비겁함, 그리고 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인간의 속성들이 다 내 안에 있었음을 확인하는 것만큼 큰 고통이 또 있을까. 이미 수많은 성현들이 우리에게 가르쳤다. 분노가 위험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분노는 아주 쉽게 그 진행방향을 자기 자신을 향해 전환할 수 있다. p102

 

   작가는 10년 동안 인도와 유럽을 방랑하고 2년간 인토 마더 데레사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했다고 한다. 방랑을 시작한 건 삼십 대의 어느 날이었고 거울에서 ‘주어진 인생 앞에 굴복하기 시작한 사내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책은 그 사내가 그 길 위에서 본 또다른 얼굴들일 것이다. 이 글들은 그 사내의 모습을 ‘보고’ ‘떠날 수’ 있던 사내가 보는 눈이었다. 거울 속 사내의 눈이었다면, 이 글들이 피어날 수 있었을까. 이 글과 작가가 만난 풍경과 사람들은 결국 볼 수밖에, 만날 수밖에 없는 풍경과 사람들이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과오 없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나 자신을 향한 분노는 우리의 숙명이다. 인간은 얼마나 약하면서도 오만한 존재이던가. 그렇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때로 나 자신을 향한 ‘정당한 분노’는 우리의 의무가 될 때도 있다. 때로는 내 스스로에 대해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죄는 내게 있음을, 따라서 벌도 내가 받아야 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분노의 부정적 에너지가 내 인생을 끝없이 갉아먹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p103~104

 

   그리고 거울을 보던 사내는 길 위에서 체 게바라를 떠올린다. 길을 걷는 동안 내도록 ‘분노’의 감정을 느낀 그 사내는 ‘분노’를 느끼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느낀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을 느끼고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의 불의에 부패에 부도덕에 맞설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한다.

 

가난, 전쟁, 질병, 소외, 폭력, 억압, 차별, 탐욕…….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그 수많은 불의와 불행들을 우리는 자꾸 외면하려 합니다. 혁명을 꿈꾸기에 세상은 너무 단단해졌다고 한숨만 쉬며,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게 눈 감고 살겠노라고 비겁하게 도망칩니다.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습니다. p188

 

good reason, '합당한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선한 이유‘로 풀어도 될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혁명이 신화가 될 수 있었던 건 거기에 ’선한 의도‘, 즉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애정이 담보되어 있었기에 당신의 븐노는 정당한 분노가 될 수 있었고, 당신의 혁명은 신화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아무쪼록 제가 이 사진들에 첨부한 중언부언들에도 또한 그렇게 ’선한 이유‘가 담겨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거기에 ’선한 의도‘가 먼저 담가지 않으면 또 다른 폭력으로 전락하기 쉽다는 걸 알 만큼은 저도 세상을 살았습니다. p189

 

   폭격처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찌르는 햇볕이 나왔지만 반갑기보다는 답답하다. 비가 내리는 동안 만들어 낸, 휩쓸고 지나간 상처들이 눈에 쟁쟁하게 보이는데 그것을 뛰어넘어 또다른 일들이 마구 만들어진다. 천재지변은 인재를 넘지 못한다고 하는 이는 ‘인재’를 만들어낸 주체가 아닌가. 천재지변을 더욱 강화시키는 인재의 모든 주체자들에게 ‘정당한 분노’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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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화해를 권하는 당신에게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뜨인돌,


    백설공주가 자꾸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외로워서라고 그래서 낯선 이들에게서 접촉 위안을 얻는 것이라고 심리학에서는 말한다. 사회학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야기한다.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나와는 관계가 없이 친구 없이, 친밀한 경험을 공유한 사람과의 교류 없이 지내는 백설공주의 일상. 지독한 정신적 허기가 백설 공주로 하여금 위험을 잊게 하고 문을 벌컥 열어 제키게 했으리라고.

  이 책에서 저자는 관용, 일탈, 지혜의 3장으로 나누어 16개의 동화를 선택해 인간을 둘러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1장 관용에서는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거나 가르침대로 살았어도 곤경에 빠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2장 일탈에서는 규범을 벗어던진 토끼와 거북이, 빨간 모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 분홍신에 대한 이야기를, 3장 지혜에서는 관계맺음에 서투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이야기를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관계맺음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양상들, 욕망과 결핍과 연대와 우정 등에 관해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한번 보자. 우리가 그동안 여우와 두루미에서 당연히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별표치고 반성하고 익혀야 했던 것을 뒤트는 이야기를 한다. 한 식탁에서 밥을 먹지만 각자 먹기 불편한 접시로 인해 제대로 먹지 못하는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에서 작가는 화해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화해를 해야 한다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 화해는 나쁘다”라고 한다.


사이끼리 강요된 화해는 나쁘다. 화해를 무조건 좋게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사이좋을 이유가 없는 사이끼리 사이좋으라고 하는 것은 살짝 변장한 폭력이다.

여우와 두루미가 꼭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가? 여우와 두루미가 왜 같은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어야 하는가? 그렇게 상대방이 먹을 밥그릇 모양새까지 머리 아프게 따져 보지 않아도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친구도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꼭 여우와 두루미가 친구가 되어야 할까? p19

 

  그래, 여우와 두루미는 꼭 화해하고 친구가 되어야 하나? 그들이 서로 사과하면 화해가 될까. 마음의 상처가 다 아물어질까. 섣부른 화해가 가져오는 부작용에 대해선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작가는 그래서 이렇게 부르짖는다.


우리는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누군가를 싫어할 권리가 있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화해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때로 누군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계속해서 문제를 유발시킨다.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욕망인가. 또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은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가. p22


  서로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라며 오랫동안 강요받았던 우리에게 얼마나 낯설게 마음을 드러내는 말인가. 이 세상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더 좋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모자라다. 애당초 싸움이란 것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아기 돼지 삼형제의 집짓기 현장으로 가보자. 작가는 이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들은 벽돌집을 짓는 사람일 것이라 말한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할까. 그런 벽돌집을 짓고 사는 이들은 서유럽 사람들이고 그들 눈에 나무나 짚으로 집을 짓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따위 엉성한 집을 짓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태평양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이들의 가난 혹은 ‘비문명’은 게으름 탓이 된다. 게으름이 외부의 침입을 부른다. 이들은 외부의 적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게으른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가 부지런한 셋째 돼지의 집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듯,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유럽인의 집으로 피신해야 한다. 그런데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인의 집으로 모두 들어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가서 유럽인의 집을 지었다. 그 이후 이어진 식민지 지배의 살벌한 역사에 대해서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p58


  빨간 모자에게 큰 길로 가라고 하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질서에 맞게 살라는 이야기이다. 그 질서를 깨지 말라는 것이다. 분홍신에 대한 금지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부당한 규제에도 묵묵히 따르는 순종적인 인간상을 학교에 바란다면 학교는 복장 규제로 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부당한 규제에 참고 견디도록 길들여진 아이는 자라서도 부당한 것이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익히 들어왔던 ‘교훈’ 은 결국 사회적인 억압에 관한 다른 전달이다. 이 책은 좋은 이야기로 감춰놓은 드러내지 않은 한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변화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동화 속에서 환상을 품지 않게 되는 탓도 있지만 동화의 환상을 깨버리는 어이없는 교훈의 덧씌우기가 즐겁게 읽는 동화의 여운을 가시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또다른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짚어 보는 것, 동화를 짚어 보는 맛이 있다.

  작가는 ‘왜’라고 묻는 것을 세상이 불편해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라고 묻지 않으면 우리는 지배자의 논리에 따른 삶을 살게 되리라 말한다. ‘왜’라는 한마디는 어른들로부터 쉽게 낙인찍히고 소외당한기 쉽다. 하지만 이들의 ‘왜’가 세상을 보다 밝게 이끄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왜’라는 물음이 가진 힘을 함께 알고 나누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임을 작가는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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