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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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蟲)전쟁

세상 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사계절, 2013.


매우 억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다. 아저씨 혹은 아줌마라는 호칭에서 누구도 품격과 인격을 연상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아저씨와 아줌마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명사는 뻔뻔함, 능청스러움, 악착스러움 등이다. “혈연관계가 없는 남자 어른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라든가 “아버지의 친형제를 제외한 남자를 이르는 말”과 같은 사전에 등장하는 아저씨의 뜻은 잊어야 한다. 상식적으로 사용되는 아저씨라는 단어에는 돈 자랑이나 지위 자랑질을 일삼는, 상쾌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중년 남자라는 뉘앙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런 단어들이 있다. 품격과 인격을 배제하기 위해 만든 단어, 충(蟲). 그래도 한때는 김치녀, 개똥녀, 된장녀 등등으로 사람임을 분명히 하는 ~녀(女), ~남(男)이 꼬박꼬박 붙었더랬는데 충성스럽게도 충(蟲)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 지 오래되었다. 일상생활에 사람을, 행동을 벌레처럼 바라보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하루가 멀다고 인터넷을 장식하는 충(蟲)에 관한 기사는 마치 그 단어를 직접 들은 것처럼 진절머리가 난다. 그런 일들이 벌어진 이 사회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그 일로 오가는 제2차 충(蟲)의 전쟁에.

  이 글은 일찌감치 ‘세속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진절머리를 절절하게 고민한 학자 노명우의『세상물정의 사회학』중 ‘성숙’이라는 제목 아래에 있다. 배운 괴물들의 사회라는 부제를 달고서 그려놓은 이 글이 어제, 오늘 인터넷을 달구는 ‘맘충’이란 단어 때문에 떠올려졌다. 그와 함께 주목한 것은 이 사건들이 전해지는 경로였다. 일명 태권도 사건과 신도시 오줌사건이라 불리는 두 사건 모두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이해’라는 말로 문제를 ‘지적’하고 문제를 ‘무효화’ 하려 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한 아이의 성장과 교육에 사회의 역할이 필요한 시대다. 아이를 위한 공동체의 협력과 지원이 필요하지만 비상식적 행동에 대한 정당성과 타당성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나서서 그 올바르지 않음, 타인에 대한 배려없음을 교육하는 것이 사회가 할 일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맘충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몰상식과 배려없음을 질타하는 것이겠지만 왜 맘충만 있고 파파충은 없냐는 목소리 또한 제기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과 마음은 없이 돌고 돌아 혐오의 감정만을 발산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두 사건 모두 관련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인터넷에 게시했다. ‘올릴 게요’ ‘신고할게요’. 다툼이 벌어졌을 때 ‘소문낼거야’와 같은 말부터 쏟아내고 써내려간 글은 당연 사건의 일부만이 게재될 뿐이다. 다툼이 일고난 뒤 답답함과 억울함으로 하소연하고 조언받기를 원하는 심정을 모르지는 않으나 지인이 아니라 익명의 사람들부터 떠올리는 일은 어느틈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걸까. 이것 또한 SNS 중독과 관련있는 인정욕구의 한 부분일까, 아니면 투쟁의 방법일까.


개인을 공적 의제로 삼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강해질수록, 방송국에 소소한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은 늘어난다. 공적 세계에서 개인이 무존재가 될수록, 사람들은 집요하리만큼 사적인 개인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개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공적 세계와 개인이 과잉으로 넘치는 사적 생활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처량하게도 진자운동을 한다.


  장소와 인물만이 바뀐 비슷한 일이 매일 넘쳐나는 세상에서 각각의 사건은 개별적이지 않고 특정 군집이 되어 혐오의 카테고리에 안착한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라도 충(蟲)을 붙일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충(蟲)을 붙일 집단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되는 건가. 저자는 무관심은 관념적 살인 무기이며 모욕은 자기 존엄을 추구하는 개인에 대한 관념적 살인이라 했다. 그러나 모욕은 일상이 되고 사람들은 관심과 무관심이라는 무기를 기막히게 잘 휘두르는 무사가 되었다.

  세속의 풍경은 평범한 일상의 나날이란 없는 듯이 흘러가고 있다. 좋은 삶을 살아보자는 학자의 시선이 세상을 두루 살피고 점검하는 동안 과연 좋은 삶을 살 수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너무 많은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기에 차라리 보지 말고 듣지 말자는 생각까지도 들지만 이러한 세상을 잘 보고서 이치를 잘 알아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어술을 익힐 수 있다는 저자의 말로 다시금 세상을 본다. 삶의 세태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통찰이 너무나 적확하기에 그래도 허허로운 감정이 길게 든다. 어떤 사건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피하고 싶지만 저자의 글은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어서 계속 보고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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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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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같은 사회


이상한 정상 가족, 김희경, 동아시아, 2017.


  ”모든 출생에 대한 차별없는 지원에 중점을 두고 출산율 위주 정책에서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방향으로 전환“한다는 정부의 저출산대책이 발표됐다. 구체적인 내용과 집행은 정책의 방향을 따른다. “모든 아동과 가족에 대한 차별없는 지원”이라는 기조 아래 비혼 출산에 대한 지원을 시작으로 점점 확대될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지원을 기대하면 좋은 걸까. 정치권은 선거가 끝나서인지 다른 일로 바빠서인지 내가 몰라서인지 저출산대책의 방향과 수준에 대해 딴지없이 조용한 듯하다. 이런 정책방향을 놓고 포퓰리즘, 세금낭비라 외치는 이들은 아직은 없고 실행력이 미흡하다는 지적만이 쏟아지고 있다. 이제 ‘가족’ 의미에 대한 변화를 인정하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정책 집행의 편리성을 위해 만들어진 ‘표준’, ‘규격’이 사회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만드는 요인이다. 특히 군사정권은 획일화된 시스템으로 일군 정책을 최고의 문화와 가치인 것처럼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처럼 고정·확장시켜 따르도록 강요했다. 자세히 알아보면 생각보다 많은 규율이 모두, 그 시절에 한사람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가족주의’가치·이데올로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한국식 가족주의의 토대가 어떻게, 언제 ‘정책방향’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였는지를 알려준다.


전근대사회에서 가족주의가 지배주의적이었던 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한국 사회의 특이한 점은 흔히들 가족주의가 약해지기 마련인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더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근대화 과정 내내 국가가 ‘선 성장, 후 분배’의 논리하에 거의 모든 사회 문제를 가족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가, 정권을 위해 ‘가족이데올로기’가 펼쳐졌고 국민들은 신들린 듯이 그것을 따랐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불편하고 부당하게 타인을 억압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때부터 모든 문제를 가족이 책임지고 희생하는 것을 수용하고 신화처럼 퍼뜨리면서 국가에서 사회문제를 책임지고 복지를 확대하는 필요성을 불편하고 부당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의 근원에 이처럼 특정 정권에 의해 세뇌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근대화시키기에 약화되는 가족주의가 한국에서 강력해진 바탕에 국가가 개입되어 있던 시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가족에 관해서는 다시 근대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인가.

  ‘가족이데올로기’는 가족의 부정적인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왔다. 특히 아내와 아이에 대해 ‘폭력’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인식을 비롯해 비혼·재혼·한부모·다문화 가정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여성에게 부과되는 출산·양육·돌봄에 대한 과도한 책임,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해외입양 등이 한국식 가족주의가 양산하고 있는 실태다. 나아가 한국식 가족주의가 결과적으로 양극화를 가중시키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회정책이 가족 단위로 설계되는 방식이 지속되면 가족을 형성치 못한 개인, 가족에게서 충실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사회가 또다시 불이익을 가하는 셈이 된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 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 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책은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고 흔히들 ‘정상’이라 규정짓는 가족에게만 제도적인 혜택을 부여해왔다. 존재하는 모든 가족형태를 인정하는 정책방향에 지속적이고 굳건하게 굳어져 온 편견이 소멸될까. 저자는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제시한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저자는 ‘개인적 삶의 독립성을 보장하되 개인 삶의 질은 집단적 책임에 달려 있다’는 스웨덴의 예를 자주 들고 있다. 부모 체벌금지법이나 스웨덴의 보편적 공공보육방법, 육아상담소를 중심으로 한 부모교육 등 스웨덴의 전반적 복지정책에 대해 인상깊게 서술한다.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주의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내 가족일이니 관여치 말라’는 인식속에서 고준희양 사건과 같은 아동학대·살인이 지속되었고 아내에 대한 폭력을 넘어서서 ‘내 여친’을 들먹이며 데이트 폭력 또한 확산되고 있다. 이 폭력의 근원에 아이와 여성을 소유물로 보는 가부장제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 존재한다. 우스운 것은 이러한 가족주의는 가족내에서만이 아니라 회사와 사회에서도 확산되는데 회사는 늘 ‘가족처럼’을 강조하며 사원들을 부림으로써 이익을 취득한다. 언론에 대고 변명인지 인식하지 못해서인지 들먹이는 각종 사장·대표·회장의 말은 “가족처럼 여겨서”이다. 가족처럼 여겨서 착취하고 때리고 막막하고 성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렇듯 한국식 가족주의는 힘의 논리에, 입맛에 맞게 그 의미가 달라진 채 진행되어 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개인의 인권의식이지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보는 엄마의 눈, 전 사회의 ‘확대가족화‘가 아니다.


  저자는 촛불혁명을 거쳐 변화된 의식이 차별없이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를 형성하는데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여전히 배타적이고 편견과 차별은 이루어지고 있다. 의식은 양심에 기대어 변화하지 않고 욕망과 이익이 양심을 덮기도 한다. 일련의 사안들에 대해 근거없는 가짜뉴스들이 횡행하며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게 한다면, 편견과 차별을 부추기며 개인의 이익을 자극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 가족주의를 벗어나는 일도 힘겹지만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가 모두에게 어느 정도 합의된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막연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기대만큼, 정말로 기대해도 좋은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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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지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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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그리고 편


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저, 민음사, 2014.


  2018년 6월 22일자 중앙일보는 [강남엔 112개, 도봉엔 1개···한국점령 스타벅스의 비밀]이란 기사를 실었다. 소위 ‘문화를 판다’는 스타벅스의 전략이 한국시장에 ‘먹히며’ 승승장구하며 영업이익 증가는 물론 신규 매장 또한 줄을 있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서울의 스타벅스 매장수가 미국 맨해튼을 포함한 뉴욕시 5개구 전체 매장수보다 100개가 많다고 한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스타벅스가 파는 문화라는 게 ‘소비’에 초점 맞춰진 자본주의의 문화 그 이상의 특별한 게 있는가 생각되지만, 한정판 스타벅스 아이템을 사기 위해 밤새 줄짓고 스타벅스 매장만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보지 못하는 스타벅스의 ‘매력’이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적지 않게 스타벅스 매장을 이용했는데 그것은 언제나 ‘눈에 잘 띄었기에’ 그랬다. 어쨌든, 이 기사는 편의점의 출발지인 미국과 최대 발흥지라는 일본을 제치고 인구 대비 편의점이 가장 많은 나라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완전한 스타벅스 공화국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편의점 사회학』에서 보는 모습과 닮았다.

  전상인 교수는 『편의점 사회학』에서 우리나라에 편의점이 성행하는 현상에 관해 설명했다. 놀랍게도 편의점은 울릉도, 백령도, 마라도, 금강산, 개성공단, 구치소에도 입점되었고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것 이상의 영역을 확보해가고 있다. 각종 공과금 수납 서비스, 민원서류 발급 등의 공공서비스 이외에도 아동 안전 지킴이와 같은 치안 영역이나 독거 노인 보호・관리라는 사회 복지 부문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이처럼 편의점이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확장하려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일상에서 편의점을 편리하게, 부담없이, 시시때때로 이용하는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무엇을 사고, 왜 사는가. 저자는 “오늘날 우리는 편의점에 의해 ‘소비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고 길들여지는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필요에 의해서 편의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편의점에 의해서 필요가 생기는 논리 구조”이며 편의점은 소비는 “무언가 고상한 행위를 하고 있다”라는 문화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영업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편의점에서는 점원과 손님의 물건 거래 이외에 인간적인 교류는 없다. 하지만 이 기계적인 무관심이 도시적 심성에 부합하는데 일명 ‘무관심의 배려’라고 표현한다. 편의점이 가지는 편리성, 깨끗함의 속성에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다양한 상품을 구비하고 있는 편의점이긴 하지만 ‘푸드몰’인듯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음식 판매가 증가하고 있다. 나라 전체가 ‘먹방’ 프로그램이 대세이기도 하지만 ‘편의점 푸드점화’ 현상은 사회 양극화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88만원 세대의 밥집이 편의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경제적 약자들이 편의점 이용률이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편의점은 눈에 띄게 띄지 않게 ‘을’을 낳는 공간이다. 알바생의 일터로 자리잡아 열악한 임금노동의 ‘을’이 되게끔 하고, 가맹점주는 본사의 횡포를 감내하는 ‘을’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렇다면 편의점을 애용하는 소비자는 ‘갑’인가. 편의점 계산기는 상품 바코드를 찍은 뒤 ‘객층키’를 누른다고 한다. 이것은 손님의 계층을 확인하는 것으로 손님이 연령과 성별에 따라 구매하는 상품에 대한 정보가 입력된다고 한다. 자신도 모르게 편의점에서는 개인 정보가 수집당하고 있는 것이다. 익히 알다시피 점유율 빅3 편의점 본사는 대기업이다. 결국 편의점을 움직이는 힘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 혹은 신자유주의다. 앞서 지적했듯 ‘소비당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소비가 조작되거나 유도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쯤 되면 우리는 ‘편의점 사회학’의 또 다른 임무를 각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편의점 스스로 주장하는 ‘편의성’의 의미 혹은 ‘편리성’의 본질을 묻는 일이다. 편의점이 사람들 소비주의 사회에 길들이는 데 편리하고, 편의점이 사람들을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시키는 데 편리하며, 편의점이 신자유주의 유목화 시대에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 편리하고, 사회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이 사람들에게 일상의 행복을 제공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데 편리하다면,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편의이고, 무엇을 위한 편리인가? 편의점의 ‘불편한 진실’은 이제 더 이상 모르는 척하거나 감출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첨단 화두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편의점을 사용할 때면 이런 생각은 잊어먹는다. 편리함에 취할 뿐. 사건이 터진 공간으로의 편의점이 나오면 그제야 불편한 편의점을 인식한다. 스타벅스도 마찬가지다. 스타벅스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있다 한들 언제나 빛나는 스타벅스일 뿐이다.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확장되는 편의점의 ‘노력’을 편리로 수긍했지만 이 책으로 생각해보지 못한 편의점의 역기능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였다. 편의점도 스타벅스도 이용하지만 뭔지 모르게 찜찜함을 달고 있는 것, 이것이 저자가 지적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편의점’이 가리키는 사회의 모습이 슬프게 흘러가는 문화가 되지 않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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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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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사회


불편한 미술관-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창비, 2018-01-08.


  오늘 하루도 인터넷 포털 실시간 검색어와 상위에 랭크되는 기사는 온통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다. 몰카 유출 사건이 세 건이나 되고 성폭력과 폭력과 살인은 빠짐없이 일어나고 있는데다 폭력과 살인의 이유는 너무나 어이없어서 할말을 잊게 한다. 더구나 코미디를 넘어선 짜증나는 정치권 의원, 경쟁이라도 벌이듯 다양한 갑질 레파토리를 내보내는 재력가들의 기사가 체한듯 속을 답답하게 한다. 그 와중에 체증이 내려갈 듯 긍정적인 기사 하나가 눈에 띈다. ‘배려’다.

  대통령의 배려. 업무를 위한 이동임에도 교통통제로 출퇴근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 야간 헬기 이동을 했다는 기사다. 벌써 대통령 선거를 한지 1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정권으로부터 ‘시민들을 위한 배려’로 정권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을 본 적이 있었던가. 무엇보다 이런 일화를 종종 접했기에 일회성이 아니라 진정성과 지속성이 있음을 믿게 된다. 그동안 도넘은 ‘권위주의’에 매몰되었던 권력자들로 인해 국민이 존중받고 배려받아야 할 존재라는 당연함이 무너진 세상에서 살았다.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배려’라는 메시지가 얼마나 필요했는지, 필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착하다거나 나쁘다거나 흑백논리를 들이대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 마주치는 인권의 문제는 선과 악의 대립보다 ‘배려하는 생활’ 대 ‘무신경한 태도’라는 구도로 보아야 할 때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앎과 모름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혐오표현의 경우가 그러한데, 어떤 말이 상처를 주는지 미리 알면 가해자가 되지 않지만 잘 모르고 있다가는 가해자가 되기 십상이다.


  『불편한 미술관』은 그림을 통해 보는 ‘인권’이야기다. 저자의 말처럼 인권에 대한 문제는 배려하지 않음에서 일어난다. 물론 선악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볼 수 없다. 하지만 절대 악이 아니라 무신경함으로 모름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면 정말 심각하지 않은가. 작가는 이것이야말로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알아야 하지만 간과하는 기본적인 인권과 명확하게 답하기 어려운 인권 문제를 그림으로 풀어가고 있어서 이미지에 힘입어 강렬하게 다가온다. 미술책에서 본 고대 그리스의 그림과 조각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그림을 넘나들며 시대를 뛰어넘어 여성, 장애인, 인종, 성소수자, 이주민, 빈곤인 차별에 관해 이야기하고 표현과 신앙의 자유에 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지나친 미화 역시 일종의 차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것이다. 타히티 섬에서 신비로운 원주민의 생활을 강렬하게 그린 화가로 평가받는 고갱, 그는 식민지 여성을 대상화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같은 화가들에게도 욕을 먹었다 한다. 고갱처럼 그림 속에서 여성, 장애인, 노인, 흑인 등은 늘 과도하게 희화화하거나 미화되었다. 같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타자화, 대상화되었다.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을 즐기며 간음의 시선으로 여성을 보는 그림들. 이런 시선들이 고착화되어 점점 ‘혐오’로 번져간다. 그런 시선을 두는 것을 당연시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인생의 세 단계를 그리면 어떻게 될까. 친구가 이렇게 농담을 했다. “할아버지는 ‘태극기집회’, 아버지는 ‘깨시민’, 아들은 ‘일베’.” 섬뜩한 느낌이 들어 나는 웃지 못했다. 정치적 지향의 문제가 아니다. 세대 사이 적대감이 문제다. 아들이 일베를 하고 할아버지가 태극기집회를 나가는 이유는 어쩌면 아버지가 깨시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너무 싫은 나머지, 서로가 더 싫어할 일만 골라서 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나도 이 말에서 끔찍함을 느꼈다. 하지만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우리 사회에 가족들 간에도 ‘배려’가 무너지고 있는 사실은 경쟁사회의 교육이 만든 비극이다. 차별을 당연하게 가르친 결과다. 같은 단지임에도 임대 아파트 주민은 놀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적은 평수,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어른들이 ‘배려’라고 가르칠까. 배려를 몸소 보여주었을까. 본 적 없는 ‘배려’를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은 없다. 그러니 새삼 작은 ‘배려’ 하나하나가 주는 놀라움이 크다.

  난무하는 불편한 기사가 많은데 이제는 하다하다 그림을 보면서까지 불편해 해야 하느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길러지는 ‘시선’을 통해 우리는 불편함을 불편하지 않음으로 인식할 것이다. 제 권리만 주장하며 타인의 권리는 간과하는 이기심은 그렇게 길러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세상이 만든 비극이다. 이제 우리는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은가. 배려가 난무하는 세상이라 끔찍한 기사가 나올 틈이 없는 세상을 보고프다면 익숙하게, 뿌리박힌 타인에 대한 ‘타자화’의 시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사사건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트집’이기도 하지만 인권에 관한한 예민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언제나 작은 불편함이 큰 변화의 시작이었다.” 무엇이 불편함인지 느끼며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한 ‘배려의 사회’가 되기를 불편한 미술관에 들렀다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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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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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인간답다

혐오와 수치심-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제목으로는 단순히 혐오와 수치심의 연관관계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혐오를 하다보면 수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니까 어떤 식으로 이야기의 연결성이 있는가, 혐오를 받은 경우 혐오에 대해 같은 반응을 하고 난 뒤 찾아오는 자괴감과 수치감을 경험하였기에 이에 대한 감정의 기제를 생각했다.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이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혐오와 수치심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아닐 것이라 생각되는데 저자는 법철학자, 정치철학자, 윤리학자였다. 저자는 감정이 법으로 작동하는 기제를 보여주며 흥미를 유도한다.   

  법을 판결하는 이에게는 감정이 있을지언정 ‘법률’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고 이성이 가득하다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상당부분 법률은 이 감정적인 반응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감정은 분별없는 정서적 격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개인이 지닌 중요한 가치와 목적에 맞게 조율된 지적 반응”이다.


감정에 대한 평가는 구체적인 사례에 초점을 맞춰, 어떠한 사람이 특정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다만 그 평가에 대해서는 개별 사례별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으며 무엇보다 수치와 혐오심에서 발현된 법의 경우 타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데 이용될 수 있기에 이 두 감정에서 나아간 법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혐오와 수치심은 “인간의 근원적인 나약함을 숨기려는 욕구를 수반”하며 이것을 숨기기 위해 타인의 공격과 배제로 이어진다. 이때 이 감정은 대체로 강자들을 위한 논리로 확대 재생산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은 완전해지고 완전한 통제력을 지니려는 원초적 욕구에서 기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폄하와 어떤 형태의 공격성(자아의 나르시시즘적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격렬하게 비난하는)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올바르게 유발된 수치심의 경우에도 한 구석에는 나르시시즘과 이와 연관된 공격성이 항상 잠재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왜 부끄럽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혐오하고 수치스럽게 느끼는가. 이에 관하여 고대철학과 문학, 정치철학, 정신분석학 등등의 논의를 가져와 전개하는데 흥미로움과 더불어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보게 된다. 나약함을 숨기려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가는 인간의 감정속엔 완전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망과 나르시시즘이 숨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들은 타인의 권리와 필요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한다. 완전함에 대한 열망,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이란 부제가 결국 인간의 신적인 존재가 되고픈 갈망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면 늘 당하는 존재는 인간들 중에서도 더 약하고 약한 이들이 된다.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같이 하는 것보다 내 것을 더욱 확고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갈급한 일이 된다. 이렇게 세상은 늘 사회적 약자를 만들어 내고 또한 그들로 인해 힘을 얻는 존재들이 있다. 


혐오는 우리가 될 수 없는 어떤 존재, 즉 동물성을 갖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되려는 소망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혐오에 담긴] 오염에 대한 사고는 우리 자신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야망을 드러내며, 이러한 야망은(어느 곳이나 존재한다 할지라도) 자기기만과 헛된 열망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으며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약함을 숨기려 외부에 대한 공격성을 강화한다는, 타인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자신의 우월감을 강화하려는 이 감정들을 “정한론”으로 이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제 나라가 흔들릴 때마다, 서구에게 뺨맞을 때마다 그 실패와 좌절과 불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조선침공을 주장한 일본인의 주장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지만 사실 세부적인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동감입니다라고 표방하지는 못하겠다. 성범죄자에 대한 신상공개와 같은 수치심을 주는 처벌을 저자는 반대하지만 저자의 논리에 따라 당연하죠!라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사고의 정리가 더 필요하다. 이래서 이상과 현실, 이론과 실천은 다른가 싶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념과, 호혜성과 상호 존중으로 대변되는 사회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 질서에 대한 사고다. 이때 상호 존중이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선에 대한 다양한 관념을 존중하는 것을 포함한다. 감정에 대한 분석과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서로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사고방식에 내재된 이상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혐오와 수치심이 법의 토대로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게 될 때 직면할 수 있는 위험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감정이 법적 규제의 근거로 사용되면, 서로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상호 존중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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