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은, 경험을 했다는 건 하나의 패배라는 것을, 모든 걸 다 잃고 나서야 겨우 뭔가 좀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 p. 40

왜냐하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게 해주는 것은 사랑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사는 것이란 참 어려워요." 나는 그 어조를 기억하고 있다. 또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속삭였다. "가장 큰 잘못은 남을 괴롭히는 일이에요.'라고. 만사가 끝나버리면 생의 갈증도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 p. 52

그렇다, 모든 것은 단순하다. 사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들이다. 우리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는 말라. 사형받은 자를 가리켜 "그는 사회에 대하여 죄값을 치르려 하고 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의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 p. 63

나는 나의 깊은 절망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들 중 하나가 지닌 저 은밀한 무심의 대치(對峙) 속에서 그 위대함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용감하면서도 동시에 의식적일 수 있는 힘을 길어내는 것이었다.  - p. 81

왜냐하면, 여행을 귀중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던 일종의 내면적 무대장치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속임수를 써볼 수가 없다 ㅡ 사무실과 작업장에서 일하며 보내는 시간들 뒤에 숨어서 가면을 쓰고 지내는 짓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에 대해 우리는 그토록 심하게 불평을 해대지만, 실은 고독의 괴로움으로부터 그토록 확실하게 우리를 방어해주는 것도 그러한 시간들이다.)  - p. 88

세계는 지속되고 있었다 ㅡ 수줍고,  아이러니컬하고 은밀하게 (여자들의 부드러우면서도 조심스런 어떤 형태의 우정과도 같이) 지속되고 있었다. 일종의 균형이 지탱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통 물들어 있는 균형이었다.  - p. 90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 p. 91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에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를 다 포옹할 수만 있다면 껴안는 방법이 서투른들 어떠랴.  - p. 93

큰 용기란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일이다.  - p. 101

 

알베르 카뮈 / 안과 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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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그처럼 저마다 마음속 깊이, 일생 동안 그의 됨됨이와 그가 말하는 것에 자양을 공급해주는 유일한 원천을 갖고 있는 것이다.  - p. 16

태양은 나에게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 p. 17

아프리카에서 바다와 태양은 돈 안 들이고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성격에 맞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의 자존심을 받아들여 그것이 보람되게 쓰여지도록 애써보는 편이 나을 것이엇다.  - p. 18

가장 풍성한 호화로움이 나에게는 언제나 일종의 헐벗음과 일치하곤 했다.  - p. 20

사실 나에게는 나 혼자만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격언이 하나 있다. "큰 일에 임해서는 자신의 원칙을 세워 그에 따를 것이요, 작은 일에는 자비심만으로 족하다." 슬픈 일이지만 사람은 타고난 천성의 결함을 메우기 위해서 격언을 만드는 것이다.  - p. 21

내가 좋아한 사람들은 언제나 나보다 더 낫고 훌륭했다. 그러므로 내가 체험한 빈곤은 나에게 원한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변함없는 마음, 그리고 묵묵한 끈기를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내가 그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었다면 그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또는 나의 결점에 있는 것이지, 내가 태어난 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 p. 22

사회가 갈라놓은 사람들을 고독이 결합시켜주는 것이다.  - p. 25

실은 정열의 인간이면서 도덕을 꿈꾼다는 것은, 아무리 정의를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을 불의에 바쳐버리는 것이 되고 만다. 나에게는 이따금, 인간이란 살아 움직이는 불의라고 여겨지는 때가 있다 - 이것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 p. 28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비밀들, 그걸 우리는 너무나 서투른 솜씨로, 그리고 무질서하게 내보이고 만 것이다. 또 너무나 부자연스럽게 변장시킨 가운데 그것들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니 그것들에게 하나의 형식을 부여할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차라리 낫다. 끊임없이 그 비밀의 목소리를 들려주기는 하되, 자연스러움과 기교를 거의 같은 분량으로 배합할 수 있을 때까지, 즉 존재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동시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p. 30-31

바로 이 유적(流謫)의 시간에일지라도 인간에 의하여 이룩되는 작품이란, 예술이라는 우회의 길들을 거쳐서, 처음으로 가슴을 열어 보였던 두세 개의 단순하고도 위대한 이미지들을 다시 찾기 위한 기나긴 행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꿈꾸어보지 못하게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 32

 

알베르 카뮈 / 안과 겉 '서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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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와 셀린느

같은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영혼끼리 공감하는 운명같은 하루를 보내고 작별하는 두 사람. 그들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돌아섰지만 우리는 세월이 훌쩍 흐른 다음에야 비로소 Before Sunset이란 영화 속에서 더욱 성숙해진 그들과 재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예상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같다. Before Sunset은 아직 보지 못했다. 개봉 당시에 봤더라면 추억으로 남을 뻔 했다. 그 때 못 보길 잘했다. 나중을 기약한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늘 더 많은 자유를 느낀다. 마음 놓고 일탈을 한다거나 누군가를 일부러 속인다거나 그런 의미의 방종이 아니라 왠지 다리 힘을 풀고 터덜터덜 걸어도 좋을 것 같고 호흡할 수 있는 산소의 양마저 좀더 많아진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미국 청년인 제시(에단 호크 분)와 프랑스 아가씨인 셀린느(줄리 델피 분)도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엔나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랑의 아픔, 결혼의 의미,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평소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했던 사연들을 공유한다. 젊고 순수하고 풋풋한 이들은 상대에 대한 겉잡을 수 없는 열정으로 빠져들지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서로의 갈 길로 떠난다. 두 사람은 아마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고 떠올리며 살 것이다. 닮은 두 영혼이 마주쳐 불꽃을 일으키는 순간은 기대와는 달리 그렇게 쉽게, 자주 일어나 주지는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론 그렇게 꿈처럼 시작된 만남이라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서서히 퇴색되기 마련이니 어쩌면 두 사람이 여운만을 남긴 채 서로의 일상으로 복귀한 것은 참 잘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어떤 한 사람을 허무하게 떠나 보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나와 영원히 오래오래 친구가 되길 바랬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려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연인 이외에도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좋으면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면 서로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보다 먼저 사랑해 온 사람이 있었고 그는 이런 나를 설득했고 이해했고 기다렸지만 나는 당최 말을 듣지 않았다. 어리고 고집이 세었던 나는 그를 이기적인 욕심쟁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좋아하면서도 미워했다. 이후 시간은 흘렀고 나의 이별 통보로 우리는 헤어졌다. 살다가, 간혹 그와 나눴던 대화가 한 움큼씩 떠오를 때가 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한참 어린 나를 위해 대화의 코드를 그 편에서 섬세하게 맞추어 주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우리는 잘 맞았고 서로의 매력에 탄복했으며 너를 만나 행복하다는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의 나라면? 나는 어렸기 때문에 그와 헤어졌지만 어렸기 때문에 그와 행복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두 가지 일이 벌어지는 데 한 가지 이유가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단 한 번 뿐일지언정, 혹은 앞으로 나에게 그런 행운이 주어질지도 모르겠으나 그 기억을 내 인생의 보너스 정도로 여기고 있다. 나도 영화같은 추억 하나 가지고 있다는 것. 정말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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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12-3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포 선셋 보고 너무나 좋아서 얼마전 선셋관 선라이즈 시리즈를 디비디로 구입했어요. 선라이즈를 아직 보지 않았는데. 어여 시간내서 봐야겠어요. 사랑은 정말 어렵죠. 너무나 예측 불가능하고 매번 다르기때문에 힘들어요.

깐따삐야 2005-12-31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사람끼리 감정의 저울질 없이 담백하게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재섭과 소희

몽환적이면서도 나른한 루시드 폴의 음악과 잘 어울렸던 이 영화는 매우 어둡고 우울했던 배경과 스토리 이면에 두 배우의 반짝거리는 젊음으로 빛이 나던 영화로 기억한다. 영화 속에서 재섭(김태우 분)은 정말 이도저도 뜻대로 안 풀린 채 상처와 불만을 가득 안으로 머금은, 결국 모든 것에 무심해지다 못해 초탈해진 듯한 학원 강사의 얼굴 그대로였다. 소희(김민정 분) 역시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 받지 못한 채 외로움에 치를 떠는, 그것을 반항이나 당돌함으로 한껏 위장하여 내보일 수 밖에 없는 여리고 섬세한 여고생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감독은 배우를 잘 골랐다. 옆으로 가방을 매고 서 있는 재섭의 구부정한 어깨와 말은 안해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한 소희의 크고 맑은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보습 학원의 국어 강사인 재섭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소통하지 않은 채 오직 길거리의 창녀들과만 몸을 나눈다. 그는 그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따분하고 외로운 일상이다. 그런 일상 속으로 소희라는 한 소녀가 뛰어든다. 공부도 잘하고 부유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소희에게 그런 것들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녀는 이해 받지 못함에 괴로워하며 원조교제를 하는 등 자기 스스로를 막 다룬다. 재섭은 이러한 소희에게서 알듯 모를듯한 동질감을 느끼며 점점 더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에서 같이 버스를 기다리고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서로의 삶에 대해 수수께끼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그러나 임신과 낙태, 어린 여고생이 겪기엔 너무 큰 일들을 겪어버린 소희는 어느 날 부터인가 학원에 나오지 않고 재섭은 소희가 사라진 무료한 일상 속에서 계속 그녀를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서 소희를 다시 만나고 재섭은 소희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이 영화를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 말을 걸다, 라고 읽었다. 아직 스무살이 되지 않은 소녀와 아직 사회 속에 완벽히 편입되지 못한 청년은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본다. 삶 속의 위선과 구차함을 마주한 이들은 어설프게라도 연기를 하며 살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이 본래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고(박인환-'목마와 숙녀'에서 인용) 저마다 한 통속이 되어 서로의 비위를 맞춰 주며 통속적으로 굴러가는 것임을, 이들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들이 택한 것은 왕따 놀이. 사회라는 공간 내에서 연기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바보가 되거나 왕따가 되어야 한다. 바보는 간혹 동정이라도 받지만 왕따는 혼자 고상 떤다고 뒷담화에나 오르락 내리락 하기 일쑤다. 때론 한 번 더 뒤집어서 본래는 왕따가 되기 좋을 스타일인데 바보 연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처럼 큰 날개를 숨기고 일부러 뒤뚱거리며 걷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웃고 즐거워한다. 그의 정신은 고고하게 창공을 날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육신이 질퍽한 지상에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그 씁쓸한 괴리감을 웃음과 농담으로 채운다.

그래서 재섭과 소희의 왕따 놀이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나는 이들이 작은 동네만 오락가락하는 버스 말고 기차나 비행기도 타 보았으면 좋겠다. 컵라면만 먹지 말고 대파를 송송 띄운 맛있는 라면도 먹어보고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을 하나씩 정해서 천장 보며 욕해 보기, 그런 놀이도 하면서 놀았음 좋겠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 보고 말 없이 이해하는 soul-mate를 찾았으니 이제 두 사람이 할 일은 안으로 더 안으로 파고드는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을 같이 해보는 것이다. 지금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슬픔이나 괴로움, 그게 전부인 것 같지만 스무살이 되고 서른살이 되면 뭔가 다른 게 보일지도 모른다. 세월이 지나도 별 게 없고 삶은 자꾸만 더 구차해진다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싱싱한 채 살아 있고 더욱이 그리운 그 사람과 함께라면 그 무엇이 두려운가. 나는 두 사람이 이 영화처럼 솔직하고 간결하고 담백하게 살길 바란다. 때때로 젊다는 게 너무 힘이 드는 나를 포함한 모든 청춘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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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신 엄마가 빈둥대며 이것저것 투덜대는 내게 말씀하셨다.

"아무개 씨가 너 중신 해준다 어쩐다 하더라."

"옹? 그래서 뭐랬어?"

"됐다고 했지."

"왜?"

"만나봐서 서로 좋으면 상관 없는데 괜히 한 쪽에서 마음에 안 들거나 그래봐. 이 좁아터진 지역사회에서 얼마나 소문이 빤하게 퍼지겠냐. 괜히 흠만 잡히지. 이 동네는 한 집 건너 한 집이면 죄다 육촌에 팔촌에 그렇더만."

"글킨 그러타... 근데 어떤 사람인데?"

"공무원이라더만. 허이구, 그래도 시집은 간다고 하는 거 보면 내 웃겨서."

"왜에~~~? 쳇, 내가 어때서."

"몰라서 묻냐. 내 딸이지만 참... 너같은 철딱서니를 누구한테 맡길 지 한 걱정이다. 내가."

"나보다 어린 쌤들도 여기저기 막 소개팅하고 선보고 그러더라 뭐."

"그 사람들이 뭐 다 시집 가려고 그러는 줄 아냐. 사람들 만나면서 다 자기 값이 얼마나 나가나 매겨보고 연애하다 잘 맞는다 싶으면 결혼도 하는거고 그럴려고 하는거지."

"참 할 일도 음따. 귀찮게스리... 그러고 다니면 귀찮지 않나. 연애가 얼마나 힘든 건데."

"네년이 힘든 연애만 골라서 하고 다니니까 그렇지. 하여간 다 너보다는 똑똑해. 알았냐?"

"몰라. 쳇!"

 

아빠라는 남자를 처음 만나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이따금씩 마치 연애와 결혼의 달인처럼 내게 면박을 주곤 한다. 일평생 한 남자랑만 연애하고(들은 야그라서 확신할 수 엄씀) 한 남자랑만 살아봤으면서도(이건 확신할 수 있씀) 내 앞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감 넘치고 파워 넘치는 자태로 연애와 결혼에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시곤 한다. 이러한 엄마 앞에서 나는 대체로 깨갱~ 하고 나가 떨어지기 일쑤인데,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엄마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생각에도 참 바보 찌질이같은 연애만 했고 옷 보는 안목부터 시작해서 남자 보는 안목도 더럽게 없다. 엄마의 평가에 따르자면 남자를 보는 나의 안목은 단순의 극치를 넘어서 흡사 백치에 가깝다. 착한 남자가 좋더라 하면 정말 말 없고 순한 거 하나만 보고, 똑똑한 남자가 좋더라 하면 정말 박학다식한 거 하나만 보고, 그래도 나이 많은 남자가 이해심도 넓고 좋더라 하면 정말 나이 많은 거 하나만 본다. 착하긴 한데 무능하고, 똑똑하긴 한데 성격 지랄갖고, 나이는 많은데 느끼한 다중인간일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시야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나마 처음에 이런 나를 발견하고 누가 말려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누가 미처 발견 못한 사이 일단 한 번 사랑에 빠진 나는 사람을 반쪽만 알고 사귀었다는 것도 모른 채 고단한 연애에 올인한다. 이럴 때는 누가 와서 말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의 측근들은 알고 있다. 이런 나를 말리면 말릴수록 귀를 닫아버리고 더욱 더 연애에 투신한다는 것을. 그들은 그것마저 알고 있다. 결국 네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내비두며 간간히 삐져 나오는 푸념들을 받아주다보면 연애에 지친 내가 가족들을 비롯한 측근들의 품으로 컴백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그 사람이 나한테 그럴 수 있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도리질을 해가면서 말이다. 그러면 나의 측근들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올 것이 온 것 뿐이라고 얘기한다. 에라이, 똘추야. 그걸 이제 알았냐? 근데 그 사람도 너와 잘 안 되길 잘했어. 너도 쉬운 애는 아니걸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지금 나는 또 다시 그 쥑일놈의 사랑에 빠져보길 기대하는 것이다. 중매 시장에 뛰어들어 차는 있으세요? 연봉은 얼마나? 혹시 장남이신가요? 주말마다 그런 지루한 질문들을 던져가며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에 빠져보고 싶은 것이다. 손바닥만한 지역사회 내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오로지 십대와 육십대의 남자 밖에는 보이질 않지만, 혹시 아는 얼라의 외삼촌이나 사촌 형이라도 나오면 어쩌나 하고 소개팅 한 번 못하고 있지만, 만나게 될 수 밖에 없는 인연이라면 언제 어디서고 뿅~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뽀샵 처리된 슬로우 모션으로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늘상 운명같은 게 어딨어, 말하고 다니지만 내심 정말 운명의 상대가 있는 건 아닐까, 나에게 어울리는 100%의 남자가 어딘가에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 어쩌나, 이런 택도 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망상으로 그치고 말든 정말 현실화 되든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남들 말맞다나 똘추인 나는 아마 앞으로 누구를 또 만나더라도 너는 내 운명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두려움 없이 올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100%의 남자를 만났다고 하하호호 좋아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래서 엄마가 내가 연애 어쩌네 하면 탐탁치 않게 여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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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12-29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깐따삐야 2005-12-29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