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졸업이란걸 시켜봤다. 어제 3학년 아이들이 졸업을 했다. 공교롭게도 3학년 담임들이 지금 휴가 중이신 한 분을 빼곤 모두 처녀샘들이라서 마음껏 퍼지고 마음껏 풀린 마음으로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아쉬움 반, 후련함 반이라는 심정에 공감했다. 나를 제외한 두 명의 처녀샘들이 졸업식장과 교실에서 눈물을 쏟았고 오늘 점심을 같이 한 학부모님 한 분이 갑자기 눈시울이 빨개지면서 눈물을 보였다. 연한 배마냥 사근사근하고 순수한 분이셨는데 한참 어린 나는 무척 당황했고 그저 고마웠다는 말 밖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누군가와 이별을 할 때마다 나는 늘 그랬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혹은 이유가 있든 없든, 헤어지고 나면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이별의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 너무나 무감해 보인다. 나도 가슴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거나 눈물이 나거나 했으면 좋겠다. 내게 헤어지는 일 자체는 그닥 어렵거나 슬프지 않았다. 문제는 늘 그 다음이었다. 나를 오래 보아왔고 잘 아는 사람들은 괜찮다. 그런데 헤어지는 당시에 아쉬워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대개 사람들은 내가 이별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정도로 냉정하거나, 지난날 그들에 대한 감정이 별로였거나, 혹은 그들을 누구보다도 더 빨리 잊을거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단지 예의 상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도 헤어질 때 뭔가 좀 할 말이 있거나 눈물이 났으면 좋겠다. 어제와 오늘에 거쳐 내가 참 못되먹고 차가운 인간처럼 보였다. 나 스스로만 모르고 있을 뿐, 원래 그렇고 그런 사람일지도.

아까 그 어머님이 눈물을 보이시다가 인사를 하고 나가셨을 때도 담임이었던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데 다른 테이블에 앉아 계셨던 다른 반 선생님이 어머님을 따라 뛰어 나갔더랬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미 타이밍도 놓쳤으니 같이 뛰어나가기도 뭣해서 그냥 계속 고기만 먹었더랬다. 다리를 다쳐 학교도 제대로 못 나가고 아이들에게 별로 좋은 담임 노릇을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그에 비해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단 느낌이 들어 마냥 불편하고 미안하기만 했다. 그런데 남들 보기엔 고기 먹는 일에만 혈안이 된, 보기 드물게 식욕 왕성한 처녀샘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줘야 하는 타이밍이 있다는 걸, 이제 혼자서 공부만 해도 좋은 학생이 아닌 이상 때때로 그런 모션도 필요하다는 걸, 종종 느낀다. 나같은 인간은 하여간 차암 세상 살기 힘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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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2-1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같으면 아직 경험은 안해봤지만, 그냥 담담할 거 같아요. 제가 그런거 별로 내색하는 스따일이 아니라서. 흠.

깐따삐야 2006-02-1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뭐든지 한 박자씩 늦는 것 같아요. ^^
 


호랑이를 보러 간 조제와 츠네오

바쁜 가운데 딴짓을 하게 되는 건 학창시절부터의 오래된 습관이다. 그런데 막상 알고보면 나같은 사람들이 어지간히 있는 것 같다. 시험 전 날 소설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서랍 정리를 하는 사람들. 정신 상태가 그다지 쌈빡하지 못한 사람들. 내 주변은 오늘도 겁나 바빠 보인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안 바쁘다.

안 바쁘다고 해서 벌 받았나 보다. 위의 글 써놓고 한 시간 정도 들입다 바빴더랬다. 음료수까지 사 나르며 단순 노동에 시달렸다.

어젯밤 늦은 시간에 이 영화를 혼자 보았다. 방 안에 서랍처럼 생겼다 싶은 것들은 모조리 활짝 열어놓고 버릴 것, 안 버릴 것까지 몽땅 모아서 한 켠에 쌓아둔 채 컴퓨터 앞에 앉아 곰플레이어를 클릭, 이 별스런 제목의 일본 영화를 보았다. 문득 생뚱맞게도 사이보그가 나오는 SF영화를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마땅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선택한 영화였다. 너도 나도 좋았다는 말이 많아서 전부터 한 번 보고 싶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영화는 제법 쿨하고 재미있었다. 츠네오(스마부키 사토시)는 너무나도 솔직하고 귀여웠으며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는 독특하고 사랑스러웠다. 된장국과 달걀말이, 생선구이를 올린 그들의 아침 밥상은 코끝에 담백한 향기를 폴폴 풍기며 얼마전 일본에서의 아침 식사를 떠올리게끔 하기도 했다.

심야 마작 게임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츠네오는 어느 날 새벽 언덕길을 달려 내려오는 유모차와 마주치고 유모차 안에서 다리가 불편한 소녀, 조제를 발견한다. 조제는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에서 따온 이름. 지금까지 그녀는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고 할머니가 주워온 잡다한 책들을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이미 기막힌 미인을 여자친구로 두고 있던 츠네오는 헝클어진 단발머리에 시큰둥하고 독특한 조제에게 점점 이끌리게 되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조제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와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를 보러 가고 싶었다는 조제와 함께 츠네오는 호랑이를 보러 가기도 하고,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헤엄치는 영상이 어른거리는 방 안에서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바다를 보러 가기도 한다. 그렇듯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며 알콩달콩 즐거운 연애를 하던 그들에게도 이별의 시간은 오고 츠네오는 스스로 그녀로부터 도망쳤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조제는 혼자 먹을 분량의 생선을 구우며, 의자에서 내려오기 위해 철퍼떡 다이빙을 하며, 츠네오가 없는 그녀만의 일상을 담담히 꾸려간다.

츠네오의 여자친구가 조제를 찾아와 다리가 없다는 너의 무기가 솔직히 부럽다고 말하자 조제가 하는 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너도 네 다리를 잘라." 난 푸핫, 웃으며 참 조제답다고 생각했다. 조제는 가란다고 해서 정말 가버릴 사람이면 가버리라고, 그렇지만 내곁에 남아달라고 진심을 다해 츠네오를 붙잡았지만 츠네오에게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츠네오와 함께 하는 동안 늘 생각했을 것이다. "너도 나를 만나 즐거우면서 뭘 그래." 츠네오가 떠날 때 조제가 그에게 선물한 책. SM 킹. 다시 푸핫, 웃으며 참 조제스럽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서 이어서 쓰자. 앗싸, 퇴근 시간!)        

사람을 만나고, 만나서 사랑하고, 사랑하다 헤어지는 과정이 이렇듯 상큼하고 담백할 수 있을까. 물론 뜨겁고 끈적한 느낌이 드는 사랑이라고 해서 더 진실되다거나 더 아름답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만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맑고 차가운 도랑물이 졸졸 흐르는 것처럼, 흐르는 물을 사이에 두고 물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얼굴을 마주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겹고 슬프고 사랑스러웠다. 츠네오는 조제를 업고서, 유모차와 렌트카에 태워서, 하늘의 구름처럼, 바다의 물고기처럼 멀리멀리 떠다니며 자유롭고 싶었던 그녀에게 집 밖의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츠네오 스스로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도 가도 내가 있을만한 적당한 자리는 없어 보이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새롭게 배워나가며 더욱 성숙해지는 계기를 맞는다. 조제와 헤어지고 난 후 옛 여자친구와 길을 걸으며 내내 찌푸리고 있던 츠네오가 갑자기 펑펑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나는 공감했다. 사랑을 하고 나이를 먹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훌쩍 어른으로 커버린 소년의 마음 속에 문득 북받쳐오르는 슬픔같은 것.

예전의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누군가를 잃어버렸을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뭔가를 잃어버리고도 그게 뭔지를 잘 몰랐을 그런 나이였을 것이다. 오후 수업이 없던 그 날. 그저 여느날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고 시간은 정오 무렵이었다. 차창 밖은 한창 봄이었고 나는 조그만 모자가 달린 귀엽고 화사한 감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서 새학기 강의에 대한 수다를 떨었고 얼굴이 하얘서 점퍼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고 자목련은 흰목련보다 어쩐지 덜 예쁘다는 말들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더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그런데 버스에 자리가 나서 앉자마자부터였나, 갑자기 울컥하더니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였다. 마침 손수건도 가진 게 없어 휴대용 화장지를 꺼내서 남들 모르게 눈물을 닦아내고 속으로 꺽꺽거리면서 나는 대체 이 눈물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했었다. 성이 차지 않게 나와주었던 지난 학기의 학점이라든가, 평소 나를 서운하게 대했던 사람들, 엄마와의 사사로운 언쟁 등을 계속 떠올렸지만 이렇다할 대답은 나와주지 않았고 이러다가 탈수증으로 쓰러지겠다 싶을만큼 많은 눈물이 솟아오르고 또 솟아올랐다. 아무튼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그 지경이었고 뒤도 안 돌아보고 후다닥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길, 눈물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후련했고 배가 고팠고 막 눈물이 솟을 때보다 마음은 어쩐지 더 슬픈 것도 같았다.

나는 지금도 그 때 내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잘 모른다. 누군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정말? 아무튼 영화 속 츠네오를 보면서 그 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이해가 되었다. 그냥 이해가 되어버리는 상황. 자잘한 설명을 듣지 않고도 저절로, 마음으로 이해가 되어버리는 순간. 어깨를 토닥여주며 너도 이제서야 조금 어른이 되었구나. 그런 말을 건네고 싶은 순간. 그랬다.

츠네오는 옛 여자친구와 분명 더욱 성숙하고 멋진 연애를 할 것이다. 조제는 시장을 봐서 따듯한 된장국을 끓이고 부드러운 계란말이를 만들고 고소하게 생선을 구우며 스스로를 위한 밥상을 차릴 것이다.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구름, 손 안에 가두고 싶은 물고기들, 하지만 그들이 바람 속에 물결 속에 미끄러져 가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파란 하늘을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는 그 순간, 찬 물 속에 손을 집어넣고 물고기의 미끈한 등을 살짝 스치는 그 순간, 주어진 그 시간을 열렬히 느끼면 되는 것이다. 아쉽지만, 아쉬워 하다가는 그 시간마저 영영 놓칠지도 모르니까.  

그 모든 아쉬움을 떠나서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다면, 그의 든든한 팔목을 꼬옥 붙잡고 있을 수만 있다면, 호랑이처럼 두려운 이 세상과 마주하는 일도 한 번 쯤 즐길만한 모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섭고 막막한 세상 앞에서 츠네오가 조제에게 홀로 서는 용기를, 조제가 츠네오에게 둘이 하는 사랑을 가르쳤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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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8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3-08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럼~요. 감사합니다. ^^

이게다예요 2006-11-14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와 닿네요. 재미있었고 또 울컥하기도 했던 영화였어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깐따삐야 2006-11-14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예요 님, 반갑습니다. 서재에 종종 놀러갈게요. ^^
 

잠을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온다. 눈도 피로하고 몸도 노곤하지만 눕기가 싫다. 오후에 낮잠을 조금 잔 탓일까. 어차피 오늘 낮잠은 설 익은 밥같았지만.

이미 목록에서 지워버린, 기억 속 어딘가에야 남아 있었겠지만 이젠 왠지 낯설어 보이는 전화번호. 곤히 자다가 울리는 벨 소리에 알람을 확인하듯 부리나케 받은 전화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 사람이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노래 가사에도 있듯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익숙한 그의 음성에 곧 침착해졌고 평범하게 안부를 물었다. 이젠 아주 가끔밖에 생각나지 않는 사람. 생각이 나다가도 다른 생각에 곧잘 묻혀버리는 사람. 그런 그가 불현듯 넉 달만에 내게 송신을 해왔다.

나도 간혹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했다.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거나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다소 심약하고 부드러운 성정의 남자이긴 해도 고집도 있고 나름의 프라이드가 강하니 잠깐 아프더라도 금새 아무렇지도 않은듯 잘 살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힘이 드는 건 오히려 내가 몇 배는 더 할 것이라고 믿었다. 헤어지고 나서 한동안은 왠일인지 그에게 잘 못 대해준 것만 생각이 나서 매일매일 미안해 하고 마음 아파하면서도 당시의 나는 갖가지 질병이 겹친 환자라는 것. 어쨌든 그가 먼저 이별의 언사를 내비쳤다는 것을 상기하며 단단히 마음을 추스렸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만나고 그에게 집중하느라 성실하게 연락하지 못했던 다른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났고 나를 속박하던 질병들로부터도 멀어졌다. 그 사이 시간은 잘도 흘러주어 벌써 2006년의 입춘이 지났고 나는 올봄에는 바람난 꽃처녀마냥 희희낙락 지내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단다. 우리가 데이트를 했던 도시에 매주 내려와 함께 갔던 장소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 오곤 했으며 나의 사진이나 내가 선물했던 모든 물건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 땐 꼭 너의 발목을 잡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할 수 없이 놓아주었지만 가슴 아프게 후회한다고, 하지만 그 때의 헤어짐이 반드시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너도 알지 않느냐고 했다. 그리고는 남자친구도 없고 아직 결혼할 마음도 없다는 내게 앞으로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접어두진 말기를 당부했다. 확실히 준비가 되면 다시 너를 찾고 싶다고, 너를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하지만 그 사이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나면 그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했다. 내가 먼저 시집 가는 걸 보고 자기도 결혼하겠다고. 나는 이 대목에서 쓸쓸하게 웃고 말았다. 이제 와서 무얼 어떻게, 라는 착잡한 생각이 드는 동시에 마음 한 켠이 몹시 아파왔다. 여전히 나를 못 잊고 있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나 곧 근사한 남자한테 시집간다고 뻥이라도 쳤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는 긴장하고 안달하는 자신에 비해 차분하고 무덤덤한 나의 어투에 짜증을 내며 이미 상처를 받은듯 했지만 내가 울고불고하며 그를 못 잊겠다고 말해도 더욱 가슴 아파할 사람이란걸 잘 안다. 나는 최대한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감을 드러내 주었고 그의 행복을 빌어주었으며 그는 다소 담담해진 분위기로 나에 대해 안심했다. 그럼에도 그는 내가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고 예전처럼 사랑을 표현해주길 바랬지만 그건 벌써 지나간 일이고 지나간 감정이기 때문에 나는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라고만 했다. 터미널 근처에서 나에게 심한 말을 하고 나를 혼자 버려둔 채 성큼성큼 멀어져갔던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는 그에게 나는 그런 건 이제 기억도 안 난다고 거짓말을 했다. 추억을 붙들고 있는 건 그의 마음이지만 한 번 끊어진 실을 다시 이어봤자 못난 매듭만 도드라질 뿐. 이젠 너무 늦었다.

나는 그를 정말로 사랑했다. 나의 생활은 학교에 나가는 것과 그를 생각하고 만나는 것. 그 두 가지였다.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해주고 그에게 잘해주었던만큼 자신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돌아보면 나도 미안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의 그런 깨달음은 어느 정도 맞는다. 나는 그에게 잘해주었다. 잘해주고 싶었고 잘해주었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엄마가 혀를 끌끌 차며 속이 뒤집어진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이래저래 표현 방법이 서툴렀던 그 사람도 물론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다.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고 강아지같은 순수함으로 나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기적인 나는 생각한다. 그를 사랑하기만 했던 게 아니라 잘해주길 정말 잘했다고. 적어도 다 지나간 후에 후회하는 시간이 그만큼 적어지지 않았냐고.    

어쩜 그 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었냐며 보고 싶지 않았냐고 말하는 그 사람 앞에서 난 또 웃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내 앞에서 떼를 쓰는 건 여전하다. 자기도 모르겠단다. 왜 내 앞에만 서면 지금도 얼라가 되는지. 이젠 내가 먼저 연락을 안하면 자기도 연락을 안하겠다고 땡깡을 부리는 그를 보며 '이 남자에게 모성애가 풍부하고 마음이 따숩고 헌신적인 여자를 하나 내려주소서'라고 빌면서 마지막 안부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미 사랑도 식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우리가 헤어진 건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철없는 새끼곰같은 우리들에겐 서로 서로 더 강한 상대가 필요한 법이다. 진심으로 그에게 새로운 사람, 더 좋은 인연이 닿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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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2-12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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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네 국립공원에서 찍은 후지산

  비행기가 간사이 국제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올 때까지만 해도 마치 이웃 동네에 잠시 놀러오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일본은 지리상으로 우리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고 첫눈에 내려다 보이는 오사카의 전경이나 기후 또한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일본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한다는 일본 제 1의 상업도시이자 물류도시인 오사카는 비교적 활기가 넘치고 시끌벅적한 동네였다. 나중에 들르게 되는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말이다. 오사카 이후에 만나본 일본의 도시들은 대개 조용하면서도 한산했고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상당히 다소곳하고 조심스러웠다. 나중에 가이드로부터 외부 침입보다는 내부 충돌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고대 사무라이에서 현대의 야쿠자로 이어지는 칼의 문화가 남아있기 때문에 서로간의 ‘화(和)’를 중시하다 보니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듯 예절바르면서도 조심스럽게 조성될 수 밖에 없었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오사카 시내로 진입하여 일본식 도시락인 오벤또로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가장 먼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3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성했다는 ‘오사카성’으로 출발했다. 원래 외모상으로나 출신 성분 상으로나 콤플렉스가 많았다는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화려함으로 감추려는 듯 웅장한 건물 여기저기에 다소 조잡스러워 보인다 싶은 금박을 입혀 놓았고 성 둘레에는 ‘해자’라는 호수를 만들어 외부의 침입을 철저하게 막아놓았다. 일본이란 나라처럼 오사카성 또한 물로 둘러싸인 하나의 섬 같았다.

  이어서 우리가 두 번 째로 들른 곳은 교토의 가장 인기 있는 명승지 중의 하나라는 ‘청수사’였다. 아름답고 정교한 단청에 안정되고 우아한 멋이 있는 우리나라의 불국사나 법주사의 본당 건물에 비하면 다소 단조롭고 밋밋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아쉬움이 들었지만 청수사에서의 재미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 곳엔 ‘지주신사’라는 돌이 있었는데 눈을 감은 채로 이 쪽 편 돌에서 저 쪽 편의 돌까지 걸어가서 돌을 만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했다. 쑥스러워하는 학생들을 뒤로 한 채 결혼 적령기에 다다른 내가 용기 있게 도전, 엄청난 집중력을 가지고 돌을 만지는 쾌거를 이루면서 2006년 올해 뭔가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설렘을 잠시 느꼈다. 그리고 언덕의 세 군데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의 물, 학문의 물, 건강의 물까지 마셨으니 아주 복이 넘치는 한 해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2005년 작년 한 해 동안은 개인적으로 불운한 일들이 많아서 힘들었는데 일리가 있든 단순히 미신이든 돌을 만지고 물을 마시면서 왠지 액땜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청수사에서 내려오는 길목의 기념품 가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무엇이든지 조그맣고 예쁘게 만들기를 좋아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아기자기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도자기와 수예품들이 매우 많았다. 한편, 여행 첫날 이후 다른 사찰에도 들르게 되지만 일본 사람들 점 치는 것을 상당히 좋아해서 사찰 곳곳에 점집이 번성해 있었고 각종 부적을 파는 가게도 성업 중이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일본에는 800만이 넘는 귀신이 산다고 하는데 화산과 지진의 위험 속에 사는 불안한 지형학적 이유, 섬나라라는 고립된 조건이 일본인들로 하여금 믿을만한 무엇인가를 계속 갈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종교도 다양해서 장례는 납골당에 목뼈를 보관하는 불교식으로 하고 결혼은 예배당에서 기독교식으로 하고 어려운 일이 있거나 바라는 일이 있으면 신사참배를 하는 등 일본인들은 그 때 그 때 편리하게 신토, 크리스트교, 불교를 포용하며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종교관에 있어서 상당 부분 융통성이 없고 서로 배타적인 우리나라와는 크게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었다.

  해가 빨리 뜨고 빨리 지는 일본은 오후 여섯 시 즈음이 되어가자 그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지진 때문에 전광판에 대한 규제가 심해서 일본 시내의 저녁은 우리나라의 새벽 무렵보다도 더 어둡고 조용하게 느껴졌다. 일본 기생인 게이샤들이 남아 있다는 고급 술집을 지나치고 캄캄한 시내를 통과하여 우리는 교토의 한 식당으로 이동해 일본식 샤브샤브를 저녁으로 먹었다. 청양고추나 고춧가루로 매콤하게 육수의 간을 하는 우리나라식 샤브샤브와는 맛이 전혀 달랐다. 일본식 간장, 즉 왜간장은 짭짤하면서도 달콤했고 왜간장으로 맛을 낸 샤브샤브는 시원하고 얼큰하기보다는 간간하고 담백한 맛이었다.

  첫날의 바쁜 일정을 마치고 교토의 도큐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우리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다른 곳을 다 생략하고도 이 곳만은 몸소 보고 갔다는 ‘금각사’였다. 연못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금각사는 일본 여행 중에 보았던 많은 건축물 중에 단연 최고였다.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황금 불상은 많이 보았어도 누각의 사방을 모두 번쩍거리는 황금을 입힌 사찰은 처음 보았다. 일본인들은 무엇보다도 금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왠만한 건축물에는 거의 다 금박을 입히거나 금칠을 해놓았거나 금장식을 해놓았다.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는 주택이나 좁다란 도로가 두드러지는 것에 반하여 일본의 고대 건축물들은 대개 크고 웅장하고 화려했다.

  금각사를 둘러본 후 ‘나라’로 이동해 호리병 벤또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곳곳에 사슴이 뛰노는 동대사로 향했다. 15M의 금동좌불상을 볼 수 있는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라고 알려진 동대사는 일단 규모 면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했지만 뭐니뭐니해도 동대사의 구경거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 사슴들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도 사슴신이 등장하지만 사슴은 일본인들이 매우 신성시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동대사의 사슴들은 인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먹거리를 들고 있는 인간들 곁으로 와서 친근하게 구는 등 예상했던 것보다 붙임성이 좋았다. 학생들은 사슴의 먹이가 될만한 과자를 사서 먹여주고 던져주고 뿌려주고 하면서 다들 즐거워했다.

  동대사 관람을 마친 후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은 일본 최초의 신궁으로 알려진 ‘이세신궁’이었다. 이세신궁 주변으로는 곧고 시원하게 뻗은 삼나무들로 이뤄진 숲이 있었는데 토토로도 튀어나오고 사슴신도 나올 것 같은 시원하면서도 으스스한 숲이었다. 우리가 갔던 날은 마침 일본의 춘분이어서 일본인들이 이 곳에 와서 신사참배를 하며 한 해의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정으로 피곤한 여행객들의 원기 회복과 소화를 돕기 위해 원래 속에 들어 있어야 할 앙꼬를 찰떡 겉에 입혔다는 적복떡(붉은 복떡)과 이 곳의 유명 특산품 중의 하나라는 새우과자를 먹고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도바항으로 갔다. 그 곳에서 이세완페리 훼리를 탑승, 국토가 긴 나라답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후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메론으로 유명하다는 아쓰미 반도로 이동했다. 실제로 그 날 저녁 호텔 뷔페에서는 맛있고 싱싱한 메론과 메론빵을 먹을 수 있었고 해변에 면하고 있는 호텔의 위치 덕분에 다음날 아침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일출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   

  이어서 여행 사흘 째, 이 날은 이번 여행 코스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좋았다. 우리나라의 KTX도 같은 신간센을 탑승, 후지역에 도착한 우리 앞에 흰머리 독수리 같은 후지산이 환하게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후지산에 사는 여신은 질투가 심해서 미인이 오면 절대 자태를 드러내지 않는다면서 못 볼 수도 있으니 너무 아쉬워 말라고 당부했으나 같이 간 남학생들의 근사한 외모 덕분에 후지산의 여신도 결국 우리 남학생들 인물을 보느라 자태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3776M의 거대 휴화산이라는 후지산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실제로 가까이에서 보면 화산답게 숭숭 구멍이 뚫린 못난 모습이라서 일본에서는 겉보기엔 근사한데 막상 사귀어보면 별로인 사람을 가리켜 ‘후지산같은 사람’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단다.

  차창 밖으로 후지산을 감상하고 다시 삼나무로 빼곡히 둘러싸인 하코네 국립공원에 들러 오와쿠다니 온천물로 찐 쿠로다마고(검은 달걀)을 먹었다. 화산지대라서 유황 냄새가 풀풀 풍기는 언덕에서 한 개 먹으면 7년을 더 장수한다는 계란을 먹으며 저 편으로 바라뵈는 후지산을 감상하고 있자니 일본에 왔다는 것이 확연히 실감이 나며 괜히 뿌듯하고 감격스러웠다.

  고원을 내려와 유람선을 타고 칼데라호인 아시호수를 30분 정도 유람한 다음 우리 일행은 드디어 일본의 심장 도쿄로 이동했다. 도쿄에 접어들자마자 보아의 앨범을 홍보하는 커다란 광고판이 보여 일본에서의 보아의 입지와 인기를 실감하며 반가움을 자아냈다. 동경 도청에 도착한 우리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으로 이동, 지상 202M의 전망대에서 도쿄 도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며 도쿄 전역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과는 달리 동경은 끝도 안 보일만큼 넓은 허허벌판에 크고 작은 건물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전형적인 현대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도청을 빠져나온 일행은 신주쿠 거리를 구경하며 유명 한식집에서 해물탕을 저녁으로 먹었다. 우리나라에서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오면 꼭 한 번 들른다는 맛집으로 식당 내에는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식을 시켜먹고 있는 일본인들이었다. 젓갈을 사용하지 않고 담근다는 라면 스프 맛이 나는 일본식 김치와는 차원이 다른, 우리식 김치를 맛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식당 주변에는 우리나라 물품을 파는 가게들도 많이 있었다. 가게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비와 세븐이 춤을 추며 노래를 하고 있었고 밖에 내어놓은 진열대에는 배용준 열쇠고리나 핸드폰줄을 쉽게 구경할 수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성업 중인 가게들을 보면서 대중매체에서 이야기하던 한류열풍의 단면을 볼 수 있어서 반갑고 뿌듯했다.

  호텔에 투숙하여 도쿄에서 하룻밤을 쉬고 여행 나흘째, ‘닛코를 보지 않고는 일본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말라’는 명언이 있을만큼 아름답다는 닛코 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 꼬불꼬불한 S자 곡선의 좁다란 길을 버스로 이동하며 눈덮인 남체산을 구경하고 산 허리에 나와 노는 원숭이들의 모습도 구경했다. 이 곳에서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이자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신사인 ‘동조궁’과 ‘쥬젠지 호수’를 구경하고 ‘게곤폭포’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했다. 특히 99m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로 이루어진 게곤폭포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꽤 쌀쌀했던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폭포가 얼지 않아서 우리 일행은 물이 떨어지는 시원한 모습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 천황의 별장이 있다는 일본 최대의 별장지대 나스로 이동해서 노천 온천을 즐겼다. 우윳빛이 나는 뜨거운 유황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시원한 머리를 들어 별을 구경하며 집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피곤했던 몸이 부드럽고 따듯해지면서 딴딴하게 뭉쳐 있었던 어깨와 다리의 근육도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온천을 하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가족동반으로 다시 한 번 나스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일본은 예부터 혼욕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아주머니들이 사이 사이 남탕에 청소를 하려고 들낙거리는 풍경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함께 갔던 남학생들은 과연 온천을 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를 두고 제딴에는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날 한 명도 빠짐없이 노천온천을 즐겼고 점점 일본에서의 일상에 익숙해져갈 무렵이 되자 벌써 일정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우리는 며칠 안 남은 개학을 투덜거리며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센다이 공항에 도착, 4박 5일의 짧은 듯 하지만 꽉 찬 일정을 마치고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 아이들의 머릿수를 세지 않아도 왠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조용하고 깨끗한 환경에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들, 오미조밀하면서도 고급스런 물건들과 담백하고 맛깔스런 음식들, 일본은 참으로 매력적이고 살기 좋은 나라였지만 익숙한 우리말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아줌마들과 아저씨들의 고함 소리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우리나라에 오니 일단 편했고 활기가 살아나는 듯 했고 그 동안 보고싶었다는 말이 불쑥 나올만큼 괜시리 반갑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일본에 비해 이렇게 유리하고 편안한 환경 속에 살면서도 왜 항상 뒤쳐질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섬나라인데다 지형마저 불안해 늘 화산과 지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일본인들은 척박한 환경에 대비하고 재난을 극복해가면서도 오늘날처럼 경제 대국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그 동안 뭐하고 있었나 하는 안타까움. 서로 속을 내비치지 않고 조심해가면서 철저한 개인주의로 살다가도 공동의 목표가 생기면 和를 내세우며 단결하는 모습은 우리가 배워나가야 할 점이 아닌가 싶다. 물론 언론에서도 이야기하듯 소위 왕따라고 불리는 이지메라든가, 날로 변태적으로 변해가는 성문화와 엽기적인 범죄 행각들은 일본의 치부이지만 남의 치부를 욕하는 데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을 배우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적극성과 부지런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함께 갔던 학생들은 우리 세대에 비하여 왜곡된 편견을 기저에 깔지 않고 훨씬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자세로 일본을 흡수하고 일본 문화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쿨한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신세대는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좌우되기 보다는 지금 현재의 좋고 싫음과 유익함과 무익함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아이들의 그러한 자세에서 희망을 보게 된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 체험했던 일본은 말 그대로 선진국이었고 소형 승용차의 대중화,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지역별 케릭터 상품 등 곳곳에 배울 점이 많은 나라였으며 원화의 열 배 가까이 육박하는 엔화의 가치는 겉으로는 소박하고 겸손해 보이는 그들이 속으로는 얼마나 실속을 잘 챙기는 알부자인지를 실감하게 해주었다.

  우리 아이들이 단무지 한 개에도 추가 비용이 필요한 나라 일본을 체험하면서 참 알뜰하고 실속있다, 혹은 참 감질나고 야박하다, 둘 중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여행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우리나라를 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기회가 닿으면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고 관광이라기보다는 견학의 차원에서 누군가에게 방문을 권해주고 싶은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오늘같이 피곤한 날, 따땃한 유황온천물에 온몸을 푹 담그고 오래오래 쉬어줬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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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1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2-11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하 너무 읽기 힘들어요. 좀 나눠주심이... ㅠ_ㅠ

깐따삐야 2006-02-1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이 나서 썼지만 읽는 분들의 입장에선 힘들고 지루하게 읽힐지도 모르겠어요. ㅜ.ㅜ
 

개학 사흘째, 그새 주말이다. 긴 휴식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눈이 좀 피로하고 어깨가 아프다. 창밖으로 삼층 까치집이 보이는 내 자리가 익숙하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거 맞어?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일까.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짬이 났을 때 문득 튀어오르는 생각. 나 여기에 있는 거 맞어? 너무 기뻐서 실감이 잘 안 난다던가, 너무 절망적이어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던가, 하는 느낌이 아니라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묻혀 있는 가운데 그저 무덤덤한 기분 속에서 툭, 하고 떠오르는 질문. 내가 지금 여기에 있긴 있는걸까. 주변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고 일상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그렇듯 문득문득 내면으로 침잠하는 시간이 있다. 아무리 바빠도 가끔씩 멍해지고, 멍해지는 시간이 없으면 못견뎌 하는 나의 고질병이다.  

지난 겨울방학 동안은 꽤나 슬렁슬렁 보낸 것 같아도 전혀 아무 변화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속을 썩이던 사랑니도 뽑았고 겸사겸사 입안의 충치를 모조리 치료했으며 다쳤던 발목도 거의 완쾌되었다. 개학을 하고 교무실에서 3학년 교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퐁당퐁당 뛰어내리며 괜히 설레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발목을 다쳤을 때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게 바로 계단이었다. 올라가는 길이든, 내려가는 길이든, 계단만 마주하면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곤 했었다. 마음 속으로 여기서 더 다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이젠 제법 체중을 싣고 빠른 속도로 오르락 내리락 해도 특별한 통증이나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예전처럼 정상으로 돌아온 것 뿐인데도 무슨 큰일을 해낸 것처럼 기쁘고 만족스럽다. 여기저기 잔병 치레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이 소용 없다는 교과서적인 교훈. 잘 먹고 잘 자고 잘 걷는 요즘 나는 행복하다.

일본일주를 다녀온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좋은 추억이 되었다. 해외에 나가본 것은 대학교 때 캐나다에 다녀온 이후로 두 번째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을 종종 떠올렸던 여행이었다. 곧 졸업을 맞는 우리 아이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체험했던 여행이라서 더욱 의미있게 느껴진다. 빠듯한 일정 내에서 너무 많은 걸 보았고 순간순간 많은 걸 느꼈던 여정이어서 솔직히 정리가 잘 안된다. 기행문을 올리긴 올려야 하는데. 언젠가 또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방문해서 속속들이 알고 싶어지는 나라다. 말 그대로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졸업 준비에 학년말 자료 정리 및 이관 등으로 학교는 요즘 바쁘다. 순간순간 멍해지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은 어떻게든 머리를 기르고 사복을 입고 오려고 날마다 머리를 굴리거나 떼를 쓰고 있으며 한 살 더 먹었다고 어찌나 느물느물 능글맞게 구는지. 나를 쌤이 아니라 그까짓꺼 맞먹어도 괜찮은 셋째 누나 정도로 보는 것 같다. 아무튼 졸업을 하고 더더욱 치열한 경쟁 속에 던져질 앞으로를 생각하면 딱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한 마음에 모진 말을 못하게 된다. 일단 나이 어린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고 부드러워지는 나의 습성도 한몫 하는 것 같다. 간혹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있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개 순수하고 예쁘다.

멍-한 가운데 다시 일거리가 밀려온다. 정신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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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6-02-1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셋째 누나라는 표현이 맘에 듭니다.

깐따삐야 2006-02-11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암... 카리스마 안 섭니다. 요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