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시원하고 헐렁한 옷차림에 얼굴 한 가득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이 이 책에는 종종 등장한다.
그들은 집을 벗어나고, 회사를 벗어나고, 대한민국을 벗어나서, 케케묵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벗어난 다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저자 박 준이 방콕의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만난 장기여행자들이다.
커다란 배낭 하나 둘러매고 편리한 슈트케이스도, 친절한 가이드도 없이, 세상 이곳저곳을 누비며 방황하고 사색하기를 즐기는 멋쟁이들의 생생한 사연들이 이 책에는 실려 있다.
마치 무색무취의 보헤미안처럼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친근해진 다음, 대화의 한 컷, 한 컷에 재미와 의미를 실어내는 저자의 인터뷰 방식도 이 책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언론에서는 호화관광이나 해외조기유학 붐을 비판하고 나섰지만 그런 부정적 일면 뒤에는, 하루 만 원의 생활비로 볼거리,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며 시야를 넓히고 자아에 눈뜨는 소박한 여행자들도 많다는 사실이 가려지기 십상이다.
사실, 나의 여행 경험을 상기해 보더라도 언제나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것은 떠나고 싶어서 떠났던, 누군가 부추겨서, 혹은 마침 기회가 되어서 떠났던 여행이 아닌, 내가 가슴 속 깊이 바라고 원해서 떠났던 여행이었다.
가이드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급하게 여기저기 눈도장 찍고 사진기 셔터를 눌러대고 하는 관광이나 견학의 차원이 아닌, 진짜 여행. 어떤 면에서 나라는 사람은 그런 진짜 여행에 대한 추억이 결핍된, 가난한 사람이란 생각도 든다.
여행, 하면 언제나 거창한 것만을 떠올리고 염두하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책 속의 여행자들 또한 처음에는 저런 머뭇거림이나 망설임 때문에 출발이 쉽지 않았지만 처음 한 번이 어렵지, 한 번만 현실을 털고 떠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건네오는 부추김의 메시지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동하며 설레였다.
예전에 좀더 어릴적에 나는,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들에 대해서 다소 시니컬한 입장을 보이곤 했다.
어딘가 다녀와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자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여행은 사람을 키운다고 하는데 왜 저 사람은 더 유치해지고 거만해져서 돌아온 걸까, 라는 의구심 때문에 한 때는 청년답지 않게 세상은 어딜 가나 똑같은가봐, 사람은 어딜 가나 잘 안변하나봐, 이런 생각을 갖고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여유'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여유는 여건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대학 시절, 벤쿠버에 갔을 때 여행을 주제로 에세이를 쓸 일이 있었다.
또렷히 기억나진 않지만 "the journey to myself"란 제목으로 모든 여행은 결국 자아 찾기와 다름 없는 과정이라고, 나 스스로도 잘 모르는 소리를 지껄여 놓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은 잘 아는 소리보다 잘 모르는 소리를 할 때가 더 으쓱한 시절이었으니깐.
그런데 저 잘 모르겠는 소리에 일리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많지 않은, 단지 몇 차례의 여행 경험을 통해서도 깨닫고 있다.
익숙한 사람들과 환경에서 놓여나면 사람은 변화하기도 하고, 몰랐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또는 새로운 일면, 새로운 모습을 보태어서 컴백하기도 한다.
'보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남들의 시샘을 사기 위한 수다꺼리를 저장하기 위해 떠나는 관광이 아니라 떠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나 스스로가 절실히 원해서 떠난다면 실제로 저러한 변화를 겪기도 한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여유 속에서 찬찬히 시선을 옮기고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세상이 달리 보이고 나 스스로가 달리 보이는 진귀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저러다가도 소위 약발이 떨어지면 본래의 자아로 회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만, 그럴만한 무렵이면 다시 배낭 매고 떠나면 되지 않겠는가.
한 손에는 On the road, 다른 한 손에는 여권, 등에는 배낭을 매고 이 여름, 멀리 멀리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