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자유 사계절 1318 문고 11
채지민 지음 / 사계절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집에 돌아와서도 오빠의 편지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 보았다. 내겐 오빠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오빠가 사용했던 붓 하나를 하영이 몰래 내 방으로 가지고 온 게 전부였다. 결과적으로 훔친 것이지만, 하느님은 나를 용서해 주실거라 믿었다. 어쩌면 내가 내 호흡에 겨워 힘들어하지 않도록 착한 악마를 보내시어 내가 그렇게 하도록 이끌어 주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 p. 141

주인공 수빈이를 보면서 학창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아마 찾아보면 그 시절 일기장 어딘가에 남겨놓았을, 이제는 누군가의 글을 통해서나 영상을 통해서가 아니면 속속들이 떠올리기 힘들어진, 미세하고 불투명한 청소년기의 감성을 다시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내가 만약 지금 당장 책을 쓴다면 어쩌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내 글의 주인공은 침착하고 조숙한 수빈이에 비하면,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처럼 훨씬 더 수다스럽고 산만하면서도 불안정할 것이긴 하다.

학창시절의 나는 어떤 생각에 골몰했다가도 후다닥 그 생각을 바꿔버리고, 끝없는 자신감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큰 소리를 치다가도 금세 사소한 이유로 풀이 죽은 채 심각하게 자살을 떠올려 보기도 하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변덕스런 아이였으니까.

책 속에서 수빈이는, 사업에만 헌신하느라 다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아버지, 생활고로 희노애락의 표현이 사라져버린 어머니, 말을 더듬는 언니, 당최 속을 내비치지 않는 오빠, 앞으로 태어날 동생까지, 가장 가까운 관계지만 사실은 애증과 몰이해의 틀을 벗어나기 힘든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를 조숙이 아니라 조로(早老)라 평하며 숙녀로 성장해간다.

개인차야 있겠지만 남달리 감성의 촉수가 발달한 청춘이 으레 그러하듯, 수빈 역시 군중 속의 외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전인격적인 존재로 소통할 소울메이트를 강렬히 원하게 된다.  

그리고 여고생이 된 그녀 앞에 선물처럼 등장한 세 사람. 친구 하영, 세계사 선생님, 그리고 하영의 오빠.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세계 이곳저곳에서 머물다 온 하영은 세련된 사고방식과 여유 넘치는 따듯함으로 수빈에게 다가오고 수빈은 아무에게도 열어보이지 않았던 마음의 문을 연다.

단순히 지식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역사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나의 위치를 가늠해 보게 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자아의 본질에 눈뜨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는 법에 대해 일러주는 세계사 선생님 또한 훌륭한 멘토로서 수빈을 이끈다.

그리고 수빈의 첫사랑의 대상이 되는 하영의 오빠. 고백 한 번 제대로 못한 짝사랑으로 그친 후 곧 이별해야 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밖에 없는 어설픈 첫사랑은 수빈이 어른으로 자라는 데 빠져서는 안될, 반드시 거치고 가야 할 소중한 성장통인 것이다.

수빈에게 어둠만을 드리우는 것처럼 보였던 가족들이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성실히 해내는 모습을 보며 고마움을 느끼고, 결국 멀게만 느껴졌던 돌아가신 아버지마저 이해하게 되었을 때, 수빈은 대학생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목전에 둔 어엿한 스무살로 성숙해 있었다.

그리고는 지금 네가 살며 지내는 그 시간의 기억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어린 시절을 잃어버리거나 추억을 간직하지 못한 채로 성장하게 된다면, 정말 오랫동안 마음이 아플 거라고...... - p. 171 낯선 독자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스무살인 수빈보다 좀더 많은 과거가 있다.

이사를 함께 다닌 일기장들과 편지들 속에, 누군가로부터 선물받은 잉크가 다 떨어진 만년필이라든가 날짜와 서점 이름이 적힌 낡은 책의 속지, 좋아하던 유행가와 팝송을 녹음한 공테입 속에, 조각난 기억들이 소리 없이 잠자고 있다.

언젠가 서랍 속의 그들을 불러내서 기록되거나 증거로 남지 않은 내 머릿속의 영상들과 조합하여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고 싶은 소망이 있다.

과거의 가난,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심신의 공허감은 서정주 시인이 읊은 것처럼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여름 무등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는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그 시절의 살결까진 되찾지 못하더라도 그 시절의 마음씨로 돌아가 나의 과거에게 말걸어 보고 싶은 바람, 언젠가는 꼭 그 바람을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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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7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7-27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오랜만이네요. 좋은 책 많이 읽으면서 건강하고 즐거운 여름 보내자구요. ^^
 

좀더 어릴적의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은 반드시 환하고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모름지기 밝고 눈부신 햇볕 아래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모든 걸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럴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고 믿었다. 엄청난 비약을 감수하고라도 당시의 나는 무엇인가를 감추는 것은 비겁함을 넘어서 곧 악의라고까지 생각했다. 당시의 내가 상대를 불문하고 자주 들이대던 말 중 하나가, 너 왜 말을 못해, 였으니까. 상대가 드러내는 머뭇거림이나 곤혹스러움을 비겁함의 징표로 해석하며 한껏 우월감을 느꼈던 나는 솔직함을 무기로 다분히 악랄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처럼 견고하던 의지에 조금씩 틈을 보이며 진행되는 균열을, 몹시도 선명하게 느끼고 있다. 이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고 비약하기는 커녕 반드시 그래서는 안된다, 고 거꾸로 비약할 지경이다. 삶이 그렇듯 반듯하고 투명한 한 가지 루트로만 통하는 게 아니라는 어딘지 꺼림칙하면서도 부정하기 힘든 깨달음에 지배되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사회적 공의에 관해 어린 시절보다 더욱 더 의심스러워하고 절망스러워 하는 지금의 나는, 공개와 진실보다도 비밀과 거짓말이야말로 물과 산소처럼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간적 영역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나 스스로의 동의를 구해보는 것이다.  

머리 꼭대기의 고상함부터 발뒤꿈치의 누추함까지 모조리 드러낸다는 것은 타고난 솔직성과 용기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빈약한 마인드를 드러내는 정신적 노출증이자 전부 아니면 무를 원하는 극단적 이기심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말해도 괜찮을까? 그렇다면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 반드시 말해야겠어. 세 번 쯤 생각해 보는 게 좋다. 곤란한 느낌이 드는 내용물은 성급히 쏟아내 보았자 악취 섞인 냉기로 주변을 얼리기밖에 더하겠는가. 더군다나 솔직했기에 나는 무죄가 되고 상대는 그 결과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조차 없다. 자백한 자는 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구원받았으므로 쌔근쌔근 발을 뻗고 자겠지만 자백을 감당해야 하는 입장에선 손발을 오므린 채로 조용히 사면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이다. 혹은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다. 이해받으려 했든 그저 털어놓는 것에 위안을 받았든, 이해하고 싶었든 그저 진실을 알았다는 것에 안도를 했든, 결국 어떤 의미에서 지나친 솔직함은 양끝에 날이 선 곡괭이처럼 상대와 나를 향해 동시에 휘두르는 잔인한 폭력인 셈이다. 말하지 말지 그랬어. 듣지 말지 그랬어. 그것만큼 무용한 말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지금은 백퍼센트 솔직한 상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오십퍼센트 알듯말듯한 베일에 싸인 상대를 이해하는 일이, 가끔은 더 편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전에 없던 생뚱맞은 생각을 하는 중이다. 개인적인 영역에 있어선 무엇이 더 공정한가, 보다 무엇이 나를 더 편히 숨쉬게 하는가, 가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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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7-26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걸 공개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저도 나름 솔직하게 글을 쓰려고 하는데요, 다른 사람이 볼 가능성이란 저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검열을 하게 만들지요. 제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구란... 글구 사랑은 솔직한 사람이랑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베일에 싸인 게 첨엔 신비해 보이겠지만, 예측이 안되서 말입니다 그냥 제 생각.

깐따삐야 2006-07-26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물론 저도 솔직한 사람이 좋은데 가끔 하지 않아도 될 말,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말까지 해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도 있는지라 솔직함도 어느 정도껏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 내지 존중으로 입을 다무는 사람이 있고, 오직 내 마음 편하자는 식으로 솔직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자가 좀더 낫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요. 사실은 저란 사람이 후자에 속하는데 조용히 있다가도 급작스런 직설화법으로 상대를 곤혹스럽게 하는 경향이 있어서 고쳐나가야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지는 모르지만, 솔직한 사람은 솔직한 말에 상처도 잘 받는답니다. 항상 부메랑을 던지고 있는 셈인데 참 아이러니지요. ^^

마태우스 2006-07-26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한 것과 말을 막하는 건 다르다고 생각해요. 음, 님한테 그런 경향이 있으시단 말이죠. 자신의 실수를 공개하는 건 솔직, 다른 사람의 실수를 꼬집는 건 배려가 없는 것, 이렇게 정리하면 어떨까요

깐따삐야 2006-07-26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실수를 공개하는 것을 곧 면죄부로 생각하는 뻔뻔함만 없다면, 그런 자기 본위의 솔직함만 아니라면, 솔직하다는 것은 여전히 미덕이에요. 그나저나 마태우스님이 정리해 주신 내용을 보니 저는 솔직하지도 못한데다, 배려도 없는 사람이네요. 이쿠!

blowup 2006-07-27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쯤 저도 쓰고 싶었던 글이에요.
서재 어딘가에 저 제목으로 글을 쓰다 만 것도 있구요.^-^
깐따삐야 님의 글쓰기는 가벼운 놀림 속에 묵직한 펀치를 숨기고 있어요.
글, 참 잘쓰세요. 늘 생각하는 거지만.

깐따삐야 2006-07-2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제가 두서 없이 써내려가느라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헤아려 읽어주시는 것이라 생각이 되요. 감사합니다. ^^
 

T는 우리반 학생이다. 재작년에도 내가 담임을 맡았던 아인데 반장선거를 하던 날, 후보를 정하던 즈음해서 눈을 깜빡이면서 수줍게 손을 들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몇 표 차이로 부반장이 되었지만 일 년 동안 그 역할을 야무지게 해냈고 성적도 항상 우수했다. 좋은 글을 써서 종종 상도 받아왔고, 키는 작지만 빠른 발로 상대를 앞지르며 재간을 부리는 우리반의 걸출한 축구선수이기도 했다. 3학년이 되어 T와 다시 만났을 때, 예전의 순진하고 깍듯하던 모습보다는 좀더 남자답고 의젓해진 모습이 먼저 눈에 띄었다. 예나 지금이나 담임으로서의 내 역할이 거의 필요 없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매사를 알아서 잘하는 모범생이란 사실은 여전했다.  

남자 아이들은 중3 정도 되면 뻗쳐 오르는 에너지를 주체 못해서 가끔 별다른 이유도 없이 화를 내기도 하고, 멀쩡한 학교 기물을 파손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멱살잡이를 하는 등, 곧잘 후회의 빛을 보일만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곤 한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서투른 신참이었을 때, 또래에 비해 다소 조숙해서 일찍 사춘기가 찾아온 아이들이 저런 식의 행동을 보일라치면, 같이 펄펄 뛰고 고함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아이를 항복시키기 위해 난리를 치곤 했다. 물론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서로에 대해 악의는 없었다. 단지 젊은 피끼리 파바방 부딪쳐 지금 이 순간 너에게만은 지지 않겠다는 치기 어린 오기에 발동이 걸렸달까. 그 때를 떠올리면서 요즘은 서로 쑥스럽게 웃기도 하지만 아무튼 매일매일이 활화산같았던  한 해였다. 한편, 그러한 잦은 충돌과 상처 속에서 내가 배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기다림'이었다. 아이들은 대개 뜨겁고 성급하기에 대척점에 있는 어른들은 그만큼 냉정하고 느긋해야 한다는 것. 상대방에 대해서 일정 부분 체념 모드로 돌입했을 때 그를 대함에 있어 차고 게을러지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언제나 일정 비율로 냉정하고 느긋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경지가 아니다. 간혹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언제나 웃는 얼굴로 학생들을 대하시는 연로하신 선생님들에게서 저런 모습을 뵙게 된다. 아직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사랑받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아이들은 금새 알아차린다. 아, 저 선생님은 진심으로 우릴 사랑하시는구나. 가끔 뾰로통한 표정으로 본숭만숭 앉아있던 아이들이 저렇듯 연세 지긋하신 선생님들 팔에 매달려 한껏 친근함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 노하우는 뭘까 궁금했다. 지금껏 관찰해 온 내 짧은 소견으로는 지칠 줄 모르는 '기다림'이란 느낌이 든다.

아이들 하나, 하나를 향해 공평한 웃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을 현재로 대하기보단 미래로 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눈앞에 벌여놓은 사소한 실수들을 서둘러 지적하게 되기 마련이고 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이해하는 건 한바탕 잔소리 뒤의 과정으로 그치는 경우가 사실은 더 흔하다. 대개는 그 자리에서 잘못했다,는 마음에도 없는 한 마디를 받아내기 위해서 앙앙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아이들보다 한 발짝 더 앞선 성급함 때문에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 얼굴 빨개질 짓만 반복하게 되곤 한다. 기다려주고 지켜봐주면 아이들도 오래지 않아 알게 된다. 잘못했다, 는 것을. 내 기분을 통제하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것을. 하지만 어떤 경우와 맞닥뜨렸을 때, 그처럼 아이들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오가며 그들의 심중을 헤아리고 가장 현명하고도 효과적인 절차를 떠올린다는 것은, 다 컸다는 어른들에게조차 그다지 호락호락하진 않은 일이다.

T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T는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 글 쓰는 것을 다른 어떤 것보다 좋아할 뿐더러, 보통 아이들이 무협지나 환타지 소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때도 세계명작이나 현대소설을 읽으면서 나름의 진지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담임이다보니 대회에 출품할 작품이라든가, 교내에서 열리는 백일장 작품 등, T의 글을 읽게 될 기회가 가끔 있었다. 모든 기교적인 면을 떠나서 우선은,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도 정성 어리고 따스해서 읽고나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그런 글들이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라고 하듯, 항상 인간적인 것에 먼저 시선을 주고 그것을 조곤조곤 상기하며 완성된 한 편의 글로 담아낼 줄 아는 T의 감성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해 왔다. 공부도 곧잘 하면서 좋은 글도 쓸 줄 아는 T에 대해선 그렇듯 만족감만 있을 뿐 별다른 우려를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T의 부모님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상담을 청해오신 T의 어머니는 T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걱정을 하고 계셨다. 진로에 대해 T가 아버지와 심하게 부딪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T의 아버지는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한 한의사다. 한 지방의 유지로서 T의 아버지가 갖고 있는 꿈은 작지 않은 듯 보였다. 아버지는 T가 대를 이어 한의사가 되길 바라고 있었고 T는 다른 건 몰라도 의사나 한의사는 싫다고 버티고 있었고 어머니는 중간에서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들인 T를 간간히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T가 남자로서의 야망이나 명예에도 눈과 귀를 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고 T는 국어교사를 하면서 평생 글이나 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니, 뜻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해마다 일류 대학을 많이 보내고 있는 어느 사립고등학교의 입시 전형에 대해 문의를 해왔고 T가 진로를 바꾸도록 설득해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T는 한의사란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며 싫다는 뜻을 비쳤다. 원체 언어와 문학을 좋아하는 T에게는 의사보다는 국어선생님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머니의 당부를 상기하며 요즘 의사들은 시도 쓰고 수필도 쓰고 소설도 쓴다면서, 진짜 순수전업작가는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한다고 말했다. T는 참하고 반듯한 모범생이었지만 모범생 특유의 고집 또한 대단할 것이었다. 무작정 설득한다고 쉽게 뜻을 바꿀 것 같지 않아 예전에 내가 써먹었던 방법을 일러주었다. 아직 생각 중이라고 해. 천천히 생각해 볼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려봐. 아버지와 정면으로 부딪쳐봤자 서로 힘들어지기만 한다.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 어머니도 힘들어지셔. 대신 공부는 아주 여얼심히 해서 부모님이 너를 마음 놓고 믿으실 수 있게끔 해드려야 돼. 그리고 꿈은 여러번 바뀌는 거야. 너무 빨리 결정지워 놓는 것도 좋지는 않아. T는 그제서야 수긍을 하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는 누구 한 편의 입장만 옹호할 수가 없었다. T만 따라준다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의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을 돕는 것도 참 좋은 일이고, 아버지만 이해해 주신다면 국어나 문학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글도 쓰며 사는 삶도 참 좋을 것이었다. 삶을 끝까지 살아보지 않는 한 무엇이 더 좋을 것이라고 그 누가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먼저 인생을 사신 부모님은 확률과 통계에 대해 빠삭한 분들이라지만 그 결정이 자녀의 의지와 상반되는 것이라면 무조건 밀어부치기만 해서도 안되는 일일 것이다. 인생은 부모님이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님 뜻을 거슬러서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게 되고 행복해지는 경우도 흔치는 않다. 결국 나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은 T에게 저만치의 조언을 해주는 것에 그쳤고 나는 그저 T는 잘할 것이고, T의 부모님도 그렇게 답답한 분들은 아니니 분명 서로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믿어보기만 할 뿐이다.

요즘은 결손가정도 많아졌고 아주 기본적인 생활고를 겪는 아이들도 여전히 적지 않기에 T의 경우엔 어떻게 보면 참 배부르고 행복한 고민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가정사에는 상대적 우월감이나 상대적 박탈감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한의사를 시키고 싶은데 작가를 꿈꾸는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나, 학업과는 담을 쌓고 오토바이만 몰고 다니는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나 부모에겐 비중의 차이 없이 똑같이 난감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옛말은 하나도 그른 것이 없다. 특히 자식 문제에 대해선 인간적으로 보나, 대외적으로 보나 요만큼의 티끌도 없는 사람들이 간혹 의외의 성급한 면을 보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나도 예전엔 기다린다고 뭐가 달라져?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다. 기다릴 줄만 안다면, 사람이 뭔가를 충분히 기다릴 수만 있다면, 좋은 부모, 좋은 교사의 역할을 절반도 넘게 해낸 것이라고 믿고 있다. 빨리 이끌어낸 대답은 정답이 아닐 확률이 더 높다. 정답의 탈을 쓴 오답이랄까.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급하게 지우고 쓴, 지운 흔적 밑으로 원래 썼던 오답이 지저분하게 보이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스스로에게 왠지 모를 슬픔과 창피함을 동시에 느끼는. 그래서 시의적절한 기다림, 질기디 질긴 애정이 뒷받침 된, 능동적인 기다림에 대해서 좀더 알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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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2006-07-13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글..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심정이네요.. 현장에서 오래 진심으로 생각한 사람만이 해 낼 수 있는 생각들.. 아이는 나날이 커가는데 제 자신이 아직 질풍노도를 못 벗어나서 매일매일이 바람에 펄럭이는 종잇장같은데.. (물론 따스하고 평온한 날도 많지만^^;;) 두고 두고 가끔씩 읽어야겠어요. 이 페이퍼를..

깐따삐야 2006-07-13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iny님, 반갑습니다. 저 자신도 사시사철 질풍노도랍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하루하루가 외줄타기 같기도 하구요. rainy님 서재로 조만간 구경가겠습니다. ^^

마태우스 2006-07-13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멋진 글이십니다. '파바방'이란 단어도 아주 신선한걸요. 무엇보다 애들에 대한 님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T의 장래가 어찌될지 모르지만 어떤 길을 걷든지 '좋은 사람'이 될 것만은 분명하군요.

깐따삐야 2006-07-1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저도 어떤 길을 걷든, T는 행복해질 수 있는 자질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개츠비 2006-07-14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오즈님)! 개성 가득한 아이들의 성장기를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입니다. 그들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기다릴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신 것도 큰 배움중 하나 같습니다. 곧 방학이군요. 즐겁고 좋은 일들이 많길 바랍니다. ^^

깐따삐야 2006-07-1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retre7님, 격려 감사합니다. 무더운 여름, 즐겁고 건강하게 보내세요. ^^
 

내가 가지고 있는 나쁜 습성 중의 하나는, 진짜 불만은 결코 겉으로 내보이지 않고 가슴 한켠에 꽁꽁 모셔둔다는 것이다. 그것을 찬찬히 삭혀서 발효시킨 다음 이해와 인내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나의 인격에 비추어 볼 때 전무후무할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렇듯 차곡차곡 쌓인 불만들이 어느 날 가슴 속에서 봇물 터지듯 폭발함과 동시에 나는 흥분하지도 않은 채로 상대에게 관계의 종언을 고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까지, 라고.

나란 사람은 꾸준한 줄폭탄보다는 급작스런 직격탄을 선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참 나쁘다, 란 생각이 들지만 본래 소심한 A형으로 타고났기 때문인지 불만에도 쫀쫀한 정리벽이 있는 모양이다. 어릴 때 겨울에 눈싸움을 할 때도 나는 오래도록 꼼꼼하고 찬찬하게, 눈가루들을 모아모아 단단히 뭉친 다음 표면에 물까지 발라 꽝꽝 얼린 후 도망가는 상대의 등짝을 향해 눈덩이를 명중시키는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대개의 여자아이들은 눈가루를 얼굴에 뿌리고 도망치기도 하고 덜 뭉친 눈덩이를 던지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눈싸움을 눈놀이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다분했지만 나는 오빠들이 눈싸움을 하는 모양을 잘 눈여겨 보았다가 실전에 활용하곤 했다. 그다지 관계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아무튼 나는, 까르르 까르르 웃고 살짝살짝 토라지기도 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눈놀이보다는, 나였든 다른 아이였든 딱딱한 눈덩이 하나 얼얼하게 얻어맞고 누구 하나 세상 떠나갈 듯 울고 난 다음에야 끝나는 눈싸움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지지부진한 즐거움 보다는 한 방의 설움이 훨씬 더 가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예전에 남자친구를 대할 때 역시 그랬다. 나는 그가 가게 점원들을 대하는 태도,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모양, 전화를 걸고 받는 습관, 부모님과 형제들을 향해 갖고 있는 마인드에 대해 항상 불만이었지만 한 번 운을 띄웠을 때 상대의 반응이 별로 진지하지 않다는 것을 간파한 다음에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그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가 마음에 들면 때로 나는 나를 넘어서는 노력까지 불사한다. 나의 모순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싫은 점이 있으면 싫다고 말한 다음 상대가 스스로 변화하기를 촉구하던가, 상대의 변화를 부추겨야 할텐데 나는 일단 상대에게 나를 맞춘다. 상대는 자신의 가려운 데를 다 알아서 긁어주고 맞춰주는 나를 편하게 생각하면서 나에게 익숙해진다. 그 과정 안에서 난 앙앙거리지도 않고 징징대지도 않는다. 마음 속으로는 성벽을 쌓았다 부수었다 여러 차례 반복할지라도 입 밖으로 뱉어내는 말은 배려와 관용이 넘치는 다정한 말들 뿐이다. 그러다가는, 어느 날 급작스럽게, 상대에 대한 마음이 식어버린다. 서서히, 가 아니라 아주 빨리. 별 고민도 없이 잠들고 난 후 그 다음 날 아침 눈을 떠서 오늘 헤어져야지, 라고 결정하는 식으로. 뜬금없이 직격탄을 맞아버린 상대는 당연히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는 내가 읊어대는 이유들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왜 그 때 말하지 않았냐고. 내가 돌려주는 말은, 내가 말할 때 넌 뭐하고 있었니.   

평소 다정하고 솔직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나지만 알고보면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다. 가게에 들르거나 하다못해 지나가는 택시를 타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조차 상냥하고 친절하다는 것에 좋은 인상을 받곤 하니까 말이다. 솔직한 것도 맞다. 거짓말을 좋아하거나 즐기는 사람이 드문 것처럼 나도 그렇다. 가능한 한 투명하게 살길 바랄 뿐더러,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솔직한 것이 인간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저처럼 켜켜이 쌓아놓고 묵혀두는 불만 섞인 감정들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 되곤 한다. 나의 해결방식은 언제나 이별 뿐. 대안책은 없다. 학부 시절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나와 한 그룹에 배정된 친구가 있었는데 한 달 동안의 실습 기간 동안 나는 그녀에게 이런저런 불만들을 갖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진 않았다. 슬슬 눈치를 살피던 친구가 이유를 물어왔지만 적당히 얼버무리곤, 한 달간의 실습기간이 끝나자 그녀의 경박함 때문에 내가 겪어야 했던 피곤함에 대해 짧고 굵게 읊어준 뒤 더 이상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졸업 이후에도 문자를 보내오고 소식을 전해 왔지만 응대하지 않았다. 시간이 이만치 흐른 마당에 계속 그러는 나 자신도 우스웠고, 어쨌든 대학 4년을 함께 보낸 친구였는데 내가 지금 친구 하나를 잃어버리고 있구나... 싶은 느낌도 썩 기쁘진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 속에서는 나의 해결책은 이별, 이별 그 이후의 대안책은 없음, 이라는 갑갑한 공지사항만 뜨는 것이다. 이건 무슨 미련한 고집이고 까닭 없는 오기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말을 참 못하는 사람이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떠드는 직업을 가졌고 남의 나라 말로 밥벌어 먹고 산다지만 말을 많이만 하고 있을 뿐, 정작 필요한 부분에서는 저렇듯 입을 다물어 버리니 말을 못하는 사람이 맞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아도, 상대의 독설이 주는 상처보다 침묵이 주는 상처가 훨씬 더 공포스러울 수 있다. 직접 대놓고 말하기 싫다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약간씩의 힌트라도 내비쳐주는 배려가 필요한 건 아닐까. 나란 사람은 기괴한 방식으로, 뒤틀린 방식으로 나와 상대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구 하나를 울리고 끝나야만 속이 시원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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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7-0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유형이군요. 전 아주 둔감하고 귀가 어두워 일일이 직설적으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경우가 참 많아요. 그래서 놓쳐버린 친구들에게 미련을 가지고 지금도 꾸준히 연락을 취하긴 하지만, 그 친구들이 마음의 문을 열 거 같지 않아 슬퍼요.

깐따삐야 2006-07-10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인간관계에서 시시때때로 서로간의 진심보다 타이밍이 우위에 놓일 때가 있는 것 같아요.
 
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시원하고 헐렁한 옷차림에 얼굴 한 가득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이 이 책에는 종종 등장한다.

그들은 집을 벗어나고, 회사를 벗어나고, 대한민국을 벗어나서, 케케묵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벗어난 다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저자 박 준이 방콕의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만난 장기여행자들이다.

커다란 배낭 하나 둘러매고 편리한 슈트케이스도, 친절한 가이드도 없이, 세상 이곳저곳을 누비며 방황하고 사색하기를 즐기는 멋쟁이들의 생생한 사연들이 이 책에는 실려 있다.

마치 무색무취의 보헤미안처럼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친근해진 다음, 대화의 한 컷, 한 컷에 재미와 의미를 실어내는 저자의 인터뷰 방식도 이 책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언론에서는 호화관광이나 해외조기유학 붐을 비판하고 나섰지만 그런 부정적 일면 뒤에는, 하루 만 원의 생활비로 볼거리,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며 시야를 넓히고 자아에 눈뜨는 소박한 여행자들도 많다는 사실이 가려지기 십상이다.

사실, 나의 여행 경험을 상기해 보더라도 언제나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것은 떠나고 싶어서 떠났던, 누군가 부추겨서, 혹은 마침 기회가 되어서 떠났던 여행이 아닌, 내가 가슴 속 깊이 바라고 원해서 떠났던 여행이었다.

가이드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급하게 여기저기 눈도장 찍고 사진기 셔터를 눌러대고 하는 관광이나 견학의 차원이 아닌, 진짜 여행. 어떤 면에서 나라는 사람은 그런 진짜 여행에 대한 추억이 결핍된, 가난한 사람이란 생각도 든다.

여행, 하면 언제나 거창한 것만을 떠올리고 염두하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책 속의 여행자들 또한 처음에는 저런 머뭇거림이나 망설임 때문에 출발이 쉽지 않았지만 처음 한 번이 어렵지, 한 번만 현실을 털고 떠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건네오는 부추김의 메시지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동하며 설레였다.

예전에 좀더 어릴적에 나는,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들에 대해서 다소 시니컬한 입장을 보이곤 했다.

어딘가 다녀와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자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여행은 사람을 키운다고 하는데 왜 저 사람은 더 유치해지고 거만해져서 돌아온 걸까, 라는 의구심 때문에 한 때는 청년답지 않게 세상은 어딜 가나 똑같은가봐, 사람은 어딜 가나 잘 안변하나봐, 이런 생각을 갖고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여유'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여유는 여건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대학 시절, 벤쿠버에 갔을 때 여행을 주제로 에세이를 쓸 일이 있었다.

또렷히 기억나진 않지만 "the journey to myself"란 제목으로 모든 여행은 결국 자아 찾기와 다름 없는 과정이라고, 나 스스로도 잘 모르는 소리를 지껄여 놓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은 잘 아는 소리보다 잘 모르는 소리를 할 때가 더 으쓱한 시절이었으니깐.

그런데 저 잘 모르겠는 소리에 일리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많지 않은, 단지 몇 차례의 여행 경험을 통해서도 깨닫고 있다.

익숙한 사람들과 환경에서 놓여나면 사람은 변화하기도 하고, 몰랐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또는 새로운 일면, 새로운 모습을 보태어서 컴백하기도 한다.

'보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남들의 시샘을 사기 위한 수다꺼리를 저장하기 위해 떠나는 관광이 아니라 떠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나 스스로가 절실히 원해서 떠난다면 실제로 저러한 변화를 겪기도 한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여유 속에서 찬찬히 시선을 옮기고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세상이 달리 보이고 나 스스로가 달리 보이는 진귀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저러다가도 소위 약발이 떨어지면 본래의 자아로 회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만, 그럴만한 무렵이면 다시 배낭 매고 떠나면 되지 않겠는가.

한 손에는 On the road, 다른 한 손에는 여권, 등에는 배낭을 매고 이 여름, 멀리 멀리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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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7-10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자체가 엄청난 뽐뿌질을 하는 매우 위험한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깐따삐야 2006-07-1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철에 맞춰 나온 것을 봐도 그렇고, 사람 어지간히 감질나게 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