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학교
이윤기 지음, 북디자인 정병규, 정재규 그림 / 민음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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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 넥타이>란 소설집을 읽고나서부터 작가 이윤기에게 관심이 생겼다. 동창생의 우스운 사연을 담은 꽤 노숙한 소설이었는데 남자 박완서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꾸려가는 솜씨가 녹록치 않았다. 나중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나서 작가 이윤기가 사실은 번역가 이윤기로 훨씬 더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미있게 읽은 후에는 이 어르신은 참 관심분야도 다양하고 자유자재로 글을 쓰시는구나, 하고 느꼈다. 그리고 이번에 <어른의 학교>를 읽고나니 에세이스트로서도 너무 멋진 사람이었다. 진짜 어른이 쓴 글이라는 느낌, 모락모락 담배연기를 뿜으며 슬렁슬렁 써내려간 듯한, 하지만 진짜 어른이 아니고서는 쓰지 못하는 글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책을 읽기는 하는데, 영화도 보기는 하는데 내용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겠다면서 자기 기억력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묻고는 합니다. 콩나물이, 제가 자라면서 마신 물을 기억하겠느냐고요...... 물을 기억하지 못해서 콩나물이 자라지 못하더냐고요...... 콩나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콩이라는 씨앗의 소양 위에 이루어진 물의 퇴적이 아니겠냐고요...... (p. 31)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불안을 말끔히 해소시켜주는 부분이었다. 산발적인 기억력 때문에 나는 책을 읽어도 소용이 없는 인간인가, 자괴감을 느낀 적도 있었고 리뷰를 써서 정리하지 못한 채 기억 저편에서 잊혀져 가는 책이나 영화 때문에 아쉬움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물을 기억하지 못해서 콩나물이 자라지 못하더냐고요...... 라고 해주시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단순하다.

정보가 쏟아지는 폼이 홍수의 도도함을 방불케 하는 이 시대에 정보를 읽는 데 뒤떨어져서는 안 되지요. 그러나 정보는 속효성 금비와 닮은 데가 있어서 그것을 흡수하는 주체를 돌보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정보가 지식이 될 뿐 지혜가 되는 일이 극히 드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나는 지금 외향성 독서를 금비, 내향성 독서를 퇴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금비 쓰지 말고 퇴비로만 농사 짓자는 주장은 이 시대에 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패륜아들에게서, 일부의 못된 신세대에게서 나는 금비에 녹아난 땅의 견본을, 효율의 허구를 보고는 합니다. (p. 35)

  나도 어른들 눈에는 요즘 젊은 것들로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요즘 어린 애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말대꾸를 잘하는 아이는 숱한데 정말로 말을 잘하는 아이는 드물다. 인터넷 검색을 빠르게 하는 아이는 많은데 주어진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을 하는 아이는 적다. 아이니까 그렇지, 하고 이해하는 부분이 있지만 요즘 아이라서 더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오래도록 앉아서 책을 읽거나 가족들과 대화하기 보다는 피시방에 몰려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게임을 즐기고, 국과 나물을 먹으며 천천히 식사하기 보다는 스팸이나 라면으로 성급히 허기를 채우고 학원에 가야하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그런 건 아닐까. 금비로 자꾸만 황폐해져가는 땅에서 쑥쑥 자라 좋은 열매를 맺기는 어려울 것이다.

머리 좋고 아름다운 대학교수를 아내로 둔 어느 친구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지요. 누구와 바람을 피웠는가 하면, 대학교수 아내와는 어느 모로 보나 도무지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하찮게 보이는 여자를 상대로 바람을 피웠다지요. 그 여자를 만나 머리 끄덩이 잡아 흔들고 온 대학교수 아내가 남편에게 이랬다는군요. <나는 당신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만 가지고 이렇게 길길이 뛰는 것이 아니다. 그 여자의 어디가 나보다 나으냐? 나보다 나은 여자와 바람만 피웠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학교수 헛똑똑이 아닌가요? (p. 54)

  위의 글은 일본인 친구가 조조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내가 조조를 싫어하는 이유였고, 일본인 친구가 유비 3형제를 싫어하는 이유가 내가 이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되더라는 말을 하면서 인용해 놓은 에피소드이다. 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선 심정적이 되면서 남의 일에 대해선 논리적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 간극이 바로 불화의 불씨가 되곤 하는 일을 종종 목격한다. 호오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인데 간혹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일수록 저런 함정에 더 쉽게 빠진다는 것이 재미있다.

쓰는 사람들 중에는 삶의 가죽을 취하는 사람도 있고, 살을 취하는 사람도 있고, 뼈를 취하는 사람도 있고, 골수를 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 그 근기에 따라 취한 것을 나름대로 연마한 언어의 그물막으로 싼 것이 글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먼길을 돌아 이 자리에 이른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나그네 신분으로, 벗들이 꼭대기를 차지하고 노니는 산기슭에서 이번에는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는, 그러면, 삶에서 무엇을 취할 것이냐? 가죽이냐, 살이냐, 뼈냐, 골수냐? (p. 161)

  글에 대한 참으로 근사한 정의다. 재주 부리는 작가들은 많지만 곡진한 글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너는 삶에서 무엇을 취할 것이냐고. 어디 글을 쓰는 일에만 해당될 것인가. 두고두고 음미하며 스스로에게 똑바로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너는 껍데냐, 골수냐, 하고.   

  이 밖에도 좋은 이야기가 많은데 모두 인용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밑줄긋기로 등록해놓고 종종 읽어볼까, 하다가 사실 모두 다 밑줄을 쳐도 좋을 내용이라서 그만두었다. 세상을 하나의 커다란 학교로 보고 스스로를 낮춘 채 항상 배우는 자세로 삶에 임하는 저자의 태도가 든든하다. 세상을 탓하면 세상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중심을 나에게 가져다 놓는다면 이 세상은 배움의 원천이 된다. 그저 아무나 보고 아무개 선생님, 하는 사회가 되었지만 진짜 스승, 진짜 어른이 드문 요즘 마치 세월의 향취같은 담배 냄새가 옷깃에 은은히 배어있을 듯한, 속 깊고 눈 깊은 재미있는 어른을 한 분 만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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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09-01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절이라 아쉬워요.

깐따삐야 2006-09-01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한 권 소장해도 좋을만한 책인데 아쉽네요. 저도 이 책 헬스장에서 빌려왔거든요. ^^

blowup 2006-09-0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미난 헬스장이닷^^
남자 박완서라는 표현에서 데구르르.(동감)
저 '골수' 이야기는 예전에 자기소개서를 쓸 때 주제로 삼은 적도 있었죠.
(붙었던가, 떨어졌던가--;)


깐따삐야 2006-09-01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헬스장 책장에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도 있더라구요. 쿡쿡. ^^

kleinsusun 2006-09-0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스장에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가 있다구요? 우와......주인의 취향이 정말 특이한데요. 그 헬스장 한번 가 보고 싶어요.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하구요.^^ 제가 다니는 헬스장엔 온몸의 근육을 자랑하는 바디 빌더들이 표지 모델로 등장하는 월간 <휘트니스> 밖에 없답니다. ㅎㅎ


깐따삐야 2006-09-0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leinsusun님, 헬스장 시설은 열악하지만 양서는 좀 있어요.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사람들의 시선에서 소외되고 있긴 하지만요. 주인 부부는 제가 아는 분들인데 솔직히 그런 책들을 사모으거나 할 분들은 아니거든요. 저도 책의 출처가 궁금하답니다. 어디서 한꺼번에 기증받은 것도 같고. 엊그제엔 함정임 소설집과 토마스 만 단편선을 빌려왔어요. ^^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유미리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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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게으름인지, 무관심인지 그 때 그 때 나오는 신간이나 신작영화를 챙겨볼 줄 모르는 나는 뒷북을 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경린의 소설이 뜨고 있을 때 김승옥의 초기단편집을 읽는다든지 키아누 리브스가 콘스탄틴에서 열연 중일 때 매트릭스 시리즈를 다시 보며 혼자 감탄한다든지 하다가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전경린의 소설을 읽고 영화 콘스탄틴을 보며 아, 하고 뒤늦게 뭔가를 느끼곤 한다. 굳이 이렇게 하자고 룰을 정해놓은 바도 없을 뿐더러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내는 작품이야말로 이 몸이 읽을만한 것이리라, 하는 고집이나 철학도 없다.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버린 것이다.

  이번에 읽게 된 유미리의 책도 그랬다. <가족시네마>는 새로 발굴한 헌책방에서 찾았고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는 헬스장의 오래된 책들 사이에서 발견했다. 이제껏 작가 유미리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사실은 재일교포라는 것,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는 것, 유부남과 사귀다가 미혼모가 되었다는 것,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한창 주목받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내가 구한 책은 1997년 고려원에서 나온 <가족시네마>인데 지금은 절판된 상태였다. 1997년이면 고등학교 시절인데 그 때는 유미리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좀더 관심이 있을 때여서 그랬는지 유미리의 책은 읽지 않았다. 신문에서 유미리의 책을 홍보하는 기사를 보았던 기억도 있고 긴 머리에 눈을 내리깔고 찍은 사진을 보고 일본여자처럼 생겼군, 슬퍼 보이는군, 정도밖엔 느끼지 못했다. 책과의 인연이란 건 가끔 의아하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처럼 만나게 될 책은 기어이 만나게 되는 것일까.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는 유미리만의 어록이자 사전이다. 유미리는 사랑이란 <피를 흘릴 만큼 타자에게 관여하는 일>이란 정의도 있을 수 있다. 사전에는 인생이 없다. 그래서 나만의 사전을 만들고자 생각하였다. (p. 8) 고 말한다. 사전에는 인생이 없다는 말에 공감했다. 인생이 있긴 있되 지극히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설명 뿐이라서 영 마뜩치가 않다. 사람들은 누구나 특별하다는 선한 전제를 차치하고라도 유미리는 특별하다. 그녀의 태생이 그러하고 살아온 여정이 그러하다. 일본에서 그녀의 삶은 철저히 이방인이자 주변인의 삶이었다. 늘상 불화하던 부모가 일찌감치 별거하는 바람에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유미리는 재일교포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의 외모나 분위기에서 배어나오는 독특한 무언가 때문에 어딜 가나 이지메를 당한다. 동년배 친구에게서 동성애적 감정을 느끼는가 하면 버스 안에서 성추행을 당하면서도 그걸 거부하지 않고 즐기는 자신을 발견한다. 40대 이상의 남자와만 연애를 하며 저축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러한 유별난 삶의 단면들이 하나씩의 화두를 제목으로 해서 이 책에 담겨 있고 <가족시네마>에도 담겨 있고 아마 아직 읽어보지 못한 유미리의 다른 책들 속에도 담겨 있을 것이다. 누군가 유미리에게 너의 불행을 팔아먹는 짓은 그만두라고 했다는데 유미리 자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발표하는 일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한갓 동정이나 얻자고 글을 쓰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글이라면 누군가 미리부터 싸잡아 비난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될 것이다. 유미리 자신이 소설을 쓰고 에세이를 쓰며 스스로의 불행을 좋은 글로 승화시켜 공감을 얻고 있다면 그 선에서 그녀와 그녀의 글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짤막한 단상과 정의들을 모아놓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 없는 삶의 내공이 느껴졌다. 읽다보니 그녀가 이 책을 쓸 때 즈음이 스물여덟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 나이에 생의 이면을 이만큼이나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론 슬프기도 했다. 그만큼 상처와 고통이 많았다는 이야기니까. 직업의식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유미리의 부모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연극무대 위에서 갑자기 도망을 쳐버린다거나, 가정이 있는 남자와 연애를 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거나, 수중에 돈이 들어오면 저축은 커녕 몽땅 써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야만 마음이 놓인다거나, 안정적인 인간관계나 경제상태에 대해서 일견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 보이는 그녀. 일관되고 지속적인 애정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스스로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나 기본적인 신뢰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얼마전 아이를 낳은 후 그녀가 많이 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냉소 섞인 슬픔이 아이를 통해서 어떻게 변화했을지 궁금하다. 긴장과 고독만이 좋은 글을 탄생시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생의 차가운 이면 뿐만이 아니라 따듯한 이면에 대해서도 시선을 돌려 다시 태어난 유미리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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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9-01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화라고 불리우는 영화나 명작으로 불리우는 책들을 꼭 물이 올랐을 때 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난다고 그 의미가 퇴색된다면 명화나 명작이 아니지
않을까요.^^..그런데 저 작가...이 세상 사람 아니지 않나요.?

깐따삐야 2006-09-01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처음 듣는 얘긴데요? 저만 모르는 건지 원;;;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윤대녕 지음 / 중앙일보사 / 1997년 3월
품절


요 몇 년 사이에 나는 극도의 소심증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와서 나는 내 처지에 대해서 별 불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산다는 것이 하나의 견딤, 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무엇에 대해서건 불만을 갖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이란 걸 알게 마련이다. 인생이란 애초부터 바둑판의 돌멩이처럼 제 행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아무리 기를 써고 덤벼도 좁디좁은 제 위치의 소극적인 영역, 그러니까 그 한계의 부동성을 깨닫게 되고 만다. 설혹 용케 바둑판을 벗어난다 해도 떨어지게 되는 곳은 저 신호등조차 없는 고속도로 한복판 같은 곳이다. 어쨌든 사람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견뎌야 한다. -26쪽

"저 한결 좋아진 것 같아요, 그치 않아요? 피돌기도 제법 느슨해지고 어제 막 결혼한 여자처럼 안정감이 느껴진다구요."
"그러니까 서둘러 결혼하라니까. 혼자서 마음을 조율하며 살기엔 이미 나이가 차버린 거야. 평형 감각을 잃지 않고 살려면 우선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야 해."
"아무튼 괜찮은 밤였어요. 오늘부턴 가계부를 써야지 싶어요."
"가계부?"
"왜 그렇게 놀래요? 규모있게, 빈틈없이 살고 싶단 얘기에요. 충동 구매 따윈 하지 않구요."
"충동 구맨 또 뭐야."
"그쪽에 관한 한은 충동 구매에 의한 것일수도 있다는 얘기에요."
"난 노예시장 출신이 아닌데."
"실은 방문 판매였어요."-161쪽

불행한 자와 함께 있으면 불행해지게 마련이다.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불행한 자는 행복한 자를 그냥 두지 못하는 법이다. 상대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한시도 자기 불행을 견디지 못하는 까닭이다. 아내, 승미에게서 나는 여태껏 그걸 보아왔다. 나 또한 그러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랑하는 일이 두려운 게 아니라 이제는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는 일이 두려운 것이다. 상처란, 어쩌면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욱 고통받게 마련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 자신도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모양이다. -168쪽

"이기심이란 것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란 거예요. 이쪽을 얼마간 희생하면서 어설프게 상대를 생각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기심이 나아요. 우선 상대를 위해서 말예요.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해요?"-184쪽

"왜 사람만이 시간을 상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걸까."
"절대 시간을 잃어버린 탓이야. 물고기나 새들은 저마다 몸 속에 시계를 가지고 있어. 지구의 공전 주기에 따른 시계 말이야. 그 시계는 틀리는 법이 없잖아. 일정 주기가 되면 정확하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찾아오곤 하잖아. 이쪽에서 새들이 날아가면 지구 저편에서는 새들이 날아오고, 강에서 물고기들이 떠나가면 바다에서는 물고기들이 돌아오듯이 말이야. 그런데 유독 사람만이 상대적으로 시간을 느껴." -197쪽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는 문득문득 무한이란 말을 생각해.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 무한의 전면이 보여. 벌레 구멍을 발견하게 되면 저기 은하수를 지나 무한의 후면으로 날아가 보고 싶어."
유진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섬뜩하기조차 했다.
"세계는 너무 단조롭고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어. 우리는 좁은 성냥갑 속에서 단 한 번 불이 붙기를 기다리는 성냥개비와도 같은 존재들이야. 어쩌면 죽음이 앞당겨질수록 그만큼 오래 살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누군가의 말처럼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자는 없어."
"황도십이궁. 하늘을 일주하는 열두 개의 성좌. 태양이 이 십이궁을 도는 데 꼭 일 년이 걸린다고 해. 태양계는 하나의 거대한 시계판이야. 시계판을 벗어나야만 무한의 후면으로 날아갈 수 있어."
"밤하늘은 죽음을 불러들이는 화사한 함정이야."-200쪽

"학생도 차츰 알게 될 거예요. 어른이 된다는 게 뭔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뭔지. 그게 점점 쓸쓸해져 가는 과정이란 것도 말예요. 학생 나이 때는 모든 게 명암처럼 뚜렷하고 좀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나이가 들다보면 자꾸 예기치 않은 일들이 생겨 거기 휩쓸리게 돼요. 그러다 보면 내가 아주 작은 존재라는 사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그걸 깨달아 가는 게 또한 살아가는 일이란 것도 말예요. 하지만 그애는 영영 어른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누가 가지고 놀다 얼결에 놓쳐버린 풍선 같은 애란 말이죠." -204쪽

내가 바라보는 것은 늘 전면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과거에 의해, 과거에 의지하여, 과거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삶에 있어서 뒤가 없는 앞이란 있을 수가 없다. 과거가 없는 인간은 늘 실종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란 가끔 과거라는 보금자리에 들어가 앉아 있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리하여 나는 늘 시간의 줄에 매달려 살아왔다. 과거 없이 산다고 해서 뭐 큰 지장은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살다보면 때로 음주 운전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불심검문을 받게 될 때 내가 무면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는 심정 이해하실는지. 과거란 그렇듯 자신에 관한 일종의 면허증과도 같은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은 과거는 다만 시간의 쓰레기일 뿐이라고 말들 한다. 그렇게 외면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외면할 과거가 나에겐 없다는 것이다. 현재에 속해 있으려면 그래서 나는 남들보다 두 배의 속도를 내야 한다. 때로는 가속도가 필요하다. 무면허니까. 캄캄한 뒷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꿈속에서도 미친 듯이 질주해야 한다. -240쪽

우리가 무엇을 하든 간에 시간은 끊임없이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아무리 무덤 속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시간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나 기쁨, 혹은 슬픔이나 괴로움처럼 어쩌다 끊어지고 이어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 완전히 동일한 나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차별없이 적용되고 똑같은 속도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순간순간을 깊이 사색하며 살아가는 거다. 시간은 모든 것에 평등하다. 나는 오늘 이 절대적 평등을 믿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련다. 살아가며 느끼게 마련인 견딜 수 없는 고통, 용서되지 않은 시간, 이 추운 겨울의 막막함, 혼자라는 두려움, 혹은 서툰 사랑 하나하나까지도, 이 모든 것을 뜨겁게 가슴에 끌어안고 살아가야지.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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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시절에 동아리 사람들과 어울려 자주 가던 순대집에 다녀왔다. 거의 3년만이었다. 신기하리만치 모든 것이 그대로였고 손으로 직접 돌려서 채널을 바꿔야만 했던 텔레비전만이 리모콘으로 조종하는 평면 텔레비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할머니는 모로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여긴 번쩍이는 실내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로 북적거리는 식당이 아니니까. 앉아서 테레비를 보자니 허리가 아파 누워서 보셨다는 할머니 대신 차지하고 앉은 자리가 왠지 죄송스러웠다. 실내는 더웠고 우리를 향한 선풍기는 한 대 뿐이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할머니는 나를 기억 못하시겠지만 나는 오랜만에 외갓집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반가웠다. 아는 척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도 동아리 후배들은 이 곳을 자주 찾고 있으니 운을 띄우면 금방 아실 것도 같았지만 나중에 후배들에게 술을 살 때나 그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할아버지는 어디에 가셨을까. 설마 돌아가신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순대와 곱창이 푸짐하게 들어간 찌개나 볶음의 육수가 졸아드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할아버지는 큼지막한 플라스틱 밥공기에 금방 해서 김이 폴폴 올라오는 쌀밥을 꾹꾹 눌러담으며 우리를 향해 웃어보이곤 하셨다. 밤이 늦도록 우리의 술자리가 쉬이 파하지 않을 것 같으면 말없이 다가오셔서 육수도 더 부어주시고 곱창도 더 넣어주시곤 했다. 공기밥을 추가할 때마다 천 원씩 똑부러지게 추가하는 일반 음식점들과는 달리 밥을 더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더 먹으라는 말씀도 하셨다. 비좁고 꾀죄죄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입을 타고 유명해지기까진 음식의 맛도 맛이었지만, 대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던 노부부의 넉넉한 인품도 큰 몫을 했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할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하다.

순대찌개와 머릿고기를 시킨 다음 느릿느릿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쏘이며 옛날을 회상했다. 모임을 대충 마무리하고 캠퍼스를 빠져나오면 밖은 캄캄했고 대개는 이야기가 고프고 술이 고플 시간이었다. 정말로 중요한 사정이었든, 과모임이나 소개팅을 위한 핑계였든 빠져나가는 멤버들의 자리만큼이나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은 쓸쓸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허전함을 달래주었던 건 순대찌개의 뜨끈한 국물과 구수하고 쫄깃하게 씹히는 곱창과 쌉싸름한 소주 한 잔. 불콰해진 얼굴을 마주하며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그리도 심각하게 나누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선배조차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그 때에는 자신을 알고 세상을 느끼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렇듯 쑥스럽고 촌스러운 포즈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곧잘 울며불며 선배와 싸우던 동기 H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극성스러운 여자친구 때문에 항상 피곤해하던 S는 어느 포털사이트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지랄맞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던 M 선배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공무원이 되었다. 내가 남몰래 흠모했던 D 선배는 얼마전 아빠가 되었다. 그 때 그 사람들은 거의 캠퍼스를 떠났고 몇몇은 남아 있고 새로운 얼굴들이 들어왔다. 그렇듯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집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순대찌개의 맛도 여전했다. 큼지막하게 썰어넣은 순대와 곱창하며 꼬들꼬들 맛있는 머릿고기에 시금시금한 깍두기와 배추김치까지, 할머니 구수한 손맛은 변함없었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데려가고 싶은 맛집이다. 추억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미래에도 너와 함께였으면 한다는 바람까지 포함한 것일테니까. 비좁은 골목 구석구석을 찾아들어가 맛있는 꽁치구이나 콩나물무침을 발견하고는 그 집의 단골이 된다거나, 옛날 그대로의 맛을 살려 짜장면을 만드는 허름한 중국집을 알고 있다거나 하는 사람이라면 이 집을 분명 좋아하게 될 것이다.  

돈을 주고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식당은 흔하지만 추억이란 별미까지 함께 맛볼 수 있는 식당은 흔치 않다. 대개는 잊혀지기 마련이고 어떤 기억이 비록 세련된 외양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내용물에 있어서는 빤하거나 초라하기 마련이니까. 할머니와 순대집이 사진처럼 언제까지나 늘 그대로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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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8-28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향에 온 기분이 들더라구요 간만에 찾아간 옛 단골장소에 가면요..^^
거기다가 음식맛도 예전 그대로라면 정말 황송한 기분까지 든다는...^^

깐따삐야 2006-08-2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 느낌을 잘 아시는군요. ^^

마태우스 2006-08-28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멋진 글입니다. 순대를 땡기게 만드는 데 이 글보다 더 강한 포스를 발휘하는 글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찌개나 볶음의 육수가 졸아드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이 대목이 가장 맘에 들었습니다. 멋진 표현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깐따삐야 2006-08-28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자화자찬격이 되겠지만 어젯밤 이 글을 쓰면서 저도 침을 꼴깍꼴깍 삼켰답니다. 흐흐흐.

2006-08-29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8-30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을까요?

2006-08-30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8-31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예리하시네요. 다니셨거나 가보신 적이 있다면 어쩌면 저와 스치고 지나갔을 지도 모르겠네요. ^^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강은 넓으니 독극물을 방류하라고 하는 미군을 보면서 아, 반미 영화겠구나. 항상 마지막 한 발을 쏘지 못하는 양궁선수로 등장하는 배두나를 보면서 아, 저 활로 결정적 한 발을 쏘겠구나. 다소 모자란 듯 어리버리하지만 딸이라면 사족을 못 서는 송강호를 보면서 마지막에 괴물을 처치하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겠구나. 괴물이 나온다는 것, 딸이 그 괴물에게 잡혀간다는 것 이외에는 줄거리를 전혀 모르고 극장에 갔지만 영화 서두만 보더라도 영화의 굵직한 줄기들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만큼 영화의 스토리와 메시지는 지극히 단순했다. 마치 <죠스>와 <엘리게이터>를 적당히 버무려 놓은 듯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방식 또한 에둘러 은유하기 보다는 영상을 통해 직접 눈 앞에 보여주고 대사를 통해 귀로 들려준다. 반면에 디테일은 훌륭했다. 돌연변이 도롱뇽같던 괴물은 그 세세한 생김새에 있어서 괴물 영화 중 전무후무한 이미지가 될 것이라 느꼈고 적절한 타이밍에 관객을 놀래켜대는 솜씨 또한 여간 아니었다. 특별한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단순하고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완벽하게 몰입하여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오락 영화였다.    

<괴물>의 흥행을 바라보며 한국의 관객 수준과 영화의 수준이 잘 맞아떨어진 경우라고 말한 김기덕은 옳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세계 시장에 진출해서도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 때 가서도 김기덕 감독이 세계의 관객 수준과 영화의 수준이 잘 맞아떨어진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물론 나는 그 동안 몇 편 안되긴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게 보아왔고 영화 속 독특한 은유의 미학에 대해서 감탄과 함께 존경을 느껴왔던 참이다. 그의 이번 발언은 실망스럽다. 대개의 평균적인 관객들은 해석이 아니라 오락을 위해 극장을 찾는다. 그런 영화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지만 내키지 않아 안 만드는 것이라면 그 고집대로 영화계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개척해 나가면 되는 것이고, 소수의 평론가나 매니아층의 공감과 응원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관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어내고 어느만치 배려할 줄 아는 것도 감독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해를 못하느냐, 고 윽박질러봤자 슬퍼지기만 할 뿐. 이 영화는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졌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소시민이고 괴물을 무찌르는 데 일조하는 건 경찰이나 군인이 아니라 노숙자, 여자 양궁 선수, 소시민 아버지다. 국제 깡패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미국에 대해 전 세계가 반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고 계절은 아이들의 방학이 끼어 있는 무더운 여름. 영화의 배경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한강이며 괴물은 물 속을 유유히 헤엄치다가 시원한 물살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는 줄곧 장대비가 내린다. 이만하면 시원하고 통쾌하게 즐긴 다음,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사회적 메시지까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오는 유의미한 경험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두 번이나 봤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몽땅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 배우들이라 그런지도. 변희봉이야 원체 말할 것도 없고 송강호는 완전 물이 올랐지 싶다.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게 소설이라고 한다면, 소시민보다 더 소시민스러운 사람이 송강호였다. 배우 설경구가 아무리 눈에 힘을 풀고 연기해도 어딘지 배어나오는 독기 때문에 다소 부담스럽다면, 송강호는 언제나 그 모습 자체로 편하고 좋다. 박해일은 무슨 역할을 해도 귀엽다. 뺀질거리는 외모에 쌍시옷을 뱉어대며 악을 써대는 모습을 보면 또 까분다, 는 즐거운 느낌이 들면서 하나도 밉지가 않다. 괴물을 향해 화염병을 던져대는 모습은 다소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웠지만 박해일이니까 그만한 그림이 나오는 것이지, 장동건이 하거나 양동근이 했다면 더 어색해질 것이었다. 배두나는 양궁선수라기엔 너무 바짝 마른 모습에 실감이 덜했지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올 듯 커다란 눈망울이나 야무지게 꼭 다문 입술은 축축하고 캄캄한 괴물 영화와 잘 어울렸다. 예쁘게 보이려고 하거나 폼 잡지 않고 얼굴에 온통 검은 칠을 한 채 연기에 몰두하는 모습이 좋았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너무 직접적으로 들이대는 것만 빼면(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아 그만큼 편하기도 했지만)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너무 직접적으로 들이대는 그 방식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감독의 성향이자 열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알고보면, 가장 평범한 소시민들이 말하는 방식 또한 그렇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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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8-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이 그런 말을 했군요. 수준이라... 쩝.
아무튼 님의 평에는 동감입니다.

blowup 2006-08-18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아성 이야기도 해주셔야죠. <떨리는 가슴>에 나왔을 때부터 참 맘에 들었는데. 배두나와 한번은 이모, 조카 사이로. 한번은 고모, 조카 사이로. 그런 경우도 드물듯.
느낌이 닮지 않았나요?

깐따삐야 2006-08-18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님, 처음 뵙지요? 반갑습니다. 김기덕 감독은 그 발언 때문에 어젯밤 100분 토론에까지 출연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에 대해선 방송을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뭐라고 했을지 궁금해서 지금 뉴스를 찾아보는 중이랍니다. ^^

namu님, <떨리는 가슴>은 못 보았구요. 처음에 예고편에서 얼핏 고아성을 보았을 땐 임수정인 줄 알았어요. namu님 말씀을 듣고 보니, 똘망똘망하면서도 수수하고 발랄한 모습이 배두나와 사뭇 비슷하다고 느껴집니다. 영리해 보이는 예쁜 배우였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