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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학교
이윤기 지음, 북디자인 정병규, 정재규 그림 / 민음사 / 1999년 4월
평점 :
<나비 넥타이>란 소설집을 읽고나서부터 작가 이윤기에게 관심이 생겼다. 동창생의 우스운 사연을 담은 꽤 노숙한 소설이었는데 남자 박완서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꾸려가는 솜씨가 녹록치 않았다. 나중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나서 작가 이윤기가 사실은 번역가 이윤기로 훨씬 더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미있게 읽은 후에는 이 어르신은 참 관심분야도 다양하고 자유자재로 글을 쓰시는구나, 하고 느꼈다. 그리고 이번에 <어른의 학교>를 읽고나니 에세이스트로서도 너무 멋진 사람이었다. 진짜 어른이 쓴 글이라는 느낌, 모락모락 담배연기를 뿜으며 슬렁슬렁 써내려간 듯한, 하지만 진짜 어른이 아니고서는 쓰지 못하는 글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책을 읽기는 하는데, 영화도 보기는 하는데 내용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겠다면서 자기 기억력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묻고는 합니다. 콩나물이, 제가 자라면서 마신 물을 기억하겠느냐고요...... 물을 기억하지 못해서 콩나물이 자라지 못하더냐고요...... 콩나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콩이라는 씨앗의 소양 위에 이루어진 물의 퇴적이 아니겠냐고요...... (p. 31)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불안을 말끔히 해소시켜주는 부분이었다. 산발적인 기억력 때문에 나는 책을 읽어도 소용이 없는 인간인가, 자괴감을 느낀 적도 있었고 리뷰를 써서 정리하지 못한 채 기억 저편에서 잊혀져 가는 책이나 영화 때문에 아쉬움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물을 기억하지 못해서 콩나물이 자라지 못하더냐고요...... 라고 해주시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단순하다.
정보가 쏟아지는 폼이 홍수의 도도함을 방불케 하는 이 시대에 정보를 읽는 데 뒤떨어져서는 안 되지요. 그러나 정보는 속효성 금비와 닮은 데가 있어서 그것을 흡수하는 주체를 돌보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정보가 지식이 될 뿐 지혜가 되는 일이 극히 드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나는 지금 외향성 독서를 금비, 내향성 독서를 퇴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금비 쓰지 말고 퇴비로만 농사 짓자는 주장은 이 시대에 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패륜아들에게서, 일부의 못된 신세대에게서 나는 금비에 녹아난 땅의 견본을, 효율의 허구를 보고는 합니다. (p. 35)
나도 어른들 눈에는 요즘 젊은 것들로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요즘 어린 애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말대꾸를 잘하는 아이는 숱한데 정말로 말을 잘하는 아이는 드물다. 인터넷 검색을 빠르게 하는 아이는 많은데 주어진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을 하는 아이는 적다. 아이니까 그렇지, 하고 이해하는 부분이 있지만 요즘 아이라서 더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오래도록 앉아서 책을 읽거나 가족들과 대화하기 보다는 피시방에 몰려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게임을 즐기고, 국과 나물을 먹으며 천천히 식사하기 보다는 스팸이나 라면으로 성급히 허기를 채우고 학원에 가야하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그런 건 아닐까. 금비로 자꾸만 황폐해져가는 땅에서 쑥쑥 자라 좋은 열매를 맺기는 어려울 것이다.
머리 좋고 아름다운 대학교수를 아내로 둔 어느 친구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지요. 누구와 바람을 피웠는가 하면, 대학교수 아내와는 어느 모로 보나 도무지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하찮게 보이는 여자를 상대로 바람을 피웠다지요. 그 여자를 만나 머리 끄덩이 잡아 흔들고 온 대학교수 아내가 남편에게 이랬다는군요. <나는 당신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만 가지고 이렇게 길길이 뛰는 것이 아니다. 그 여자의 어디가 나보다 나으냐? 나보다 나은 여자와 바람만 피웠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학교수 헛똑똑이 아닌가요? (p. 54)
위의 글은 일본인 친구가 조조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내가 조조를 싫어하는 이유였고, 일본인 친구가 유비 3형제를 싫어하는 이유가 내가 이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되더라는 말을 하면서 인용해 놓은 에피소드이다. 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선 심정적이 되면서 남의 일에 대해선 논리적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 간극이 바로 불화의 불씨가 되곤 하는 일을 종종 목격한다. 호오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인데 간혹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일수록 저런 함정에 더 쉽게 빠진다는 것이 재미있다.
쓰는 사람들 중에는 삶의 가죽을 취하는 사람도 있고, 살을 취하는 사람도 있고, 뼈를 취하는 사람도 있고, 골수를 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 그 근기에 따라 취한 것을 나름대로 연마한 언어의 그물막으로 싼 것이 글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먼길을 돌아 이 자리에 이른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나그네 신분으로, 벗들이 꼭대기를 차지하고 노니는 산기슭에서 이번에는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는, 그러면, 삶에서 무엇을 취할 것이냐? 가죽이냐, 살이냐, 뼈냐, 골수냐? (p. 161)
글에 대한 참으로 근사한 정의다. 재주 부리는 작가들은 많지만 곡진한 글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너는 삶에서 무엇을 취할 것이냐고. 어디 글을 쓰는 일에만 해당될 것인가. 두고두고 음미하며 스스로에게 똑바로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너는 껍데냐, 골수냐, 하고.
이 밖에도 좋은 이야기가 많은데 모두 인용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밑줄긋기로 등록해놓고 종종 읽어볼까, 하다가 사실 모두 다 밑줄을 쳐도 좋을 내용이라서 그만두었다. 세상을 하나의 커다란 학교로 보고 스스로를 낮춘 채 항상 배우는 자세로 삶에 임하는 저자의 태도가 든든하다. 세상을 탓하면 세상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중심을 나에게 가져다 놓는다면 이 세상은 배움의 원천이 된다. 그저 아무나 보고 아무개 선생님, 하는 사회가 되었지만 진짜 스승, 진짜 어른이 드문 요즘 마치 세월의 향취같은 담배 냄새가 옷깃에 은은히 배어있을 듯한, 속 깊고 눈 깊은 재미있는 어른을 한 분 만났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