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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ing students means giving them the ability to hurt you... it is part of the burden of being a good teacher... When I feel hurt by them that I know I'm suffering for good reasons.
어찌어찌하여 흘러들어간 블로그에서 발견한 글귀다. 교무실 책상 앞에 붙여놓고 오며가며 새겨야 할. 새학기에 난 다른 곳에 있겠지만. 돌아와서라도 잊지 말아야 할. 좀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아쉬움도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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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이 좀더 줄어서 바지들을 수선했다. 저주받은 하체에도 축복이 오려나. 먹음직스런 음식을 보면 군침은 도는데 식욕이 예전같지 않다. 식욕 뿐인가, 했더니 예전같지 않은 게 한둘이 아니구나. 입체감을 잃은 욕망들. 머리에 웨이브라도 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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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장 오른쪽에 놓아두었던 동자승이 왼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옮겨 놓았는데 그 다음 날 보니 또 다시 왼쪽으로 옮겨져 있고. 이상하다, 생각하고 옆으로 조금 틀어서 오른쪽으로 옮겼는데 오후에 다시 보니 왼쪽으로 다시 옮겨져 있었다. 원인은 소리 없이 강한 아빠의 고집. You Win. 먼지 닦을 생각은 안하고 쓸데없는 정리벽만 고집하는 건 아빠를 빼다박았다는 엄마의 지적. 더 정확히 말해보면 쓸데없는 걸 좋아하는 게 닮은거지. 아빠의 휴가와 나의 방학이 겹친 요즘. 엄마는 가출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셨다. 우리 부녀는 효용이니 실용이니 하는 말들과 언제쯤 화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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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녀에게'란 노래가 있다. 중학생이었을 때, 마방진이라는 별명을 가진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첫 시간에 마방진이라는 숫자게임을 설명해 주었고 마방진이라는 게임 이름은 선생님의 지루하고 기다란 얼굴과 잘 어울렸다. 보다보다 너희들처럼 공부 안하는 애들은 처음 봤다며 맞는 말만 하더니 어느 날 수업을 하다 말고 굵다란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다. 저렇게 청승맞은 노래를 저렇게 진지하게 부르다니, 우리는 총각선생님의 갑작스런 도발 앞에서 키득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틈만 나면 조용히 잠을 청하는 내게 특혜받았느냐 어쩌느냐 하면서 상처를 주었던 선생님. 당신도 밤새 라디오 듣고 엽서 쓰느라 고심하고 새벽까지 공부하는 척 해봐. 안 졸린가, 라고 말하진 못했고 그냥 묵묵히 미워하기만 했었다. 얼굴만 길면 다야, 그까짓 수업 안들어도 백점이다. 그만치 재수없던 여학생이 교사가 되었다는 걸 알면 인과응보란 말을 떠올릴까, 개과천선이란 말을 떠올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직녀에게'란 노래가 가끔 당길 때가 있다. 더욱이 누군가 노래방에서 이 노래라도 부르는 날이면 잠시나마 마음이 방긋, 웃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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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언니가 결혼을 했다. 어릴적에 헝겁을 오려서 인형 옷을 예쁘게도 만들던 언니는 이젠 옷가게를 하고 있다. 그 때 우리는 <캔디 캔디>라는 책을 좋아했다. 원래는 말랐었는데 보약을 많이 먹어 뚱뚱해졌다고 주장하던 언니의 친구는 언니에게 시리즈로 나온 그 책들을 빌려주기 시작했고 나는 언니에게서 그 책을 다시 빌려보는 식이었다. 드디어 언니가 마지막 권을 빌려온 날,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언니에게 그 책을 내가 먼저 봐야겠다고 했다. 언니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는 서로 한 마디도 안하고 함께 버스에 올랐고 집으로 오는 내내 침묵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토라진 채로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언니도 동생과 함께 총총 사라졌다. 풀리지 않은 마음으로 꽁해 있던 오후, 문득 전화벨이 울렸고 전화를 받는 순간 너 먼저 읽어, 라는 말과 함께 급하게 전화가 끊겼다.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그 길로 언니네 집으로 달려가서 <캔디 캔디>를 가져와서는 별로 재미없는 캔디의 편지들을 읽으며 먼저 읽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을 후회했다. 언니는 성씨만 다를 뿐 나와 이름이 같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착했다. 진심으로 행복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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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는 엄마한테 말하길, 엄마, 나 두부 넣고 끓인 김치국 먹고 싶어...란다. 언니도 옆에 있었을텐데 한 대 맞지나 않았을런지. 흔하다 못해 뻔하기까지 한 두부와 김치라니, 언니는 오빠의 만행에 두부처럼 하얘졌거나 김치국물처럼 붉어졌거나. 아니면 이젠 아예 그러려니 하거나. 결혼한 오빠가 찾는 음식들은 희한하다. 지극히 평범하다는 의미로 희한하다. 김치찜, 고사리나물, 계란말이, 김밥, 깻잎장아찌, 멸치조림... 좀더 나아가봤자 소면이 아닌 당면을 넣은 갈비탕 정도. 회식자리에서, 또는 출장을 다니며 온갖 산해진미를 다 먹을텐데도 언제나 전화기 너머로 칭얼대는 메뉴들은 간소하기 짝이 없다. 오빠의 투정을 어쩐지 이해할 것 같긴 한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입장에서 그런 것일 뿐, 엄마의 손맛에 길들여진 입 짧은 남자는 질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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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깨닫기 위해선 아파야만 할까. 진부한 물음. 그럼에도 간혹 던질 수 밖에 없는 물음. 책을 읽을 시간에 좀더 사람들과 부대껴야 했을까. 과연 책도 읽고 사람들과 부대꼈던 이들은 똑고른 나이테를 지닌 채 단단하게 성숙해 있을까. 더 많이 싸우고 더 많이 연애를 걸고 더 많이 좌절했다면. 하지만 그렇듯 파란만장했던 이들도 결국엔 재테크와 다이어트와 아이들의 조기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상투적인 생활인이 되고 말텐데. 왜 깨닫기 위해선 아파야만 할까. 진부한 이 물음이 꽤 신선하게 들릴 날이 올지도 모르고 이런 싱거운 생각을 하고 있다니 겨울밤은 너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