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학교
이윤기 지음, 북디자인 정병규, 정재규 그림 / 민음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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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 넥타이>란 소설집을 읽고나서부터 작가 이윤기에게 관심이 생겼다. 동창생의 우스운 사연을 담은 꽤 노숙한 소설이었는데 남자 박완서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꾸려가는 솜씨가 녹록치 않았다. 나중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나서 작가 이윤기가 사실은 번역가 이윤기로 훨씬 더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미있게 읽은 후에는 이 어르신은 참 관심분야도 다양하고 자유자재로 글을 쓰시는구나, 하고 느꼈다. 그리고 이번에 <어른의 학교>를 읽고나니 에세이스트로서도 너무 멋진 사람이었다. 진짜 어른이 쓴 글이라는 느낌, 모락모락 담배연기를 뿜으며 슬렁슬렁 써내려간 듯한, 하지만 진짜 어른이 아니고서는 쓰지 못하는 글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책을 읽기는 하는데, 영화도 보기는 하는데 내용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겠다면서 자기 기억력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묻고는 합니다. 콩나물이, 제가 자라면서 마신 물을 기억하겠느냐고요...... 물을 기억하지 못해서 콩나물이 자라지 못하더냐고요...... 콩나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콩이라는 씨앗의 소양 위에 이루어진 물의 퇴적이 아니겠냐고요...... (p. 31)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불안을 말끔히 해소시켜주는 부분이었다. 산발적인 기억력 때문에 나는 책을 읽어도 소용이 없는 인간인가, 자괴감을 느낀 적도 있었고 리뷰를 써서 정리하지 못한 채 기억 저편에서 잊혀져 가는 책이나 영화 때문에 아쉬움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물을 기억하지 못해서 콩나물이 자라지 못하더냐고요...... 라고 해주시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단순하다.

정보가 쏟아지는 폼이 홍수의 도도함을 방불케 하는 이 시대에 정보를 읽는 데 뒤떨어져서는 안 되지요. 그러나 정보는 속효성 금비와 닮은 데가 있어서 그것을 흡수하는 주체를 돌보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정보가 지식이 될 뿐 지혜가 되는 일이 극히 드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나는 지금 외향성 독서를 금비, 내향성 독서를 퇴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금비 쓰지 말고 퇴비로만 농사 짓자는 주장은 이 시대에 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패륜아들에게서, 일부의 못된 신세대에게서 나는 금비에 녹아난 땅의 견본을, 효율의 허구를 보고는 합니다. (p. 35)

  나도 어른들 눈에는 요즘 젊은 것들로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요즘 어린 애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말대꾸를 잘하는 아이는 숱한데 정말로 말을 잘하는 아이는 드물다. 인터넷 검색을 빠르게 하는 아이는 많은데 주어진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을 하는 아이는 적다. 아이니까 그렇지, 하고 이해하는 부분이 있지만 요즘 아이라서 더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오래도록 앉아서 책을 읽거나 가족들과 대화하기 보다는 피시방에 몰려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게임을 즐기고, 국과 나물을 먹으며 천천히 식사하기 보다는 스팸이나 라면으로 성급히 허기를 채우고 학원에 가야하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그런 건 아닐까. 금비로 자꾸만 황폐해져가는 땅에서 쑥쑥 자라 좋은 열매를 맺기는 어려울 것이다.

머리 좋고 아름다운 대학교수를 아내로 둔 어느 친구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지요. 누구와 바람을 피웠는가 하면, 대학교수 아내와는 어느 모로 보나 도무지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하찮게 보이는 여자를 상대로 바람을 피웠다지요. 그 여자를 만나 머리 끄덩이 잡아 흔들고 온 대학교수 아내가 남편에게 이랬다는군요. <나는 당신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만 가지고 이렇게 길길이 뛰는 것이 아니다. 그 여자의 어디가 나보다 나으냐? 나보다 나은 여자와 바람만 피웠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학교수 헛똑똑이 아닌가요? (p. 54)

  위의 글은 일본인 친구가 조조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내가 조조를 싫어하는 이유였고, 일본인 친구가 유비 3형제를 싫어하는 이유가 내가 이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되더라는 말을 하면서 인용해 놓은 에피소드이다. 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선 심정적이 되면서 남의 일에 대해선 논리적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 간극이 바로 불화의 불씨가 되곤 하는 일을 종종 목격한다. 호오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인데 간혹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일수록 저런 함정에 더 쉽게 빠진다는 것이 재미있다.

쓰는 사람들 중에는 삶의 가죽을 취하는 사람도 있고, 살을 취하는 사람도 있고, 뼈를 취하는 사람도 있고, 골수를 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 그 근기에 따라 취한 것을 나름대로 연마한 언어의 그물막으로 싼 것이 글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먼길을 돌아 이 자리에 이른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나그네 신분으로, 벗들이 꼭대기를 차지하고 노니는 산기슭에서 이번에는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는, 그러면, 삶에서 무엇을 취할 것이냐? 가죽이냐, 살이냐, 뼈냐, 골수냐? (p. 161)

  글에 대한 참으로 근사한 정의다. 재주 부리는 작가들은 많지만 곡진한 글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너는 삶에서 무엇을 취할 것이냐고. 어디 글을 쓰는 일에만 해당될 것인가. 두고두고 음미하며 스스로에게 똑바로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너는 껍데냐, 골수냐, 하고.   

  이 밖에도 좋은 이야기가 많은데 모두 인용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밑줄긋기로 등록해놓고 종종 읽어볼까, 하다가 사실 모두 다 밑줄을 쳐도 좋을 내용이라서 그만두었다. 세상을 하나의 커다란 학교로 보고 스스로를 낮춘 채 항상 배우는 자세로 삶에 임하는 저자의 태도가 든든하다. 세상을 탓하면 세상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중심을 나에게 가져다 놓는다면 이 세상은 배움의 원천이 된다. 그저 아무나 보고 아무개 선생님, 하는 사회가 되었지만 진짜 스승, 진짜 어른이 드문 요즘 마치 세월의 향취같은 담배 냄새가 옷깃에 은은히 배어있을 듯한, 속 깊고 눈 깊은 재미있는 어른을 한 분 만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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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09-01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절이라 아쉬워요.

깐따삐야 2006-09-01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한 권 소장해도 좋을만한 책인데 아쉽네요. 저도 이 책 헬스장에서 빌려왔거든요. ^^

blowup 2006-09-0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미난 헬스장이닷^^
남자 박완서라는 표현에서 데구르르.(동감)
저 '골수' 이야기는 예전에 자기소개서를 쓸 때 주제로 삼은 적도 있었죠.
(붙었던가, 떨어졌던가--;)


깐따삐야 2006-09-01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헬스장 책장에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도 있더라구요. 쿡쿡. ^^

kleinsusun 2006-09-0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스장에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가 있다구요? 우와......주인의 취향이 정말 특이한데요. 그 헬스장 한번 가 보고 싶어요.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하구요.^^ 제가 다니는 헬스장엔 온몸의 근육을 자랑하는 바디 빌더들이 표지 모델로 등장하는 월간 <휘트니스> 밖에 없답니다. ㅎㅎ


깐따삐야 2006-09-0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leinsusun님, 헬스장 시설은 열악하지만 양서는 좀 있어요.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사람들의 시선에서 소외되고 있긴 하지만요. 주인 부부는 제가 아는 분들인데 솔직히 그런 책들을 사모으거나 할 분들은 아니거든요. 저도 책의 출처가 궁금하답니다. 어디서 한꺼번에 기증받은 것도 같고. 엊그제엔 함정임 소설집과 토마스 만 단편선을 빌려왔어요. ^^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유미리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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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게으름인지, 무관심인지 그 때 그 때 나오는 신간이나 신작영화를 챙겨볼 줄 모르는 나는 뒷북을 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경린의 소설이 뜨고 있을 때 김승옥의 초기단편집을 읽는다든지 키아누 리브스가 콘스탄틴에서 열연 중일 때 매트릭스 시리즈를 다시 보며 혼자 감탄한다든지 하다가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전경린의 소설을 읽고 영화 콘스탄틴을 보며 아, 하고 뒤늦게 뭔가를 느끼곤 한다. 굳이 이렇게 하자고 룰을 정해놓은 바도 없을 뿐더러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내는 작품이야말로 이 몸이 읽을만한 것이리라, 하는 고집이나 철학도 없다.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버린 것이다.

  이번에 읽게 된 유미리의 책도 그랬다. <가족시네마>는 새로 발굴한 헌책방에서 찾았고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는 헬스장의 오래된 책들 사이에서 발견했다. 이제껏 작가 유미리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사실은 재일교포라는 것,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는 것, 유부남과 사귀다가 미혼모가 되었다는 것,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한창 주목받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내가 구한 책은 1997년 고려원에서 나온 <가족시네마>인데 지금은 절판된 상태였다. 1997년이면 고등학교 시절인데 그 때는 유미리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좀더 관심이 있을 때여서 그랬는지 유미리의 책은 읽지 않았다. 신문에서 유미리의 책을 홍보하는 기사를 보았던 기억도 있고 긴 머리에 눈을 내리깔고 찍은 사진을 보고 일본여자처럼 생겼군, 슬퍼 보이는군, 정도밖엔 느끼지 못했다. 책과의 인연이란 건 가끔 의아하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처럼 만나게 될 책은 기어이 만나게 되는 것일까.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는 유미리만의 어록이자 사전이다. 유미리는 사랑이란 <피를 흘릴 만큼 타자에게 관여하는 일>이란 정의도 있을 수 있다. 사전에는 인생이 없다. 그래서 나만의 사전을 만들고자 생각하였다. (p. 8) 고 말한다. 사전에는 인생이 없다는 말에 공감했다. 인생이 있긴 있되 지극히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설명 뿐이라서 영 마뜩치가 않다. 사람들은 누구나 특별하다는 선한 전제를 차치하고라도 유미리는 특별하다. 그녀의 태생이 그러하고 살아온 여정이 그러하다. 일본에서 그녀의 삶은 철저히 이방인이자 주변인의 삶이었다. 늘상 불화하던 부모가 일찌감치 별거하는 바람에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유미리는 재일교포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의 외모나 분위기에서 배어나오는 독특한 무언가 때문에 어딜 가나 이지메를 당한다. 동년배 친구에게서 동성애적 감정을 느끼는가 하면 버스 안에서 성추행을 당하면서도 그걸 거부하지 않고 즐기는 자신을 발견한다. 40대 이상의 남자와만 연애를 하며 저축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러한 유별난 삶의 단면들이 하나씩의 화두를 제목으로 해서 이 책에 담겨 있고 <가족시네마>에도 담겨 있고 아마 아직 읽어보지 못한 유미리의 다른 책들 속에도 담겨 있을 것이다. 누군가 유미리에게 너의 불행을 팔아먹는 짓은 그만두라고 했다는데 유미리 자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발표하는 일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한갓 동정이나 얻자고 글을 쓰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글이라면 누군가 미리부터 싸잡아 비난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될 것이다. 유미리 자신이 소설을 쓰고 에세이를 쓰며 스스로의 불행을 좋은 글로 승화시켜 공감을 얻고 있다면 그 선에서 그녀와 그녀의 글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짤막한 단상과 정의들을 모아놓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 없는 삶의 내공이 느껴졌다. 읽다보니 그녀가 이 책을 쓸 때 즈음이 스물여덟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 나이에 생의 이면을 이만큼이나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론 슬프기도 했다. 그만큼 상처와 고통이 많았다는 이야기니까. 직업의식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유미리의 부모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연극무대 위에서 갑자기 도망을 쳐버린다거나, 가정이 있는 남자와 연애를 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거나, 수중에 돈이 들어오면 저축은 커녕 몽땅 써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야만 마음이 놓인다거나, 안정적인 인간관계나 경제상태에 대해서 일견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 보이는 그녀. 일관되고 지속적인 애정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스스로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나 기본적인 신뢰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얼마전 아이를 낳은 후 그녀가 많이 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냉소 섞인 슬픔이 아이를 통해서 어떻게 변화했을지 궁금하다. 긴장과 고독만이 좋은 글을 탄생시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생의 차가운 이면 뿐만이 아니라 따듯한 이면에 대해서도 시선을 돌려 다시 태어난 유미리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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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9-01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화라고 불리우는 영화나 명작으로 불리우는 책들을 꼭 물이 올랐을 때 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난다고 그 의미가 퇴색된다면 명화나 명작이 아니지
않을까요.^^..그런데 저 작가...이 세상 사람 아니지 않나요.?

깐따삐야 2006-09-01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처음 듣는 얘긴데요? 저만 모르는 건지 원;;;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윤대녕 지음 / 중앙일보사 / 1997년 3월
품절


요 몇 년 사이에 나는 극도의 소심증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와서 나는 내 처지에 대해서 별 불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산다는 것이 하나의 견딤, 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무엇에 대해서건 불만을 갖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이란 걸 알게 마련이다. 인생이란 애초부터 바둑판의 돌멩이처럼 제 행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아무리 기를 써고 덤벼도 좁디좁은 제 위치의 소극적인 영역, 그러니까 그 한계의 부동성을 깨닫게 되고 만다. 설혹 용케 바둑판을 벗어난다 해도 떨어지게 되는 곳은 저 신호등조차 없는 고속도로 한복판 같은 곳이다. 어쨌든 사람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견뎌야 한다. -26쪽

"저 한결 좋아진 것 같아요, 그치 않아요? 피돌기도 제법 느슨해지고 어제 막 결혼한 여자처럼 안정감이 느껴진다구요."
"그러니까 서둘러 결혼하라니까. 혼자서 마음을 조율하며 살기엔 이미 나이가 차버린 거야. 평형 감각을 잃지 않고 살려면 우선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야 해."
"아무튼 괜찮은 밤였어요. 오늘부턴 가계부를 써야지 싶어요."
"가계부?"
"왜 그렇게 놀래요? 규모있게, 빈틈없이 살고 싶단 얘기에요. 충동 구매 따윈 하지 않구요."
"충동 구맨 또 뭐야."
"그쪽에 관한 한은 충동 구매에 의한 것일수도 있다는 얘기에요."
"난 노예시장 출신이 아닌데."
"실은 방문 판매였어요."-161쪽

불행한 자와 함께 있으면 불행해지게 마련이다.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불행한 자는 행복한 자를 그냥 두지 못하는 법이다. 상대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한시도 자기 불행을 견디지 못하는 까닭이다. 아내, 승미에게서 나는 여태껏 그걸 보아왔다. 나 또한 그러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랑하는 일이 두려운 게 아니라 이제는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는 일이 두려운 것이다. 상처란, 어쩌면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욱 고통받게 마련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 자신도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모양이다. -168쪽

"이기심이란 것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란 거예요. 이쪽을 얼마간 희생하면서 어설프게 상대를 생각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기심이 나아요. 우선 상대를 위해서 말예요.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해요?"-184쪽

"왜 사람만이 시간을 상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걸까."
"절대 시간을 잃어버린 탓이야. 물고기나 새들은 저마다 몸 속에 시계를 가지고 있어. 지구의 공전 주기에 따른 시계 말이야. 그 시계는 틀리는 법이 없잖아. 일정 주기가 되면 정확하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찾아오곤 하잖아. 이쪽에서 새들이 날아가면 지구 저편에서는 새들이 날아오고, 강에서 물고기들이 떠나가면 바다에서는 물고기들이 돌아오듯이 말이야. 그런데 유독 사람만이 상대적으로 시간을 느껴." -197쪽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는 문득문득 무한이란 말을 생각해.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 무한의 전면이 보여. 벌레 구멍을 발견하게 되면 저기 은하수를 지나 무한의 후면으로 날아가 보고 싶어."
유진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섬뜩하기조차 했다.
"세계는 너무 단조롭고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어. 우리는 좁은 성냥갑 속에서 단 한 번 불이 붙기를 기다리는 성냥개비와도 같은 존재들이야. 어쩌면 죽음이 앞당겨질수록 그만큼 오래 살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누군가의 말처럼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자는 없어."
"황도십이궁. 하늘을 일주하는 열두 개의 성좌. 태양이 이 십이궁을 도는 데 꼭 일 년이 걸린다고 해. 태양계는 하나의 거대한 시계판이야. 시계판을 벗어나야만 무한의 후면으로 날아갈 수 있어."
"밤하늘은 죽음을 불러들이는 화사한 함정이야."-200쪽

"학생도 차츰 알게 될 거예요. 어른이 된다는 게 뭔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뭔지. 그게 점점 쓸쓸해져 가는 과정이란 것도 말예요. 학생 나이 때는 모든 게 명암처럼 뚜렷하고 좀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나이가 들다보면 자꾸 예기치 않은 일들이 생겨 거기 휩쓸리게 돼요. 그러다 보면 내가 아주 작은 존재라는 사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그걸 깨달아 가는 게 또한 살아가는 일이란 것도 말예요. 하지만 그애는 영영 어른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누가 가지고 놀다 얼결에 놓쳐버린 풍선 같은 애란 말이죠." -204쪽

내가 바라보는 것은 늘 전면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과거에 의해, 과거에 의지하여, 과거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삶에 있어서 뒤가 없는 앞이란 있을 수가 없다. 과거가 없는 인간은 늘 실종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란 가끔 과거라는 보금자리에 들어가 앉아 있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리하여 나는 늘 시간의 줄에 매달려 살아왔다. 과거 없이 산다고 해서 뭐 큰 지장은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살다보면 때로 음주 운전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불심검문을 받게 될 때 내가 무면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는 심정 이해하실는지. 과거란 그렇듯 자신에 관한 일종의 면허증과도 같은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은 과거는 다만 시간의 쓰레기일 뿐이라고 말들 한다. 그렇게 외면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외면할 과거가 나에겐 없다는 것이다. 현재에 속해 있으려면 그래서 나는 남들보다 두 배의 속도를 내야 한다. 때로는 가속도가 필요하다. 무면허니까. 캄캄한 뒷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꿈속에서도 미친 듯이 질주해야 한다. -240쪽

우리가 무엇을 하든 간에 시간은 끊임없이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아무리 무덤 속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시간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나 기쁨, 혹은 슬픔이나 괴로움처럼 어쩌다 끊어지고 이어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 완전히 동일한 나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차별없이 적용되고 똑같은 속도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순간순간을 깊이 사색하며 살아가는 거다. 시간은 모든 것에 평등하다. 나는 오늘 이 절대적 평등을 믿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련다. 살아가며 느끼게 마련인 견딜 수 없는 고통, 용서되지 않은 시간, 이 추운 겨울의 막막함, 혼자라는 두려움, 혹은 서툰 사랑 하나하나까지도, 이 모든 것을 뜨겁게 가슴에 끌어안고 살아가야지.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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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영옥 옮김 / 범우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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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읽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원인>은 먼저 읽었던 <지하실, 하나의 탈출>의 전편이라고 보면 되겠다.

작가의 자전소설 5부작 중 하나인 이 책도 여전히 분위기는 어둡고, 주인공은 우울하며, 특별한 스토리로 진행되기 보다는 불만과 불신에 찬 어조의 독백으로 그득하다.

실제로 책 속에서 만난 작가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 것 같지는 않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일찍이 사생아로 태어나 부모의 정상적인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고 어릴적부터 외조부의 엄격한 교육 아래 성장했다.

물론 외조부는 남다른 선견지명으로 어린 베른하르트에게 예술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고는 그를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에 보내고 개인 교습으로 영어와 피아노를 배우게 하는 등, 외손자를 예술가로 키우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예술가란 타고난 영혼을 기반으로 해서 스스로 창의적인 힘을 발휘하는 인간이지, 타인의 요구나 특별한 교육에 의해 제조되거나 길러질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던가.

베른하르트는 자신을 거두어 준 외할아버지에 대해 늘 고마워하고 있었지만 '네 할아버지가 피아노 교습비를 대주는 것은 창밖으로 돈을 던져버리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피아노 강사의 독설이 맞다고 생각할 정도로 외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실제로 자유로운 분위기만 조성된다면 곧잘 놀라운 연주 솜씨를 발휘하곤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악보대로는 그 어떤 곡도 온전히 연주해내지 못하는 기이한 천재였던 것이다.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술을 진탕 마셔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영화 <술고래>의 미키 루크처럼.

나치즘에 이어 카톨릭이 장악해버린 오스트리아의 파시즘적 교육 아래서 베른하르트는 끝없이 자살에의 충동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인간의 정신을 파멸시키는 중고등교육 단계를 없애고 대중을 위한 초등학교와 개별 인간들을 위한 대학교만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나 자신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입장이지만, 어쩌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 즉 상식은 초등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하기 전까지의 그 기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것에 맞게끔 진로를 결정하는 탐색의 기간, 유예의 기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에는 청소년기는 자아탐색과 진로결정의 시기라고 버젓이 나와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슨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심사숙고하는 시간보다는 부모님의 뜨거운 기대와 가차없이 등수를 매겨대는 시험성적에 목을 매며 영어 문장을 외우거나 수학 문제를 푸는 시간이 훨씬 더 많고 정말로 배짱이 두둑하거나 본래 독하게 타고난 인간이 아닌 한, 사회와 학교와 부모가 강요하는 이러한 룰에서 비껴나 뚜벅뚜벅 자기 길을 걷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중고등학생들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란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방학 때 아무 생각 없이 실컷 놀다보면 문득 공부가 하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 순간에 책을 펴면 그것이 소설책이었든 새학기 교과서였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술술 읽히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스스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기까지 가만히 놔두고 지켜볼 수 있는 부모란 결코 흔치 않다.

베른하르트는 계몽이 되지 않은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어른이 되어 또 다시 계몽이 안된 채로 자식을 낳고, 결국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사이클 안에서는 사회가 결코 변화하거나 발전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똑똑한 목소리들은 자꾸만 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이들은 갈수록 더 힘이 든다 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교육 수준과 의식 수준이 항상 상응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부모와 교사와 사회와 국가는 베른하르트라는 예민하고 내향적인 천재가 힘들게 맞서야 했던 지독한 적(敵)들이었다.

거대하고 굳건한 체제에 쉽게 적응할 수도, 그것을 하루 아침에 전복시킬 수도 없는 어린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절망에 찬 독백밖에 더 있겠는가.

그가 그 현실 자체로 만족했거나, 비인간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 대해 비판의 눈을 뜨지 않았다면 행복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베른하르트는 세상에 대해 절망한만큼 세상을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그의 독백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어두운 분노로 차 있지만 글을 써서 그것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이미 대사회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고 세상을 정말로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읽기에 쉽거나 즐거운 책은 아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를 만난다는 것은 깨끗하게 닦아놓은 거울로 더러운 세상을 비춰보며 나 자신까지 돌아볼 수 있는, 바닥까지 내려가 진실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의 또 다른 책을 어서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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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바쁜 일상을 꾸려가다 보면 불현듯 이게 아닌데, 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간헐적으로 피어오르는 무료함이나 우울함과는 다른, 좀더 근본적인 낙담 내지 환멸같은 것.

이후 한동안은 온 심신이 물먹은 스펀지처럼 축축하고 무거운 상태로 지속된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가보며 실컷 마음의 호사를 누린다 해도, 그것들로 인해 잠시잠깐 까슬까슬하고 말랑말랑한 심신 상태를 되찾는다 해도, 언젠가 또 다시 엄습해 올 그 느낌에 대해서 마음을 놓지 못하곤 한다.

<키리쿠, 키리쿠>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갓 열살을 넘긴 외사촌 동생은 우리도 저렇게 살면 참 좋겠지? 라고 물어왔다.

주인공 키리쿠는 아프리카 소수 부족의 어린이다.

키리쿠네 마을 사람들은 손수 파종을 해서 먹거리를 마련하고, 흙을 빚어 만든 그릇을 읍내에 내다팔아 돈을 버는 등, 육체노동을 통한 단순하고 원시적인 삶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집에는 문이 없으며 한 집의 아기를 이 사람이 돌보아 주기도 하고 저 사람이 돌보아 주기도 한다.

그들은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나면 기쁨과 감사의 의미로 모닥불을 피워놓고 춤을 추며 축제를 연다.

<월든>을 다시 읽으며 마치 고갱의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것처럼 화면 가득히 열기와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던 <키리쿠, 키리쿠>를 떠올렸고 어쩌면 내가 원하고 있는 삶도 이런 것이 아니었느냐, 고 조심스럽게 반문해 보는 것이다.

학부시절에 강독했던 <월든>은 <더블린 사람들>이나 <폭풍의 언덕>등 그 시절 청춘의 낮밤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던 다른 책들과 더불어 졸업과 동시에 내 시야에서 멀어져 버렸다.

시험은 코앞인데 굳이 캠퍼스 근처의 산을 오르게 하셨던 어떤 교수님은, 늘상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다보니 급격한 체력저하를 겪으며 헥헥거리고 있던 우리에게 던킨도너츠를 쥐어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아... 여러분, 산에 오르면서 무얼 보았나요?"

나야 물론 입가에 허연 설탕가루를 묻힌 채 교수님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고 눈만 껌뻑이며 묵묵부답이긴 다른 학우들도 매한가지였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교수님은 허둥거리며 내려가는 우리를 멈춰서게 하신 다음 다양한 나무 이름을 알려주셨고 산을 오르는 목적 그 자체보다 과정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교수님다운 말씀을 해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에 와서는 나무 이름은 물론이고 올랐던 산 이름조차 가물가물하고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유인물, 이라는 교수님 별명과 교수님이 우리에게 던졌던 저 질문 뿐이지만, 대놓고 지루해하던 수강생들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월든>의 문장에 심취해서 창 밖으로 아련한 눈빛을 보내시던 교수님은 분명 이 책을 사랑하셨고 우리를 지도하느라 참 외로우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졸업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다시 만난 <월든>은 나로 하여금 Simplicity, simplicity, simplicity! 라는 책 속의 외침을 상기시키며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2년간 자연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는 삶을 몸소 보여준 소로우는 누구든 한 번쯤 꿈꾸게 되는 무소유의 삶을 직접 실천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기록을 아름다운 한 권의 책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두 번 훌륭하다.

당대의 엘리트였다는 조건이 그가 선택한 소박한 삶을 더욱 미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한 점이 없지 않지만, 혹자는 언제고 다시 사회로 편입하면 어떤 좋은 자리든 주어질만한 상황이 아니었냐며 비판할 때도 있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당장 코앞에 주어진 부와 명예, 세속적 성공을 포기하고 숲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 쓰는 일에 비하면 어떤 것을 직접 사는 일은 훨씬 더 어렵고도 모험을 요하는 일이다.

물질과 자본으로 움직이는 현대에도 <월든>이나 헬렌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과 같은 책이 주목받는 것을 보면, 대개 사람들의 진심 속에는 이 갑갑하고 기계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맨손과 맨발이 허용되는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욕구가 내재해 있는가 보다.

나 역시 내 뿌리가 농촌에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란 게 본래 그런 것인지, 밭이랑에 한가득 캐서 모으던 감자라든가, 고추 모종에 주전자로 물을 주던 풍경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누군가를 속이는 일이 될까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일 없이 내가 흘린 땀방울만큼 먹거리를 얻고 흘린 땀에 비해 수확량이 적더라도 쓰임새를 줄이면 그만이라고 일갈하며 다음해를 기약하는, 정직하고 엄격한 삶 속에 나를 내맡기고 싶을 때가 있다.

실상 가진 것도 별로 없으면서 그만큼의 가진 것도 버리기가 아깝고도 두려워서 늘 공상만으로 그치는 일이 허다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모른다.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발 벗고 동조해주고 이해해준다면 정말 일을 저질러 버릴지도.

논리나 이성보다는 여전히 직관과 감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나이기에 전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다.

어쩌면 나란 인간은 그때부터 비로소 신나게 살지도 모른다.

<월든>. 오로지 축적하는 데에만 몰두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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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8-03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깐따삐야님 제가 그 동조자해드리면 안되겠니(요)? 꾸벅~ 초면에 넘 쌨죠? ㅎㅎ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저너머 행복을 쟁취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음먹은대로 실행하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그만큼 얻고자 하는 것이 절박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죠...좋은 글 잘 봤어요.^^

Mephistopheles 2006-08-03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응원은 해드릴 수 있습니다...^^

깐따삐야 2006-08-0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런스님, 반갑습니다. 절박하지 않아서, 용기가 없어서, 그냥 이러고 살고 있습니다. 흐흐.

메피스토님, 고맙습니다. ^^

개츠비 2006-08-05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든, 다시 읽으셨군요. 반갑네요.. 깐따삐야님 글로 만나보는 월든...실은 지루한면이 없잖지만, 대게 고전은 그러면서도 가장 기억속에 오래남는 책이니까요..^^

깐따삐야 2006-08-0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retre7님, 고전에 대한 느낌, 진심으로 동감해요. 읽을 땐 지루한 면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나중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고전 뿐인 것 같습니다. 날씨가 무척 덥지요? 건강 조심하세요. ^^

비로그인 2006-09-0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버드대 총장이 졸업생들에게 권하는 책이라고 하던데, 이 책을 다 읽어내지 못한 게 아주 민망합니다만 다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리뷰.

깐따삐야 2006-10-3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좋은 책이긴 한데 다시 읽어봐도 역시 지루한 부분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생활이 너무 뻑뻑하게 돌아간다 싶을때 펼쳐보면 찰랑찰랑 파문이 일기도 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