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수첩 2 알베르 카뮈 전집 1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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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의 결점과 대면하도록 만들기보다는 그 자신에 대한 호의적인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대개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최선의 이미지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법이다.-18쪽

H. 하이네의 묘비명 : "그는 브렌타의 장미꽃들을 사랑했다."-29쪽

조이스에게 있어서 감동적인 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런 작품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도의 비장함 - 이건 예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과 문자 그대로의 예술적 감동은 구별해야 한다.-46쪽

과학은 기능을 설명할 뿐 존재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예 : 왜 꽃의 종류는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인가?-50쪽

그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창녀에게 마음이 있지만 그녀와 자지 않는다. 수중에 천 프랑짜리 지폐 한 장뿐인데 차마 그녀에게 잔돈을 거슬러달라고 할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54쪽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라고 스탕달에 이어 니체가 말했다. 그러나 행복 그 자체가 없다면 아름다움이 무엇을 약속할 수 있을까?-74쪽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결혼에서 찾아야, 다시 말해 환상을 갖지 않는 사랑을 해야 옳다. -125쪽

예술에는 수줍음의 기미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예술은 만사를 직접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132쪽

나는 왜 예술가일 뿐 철학자가 아닐까? 왜냐하면 나는 관념이 아니라 말에 의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181쪽

도덕을 만나기 전에 사랑을 먼저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슴을 찢는 아픔을 먼저. -310쪽

나쁜 평판은 좋은 평판보다 견디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좋은 평판은 끌고 다니기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거기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일체의 과실은 큰 죄로 간주된다. 나쁜 평판을 받고 있을 때 과실은 용서할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313쪽

늙는다는 것은 열정passion에서 연민compassion으로 옮겨가는 것이다.-399쪽

지식인들은 이론을 만들고 대중은 경제를 만든다. 결국 지식인들은 대중을 이용하고, 대중을 통해서 이론은 경제를 이용한다. -416쪽

모든 완성은 속박이다. 그것은 더 높은 완성을 강요한다. -4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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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22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봐도 깐따삐야님은 읽은 책이 밀리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시 되고 있군요.

깐따삐야 2008-01-22 08:45   좋아요 0 | URL
밀렸기 때문에 거의 빛의 속도로 읽어내고 있습니다. 메피님 이벤트 경품이 그 중에서도 가장 재밌네요.^^
 
김혜리 기자의 영화야 미안해
김혜리 지음 / 강 / 200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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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보다 평론을, 영화보다 영화평을 더 즐기는 내게 김혜리의 책은 조금씩 아껴 먹어야 할 희귀한 쿠키 같았다. 금방 질리는 단맛이 아니다. 귀찮은 부스러기도 없다. 왼쪽 서랍 속에 넣어두고는 두 개씩만 꺼내서 묽게 탄 커피 한잔과 함께 먹고픈 담백한 쿠키. 책 속에서 그녀가 소개하고 있는 영화의 1/3이나 다 보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리의 글을 읽고 보려던 영화를 취소한 적도 있었다는 작가 윤성희의 말처럼 이것으로 충분한 느낌. 건조한 해석에 그치는 따분한 평론이 아니었다. 글쓰기의 재능과 철저한 조탁 과정이 조화를 이룬, 그녀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한 근사한 에세이였다. 이동진의 글이 하얀색 쵸콜릿이라면 김혜리의 글은 다갈색 쿠키다. 고소하면서도 매우 성실한 맛. 

 '비포 선라이즈'의 시간은 바닥 없는 잔에 찰랑이는 와인과 같았으나 '비포 선셋'의 시간은 일초 일초 우리의 심장 위를 저벅저벅 지나간다.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의 연기는 연기 같지도 않아서 어디선가 연기상을 준다면 모욕으로 느껴질 정도다. 5분이 넘는 롱테이크와 잦은 오버랩을 감당하는 대사의 완벽한 구현은 기교를 떠난 집중력과 신뢰의 산물이다. -p.123 이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잖아. 남의 글을 읽으며 무릎을 치며 환희를 느끼는 순간이 많지 않다. 시간의 풍화작용과 함께 사그라드는 영상과, 잦은 리뷰청탁을 감당하는 평론의 완벽한 구현은 기교를 떠난 그녀의 집중력과 신뢰의 산물이리라.

 '디 아워스'는 과거와 현재이면서 동시에 미래일 수 있는 시간을 질투하는 영화다. 그리고 질투를 통해 삶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것은 아주 깊이 가라앉아 기도와 비슷해진 사랑이다. 자기를 버리고 눈을 감아 빛을 버리고 좁은 우물의 바닥 같은 평화를 대가로 얻는. -p.196 '버지니아 울프'의 니콜 키드만, '로라'의 줄리언 무어, '클래리사'의 메릴 스트립은 제각기 뭔가에 사로잡히거나 호소하려는 듯한 독특한 눈빛으로 나를 매혹시켰다. 사실 나는 이 영화에서 '여성' 또는 '인생'이라는 두리뭉실한 거대 화두 밖에 캐취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세 여인에게서 구도자의 사랑을 봄으로써 영화를 한 단계 더 승화된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사색의 표정이 고인 여윈 얼굴로 조용히 움직이는 그는 여성의 존경심과 모성애를 동시에 자극했다. ... '애수'의 로버트 테일러는 결코 여자를 울리거나 배신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온화한 미남자의 이미지를 스크린 안팎에서 체현하면서 1930, 40년대 여성 스타들이 선호하는 '무난한' 상대역으로 상종가를 누렸다. -p.247 게리 쿠퍼와 로버트 테일러에 대한 그녀의 평이다. 헐리웃 꽃미남 스타들의 계보와 변천사를 읊으며 우리가 디카프리오 때문에 '타이타닉'을 두 번 보거나 장동건에게 반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봤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옹호해주는 멋진 그녀. 우리 엄마가 찰슨 브론슨의 시니컬한 콧수염에 여태 열광하는 것도 영화의 가장 마술적인 모멘트에 동참하는 것이라며 이해해주는 미더운 그녀. 아! 용솟음치는 무한공감이여.

 리버 피닉스의 생애는 패딩턴의 북극 탐험기에 나오는 아이로니컬한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이글루 안에 갇힌 한 남자가 내쉬는 숨마다 입김이 얼어붙어 결국 점점 다가든 벽에 갇혀 죽었다는 일화. ... 리버 피닉스는 그저 못다 핀 배우였고 착하고 총명했으나 치명적인 실수를 피하지 못한 젊은이였을 뿐이다. -p.332 '아이다호'의 아름다운 청년, 리버 피닉스를 향한 연민 어린 따듯한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가 변덕스런 반항아에 마약중독자였다는 사실은 '배우'라는 타이틀에 비추었을 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타고난 아우라로 관객을 사로잡는 배우가 있다. 리버 피닉스는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청순한 아우라에, 안타까운 요절이 플러스 됨으로써 못다 핀 청춘으로 영원히 신화화 되었다.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서 침묵해 버린 그는, 삶의 전후로 경쟁자가 전무한 배우다. 김혜리가 리버 피닉스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반가웠다.

 이밖에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휴 그랜트의 매력을 '게으름뱅이', '세속적 이기주의자', '회의주의자', '네추럴형의 유혹자'라는 네 가지 카테고리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페이지도 흥미로웠고 샤를리즈 테론과 제레미 아이언스의 숨은 가치에 대해 짚어주는 대목도 관심있게 읽었다.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배우들이나 감독들을 모두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했듯 그녀의 글은 그 자체로 재미있고 성실해서 이름들의 낯설음을 무마하고도 남더라는. '영화야 미안해'라는 책 제목처럼 친절하고도 겸손한 글이다. 편견 없이 마음을 열고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날카로운 예지의 향을 품고 있는 따끈한 쿠키 같은 리뷰를 만날 수 있다. 바삭바삭 음미하며 한번 더 읽어보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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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8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8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01-18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혜리의 글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읽을 때마다 참 많이 공감했던 것 같아요- 밀양 리뷰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 책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깐따삐야님 덕에 맛을 봤네요 흐흐

깐따삐야 2008-01-19 00:00   좋아요 0 | URL
아무래두 영화의 전체적인 실루엣을 잡아가는 건 이동진이 더 탁월한 것 같은데 반짝이는 직관이나 성실한 글쓰기 면에서는 김혜리가 좀더 나은 것도 같아요. 남녀의 차이일까요? ^^;
재미도 있고 예상 외의 정보도 많은 좋은 책이었어요.

웽스북스 2008-01-19 00:31   좋아요 0 | URL
어, 어, 나 계속 알라딘 들어왔었어요 ㅋㅋㅋ 덧글 달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 흠흠 ㅋㅋㅋ

라로 2008-01-19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다음달에 주문하려고 찜했는데~.
다들 넘 좋다고 해서,,,역쉬~.^^

깐따삐야 2008-01-19 01:29   좋아요 0 | URL
이동진&김혜리의 메신저 토크라는 걸 종종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그때 이름을 알게 됐는데 이 책 읽으면서 제가 못 보고 지나쳤거나, 미처 생각도 못 했던 것을 짚어내는 데에 감탄했어요.^^

비로그인 2008-01-19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버 피닉스의 비유가 충격적이네요.
저는 마약하는 사람은 어떤 직업이건 용서하지 않는데 이 책을 읽어보고 싶게 하는군요.
거기가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휴그랜트에 대한 분류도 은근히 끌리는군요.
리뷰,잘 읽고 갑니다.
더불어 추천도...

깐따삐야 2008-01-20 22:29   좋아요 0 | URL
호흡하는 동시에 죽어가는 남자. 참으로 적확한 비유죠?
리버 피닉스는 마약중독자였고 휴 그랜트는 희대의 바람둥이라지만 저는 어쩐지 두 배우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는 너무 아름다웠고 '어바웃 어 보이'의 휴 그랜트는 너무 귀여웠어요.^^

비로그인 2008-01-19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브리핑에 왼쪽 서랍 속의 쿠키라는 제목을 보고 또 들어왔어요.
오른쪽 서랍에는 뭐가 들었을까 궁금해서요.

깐따삐야 2008-01-20 22:30   좋아요 0 | URL
오른쪽 서랍엔 달콤하고 예쁘장한 손님용 쿠키가 들어있지 않을까요? ^^

순오기 2008-01-21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는 영화매니아들이 많아서 참 좋아요. 아마도 책읽기와 마찬가지로 정적인 취향과 어울려서 그럴까 생각되지만. 이 책과 이동진 책 보관함에 담아요. 구입은 2월에~ㅎㅎ

깐따삐야 2008-01-20 22:33   좋아요 0 | URL
근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몸은 가만히 있지만 머리하고 가슴은 아주 역동적으로 움직이잖아요! ^^

Mephistopheles 2008-01-2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고 밖에는..^^

웽스북스 2008-01-20 21:52   좋아요 0 | URL
나두나두 여기 한표 ㅋㅋ
우리 깐따삐야님, 주말에 또 어디 놀러가신 거에요~~~
(어린아이처럼 깐따삐야님만 사라지면 보채는 웬디 ㅋㅋ)

Mephistopheles 2008-01-20 22:31   좋아요 0 | URL
사실 웬디양님이 없어져도 깐따삐야님이 보채긴 합니다.

깐따삐야 2008-01-20 22:35   좋아요 0 | URL
메피님- 이 책 재밌어서 후다닥 읽어버렸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웬디양님- 이젠 웬디가 '왠지'처럼 일상어가 된 것 같아요. ㅋㅋ

프레이야 2008-01-20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론을 잘 읽지 않지만 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님의 표현을 빌어, 겸손하고 고소한 쿠키 같은 글이에요.
마구 읽어보고파져요.^^
전 제레미 아이언스의 매력을 잊지 못해요. 특히 롤리타,에서..
그리고 '토탈이클립스'에서의 디카프리오를요.. 홍홍.. 그래도 되는거군요.
김혜리의 글에서 깐따님이 느낀 것처럼요.^^

깐따삐야 2008-01-20 22:41   좋아요 0 | URL
이동진의 글처럼 유려하진 않은데 좀더 촘촘한 매력이 있어서 좋았어요.
제레미 아이언스는 '데미지'란 영화에서 처음 보고 예사롭지 않은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오... '토탈 이클립스'에서 디카프리오는 너무도 완벽한 랭보였어요. 권총으로 손바닥에 구멍 내는 장면 등에선 조금 버거웠는데 그래도 다시 보고픈 영화 중 하나에요.^^

혜성 2008-01-2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이동진의 글보다 김혜리의 글을 좀 더 좋아해요.^^ 이번에 클로버필드 쓴 것 보니까 더욱...ㅋㅋ 특히 김혜리는 허진호감독에 대해선 우리나라 최고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행복> 리뷰는 어쩜 그리도... 그나저나 책 나온 줄 모르고 있었는데 감사해요^^

깐따삐야 2008-01-27 22:57   좋아요 0 | URL
김혜리의 글을 좋아하신다면 이 책도 재미있게 읽으시겠어요.^^
 
황금 물고기
황시내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저자 황시내는 황순원의 손녀이자 황동규의 딸이다. 처음에는 그 화려한 배경과 클레의 황금물고기가 그려진 예쁜 커버에 이끌렸다. 작곡을 전공한 후 미술사를 공부했다는 독특한 이력에도 호기심이 갔다. 유전과 환경의 세례를 골고루 받은 이 행운의 여인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과거 독일로 떠났던 전혜린에게서 잿빛 우울을 보았다면, 황시내에게서는 황금빛 그리움을 보는 듯 했다. 클레의 <황금 물고기>는, 가끔 화집이나 포스터로 마주칠 때마다 의뭉스레 한쪽 눈을 꿈쩍이며 내게 아는 척을 하는 것만 같았다. 남몰래, 내게만. 그리고 그 인사를 받을 때마다 그를 가까이서 만져보고 싶다는 갈망이 나의 내부에서, 마치 막 부풀기 시작한 오븐 속의 효모처럼 마구 꿈틀거린다. 다다르고자 했으나 한 번도 이룰 수 없었던 나의 열망, 나의 황금 물고기.(p.56) 저자는 청춘의 많은 시간을 이국 땅에서 홀로 외롭게 보냈다. 학문과 예술에의 열망으로 가득차서. 그녀는 공부하고 여행하며 마주쳤던 갖가지 추억들을 이 묵직한 한권의 에세이집 속에서 조곤조곤 되짚는다. 깐깐한 자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갈하고도 상냥한 목소리로.

 Freundin이라는 단어에는 특수한 울림이 있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세상 어느 단어보다도 다정한 느낌을 주는 낱말. 그러나 때로는 이 부드러운 단어가 얼마나 날카롭게 사람의 가슴을 찌를 수 있는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실은 얼마나 우리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지.(p.79) 섣부른 친절로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는 한발짝 늦게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하는 그녀. 그렇듯 아름다운 것들이 감추고 있는 가시에 찔리고, 독에 취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청춘이 지닌 찬란한 슬픔을 깨닫는 것이겠지.

 술을 마실 때면 언제나 2차로 평양 빈대떡을 부쳐주는 주점으로 향했다는 그. 어린 시절 친척들이 모일 때면 우리는 늘 주교동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평양냉면과 불고기를 먹곤 했다.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한 그 가게에는 언제나 평안도 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중노인들이 식탁마다 둘러 앉아 평안도 식으로 조리한 갈비를 뜯고 평안도 식으로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서울은 그들에게 어떻게 해봐도 낯선 도시였을까.(p.95) 여기서 '그'는 저자의 할아버지인 황순원을 가리킨다. 어쩌면 먼 곳에의 향수도 태생적이란 느낌이 든다. 피와 살에 섞여 면면히 내려져오는 유전적 그리움. 그 실향민 의식은 재능과 열망이 있는 사람을 예술가로 키운다. 생활인의 가면 뒤에서 저마다 향수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예술을 즐기는 가운데 고향을 본다.

 뭐랄까.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것 하나 없지만, 그리고 아직 세상에 보탬이 될 만한 일 하나 한 것 없지만 왠지 이제는 드디어 온전히 세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은 느낌. 삶의 주인이 된 듯한 느낌.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이라는 클럽의 준회원이었다가 어느덧 정회원 자격을 부여받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어. 그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이었을지? 아마도 여태까지 쌓아온 경험들과 추억들이 아니었을까. 예전엔 그리도 심각하고 목숨 걸 만큼 절박하던 일들이 지나고 보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된 데서 오는 느긋함. 웬만한 일은 이제 큰 집착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여유로움......(p.205) 삼십대에 들어선 저자의 고백에 아직은, 이라고 갸웃하면서도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요즘 나의 고민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고. 언제쯤이면 나도 집착 없이, 느긋하게 세상의 정회원이 될 수 있을까. 기다림의 순간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그러나 그 끝이 공갈빵처럼 텅 빈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p.219) 내 기다림의 끝도 구멍 뚫린 공갈빵 또는 도너츠 같아서 숭숭 통하는 바람에 결국 이런 것이었어? 라며 쓸쓸해질까.

 한 번 버려진 길들은 영원히 No longer an option으로 남는다. 만일 선택한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가던 길을 되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예전에 선택할 수도 있었을 처음 그대로의 길을 만나지는 못한다. 우리가 다른 길을 걷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비가 내리고 낙엽이 쌓이고 길가에는 잡초들이 자라고 하는 것이다.(p.223) 왠지 이 문장 다음에는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라는 즐거운 편지의 싯구가 이어져야 할 것 같다. 가지 않은 길은 기억 속에서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겨두고 지금 선택한 길을 성실히 걷는 수 밖에. 쉽사리 성실을 허락치 않는 끈적끈적한 그리움으로 이따금 삶의 궤도를 다시 돌아보곤 하는 내게 꼭 필요한 충고이다.  

 뛰어난 에세이스트 한 사람을 발견한 느낌. 더불어 이 책 속에는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들과 다양한 음악에 대한 소개가 함께 담겨져 있다. 루이제 린저와 4월이라는 교집합 앞에선 사뭇 반가워지기도 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사방으로 가지를 드리우듯 그녀의 감수성엔 한계가 없어 보인다. 열린 지성과 다정한 성품. 게다가 이렇게 참하기까지 하다. 

 황시내 / (네이버 인물정보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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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1-1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림의 순간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그러나 그 끝이 공갈빵처럼 텅 빈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p.219)

저는 지금 알아가고 있는것 같아요.
제 기다림의 끝이 공갈빵처럼 텅 빈 것은 아닌줄로만 알았는데, 그럴수도 있다는걸 깨달아가고 있어서 아픈 요즘이지요.

깐따삐야님의 리뷰를 읽었더니, 내용과는 상관없이, 저 문장 하나때문에,
쓸쓸해지고 말았어요.
후~

깐따삐야 2008-01-11 10:28   좋아요 0 | URL
뭔지는 잘 모르지만 저까지 마음이 아파오네요. 끝이 쓸쓸하더라도 기다리면서 설레었던 기분은 추억으로 고이고이. 그쵸? :)


순오기 2008-01-11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전과 환경의 세례... 부럽당!
전혜린......청춘들이 바치는 그녀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었다. 나도......

깐따삐야 2008-01-11 10:38   좋아요 0 | URL
그쵸? 저도 읽다보니 질투심이 일더라구요. 나도 재주 많았는데. 막 속상해 하기도 하면서. ㅋㅋ 그래도 현재 이룬 것들의 많은 부분은 그녀가 외롭게 노력한 시간들 덕분이겠죠.
전혜린은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서 고유명사였다는 말을 들었어요. 짧게 살았기에 더 신화화된 경향도 있는 것 같구요. 어쨌든 당시로서는 매우 비범한 여성이었나 봐요.

웽스북스 2008-01-1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전혜린을 너무 늦게 읽은 거야, 라고 툴툴거렸어요. 이십대 후반에게는 더이상 전혜린이 멋있어보이지 않았더라며.

깐따삐야 2008-01-11 12:53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여름에 머플러 하고 다니는 것도 예전엔 그렇게 멋져 보이더니 말이죠. 전혜린은 그 마음 그대로 성장이 멈춘 채 죽었는데 우리는 계속 변화하니깐. 궁합이 잘 안 맞아요. 이젠.^^
 
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그럴 때마다 기껏 진심에서 우러나는 동정심밖에 줄 게 없는 내게도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에 미묘한 희열을 느꼈다. ... 새로운 것을 인식할 때마다 흥분하고, 일단 어떤 감정으로 뒤흔들리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청춘의 특징이다. 이 연민이 나를 즐겁게 할 뿐 아니라 주변까지도 편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내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연민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자 내 피에 어떤 독소가 침투해서 피를 더욱 뜨겁고 빨갛게, 빠르고 격렬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 p.68

 걸출한 이야기꾼이자 사랑의 심리학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 '연민'에서 열정적 연민이 야기하는 재앙을 예의 그 남다른 투시력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호프밀러 장교가 빈에서 만난 작가에게 자신의 사연을 고백하는 액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작가는 이 이야기가 실화임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누군가 직접 뼛속까지 체험하지 않고는 이런 대사와 문장이 나올 수 없으리란 느낌이 들 정도로 작품 속 이야기는 뜨겁고 절절하다. 죽은 역사를 살아있는 소설로 부활시키는 츠바이크의 탁월한 재능을 재차 확인하는 기회였다.

 주둔지의 헝가리 귀족에게 초대받는 스물다섯의 청년 호프밀러. 그는 예의상 귀족의 외동딸 에디트에게 춤을 청했다가 갑작스런 그녀의 발작에 그녀가 하반신 마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자신의 실수로 상처받았을 그녀에게 꽃을 보내고 그녀는 화답의 의미로 그를 저택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불구가 된 이후 격리된 환경에서 자라온 에디트에게 호프밀러라는 존재는, 친절하게 대해주는 친구 이상의 의미였다. 처음에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호프밀러는 위의 인용처럼, 봉사한다는 희열 하나로 그녀의 기분전환을 위해 헌신한다.

 그녀를 향해 우정이나 남매애 이상의 감정을 품어보지 않았던 호프밀러는 이윽고 그녀가 자신을 상대로 품고 있는 집착에 가까운 정열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그러나 열정적 연민은 열정적 사랑과는 달리 애초에 동등구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므로 좀더 건강하기에 좀더 강자의 위치에 놓인 그가 그녀를 내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마는 것이다. 그녀의 연정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대비하기에 스물다섯의 그는 너무 어렸고, 감정에도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숙지하기엔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였고, 보잘 것 없고 평범했던 자신이 미소나 지껄임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는 허영심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처음에 한두 번 맞으면 통증을 진정시키고 마비시키며 기분을 좋게 만들죠. 그러나 육체나 영혼이나 우리의 기관은 불행하게도 놀라운 적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이 점점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원하듯 감정도 점점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되고 결국에는 당신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입으로 '안됩니다'라고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리고나서 상대가 당신을 이제껏 한 번도 자기에게 도움을 준 적이 없는 사람보다도 더 증오하게 된다 해도 마음쓰지 말아야 하는 그런 순간이 옵니다. 친애하는 소위님, 우리는 연민을 제대로 관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보다도 더 나쁜 해를 끼치게 됩니다. - p.222

 에디트의 주치의였던 콘도르가 호프밀러에게 경고하는 장면이다. 이에 갈팡질팡하며 초조해하던 호프밀러는 에디트의 아버지인 케케스팔바 노인의 간청과,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연민의 감정으로 그녀와 약혼까지 하게 된다. 그 이후 그녀의 장애가 치료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하고 정신을 차린 호프밀러는 그녀로부터 도망친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자살로써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지만 연대장의 제안에 따라 전보명령의 형식을 띠고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결국 그의 도주는 에디트의 상처를 심화시키고 절망한 그녀는 자살하고 만다. 그 후 호프밀러는 자신의 무책임한 연민과 우유부단함이 자신을 사랑했던 한 여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자책감으로 전쟁 속으로 도주하여 영웅이 된다.

 그녀의 의심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녀가 바라는 본질적이고 유일한 것, 즉 그녀의 사랑에 대한 무언가를 내가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갔다. 그녀는 이야기 도중에 자주 (내가 아주 열심히 그녀의 믿음과 다정함을 구걸할 때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면 나는 얼른 눈썹으로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 마음의 밑바닥을 알아보기 위해 관측기구를 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 p.346

 일체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완전무결한 애정을 갈구하는 여자와 애정을 열정적 연민으로 대체하고는 눈 감고 야웅하는 식으로 나날의 상황을 견뎌내고 있는 남자. 막대한 재산과 막연한 희망만이 두 사람을 위태롭게 받쳐주고 있을 뿐. 이들의 파국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에디트는 조제처럼 밝고 쿨한 여인도 아닐 뿐더러, 호프밀러는 츠네오가 조제를 업어주듯 그녀를 사랑할 수가 없다. 소설 속 실화는 영화 속 동화보다 훨씬 더 가혹했으니. 그런 면에서 콘도르의 통찰력 넘치는 충고는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보편적 사실이리라.

 예전의 나도 한때 주제 넘은 연민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는 감정이입에 능한 나는 우울한 가정사와 닭똥 같은 눈물 앞에서 즉시 무장해제 되어버렸고, 연민을 제대로 관리할 줄 몰랐기에 그것을 우정 또는 애정이려니 믿었다. 더 이상 감당하기 부담스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안됩니다'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어서 몇 개월을 더 끌려다녔다. 자갈 하나에도 천둥 같은 파문이 이는 상대의 마음을 다칠까봐 하고 싶은 말은 되도록 참았고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었다. 상황을 알고 있던 지인 중의 하나는 차라리 나를 아프간으로 보내는 게 낫겠다고 꼬집기도 했지만 연민에 중독된 자, 어느새 '안됩니다'라는 말을 잊게 되더라는.

 영원한 망각 속에서 구원자로 남았으면 좋았을까. 하지만 상대가 제공하는 연민이라는 모르핀에 중독된 자 역시 '그것으로 족합니다'를 잊게 되더라는. 에너지를 탕진한 채 비에 젖은 낙엽마냥 돌아오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든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 결국 도망쳤다. 그 날, 카페에서 나오던 나를 붙잡어 세웠던 동자승처럼 보이던 두 여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내게 가족에게 잘하라는 묘한 충고를 하더라는. 도망칠 계기만 찾고 있던 내게 그들의 충고는 곧장 내 방식으로 풀이 되어 '남에게 쓸데없는 신경 끄고 네 가족에게 더 잘하라'는 전언처럼 들렸다. 이후 한동안은 미안함과 자책감으로 내내 불편했지만 그것이 오래도록 억눌러왔던 도주 욕구를 넘어서진 못했다. 

 호프밀러와 나의 연민은 끝내 책임질 줄 아는 창조적 연민으로 승화되지 못했다. 그 경지에 이른다면 그것은 위대한 사랑이겠지. 불명확한 감정을 거두어들이기엔 너무 늦었고, 불확실한 희망에 전부를 걸기엔 너무 이기적어서, 모든 것이 뚜렷해질 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두려워서, 결국 인간적 나약함 때문에 천사의 의도를 품고도 악마로 기억되는 것이리라. 양심이 알고 있는 한 그 어떤 죄도 결코 망각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p.434)는 호프밀러의 마지막 말처럼 섣불리 내민 손은 나중에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게 된다. 만약 손을 내밀었다면 목도 함께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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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09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정말 남얘기같지가 않은데요- 창조적 연민훈련을 받아야 하는건가, 섣불리 연민에 빠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건가.

깐따삐야 2008-01-09 23:15   좋아요 0 | URL
창조적 연민까지 끌어올릴 자신이 없다면 섣불리 연민에 빠지지 말자?
써놓고 보니 어쩐지 슬퍼서 술푸고 싶으네. -_-

깐따삐야 2008-01-09 23:27   좋아요 0 | URL
입에 물었던 수건으로 눈물 닦는대. 앗! 드러버라. =333

깐따삐야 2008-01-09 23:48   좋아요 0 | URL
찜질방이라면서 세수도 안 했대. -_-

이리스 2008-01-10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조적 연민이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서 말이죠. 쿨럭..

깐따삐야 2008-01-10 00:06   좋아요 0 | URL
상대가 살청님이기에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요. 켁..

이리스 2008-01-10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 그게 또 그렇게 해석이 되나요. 쿨럭.. ㅋ

깐따삐야 2008-01-10 00:55   좋아요 0 | URL
암만 노력해두 살청님을 대상으로 해선 좋게는 해석이 안 되네요. ㅋㅋ

웽스북스 2008-01-10 01:11   좋아요 0 | URL
이런 이교도와 크로스~ 하여 성도간의 이간질을 촉구하는 건 옳지 않아요
깐따님 회개하는 마음으로 덧글 10개 달고 오십시오

깐따삐야 2008-01-10 01:24   좋아요 0 | URL
나 이제 리뷰 안 써! 흑! (아무도 말리지도 않는군아...)

웽스북스 2008-01-10 01:35   좋아요 0 | URL
어, 안....돼.....요오오옹.......

치니 2008-01-1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억하는 한, 안톤 체홉의 단편에서는 소위 '창조적 연민'을 느껴본 거 같아요.

깐따삐야 2008-01-10 20:22   좋아요 0 | URL
체홉은 참 잘 쓴다, 고 생각하면서도 많이 읽어보진 못했어요. 책도 한 권도 안 갖고 있네요. 그러고보니.
치니님 말씀을 들으니 다시 체홉을 읽고 싶어집니다. 근데 읽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거 있죠.^^

딸기뿡이 2008-01-26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방금 책을 다 읽고 제게도 별표 다섯 빵빵 주고 싶은 작품이라 어떤 분이 리뷰 쓰셨을까 보니 깐따삐야님이네요. 더군다나 그림까지 제가 좋아하는! 흔적 살짝 남깁니다.

깐따삐야 2008-01-26 23:59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이 책 참 잘 썼고 재미있죠? 종종 들러주세요.^^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유하 지음 / 열림원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엔 옛날에 사두었던 시집들을 한 권씩 꺼내서 읽고 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맞는 건지, 아니면 내 감수성의 감이 떨어진 건지, 서점에 가봐도 딱히 눈에 들어오는 시집이 없다. 세계의 문학은 올해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으로 문혜진의 시를 대서특필하고 있지만 새롭다는 느낌이 들기는 커녕, 김정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김선우 식으로 풀어놓았다는 느낌만 들더라는.

 초임 발령을 받고 그 해 여름 즈음해서 쉰을 넘기신 선배 선생님 한 분이 내게 문혜진의 '질 나쁜 연애'라는 시집을 권해주신 적이 있었다. 불량한 남자와 오토바이를 타고 검은 구름을 몰며 떠나보자는 내용이었는데, 왜 이 시집을 권해주셨냐는 물음에 대해 아버지뻘 되시던 그 선생님은 알듯말듯한 미소와 함께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더랬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아마도 너무 FM적으로 보였던 내 삶에 나름의 자극을 주고 싶으셨는지도. 어쨌든 이제는 시든 소설이든, 날것과 본능이라는 근래의 트렌드를 따르기 보다는, 본래의 정공법으로 성실하게 써나간 작품을 만나고 싶다. 

 유하도 물론 정공법이나 성실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시인이다. 황동규나 이수익 같은 격조 있는 시인들에 비하면 그냥 산문을 쓰지, 할 정도로 장황하고 수다스럽다. 그러나 유하는 스스로의 장점을 미덕으로 끌어올리는데 나름 성공했고 그의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은 김수영 문학상에 걸맞는 새로움과 발랄함 그 자체였다. 나는 그의 청승과, 허풍과, 유머를 좋아한다.

 기형도가 일기 쓰는 멜랑콜리커였다면 유하는 편지 쓰는 멜랑콜리커랄까. 그것도 연애편지 전문. 새끼 치는 조건으로 무보수 대필 편지 가능이라는 푯말을 들고 있을 듯한. 도무지 건조하고 냉정한 데라곤 없어뵈는 유하는 시를 쓰고 영화를 찍으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청승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듣기로는 보기 드문 거구라는데 그 안에는 순정만화에나 나올법한 웅크린 소년 하나가 엄마나 누나를 기다리며 울고 있을 것만 같다.

 이 시집은 99년 3월. 내가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구내서점에 들렀다가 충동구매한 책이다. 일단 표지와, 제목과, 시인이 마음에 들었고 아브라카다브라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오 그이의 마음은 알고 싶지 않나니(p.41)라는 구절을 보고 주문을 외워야겠단 생각에 망설임 없이 질러버렸다. 나중에 내가 심리적 안정을 되찾았을 때 이 사람은 자기 일기장에나 쓸 이야기를 책으로까지 냈네, 뾰루퉁하다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이 시집을 다시 읽었을 땐 정말 잘 쓴 시구나, 라고 생각했다. 없는 것을 끌어와가며 공들여 제조한 듯한 기교가 아니라, 안에서 솟구치는 청승의 봇물이 그분이 오시는 타이밍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열정으로 터져나온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음울한 실연의 감옥인 몸둥아리로부터 벗어나 한 그루 아름드리 시로 피어나고픈 욕망. 

나무

잎새는 뿌리의 어둠을 벗어나려 하고
뿌리는 잎새의 태양을 벗어나려 한다
나무는 나무를 벗어나려는 힘으로
비로서 한 그루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새로 인해 무성한 이파리를 피워내고 사랑하는 자, 윤회를 믿게 되듯 시인은 날아오르는 새떼 속에서 내세를 본다. 

나무를 낳는 새

찌르레기 한 마리 날아와
나무에게 키스했을 때
나무는 새의 입 속에
산수유 열매를 넣어주었습니다

달콤한 과육의 시절이 끝나고
어느 날 허공을 날던 새는
최후의 추락을 맞이하였습니다
바람이, 떨어진 새의 육신을 거두어 가는 동안
그의 몸 안에 남아 있던 산수유 씨앗들은
싹을 틔워 잎새 무성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무는 그렇듯
새가 낳은 자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새떼가 날아갑니다
울창한 숲의 내세가 날아갑니다

농담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렀군요
...... 미안해 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이 순간, 그대 재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 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대 이건 진실이에요

 경고하건대 제발 오버하지 말아요. 하지만 이처럼 귀여운 고백에 웃지 않을 수 없는 여인들이여. 당신은 유하의 개미지옥에서 오래도록 빠져나올 수 없을지니.

학교에서 배운 것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그 많던 상상력은 누가 다 치웠을까. 상상력 절제 상실증으로 학교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유하. 그가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여고생의 뒤꽁무니를 쫓는 세운상가 키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뛰어난 시인과 감독을 보는 대신, 주류일절을 애호하는 비주류 수다맨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유하라는) 베짱이는 허기진 노래를 부를 것이다. 개미를 한입에 먹어치우고 싶다고. (p.47) 그가 허기를 느낄 만큼 살아있고, 욕망을 채우기 위한 뜨거운 노래를 멈추지 않는 한 그의 행로를 계속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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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09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물오른 깐따삐야님, 노느라 책도 못읽는 전 깐따삐야님 리뷰 읽는 게 더 즐거워요 흐흐흐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아, 여기 ㅠㅠ 나 이제 확 엎어버릴까봐

깐따삐야 2008-01-09 01:03   좋아요 0 | URL
아이구. 웬디양님이 즐겁다니 정말 좋으네요.
요즘 한가할 때 바짝 읽으려고 노력 중인데 언제 잠수탈지 모르는 게 또 내 특성이라는. 그간의 행로에 대해선 메피님이 잘 아시죠. 흐흐.

엎은 거 닦을 땐 살청님 수건 빌려다 씁시다. ㅋㅋㅋㅋ

웽스북스 2008-01-09 01:04   좋아요 0 | URL
입속에 들어갔다온 수건인데 괜찮을까요?
하도 악~ 물어서 이빨자국 강하게!! ㅋㅋ

잠수하기만 해봐요 청주로 날라갈테니 ㅎㅎㅎ

깐따삐야 2008-01-09 01:12   좋아요 0 | URL
앗! 그렇다면 살청님을 시켜서 닦으라고 합시다. ㅋㅋ

웬디수사관 날라오고 살청님이 비글 풀고 메피님이 펠레의 저주 내리면 난 벼랑에 몰린 깐들쥐겠구만. -_-



웽스북스 2008-01-09 01:46   좋아요 0 | URL
그러기전에 먼저 혈육을 잃은 슬픔에 젖은 엘신 형님이 깐따삐야 별에 있는 도우너에게 교신을 보내 텔레파시로 깐따삐야님을 잡아오라고 할 거에요 ㅋㅋ

아 근데 깐들쥐, 어째 징그러워요 (깐 들쥐라니 ㅠㅠ 너무 편혜영 소설이다 ㅋㅋㅋㅋㅋㅋ)

깐따삐야 2008-01-09 01:53   좋아요 0 | URL
엘신형님은 나의 잠수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왠지. ㅋㅋ

사육장 덕분에 요즘 야생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지낸다는. 으흐흐.

깐따삐야 2008-01-09 18:02   좋아요 0 | URL
어쩌면 위에 보이는 웬디양님은 메피님일지도 모른다는. 항간에는 메피님의 분신설이 나돌고 있거든요. ㅋㅋ (커피는 맥심 커피믹스가 쵝오에요!)

채찍은 없지만 가죽허리띠가 있으니 이리 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