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뉴스에서 모래주머니를 어깨에 들쳐매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느 구청에서인가, 환경미화원을 뽑는 실기시험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장면이 계속 꿈에 나온다. 얼굴이 노란 사람들은 제대로 헉헉 소리도 못 내고 체육관의 끝에서 끝을 달리고 또 달린다. 출발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는 그칠 줄을 모르고 헐렁한 바지 속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춘 채 사람들은 계속 달린다. 대신해 줄 것도 아니면서 다리 뻗고 누워서 꿈으로나 꾸고 있다니, 뉴스보다 더 처절한 꿈에 마음이 좀 거시기 했다.

  내 일상은 34%의 잡소리, 10%의 엄살, 56%의 몽상으로 굴러가고 있다. 달지도 쓰지도 않기에 다소 사치스럽다. 낼모레가 그새 입춘이고 개학이 머지 않았다. 다시 봄이 올 것이라는 별로 새롭지도 않은 사실이 언짢기만 하다. 어깨에 모래주머니를 들쳐매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야만 할 것 같은 기분. 심정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모래주머니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걸 들쳐매고 힘겨루기, 속도전만 치르고 있는 것 같다. 입춘이 가까워오면 나는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무장해제했던 심신을 일으켜 다시 철갑상어로 둔갑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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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7-02-02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49프로의 방치, 35프로의 빈말, 16프로의 엄살로 살아가요.

깐따삐야 2007-02-0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가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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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ving students means giving them the ability to hurt you... it is part of the burden of being a good teacher... When I feel hurt by them that I know I'm suffering for good reasons.

  어찌어찌하여 흘러들어간 블로그에서 발견한 글귀다. 교무실 책상 앞에 붙여놓고 오며가며 새겨야 할. 새학기에 난 다른 곳에 있겠지만. 돌아와서라도 잊지 말아야 할. 좀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아쉬움도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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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중이 좀더 줄어서 바지들을 수선했다. 저주받은 하체에도 축복이 오려나. 먹음직스런 음식을 보면 군침은 도는데 식욕이 예전같지 않다. 식욕 뿐인가, 했더니 예전같지 않은 게 한둘이 아니구나. 입체감을 잃은 욕망들. 머리에 웨이브라도 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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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열장 오른쪽에 놓아두었던 동자승이 왼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옮겨 놓았는데 그 다음 날 보니 또 다시 왼쪽으로 옮겨져 있고. 이상하다, 생각하고 옆으로 조금 틀어서 오른쪽으로 옮겼는데 오후에 다시 보니 왼쪽으로 다시 옮겨져 있었다. 원인은 소리 없이 강한 아빠의 고집. You Win. 먼지 닦을 생각은 안하고 쓸데없는 정리벽만 고집하는 건 아빠를 빼다박았다는 엄마의 지적. 더 정확히 말해보면 쓸데없는 걸 좋아하는 게 닮은거지. 아빠의 휴가와 나의 방학이 겹친 요즘. 엄마는 가출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셨다. 우리 부녀는 효용이니 실용이니 하는 말들과 언제쯤 화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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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녀에게'란 노래가 있다. 중학생이었을 때, 마방진이라는 별명을 가진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첫 시간에 마방진이라는 숫자게임을 설명해 주었고 마방진이라는 게임 이름은 선생님의 지루하고 기다란 얼굴과 잘 어울렸다. 보다보다 너희들처럼 공부 안하는 애들은 처음 봤다며 맞는 말만 하더니 어느 날 수업을 하다 말고 굵다란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다. 저렇게 청승맞은 노래를 저렇게 진지하게 부르다니, 우리는 총각선생님의 갑작스런 도발 앞에서 키득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틈만 나면 조용히 잠을 청하는 내게 특혜받았느냐 어쩌느냐 하면서 상처를 주었던 선생님. 당신도 밤새 라디오 듣고 엽서 쓰느라 고심하고 새벽까지 공부하는 척 해봐. 안 졸린가, 라고 말하진 못했고 그냥 묵묵히 미워하기만 했었다. 얼굴만 길면 다야, 그까짓 수업 안들어도 백점이다. 그만치 재수없던 여학생이 교사가 되었다는 걸 알면 인과응보란 말을 떠올릴까, 개과천선이란 말을 떠올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직녀에게'란 노래가 가끔 당길 때가 있다. 더욱이 누군가 노래방에서 이 노래라도 부르는 날이면 잠시나마 마음이 방긋, 웃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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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 언니가 결혼을 했다. 어릴적에 헝겁을 오려서 인형 옷을 예쁘게도 만들던 언니는 이젠 옷가게를 하고 있다. 그 때 우리는 <캔디 캔디>라는 책을 좋아했다. 원래는 말랐었는데 보약을 많이 먹어 뚱뚱해졌다고 주장하던 언니의 친구는 언니에게 시리즈로 나온 그 책들을 빌려주기 시작했고 나는 언니에게서 그 책을 다시 빌려보는 식이었다. 드디어 언니가 마지막 권을 빌려온 날,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언니에게 그 책을 내가 먼저 봐야겠다고 했다. 언니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는 서로 한 마디도 안하고 함께 버스에 올랐고 집으로 오는 내내 침묵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토라진 채로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언니도 동생과 함께 총총 사라졌다. 풀리지 않은 마음으로 꽁해 있던 오후, 문득 전화벨이 울렸고 전화를 받는 순간 너 먼저 읽어, 라는 말과 함께 급하게 전화가 끊겼다.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그 길로 언니네 집으로 달려가서 <캔디 캔디>를 가져와서는 별로 재미없는 캔디의 편지들을 읽으며 먼저 읽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을 후회했다. 언니는 성씨만 다를 뿐 나와 이름이 같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착했다. 진심으로 행복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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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는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는 엄마한테 말하길, 엄마, 나 두부 넣고 끓인 김치국 먹고 싶어...란다. 언니도 옆에 있었을텐데 한 대 맞지나 않았을런지. 흔하다 못해 뻔하기까지 한 두부와 김치라니, 언니는 오빠의 만행에 두부처럼 하얘졌거나 김치국물처럼 붉어졌거나. 아니면 이젠 아예 그러려니 하거나. 결혼한 오빠가 찾는 음식들은 희한하다. 지극히 평범하다는 의미로 희한하다. 김치찜, 고사리나물, 계란말이, 김밥, 깻잎장아찌, 멸치조림... 좀더 나아가봤자 소면이 아닌 당면을 넣은 갈비탕 정도. 회식자리에서, 또는 출장을 다니며 온갖 산해진미를 다 먹을텐데도 언제나 전화기 너머로 칭얼대는 메뉴들은 간소하기 짝이 없다. 오빠의 투정을 어쩐지 이해할 것 같긴 한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입장에서 그런 것일 뿐, 엄마의 손맛에 길들여진 입 짧은 남자는 질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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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깨닫기 위해선 아파야만 할까. 진부한 물음. 그럼에도 간혹 던질 수 밖에 없는 물음. 책을 읽을 시간에 좀더 사람들과 부대껴야 했을까. 과연 책도 읽고 사람들과 부대꼈던 이들은 똑고른 나이테를 지닌 채 단단하게 성숙해 있을까. 더 많이 싸우고 더 많이 연애를 걸고 더 많이 좌절했다면. 하지만 그렇듯 파란만장했던 이들도 결국엔 재테크와 다이어트와 아이들의 조기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상투적인 생활인이 되고 말텐데. 왜 깨닫기 위해선 아파야만 할까. 진부한 이 물음이 꽤 신선하게 들릴 날이 올지도 모르고 이런 싱거운 생각을 하고 있다니 겨울밤은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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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1-24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깨닫기 위해선 아파야만 할까. 그냥, 아프지 않고, 돌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깐따삐야 2007-01-2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개츠비 2007-01-2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때까지 깨달아야 하는게 사는건가 봅니다. 그러나 뭐든 많이 해보는게 중요한거같습니다. 연애도 공부도 ...마니마니..그래야 후회가 없는것도 같습니다.

깐따삐야 2007-01-26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retre7님, 저란 인간은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 많이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 후회로 점철된 삶... 에고. 사람은 생긴대로 살고, 성격이 팔자 만든다는 말이 맞는지도 몰라요.
 

  어제 오후 대학 동기 K가 집에 왔었다. 방학이라고 띵가띵가 쉬고 있는 나와는 달리 고등학교에 있는 그녀는 보충수업을 하느라 내내 바쁜 모양이었다. K는 엄마와 이야길 많이 했다. 요즘 연락하며 지내는 한 남자에 대해 엄마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다 괜찮고 어디 하나 흠잡을만한 데는 없는데 가슴이 뛰질 않노라고. 엄마 말씀, 같이 살 남자는 그저 편한 게 최고다. 그리고 넌 누굴 만나도 가슴이 뛰긴 어려운 사람 아니냐. 쉽게 수긍하며 이놈의 가슴이 당최 뜨뜻해져 본 적이 없고 뜨뜻해질 생각조차 안한다는 K. 왼쪽 가슴 속에 개구리라도 들어앉았는지 시도 때도 없이 두근거려대는 나와는 달리 K는 사실 그랬다. 언제나 차고 도도하고 담대했다.

  시내에 나와 엉터리같은 영화를 한 편 보고 커피를 마셨다. 이런저런 이야기 도중, 행사에 쓰라고 보내준 돈의 액수를 후배가 잘못 정산해 올려놓았는데 아직까지 정정을 안해서 좀 창피하다고 하자 K는 아무 말 하지 말고 입금시켰던 영수증 스캔 떠서 보내줘, 라고 말했다. 착오니 실수니 등등의 말을 했더니 돈의 액수가 그대로 제 통장에 찍혔을텐데 무슨 얼어죽을 놈의 착오고 실수냐면서 제발 상대방을 헤아리려고 들지 말고 개싸가지스러운 현상 그 자체에만 주목하라고 일침을 가했다. 돈 떼어먹고도 떼어먹었다고 말하는 놈 못 봤다면서 그것도 이미 졸업한 선배가 보내준 돈을 확인 절차도 없이 그 따위로 처리한다는 것은 문제성이 있다고 했다. 마치 엄마처럼 K는 나를 향해 화를 내고 있었다. 왜 넌 걔를 이해하려고 하니. 이해해주지 마. 사실 그 말은 대학 시절부터 K로부터 즐겨 듣던 말이었다.

  K는 나처럼 자잘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객관적일 수 있었고 그런 면에서 의지가 되는 친구였다. 물론 그녀는 나의 어리석었던 연애사를 보고 들으며 이런 말 해서 좀 너에겐 미안하지만 난 그래도 항상 정열적인 네가 부럽다, 라고 말한 적도 있었고 그 말이 어느만치 진심이라는 것도 이해했지만 나는 언제나 눈빛과 태도에서 감히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냉기와 카리스마가 묻어나는 그녀를 닮고 싶었다. 내가 어느 순간 활짝 피었다 시들었다를 반복하는 변덕스런 야생화라면 그녀는 토파즈로 만든 차고 푸르고 단단한 돌꽃 같았다. K는 장난처럼 종종 내가 남자였으면 너를 기꺼이 거둘텐데, 라고 말하곤 했다. 난 진심으로 K처럼 야무지고 단단한 남자가 이렇듯 나약하고 변덕스럽고 다정도 병인 나를 좀 거두어줬으면 했다. 그렇다면 사랑보다 더 질긴 존경심으로 그를 위해 노력할텐데, 생각하곤 했다.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밤, 익숙하지 않은 도로로 접어들자 갑자기 헷갈려하며 불안해하는 날 보며 운전을 하던 K는 알아서 집으로 뫼실테니 걱정 말라며 널 어떡하면 좋으냐, 라고 했더랬다. 나는 어떤 사람이 너무 보고싶어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걸 참고 있었노라고 고백해 놓은 참이었다. 핼쑥해진 내 모습에 K는 막연히 감을 잡고 있었고 나는 추스릴 새도 없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버렸다. 바닥을 봐야만 정신이 드는 나이기에, 정신이 들어도 원망의 화살 하나 쏠 줄 모르고 도리어 화살촉을 더 뾰족하게 만들어 스스로의 가슴에 대고 겨냥하는 나란 사람을 알기 때문에, K는 차분한 충고 끝에는 늘 씁쓸한 한 마디를 남기곤 했다. 결국 넌 내가 하라는대로 하지 않으리란 걸 나는 알고 있어.

  사주를 봤는데 말이지. 내 사주에는 갈고리가 하나 있대. 결국 무엇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거지. 내게 상처낸 것은 사람이든 무엇이든 갈고리로 잡아당겨서 당한 만큼 갚아주고 넘어가야만 되는 사람 있잖아. 내가 그런 사람이래. 사주에 갈고리가 있다니, 사주로 그런 것까지 읽을 수 있다니 참 재밌어.

  그 말 끝에 K의 미소는 의미심장하고도 무서웠다. 가슴에 옹이지는 것이 두려워 결국엔 무엇이든 다 좋았노라, 하고 미화시키고 넘어가야만 편히 숨을 쉬는 나에 비해 갈고리를 지녔다는 K는 강하고 독한 사람이었다. K는 예의 없이 다가왔던 것들은 다시 예의 없이 떠나가기 마련이라며 그런 무례한 것들은 너도 무례하게 대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머리로는 그렇지, 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그래도 난 그 사람이 보고싶다, 고 말하는 내 복잡한 눈빛을 K는 침착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넌 다른 사람들한테는 참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 자신한테도 좋은 사람이 되어봐. 대학 시절 무슨 일인가로 징징거리던 나를 토닥이며 K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도 갈고리를 하나 지녔으면 싶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말하지 않고 네가 그랬단 말이지, 라고 옹이를 품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K는 하나의 경험을 통과하면 열을 배운다. 그녀는 결코 징징대지 않고 받은대로 돌려주거나 스스로를 훌쩍 키워버린다. 돌처럼 딱딱한 심장을 지녔을지 모르지만 오래오래 식지 않는 따듯한 돌이다. 나는 항상 붉은 피로 출렁이지만 곧바로 까맣게 죽어버린다. 그녀는 내 정열이 부럽다 했지만 나는 K가 나보다 훨씬 더 원대한 사랑을 할 것이라는 걸 안다. 아무 때나 심장을 내었다 들였다 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딱 한 번 그녀의 갈고리로 뜨거운 심장을 끌어내어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날이 올 것 같다. 사랑보다 더 진한 존경심으로 나는 K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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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1-18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고리라는게 한번 걸리면 잘 안빠지는데...^^
소울 메이트신가 봐요???

마늘빵 2007-01-19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은 차분하게 자기를 들여다보는 듯 해서 좋습니다.

치니 2007-01-19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나는 그럼 어떤 쪽일까 생각해보게 되네요.

비로그인 2007-01-19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장을 걸어내는 갈고리라..
음.. 가슴이 뜨끔합니다. 하하


깐따삐야 2007-01-19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갈고리란 말, 올가미 등등의 말처럼 무섭고 좀 그랬습니다. 소울메이트까진 아니고 그냥 오래 알며 지내다보니 서로에 대해 많이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아프락사스님, 차분이라니 내숭일거에요. 전 절대 차분한 것과는 거리가 멀답니다. ㅋㅋ

치니님, 치니님은 K와 저를 반반 섞어놓은 것 같은 분이 아닐까, 싶어요. ^^

깐따삐야 2007-01-19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헛?! 님도 역쉬...

2007-01-19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현재 21권 세트로 나와 있는 토지는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적이 있다. 그래서 소심하게 선택한 것이 청소년 토지 12권. 김현주가 최서희로 나왔던 드라마도 재미있게 봤었다. 극이 진행될수록 김현주 보다는 악한 김두수 역할을 실감나게 해냈던 유해진이라는 배우를 눈여겨보게 되었지만. 비록 작가가 아닌 다른 이들에 의해 재구성된 책이긴 하지만 새벽을 환히 밝히면서 읽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토지를 모두 읽고나서 그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을 무렵 묵혀두었던 이상문학상 전집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지만 활자들은 핑그르르 두서없이 떠다녔고 급기야 신경질이 나려고까지 했다. 모든 책은 각자 가치가 있고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한 장 속에 있는 짤막한 어구들조차 누군가의 고민이 녹아있다고 생각하며 지내다가도, 이렇듯 숨막힐 듯한 대작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그래도 똑같을 순 없지, 라는 확신이 생기기도 한다.

  평소에 시나 소설을 좋아하긴 했지만 하도 잡식성이다보니 원래 특별히 꼬집을만한 취향은 없었는데 근래 들어 역사소설이 좋아진다. <상도>를 찬찬히 다시 읽고 싶어졌고 최인호의 <유림>이 완간되었다는 소식이 반가웠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나로부터 벗어나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점점 더 아빠를 닮아가는 내 얼굴과 엄마의 말투와 생활습관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부모님과 부모님 위의 더더 오래된 조상들, 나 개인의 역사보다 훨씬 오래된 민족의 역사, 그 민족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을 인류의 역사, 그러한 것들이 궁금해진다. 뭔가 근원적인 것, 변하지 않고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낸다면 내가 나를 이해하고 전망하는 일이 더 쉬워지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것에서 말이다. 토지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엄마는 차디차고 고고한 윤씨 부인의 모습에서 엄마의 할머니를 보았다 하고 나는 최서희의 강하고 질긴 모성애를 보며 엄마를 떠올렸다. 임명희와 양현이의 갈등과 고민 속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각자 땅을 향한 강한 집념을 보였지만 최서희에게서는 스칼렛 오하라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기품이 느껴졌고 그것은 한국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오롯한 자부심마저 들었다. 토지에 대해서는 감히 리뷰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손을 놓고 있지만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 어딘가에 한국 여성의 끈기와 기품이 서려있지는 않을까, 하는 허튼 희망을 걸어보는 경험은 매우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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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18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들며 부모님을 닮아감을 실감합니다..
또한 그분들의 사랑과 애쓰심 역시.


깐따삐야 2007-01-1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그렇죠?
 

  방학을 했고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중국에 다녀왔다. 여행지는 상해, 장가계, 소주, 항주 일대였다. 현지식은 물론 한식을 시켜도 도통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 때문에 가져갔던 풋고추와 볶음 고추장 두 통을 탈탈 거덜내고, 평소엔 거들떠도 안보던 주전부리와 야밤의 컵라면으로 불만투성이인 혀를 달래곤 했던 허기진 여행이었지만 그 일정은 대체로 무탈하고 즐거웠다.


  상해는 항구도시인만큼 매우 부산하면서도 역동적인 인상으로 다가왔다. 중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똑같은 모습을 한 고층 건물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고 시내 중심가로 들어서면 유명 패스트푸드점이나 고급 백화점들이 종종 눈에 띄는 소비도시이기도 했다. 사진은 동방명주타워에서 바라 본 상해시의 모습.


  장가계의 천자산과 천문산 일대는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한 곳. 이어지는 절경에 케이블카 안에서 계속 탄성을 질러대야만 했다.


  중국 산수화를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아름다운 풍광들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우리나라의 아기자기하고 소담스런 산들에 비하면 중국의 산들은 육중하고도 과감한 멋을 자랑한다. 안개 때문에 보다 선명한 사진을 찍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해질 무렵, 관람을 하고 내려오던 중 어둑어둑해지는 케이블카 안에서 우리의 엉뚱마님 곽 따꺼, 곽 선생님과 함께.  


  계단 오르기 힘들다고 칭얼대던 일곱살배기 박군. 결국 가마꾼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 가마꾼들. 얼마냐고 물으니 처음엔 만원, 만원, 만원, 하더니 결국 그건 만원이 아니라 삼만원이었다고 우겨대기 시작하는데 가이드의 도움이 없었으면 된통 바가지 쓸 뻔 했다. 우리 박군이 다소 무겁긴 했지만서도. 쩝.


  동행했던 사서 선생님과 개구쟁이 박군. 우리는 밤마다 한 방에 모여 컵라면을 끓여먹고 다른 선생님들의 천태만상을 카메라로 고발하며 불면의 밤들을 보내야만 했다.


  항주에서 보았던 송성쇼. 평균신장 170 이상의 화려한 미녀들이 한 시간 내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중국 영화에서 익히 보았던 흥겨운 뻥들이 쇼의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갑자기 인공절벽에서 폭포수가 쏟아지고 촛대를 등에 얹고도 온몸을 자유자재로 말아대는 등, 연중 빈 좌석이 없다는 풍문만큼은 뻥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송성쇼가 막을 내릴 무렵 배우들이 관객들을 향해 던져주었던 행운주머니. 어찌나 집중력과 완력 넘치는 점프였던지 함께 갔던 선생님들 중에 주머니를 받은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하지만 주머니를 받은 관객들은 앞으로 나와서 함께 춤을 추자고 말하는 배우들의 눈치를 보며 몰래 엉덩이 밑으로 주머니를 밀어넣은 채 숨죽이고 앉아있었다는 뒷담화. 춤을 출 걸 그랬나. 핸섬하고 늘씬한 남자배우들도 많았는데.


  일정 내내 일행을 이끌며 사진을 남기며 수고하셨던 체육선생님과 서호유람 중 한 컷. 요리집에 갔을 때였다. 내가 장난을 치느라 중국인 종업원에게 우리는 모두 한국인이고 이 선생님만 동남아에서 왔다고 말하자 어려뵈는 청년 종업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끄덕. 이국적인 마스크에 썰렁한 농담을 좋아하고 직원체육날이면 직접 순대를 만들고 어묵국을 끓이기도 하는 적극적이고 재미있는 유부남이시다. 학창 시절 체육 선생님들에 대한 안좋은 추억을 싸그리까지는 아니어도 상당 부분 해소해 주셨던.


  백마사, 소림사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 큰 사찰 중의 하나라는 영은사의 불상. 많은 중국인들이 불상 앞에서 향을 피워놓고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 모습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도 마음 속으로 소원 하나를 빌었는데 국적차별인지 아니면 간절함이 부족했는지 내 소원은 물 건너갔다.


  올라가려면 올라가셔도 좋지만 시간 맞춰 내려올 자신이 없거나 다리 힘 없으신 분들은 그냥 아래에 계셔달라는 현지 가이드의 엄포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렸던 999계단. 그러나!


  남달리 튼실한 하체를 자랑하는 내가 올라가지 않는다면 내가 웃고, 남들이 웃고, 하늘이 웃을거란 자책감에 두 주먹 불끈, 두 다리 울끈하며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가파르고 촘촘하고 많긴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이제 웬만한 계단은 날아 오를지도 모른다. 올해 고3 수험생의 엄마가 되시는 선생님들 세 분도 이를 악물고 정상까지 오르셨단다. 대한민국 엄마들은 버스보다 빠르다고 하질 않던가.


  세자매 바위를 뒤로 한 채 홀로 한 컷. 현지인처럼 나왔다.

  중국은 듣던대로 크고 넓고 많은 나라였다. 저녁 한 끼 먹으러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가는 느낌이라고 말할 정도로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넓었고 그만큼 아직은 도농간의 격차나 지역간의 격차가 상당히 컸다. 자유화의 물결이 곳곳에서 느껴지긴 했지만 여전히 공산국가 특유의 나태함이라든가 방만함이 느껴졌고 전반적으로 아직 자리잡히지 않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끝을 가늠하기 힘든 광대한 국토와 버스를 타든, 비행기에 오르든, 배에 오르든 여기저기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수많은 중국인들과 시끌벅적한 그들의 언어. 10년 남짓이면 미국을 능가할 거라는 전망이 무색하게 들리진 않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작년의 일본여행에서도 그랬고 이번 중국여행에서도 그렇고 이웃나라의 좋은 점을 우리가 제대로 캐취해서 야무지게 활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컸다. 불리한 지리적 요건에도 불구하고 그 불리함마저 관광산업과 문화사업으로 육성시킬만큼 꾀가 많고 재기발랄한 일본인의 기질과,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도 의뭉스럽게 제 이익을 꾀할 줄 아는 중국인의 대범함을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행의 끝엔 늘상 그래도 우리나라가 제일 좋아, 라는 수수한 깨달음과 함께 귀환하곤 하지만 오감으로 느꼈던 그들만의 장점은 쉽게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고 아쉬움으로 남곤 한다. 평소 내가 생각해오는 바, 해외 여행을 떠나는 데 있어 어르신들의 관광으로서도 물론 좋겠지만 어린 학생들의 견학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도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어쨌든 여러 선생님들의 수고로움에 기대어 다른 듯 닮아 있고 닮은 듯 서로 다른 한, 중, 일 세 나라를 부분적으로나마 비교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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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1-07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여행하셨군요. 예쁘게 잘 나왔는데요^^

Mephistopheles 2007-01-08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가 중국여행 다녀오신 후 " 걔들은 뭐든지 기름에 볶더라.." 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는군요..^^
미녀선생님의 중국탐방기..군요.^^
(3미터마다 계단참이 없는 계단은 무효에요 무효..)

레와 2007-01-0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앙!
흔적이 없어 궁금했었어요! 깐따삐야님~
중국다녀오셨군요!! (부럽~)

얼굴이.. 너무 깜찍하셔요~ (아..앙...*.*)
즐거운 여행은 우리 마음을 살찌우지요. 통통해 지셨나요? 헤헤..:)
얼굴뵈니 너무 반갑습니다.~!

마태우스 2007-01-0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단아한 미모가 돋보이는 사진이었습니다. 체육선생님 동남아사람...호호. 글구 그럴 땐 나가서 춤도 추는 것이 님의 모범생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주머니 받은 날) 잘 봤습니다.

깐따삐야 2007-01-0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적게 먹고 많이 걸었던 여행이었지만 즐거웠답니다. ^^

메피스토님, 맞아요. 뭐든지 기름에 볶습니다. 콩도 볶고 국수도 볶고 닭도 볶고... 그런데도 중국인들은 참 맛있게 잘도 먹어요. (우리 동네에도 저런 계단이 있다면 따로 다이어트가 필요 없을 듯 해요.)

레와님, 처음엔 중국에 가면 빵빵하게 살이 오르진 않을까 싶었는데 돌아와서 보니 오히려 체중이 조금 줄었더라구요. 이것저것 먹을 건 많은데 그다지 먹고싶은 게 없었어요.

마태우스님, 아직 저의 파격적인 면모를 보지 못하셨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송성쇼엔 미녀들이 대거 출연해서 마태우스님이 보시면 무척 좋아하실 것 같아요. ^^

비로그인 2007-03-20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깐따삐야님 ^^

여차저차 흘러흘러 여기까지 와서 중국 사진을 보고 가네요.
사진도 곱고 님도 고우십니다.
좋은 봄날 되세요 :)

깐따삐야 2007-03-22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2님, 댓글을 지금에서야 봤네요. 반갑습니다. 종종 뵙도록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