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지음 / 황금부엉이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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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어느 행사에 가서 오정희 선생님을 실제로 뵌 적이 있다.
단아한 체구에 검고 맑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는데 소설가라기보단 엄마 같고, 큰이모 같은 느낌이 났다.
춘천에 살고 계신다 했는데, 재작년인가 들렀던 춘천은 적막하고 쓸쓸한 느낌이었다.
단순한 우연인지 젊은이들이 잘 눈에 띄지 않았고,
일본 교토의 거리에서나 종종 마주칠 법한 자그맣고도 깔끔한 노인들이 알듯말듯한 표정을 한 채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닭갈비에는 떡과 함께 우동사리가 곁들여 나왔고,
한여름이라 전력량 초과였는지 때때로 에어컨이 꺼지고 스크린이 꺼지는대도, 다들 무심한 표정들로 일관했다.
아무런 놀라운 일도 없을 법한 인상을 주는 도시, 원하기만 하면 비밀스럽게 은둔하기 좋을 것 같은 도시였다.
그 곳에서 오정희 선생님은 밥 짓고, 글 쓰고,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지금껏 살아오고 계신다.

마음이 산란할 때면 내가 무심코 집어드는 책들은 대개 이미 세상에 없거나, 아니면 연로한 작가들의 것이다.
대청마루에 나와 앉아 시원한 수정과 앞에 놓고, 현자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듯,
아늑하면서도 나를 몽땅 드러내 보이며 기대고 싶은, 편안한 기분을 동시에 느낀다.
이 책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한 수 크게 배우고 난 것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그 나이를 이미 지난 사람들은 '희망과 가능성으로 푸르디푸른 아름다움'이라 의심 없이 말하지만 삶의 실체는 잡히지 않는 채로 점차 생활인, 사회인으로서의 책무, 존재 의미를 찾고자 하는 안팎의 요구에 시달리는 20대의 생과 사랑은 얼마나 외로운가. - pp. 36-37
항상 내 나이를 사랑하며 살길 바라지만 너무 가까이 있다보면 그 실체와 소중함을 잘 모르듯 나 또한 나의 이 징글맞은 20대가 어서 지나가기를,
어서 어서 늙어서 야생화처럼 들끓는 열정보단 마음에 한 두 송이의 곰팡이꽃이 피어나기를, 하고 바라곤 한다.
육신을 보면서는 세월이 비껴가기를 원하고 마음은 공자님이 되길 원하니, 엄마 말씀을 빌리자면 '욕심이 땅두께 같다'.

조리대와 나란히 놓인 책상에서 글을 쓰면서 밥짓기와 글쓰기가 결코 생각처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 문학이라든가 창조적 생활이란 저 멀리서 나부끼는 깃발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발 딛고 있는 자리를 굳건한 터전 삼아 발아하는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 p. 87
내가 항상 겁을 냈던 것 중의 하나는,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상황에 내 자신이 매몰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완벽한 몰두, 그렇지 않으면 無를 택하는 외곬 기질이 두려웠다. 
쓰잘데기 없는 고집과 자의식 포화 상태를 오갔던 결과는 항상 '현재상태 불만족'이라는 불온한 경고등이었다.  
칭얼대는 듯 하면서도 이룰 건 다 이룬다고 나보고 괜한 엄살쟁이라고 하는 사람도 보았지만,
인용한 글처럼 저 멀리서 나부끼는 깃발만 쳐다보느라 발 딛고 서 있는 자리에 좀비처럼 떠다니는 기분도 과히 좋지만은 않다.
생활과 실존와 이상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그것의 일치와 조화가 곧 생활이고 실존이고 이상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 시절, 호감을 갖고 몇 차례 만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만날 때마다 우유를, 그것도 따끈하게 데운 것으로만 마셨다. 나는 그것이 의아했고 그는 내가 커피만을 고집하는 것에 대해, 왜 몸에 나쁜 커피를 마시는가 하고 못마땅해했다. 결국 그와는 곧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커피만 마셔대는 여자의 퇴폐성, 불건강함이 싫었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의 고정관념으로 우유만 마시는 남자의 유아성이나 생활성, 동물적인 건강성이 싫었던 것일 게다. - p. 92
이 구절을 읽다가 쿡쿡, 웃음이 났다.
요즘 유리볼이며 도시락이 증정품으로 붙어 있는 인스턴트 봉지 커피를 열렬히 마셔대는 나도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로 달고, 뜨겁고, 진한 커피는 건강 상의 이유로 우유만 마셔대는 심심한 남자보다 훨씬 더 큰 위안과 기쁨을 준다.
전에 한방차 류의 건강차를 유독 즐겨마시는 사람과 알고 지낸 적이 있었는데, 곁에만 가면 탕약 냄새가 나는 것 같아(실제로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지한 표정까지 우스웠던 기억이 있다.
우유 한 컵 하시겠어요? 탕약 한 사발 어떠세요?
아, 완전 깬다.

"엄마, 바람이 불어. 바람이 무서워. 바람은 어디서 살지..."
오정희 선생님은 유치원에 다녔던 아이의 말에서 영감을 얻어 <바람의 넋>을 썼단다.
보이지 않는 것, 잡을 수 없는 것, 하지만 분명히 있는 것.
그러한 것들에 넋을 불어넣는 일.
그럼으로써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를 애정으로 바꾸는 일이 곧 글 쓰는 일, 창조일지도 모르겠다.  

저는 행복한 삶이라는 말보다 충만한 삶이라는 말을 좋아하고 그 충만함이 문학을 통해서 이루어지길 바랐습니다. 제가 가지 않은 어떠한 다른 길에 대한 선망도 동경도 없었고 능력조차도 없었다는 것은 드문 축복인 것 같습니다만 생각해보면 언제나 자신이 가장 큰 적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작은 성취에 연연해했으며 오랜 시간을 두고 해나가야 하는 일의 과정에서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하는 작은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소심함이나 문학에 대한 외경심이 너무 큰 데서 오는 상대적인 자신의 왜소함에 너무 예민했던 점 등이 그것이지요. - p. 173
나는 작가도 아니면서, 위의 구절에 완벽하게 공감했다.
오정희 선생님은 원고지에서 줄 바꾸기를 잘 안 하는 작가로 한때 유명했단다.
실제로 작가 본인이 직접 밝히기도 했는데, 원고지의 여백을 보면 성실히 써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비교적 다작은 아니지만 조경란이나 윤성희 등, 젊은 여류작가들이 글쓰기의 모범으로 삼고 있듯 꼼꼼하고도 유려한 문체는 다 저러한 각고의 성실성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보다.

나는 최소한 30센티미터짜리 자를 가지고 다니며 상대방과의 거리를 유지해야 안전하다고 생각할 만큼 사람 사이의 거리 조절에 자신이 없었다. 다정도 병인 것이어서 그렇게 분수없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 사이의 정을 중히 여기면서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덤비는 기질 때문에 종종 피차 상처를 입거나 낭패를 겪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 p. 232
평론가 김병익 선생님을 회상하며 쓴 글의 일부인데 흡사 내 이야길 하는 줄 알았다.
겉으론 그렇게 차돌맹이처럼 당차고 야무져 보이셨는데... 하다가,
나도 겉모습은 남들이 오해하기 딱 좋게 생겼다는 생각에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는 식상한 결론.  
그런데 30센티는 너무 짧지 않은가.

황혼에 접어드는 노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역시 인생사 거저 얻는 것이 없다, 란 생각이 든다.
스타일에 살고 스타일에 죽는다는 듯 오로지 포즈 잡기에만 연연하는 요즘 세태를 향해,
낮지만 곧은 목소리로 보다 겸손해질 것을, 세상을 좀더 넓게 볼 것을 타이르는 듯 하다.
책의 힘이 의심스럽다가도 이렇듯 부피감 있는 책을 읽고나면 역시 또 다시 훌륭한 작가, 좋은 책의 위력을 믿게 된다.
변덕스런 계절 속에서 이렇듯 한결같은 목소리를 만나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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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08-1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에게도 필요한 책인 거 같아요.

깐따삐야 2007-08-10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와닿는 구절이 많은데 모두 옮겨놓을 수가 없어 아쉬웠어요.^^
 
야간비행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64
생 텍쥐페리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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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간 비행 중에 실종된 파비앵의 상사, 리비에르는 어제 종영된 '달자의 봄'에서 강신자 팀장(양희경 분)을 떠올리게 했다. 원리원칙주의자인 그녀는 아이가 수술실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흔들림 없이 직장에서의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철두철미한 것처럼 부하직원들에게도 똑같이 엄한 룰을 적용한다. 아이가 걱정되어 남몰래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하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 만큼은 찔러도 바늘이 휘어질 만큼 단단하고 차갑게 무장되어 있다. 드라마 초기에는 좀 너무한다 싶기도 했다. 그런다고 작업 능률이 팍팍 오를 줄 아느냐, 달자가 뭘 그렇게 크게 잘못했느냐, 임신까지 한 직원한테 되게 뭐라 그러네...투덜거리며 그녀를 배척했다. 하지만 극의 진행과 더불어, 뻔한 드라마 구도 상 어느만치 예상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강신자 팀장은 지칠 줄 모르는 프로의식의 본보기가 되는 동시에 부하직원들에게 남다른 마음씀씀이를 보여준다. 첫 눈에 살갑고 다정하게 다가왔지만 갑자기 뒤통수를 맞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은 건너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 는 말의 교훈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평균적인 여론에 비추어 봤을 때 강신자 팀장이나 리비에르는 직장 상사로서 첫 눈에 환영받기는 어려운 사람이고 아무리 겪어본다 한들, 그들을 향해 끝끝내 원망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받으려면 동정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동정하지 않는다. 아니 동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나도 우정과 인간적인 기쁨 속에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의사는 자신의 직무를 행하는 과정에서 우정과 인간적인 기쁨을 얻는다. 나는 부하들이 사고에 대처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저녁 때, 항공지도를 펴놓고 사무실에 앉아 있노라면 이 숨은 법칙이 잘 느껴진다. 내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아무리 규율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해도 그 흐름에 내맡기면 이상하게도 사고가 일어난다. 마치 내 의지만이 비행중의 기체에 이상이 생기는 걸 막고, 그리고 우편기의 도착을 지연시키는 폭풍을 막기라도 하듯이. 내 능력에 나 스스로도 이따금 놀란다.'  (pp. 69-70)

  그는 로비노의 목소리를 들었다. "본부장님...... 그 부부는 결혼한 지 여섯 주밖에 안되었습니다......" "가서 일이나 하시오." 리비에르는 사무원들을 둘러보다가 잡역부들, 정비사들, 조종사들 등 신념을 갖고 자신의 사업을 도와주었던 모든 이들을 떠올렸다. 그는 '섬들'에 대해 하는 얘기를 듣고 배를 만들었다던 그 옛날의 작은 도시들을 생각했다. 그 배에 희망을 싣기 위해, 그들의 희망이 바다에서 돛을 펼치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한 척의 배로 인해 모든 이들이 한층 성장하고, 그 자신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던 것이다. '어쩌면 목적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행동은 죽음에서 해방시켜준다. 그 배로 인해 그들은 오래도록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전신들에 의미를 주고, 밤샘을 하는 직원들에게 위험성을 인식시키고, 조종사들에게 비장한 목표를 부여할 때에 비로소 리비에르도 그 죽음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바람이 바다에서 범선을 다시 달리게 하듯이 활기가 그 사업을 되살릴 때, 비로소 그도 죽음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되는 것이다. (pp. 106-107)

  그가 만약 단 한 번이라도 출발을 중지했다면, 야간 비행의 명분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내일이면 자기를 비난할 마음 약한 자들을 앞질러 리비에르는 지금 또 다른 한 팀의 승무원을 밤하늘로 내보낸 것이다. 승리니...... 패배니...... 하는 따위의 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생명은 그런 표상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이미 새로운 표상을 준비하는 것이다. 승리는 한 국민을 약하게 만들고, 패배는 또 다른 국민을 각성시킨다. 리비에르가 어쩔 수 없이 겪은 패배는 어쩌면 진정한 승리에 가까워지라는 격려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오직 전진하는 일뿐이다. (pp. 119-120)

  아무것도 제대로 자리잡히지 못했던 야간 비행의 초창기. 항로 개척을 위해 스스로를 예측불허한 위험 속에 던져야 했던 파비앵을 비롯한 수많은 조종사들. 개인적 안위와 쾌락을 초월한 그들의 목표의식과 책임감 덕분에 오늘날 보다 자유롭고 안전한 비행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편안히 현재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과거 선구자가 피땀 흘려 이룩한 성과의 혜택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기 마련이다. 파비앵의 희생 뒤에는 리비에르의 명령이 있었고, 부하직원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을 여유도 없이 중요한 것은 오직 전진하는 일뿐, 이라고 단언하는 리비에르는 모든 것을 묵묵히 짊어지고 가는 결연한 선구자의 모습이다.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면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 뒤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사람은 때로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이번 학기에 신청한 강의 두 개는 모두 영문학 관련 이지만 실제로 그 분야에 대해 논문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조교 말에 따르자면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의 인연을 가리켜 부부라 한단다. 헤어지고 싶어도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 곯머리를 썩지만 열 달이 지나면 알아서 나오게 되어 있는 논문은 그들이 낳은 자식이란다. 분배의 법칙이 여기에서도 적용이 되니 원하는 지도교수에게 배정을 못 받을 수도 있다고. 어쨌든 그저 운좋게 연이 닿기를 바랄 수밖에. 아직은 적응 중이고 수업도 몇 시간 안 들었지만 같은 영문학 전공자이면서도 성향이 많이 다른 교수님들을 보는 일이 재미있다. 문학사를 맡은 교수님은 강의 시간 내내 사적인 이야기라곤 전혀 안 한다. 한 학생이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좀 쉬었다 하자고 말하자 약간 당황해 하는 표정이 스쳤고, 쉬는 동안에도 아무 말 없이 교재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계셨다. 나이도 젊은 분이 어찌 저리 빡빡할꼬... 자료를 찾아보니 사뮤엘 베게트에 대한 심오한 논문이 눈에 띄었다. 역시 고도의 지식을 갖춘 분이란 느낌이 들었다. 친해질 기회가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고도가 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가끔 개그야나 무한도전을 보시는지.

  반면에 교육방법론을 가르치는 교수님은 외모는 로빈 윌리엄스, 목소리는 정형돈이다.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정감 있는 모습. 살짝 눌려 있어서 최홍만이라도 불러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쭈욱 한 번 늘려주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들지만, 천진한 웃음과 장난기 어린 말투가 그 외양과 딱 어울린다. 문학사 시간에 여기저기 밑줄을 치며 귀를 쫑긋 세우고 머리를 쥐어짰다면, 방법론 시간에는 가끔 재미가 없어도 너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심하게 끄덕여주기만 하면 교수님이 마냥 즐거워하시니 훨씬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빡빡한 원서 교재 다섯 권을 정해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과제를 던져 주시는 모습을 볼 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염두해 두어야겠다는 소심한 생각도 들었다. 첫 눈에 사람 좋아 보인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니까. 언뜻 보기에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이 은근히 들볶아대면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하고 더 억울할 때도 많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고생하면 고생한 만큼 얻는 게 많다고 한다. 영어교육학 분야에서 저명하신 어떤 교수님은 "제가 영어로 말을 잘 못해서..." "제가 영어로 발표를 하는 것에 서툴러서..." 이런 말로 프리젠테이션의 서두를 시작하면 여지 없이 바로 F 학점을 날리신단다.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듣다보면 거의 폐인이 될 정도로 방대한 학습량과 과제량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끝나고 나면 한껏 실력이 향상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고. 전에 시험장에서 보았던 모습을 기억하기론 머리카락이 많이 없으셨고 일단은 매우 상냥하고 친절하셨다. 강의를 신청하진 않았지만 그 정도로 철저하고 엄격한 분이라면 뭔가 배울 점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현장에서도 그렇지만 일이나 업무라는 건 사실 별 게 아니다.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고 맡은 이후에는 성실히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정작 사람을 진 빠지게 하고 환멸스럽게 하는 건 본업 이외의 자잘한 인간관계를 강요하는 풍토다. 과제는 적게 내주지만 정기적으로 화분에 물을 주러 오라고 말하는 교수님 보다는, 잔심부름 같은 건 일절 시키지 않고 과제를 억수로 내주는 교수님이 훨씬 낫다.

  그 정체마저 뚜렷하지 않은 포스트모던이니 글로벌이니 하는 말들이 시대를 잠식하면서, 많은 것이 아무런 룰도 없이 미친 듯 널을 뛰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야간비행의 리비에르와도 같은 원칙주의자, 행동주의자의 면모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리비에르는 행복을 성실한 의무 수행에서 찾는다. 의무 따로, 즐거움 따로, 라고 여기는 요즘 세태에 완전히 역행하는 태도다. 찰나의 쾌락을 찾아 헤매는 사람은 찰나의 절망도 견디지 못하지만 더 큰 목적, 더 큰 미래를 향해 의지를 굳건히 하는 사람은 잠시잠깐 스쳐 지나가는 감정 때문에 큰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면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는 세상이 되었지만 야간 비행의 실용화였든, 쵸코파이의 머쉬멜로우였든,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하고 계발했던 사람들은 패배는 승리를 향한 격려라고 믿으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를 부추기고 또 부추겼을 것이다. 끝없는 긴장 속에서도 의무 수행 이외에 다른 것에 눈 돌릴 줄 몰랐던, 그 오롯한 목표 의식과 책임감이 그리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오직 전진하는 일뿐이다, 라는 이 말이 몹시도 생경하게, 그리고 아쉽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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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 2007-03-19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행복한 한 학기가 되기를 기도할게요 ^^ 항상 연구하고 노력하는 모습 보기 좋네요..

깐따삐야 2007-03-20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retre7님, 고맙습니다. 요즘 설레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계시겠군요. 에구, 부러버라...^^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개정판
한강 지음 / 열림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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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서관에서 이 산문집을 빌려왔던 어제 KBS '낭독의 발견'이란 프로그램에 한 강이 출연했다. 반가운 우연이었다. 작가는 정현종의 시를 낭송하고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라는 자작곡을 직접 불렀다. 낮지만 긴 여운의 목소리.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청신한 여대생 같았다. 그 잔잔한 아우라는 조명 아래 번쩍거리던 진한 메이크업의 아나운서가 안 되어 보일 정도로 신비로운 빛을 발했다.

  한 강을 처음 알게 된 건 <여수의 사랑>이란 소설집을 통해서였고,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건 <내 여자의 열매>라는 책을 읽고난 후였다. 이제껏 만나보지 않은 독특한 감성이었다. 전경린의 귀기, 은희경의 위악, 신경숙의 신파에 물려갈 즈음에 이 작가를 알게 된 건 특별한 수확이었다. 인간이나 속세, 그 너머의 것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다. 그 또래라면 으레 그러하듯, 사랑에 실패했거나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태생적이고도 근원적인 향수 같은 것이었다. 오정희나 최 윤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가만가만 숨을 죽인 채 꼼꼼한 독서가 필요했다. 많은 독자를 갖기는 어려운 작가란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신문 지면을 통해 그녀가 소설가 한승원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별로 예쁜 얼굴은 아닌데 새 같기도 하고 사슴 같기도 한, 알듯말듯한 작가의 얼굴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 책은 그녀가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사연과 단상들로 이루어졌다. 열림원에서 나온 책인데 새빨간 표지부터 큼지막한 글씨까지 외관상 썩 마음에 드는 책은 아니었지만 그 안의 글과 사진만큼은 다른 어떤 책들보다도 내 마음에 들었다.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있는 모습이든, 방송에 출연하여 보여주는 모습이든, 몹시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품이라 짐작했는데 오히려 그렇듯 무색무취한 성품이 많은 사람들과 친구로 지내는 데 장점으로 작용했다는 걸 알았다. 한없이 좋기만 하다거나 게으른 우유부단이 아니다. 그녀의 견고한 자아는 연하고 투명한 막으로 감싸져 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시인과 소설가들은 3개월 동안 함께 기거하며 서로의 사연과 생각을 공유한다. 동남아나 아랍처럼 주로 제3세계에서 온 그들은 각기 다른 개성으로 특별한 추억의 소재가 된다.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모국으로 돌아갈 것을 걱정하는 베트남의 페이민, 체격답지 않게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던 팔레스타인의 마흐무드, 거짓말은 사람을 약하게 하므로 나는 항상 진실만을 택했기에 강해졌다고 말하는 터키의 에란디스, 엄격한 문학적 잣대를 지닌 채 스스로를 단련하던 고집쟁이, 브라질의 베르나르도, 불안한 사랑을 하고 있음에도 아이처럼 천진하던 쇼퍼홀릭, 아프리카의 아예타... 한 강은 낮은 시선과 깊은 눈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각자의 사연에 조용히 귀 기울인다. '초원의 빛'이라는 서점에 모여앉아 작품을 낭독하는 장면은 무척 부러웠다. 누군가는 눈물도 흘리고 누군가는 그를 안아주었겠지.

  교원대는 무슨 옛 사원이 아닐까 싶을 만큼 고요하고 도서관을 오가며, 캠퍼스를 거닐며 마주치는 눈빛들은 대개 너무나 진지해서 순간, 부끄러워지곤 한다. 한 학기 동안 들을 강의를 신청하고 오늘에서야 비로소 교수님들과 동기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학부 때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영문학이 좋아서 대학원에 왔다는 사람부터 교사가 되기 위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시작해보겠다는 사람, 머릿속에서 중국어와 영어와 한국말이 마구 싸우고 있는 것 같다는 앳되어 보이던 중국인, 그리고 나처럼 이런저런 혜택 누리며 편하게 학위 따보겠다고 찾아든 현직교사들... 자기소개를 하던 중에 3년 동안 남자중학교에 있으면서 너무 힘들었고... 하다가 속으로 아차, 싶었더랬다. 바로 그 길을 가기 위해 교직이수를 하려고 입학한 사람들이 태반인 마당에 저런 배부른 소리나 하고 앉았다니, 참 왕재수다.

  한 강은 3개월이었지만 나는 2년이다. 엄마는 혈세를 낭비하지 말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셨다. 도서관에는 읽어도 읽어도 남을 만큼의 책과 논문들이 있고 강의실을 채우는 형형한 눈빛들은 나를 바짝 긴장시킨다. 교수님은 학부생과는 달리 진지함을 갖추라, 는 말씀을 하셨고 조교는 앞으로 2년간은 학생으로 사시라, 며 따가운 일침을 놓았다. 초원의 빛, 이라는 예쁜 이름의 서점도 없고 아마 낭독회 대신 세미나가 있겠지만 내 인생에 이런 시간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 만큼은 틀림이 없다. 오랜만에 깨알같은 원서를 보자니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지만, 오늘 어떤 선생님의 말처럼 행운을 실력으로 바꾸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사람과 사람을 둘러싼 것들, 나와 나를 둘러쌌던 것들에 대하여 한 강처럼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이 온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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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7-03-09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돌아가고 싶은 학생시절은
다시 돌아갈 수 없어 더욱 애뜻합니다.

모쪼록 하루하루 기억될만한 멋찐 일들이 펼쳐졌으면 좋겠어요..
깐따삐야님의 지금이요! ...

봄봄 2007-03-09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아님의 리뷰에는 삐아님의 이야기가 있어서 더^^ 즐겁습니다.
얼마전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고 난 후 <여수의 사랑>을 주문할려고 하다가
뭔가 찜찜하여 책장을 훑어보니 먼지를 곱게 묻은 <여수의 사랑>이 있더군요.ㅋㅋ
요즘은 시간과 함께 제 삶의 치열함이 퇴색해갑니다.

개츠비 2007-03-0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아님, 좋은 책들 많이 읽으시고 계시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요즘 결혼준비 때문에 무척 바쁘답니다. 그래서 책에서 멀어지고 있어요.결혼후에 좋은 책들 많이 읽으려구요...다시 카뮈홈두 살리는 날을 고대해 봅니다. 언젠가 그렇게 될거에요...^^

깐따삐야 2007-03-10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고맙습니다.^^ 성실히 보내도록 노력해야겠어요.

봄봄님, 마지막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씁쓸하네요. 예전에는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게 참 싫었는데, 요즘은 목적이 뚜렷하지 않으면 당최 움직여지지가 않으니 말예요.

sretre7님, 요즘 힘드셨겠어요. 그 문제에 대해선 강경하게 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혼 정말정말 축하드려요! 분명 성실하고 자상한 가장이 되실 거에요. 나중에 카뮈홈에 행복한 풍경이 많이많이 올라오길 바랍니다.^^
 
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시골 출신이지만 직접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없다. 그런데도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완벽하게 정직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고, 그건 농사밖에 없을 것 같았다. 글줄이나 써가며 편안하게 살아왔으면서 웬 엄살인가 싶고, 또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꿈도 망상도 아니라 순전히 유전자 때문일 듯 싶다. ...... 여자들은 요새 여자들 핸드백처럼 늘 호미가 든 종댕이를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서 김매고, 밭머리건 논두렁이건 빈 땅만 보면 후비적후비적 심고 거두던 핏줄의 내력은 자랑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꽤 집요한 것 같다. (p. 51)

  여러가지 사정 상, 당장 그러기는 어렵겠지만 가족들에게 종종 시골로 이사 가고 싶다는 말을 비칠 때가 있다. 나중에 아이들을 낳고 기를 때에도 그 곳이 산도 있고 들도 있는 시골이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위의 대목처럼 이건 꿈도 망상도 아니라 순전히 유전자 때문일 듯 싶다. 어릴 적, 추운 겨울마다 앞마당의 샘에 나와 머리를 감을 때에는 내가 하루빨리 이 곳을 뜨던지 해야지, 라고 투덜거리곤 했고 그건 순전히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매스컴에서 귀농이란 말이 들려오거나 기회가 닿아 산과 들을 둘러보고 올 때면 마음이 공연히 뒤숭숭해지곤 했다. 촉촉한 흙의 촉감과 달큰한 딸기향을 오감으로 느끼며 맨발로 딸기밭을 매던 아이,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즈음 된장찌개에 넣을 풋고추를 따기 위해 고추밭으로 달려가던 시골 아이가 바로 나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집요하다. 그 기억은, 아마 요즘의 아스팔트 킨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촌스러운 유전자를 내 몸 어딘가에 집요하게 새겨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을 닮아간다 했던가. 박완서님의 신간을 읽으면서 이 분도 자연히 자연을 닮아가는구나,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이제는 눈이 아파서 글도 제대로 못 읽겠구나, 하시던 엄마를 떠올리며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책 한 권을 묶어내기 위해 때로 깔깔한 눈도 비비고, 저려오는 손도 주무르고, 뻐근해오는 어깨도 두드리고 했을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니 잠시 송구스럽기도 했다. 값싼 재주만 부리다 쉬이 잊혀져가는 작가들에 비하면 알토란 같은 얘깃거리를 들고 뒤늦게 등단해 지금껏 모범적 삶을 일궈오고 있는 박완서님은 문단의 원로이자 우리시대의 어머니, 라고 해도 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히 요술을 부린다 싶을만치 비루하고 남루하기 그지없는 인간사를 천의무봉의 글솜씨로 요리해내는 것을 보면서 타고난 작가란 이런 것이구나, 감탄했더랬다. 그러나 읽기 쉬운 글은 그만큼 쓰기는 어려운 법.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같기도 하고 동네 사랑방 수다 같기도 한, 쉽고도 재미있는 이야기 한 가락을 읊기 위해서는 점점 더 노쇠해지는 심신과 싸우는 강인한 정신력이 뒷받침 되었을 것이다. 31년생의 작가가 두툼한 수필집을 묶어 내놓고는 책머리에 '하지만 이 나이 이거 거저먹은 나이 아니다'라고 당차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숙연해지는 한 편, 어쩐지 빙글빙글 웃음이 나기도 했다.

  새 책에서 작가는 꽃을 키우고 풀을 매고 계절을 보내며 나이 들어가는 일상 속에서 사람과, 음식과, 시대와, 엄마를 그리워한다. 나를 나로 있게 하고 작가를 작가로 있게 한 것, 결국 팔할의 바람이란 것은 그 사람과 음식과 시대와 엄마가 아니겠는가. 소싯적의 옴팡진 촌철살인을 아예 버린 것은 아니지만, 기억들을 보듬어 감싸 안는 작가의 품이 훨씬 더 푸근하고도 넉넉해졌다. 글을 읽으며 문득 나도 박완서님 같은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인형을 업고 있는 외손녀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밥숟가락 위에 참게장을 올려주며 입맛을 잡아주는, 곰살맞고도 유머러스하고, 맛깔스런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별난 사연도 많이 아는, 세상살이와 살림살이에 빠삭한, 귀엽고도 야무진 할머니. 늙수그레하더라도 누추하지는 않게끔, 그렇게 나이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

  먼저 산 세월이 한참인 원로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내가 전부 다 공감했다고 말한다면 거짓이겠지만 요즘의 젊은 작가들의 글을 읽었을 때보다 오히려 마음 가는 데가 더 많았던 건 사실이다. 지나온 자의 여유와 거쳐온 자의 통찰이 행간마다 넘쳐났고 삶은 곧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은 곧 그의 글이다, 라는 말을 실감했다. 봄이면 논둑마다 푸릇푸릇하게 올라오는 쑥이며 냉이를 캐러 다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나도 언젠가는, 이라는 다짐을 새롭게 하기도 했다. 너무도 한적해서 때때로 심심했지만 지금처럼 때때로 고독하지는 않았던, 그 모든 게 사실은 자연과 자연을 닮은 사람들의 순수한 생명력 때문이었다는 깨달음을 세월이 흐를수록 절감하고 있다. 이제는 농촌도 예전의 농촌이 아니긴 하지만 내가 발 딛고 움직이는 단 몇 평의 땅이라도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맨흙땅이었으면, 텃밭에서 상추를 뜯고 마늘쫑을 뽑아 밥상을 차리는 소박한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느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택배 상자 안에는 과꽃의 씨앗 한 봉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올해도 과아꽃이 피었습니다아...하던 노래의 그 과꽃. 이미지를 찾아보곤 아, 하는 반가움과 함께 지천으로 피어나던 들국화를 떠올렸다. 나는 과꽃을 부르면서도 과꽃이 과꽃인 줄 몰랐구나. 한 때는 우리 고향집 앞뜰에도 갖가지 꽃이 소담스럽게 피어났었다. 까만 씨앗을 깨뜨리면 하얀 분가루가 나오던 분꽃, 물관의 흐름을 살펴본다고 자연시간에 뿌리째 뽑아가야 했던 봉선화, 외사촌 동생이 잘 그리는 꽃 모양처럼 생긴, 예쁘기도 한 이름을 가진 채송화... 고향 땅을 떠나온 지금, 봄을 맞이하여 나는 이 꽃씨를 땅이 아니라 내 마음에 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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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7-02-23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분이 무슨 글을 이리 구수하게. ㅋㅋ
깐따삐야 님의 소망처럼 늙어가실 거라고 예감해요.
곰살맞고도 유머러스하게.
제가 깐따삐야 님 글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거든요.

깐따삐야 2007-02-23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그렇게 보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무래도 근본은 속이지 못한다고 제 뿌리가 시골에 있기 때문인지, 때로 이렇게 시골 아줌마스러운 글을 쓰는가 봐요.

봄봄 2007-02-2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인터뷰글을 옮겨봅니다^^

-70대의 시간이 마음에 드십니까?
=뜻하지 않은 나이죠. 예정에 없었던. (웃음) 걱정도 없고 먼 계획도 없고 하루하루 편안히 가요. 예전에는 작가로서 계약도 하고 연재도 했지만 이제는 매이는 일은 안 하게 되더라고요. 어찌 보면 여벌의 삶이지만 내가 원했던 삶이 이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경제적, 육체적, 감정적으로 내가 온전히 독립했다는 자유의 느낌이 굉장히 좋습니다.

깐따삐야 2007-02-2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봄님, 70대의 시간이라... 저로썬 아직 상상하기 어렵지만 경제적, 육체적, 감정적으로 온전히 독립했다는 자유의 느낌이라니, 늙는 것도 기대가 되려 합니다. 물론 한평생 남들보다 열심히 산 원로 작가나 누릴 수 있는 복록이겠지요.^^

봄봄 2007-02-25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그라지요..아,,근데,,넘 부러분거 있죠..감정적으로 독립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하면서 말입니다. 제가 요즘 이 방을 자주 오네요^^ ㅋㅋ
 
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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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초년생이었을 무렵, 거의 전작주의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윤대녕을 탐독했던 것은 윤대녕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윤대녕을 좋아하는 어느 선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내 사랑의 방식은 그토록 무분별했다. 좋아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가 아니라 좋아하면 알아야 하며 알고 나면 보이지 않을까, 였다. 선배는 윤대녕과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좋아했고 아마 고정희나 기형도 같은 시인들도 좋아했을 것이다. 나는 우선 <은어낚시통신>과 <그리스인 조르바>로 고단한 짝사랑의 여정을 출발했다. 나중에 선배가 모교를 떠나 취직을 하고 결혼을 했을 때 이미 감정은 식은 지 오래였지만, 나는 여전히 윤대녕과 카잔차키스와 기형도 등을 좋아하고 있었다. 선배는 어느 가을 날, 롤링페이퍼에 예의 그 독특한 글씨체로 "부러지지 않는 유연함을 찾아"라고 써주었고 동경하던 선배의 소중한 말씀이니 고이고이 새겼으나, 나는 여전히 휠 줄 모르고 여기저기 부러져서는 상처만 늘려가며 살고 있다.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라는 작품집에서 만났던 단편 '상춘곡'은 내가 가장 아름다운 단편들 중의 하나로 꼽는 작품이다. 그림이 되려다 만 시처럼, 시가 될 뻔한 그림처럼, 행간마다 연두와 분홍이 엇갈리는, 애틋하고 아슴아슴한 봄빛 그 자체였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듯한, 가장 윤대녕다운 작품이 아닐까 한다. 사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는 늘 얼마만큼의 기대치가 있다. 현실의 변방에서 역마살과 도화살의 운명을 피해 갈 수 없는 남자들,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팜므파탈 같은 여자들, 실패한 시인이 지어준 듯한 카페 이름들, 바흐나 굴렌 굴드, 아바 등 시공을 초월하는 음악들, 베스킨라빈스의 화려한 달콤함에 이어지는, 고개를 떨군 채 바싹 타들어가는 초췌한 식물들의 이미지, 희망을 예견하되 현실에의 복귀가 아니라 또 다른 방황을 시작할 것만 같은 쓸쓸한 결말들... 그러한 것들이 거기에 있을 거라는,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할지언정 그 특유의 톤과 색조는 다르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엄습한다. 그것은 뻔함도, 진부함도 아니다. 익숙한 기대감 같은 것이다. 장편 <달의 지평선>이 나왔을 때 혹자는 적잖이 실망했다고도 하고 윤대녕은 장편은 무리지 않겠냐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완벽하게 몰입하여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 그녀들과 몽땅 사랑에 빠졌다. 그럴 만큼 말랑말랑한 연령이기도 했지만 삶의 한복판이 아니라 그 귀퉁이에서 아무 것도 결론 내리지 않고 시와 잠꼬대의 중간 정도 되는 은유들이나 읊조리면서 그네들과 더불어 살아갔으면 했다. 매력은 있지만 생활력이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남자들과 사랑에 빠졌다가 다시 그 사랑으로부터 빠져나와 그들을 골려주었다 얼러주었다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매력은 없지만 둘째 가라면 서러울 생활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해서 그들을 가끔 그리워하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시답잖은 낭만을 꿈꿨더랬다. 당시엔 누군가 짱돌을 넣은 양파망을 던진대도 꿈쩍 않을 만큼 삶에 관한 탄성 또한 대단했으니까. 지금은 세월의 각질층으로 인해 뻔뻔해져서 그렇다지만 그 때는 당최 아무 것도 몰라서 도리어 용감했다.

  옅은 제비꽃 빛깔로 곱게 장정한 <제비를 기르다> 역시 익숙한 기대감을 갖고 읽었다. 좀더 따스하고 의젓해진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마음은 어쩐지 처연하고도 호젓했다. 가까스로 청승을 비껴나 그럴듯한 폼만 잡고 말만 청산유수로 뻔드르르하게 할 뿐, 사실은 웅크린 어린애나 다름없었던 윤대녕의 남자들이 이제는 조금 달라진 것도 같았다. 우연인 듯 필연처럼 인연이 엮이고, 문득 하나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섬으로 육지로 떠돌고, 일상 저 너머에 있는 헛것에 매달려 녹록찮은 은유를 덧씌우는 기법은 비슷했지만, 이제는 운명에 쓸리고 휘둘린다는 느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라도 순응하고 감싸고자 하는 곡진함이 느껴졌다. 일상에 침입한 예고 없는 변화나 균열들에 대처하는 방식들도 지지부진하고 어릿어릿하기만 했던 과거에 비하면 상당 부분 적극성과 현실성을 띄고 있었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스토리 라인에 여전히 비슷한 플롯의 반복이었지만 언제나 '나'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를 통해서 타인을 바라보거나 의식하고, 타인의 내면에서 들여다보고자 했던 것 또한 '나' 뿐이었던 우울하고 이기적인 나르시스트가 타인의 운명과 상처의 생김생김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 같았다. 찬이 초라하기에 역설적으로 손이 많이 갈 수 밖에 없는 밥맛의 깊이(연), 당신의 입안에 남아 있는 치약 냄새를 사랑했노라는, 다소 유치하지만 이보다 더 사실적이기도 힘든 고백(못자국), 하루 세 번 먹는 밥과 세 번 닦는 이처럼, '나'는 포즈 잡을 겨를 없이 꾸역꾸역 이어지는 생활의 발견 앞에서 슬그머니 겸손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노회한 것 까지는 아니고, 윤대녕은 한 두 갈피 정도는 언제나 옹골차게 노회함이 쳐들어오지 못할 자리를 마련해두고 있을 법 하지만, 오랜만에 성숙의 향기가 은은히 우러나는 근사한 작품들을 만나 반갑고도 즐거웠다. 안 보는 사이, 무턱대고 퍼져가지고는 달통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허접스런 이야기들을 묶어가지고 새 책이랍시고 들고 나오는 작가들도 있는데 <제비를 기르다>는 역시 믿고 읽을만한 중견작가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신뢰감을 주었다. 어디 하나 꼬집을 데 없이 유려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읽히는 문체 또한 건재해서 역시 내가 좋아하던 그 사람 맞구나 싶어 다행스럽기도 했다. 선배는 떠났고 윤대녕은 남았다. 어차피 남을 사람은 윤대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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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5 0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7-02-1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반갑습니다. '상춘곡'이 님과 저를 이어주네요. ^^

봄봄 2007-02-15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구절이 맴맴 도네요^^ 선배는 떠났고 윤대녕은 남았다. 어차피 남을 사람은 윤대녕이었던 것이다..씩씩하십니다..홧팅..님의 대문그림이 영화 <바람피기 좋은날>에 잠깐 스쳐가더군요..^^

깐따삐야 2007-02-16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봄님, 반가워요. 별명을 예쁘게 지으셨네요. 좋아서 걸었는데, 여기저기서 종종 눈에 띄는 그림이더라구요.

RAJAH 2007-02-22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춘곡.. 정말 좋은 작품이에요. 한동안 베껴쓰며, 외우며, 푹 빠졌었는데.. 같은 느낌을 받은 분을 만나다니 정말 반가워요. 헤헤 깐따삐야 님의 리뷰를 읽으니 다시 윤대녕을 읽을 마음이 생기네요.

깐따삐야 2007-02-23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neenrajah님, 상춘곡을 정말 좋아하시는 분을 만났네요. 베껴쓰며, 외우며...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저 봄이 올 적마다 다시 읽어봤으면, 하는 정도랍니다.^^

비로그인 2008-01-24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너무 좋아요...아직 상춘곡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꼭 읽어봐야겠어요.
저는 이 책에서 '탱자'를 볼때마다 울어요.
읽은책을, 그것도 단편을 또 읽는 습관은 원래 없는데..^^

깐따삐야 2008-01-24 16:48   좋아요 0 | URL
어므낫. 리사님은 왜 탱자를 볼 때마다 우실까요. 감수성도 풍부하셔라.^^
근데 윤대녕 단편들이 참 슬프고도 아름다운 건 맞는 것 같지요?
'상춘곡'은 봄처럼 화사하고 촉촉한 작품이었어요. 좋아하실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