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 - 여덟 번째 개정판
실반 바넷 지음, 김리나 옮김 / 시공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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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킨에 대한 영화를 보고 생각이 나서 읽은 책. 미술 미평에 관해 많은 것을 아우르고 있다. 논문 쓰는 법, 실제 비평문의 예들, 간단한 사조사, 등등, 한 권의 책이 담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상을 담고 있다. 특히 좋았던 것은 학생들의 비평문을 싣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의 한 편은 아주 인상적이었고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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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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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에 이 책을 첫 번째로 읽은 것은, 지금이 두 번째이고, 중2때였던 것 같다. 무척 충격적인 책이었다. 루팽 대 홈즈 수준의 독서에서 넘어갔으니 그랬을 수도 있는데, 첫 문장의 장황함, 충격적일 정도로 적나라한 인간 실재에 대한 묘사, 그러다 후반부의,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사상범들, 늙은 현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약에 대한 강독까지... 이런 것이 소설이구나 하는 깨달음에서, 이런 것이 소설인가 하는 의구심 사이를 오가게 하는, 쉽게 갈피를 잡기 힘든 작품이었다.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충격은 여전했다. 톨스토이 개인의 주관이 불쑥불쑥 끼여드는 것에 대해서는 선호나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 그 점을 제하고 보면 이 책은 시간의 풍화를 전혀 겪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19세기에 톨스토이가 이 책을 출간하여 중2인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을 시간적 괴리감과 현재의 내가 부활을 다시 읽으며 중2적 시대를 되돌아보았을 때 느끼게 되는 시간적 괴리감 중 어느 것이 더 클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말도 안되는 엉뚱한 이야기일까? 종종은 우리가 사는 지금의 시대는 참으로 노회한 시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부활의 곳곳을 장식하는 이상주의적 귀절들은 때로는 참을 수 없는 위화감을 주지 않는가? 그러나 아이러니는 부활은 철저하게 사실주의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상은 어디에서 배어나오는가? 그것은 도저한 사실주의와 노회함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부활이라는 작품은 이에 대해 긍정의 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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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성에 관하여 - 개정판 비트겐슈타인 선집 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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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얄팍한 책이지만, 읽는 데 정말 정말 오래 걸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 책이 난해하다든지 심오하다든지 해서라기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지루해서 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런 지루함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직전까지 써내려간 철학적 단상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이 철학자의 최종적인 검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말 그대로 날 것의 노트 묶음이다.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집요하게 고찰하고 있다지만, 반복은 불가피하고, 그 집요한 고찰들에서 빼어난 영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읽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철학하는 방식을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는 있다고 본다. 


책의 내용은, 무어라는 영국 철학자가 쓴 일련의 논문들에 대한 코멘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을 희화화할 수 있는 사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무어는 "나는 여기 내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아"와 같은 명제에서 우리 의식 밖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도 여타의 철학자들에 동조하여 무어의 증명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게 독특한 것은 무어가 '알다' 라는 말을 오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즉, 무어가 제시한 명제들은 '알다'라는 말과 의미롭게 어울릴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그 확실성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명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예컨대, "여기 내 손이 있어"나 "지구가 존속하고 있어"와 같은 명제들. 


내 관점에서는 비트겐슈타인에 별로 동조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의미로움'에 대한 기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컨대, 이른바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랭귀지 게임이라는 기준점을 도입하여, 예컨대 무어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알다' 라는 말은 오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도 기준점은 다르지만 똑같은 짓을 했다. 나는 사고에 자꾸 제한을 두려는 이런 검열관적 태도에 반감이 있다.) 그러나 오용을 말하려면 어떤 특정한 사용에 특권적 권위를 주어야 한다. 이 경우 비트겐슈타인에게 그것은, 참 혹은 거짓이 될 수 있는 진술이라는 의미에서의 명제와 어우러져 사용될 수 있는 한에서의 '알다'의 용법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러한 용법의 '알다'에 특권을 주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예컨대 비트겐슈타인은 "나는 여기 내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아"와 "나는 지구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를 동일한 기준에 의해 '알다'라는 말을 오용한 것이라고 판단하지만, 이 두 문장의 기이함은 각각 다른 이유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의의가 사태의 구체성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한 것이라 한다면, 그 사태의 구체성은 더욱 구체적인 구체성이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는 재판정의 비유가 허다하게 나온다. 비트겐슈타인은 판사의 역할을 한다. 반면 나는 피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본다. "말은 그렇지만, 법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세상에나!")


(인간 비극. 소년이 얼마나 빨리 늙는가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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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BBC를 시청할 수 있는 앱인 BBC iPlayer 영화 섹션에 한국 영화 세 편이 올라와 있다. (아마 한국에서 iPlayer를 이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악인전, 공작, 그리고 버닝. 이 섹션에 올라와 있는 외국어 영화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한국 영화가 세 편이나 올라와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왜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다.


악인전은 그렇고 그런 깡패 영화다. 마동석의 캐릭터 때문에 선택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동석은 기존의 동양계 남성 배우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배우이다. 서구권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공작은 매우 우아한 첩보물이다. "팅커, 테일러..." 같이, 총격씬이나 추격씬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스타일의 첩보물. 르 카레 원작의 작품들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실화에 기반한 것이니 만큼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매우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보인다. 많은 한국의 작품들에는 서구권 작품들에서 찾기 힘든 매력이 있는데, 이 작품도 그렇다.


버닝.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보면서 까뮈의 이방인을 떠올렸다. 이방인은 형이상학적 소설이다. 그런 고로 주인공 뫼르소가 소설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인격적 전변을 겪는 것도, 납득은 안되지만 그냥 넘어가준다. 어차피 우화 아닌가, 하면서. 그러나 버닝에서의 종수의 인격적 전변은 그런 식으로 양해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이 작품의 핵심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어느 정도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벤이라는 인물의 성공적 형상화가 이 영화의 주제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감독이 만든 훌륭한 영화다.


악인전을 제하고 나 나름대로 평가해 보자면 역시나 한국의 작품들, 한국의 영화들의 장점은 리얼리즘에 있는 것 같다. 리얼리즘은 쉬운 쟝르이기도 하고 쉽지 않은 쟝르이기도 하다. 한국의 문화가 고도화될수록 리얼리즘에서 탈피하려는 유혹이 커질 것이다. 즉, 그러할수록 리얼리즘은 고수하기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여정일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한국은 일반 문화 대중과 문화 창작 집단 사이의 괴리가 크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이반이 필연적일 것 같지는 않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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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from: https://news.zum.com/articles/74298573?cm=news_media_rank)


옆에 페미니즘에 대한 댓글이 계속 따라다니고 있으므로 한 마디 해두기로 한다.


누구든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칭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의 폭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예컨대, 트랜스 여성을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한 극단에 누가 동조할 수 있을까? 반면, 페미니즘이란 말 대신, 윤석열이 얘기하는 것처럼, 휴머니즘이란 말로 충분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예컨대, 사회에 구조적 성차별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그리고 그에 대한 대책에 대해 휴머니즘은 무력하다. 페미니즘을 필요로 하는 고유한 영역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념은 문제를 인식하게 해주지만 해결책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해결책을 제공해주지 못할 뿐 아니라 때로는 해결 자체를 왜곡할 수도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그렇다. 페미니즘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위의 아름다운 사진이 포착하고 있는 현장에서, 이재명은, 여성의 신체적 특성 때문에 여성이 더 많은 화장실 공간을 필요로 하고, 그러므로 앞으로 공공 화장실을 지을 때 여성용을 남성용의 1.5배 짓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것을 페미니즘적인 정책이라 해야 할까, 온정적 성차별주의라고 해야 할까? 여성 전용 주차장의 경우는 어떤가? 생리 휴가는 어떤가? 이런 문제들은 이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이런 문제들에 일정한 기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많은 경우 이런 온정적 성차별주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분히 온정주의적인 정책이 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은 철폐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온정주의적이지는 않다. 예컨대, 성별 할당제는 온정주의가 아니라 다양성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 예컨대, 공무원 임용과 진급에 있어 하급의 경우에는 남성이, 상급의 경우에는 여성이 할당제의 혜택을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일방 성에 특혜를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할당제가 현실에서 왜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별 임금 격차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자본주의란 더 적은 돈으로 더 많은 성과를 낼 수만 있다면 원숭이라도 고용하는 곳이므로, 성별 임금 격차가 설사 존재하더라도 거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등등의 반박이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요컨대, 프리미엄이라는 것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예컨대, 영국 회사의 경우 네이티브 백인이 임금 책정과 진급에 있어, 생산성과 상관없이, 프리미엄을 받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지만, IMF 당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잘려져 나간 사람들은 여성과 신규 인력이었다고 한다. 여성의 경우에는 더블 인컴 가정의 주수입원은 주로 남성이므로 여성을 해고하는 것이 가정 경제에 타격을 덜 줄 것이라는 고려가 있었다고 한다. 즉, 해고에 있어 경제 논리보다는 온정주의가 작용한 셈이다. 이러한 온정주의에도 논리, 즉 나름의 합리성이 있지만 요즘 세상에서 그 합리성은 이미 비합리성일 뿐일 것이다. 현대 한국의 직장에 있어 성별 임금 차이가 남성 프리미엄 때문인지, 아니면 남성이 그만한 성과를 보여서인지는 데이터를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보면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벌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온정주의적인 정책에 대해 분명히 반대한다. 그것은 단순히 현대 사회의 기본 관념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온정주의적 정책 때문에 여성을 고용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안을 하나 하나 따진다면 합리적 결론을 도출할 수 없는 경우는 드물 것이라고 믿는다. 페미니즘이냐 안티-페미니즘이냐는 이념 다툼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방안을 만들어 낼 것이냐에 집중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런 현대적 합리성은, 나 자신 남성으로서 말한다면, 남성을 좀 더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병사 월급이 만원 안팎에 불과했다. 군대란 "남자라면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월급을 주느냐 마느냐가 문제시되지도 않았다. 지금은, 국가가 강제로 나의 노동력을 징발한다면, 그에 맞는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 합리성이 되었다. "남자라면 당연히"가 아니라 "사람을 썼으면 당연히"인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나는 특히 이번 대선에서 윤석열을 지지한 2030 남성들에게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미스테리하다. 이 젊은층들은 페미니즘의 어떤 부분을 반대하는 것일까? 온정주의적인 부분? 일체의 성 할당제? 여성은 군대를 가지 않는 현실? 이 친구들은 무엇에 대해 반대하고, 무엇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일까? 혹 페미니즘 이전 시대로의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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