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2월31일이 EU와 영국이 합의한 브렉싯 이행 기간의 종료일이다. 이때까지 새로운 무역 합의안에 이르지 못하면 영국은 노-딜로 EU를 나가게 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노-딜 브렉싯을 예상하고 있다. 


관세 없이 무역을 계속 하고 싶어하는 EU와 영국의 협의가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은 크게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하나는 어업 문제, 다른 하나는 영국이 EU의 규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 그런데 둘 다 해결하기 힘들어 보인다.


어업 문제. 영국은 섬나라로 풍부한 어족 자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영국이 EU에 가입하면서 영국은 자신의 바다를 다른 나라들과 나눠 먹어야 했다. 그러므로 어업은 영국이 EU 가입으로 입은 피해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브렉싯은 영국이 자신의 바다의 통제권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이 자신의 바다에 대한 배타권을 주장할 경우 EU는 영국이 EU의 수산 시장에 세금도 내지 않고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마침 영국은 어업량의 70%를 EU에 수출한다. 영국은 양보할 수 없다. 브렉싯으로 영국 바다의 통제권을 되찾아오겠다고 그동안 큰소리 치지 않았던가? EU 역시 양보할 수 없다. 영국에 둘 다를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영국이 EU 규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 EU는 영국이 EU와 관세 없는 무역을 하고 싶으면 EU의 노동 관련 규제나 환경 규제 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규제들은 기업에 곧 비용이기 때문에, 영국이 이런 규정들을 회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EU를 탈퇴하면서 선물을 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즉, EU는 양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 영국도 양보할 수 없다. 영국에게 브렉싯이란 EU로부터 영국의 주권을 되찾아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EU의 규제를 계속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브렉싯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노딜-브렉싯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다. 우리 집도 최근 쇼핑을 더 많이 하고 물건을 더 많이 사고 있다.


노-딜 브릭싯이 세상의 종말은 아니다. 누구 말대로 브렉싯의 실제적 의미는 EU와 영국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비싼 가격에 물건을 사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주권, 자유라는 매우 비현실적인 이념을 내세우는 경우의 현실적 귀결은 항상 이렇다. 앞서도 보았지만 세상은 서로 너무도 얽혀 있어서 주권이라는 개념은 매우 한정적인 분야에서의 정책이나 행위의 정당화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여튼, 브렉싯은 영국 국민들이 두 번이나 선택한 사항이다. 첫째는 국민투표로, 두번째는 브렉싯 강경파인 보리스 존슨의 내각에 어머어마한 표를 몰아줌으로써. 그러니 일단은 보리스 존슨의 주장대로 일을 처리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일을 겪고나서 나중의 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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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침 40 파운드짜리 아마존 키프트 카드를 얻게 되어서 그것으로, 사고 싶었으나 우선 순위 때문에 살 수 없었던 책 두 권을 샀다. 그 중 한 권이 <하이데거-야스퍼스 서간집>이다. 킨들 버전으로 샀고 물리 책 버전으로는 500, 600 파운드나 한다. 


요즘 하이데거의 <현상학의 기초 문제들>을 읽고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강의록이다. 강의록답게 반복되는 부분도 많고 중언부언하는 부분도 많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현장감으로 받아들인다. 책 후반부에서 지나치게 중언부언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하이데거가 강의를 질질 끄는구나, 강의의 전체 내용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는다. 


부정적이랄 수 있는 부분을 먼저 말했는데,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부분도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존재의 문제를 끌고 그 근원성을 향해 끊임없이 소급해 올라가는 과정은 여느 스릴러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그 강의실 현장에서 하이데거의 강의를 직접 들은 학생들은 그야말로 복받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 그 학생들은 신을 영접하는 기분이었겠지?


그런데 서간집을 보면 아직 30대 초반의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불평을 하는 장면이 많다. 내가 이렇게나 죽을 힘을 다해, 사적 즐거움 다 팽겨치고 몰두하여 강의를 준비했건만 강의실에는 바보들만 가득하도다... --- 나는 깨닫는다. 아, 그렇구나... 하이데거 눈에 학생들은 그렇게 비쳤을 수도 있겠구나...


저작들에서는 대체로 신중한 하이데거가 서간집에서는 아주 거침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생생한 모습들을 보는 것이 대가들의 서간이나 일기를 읽는 즐거움이다. 어느 방향으로든 터져나갈 수 있는 그 에너지, 우리가 흔히 열정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내가 현재 읽은 하이데거의 편지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반면 야스퍼스는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그래서 그 열정이라는 측면에서, 스스로 받아안은 그 내적, 외적 압박감 속에서 작업하는 젊은 철학자라는 측면에서 나는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일종의 쌍둥이로 발견한다. 하이데거가 어느 서간에서 암시한 것처럼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는 것처럼, 그대의 진보가 크면 클수록 다른 사람들과 이해의 거리는 멀어질 것이라는 것, 즉 그러한 몰이해야말로 그대의 진보의 징표가 될 것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그러한 몰이해야말로 그대의 노고의 보상일 것이라는 것...  ---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고독의 정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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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 작업을 오늘까지만 하기로 했다. 남은 부분은 내년으로 넘긴다. 원래 크리스마스 전 주까지만 하기로 했었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거의 비가 내릴 것이니 이쯤에서 맘 편하게 종료하는 게 나을 듯 하다.

 

땅을 좀 더 평평하게 해야 하고, 잔뿌리 등을 더 긁어내야 하고, 뒷 펜스 부분 등에 낮은 목책을 설치해야 하고, 잔디를 심어야 하고 등등의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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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로 덮여 있던 가든의 나머지 절반 부분(파트 투라고 부른다)에 작은 언덕들이 있어서 그것을 까내고 체로 걸러서 좋은 흙은 벌크백에 담고 잔돌이나 진흙인 것은 모아다 스킵에 버리는 작업을 이번 주 초에 마쳤다. 


목재와 철망을 사다가 체를 만들어 작업을 하루 해보고는 작업 진도도 너무 느리고 허리도 아파서, 저 많은 흙더미를 이런 식으로 언제 다 처리하나 하고 좌절감에 빠졌었다(쏘울-디스트로잉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기계를 몇 칠 대여해 사용해 보았지만 흙이 젖어 있어서 손으로 하는 것보다 효율이 더 나빴다.  


결국 하던 대로, 삽으로 흙을 체에 붓고 손으로 일일이 문질러서 고운 흙을 골라내는 식으로 작업해야 했다. 그래서 1톤짜리 벌크백 22개와 마대자루 33개 분량의 고운 흙을 골라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스킵 하나로 이 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또, 나중에 잔디를 깔 때 따로 표층흙을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 — 미친 짓이었지만 암만 생각해도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시간은 열흘 정도 걸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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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이념들 1> 하나만을 끝까지 읽었다. 이러 저러한 것들을 상수로 할 때 변수로 끼여 든 것은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 시리즈였다. 이걸 보려고 네플릭스 가입까지 했고(영국은 한달 무료, 이런 것이 없다), 덩달아 <길모어 걸스>를, 시청한 순서대로. 7, 5, 6 시즌까지 봐버렸다. (주로 세수할 때 보기는 했지만)  


나의 아저씨: 1, 2 회를 볼 때는 기가 막힌 드라마가 여기 있구나 하는 감탄을 거듭 했으나 곧 열기가 사그라들기는 했다. 여튼 한류가 그저 이름은 아닌게로구나, 다 이유가 있는 게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 대해 너무 가르치려든다거나, 대사가 중언부언한다든가, 술집을 배경으로 한 일본식 드라마 아닌가, 하는 등등의 비판도 있을 것 같다. 혹은 있었을 것 같다.


길모어 걸스: 이번에 후반 시즌들을 보면서 드라마를 형식적으로 틀짓는 구조들에 관심이 갔다. 즉, 계급 갈등과 세대 갈등. 계급 갈등은 길모어 할머니-할아버지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계급과, 식당 주인 루크를 포함하는 스타스 할로우 주민들 사이의 이질성을 뜻하고, 세대 갈등은, 길모어 할머니-할아버지와 레인의 엄마 김여사로 대표되는 부모 세대와, 로렐라이로 대표되는 자식 세대 사이의 이질성을 뜻한다. 전자들은 존재의 튼실함에 기반해 있고 후자들은 상대적으로 존재의 가벼움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 계급에 속하지만 아시아 출신 부모 세대라고 할 수 있는 김여사는 바로 이런 점에서 길모어 집안의 노인들(화이트 부르주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들 부모 세대들은 결혼 등을 통해 자신의 집단에 들어오려는 사람에 대해 배타적이고 속물적인 검증을 하지만, 맘에 들던 들지 않던 자신의 집단의 구성원으로 일단 인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존재의 튼실함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존재의 튼실함에 대한 부정성을 인물화한 것이 로렐라이라는 캐릭터다. 그러므로, 부정적 관계 속에서이기는 하지만 로렐라이라는 인물에게도 존재의 튼실함의 세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렐라이의 딸 로리에게는 존재의 튼실함의 세계에 대한 부정의 관계조차 없다. 그러므로 로리의 존재는, 길모어 할아버지가 표현한 대로, 드리프트하는 것으로 조건지워져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로리의 성장 이야기라기보다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것으로 조건지워져 있는, 혹은 운명지워져 있는, 로리에게 그 가능성이 결국 운명이 되어 버리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나는 이 극의 작가가 로리를 애초부터 그런 성격의 인물로 설정해 놓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리버럴한 부모들에게서 자란 아이들의 이런 방황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드문 것은 아니니까. 


다음은 11월에 읽은 책:

1. <이념들 1>, 후설: 지루한 초반부를 지나고나면 뭔가 설득력 있는 전망이 제시되는 절이 시작되어 기대를 품게 하지만, 현상학적 환원에 대한 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별로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끝내고나면 후설의 이념에 경도된 철학자들의 책을 찾아,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전향을 하게 한 것인가를 알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 후반부에 접어들자 매우 흥미롭고 구체적인 분석이 이어져서 일단 후설을 계속 파봐야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다시 긍정하게 되었다. 아마 다시 이 책을 읽게 될 즈음에는 상당히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것 같다.


시작했으나 끝내지 못한 책:

1. <후설의 ‘이념들 1’의 핵심>, 폴 리퀘르: 후설의 책에 대한 주석서다. 서론 부분만 읽었다. <이념들 1>을 다시 읽을 때 참고하면서 읽게 될 것이다.

2. <현상학>, 한전숙: 한국에서 가져온 책. 독자 친화적인 책이기 때문에, 즉 반복적이고 깊지 않아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일종의 용어 사전으로 활용하다가 후반 장부터 제대로 읽어나갔다. 내가 직접 읽은 후설과 이 책 사이의 간격이,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이루고 있는 진보의 지표다. 진보에 대한 느낌이 대부분의 경우 환상일 뿐이긴 하지만.

3. <내적 시간 의식의 현상학>, 후설: 전반부는 재미있게 잘 읽었는데 어느 순간 흐름을 놓쳤다. 다음에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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