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4 #시라는별 16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한자 듬성듬성 낀 이성복 시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읽다 잠이 깨기는커녕 잠이 들 지경이라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로 갈아탔다. 희한한 느낌을 받았다. 외국어를 읽다 모국어를 읽는 편안함. 웬일이니. 한자는 이제 내게 완전한 외국어여서 한글 표기 없는 글은 읽기 힘들어졌다. 꺼이~~~~~
내가 이규리 시집 <<당신이 첫눈입니까>>를 읽고 있을 때 syo님이 말했다. "이 시집도 좋지만, 정말 좋지만 저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가 더 좋아요" 라고. 아직 몇 편밖에 읽지 않아 "더 좋아요"라고는 못하겠고 '암튼 좋다'라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다.
읽은 몇 편 중 오늘 올리고 싶은 시는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이다. 마지막 세 행에서 마음이 먹먹해졌다 편안해졌다.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부음 통보는 되도록 받고 싶지 않은 전화에 속한다. 12년 전 딱 저런 상황을 맞은 때가 있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 살아계시는 동안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저 시처럼 "차일피일" 미루고 "어영부영" 지내다 부음 전화를 받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5월이었다.
그분은 꽃처럼 절정의 순간을 살다 가셨다. 내가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 중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는 분을 나는 보지 못했다. 너무 열심히만 살고 당신 몸은 돌보지 않아 병이 온 거라고 주위 사람들은 말했다. 그런 말에 그분은 개의치 않았다. 사는 동안도 씩씩했던 그분은 죽음조차 씩씩하게 받아들였다. 참으로 그분다워서 눈물 흘리는 것조차 송구해지려 했다. 그때 하려고 했던 무언가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나는 아직도 결정을 못 지은 채 "어영부영 놓치고" 산다.
이규리 시인 덕분에 언제일지 모르지만 아주 멀지는 않을 언젠가 받게 될 통보를 가볍게, 조금은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전화를 받으실 줄만 알던 당신이 내게 전화를 주셨군요. 아, 오늘이 "꽃피는 날"이었군요. 한송이 꽃으로 내게 왔다 향기 듬뿍 뿌려주고 가신 당신. 고맙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라고 덤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자면, 꽃매를 당하지 않도록 한 번 더 전화하고, 찾아보고, 노래하고, 웃어야지. 그날 따윈 없어. 지금이 그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