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도록 야문 길

20210322 #시라는별 21 

조문(弔問)
- 안도현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살아서 눈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주고 추석 가까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봐주던

이 동네의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슬프도록 야문 길이었다 

돌아가셨을 때 문상도 못한 나는 마루 끝에 앉아, 할아버지네 고추밭으로 올라가는 비탈, 오래 보고 있다 

지게 지고 하루에도 몇번씩 할아버지가 오르내릴 때 
풀들은 옆으로 슬쩍 비켜앉아 지그재그로 길을 터주곤 했다 

비탈에 납작하게 달아붙어 있던 그 길은 여름 내내 
바지 걷어붙인 할아버지 정강이에 볼록하게 돋던 핏줄같이 파르스름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비탈길을 힘겹게 밟고 올라가던 
느린 발소리와 끙, 하던 안간힘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그만 

길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풀들이 우묵하게 수의를 해 입힌 길, 
지금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 위로 
조의를 표하듯 산그늘이 엎드려 절하는 저녁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집을 잠시 내려놓고 얼마 전 구입한 안도현 시인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펼쳐 들었다. 2008년 출간된 이 시집은 안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들을 읽다 보면 시인이 ‘내가 사랑하는 시‘라며 묶어 펴낸 시집 제목처럼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이 물씬 느껴진다. 100편의 시들 중 오늘 내 마음에 쑤욱 들어온 시는 뒷집 할아버지의 죽음을 노래한 ‘조문(弔問)‘이었다.

안 시인에게 한 사람은 하나의 사람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돌아가시는 순간 ˝길도 돌아가시고˝ 만다. 그러나 앞사람의 발자취는 어디에나 남아 있는 법이고, 찾으려는 눈들에겐 언제고 발견되기 마련이다. 시인의 눈이 그런 눈이리라.

사람은 나서 짧든 길든, 좁든 넓든 길을 내며 산다. 조성배 할아버의 길은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을 만큼 길었고, 이 길 저 길과 엮여 넓어지기도 했다. 소매 걷어붙이고 마을 대소사 쫓아다니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다 보니 할아버지는 어느새 ˝동네의 길이˝, 그것도 ˝슬프도록 야문 길˝이 되었다. 그런 분 떠나는 길에 문상조차 못한 것이 죄스러워 시인은 할아버지가 오르내리던 비탈을 바라본다. 오래오래.

˝후회는 늘 막차를 타고 오고,
 풍경은 아려서 
 나도 아프다.˝ (‘시인의 말‘ 중) 

안 시인이 올라탄 후회의 막차는 오래도록 남을 조문(弔問)의 궤적을 남겼다. ˝슬프도록 야문˝ 궤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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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22 1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비온뒤 말게 개인 하늘 !
진달래 꽃이 화알짝!
향기가 화면을 뚫고 나올것 같은
봄의 전령은 비를 내려 겨울내 잠든 생명들을 이렇게 하나둘씩 화려함을 뽐내게 만드네요

˝후회는 늘 막차를 타고 오고,
풍경은 아려서
나도 아프다‘
맞습니다, 항상 후회 하면서 막차타기 일보 직전에 탑승해도 후회만 한가득 ㅜ.ㅜ
비탈길 무서워 하는 1人
행복한 책읽기님 사진속 비탈길 올라 가셨으리라 !!
월요일 한주 시작 행복한 책읽기님의 시로 시작합니다 ^.^

행복한책읽기 2021-03-22 18:37   좋아요 1 | URL
그죠. 어제 오늘 하늘이 아주 맑아요. 대신 바람은 겁나 불었답니다. 산이 아니고 바다에 온 듯했어요. ㅋㅋ 저는 scott님 올려주는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하죠. 안도현님의 시로 scott님 한 주가 봄꽃들처럼 화사하기를요 ^^

미미 2021-03-22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의 후회의 막차는 오래도록 남을 조문의 궤적을 남겼다. 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항상 잘 보여주시네요! 오늘 도서관 가는데 시집도 한 권 담아와야겠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22 18:38   좋아요 2 | URL
ㅎㅎ 미미님 도서관 서가서 담아온 시집도 올려주시와요. 미미님이 어떤 시집을 골랐을지 궁금궁금^^
 

20210319 어떻게든!

싫은 책을 다룰 때만 아니면 서평 쓰기는 좋아한다. 서평을 읽을 때는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글이 최고지만, 잘 쓰고 잘 맞는 악평도 귀하게 여긴다. 형편없는 책에 대한 죽여주는 평을 읽으면 죄책감 없이 즐겁다. 그러나 악평을 쓰는 즐거움은, 저자에 대한 동료 의식이며 고통을 가하는 것을 즐긴다는 데 대한 부끄러움 등 온갖 죄책감 탓에 우울해진다. . .(12)

현재 시점 5분의 4를 읽었다.
르 귄 언니의 저 말대로 이 책의 리뷰들은 대체로 터치하고 달려가게 만든다. 선명하고 명료한 리뷰의 정수를 맛보는 듯하다.

터치로 구입했다.
보르헤스 전집 3 #알렙
로베르토 볼라뇨의 #팽선생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

달려가 대출했다.
조지 맥도널드의 #공주와 고블린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 리뷰는 감동적이었다. 특히 다음 문장이.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 대한 격려사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옳긴 한 건지조차 잘 모르면서도 옳다고 여기는 일을 계속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에게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서, 우리들 대부분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갈망하고 얼마나 조금에 만족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쓸 수 있었다. / . . . 수많은 소설이 행복 추구에 대해 썼지만, 이 소설은 실제 행복의 빛을 발한다.(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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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3-19 1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주만화>가 눈에 확 들어와요. 컬러도 제목도!

행복한책읽기 2021-03-20 15:37   좋아요 1 | URL
ㅋㅋ 구매는 했는데, 칼비노는 넘 어려워서 언제 읽을까 모르겠어요. 표지만 보고 므흣므흣할지도 몰겠어요.^^;;j

새파랑 2021-03-19 1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줄지어 있는책 보니 또 귀가 흔들리네요 ㅜㅜ

행복한책읽기 2021-03-20 15:38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은 요즘 정말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쓰셔서 아주 귀감이 됩니다. 하루프를 좋아하실 것 같아요. ^^

scott 2021-03-19 20: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주와 고블린 찜!ヾ(๑╹ꇴ◠๑)ノ”

행복한책읽기 2021-03-20 15:39   좋아요 1 | URL
어머. AI scott님이 안 읽은 책도 있단 말입니까.^^;;;

라로 2021-03-19 21: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팽선생!ㅎㅎㅎ
암튼 저보다 먼저 끝내시겠군요. 저는 도서관에서 빌린 오디오북들 기간이 만료된다고 해서 그것들 듣냐고 책 못 읽었어요.ㅠㅠ 여기 인간들이 오디오북을 열심히 듣는지 아니면 빌려놓기만 하는 건지, 다시 빌리려면 대부분 8주 이상 걸리고, 어떤 건 거의 6개월 기다렸어요.끙

행복한책읽기 2021-03-20 15:41   좋아요 1 | URL
네. 요 책은 담주 화욜 마감이에요. 같이 읽는 책이라서요. 라로님은 오디오북 정말 잘 들으신다요. 근데 오디오북도 대기가 있다구요? 오호. 여기 신세계인데, 저는 조금 늦게 합류하겠어라. ^^

희선 2021-03-21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 사고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했군요 책을 보고 읽고 싶은 책이 생기는 건 좋은 듯합니다 그때는 한번 보고 싶다 생각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잊어버리는데, 행복한책읽기 님은 사고 빌리기도 해서 다 보시겠군요


희선
 

20210318 #시라는별 20 

위령의 날 Zaduszki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Wislawa Szymborska 

회한을 맛보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다; 
그보다는 나뭇잎에 묻는 축축한 얼룩을 털어내기 위해서다, 
그래야 잎새가 훨씬 아름답고 가벼워지니까. 

싸우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다; 
그저 미약한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 
바람으로부터 그 흔들림을 막아주기 위해서다. 

공간은 더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전나무와 과꽃 장식으로 
보기 싫은 무덤으로 덮어버릴 테니까. 

그 순간 더 많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우리 위로 공포가 아니라 적막이 내려앉을 테니. 
그것은 수많은 시도가 깃든 적막일 테니. 

여기서 시詩를 기다린 건 아니다; 
내가 온 건 
찾아내고, 낚아채고, 움켜쥐기 위해서다. 
살기 위해서다. ​


​쉼보르스카가 타이프라이터로 남긴 원고에는 <위령의 날>을 쓴 해가 1946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쉼보르스카가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세계 각국의 출판사들이 그의 시를 번역, 출판하기 위해 저작권을 요청했을 때의 일이다. 쉼보르스카는 출판사들에게 한 가지 전제 조건만 지켜 준다면 자신의 시집을 출판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 조건이란 1950년대 전반기에 출간된
두 권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번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난 호에 말했듯이 쉼보르스카는 젊은 시절 자신이 쓴 시들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보다는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집 <<검은 노래>> 에 수록된 시들 중 미발간 원고들은 1950년 이전에 쓰인 것들이다. 그러니까 시인이 사회주의 사상 검열을 자기 검열하기 전이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열린 날이었다. 당시 쉼보르스카는 열여섯 살이었다. 사춘기 소녀 쉼보르스카는 창문으로 붕대를 감은 채 피 흘리는 부상병들이 짐수레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면은 소녀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46년 쉼보르스카는 그날의 기억을 토대로 <9월에 관한 기억>이란 시를 썼다.

<위령의 날>은 쉼보르스카의 미발간 작품들 중 내 마음에 가장 스며든 시다.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썼고, 쓰고 있는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위령(慰靈)‘의 사전적 의미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함‘이다. 쉼보르스카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이름 모를 전사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짐과 동시에 그 일로 상처 입고 아픔을 겪어야 했던 자신의 마음까지 위무한다.

여기서 시詩를 기다린 건 아니다; ​​
내가 온 건
찾아내고, 낚아채고, 움켜쥐기 위해서다.
살기 위해서다. ​

쉼보르스카는 시詩를 기다리지 않고 시詩를 썼다. 그에게 시는 절대 놓지 말아야 하는, 살게 하는 동아줄이었다. 어둠 속 빛이었다. 그랬기에 숨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썼다. 묵묵히, 꾸준히 말이다. 에밀리 디킨슨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쉼보르스카를 검색해 보던 중 2018년 봄날의책 출판사에서 출간된 서평집 <읽거나 말거나>를 발견했다. 기쁘다.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집
<아버지의 여행가방>에서도 쉼보르스카를 발견했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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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18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詩를 기다리지 않고 시詩를 썼다.

국가는 다르지만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도 모든이들이 구타 당하고 피를 흘리고 끌려가고 두번다시 살아돌아오지 못하는 시대에 시어가 자신에게 다가오기전에 간절하게 시대를 기억하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영혼을 애도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를 썼데요.

죽음의 광풍속에서도 시를 포기 하지 않고 쓴 쉼보르스카,
역사속에 사라져버렸던 영혼들이 쉼보르스카 시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는것 같습니다.

행복한 책읽기님이 올려주신
위령의 날 시

전부 암보 할거 임 (*๓´╰╯`๓)ㅡ❥


행복한책읽기 2021-03-18 14:42   좋아요 1 | URL
안나 아흐마토바. scott님은 대체 뭘 모르심?? ㅋㅋ 고마워요. 저는 작년에 코로나와 나이로 우울감, 허무감이 화악! 파도처럼 덮쳐 오더라구요. 좀 무서웠어요. 저 원래 밝고 씩씩한 사람이거든요. ㅋㅋ 그래서 책꽂이 한 자리서 먼지 뽀얗게 쌓여 가던 시집을 뒤적거리기 시작했어요.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음요.^^ 안나 아흐마토바 시집은 품절이군요. 도서관을 뒤적여보겠슴다요. scott님 덕에 모르던 시인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네요. 그런데, 암보가 가능하단 말입니까. 진정?? scott님 목소리가 들려주는 쉼보르스카 시. 넘 멋지겠어요.^^
 
















20210315 #시라는별 19 

단어를 찾아서 Szukam slowa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Wislawa Szymborska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고문실 벽처럼 피로 흥건하게 물들고, 

그 안에 각각의 무덤들이 똬리를 틀기를,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기를,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는 것, 

지금 내가 쓰는 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기에. 

터무니없이 미약하기에.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소리는 적나라하고, 미약할 뿐.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폴란드 태생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1923년에 태어나 2012년에 타계했다. 22세 때 <단어를 찾아서>라는 시로 등단하여 살아생전 12권의 시잡을 출간했다. 별세 후 미완성 유고 시집 <<충분하다>>가 출판되었다. 시인의 나이 73세 때인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폴란드 중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시인은 여덟 살 때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로 이주한 후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쉼보르스카가 타계하고 며칠 후, 이 시인의 책상 서랍 속에서 오래된 원고 뭉치가 발견되었다. 40여 년 전 시인의 전남편이자 편집자였던 아담 브워테크가 시인의 생일 선물이자 등단 25주년과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축하하는 이벤트로 그녀의 초기작들을 모아 만든 가편집본 시집이었다. 쉼보르스카는 자신이 초기작들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목적의식이 강한 사회주의리얼리즘에 경도된 시들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랬기에 시인은 선물로 받은 이 원고 뭉치를 차마 없애지는 못하고 책상 서랍 속에 간직해 둔 것이었다. 새내기 시인 쉼보르스카의 생각과 고민, 시적 모티브, 그리고 2차 대전의 상흔이 끼친 영향이 담겨 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임에도 나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라는 시인을 알라딘 광고로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알고 싶어져서 시집을 냉큼 구입했다. 이십대는 꿈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꿈이 잡히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시기다. 젊은 쉼보르스카도 다르지 않다. 그런 고민을 생생하게 표현한 시가 등단작인 <단어를 찾아서>이다. 자신이 내뱉는 말이 힘이 없고 기술하는 글이 충분치 않다고 속상해 하던 젊은 시인은 원로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충분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온 이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아닐 수 없다. 

국내에 출간된 쉼보르스카 시집으로는 시선집 <<끝과 시작>>과 유고 시집 <<충분하다>>가 있다. 번역이 쉽지 않았을 텐데, 최성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 교수의 노고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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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3-15 0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끝과 시작만 읽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전히 대단하다고 느꼈던 느낌이 생생하고 여전히 잘 보이는 곳에 버려두고 있지요. ㅠㅠ 다시 들쳐 봐야겠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15 16:11   좋아요 1 | URL
와. 라로님은 이분 시집을 진즉 읽으셨군요. 역쉬 서재에 오랜 세월 적을 둔 알라디너답습니다. 아직 몇 편 못 읽었는데, 시들이 진솔하다 느껴집니다요 ^^

라로 2021-03-15 17:09   좋아요 0 | URL
네, 2008년에 처음 읽었고, 2010년까지 기록이 있는 것을 보니 그때까지는 읽었나봐요. ^^;; 알라딘 오래 한 덕을 보는 거죠~~!!^^

미미 2021-03-15 0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그렇게 연결되는군요! 저도 덕분에 쉼보르스카를 알게되네요.😉 번역시는 되도록 안보려고 했는데 이 시집들 끌려요ㅋ주섬주섬 담아갈래요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3-15 16:13   좋아요 1 | URL
저도 번역시는 껄끄러운데, 폴란드어를 전혀 모르니 영시보다 읽기 편하더라구요. 제목 연결은 제맘대로 했습니다요. ㅋㅋ

scott 2021-03-15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 번은 없다 / 비스와봐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행복한 책읽기님 덕분에 월요일 쉽보르카의 시와 함께 하게 되네요 ^0^


행복한책읽기 2021-03-15 16:16   좋아요 1 | URL
허걱. 쉼보르스카도 이미 읽으셨단 말입니까. 진정. 당신은 AI. 올려주신 시 멋있습니다. 두 번은 없다! 제목 똑부러집니다. 합쳐지지 않는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 흠흠흠. 일치점을 찾아보겠습니다. ^^

희선 2021-03-16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몇해 전에 《충분하다》만 봤어요 그러고 보니 거기에는 죽음을 말하는 시가 있었다는 게 조금 생각나는군요 심보선은 비스와봐 심보르스카라 쓰고 자기 고모라 했어요


희선
 














20210309 책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면. . .  

보름전 안과에 갔다. 

눈에 모래가 잔뜩 낀 듯한 서걱거림과 통증을 더는 그냥 두면 안 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의사의 진단은 세 가지였다.

건조증. 검은자 스크래치. 백내장. 

ㅡ 백내장이요? 제가요? 

ㅡ 네. 도수를 아무리 올려도 시력 교정이 안 되시는데요. 백내장이 시작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헐. 의사들은 대개 좋게 말하면 쿨하게 말하고, 나쁘게 말하면 참 싸가지 없이 말한다. 툭 던지듯 내뱉는다. 뭐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래 놓고는 엄포를 놓는다.

ㅡ 건강 검진 받듯 눈 검사도 정기적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점점 더 나빠지다 안 보이십니다. 

의사는 백내장이 시작되었을 뿐 수술 단계는 아니고 지금은 건조증으로 인한 검은자 스크래치 치료가 급선무라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안약을 넣고 나니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서걱거림은 가셨는데, 안압이, 안압이 날마다 높아졌다. 밤에 눈을 감는 것도,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조금씩 무서워졌다.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이라니. 기어이 정수리 두통까지 수반되었다. 결국 다시 안과를 찾았다. 의사는 여전히 쿨하게,  혹은 무신경하게 말한다. 

ㅡ 흠. 검은자 스크래치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이게 좋아져야 시력을 맞출 수 있어요. 약을 좀 바꿔 보죠. 

바꾼 약은 젤 타입이다. 나는 지금 안약을 넣은 생태에서 희뿌연 화면을 보며 타자를 치고 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임. ㅋ 

어슐러 K. 르 귄 언니(나는 이 작가를 언니로 부르기로 했다. 애트우드 언니처럼. 완전 걸크러쉬다)의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를 삼분의 일 정도 읽었다. 잘 이해 안 되는 대목이 간혹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주 좋다. 특히 어제 읽은 집, 책, 잠에 대한 에세이는 푹 빠져들어 읽었다. 

나에게 독서는 유희다. 내게도 분명 지적 허영이 있지만 내가 책을 읽는 건 대체로 좋아서다. 즐거워서다. 잘난 척하고 싶어 어려운 책을 골라 읽더라도 그 책이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 나는 내려놓는 편이다. 나는 물도 싫어하고 수영도 못하지만 책을 읽고 있으면 책이라는 바다에서 깊이 잠수하는 듯하다.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는 책바다를 유영하노라면 고요와 자유와 희열이 찾아든다. 행복감이 몸속 깊이, 깊이 스며든다. 대체 그 어떤 것에서 이런 환희를 맛볼 수 있단 말인가. 가성비 끝내주는 유희가 아닌가. 르 귄 언니의 말대로 "첨단기술을 뽐내지는 않지만 복합적이고 극도로 효율적"이며 "빛과 사람의 눈, 그리고 사람의 머리만 있으면"(133쪽)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덜커덩, 내 유희를 굴러가게 해주는 바퀴에 제동이 걸렸다. 저 세 바퀴, 빛과 눈과 머리 중 눈에 펑크가 난 것이다. 바람이 쉭쉭 샌다. 바퀴가 쪼그라든다. 데굴데굴 구르지 못하고 픽픽 주저앉는다. 이것은 슬픔이 아니다. 이것은 악몽이 아니다. 이것은 저주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세계는 암흑의 세계다. 사람은 어리석어 어둠을 예측하지 못하거나 예측하고도 밀어내려 한다. 나는 전자였다. 내 눈은 오랫동안 말짱할 거야. 노안도 빨리 안 왔잖아 라면서 좀 기고만장했다. 그 거만함에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그것도 엄청 얼얼하게.

나는 책과 오래오래 놀고 싶다. 그러니 눈 관리를 잘하자!!! 

어떤 집의 아름다움은 ‘거주‘를 통해서 활성화하고 채워진다. - P102

이 글을 쓰다 보니 소설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 중 많은 부분이 결국 그 집에 살았던 경험으로 배운 게 아닌가 싶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평생 단어로 그 집을 다시 지으려 애써 왔는지도 모른다. - P122

독서는 능동적이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행동이고, 내내 깨어 있어야 한다. 사실상 사냥이나 채집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스스로 말하지 않기에, 책은 도전이 된다. 책은 물결치는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 줄 수도, 요란한 웃음소리나 거실에 울리는 총소리로 귀를 먹먹하게 만들 수도 없다. 책은 머릿속으로 귀 기울여야 한다. 책은 영상이나 화면처럼 눈을 움직여주지 않는다. 스스로 정신을 쏟지 않는 한 정신을 움직이지도 않고, 마음을 두지 않는 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해 주지 않는다. 단편 소설 하나를 잘 읽으려면 그 글을 따라가고, 행동하고, 느끼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 글을 쓰는 것만 빼고 다 해야 한다. 읽기는 게임처럼 규칙이나 선택지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읽기는 작가의 정신과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모두가 빠져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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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3-09 12: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놀라셨겠어요!! 저는 지난번 안과 다녀온후 온찜질에 인공눈물에 눈 주위뼈 마사지, 영양제 구입, 숲멍때리기등 열심히 챙기고 있어요. 그러다가도 또 잠깐 소홀하면 눈의 피로가와서 정신차리라고 너가 아끼는 책 보렴 이럼 곤란하다고 찰싹찰싹ㅋㅋㅋ같이 힘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09 14:10   좋아요 1 | URL
숲멍때리기. ㅋㅋ 이거 넘 좋다요. 네 미미님 우리 같이 힘내 오래오래 책 보자요. 응원 감솨 감솨!^^

새파랑 2021-03-09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한책읽기를 위해서는 눈건강이 필수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09 14:11   좋아요 2 | URL
그니까요 ㅠㅠ 제가 좀 방심했어요. 행복한책읽기를 위해 눈을 지키자 지키자!!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scott 2021-03-09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젤타입 약이면 행복한 책읽기님 상태 초기인데
동네병원보다 큰병원에서 정확하게 검진을 받아보세요.
요즘은 거의 백내장 수술하지 않고 약으로 지연 시켜요.
넘 걱정 하지 마시고 관리 잘하시면 됩니다.
미미님 말씀처럼 온찜질 인공눈물 눈주위 뼈 마사지!
그리고 커피 같은 카페인 음료 줄이시고
외출시에는 선글라스 착용!

당분간 책은 오디오로만 들으시고 멍! 때리는 시간을 늘리기 ^ㅎ^

행복한책읽기 2021-03-10 18:46   좋아요 1 | URL
잉잉. 큰병원 가기 싫어요. 큰병원 의사들 싫어요. 정말 싫어요.^^;;; 커피 줄이라는 말씀에 허걱 했슴요. 아, 맞다. 카페인이 수분을 앗아간다고 했는데. 물기 촉촉한 눈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슴다. scott님 페이퍼를 읽어야 해서리 ㅋㅋㅋ 고마워요~~~^^

라로 2021-03-09 1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어째요?? 저도 눈이 점점 빠르게 나빠지고 있지만, 책님 증상을 들으니 더 심하신 것 같아요. 아직 젊으신데,,,백내장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시길 추천합니다. 햇볕이 백내장을 더 빨리 생기게 한다고 하네요. 안과에서 추천하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저도 안 끼던 선글라서 아주 열심히 끼고 다녀요. 백내장 조금이라도 늦추려고요. 스캇님 말대로 약으로도 지연이 된다고 하니까,, 뭐 그래도 안되면 백내장 수술은 간단하니까 넘 걱정하지는 마세요. 백내장 수술 잘하는 의사 찾아서 수술하세요. (저 백내장 수술하는 거 봐서 알아요.ㅋ) 어쩄든 그래도 중요한 것은 연기하는 것이니까 우리 눈 너무 혹사하지 맙시다. 책도 적당히 읽자구요. 아니면 저처럼 대부분 오디오북으로 듣던지요.

얄라알라 2021-03-10 00:29   좋아요 2 | URL
헉, 지금 라로님 댓글을 읽다보니 제가 거꿀, 거꾸로 가고 있었네요. 햇볕 많이 쬐는 건 근시 증상에 해당하는 처방이었나봐요 백내장은 다르군요^^;; 행복한 책읽기님께 어설픈 조언 드릴뻔 했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10 18:49   좋아요 1 | URL
앗. 백내장 아주 심각한 건 아니고. 이미 시작은 됐으니 눈 관리 잘하라고 의사가 엄포를 놓은 거예요. 라로님이 저보다 더 걱정을 해주시는 것 같아 송구합니다. 햇볕이 백내장에 나쁘다고라 ~~~~ 저 햇볕 쬐는 거 엄청 좋아하는데, 오늘은 볕이 좋아 낮에 산책까지 했는데, 선글라스 끼는 거 싫어하는데, 아, 껴야 한단 말입니까. ㅠㅠㅠㅠ 그래도 눈을 보호해야 하니, 책을 오래 읽어야 하니, 이제부터는 선글라스 챙기겠습니다. 고마워요. 비록 온라인 친구지만 간호사 친구 있으니 넘 좋다요 ~~~~^^

얄라알라 2021-03-10 0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차분하게 쓰셨지만, 얼마나 놀라시고 속상하셨을까요? 특히 행복한 책읽기님처럼 책 없는 삶 상상하기 힘든 분께 눈의 변화가 얼마나..

사실 3월 내내 모니터만 보고, 문밖에도 안 나가니 저도 눈이 침침해서 무서워지는 상태인데..

안과가면 늘 햇볕쬐면서 야외활동 많이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같이 눈도 지키고, 오래오래 책 읽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10 18:51   좋아요 1 | URL
맞아요. 책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든데. 언젠가는, 아주 먼먼 날은 받아들여야겠죠. 흠. 아니다. 그때쯤이면 의학이 발전해서 여전히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 되기를 꿈꿔 봅니다. 북사랑님 고마워요. 햇볕은 선글라스 낀 눈으로 보겠습니다.^^

syo 2021-03-11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 눈은 생명줄입니다.
생명을 지킵시다 ㅠㅠ 화이팅...

행복한책읽기 2021-03-12 12:50   좋아요 0 | URL
홧띵!!!^^

희선 2021-03-12 0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읽기 좋아하는 사람은 눈을 잘 지켜야 해요 눈에 문제가 있었군요 이번에 받은 약은 괜찮으면 좋겠네요 눈에는 뭐가 좋을지... 마사지 잘 하세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12 12:51   좋아요 1 | URL
네. 저번약보다 괜찮아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