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1 #시라는별 24 

갱죽 
- 안도현 

하늘에 걸린 쇠거리기 
벽에는 엮인 시래기 

시래기에 묻은 
햇볕을 데쳐 

처마 낮은 집에서 
갱죽을 쑨다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 

훌쩍이며 떠먹는 
밥상 모서리 

쇠기러기 그림자가 
간을 치고 간다 


안도현 시인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삼분의 이 읽었다. 이 시집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갖가지 전통 음식을 시적 재료로 버무려 한 상 가득 차려 놓은 2부가 특히 백미다.

수제비, 무말랭이, 명태선, 물외냉국, 닭개장, 건진국수, 태평추, 돼지고기, 염소고기, 간장게장, 무밥, 콩밭짓거리, 민어회, 물메기탕, 병어회와 깻잎, 시락국, 전어속젓, 매생이국, 대개가 시인이 어릴 적 먹어본 음식들이다. 얼마나 자세하게, 맛깔나게, 구수하게, 정다웁게 표현해 놓았는지, 눈으로 읽기만 하는데 입안에 군침이 돈다. 직접 만들지 않고 그저 먹기만 했을 텐데, 해당 요리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잘도 안다. 확실히 시인의 눈은 남다르다. 어쩌다 음식 시편을 쓰게 되었는지를 시인은 이렇게 밝혔다.

˝음식이라는 것은 기본은 미각이지만 음식을 보기 위해서는 시각이 필요하고, 후각이 필요하죠. 음식을 씹을 때는 청각도 필요합니다. 모든 감각의 총집결체가 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음식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욕망이 한데 엉켜 있지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7년 11.12월호)

그렇다. 이 시집의 음식 시들은 온몸의 감각 뿐 아니라 기억의 빗장까지 연다. 켜켜이 접혀 있던 기억의 주름을 편다. 소환된 기억들은 꽃게 살 속으로 간장이 스며들듯 몸 속으로 스며든다. 아. 그 추억의 맛들.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을 ˝삼십
년이 넘도록 입에 대보지˝ 못한 시인은 그 맛이 너무 그리워 ˝굵은 눈발을 툭툭 잘라 태평추나 한 그릇 먹었으면 하는 간절하게, 간절하게 참 철없이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예천 태평추>)

22편의 음식 시편들 중 내 오감을 제일 자극한 시는 ‘갱죽‘이다. 갱죽은 시래기 따위의 채소류를 넣고 멀겋게 끓인 죽을 말한다. 내 어릴 적 추억의 음식은 김치 국밥이다. 추운 겨울날 엄마가 양은 냄비에 송송 썬 김치와 밥을 넣어 연탄불에 펄펄 끓여 죽처럼 만들어준 김치 국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국밥을 떠먹었다.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백석 평전> 16쪽)

먹는 것이 곧 나를 이룬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무엇을 먹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먹었는가 라는 의미도 들어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내가 속한 가족의 구성원들과 어떤 음식을 어떤 마음으로 함께 먹었는지 말이다. 밥상을 둘러싼 분위기가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그러니 밥상머리에선 교육 같은 거 시키려 들지 말고 그저 하하호호 맛있게 먹는 게 장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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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01 06: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4월 첫날에 어울리는 멋진 시와 꽃과 음식(?)이네요~! 즐거운 하루 시작하세요^^

행복한책읽기 2021-04-01 11:10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도 멋진 4월 첫날 보내세요. 봄날과 넘 잘 맞는 이름이어요. 새 파 랑^^

미미 2021-04-01 08: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음식을 먹을 때 온갖 감각이 다 쓰이는걸 이렇게까지 생각해 본적은 없었네요?!! 미각만 떠올림..😳안도현 시인의 첫 번째 글을 읽으니 새삼스럽고 신기해요ㅋㅋㅋ덕분에 4월의 시작을 열린 마음으로~♡

행복한책읽기 2021-04-01 11:13   좋아요 2 | URL
감각의 집결체!! 미미님 오늘부터 먹을 때면 오감이 어찌 작동하나 찬찬히 관찰하실 듯하옵니당^^

scott 2021-04-01 08: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4월 저녁은 갱죽을! 먹어야 겠어요.
오트밀+그릭요구르트+블루베리+크랜베리+호두넛 -요건 아침
갱죽으로 하루 마무리

4월은 겨울내 찐 거
뺴기 ^ㅎ^

행복한책읽기 2021-04-01 11:16   좋아요 2 | URL
와우. scott님만의 갱죽. 굿아이디어. 달콤상콤시큼 맛이 버무러진 퓨젼 갱죽!! 지는 눈요기만 하는 걸루^^

라로 2021-04-01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징어라기에는 다리가 짧아 보이는데, 아무튼, 거기에 콩나물 넣어서 만든 것 처음봐요!! 저 오징어, 문어 이런 연체류 아주 좋아합니다. 없어서 못 먹는 일인. 😥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군요!!
저는 연탄불 위에서 펄펄 끓인 김치 국밥은 먹어 본 적이 없지만 김치 국밥 아주 좋아해요. 저는 제 식으로 거기에 콩나물과 명란을 넣는데 제 입엔 일미. ㅎㅎㅎ 집에 가면 만들어 먹어야겠다는요.

행복한책읽기 2021-04-01 14:53   좋아요 0 | URL
쭈꾸미에요. 한국에서 잘 먹는 쭈꾸미삼겹살이랍니당. 라로님 못 먹어봤나봐요. 여긴 꽃들이 만발하고 있어요. 연두잎들이 알록달록 꽃들 밀어낼 준비 중요. ㅋ 라로표 김치국밥 일품 요리에 올려드립지요. 명란이라니. 와우^^
 














20210331 낯설다 


보름 전부터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읽고 있다. 흐음. 낯설다. 아주 낯설다. 그래서 당혹스럽다. 작년에 읽은 <도덕적 혼란>이 정말 좋아서 애트우드 소설을 올해 모조리까지는 아니고 몇 권 읽어 보겠노라 야무지게 약속했건만(나 자신과, 그리고 라로님과 ㅋ), <도덕적 혼란>라는 많이 달라 약속 이행에 빨간불이 켜졌다. 


<시녀 이야기>는 책 뒤편에 수록돼 있는 '역사적 주해'를 먼저 읽으면 낯설음이 상쇄될 것 같지만, 나는 아무런 정보 없이 뛰어들었을 때 얻어맞게 되는 이 감각을 즐기는 편이다.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했던가. 절반을 넘어서자 좀 적응되었다. 문체는 여전히 아름답다. 애트우드만의 리드미컬할 시적 문체. 그리고 깊은 사유에서 길어낸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다. 

우리는 한때 체육관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잤다. - P11

우리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서로 속삭이는 법을 배웠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팔을 뻗어 허공을 가로질러 서로의 손을 만질 수 있었다. 머리를 바짝 붙인 채로 옆으로 돌아누워 서로의 입을 지켜보며 입술을 읽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침대에서 침대로 이름을 교환했다. 알마. 재닌. 돌로레스. 모이라. 준. - P13

이게 내가 꾸며내는 이야기라고 믿고 싶다. 그렇게 믿을 필요가 있다.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이런 것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 이게 만일 내가 꾸며낸 이야기라면, 결말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언젠가 끝이 나고, 진짜 삶은 그 후에 이어질 것이다. 끝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 P73

우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시하며 살았다. 무시한다는 건 무지와 달리,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 P101

한심스러울 정도로 행복하다. / 행복은 참 사소한 데서 온다. - P131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 남자라면, 그리고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다면, 제발 명심해 달라.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정말이지 그런 충동은 참으로 거역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용서 역시 일종의 권력이다.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권력이며, 용서를 유보하거나 베푸는 일 또한 일종의 권력이다. 아마 그만큼 커다란 권력도 없을 것이다. - P235

이 세레나의 정원에는 어딘지 전복적인 분위기가 있다. 묻혀 있던 것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찌르듯 위로 솟아나 햇볕을 받으며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침묵을 강요당한 것은 자기 소리를 들어달라고 쾅쾅거리기 마련이다. 물론 조용하게. - P264

내 손가락 사이에 쥐어진 펜은 육감적이고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인다. 펜의 권력이, 펜이 내포하고 있는 글의 권력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펜은 질투를 불러일으켜. - P323

밤이 내린다. 아니 이미 내린 지 오래다. 어째서 밤은 여명처럼 솟아오르는게 아니라 떨어져 내리고 저문다고 말하는 걸까? 하지만 일몰 시각에 동편을 보면, 밤이 내리는 게 아니라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름의 장막 너머 검은 태양처럼 어둠이 지평선에서부터 몸을 일으켜 뭉게뭉게 하늘로 솟아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길로부터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산불이나 도시가 불탈 때 지평선 바로 아래 죽 늘어서 타오르는 불길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아마 밤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지 모른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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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31 10: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도덕적 혼란>하고는 많이 달라요! 그런데 저는 애트우드 특기와 장점은 이런 SF 장르에서 더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좀 더 읽어보아용~

행복한책읽기 2021-03-31 11:36   좋아요 3 | URL
ㅎㅎㅎ 네. 낯설지만 점점 흥미롭습니다. 구매를 했으므로 증언들까지 읽을 거예용^^ 애트우드만의 특기와 장점!! 더 빛난다니, 그 빛을 향해 열나 노를 젓겠음요. 잠자냥님 응원에 힘이 불끈!!! 고마워요~~~~^^

새파랑 2021-03-31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이책보다 ‘도덕적 혼란‘이 좋다는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는지 ㅎ ㅎ (눈먼 암살자 몇년전에 사놓고 펼쳐보지도 않았는데 ㅜㅜ) 완독 응원합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31 14:59   좋아요 1 | URL
흠흠. 제 생각엔 새파랑님도 도덕적 혼란을 더 좋아할 것 같아요. 저는 이 책 푹 빠져 읽었고 웃고울고 그랬어요. 근데 시녀이야기는 사뭇 다르네요. SF는 올해 도전 종목이 될 것 같아요. 르 귄 언니 덕에 ㅋㅋ 눈먼 암살자 우리 언제 같이 읽어요. 저는 원서 좀 보다 접었어요. 애트우드는 문체가 정말 시적이거든요. 아.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넘의 말의 한계. 저는 내 품에 안기는 한국어로 만족할라구요.^^

새파랑 2021-03-31 15:35   좋아요 2 | URL
원서 읽으시는 분들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던데 ㅋ 매월 1일은 책사는 날인데 ˝도덕적 혼란˝을 담겠습니다ㅎㅎ 눈먼암살자 표지가 안땡겨서 대기중인데 나중에 행복한책읽기님 읽기 시작하면 따라 읽어봐야겠네요^^

scott 2021-03-31 16: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책의 후속작 증언들 보다 그래도 시녀이야기의 서사가 압도적이죠
르귄 여사님에 말씀처럼 픽션이 작가의 상상력으로 버무린 것이 아닌 지금 이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세련된 언어로 풍자한 진정한 모더니즘 인것 같아요.

애트우드 여사의 최고작은
‘눈먼 암살자‘ 라고 생각 함 ^.^

행복한책읽기 2021-03-31 17:06   좋아요 1 | URL
오호. 눈먼 암살자. 를 최고작으로 선정한 scott님의 눈. 시녀이야기 눈과는 다른 눈^^;; 르귄 언니, SF에 대한 저 정의. 시녀이야기에 정말 딱 들어맞아요. 현실을 어떻게 이렇게 변주할 수 있지. 이런 상상력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하며 감탄하고 있어요. 낯섬과 당혹과 설렘과 감탄이 교차 중입니다용^^

han22598 2021-03-31 23:47   좋아요 1 | URL
눈멀 암살자가 최고작인가요? 바로 접수합니다. ^^
 

20210329 #시라는별 23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 시인은 정현종 시인과 더불어 내 이십대의 어두운 터널을 같이 걸어주었던 시인이다. 1997년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는 시집 후기에 시인은 이렇게 쓴다.

˝이번 시집을 정리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시가 나를 구원해주지는 않았으나, 나를 늘 위무해주었다. 혹시 이 시집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나처럼 위무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큼 더 좋은 일은 없겠다.˝

이십대의 나는 희망을 찾아 헤매다 ‘희망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란 말에 기대어 하루하루 열심히는 아니지만 꾸역꾸역 살았고, 그러는 사이 잘 웃고 잘 떠들고 잘 덤비는 명랑한 나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에서는 점점 멀어져 갔다.

97년으로부터 무려 24년이 흐른 2021년 3월. 지인이 단톡방에 봄날의 풍경과 함께 정호승 시인의 ‘봄길‘을 올렸다. 어느 카페에 적혀 있던 시라면서. 얼마나 반갑던지. 내가 그의 시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동안, 그의 시들은 ˝단 한 사람이라도˝라던 시인의 바람을 보기 좋게 배반하고 무수한 사람들을 위무해왔고 교과서에도 실려 학생들을 위로, 아니 어쩌면 괴롭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21년 3월 1일. 가수 안치환이 정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디지컬 싱글 ‘봄길‘을 발표했다. 안치환은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하고 싶어 이 곡을 지었다며 앨범 발매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길고 지루한 코로나시대를 견디고 있는 모두에게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어려운 시기일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봄길’의 주인공입니다​추운 겨울의 한파와 눈보라를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을 꽃피워 내는 언제나 반가운 봄. ​그 봄의 기운을 받아 하루 빨리 마스크를 벗고 활짝 웃으며 반가운 인사와 따뜻한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의 날들이 오길 기원합니다. ​​​함께 걸을 수 있는 ‘봄길’을 기다립니다.˝
https://youtu.be/8G9ILXSfVi4

남쪽 지방에는 봄꽃들이 벌써 만개했다지. 봄길은 꽃길이기만 할까. 아니아니. 오늘 내가 본 봄길 중 하나는 보도블럭 바닥을 뚫고 올라온 민들레와 이름 모를 풀의 길, 보도블럭 아래 헐거워진 흙들을 부서뜨리며 조금씩 조금씩 길을 내 기어이 햇빛 세례를 받고야 만 의지의 길이었다. 희고 붉고 노란 봄꽃들 뒤에서 아기 속살 같은 연두빛 잎들을 장착하기 시작하는 가지들의 길이었다. 봄길이 아름다운 것은 이런 생명력 때문이다.

정호승 시인은 1950년생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90년 가을 <<별들이 따뜻하다>> 이후 시인이 7년 만에 펴낸 다섯 번째 시집이다. 시인의 나이 47세 때였다. 시를 쓰지 않은 6년 동안 시인은 소설을 썼다. 1993년 10·26과 김재규를 다룬 3권 짜리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를 발표했다. 그러나 6년간 소설 작업에 매진하던 시인은 1996년 가을쯤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사람마다 자신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있다. 나는 소설에 대한 문학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시적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정 시인은 그 해 10월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이듬해 봄 한 권의 시집을 낼 분량을 다 썼다. 그렇게 탄생한 시집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이다. 이 시집은 출판사 추산 15만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된다.

보라, 정 시인은 길이 끝났다 싶은 곳에서 또 하나의 길을 발견했다. 다음에는 스스로 길이 되었고, 그 길을 지금도 ˝한없이˝ 걷고 있다. 그 ‘봄길‘을 나도 같이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어서 흐릿한 봄날인데도 마음만은 화사한 봄날이었다.

‘봄길‘은 2016년 열림원에서 출간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도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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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29 08: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집 제목이 너무 강렬하네요^^ 정호승 정현종님 시들 가끔씩 읽으면 정말 좋더라구요. 항상 좋은 시를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29 11:04   좋아요 4 | URL
그죠. 두 시인의 시는 참 편안해요. 같이 시를 읽어줘 저야말로 감솨감솨^^

미미 2021-03-29 10: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왜 이렇게 강렬한가 했어요. 책읽기님 후기를 읽고보니 그럴 수 밖에 없네요.
이런 사랑에 눈에 띄지 않는 길 바닥의 민들레나 이른 바 잡초를 연결지으시다니 놀랍고 놀랍습니다. 저도 때때로 어떤 꽃 못지않게 피워내는 그 모습들에 시선을 빼앗기거든요.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온 생명을 살리는 것이란 말도 떠올랐어요. 시인의 지향점은 그런 점에서 더 빛나는 듯해요. 너무 좋네요~오늘 글 특히 더요.
책읽기님 책을 쓰셔야겠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29 11:06   좋아요 3 | URL
그니까. 사랑하다 죽을 것 같았는데 저 시집이 저를 살렸네요. 역설적이게도. ㅋㅋ 미미님 속에도 시인이 살던데요. 올리는 글과 사진으로 보아^^

scott 2021-03-29 10: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비온뒤 더욱 초록빛 향기를 품고 있는 민들레, 누군가 강제로 흔들어 뽑지 않은 이상 저자리에서 몇일후 노란색 희망의 꽃이 피겠죠. 행복한 책읽기님은 시인의 시선으로 사진을 찍으쉼 ^0^

행복한책읽기 2021-03-29 11:08   좋아요 4 | URL
그 노란 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 온 뒤라 색들이 더 선명했어요. scott님은 보는 눈이 정말 밝으심^^

희선 2021-03-30 02: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만난 어른이 읽는 동화로 나온 책이 생각납니다 제목이 《항아리》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라니, 거기에서 이어진 게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봄에는 꽃만 피지 않지요 봄에 만날 수 있는 연푸른잎이나 풀도 좋아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6:10   좋아요 1 | URL
우와. 희선님 머릿속에는 책들이 정말 많이 들어 있네요. 누르면 나오는 책 자판기 같아요. <<항아리>>는 검색이 안 되고,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찾았어요. 정호승님 책이었다니. 감사합니다. 희선님 리뷰도 찾아 보았음요.^^

붕붕툐툐 2021-03-30 1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책님의 20대를 함께 걸었다니 시인이 들으면 넘 행복할 거 같아요! 다 만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는 거겠죠~ 시 다시 읽어도 진짜 좋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6:13   좋아요 1 | URL
그죠. 정호승 시인을 직접 뵌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얘길 못해 드렸어요. 여 또 만나게 되면 꼬옥 알려드려야겠어요. 과연??? ㅋ 시는, 맞아요. 다시 읽으니 진짜 좋네요. 나이 들어 읽으니 더 좋네요. 붕붕툐툐님 행차 해 댓글 남겨주셔 감솨해요 ^^
 

능선을 타고 앉은 구름

20210325 #시라는별 22

독거 
- 안도현 

나는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의 독거(獨居)를 사랑하련다 

염소떼처럼 풀 뜯는 시늉을 하는 것과 흰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 구름의 흠이긴 하지만, 

잠시 전투기를 과자처럼 깨물어먹다가 뱉으며, 너무 딱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썩 좋아하고 

그가 저수지의 빈 술잔을 채워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도 좋아한다. 떠나고 싶을 때 능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차버리고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무엇보다 위로 치솟지 아니하며 옆으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대통령도 수도승도 아니어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저 구름,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까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 

혼자 울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밤을 새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보지도 못한 나는 그래서 끝끝내, 

저 구름의 독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안도현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계속 읽는다. 시인의 최근작인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는 읽기가 약간 버거웠는데, 이 시집은 편안하게 읽힌다. 삼분의 일을 읽은 지금까지는 그렇다.

위의 시 <독거>는 지난 주 금요일 열두 살 아들이 내게 보여준 하늘을 떠올리게 했다. 오후 다섯 시. 검도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이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부탁조로 말했다.

ㅡ 엄마, 잠시 나랑 같이 나가요.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아들이 이런 말을 할 때의 마음을 안다. 어여쁜 풍경을 발견해 그 풍경을 엄마와 나누고픈 마음, 그 마음은 이 시집의 제목처럼, 참 철없이 간절하다. 아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서, 아들의 손이 가리키는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하늘 바다에 구름 물결이 부드럽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아들이 말했다.

ㅡ 엄마, 솜사탕을 뿌려 놓은 것 같지 않아요? 포근포근하고 달콤할 것 같아요. 
ㅡ 정말 그렇구나. 이런 멋진 풍경 엄마한테 보여줘서 고마워. 우리 아들은 낭만 아들일세. 

‘낭만‘의 정의를 이 시에서 찾자면, 바로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바라보는 일˝은 구름의 ˝직업˝이고,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은 시인의 변형일 것이다. ˝빈 술잔˝ 넘치도록 채워주고, 길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나고,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남기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통장 잔고˝ 바닥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구름, 시인은 그런 구름이 부럽다.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이것이다.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까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바라보기만 한다고 시인이 되랴만, 우두커니, 멍하니, 가만히, 찬찬히, 골똘히 바라보지 않고서는 ˝구름의 독거를˝ 어찌 사랑할 수 있으랴. 어찌 시를 읊을 수 있으랴. 세상 바쁠 것이 없는 아이들의 마음에는 ˝능선을 타고 앉은 구름˝이 산다. 그러니 그저, 같이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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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3-25 08: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구름의 독거네요! 구름 아래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 모자는 얼마나 더 아름다울지 상상해 봅니다!ㅎ 덕분에 맘이 따듯한 글로 하루 시작하네요! 즐건 하루되시구요!ㅎ

행복한책읽기 2021-03-25 11:31   좋아요 2 | URL
히히. 그죠. 안도현님 시들이 따땃해요. 막시무시님 하루에 온기를 보태 덩달아 기분 좋아졌음다. 굿데이~~~^^

scott 2021-03-25 1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마치 물고기가 용으로 승천해서 올라가면서 일으킨 물보라 같아요!!
사진을 이토록 잘찍으시는데
행복한 책읽기님
사진 재능 아끼지 마세요.
넘 잘찍으심 ^ㅎ^

행복한책읽기 2021-03-25 20:21   좋아요 1 | URL
오호. 물고기 용 승천.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scott님 사진 보는 눈이 더 시적입니다요. 감사해용~~~^^

희선 2021-03-26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름 하니 정채봉이 구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식으로 쓴 동화가 생각나네요 예전에 봐서 거의 잊어버렸지만... 아이는 좋은 게 있으면 엄마하고 함께 보고 싶기도 한가 보네요 저는 어릴 때 그랬을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네요 행복한책읽기 님 아드님이 지금 마음 오래오래 가지고 있으면 좋겠네요


희선
 

20210324 포르투갈의 쉰들러, 아리스티데스 데 소사 멘데스


3월 13일부터 한달 계획으로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 매일 인증을 하고 있다. 하라리의 작법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글이 깔끔하다. 시원시원하다. 재미있다. 술술 읽힌다. 이렇게 박식할 수가! 뭐 이런 감탄도 매번 하게 된다. ㅋ 


이 책을 이미 읽은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나는 처음 알게 된 보르도 주재 포르투갈 영사 이야기를 올린다. 그는 포르투갈의 쉰들러였다. 그리고 하라리는 실제를 능가하는 문서의 힘을 훌륭한 예시로 보여주었다. 

1940년 봄 북쪽에서 내려온 나치가 순식간에 프랑스를 장악하자, 그곳에 살던 유대인 집단 대부분이 프랑스를 떠나 남쪽으로 도망쳤다. 국경을 넘으려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행 비자가 필요했고, 따라서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생사가 걸린 종잇조각을 얻기 위해 다른 난민들의 물결에 휩쓸려 보르도 주재 포르투갈 영사관에 몰려들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프랑스에 있는 영사들에게 외교부의 승인 없이는 비자를 발급하지 말라고 했다. 보르도 주재 포르투갈 영사 아리스티데스 데 소사 멘데스는 그 명령을 무시했고, 그로 인해 30년 외교관 경력을 날려버렸다. 나치의 탱크가 보르도로 다가오는 가운데, 소사 멘데스와 그의 팀원들은 비자를 발급하고 종이에 도장을 찍느라 잠도 못 자며 하루 24시간씩 열흘 밤낮을 일했다. 수천 장의 비자를 발급한 뒤 소사 멘데스는 탈진해 쓰러졌다. - P231

난민들을 수용할 마음이 없던 포르투갈 정부는 요원들을 보내 명령에 불복한 멘데스를 고국으로 호송했고, 그의 외교관직을 박탈했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던 관료들도 문서에는 깊은 존경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소사 멘데스가 명령을 어겨가며 발급한 비자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관료들에게 받아들여져 나치가 친 죽음의 덫에서 3만 명의 영혼을 구했다. 겨우 고무도장 한 개로 무장한 소사 멘데스는 홀로코스트에서 개인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구조작전을 펼쳤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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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3-24 11: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호모데우스!!!!!!! 저도 저도 ㅎㅎㅎ읽어야하는데 :-)
파이팅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24 15:32   좋아요 1 | URL
히히. 술술 잘 읽혀요. 하라리 음성 지원도 되는 문체여서 강의 듣는 느낌이랍니다^^ 파이팅 감솨!!^^

scott 2021-03-24 11: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발 하라리!
글쓰기 구성 작법 배우고 싶은 1人
행복한 책읽기님이 올려주신 문구 열쉼히 메모메모 ◌⑅⃝*॰ॱ✍

초딩 2021-03-24 11:54   좋아요 2 | URL
오오오 임콘 탐 나요!

행복한책읽기 2021-03-24 15:34   좋아요 2 | URL
아니. 저도 scott 님께 도움이 된건가요?? 늘 받기먹기만 해 그저 송구했건만. 기분 좋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