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록/ 이태준
S군. 자네가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말에 나는 가슴이 내려 안았다네. 이런 기분 실로 오랫만 에 느껴보는 것 같네. 자네만큼은 늘 내 주위에서 언제나 전화하면 늦은 시간에라도 달려와 줄줄 알았는데 이렇게 떠나고 나니 자네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구먼.
자네와의 첫 만남은 초등학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흐른듯 하네. 30년하고도 몇년이 지났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일세. 사실 초등학교 기억은 별로 없네만 중학교 2학년때인가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네. 자네는 늘 입술을 핥고다녔지, 그래서 추운 겨울에는 입술이 퉁퉁 불어있곤 하였지. 그 기억이 이십수년이 지나서 자네를 다시만난 2000년의 어느 날에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이제는 지나온 세월이 얼굴에 그대로 베어난 나이가 되었지만, 그때의 그 추억과 기억들은 아직도 그대로남아 있다네. 우리의 지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세나. 한번은 늦은 시간에 나의 휴대폰에 문자가 찍혔었지. 자네가 보낸 문자인데 술한잔 하고 보낸 메시지가 나의 마음을 단번에 오그라들게 만들었지. 마치 세상을 등질것 처럼 말이지. 놀라 전화버튼을 눌렀지만 꺼져있다는 메시지만 하염없이 흘러나오는데 정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구먼. 결국은 다음날 아침 모든 진실이 밝혀졌지만, 자네의 문자를 받은 나는 밤새도록 이생각 저생각에 거의 뜬 눈으로 지새운걸 아는가?.
그래도 힘들때 나를 찾아주어 고맙다네. 내가 비록 도움은 안 되더라도 그냥 술한잔 기울이며 자네와 지난 이야기라도 나누면 마음만큼은 편해지지 않았는가 말일세. 지금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무리 멀리 있어도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달려와 준것처럼 또 달려 간 것처럼 늘 그런 마음 간직하고 살자 친구야.
보나마자 자네는 지금 먼 객지에서 외로움에 지쳐 어느 선술집에서 새로나온 19점 몇도의 소주가 아닌 예전 소주를 주문해 놓고 홀로 쓸쓸히 술한잔 하고 있겠지. 이 곳에 있었더라면 앞에 내가 앉아 있었을텐데 말이야...1년하고도 몇개월이 지나야 다시 올라 올 수 있다고 하는데 - 하긴 그것도 그때 가봐야 안다고 했던가- 그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네. 부디 건강하시게.
참,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 중의 한권일세. 힘들고 지친 자네에게 꼭 선물하고 싶은 책이라네. 책 중에 이런 구절이 있으니 한번 음미해 보길 바라네. 책은 조만간 도착할 것이니 나머지는 천천히 일독하게나.
고요한 밤 산가에 일어나 앉아 말이 없네 (山堂靜夜坐無言)
쓸쓸하고 적막한 것이 본래 자연의 모습이러니 (寥寥寂寂本自然)
얼마나 쓸쓸한가!
무섭긴들 한가!
무섭더라도 우리는 결국 이 요요적적(寥寥寂寂)에 돌아가야 할 것 아닌가!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 아니겠나. 책 제목처럼 인생의 끝도 순서가 없으며, 고독이라는 위의 글처럼 쓸쓸한 자연의 모습 바로 그 자체 말일세. 너무 어두운 이야기만 한것 같으이.
오랜시간이 흘러도 사랑을 받는 이 책처럼 자네와 나의 우정도 함께 오랫동안 간직하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