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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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A Fool - Keira Knightley


내일부터 봄학기가 시작한다.

수업은 아침 7시부터. 

이 책을 읽은 덕분에 피트먼식 속기법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만약 사람과 장소를 연결하고, 무고한 사람을 무죄로 돌리고 진범을 밝혀낼 다른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 지문이나 DNA증거 이외에도 어떤 사건에 대한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를 입증할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것이 아무도 모르게 스며드는 흔적이라, 아무리 법의학에 빠삭한 범죄자라 한들 결코 완전히 지울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떨까? - P8

사람들이 자신의 몸이 단지 무기물, 에너지, 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장 위대한 진실을 마주하는 데는 일종의 믿음이 필요했다. 세상 만물은 끝에 다다르면 에너지와 생명력이 더 이상 흐르지 않으며, 우리의 마음과 우리 자신에 관한 모든 기억을 담은 몸은 요소들로 분해되고 모든 생명체가 출현하는 자연 원소의 거대한 그릇 안에 무너져 섞이리라는 진실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들,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것들이 한때는 다른 무언가에 속했으며 우리가 사라진 뒤에는 다르게 쓰이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생각조차 못 해봤을 것이다. (중략) 그 과정이야말로 궁극적인 의미의 재활용이며 따라서 윤회이고, 종교를 갖든 그러지 않든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자연의 일부다. 누군가는 그 냉혹함과 무자비함에 - P14

몸서리칠지도 모르나, 공상적이고 입증할 수 없는 어떤 동화보다도 더 아름다운 이야기다. - P15

죽음 이후의 유일한 삶이 있다면 우리 몸의 구성요소가 죽음을 통해 세상에 방출되어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되는 과정이다. (....) 우리 몸은 마치 분수가 만들어내는 물줄기의 모양과 같고, 에너지와 물질은 몸에 들어왔다 흘러 나간다.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 안에는 언제나 삶이 있다. - P15

중요한 것은 우리 가운데 스스로가 자연 세게와 얼마나 상호 연관되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점이다. - P20

자연은 우리의 온몸에, 몸의 안과 밖에 흔적과 단서를 남긴다. 우리가 환경에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환경 또한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는 셈이다. - P21

살인자들은 종종 허영심이 많고 거만하다. - P24

이 과정이 여러분의 생각만큼 마법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몇 년 동안 기초 학문을 열심히 공부하고, 두 발로 현장을 누비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서계에 관한 지식을 끊임없이 축적한, 오랜 세월에 바탕을 둔 직관에 가깝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뇌라는 놀라운 슈퍼컴퓨터 안에서 저장되고 처리된다. - P37

행동분석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누군가 무거운 시체를 끌고 갈 수 있는 한계 거리는 약 100미터다.

이 일을 오랜 세월에 걸쳐 해왔음에도 나는 꽃가루 프로파일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정보와 생각, 추측, 시야를 제공하는지에 언제나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은 증거물에 기초하는데, 이것은 나에게는 생생하게 분명히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신이나 마법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 P42

식물 생태를 알고 있다면, 그 식물이 어던 종류의 토양에서 자랄지는 예측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지질학적 특성도 자연히 알 수 있을 터였다. - P43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일들을 매일같이 직면해야 하는 세상에서, 충격에 둔감해지거나 지적인 도전 과제 속에 빠져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감정을 보류하는 일은 얼마든지 쉽게 일어난다. 사랑하는 고양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서재에 앉아 조앤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자니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조앤 넬슨은 우리가 풀어야 할 한낱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몇 년에 걸쳐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맞서야 하는 도전 과제 역시 아니었다. 조앤은 사랑과 희망, 두려움, 야망을 갖춘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편지를 읽으며 나는 깨달음을 얻었고, 평소에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휘몰아쳤다. 지적 도전이나 법의생태학을 발전시키며 내가 늘 지녔던 자부심보다도,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다. 사람의 감정은 이토록 소중하다. - P44

나중에 나와 결혼한 당시 남자 친구는 내가 대소변과 혈액을 분석하고 쥐를 다루는 일보다는 더 ‘여자다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다운‘이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사무직과 비서직을 위한 강의를 신청했고 돈을 받는 상근직 일자리를 얻었다. 강의는 꽤 버거웠다. 새로 하는 일인 데다가 대학은 법학, 경제학, 심리학, 영문학 같은 핵심 과목을 담당하는 전문가들을 시간제로 고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타이핑과 피트먼식 속기법(지금까지 내가 접한 것들 가운데 가장 논리적이면서도 유연하고 멋진 체계)을 능숙하게 익혀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우리는 사무실을 효율성 높게 운영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워야 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살면서 했던 모든 공부 가운데서도 이 과정은 정말로 훌륭했다. - P46

졸업 후 첫 직장은 나이츠브리지에 있는 코카콜라 본사였다. 신제품을 들이마시느라 신입사원들은 살이 쪘다. 모든 직원들의 책상 위에는 언제나 당분과 탄산 혼합물이 한 잔씩 놓여 있었다. 직원들이 표현하는 애사심을 처음으로 접한 실례였다. 여기서 하는 일들은 정말 이상해 보였다. 어두운 양복 차림의 이기적이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해 바보같이 일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 P47

나는 재빨리 크고 명망 있는 건축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에서 하는 일은 까다로웠고 책임감을 요구했다. 런던 브리지나 드락스 발전소 같은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의기술적인 측면에 관해 읽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이 회사도 지겨워졌다. 일이 만족스럽지 않았으며 지루했다. 기계적인 일상에 치이다 보니 매혹적인 지식들을 얻을 기회가 적었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 P47

나는 식물학을 전공했지만, 생태학, 지질학, 미생물학, 동물학, 기생충학, 생물지리학을 비롯해 자연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배우는 기회를 누렸다. - P49

백골로 남은 뼈가 있다 해도 부지런한 지렁이들에 의해 곧 땅에 묻혔을 것이다. 지표면에 놓인 물체는 무엇이든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지렁이의 힘으로 땅속에 파묻힌다. 다윈이 잔디밭에 포장용 평판을 가져다 놓아 깔끔하게 증명해 보인 사실이다. - P57

수화기 너머로 형사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로운 개척지처럼 보였다. 마치 <스타트랙>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대담하게 나아가라.....!"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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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0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4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4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4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psyche 2020-03-16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동안 알라딘에 좀 뜸했나봐요. 2월에 쓰신 글인데 이제 보다니!

라로 2020-03-17 12:5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프님도 글좀 올려주세요~~~~!!^^
 

<랩 걸>의 저자인 홉 자런의 친구(?)인 빌이 책을 읽고 있는 홉에게 물었다. 아래 밑줄긋기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나는 이 부분을, 특히 빌이 한 얘기를 여러번 읽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게 심리적인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데 빌은 그냥 받아들인다. 하지만 만약 장 주네가 도둑질이 아닌 살인을 했다면?

나는 장 주네 Jean Genet(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시인-옮긴이)의 새 전기를 읽고 있었다. 1989년 미니애폴리스에서 <병풍들>을 연극으로 본 후 굉장히 흥미를 갖게 된 작가였다. 내게 있어서 주네는 진정성 있는 글을 쓰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대 큰 힘을 들이지 않으며,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고, 인정을 받더라도 영향받지 않는 유기적 작가의 전형이었다. 그는 또 글쓰기를 따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독창적인 목소리를 냈다. 자신이 읽은 수백 권의 다른 책들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게 되는 다른 작가들과 다른 점이었다. 나는 주네의 어린 시절 어떤점이 그가 성공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동시에 성공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만든 것인지 알아내는 데 거의 집착하고 있었다.
"장 주네에 관한 책이야." 나는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고 대답했다. 내가 책벌레라는 사실을 더는 감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빌은 전혀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심지어 약간의 관심까지 보였다. 나는 용기를 내서 설명을 시도했다. "한 세대를 풍미한 위대한 작가였어. 무한하고 복잡한 상상력을 지녔고. 그런데 유명해진 다음에도 그 사실을 한편으로 실감하지 못했지."
나는 마음에 제일 걸리는 사실을 덧붙였다. "성장하면서 주네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범죄를 연달아 저질러 복역한 바 있어. 그래서 사뭇 다른 자기 나름의 도덕 체계를 만들어냈지." 나는 그렇게 설명하면서 누군가와 책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에 놀랐다. 야외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이미 죽은 작가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을 하다 보니 가족 생각이 났다. 모든 면에서 이제는 나와 거리가 많이 멀어진 내 가족. 빌이 자기 칼로 흙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엄마와 같이 정원에서 일하던 여름날을 기억했다.
"주네는 남창으로 일하면서 고객들의 물건을 훔쳤고 그러다가 감옥에 갇혀 그 시간 동안 책들을 썼어." 나는 계속해서 설명을 했다. "묘한 사실은 이미 부자가 된 다음에도 주네는 가게에 들어가 자기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엉뚱한 물건들을 훔치곤 했다는 거야. 한 번은 파블로 피카소가 주네의 보석금을 내주기까지 했어. - 앞뒤가 맞질 않지." 나는 그렇게 결론 지었다.
"아마 자기 저신에게는 앞뒤가 완벽하게 맞는 일이었겠지." 빌이 반박했다. "누구나 자기도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는 별 이상한 짓을 할 때가 있잖아. 단지 아는 건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뿐인 거고." 그가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p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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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0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1 0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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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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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이렇게 큰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서울에 가서 공부도 하구 영화감독두 되구. 힘든 대루 손 벌리지 않고 네 힘으로 살구. 까짓것 다 무시하면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난 그거, 멋지다고 본다. p.39

할아버지가 우산을 조금 만지자 꼼짝도 않돈 우산대가 활짝 펴졌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면서 나에게 우산을 씌어줬다. 할아버지가 쓰고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정류장까지라도 같이 가자고 하니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그냥 이대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이 빨개졌다. 울고 싶으니까 그냥 풀어달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놓았다. 할아버지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p.41

저렇게 제멋대로고 충동적이고 마음 여린 이상한 사람. 이상한 나의 할아버지. 저 엉망진창인 사람.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할아버지가 씌워준 우산을 쓰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p.41-42

슬픔을 억누르고 억누르다 결국은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엄마였다. p.51

내가 창의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 능동적인 사람은 더더군다나 아니며 암기식 교육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토록 싫어했던 제도권 교육 안에서 나는 얼마간 편안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동안 매일 채용 사이트에 들어가서 취직자리를 알아보는 일도 거르지 않았다. p.60

그때 쇼코는 그 예의바른 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p.69

어떤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따뜻한 기분과 우리 두 식구가 같은 공간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던 공기를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호의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고작 한명의 타인과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는 어른이 된 나로서는 그때의 일들이 기이하게까지 느껴진다. p.73-74

혼자 그렇게 오래 있으면 자연히 어두운 생각에 빠지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했다. p.74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투이네 가족도, 우리 가족도 서로 말고는 그렇게 가까운 이들이 없었던 셈이다. p.75

경쟁적으로 서로의 존대를 무시하는 그 두 사람이 한때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중략) 아무 미움 없이 평범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기를, 결코 헤어지지 않기를 나는 매일 빌었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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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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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아서 다 옮길 수가 없어.

한 번에 10개씩.

쇼코와 나는 하굣길에 비디오를 빌려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대부분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였지만 쇼코와 함께 비디오가게에 가면 어떤 의심도 받지 않고 비디오를 빌릴 수 있었다. 에단 호크가 화가로 나오는 <위대한 유산>, 야한 베드신이 있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 일본 공포영화 <링>, 쥴리아 로버츠의 <노팅 힐> 같은 영화들이었다.

쇼코에게는 가까운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겉보기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쇼코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내밀한 우정을 쌓는지 알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엇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나는 마루의 끝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왜 내가 쇼코를 만나기 위해 굳이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쇼코는 아는 사람도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낯선 사람이었다. 쇼코는 처음부터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의미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만큼 얕은 사람도 아니었다.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얼굴을 들여다 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는 매사에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사정이 있어서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정같은 건 봐줄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이해나 관용이라는 것은 없었고 뒤끝도 있어서 자꾸만 지난 얘기를 끄집어내며 화를 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친구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거의 다 잃어갔다. 기다려준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림자를 먹고 자란 내 자의식은 그 친구들마저도 단죄했다. 연봉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는 볼 것도 없이 속물이었고, 직장생활에서 서서히 영혼을 잃어간다고 고백하는 친구를 잏ㅐ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의 끔찍함에 놀랐으나 그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도 바닥에 앉자 할아버지는 여자는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를 대면 안 된다면서 의자에 앉으라고 소리를 쳤다.
"할아버지, 여기서는 조용히 말해야 돼. 방음이 잘 안돼."
"염병할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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