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날 여정을 마치면 책 읽는 걸 그날의 보상으로 생각해요. 지금 가지고 있는 책은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이에요." 그 책은 아직 상한 곳 하나없이 내 배낭 안에 들어 있었다. 눈길을 걸으며 앞으로의 일정이 언제 어떻게될지, 다음 보급품을 받을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몰랐기에 책을 찢어 불태우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 책을 다 읽었고 지난밤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괜찮다면 한번 읽어봐요." 제프가 이렇게 말하며 《짝짓기》를 손에 들고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이미 다 읽었으니까.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으면다른 책도 있어요." 그는 주방을 나가 침실 쪽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뒤 제임스미치너의 두툼한 책 한 권을 들고 와 이제는 텅 비어버린 내 접시 옆에 놓았다.
제목이 《소설 The Novel》 이었다. 제임스 미치너는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작가였지만, 그 책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미치너의 책을 읽으며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지 몰랐다. 무슨 책을 읽었느냐는 교수의 질문에 내가 《대중을 위한 즐거움An entertainer for the masses》이라고 대답했더니 교수는 비웃듯이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정말 진지한 작가가될 생각이 있다면 제임스 미치너의 책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나는 갑자기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10대 시절 내내 그의 책들에 흠뻑 빠져 지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대학에 입학한 그 첫 달에 나는 어떤 작가가중요하고 또 어떤 작가가 그렇지 않은지 금방 배우게 되었다.
"엄마는 그게 진짜 책이 아니라는 것도 몰라?" 그해 크리스마스에 누군가엄마에게 미치너의 《텍사스Texas》를 선물하자 나는 조롱이라도 하듯 그렇게 말했다.
"진짜 책이라니?" 엄마가 나를 재미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는 표정으로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진지한 책이 아니라고, 그럴 시간이 있으면 진짜 문학을 좀 읽어요." 내가 핀잔을 던졌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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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두 사람은 그늘에 앉아 우리가 왔던 길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마흔 살, 워싱턴 주 타코마에서 회계사로 일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고 엄격한 모습의 금융인 분위기가 풍겼다. 그는 5월 초에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캐나다까지 계속해서 이렇게 걸어갈 계획이었다. 본래 내가 하려고 했던계획을 고스란히 실천에 옮기고 있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물론 그의여정이 나보다 훨씬 더 길기는 했다. 그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설명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이해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와 함께 같은 길에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으쓱해졌다. 동시에 그는 나와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허술한 나에 비하면 그의 준비는 완벽했고, 그가 훤히 꿰뚫고 있는 문제들 중에는 아예 들어보지도 못한 것도 많았다. 그는 이 도보여행을 4년간 준비하면서 PCT를 여름철에 여행해본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주도해 만든 이른바 ‘장거리 도보여행을 위한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기도 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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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는 여자 화장실로 향했다. 각자 따로 변기 위에 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슬픔 때문에 외로움이 치밀어 올라서가 아니라 한 몸인 것 같은 그 느낌 때문이었다. 우리는 마치 둘이 아닌 하나의 몸 같았다. 나는 문에 기댄 엄마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엄마의 손이천천히 문을 내리쳤고 화장실 문 전체가 흔들렸다. 잠시 뒤 우리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얼굴과 손을 씻고 환한 거울 속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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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오는 일은 불가능했다. 헉. 나는 마치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숨을들이켰다. 비록 황무지에서 38일을 지내며 이곳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금 일어난 일의 충격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등산화가 사라지다니....... 말 그대로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남은 한 짝을 마치 갓난아이처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물론 그건 아무소용없는 짓이었다. 도대체 이걸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짝에도쓸모없고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아닌가? 끈 떨어진 고아 같은 녀석에게 나는 아무런 동정심도 느낄 수 없었다. 그건 그냥 무겁고 커다란 짐짝일 뿐이었다. 은색의 금속 죔쇠에 붉은색 신발끈이 달린 갈색가죽의 라이클Raichle 등산화 한짝이라니. 나는 남은 신발 한 짝을 온 힘을 다해 멀리 내던졌다. 그리고 녀석이내 품을 떠나 저 멀리 무성한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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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곤조는 얼핏 쓴웃음을 지었다.
"선대 안주인은 상당히 성미가 격한 여자였던 모양입니다. 바로 뒤에 있는 잡곡 도매상에서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데 지금의 안주인, 즉 며느리 가요에게 고함치는 목소리가하루 종일 들리곤 했다고 합니다. 본래 가요는 이세야에 드나들던 염색 가게의 딸이었거든요. 가요의 입장에서 보자면비단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간 것이지만, 이세야 쪽에서 보자면 마당에서 데려온 며느리가 되지요. 선대 안주인은 그게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틈만 나면 가요를 괴롭히곤 했던 모양이에요."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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