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사람의 저녁 산책

 

1

 

해가 일찍 눕잖아요. 바람이 열심히 낮과 저녁 사이를 조율하잖아요. 나무 그림자 조용히 호수 표면을 간질이면 웃음 참느라 물살 얕게 일렁이잖아요. 얼마나 좋겠어요, 함께 호숫가를 빙빙 돈다면. 하늘이나 구름이나 바람같이, 만지지 못해 아름다운 것들이나 말하면서, 오늘의 것이 흩어져가는 오늘과 그 빈자리를 내일의 것이 채우는 내일을 이야기하면서, 나랑, 당신이랑, 겹쳐진 우리의 그림자랑 이렇게 셋이서 함께 호숫가를 빙빙 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일찍 누운 해가 지평선이 친 커튼 뒤에서 천천히 천천히 우주를 돌고, 새벽을 퍼 올려 세수를 마친 지구와 산뜻하게 맑은 얼굴로 다시 만나기 전에, 그 전에 우리가 함께 호숫가를 빙글빙글 돌 수 있다면,

 

손잡기 좋은 계절입니다.

 

 

 

2

 

아니, 유시민이 재미없다니. syo인데????

아니, 플라톤이 재미있다니. syo인데??!!!!

 

이 가을, syosyo가 아닌 무엇인가가 되고 있는 것 같다.

 

 

 

 

3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한마디로 '책을 좋아한다.'라고 하지만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1. 이것저것 끼우는 걸 좋아함

2. 냄새 맡는 걸 좋아함

3. 옆 사람이 읽는 책 보는 걸 좋아함

4. 쌓아놓는 걸 좋아함

5. 읽는 걸 좋아함

6. 일단 모으는 걸 좋아함

7.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좋아함

8. 옷 입히는 걸 좋아함

9. 바퀴를 달아 굴리는 걸 좋아함

10. 올려놓는 걸 좋아함

11. 책갈피 끈을 쭙쭙 빠는 걸 좋아함

12. 손에 들고 춤추는 걸 좋아함

요시타케 신스케있으려나 서점


일이삼사오륙칠팔구십십......일?

 

 

 

4



 "재밌었어요재밌고 허망했어요."

 "나도."

 "이제 어디로 가요?"

 기대는 하지 않고그는 자동차를 찾으러 다시 남산으로 갈 것이라 말하며 모자를 고쳐 쓰는데 역시너무잘생겼다환승센터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부드럽고 단호하게 괜찮다고 말한다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판단력은 흐려지고 그러는 사이 간다그는 모르는 사람처럼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다시 올라온다.

 "왜요?"

 라고 묻는 내게

 다가와 그는 내 볼에 아주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다시 내려가는데

 너무 좋아서 광대가 아플 지경인데 그렇게 한껏 좋아지는 기분 가운데 그의 뒷모습을 본다내 옷을 입은 당신이 저기 걸어간다내 옷을 입은 남자를 보는 건 언제나 행복하게 야릇하고이 숨 막히게 덥고 사람으로 가득 찬 광장 속에서 오직 아는 사람이 너뿐이라는 사실이 어이없게 든든한데 그가 다시 돌아 손을 흔드는 모습을 나는 언젠가 보았던 것만 같고그건 반복되는 토포스거나 사실 나는 당신을 이미 마흔 번쯤은 사랑해본 적이 있는 것이고언제나 기대했던 기시감으로 넘쳐나는 지금 이 순간그런 기시감과 패턴만을 사랑해왔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사랑해버린다.

김봉곤디스코 멜랑콜리아


 

어떤 사랑이 불편한 이유를 가장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사랑이야말로 사랑 같은 사랑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읽은 책들 읽는 책들


 

김봉곤, 여름, 스피드

유시민, 역사의 역사

요시타케 신스케, 있으려나 서점

김혜경, 쉽게 읽고 되새기는 고전 국가


플라톤, 국가

김민섭, 고백, 손짓, 연결

이승우, 만든 눈물 참은 눈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정암학당, 아주 오래된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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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9-2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 산보는 일본식 표현이라고 해서 잘 사용 안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산책이 맞지 않을까요?
암튼 유시민이 재미없나요? 많이들 좋아하는 것 같던데.
플라톤의 국가가 재밌나요?
저는 고고전이라면 무조건 겁부터 먹는 주의라.ㅠ

syo 2018-09-28 13:21   좋아요 0 | URL
역시 이런 거 하나 놓치지 않는 ‘작가의 눈‘ ㅎㅎㅎㅎ
옳은 말씀 수용하여 제목을 수정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별로 재미없게 읽고 있습니다. 원래 관심분야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요? 유시민과 여친과 치킨을 삼위일체로 섬기는 저인데......

소크라테스는 맞는 말도 잘하지만 뻘소리도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아무래도 2500년 전 인간이니까요. 거룩한 한 마디와 뻘소리 한 마디가 교차되면서 마치 널뛰기를 보는 느낌입니다!

stella.K 2018-09-28 13:3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그렇군요. 삼위일체.
제가 못 알아 먹었슴돠.ㅋㅋㅋ

거룩한 한마디와 뻘소리 한마디라
갑자기 소 할배가 좋아질 것만 같습니다.ㅋㅋ

syo 2018-09-28 14:52   좋아요 0 | URL
더 읽어보고 더 자세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ㅎㅎ

- 2021-10-13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맨처음 글의 제목이 무엇인지 여쭙니다^^
 


우리가 두고 온 오답들 


1

 

명절의 끝에는 마침내 가을이다. 읽기는 더없이 더디고, 사랑하는 사람의 품이 자꾸 그립다. 밤이면 때때로 코를 풀고 감기를 앓지는 않는지 제 이마에 손을 올려본다. 소용없는 짓이다. 이부자리가 어쩐지 눅눅하고 책도 손닿는 자리마다 눅눅하게 넘어간다. 비도 없는 밤에.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눅눅한 탓이고, 눅눅한 마음은 술로 말린다. 오랜만에 친구들 둘러 앉아 실패한 지난 사랑 얘기를 나누며 새벽까지 웃음으로 각자의 마음을 말린다. 두어 놈은 가망 없는 짝사랑을 하고 있노라 쓰게 웃는다. 묻는다. 어차피 절대로 응답받지 못할 거라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랑과 이미 지나간 사랑 중 어느 쪽을 품고 있는 마음이 더 눅눅하겠어? 친구들은 괜히 크게 웃는다. 제가 정답일까 봐. 혹은 제 사랑이 오답일까 봐. 마셔라, 마셔라. 민족의 큰 명절에는 역시 개소리지. 개소리는 역시 syo개소리지. 마셔라, 마셔라. 끝내 응답받지 못하겠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 행복하다. 주기만 하는 것의 행복함을 느끼는 중이다. 그렇게 말하고 쓸데없이 해맑게 친구는 웃는다. 친구야. 다름 아닌 그게 바로 개소리란다. 누구도 아닌 네가 바로 새로운 개소리 챔피언이란다. 지금 너는 행복한 게 아니라 중독된 거란다. 혼자서는 헤어 나오지 못할 자기최면의 늪으로 너는 잠겨들고 있단다. 그렇게 말해주지 못한다. 내 사랑도 한번쯤 그렇게 늪 속에서 망한 적이 있다고, 내 사랑의 목을 내가 졸라 질식사한 적이 있다고, 그렇게 말해주지 못한다. 사랑했던 사람의 손이 잠깐 그립다. 추억을 앓지는 않는지 이마에 손을 올려본다. 정신 나간 짓이다. 우리의 마음이 제각기 응답받지 못한(못할) 어떤 것들의 젖은 손길로 또다시 눅눅해지기 전에, 친구들아,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짧은 연휴가 밤의 고개를 넘어 녹아나듯이 끝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그 사실은 나를 자격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김봉곤컬리지 포크


난 기억한다당신을 만나기 전에 내가 사랑을 얼마나 낙관했던가를.

이 모든 것을 겪고도 사랑에 대한 내 생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조애나 월시호텔


 

 

2



 

국가는 모든 것의 시작이 된 책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부터 우리 시대 존 롤스의 정의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저작은 국가에 대한 응답이다.

스티븐 스미스,정치철학

 

처음부터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겠다고 하는 나에게 그는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먼저 읽도록 요구했다그런 다음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한 후에야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도록 허용했다왜 카벤디쉬 교수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먼저 읽도록 조언했는가를 이해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서양 정치 사상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런 순서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용환리바이어던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이러니, 버틸 재간이 있나. 읽어야지. 내 더러워서 읽는다, 읽어. 그놈의 플라톤, 그놈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무얼 읽어도 피할 수가 없는 건가.

 



 

3

 


좋은 글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그것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생각하기를 강요하면서 우리 삶을 내내 성가시게 하는 글가능하면 대면하지 않았으면 싶은 글쾌감보다 불쾌감을 주는 글일지도 모른다세계의 슬픔과 진리의 어려운 자리가 글에게 그런 고약한 성질을 가질 것을 요구하리라가끔 바람이 책장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이런 글의 영혼이 읽는 이들의 숨결에 섞여 들기 위해책의 내부로부터 박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한 줄의 문장을 창문처럼 찾고 있기 때문이다읽는 눈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빛도 들지 않고 닫혀 있을 문장의 창문 말이다.

서동욱,생활의 사상

 

어려운 글은 있어도 불편한 글은 없던 때가 생각난다. 책 읽는 일이 쉬웠던 시절이었다. 읽히면 읽고 즐거워하고, 읽히지 않으면 던져버린다. 간단한 원칙이었다. 읽다 보니, 읽히는데 불편한 글과 읽히지 않는데도 편한 글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영 복잡해졌다. 읽으면 불쾌하거나 불편한 책이 있다는 것은, 굳이 그 책을 읽지 않아도 그 사실 자체 사람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한다. 편한 책을 읽는 순간조차 불편해진다. 세상에는 너를 불편하게 하는 책이 있어. 많이 있어. 그런데 넌 이렇게 네 기분 맞춰주는 책만 계속 읽고 있을 거야? 이것은 작긴 해도 명백히 일종의 투쟁 국면이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내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길목에 버티고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책만큼은 즐겁게 읽고 싶다는 마음과, 세상에서도 너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으면서 독서조차 도망치면서 하겠느냐는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자주 싸움 붙는다. 아직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어느 한 쪽이 이기는 일은 없을 것도 같다.

 

 

 

읽었거나 읽는 중이거나

 

알베르토 망겔, 서재를 떠나보내며

서머싯 몸,서밍 업

개러스 사우스웰,마르크스라면 어떻게 할까?

강신준,오늘 자본을 읽다

김용환,리바이어던,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서동욱,생활의 사상

김봉곤,여름스피드

스티븐 스미스,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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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8-09-27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추석연휴 잘 보내셨나요? 마셔라마셔라 하셨는데 속은 괜찮으신지 모르겠네요. 저는 연휴 내내 육아모드로 보냈더니 피곤하고 행복합니다.
불편한 책을 읽느냐 마느냐, 그게 한 사람의 독서의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도 가리지 말고 많이 읽어주세요^^

syo 2018-09-27 08:46   좋아요 0 | URL
피곤하고 행복하다시는 그 말씀이 답이겠어요. 꼭 그렇게 읽어야 되겠습니다.

마셔라 마셔라 외치기만 바빴지 막상 저는 주량이 약하여 조금만 마셨거든요 ㅎㅎㅎ 말짱합니다^-^
 

 

서가에 쌓인 먼지를 걷고 읽은 책을 읽지 않은 책 뒤로 옮기는 작업을 하다가 오래 잊었던 책 한 권을 발견한 s는 그대로 퍼질러 앉아 그 책을 끝까지 읽었다. 그 책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느 시대를 살던 누구의 작품인지가 우리에게 중요치는 않다. 책 한 권만큼의 시간이 점이나 선처럼 연약하지만 뚜렷하게 녹아버리는, s의 인생에 때때로 찾아오는 이 마술 같은 사건의 구성 요소들이야말로 잠시나마 생각해볼 만하다.

 

지금보다 더 젊고, 어리석고, 무모하였으며, 그래서 더 선명했던 s가 있었을 것이다. 젊음이 늘 그런 것처럼, 자신을 한 가운데 꽂아 그걸 축으로 세상을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신성한 회전의 어느 지점에서 s는 한 권의 책을 만났을 테고, 그 책이 무겁고 끈적하게 s에게 달라붙어 세상의 공전 속도로 착각되던 s의 자전 속도를 얼마만큼 늦췄을 것이다. 그리고 천구에 별자리가 박혀 이야기를 증명하듯, 그 만남이 s의 마음에 박혀 무엇인가를 증명했을 것이다. 젊고 어리석고 무모하여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뒤이은 수 천 수 만 걸음 중 몇 발 정도는 그 만남에서 비롯하였을 것이다.

 

인생의 항로는 등 뒤로만 펼쳐지는 것 같다. 앞은 그저 어두울 뿐이고, 몇 개의 가느다란 선분으로 이어진 흔적만이 지나온 날을 기록하며 존재를 외치고 있다. 사람의 생 전체는 하나의 별자리고, 사람의 현재는 그 별자리의 제일 끝별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선분으로도 이야기는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만남은 그 선분을 다시 한 번 꺾어 다음 자리에 새로운 끝별을 박는다. 그러면 다시 이야기는 새로워진다. 끝별은 자기가 별인 줄 알아도 어느 별자리의 끝별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제까지의 별들을 바라보며, 이 긴 항로가 어떻게 변곡되어 왔는지 추측하는 밤이 있다. 변곡의 밤과 추측의 밤 사이의 거리는 늘 멀다. 그러나 너무 멀지는 않다. 너무 가까이 서면 별은 보이고 별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멀리 서면 별자리가 하나의 별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어느 시기에, 언젠가 읽었던 책을 다시 한 번 읽어야 한다. 우연으로, 혹은 의지로.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건 하늘의 뜻과 시간의 조력이 조금은 필요한 일이다.

 

 

180901 180918 : 24



1.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기본소득에 관한 책들은 의외로 많지만 막상 읽어보면 의외로 이렇게 많을 필요가 없겠는데 싶을 만큼 겹치는 데가 있다. 그렇다면 든든한 한 권을 여러 번 읽는 것이 남는 일일 수 있다. 아직 서너 권밖에는 읽지 못해 섣부르지만, 아직까지는 이 책이 바로 그 한 권이다.

 

2. 언젠가, 아마도

: 보자마자 이건 내가 따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있고, 읽는 사람이 이 정도면 나도 하겠는데 하는 착각에 취해 백지 앞에 마주앉아 좀 끄적대고 나서야 비로소 그 경지를 드러내는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초식이 없는 무공이 결국 가장 무서운 무공임을 설파한 무협지가 있었다. 색깔 없음을 색깔로 삼는 작가는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워 무섭다. 아무렇게나 쓸 수 없는 글을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글인 것 마냥 위장할 수 있는 작가는 무슨 일을 칠지 짐작하기 어려워 무섭다.

 

3.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처음 이 책을 읽고 작가 후기에서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는 식의 쓴 소리를 많이 들었다는 진술을 발견했을 때, 그 사태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하루키에 손대기 전 거의 전작을 하다시피 했던 작가가 배수아였기 때문인데...... 하여간 오늘날의 자리에 가져와도 독특하고 독창적인 작품이긴 하다. 젊은 날 만났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감동까지야 다시 찾아오진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원래 항상 하루키는 좋은데 왜 좋은지 딱히 설명하기 힘든 양상으로 좋았던 것도 같다.


4. 남자는 불편해

: ‘남성성이 담지하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syo가 가장 경기하는 것은 이성객관성이다. 그건 남자와 여자 중 누구의 것이냐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것도 되기 힘든 것에 가깝다. 도대체가 스스로 객관적이라 생각하는 인간이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 근거도 없이 자기가 파악하는 편향적인 자기 정보만을 근거로 스스로를 객관적이라고 칭하는 것이, 어떻게 이성적인 행동이란 것인지. 스스로를 표준의 자리에 올려놓는 저 무지함, 무심함, 무자비함 같은 것들을 이 책은 때리고 있다.

 


5. 전한길의 공시 합격을 위한 선한 영향력

: 하루 최소’ 16시간씩 6개월간 공부했다는 거대한 7·9급 영웅들의 장쾌한 일대기가 담겨 있는 책. , 이 좋아 미치는 독서를 해도 10시간이 넘어가면 식상해서 식상사할 지경인데. 저들을 과연 인간 승리라 해야 하나, 인간이길 포기한 공부짐승이라고 해야 하나.....

 

6. 단어로 읽는 5분 한국사

: 책이 이쁘게 잘 빠졌다. 하지만 한국사라는 타이틀을 만나면 어느 정도의 함량을 기대하기 십상인데, 그걸 채울 만큼 알차다고 할 순 없겠다.

: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다. 그러나 syo에겐 아이가 없지. 그리고 아이에게 읽히고 싶은 책은 있는데 책을 읽히고 싶은 아이가 없다는 대구를 뼈대로 하는 이런 식상한 말장난,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만하고 싶다. 그러려면 애들 읽기에 좋은 책은 이제 슬슬 알아서 커트해야 하겠다......

 

7.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더할 나위 없는 것이 최고를 뽑는 조건이라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단연 2018syo 주최 양서대상 대상 수상작으로 점쳐진다. 이런 걸 쓰다니. 그리고 이렇게 쓰다니. 존경이라는 것을 한 번 해볼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8. 블랙코미디

: 이런 건 재능인가.

: 이런 걸 책으로 엮어 내면 득보다 실이 클지도 모른다. 독서가들은 책에 관해선 아무래도 엄격한 편이니까.

 


9.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6가지 코드

: , 별 거 없네요. 이 장르의 책이 대충 그렇지요.

 

10. 빵 고르듯 살고 싶다

: 사는 게 다 비슷하다고 느끼게 하는 삶이 있고, 제각각 다 달리 산다고 느껴지는 삶이 있다. 또한, 에세이는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에세이가 있고, 에세이는 제각각 다 다르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에세이가 있다. 삶과 글은 상관이 있지만 꼭 함께 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나랑 사는 게 비슷한 것 같지만 어쩐지 다르게 느껴져 식상하지 않은 에세이나. 나랑 사는 게 전혀 다르지만 어쩐지 나와 닮아 있어 친근한 에세이가 있다. 많이 읽어야 내게 좋은 에세이를 만난다.

 

11.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가 나는 아프다. 손을 내밀거나 내밀려다 마는 것도 아픈 사람이고 그 손을 잡거나 뿌리치거나 그 손에 침을 뱉는 것도 다 아픈 사람이다. 주고받는 그 손이 아픈 사람들을 아프게 할 동안,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방식을 손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영영 아프지 않다. 아픈 사람은 점점 아프고 아프지 않은 사람은 늘 아프지 않다.

 

12. 고민과 소설가

: 진짜는 에세이인가.



13. 꿀벌과 철학자

: 기획 자체가 흥미롭고 귀하다. 하지만 이런 책은 대체로 소수의 팬을 만들고 다수로부터 무관심의 대상이 되기 쉽다. syo는 다수가 되었다.

 

14. 정치는 잘 모르는데요

: syo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좋은 책,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이다. 그러나 어쨌든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책은 그 자체로 가치와 의미가 있다. 자신의 생각을 너무 과신하지 말자. 솔직히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잘 벼려진 좋은 생각을 알려주는 것보다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가끔 더 나을 때가 있다.

 

15. 우미인초

: 소세키에 대한 편애로 가득 찬 인간으로서 무심히 별 다섯 개를 때렸지만, 솔직히 낡았고, 강압적이고, 지루하다. 100년 전의 소설이란 뭐, 어느 정도 그런 법이다. 시간이 이 시대에 이 책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은 것일까.

: 300쪽까지 작정하고 재미가 없다. 그러나 300쪽을 넘기면 모든 고구마가 쓸려 내려가고 폭풍처럼 사이다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셰익스피어의 하위호환 같은 느낌이 되고 만다.

 

16.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 전공책을 제외한 과학책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과학이 거들먹거리는 책과 과학이 거드는 책. syo가 가장 사랑하는 과학저술가 이정모 선생님의 손끝에서 과학은 항상 거들 뿐이다. 그리고 아직은, 거드는 책이 잘 읽히는 시대가 아닐까.

: 뒤표지에 서민 선생님의 추천사가 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우리 둘의 격차를 다시금 절감한다. 이정모 선생님, 언젠간 꼭 따라잡고 말 겁니다. 10년만 기다리세요.” 이러면 syo는 작가도 뭣도 아니면서 괜히 박탈감이 든다. ..... 이 양반들이 여기서 지금?



17. 불편한 인권

: 가끔, 이분은 정말 너무 빨리 태어나신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르네상스적 지식인이라는 칭호가 앞에 붙는 박홍규 선생님. syo는 르네상스가 뭐 어떤 건지 박홍규 선생님을 통해서 조금씩 감을 잡고 있다. 다빈치가 아니라.

 

18.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실은,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고전으로 철학하기를 먼저 읽고 이 책을 본 건데, 아우만한 형이 못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하준 선생님보다 더 좋은 학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syo가 알 수 없으나, 이 책보다 더 좋은 책이 얼마간 있음은 잘 알고 있다.

 

19.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마르크스 개론서 중 가장 좋은 책을 찾는 방법이 무엇일까? 출간된 모든 마르크스 개론서를 다 읽은 사람 1000명을 모아 설문조사를 한다고 하자. 가장 좋은 책은? 하는 질문에서 제일 많은 득표를 한 책을 고르면, 그걸로 될까? 의문이다. syo 생각에, 더 좋은 질문은 이렇다. 가장 좋은 책 3권을 꼽는다면? 앞의 질문에 어떤 책이 1등을 할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뒤의 질문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을 책은 단연 이 책이다.

 

20. 샤를 보들레르 :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 지금 보들레르는 아마 불지옥에서 자연과 문명 중 어느 쪽이 더 쓰레기인가를 놓고 루소와 멱살을 붙들고 싸우고 있는 중일 것이다. 지상에서 문장으로는 전 유럽에 이름이 떠르르 했던 두 사람이므로 승부는 아마 펀치력에서 결정되지 않을까. 둘 다 그다지 싸움을 잘 할 것 같지는 않다. 컨디션 좋은 사람이 이기지 않을까? syo 마음속의 루소와 보들레르도 그렇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얘 말이 맞는 거 같다가도 또 쟤 말이 맞는 것도 같고 그렇다.



21. 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

: 다 알아듣겠는데, ‘일반의지는 정말 애매하다. 그게 뭔지 제대로 알 때까지 루소를 다룬 다른 책들을 이것저것 읽어야 하겠다. ‘루소 골목에 발을 들이민 것 같다. 빨리 이 골목이 끝나기를.

 

22. 우리는 사랑했다

: 아직도 강화길의 다른 사람을 읽고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 그리고 작가의 전작을 이야기하면서 아직도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라는 식의 코멘트를 다는 게, 이 작품에 대한 생각이 어떻다는 의미인지는, 널리 일반적으로 추정되는 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 그 생각이 맞습니다.

 

23. 일본적 마음

: 90년대 쓴 글도 있고 그렇다. 좀 그렇다.

 

24. 스스로 생각하기의 전통

: 언제나 빛나는 선생님의 사유. 탐나는 그 빛.

: 그러나 그 사유의 빛을 어떻게 내 인생 쪽으로 당겨 와야 하는지는 전적으로 읽는 이에게 달렸다. 뭔들 아니 그렇겠느냐 만은, 그걸 안다고 해서 허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좋은 말씀은 좋게 허망하고, 너무 좋은 말씀은 너무 좋게 허망할 때가 있다. 다 제가 못나서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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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9-25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연휴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우미인초 300쪽 이후..믿고 갑니다.ㅎ

syo 2018-09-25 12:23   좋아요 1 | URL
평을 쓸 때는 엄청 호기롭게 써 놓고는, 그래서 한 번 읽어보겠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왜 이렇게 조마조마한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ㅎㅎ

북프리쿠키님께서도 즐거운 연휴 중이시겠지요?^-^

수이 2018-09-25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미인초 빼들고 카페 나갑니다! 뒤늦었지만 쇼님 즐거운 추석 보내셨으리라 믿으며_ :)

syo 2018-09-25 15:36   좋아요 0 | URL
저는 괜찮은 추석을 보냈는데 카페에서 우미인초 읽는 추석만큼 괜찮지는 않았지요 ㅎㅎㅎ 하필 우미인초라니 쉽진 않겠으나 수연님 더 즐거운 연휴로 마무리하시길^-^

2018-09-26 0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26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랙겟타 2019-09-2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syo님께선 왜 왜 때문에! 계속 제가 읽으려는 책(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마다 보이시는 겁니까? ㅎㅎㅎㅎ
어떤 책인가 하고 알라딘에서 검색중에 syo님의 글로 들어와버렸습니다!
syo님의 글을 읽고 이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

syo 2019-09-27 18:41   좋아요 0 | URL
응? 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님과 제 취향이 놀라울만큼 유사한 탓이겠지요!

2022-01-25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26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26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패의 추억, 실패의 예감 

 

1

 

기록을 보니, 작년 연휴는 길었고,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페이지로 8000페이지가 넘었던 것 같다) 읽으려 깝죽거리다 아, 정말 처절하게 실패했다. 가끔 나도 내 미친 배짱에 놀랄 때가 있다. 그러나 실패라는 결과에는 전혀 놀라지 않는다. 그것은 그야말로 늘상 있는 일이니까. 매일이 실패고, 실패하지 않는 거라곤 오로지 실패하기밖에 없는 듯하다.....

 

올해는 연휴도 짧고, 욕심 없이 평소에 좋아하고, 때론 그만 좀 읽고 원전 보라고 눈치도 받던 입문서나부랭이나 잔뜩 읽으며 빡세게 보내고 싶다. 그리고 실패의 긴 목록에 또 하나의 기록이 추가되겠지.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ㅠ

  

 

고요한 폭풍스피노자 손기태

정치철학 스티븐 스미스

리바이어던 김용환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입문 / A. 베일리, D. 오브리언

칸트 철학에의 초대 한자경

오늘 자본을 읽다 강신준

인생 교과서 헤겔 최신한권대중

존재의 제자리 찾기 박영규

집 읽은 개 1 / 리링



 

2

  

 

누군가의 마음에 공감하고 나면, 완전하게 솔직한 문장을 쓸 수는 없게 된다. '솔직하다'라는 의미 역시 달라지고 만다. 글을 쓴다는 것은 '최초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_ 김중혁, 『무엇이든 쓰게 된다』 


내 마음이라는 것은 다 만들어진 옷에 붙은 태그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옷을 만들고 이름 붙이는 일은 이런 식일 수 있다. 양털은 스위스 어딘가에서 왔고, 마섬유는 중국 남부 어딘가에서 가져왔을 테고, 그 두 재료가 적절히 섞인 하나의 옷감을 만드는 기술은 남미에 사는 어느 기술자의 손끝에서 빌려왔다. 그 옷감은 다시 동남아시아의 어느 공장으로 운송되었고, 그 공장에는 일본의 어떤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서 나온 모양대로 옷감을 이래저래 끼워 맞추는 수천 수백 개의 손들이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것들과 수많은 이들의 흔적이 이런저런 비율로 뒤섞여 만들어진 한 벌의 옷에 마지막으로 상표가 새겨진 태그를 붙인다. 그러면 사람들은 태그를 읽어 그 옷의 이름을 부른다. 태그에 적힌 이름은 그 옷의 가장 강력한 정체성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옷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 중 가장 손쉽게 내버려질 수 있는 취약한 껍데기에 불과일 수도 있다. 이름이 없어도 옷은 있지만, 이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은, 심지어 옷을 포장하는 한 겹 얇고 투명한 비닐조차도, 옷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 나는 내 생각이 나의 것이라는 사실에 집착한다. 많은 책들, 많은 사람들을 통과해오며 물들고 스몄음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그래서 그게 라는 태그를 붙이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가 없으면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하나 똑바로 못 만들었다는 인상을 주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은 성과주체로서의 삶을 강요받는 오늘날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게 모르게 마음 밑바닥에 깔아 놓은 바늘 카펫이다. 일단 를 만들면 를 지키고 싶다. 흔들리는 것은 취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는 한껏 열려 있지만 동시에 중심에는 굳은 기둥을 지닌, 훌륭하고 흠 잡을 데 없는 인간이고 싶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욕심이, 열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지키지 말아야 할 것들을 고집스레 움켜쥐고 있게 만든다. 딱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열어젖힐 수 있는데, 그 마지막 한 발짝 내딛는 일을 껄끄럽게 만든다. 열릴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이 딱 한 발이 모자라 수없이 닫혔다. 닫힌 문 앞에서 망연자실함을 감추고 우리는 서 있다. 당황하지 않은 척, 아쉽지 않은 척하며. 수많은 손들이 함께 만든 옷은 이미 연기처럼 녹아 날아갔고, 나는 그저 라는 이름이 적힌 태그만 덩그러니 손에 쥔 채 발가벗고 서서 바람을 맞는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왜 대학에 남아 로고스의 기술을 연마하는가타자에 대한 환대를 방해하는 모든 거짓된 담론을 비판에 부칠 힘을 기르기 위해서그리고 로고스 차원에서그러므로 이해와 대화’ 저편에서 찾아오는 타자를 영접할 때 로고스란 전혀 불필요하다는이성의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닐까대학에서 이성을 훈련하는 일은 전적으로 고귀한 일이다그러나 이 훈련하는 자 자신이 고귀한 자일 수 있다면 그 까닭은그가 이성적 존재여서가 아니라타인에 대한 환대는 이성과 그것이 낳은 수많은 합리적인 담론 저편의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명민한 이성을 낮출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_ 서동욱, 『생활의 사상』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성은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단순히 이성만을 위한 이성이어서도 안 된다그것은 감성의 잠재력을 폭넓게 수용하는 이성이어야 한다그러면서 동시에 그 이성은흔히 말하듯이감성과 이성을 종합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해소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더 넓은 지평으로 열리는 것이어야 한다.

_ 문광훈, 『스스로 생각하기의 전통』

 

세상에는 데카르트가 너무 많다. 특히 술자리에 많다. 그런데 이 무수한 데카르트님들이 대부분 실제로는 데카르트 한 번 읽은 적 없는 데카르트들이라는 게 신비롭다. 제일 유명한 한 마디를 외우거나, 조금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의심한다는 태도 정도만 접하고는 바로 데카르트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 마냥 이성거리며 감정을 씹어돌린다.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여 완벽한 지식을 찾아내겠다던 그 방법을 가지고 데카르트가 내린 결론이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라는 사실을 알까? 방법을 만든 사람도 저럴진대, 그 방법의 존재만 아는 걸로 마치 이성과 진리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굴면 쪽팔림만 낳을 뿐이다. 17세기에 만들어진 그 감성을 때려잡는 이성’, 그거 유통기한 지난 지 벌써 100년 다 되간다. 업데이트 좀 하자, 17세기야.

 


 

4




syo가 철학책을 대하는 태도는 간단하다. 재미없다 싶은 순간 아 이걸 어따 써, 하며 바로 내동댕이치는 것. 내가 이걸로 밥 벌어 먹고 살 것도 아닌데, 알고 싶은 만큼만 알 거야, 하는 것. 정말 졸렬하고 불공정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가 오랫동안 철학책을 읽어올 수 있게 만든 동력이 되었다. 결국 syo의 안에 남은 철학적 지식이나 지혜는 똥만큼이지만, 읽기 싫은 철학책은 syo에겐 똥보다 못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는 참 쉽고 재미있다. 에티카가 어렵지 스피노자는 어렵지 않다. 물론 잘 모르는 놈이 하는 소리다. 어렵자고 들면 무엇이든 한없이 어렵다. 1+1=2 라는 걸 증명하는 일도 몹시 어렵다. 하지만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친구들에게, 시작하려면 스피노자에서 시작하라는 충고를 계속 해대는 것은 분명히 스피노자의 철학이 쉬우면서도 희한하게 모던하다는 데 이유가 있다. , 그래도 결국에는 안 읽더라만.....




R.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서동욱의 생활의 사상데이비드 에드먼즈와 존 에이디노의 루소의 개손기태의 고요한 폭풍스피노자개러스 사우스웰의 마르크스라면 어떻게 할까?이언 스튜어트의 보통 사람을 위한 현대 수학알베르토 망겔의 서재를 떠나보내며서머싯 몸의 서밍 업을 읽었고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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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23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명절 잘 보내세요~맛난거 많이 드시구^^

syo 2018-09-23 12:18   좋아요 1 | URL
카알님두요!! 연휴에는 좀 쉬엄쉬엄 읽으시구요!! ㅋㅋ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09-23 12:20   좋아요 0 | URL
그건 내가 할 소리입니다요 전 별로 읽는게 없어요 고갈이 올까 염려되요 ㅋㅋㅋ 즐겁게 지내세요^________^*

서니데이 2018-09-23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추석인사 드립니다.
올해는 연휴가 5일인데, 벌써 오늘이 2일차라서, 추석이 지나고 나면 연휴가 바로 끝나는 느낌이 들 것 같아요.
그리고 작년 생각을 하면, 10월에 연휴가 오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요.^^
연휴에 책도 많이 읽고, 맛있는 음식 많이 드시면서
가족과 함께 즐겁고 좋은 추석명절 보내세요.^^

syo 2018-09-23 19:20   좋아요 1 | URL
작년은 정말 어마어마했죠 ㅎㅎ 시험도 끝나셨으니 서니데이님도 모든 걸 내려놓고 광란의 추석(?) 보내세요^-^

단발머리 2018-09-23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건 추석 되길요, syo님~~~ 맛난거 많이 먹구요.
복숭아 좋아하는 syo님은 추석에 무슨 과일을.... 무슨 과일을 또 맛나게 드셨을까 궁금하네요.

2번의 두번째 문단 좋아요.
멋있다, 쫌 많이~~~!!!

syo 2018-09-23 21:43   좋아요 0 | URL
전 복숭아 말고 딱히 좋아하는 과일이 없어요. 중앙집권식 일편단심 스타일이지요......

단발님도 끝내주는 추석 보내시고, 꺼지지 않는 독서의 불꽃을 머금고 돌아오시기를^-^

단발머리 2018-09-23 22:10   좋아요 0 | URL
끝내주는 추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금방 오리다~~~~~~~~~~(찡긋!)

bookholic 2018-09-2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온가족 모두 다함께 즐겁고 넉넉한 한가위 되시길 바랍니다. 즐거운 독서도 함께~~

syo 2018-09-23 23:24   좋아요 1 | URL
북홀릭님도 신나고 복된 명절 보내시구요.
우리는 명절도 안 명절도 언제나 즐거운 독서를 이어가자구요^-^
 


비, 그리고 소년의 개구리의 개구리의 개구리 

 

1

 

나는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이란 정말 각양각색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는 난생 처음 해보았던 것 같다. 진짜, 비를? 비를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럼 바람도 별로야? 잔잔하면 괜찮아. , 세상에. 인간이란 대체 무엇이지?

 

비 이야기 하다 보니 생각났는데, 애기 syo에게 노랑 장화가 있었다. 눈이 방울만한 개구리가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그림이 장화 코에 그려져 있었다. 그 개구리도 노랑 장화를 신고 있었다. 개구리의 장화를 가리키며 syo가 물었다. 엄마, 이 개구리가 신고 있는 장화에도 개구리 그림 있을까? 슬쩍 보더니, 엄마가 대답했다. 아니. ? 왜 아냐? ......산업기술력이 부족하니까. syo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엄마. 개구리 장화에 개구리 그림 있고, 그 개구리도 개구리 장화 신었고, 그 개구리도 또 개구리 장화 신었고, 그 개구리도 또 개굴...... 엄마가 말을 끊었다. 그러면 너도 개구리겠네? 너도 누가 신은 장화 속 개구리 그림이겠네? 아니 이 엄마는 왜 미취학 아들에게 아득바득 이기려 들지? 어머니, 이런 식의 교육방침을 고수하신다면 과연 제가 장차 제대로 된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당시에 대꾸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저 어머니의 말씀을 잘 받들어, 그날 이후 청개구리 아들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성실히 제멋대로 살아왔다.

 

syo는 비가 좋다. syo의 정체가 알고 보면 초월적 존재가 신은 노랑 장화 위의 개구리 그림에 불과하다고 해도, 내리는 빗방울을 보고 듣는 중에는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비 내리면 옷 젖는 것. 옷 젖다보면 맘 젖는 것. 젖으면 말랑말랑해지는 것. 우리는 종종 말랑말랑해져야 하는 것. 가끔은 감기도 앓아 줘야 하는 것. 비와 같이 산다는 건 그런 일이니까.

 




비 황인숙

 

하얀무수한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맨발들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여들고 싶게 하는. 

 

 

2

 

황인숙의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 전석순과 훗한나의 밤이 아홉이라도, 박완규의 리바이어던, 양자오의 묵자를 읽다, 김응교의 일본적 마음, 이하준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이사카 고타로의 악스, 서동욱의 생활의 사상,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존 에이디노의 루소의 개, 한자경의 칸트 철학에의 초대를 읽었다.

 

 

읽을 장르를 줄이고 처내고 나면 결국 철학이 남는 것은 왜일까. 나는 공대를 나왔는데. 전자기학 전자회로 반도체공학 운영체제 통신이론 시스템프로그래밍 이런 걸 잔뜩 배우고 대학교를 졸업했는데, 왜 골라서 읽는 책은 홉스, 묵자, 칸트, 루소, 마르크스 이런 애들일까. 쟤네들은 맥스웰 방정식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보는 애들인데......

 


 

홉스의 자연상태를 악이 판치는 전쟁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홉스는 그걸 악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악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규범이 존재한 이후의 이야기고, 자연상태에서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 안에는 타인에게 상처 입히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건 악이 아니라 그냥 권리 추구고 자연이라는 것. 악은 추후에 규정된다는 것. 기존에 알고 있던 성악설과 큰 차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역시 성선/성악/성무선악 이딴 식의 구획 속에 뭘 처넣는 방식으로 배우다보면 어딘가 뒤틀어진 것들만 기억에 남기게 된다.

 



100쪽쯤 읽었는데, 이 계몽주의자라는 인간들 하나같이 별로다. syo는 누가 날 계몽해주는 것에 대해 1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래도 기왕이면 지적/인격적으로 계몽할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계몽되고 싶다. 계몽새들이 어딘가 졸렬해 주시는 것은 오랜 전통이로구나.




칸트 읽을려는 놈이 이것보다 더 친절하길 바라면 도둑놈 심보라는 평을 발견하고 빌렸다. 확실히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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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9-2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의 개구리의 개구리의 개구리... 좋으네요..... 저는 개구리를 무서워합니다만...... 쇼님이 써주신 개구리의 개구리의 개구리 이야기는 좋으네요.........

syo 2018-09-21 17:39   좋아요 0 | URL
그 개구리는 상당히 다정하게 생겼던 걸로 기억합니다. 왼발인지 오른발인지를 앞으로 뻗고 신나게 걷고 있는, 너그러운 인상의 개구리였어요 ㅎㅎㅎㅎㅎ 그런 다정한 개구리 참 많이도 잡아죽였네ㅠㅜ

단발머리 2018-09-21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구리의 개구리의 개구리와 참 잘 어울리는 황인숙의 시집을 나도 빌렸었는데, 21일을 같이 살았었는데.....
안 읽었나봐요. syo님 페이퍼 읽으면서 알았네요. 좋은 시를 못 찾는, 아 나의 슬픈 눈이여!

syo 2018-09-21 18:17   좋아요 0 | URL
저는 그저 읽히는 시를 골랐을 뿐입니다.... 그게 흔하지 않잖아요 ㅎㅎ

북다이제스터 2018-09-21 1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 저도 무척 좋아하는데요, 최고는 비오는 날 포장마차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 들을 때 인 것 같습니다. ㅎㅎ
공대... 이미 과학이 아닌 철학이라고 생각됩니다. ^^
홉스... 그놈이 죽어야 인류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ㅋㅋ
계몽주의.... 이성은 없다고 이미 밝혀진 이상...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즐겁고 행복한 한가위 보내세요. ^^

syo 2018-09-21 19:57   좋아요 1 | URL
언제 한번 북다님 모시고 포장마차 지붕 때리는 빗소리 들어보길 기대할게요 ㅎㅎㅎ

북다님도 신명나는 한가위 보내세요!!

북프리쿠키 2018-09-2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수에는 우수감이 제 맛인데ㅎ
쇼님 추석 잘 쇠십시요^^



syo 2018-09-22 14:55   좋아요 1 | URL
북프리쿠키님도 풍성한 한가위에다가, 그에 뒤지지 않는 풍성한 독서생활 되시기를^-^

2018-09-22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23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