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휴가 시작되었다. 빨간 날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배치의 기쁨과 슬픔을 논하려면 우선 빨간 날과 검은 날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는, 그러니까 검은 날 아침에(혹은 그 하루 중 그 어떤 시간이라도)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예를 들면 학생이랄지 직장인이랄지 뭐 그런 신분이어야 하는 것이다. 365일이 휴일이었던 1년과 그 전의 1년과 또 그 전의 많은 1년 들을 거쳐오는 동안 연휴에 대한 개념원리가 흐려졌던 syo였는데, (은 아니고 아직까지는 일 비스무리한 것)을 시작하면서 단숨에 잊고 살았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래, 연휴란 이런 것이었지. 아오, 소중.

 

 

 

2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도 그러한가?

 

워낙 일 이슈가 지배적인 이 나라의 담론 구조상, 일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조차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추론할 수 있고, 심지어 어떤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기가 일을 하며 겪었던 양 호들갑스럽게 묘사하며 듣는 사람을 속여 넘길 수조차 있다. 일에 대한 경험을 얻기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은 일과 일을 둘러싼 사건, 감정, 정치, 관습과 윤리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일이 임금노동과 동일시되고 가정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일은 대표적인 사적 영역과 비교했을 때상대적으로 공적인 것으로 여겨지기가 쉬워졌다. 하지만 여기에 내가 일의 사유화라고 부르는 과정을 일으키는 기제들이 추가로 작동한다. 첫 번째 기제는 물화物化. 오늘날 "생계를 꾸리려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사회적 관습이라기보다는 자연 질서의 일부처럼 받아들여진다. 그 결과, C. 라이트 밀스가 썼듯이 우리는 의무로서의 일, 시스템으로서의 일, 삶의 방식으로서의 일보다는 특정한 일자리, 혹은 일자리 부족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인용구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것처럼, 노예가 "처음에는 자신의 군주가 권력을 누린다는 사실에 불평하지 않고, 다만 군주의 폭정에 불평"하듯이, 우리는 이런 사장, 저런 사장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뿐 사장에게 그런 권력을 준 시스템에 주목하지 않는다.

_ 케이시 윅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14

  

백수의 왕이라 불리었던 syo의 그 길고도 길었던 제위 기간 동안에 그가 많이 한 생각들은 대충 이랬다. 나는 왜 가난할까? 취직을 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왜 취직을 하지 못했을까? 능력이 없으니까. 나는 어떤 인간일까? 취직을 하지 못한 인간. 취직을 하지 못한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가난하고 능력 없는 한심한 인간. 뭐가 뭔저고 뭐가 나중인지도 모를 이런 생각들을 뺑뺑이 돌리며 자아를 돌려깎는 동안, 왜 이런 생각들은 아예 할 수 없었던 걸까? 나는 왜 가난할까? 물려받은 부동산이 없으니까. 나는 왜 취직을 하지 않았을까? 세상에는 노동 말고도 신나고 재미나는 일들이 너무너무 많으니까. 나는 어떤 인간일까? 취직을 하지 않은 인간. 취직을 하지 않은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뭐 그게 이런 인간 저런 인간으로 정의할 만큼 특별한 일인가 싶네.

 

 


모이시 포스톤Moishe Postone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와 서비스가 분배되는 구체적 메커니즘은 사회 관습이나 정치권력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임금노동의 사회적 역할은 필수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으며땜질할 수는 있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고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아래의 노동이 갖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기능을 명확히 하고동시에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이 노동의 산업적 형태와 자본주의적 관계 속에 갇혀 있다는 점을 문제 삼으려 했던 것이다이렇게 노동을 공적인 것이자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사적인 것으로개인적으로존재의 조건으로 만들려는 압력그 결과 탈정치화하려는 압력에 맞서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케이시 윅스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열심히 일하는가?, 19


포이어바흐는 헤겔과는 상이한 개념 구도를 통해 헤겔의 곤경을 돌파하고자 했다. '인간' '유적 본질' '소외'가 그것이다그의 비판은 기독교의 본질을 분석하며 제시한 '종교가 인간의 유적 본질의 소외'라는 테제에 가장 잘 드러난다인간의 유적 본질이 소외되어 대상화 된 실체가 종교이며 그것이 다시 우리를 지배하는 관계에 놓인다는 사실이 종교를 이해하는 핵심이다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인간은 자신의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본질을 대상화해 낯선 실체로 투사함으로써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낸다그리고 낯선 존재인 신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가 형성된다이로써 이제 종교에 의해 지배받는 인간이라는 구도가 해명된다이렇게 인간은 본래 자신의 본질이었던 것을 외부로 투사해 낯선 것으로 만든 다음 그 낯선 것의 지배를 받는데그것이 바로 소외이다.

  이러한 종교 비판의 핵심은 '인간을 깨우친다'는 것이다이 소외론의 구도는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마르크스의 국가 비판의 틀로 옮겨져 활용된다종교 비판을 통해 '천상에 대한 비판'이 '지상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헤겔의 주장처럼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고그것은 특수한 것으로서의 시민사회를 지양하는 보편국가 속에서 그 보편성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이제 종교의 소외 구도처럼 역으로 국가는 오히려 인간 본질의 실현인 시민사회를 억압하고 그 본질을 낯선 것으로 만들어 투사한 외적 실체가 됨으로써 인간들을 지배하는 소외된 대상이 된다이제 과제는 국가를 해체하고 시민사회 속에서 인간의 유적 본질을 실현하는 일이다.

백승욱생각하는 마르크스』 117-118


천상의 비판을 지상의 비판으로 끌어오고, 노동을 당연한 것, 사적인 것, 존재의 조건으로 만들려는 악독한 놈들의 시도에 맞서서 마르크스는 싸웠다. 그런 그조차 노동 그 자체,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음영에 포획되어 네 가지 방식으로 소외된 노동 너머의 진정한 노동을 어떤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듯한 뉘앙스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노동을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고 자신을 정립하는 필수적 수단으로 보는 헤겔의 후계자로서 당연한 입장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보면, 한 하늘을 이고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 각각 신봉하는 대상인 베버와 마르크스 사이에, 뜻밖에 닿는 부분이 있는 셈일지도?

 

 


3

 

이 책이 하려는 가장 큰 일은 노동윤리의 폭파인 것 같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라는 질문은 겁나 오래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이노무 각박한 세상 ㅈ까라 그래!’하는 자본주의 비판에서 멈춰서는 게 아니라, ‘입에 풀칠하는데 노동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단 말이냐?’하는 식으로 노동윤리 자체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는 작업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아직 더 읽어봐야 하겠지만.

 

기본소득 이야기가 이어지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못하게 하는 말씀이 세상을 오래 풍미했고, 노동의 대가로서의 소득을 기본값으로 놓는 풍조(따라서 불로소득이라는 말에는 어떤 음흉하거나 비겁한 이미지가 슬쩍 묻어 있기도 하다)는 풍조가 아니라 신조에 가깝다.

 

일하지도 않는 것들한테 퍼주면 무너지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세상이 무너진다는 말의 역사다. 반상의 법도가 무너지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고 어쩌고저쩌고 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당대에는 최고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었고,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가장 근접한 인간들이었다. 이런저런 혁명과 진보와 새로운 지식 들이 맞물리면서 새로운 시대가 왔고, 에피스테메가 교체되고 나니 그들이 기반했던 지식과 사상은 더없이 낡은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는 오늘날 도리어 반상의 법도가 일찌감치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의 근간이 흔들렸던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늘 그런 일이 벌어진다. 오늘의 도그마dogma가 내일은 독사doxa로 밝혀지고, 후대의 사람들은 전 시대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고 비윤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생각들을 신봉하고 살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다. 지금 추파춥스를 쪽쪽 빨며 어린이집에서 블록을 쌓고 있는 아이들 역시 나중에 우리 이야기를 들으며 똑같은 표정을 지을 거라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syo가 페미니즘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그에 대한 판단을 계속 유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저 물결은 신분 철폐, 노예제 철폐, 인종차별 철폐 등 각종 철폐의 성공적 역사(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와 너무도 닮은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이건 결국 이렇게 될 일이다 싶어서, 후대의 눈에 이해 못 할 조상님으로 남고 싶지는 않아서.


노동윤리 역시 어쩌면 같은 과정을 밟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이 책을 읽어나간다. 기술과 사회제도에 관한 많은 책들을 버무려 읽어야 나올 답이겠지만, 이 책에는 이 책의 역할이 있을 것 같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syo 역시 노동은 해야 하는 한 마리의 슬픈 짐승일 뿐이라서, 며칠 전 연수원 동기에게 마니또 선물로 이 책을 건넸다.



  "지금 뭐라고 했어?"

  "축의금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해그까짓 오만원 내가 내준다고."

  "내가 지금 돈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그깟 오만원 아끼려고 내가이러는 것 같아?"

  어째서인지 나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아직도 모르나본데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설거지전 부치기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나는."

  구재는 내가 뭔가를 잘못했구나그래서 쟤가 화가 났구나,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 알아듣겠다는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결혼 준비하는 내내 지겹게 봐온 눈빛이었다.

장류진잘 살겠습니다


 

눈물을 닦고, 아무튼 잘 살자, 동기들아.

 

 

 

5

 

명절 잘 보내세요!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5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1-24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일의 기쁨과 슬픔 저 책, 아직 안봤고 사실 딱히 관심도 없었는데.. 보고싶어졌네요.
연휴동안 완독입니까? 아이참.. 나는 어쩌지..(시무룩)

syo 2020-01-24 11:34   좋아요 0 | URL
연휴동안 완독인 것입니다!!
연휴에 딱 한 권을 목표로 삼아본것도 되게 오랜만이네요....

<일의 기쁨과 슬픔> 괜찮습니다! 다락방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데 난??

공쟝쟝 2020-01-24 19:29   좋아요 0 | URL
오마맛 이책 정말 재밌다구요! 작가님이 트랜디하셔서 미러링도 있구 ㅎㅎㅎ

무식쟁이 2020-01-24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업인으로서의 첫명절 이겠군요. 압박없는 편안한 연휴 되시길..

syo 2020-01-24 11:35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미리 공부해야 할 게 많네요.... 그래도 지금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압박 적은 연휴겠지요? ㅠ

수이 2020-01-24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미루고 있다가 연이어 올라오는 페이퍼에 결국 아 이제 그만 미루고 읽어야지 하고 얍!

syo 2020-01-24 11:3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저 진짜 드럽게 미루고 있었는데 ㅋㅋㅋ

공쟝쟝 2020-01-2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페미니스트 후대들은 아이를 낳지않아 세상은 종말합니다. 그러니 뒤처진 조상이 될일은 없겠지요. 지금까지 제가 공부한 대안으로서 가장 좋은 시나리오 입니다. 우주와 지구를 위해 사회주의보다 좋습니다.

syo 2020-01-24 11:37   좋아요 0 | URL
혜안에 그저 탄복합니다, 슨밴님.....🙊

공쟝쟝 2020-01-24 11:42   좋아요 1 | URL
역시 혁명보단 멸망이죠 ㅋㅋㅋㅋㅋ 함께 걸어가 보자요,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단발머리 2020-01-24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햐~ 기다리던 페이퍼 드디어 올라왔군요! 연휴동안 이 책만 읽는다는 거죠?
나 너무 선두라서 여러분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지요. ㅎㅎ

syo 2020-01-26 12:0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연휴가 끝나가는데 1장까지 읽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4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책 열심히 읽으시며 좋은 연휴 잘 쉬시길 기원합니다. 공동체는 다 무너지고 이해관계로 묶인 도시에서 시장에서 정해주는 임금 받는 노동 외의 생존 대안은 제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좀체 떠오르지 않습니다...그외 먹고 살 능력도 딱히 제겐 없고...그냥 안 짤리고 나랏돈이나 열심히 받으며 노역하다 오년 후에 육아휴직이나 한 번 더 하자 하는 안일함... ㅋㅋㅋ

syo 2020-01-26 12:06   좋아요 1 | URL
요즘 반님이 하시는 양질의 독서가 알라딘 마을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소문이 제 서재까지 도달했습니다. 생존 고민은 생존한테 하라고 하고(?) 반님은 지금처럼 읽고 써서 아름다운 알라딘 생태계를 만드는 데 기여해주시면 저는 행복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제가 알라딘에서 월급 받는 인간 같네요. 월급은 나라에서 주는데..... 저는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인간이 되어야 할텐데 말이지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6 14:59   좋아요 0 | URL
보탬은 가계에만 되면 되지 않을까요 ㅋㅋ소문은 앞에 헛자가 붙는 것 같습니다...저도 복직하면 지금보다 훨씬 못할 예정이랍니다. ㅎㅎㅎ

초록별 2020-01-24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마음에 와닿는 님의 글로 위안을 삼아요. 늘 건강하시고 가내 두루 화평하시길 기원합니다.

syo 2020-01-26 12:0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초록별님.
명절 인사가 늦었네요. 건강은 당연히 가져가는 것이고, 원하시는 바도 한없이 성취하실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20-01-24 1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동자의 입장에서 국가를 억압도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반면, 글로벌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초국가적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국가를 부정하는 측면이 있어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생산의 두 주체인 노동과 자본 양쪽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국가의 본질과 권력의 활용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syo님 행복한 연휴 되세요!^^:)

syo 2020-01-26 12:00   좋아요 3 | URL
반대로 생각했을 때, 노동이나 자본 한 쪽으로부터 완전하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반대편으로부터 완전하게 부정당한다는 뜻이겠지요. 무조건적인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노동과 자본으로 거칠게 이분했을 때, 현상은 국가라는 기관을 그 양쪽 가운데 어느 쪽으로 더 가까이 끌어올지에 관련된 권력의 줄다리기 양상이 펼쳐지고 있는 모양새에 가깝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냥 그런 줄다리기 경기장 같은 게 국가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님도 남은 연휴 행복하게 보내세요^-^

블랙겟타 2020-01-25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 syo님의 전철을 곧 밟게 되는건가요? ㅋㅋㅋ

syo 2020-01-26 11:5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syo님의 전철‘ 이런 건 밟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12개의 테마로 읽는 페미니즘 도서목록 - 증보판
말과활 아카데미 엮음 / 일곱번째숲 / 2019년 4월
평점 :
품절


 

 

1

 

슬픈 열대를 읽다에서 양자오는 리스트가 양도할 수 없는 동시에 양도하지 않는 독보적인 역할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의 베트남전 기념비다이 기념비는 어떤 기념비인가상단에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국 군인의 이름이 가득 새겨진 커다란 돌비석이다.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국 군인'은 이 돌비석이 기념하는 대상이자 그들의 공통점에 대한 묘사라 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묘사를 통해 그들이 살아 숨 쉬던 개체였다는 사실은 축소되고그들은 더 이상 진정한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하나의 묘사하나의 거대한 분류 속에서 그들은 저마다의 개별성을 잃어버린다이에 대한 저항감에서 사람들은 개개인의 이름수십만 개의 이름으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리스트를 커다란 돌판에 새긴 것이다.

  이는 리스트의 특수한 의의이자 작용이다그것은 개체와 차이를 보존하는 동시에 두드러지게 한다.

양자오슬픈 열대를 읽다, 178

 

 

2

 

syo는 리스트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에서 역시 그런 어른으로 자라났다. 스케치북 한 장을 북 찢어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 앞에 엎드린 어린 syo는 시에 담으면 좋을 것 같은 예쁜 낱말들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하늘, , 앵두, 모래, 도랑, 아기, 강아지풀, 순돌이(진돗개)…….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일들의 리스트를 만들던 고등학생 syo도 있었다. 뜻밖에 공책 한 바닥도 다 채우지 못했던 그 리스트는 평범하고 무난한 희망사항들로 가득한 색채 없는 청소년 인생의 단면이었다. 밤이 내리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들판이 늘어선 고장에서 경계를 서던 군인 syo, 남몰래 총구를 내리고 사랑하는 작가들의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주욱 늘어놓은 그들의 이름은 별빛을 받으면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처럼 빛났다. 별 하나에 김연수와, 별 하나에 쿤데라. 별 하나에 문태준과, 별 하나에 장 그르니에. 그리고 그 긴 리스트의 끝자락에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석 자.

 

 

 

3

 

취향과 생각을 드러내는데 리스트만큼 직접적인 장르가 있을까. 리스트를 만들면서 거짓말을 하기란 정말로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스트에는 약간의 거짓’을 아직 달성되지 않았을 뿐인 진실로 바꾸어주는 착한 힘이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리스트를 보여 달라는 말에 신이 나서 베르나르 베르베르, 기욤 뮈소, 히가시노 게이고와 같은 이름들을 적어나가다, 문득 좀 있어 보이고 싶은 욕심이 들어 아직 읽어보지도 못한 보르헤스를 슬쩍 덧붙였을 때, 그것은 귀여운 거짓말인 동시에 마음의 짐이 되어 보르헤스를 향해 나를 한 걸음이나마 옮겨놓기도 한다. 아무리 폼 나더라도, 죽는 날까지 평생 읽어보지 않기로 작정한 작가의 이름을 굳이 골라 써넣는 일이 있을까?

 

이미 지나온 것들과 앞으로 지나가야 한다고 믿는 것들의 경계선이 부드럽게 녹아 있는 한 잔의 커피. 세상의 모든 리스트는 영수증이면서 계산서인 셈이다.

 

 

 

4

 

그리고 어떤 리스트를 만났을 때 내가 그것을 사랑할 수 있다면, 높은 확률로 그 리스트의 주인 역시 사랑할 수 있다고 syo는 믿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리스트가 지니는 가장 매력적인 기능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일단 명함을 교환한 다음(누구누구입니다, 무슨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다), 즉시 무수한 리스트를 교환하기 시작한다(쉬는 날엔 뭐하세요, 영화 좋아하세요, 무슨 커피 드실래요, 패션 센스가 있으시네요.) 그렇게 서로의 리스트를 맞대어보다 덜컥 교집합이 발견되는 순간 대화의 봇물이 터지고 호감의 홍수가 밀려든다


리스트의 교환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미묘한 부분까지 조금 더 상세하게 작성된 리스트를 서로에게 조심스레 내민다(그러면 호퍼 그림도 좋아하시겠네요, 그 가사 전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솔직히 그 부분만큼은 혐오 정서가 은근히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대단하지만 어쩐지 하루키의 불꽃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떻게 그 대목에서 유채영의 <emotion>을 집어넣을 생각을 했을까요! 완전 대단하지 않아요?) 이즈음에서 우리는 서로의 교집합이 아니라 차집합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신기한 만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건 결국 모든 게 신기하다는 뜻이다. 즉시 이 순간이 신비해진다. 이 사람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만나 무엇을 함께할지는 확실한 게 없지만, 최소한 서로의 리스트를 열어젖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충만하다.

 

 

 

5

 

직접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즐거운 만큼, 타인이 만들어 놓은 리스트를 정성스레 옮겨 적는 일 역시 사랑할만하다. 두 시간에 걸쳐 찬찬히 옮겨 적어보니, 이 리스트는 12개의 테마와 부록까지 포함해 247권의 도서목록402권의 함께 읽어보면 좋은 책들 목록을 제공하고 있었다. 10권 남짓의 중복이 있었다. 옮기기만 해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리스트를 열어준 이를 위해 가장 알맞은 보답은 이쪽의 리스트를 열어주는 것이다. 내가 연 리스트는 아직 공백으로만 가득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우리의 행복한 시간을 위해 모든 리스트는 끝없이 채워져야 한다


연필로 그대로 옮겨 적은 리스트 속 이름들을 지울 수 없는 볼펜으로 하나하나 덧칠하는 일이 기다린다. 그렇게 내가 리스트를 제대로 만드는 동안 아마 새로운 책들은 또 나오고, 어쩌면 새로운 리스트가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새로이 스케치북을 찢어 방바닥에 놓고 엎드려 새로운 책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겠다. 아름다움이 될 낱말들을 고르느라 행복한 고민에 빠진 아이처럼.

 

아마도 이런 지난한 순환이 끝도 없이 이어지지 않을까. 리스트는 늘 열려있으므로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일은 독서의 본성이다. 끝내 물은 고이지 않겠지만, 항아리 주변에 깔린 잔뿌리들이 몰래 그 물을 받아 마실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작은 꽃대가 올라오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잠깐 꽃이 피었다 가기도 하고, 그러지 않을까. 늘 그럴 수는 없더라도, 신비롭고 충만한 순간을 가끔씩은 만나게 되지 않을까.

 

 


000. 12개의 테마로 읽는 페미니즘 도서목록 / 말과활 아카데미 / 일곱번째숲 / 2019



댓글(9)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그만 메모수첩 2019-08-2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픈열대의 저 인용부분은 얼마 전 읽은 손탁의 타인의 고통에서, 전쟁사진을 두고 이야기한 것과 비슷해서, 마치 외지에서 아는 사람 만난 양 반갑(?)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syo 2019-08-24 09:51   좋아요 1 | URL
바로 이 맛에 알라딘 하는 건가 봐요 ㅎㅎㅎ 반갑습니다 메모수첩님^-^

북다이제스터 2019-08-23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섬의 장 그르니에...전 중학교 때 엄청 좋아했는데요. 그때 이후 첨 들어보는 이름이라 넘 반갑습니다.^^ 추억도 덕분에 새록새록...^^

syo 2019-08-24 09:52   좋아요 1 | URL
장 그르니에 이야기 나올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청하판 장 그르니에 전집의 부활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2019-08-26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6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6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7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9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