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朔
1
깊은 산 눈 내리는 절간 뒷마당의 옹기처럼, 사람 떠난 옛 어촌 마을 물 마른 시냇가의 갈대처럼, 달리 누굴 만나지도 않고, 세상 방향으로 손짓도 눈짓도 하지 않고, 호젓하고 아늑하게 나의 시간은 가고 있다.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는 게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젊은이의 일. 몸과 마음 중 어느 하나라도 젊은 사람의 일. 눈이 내리는 날도 비가 내리는 날도 달력 위의 똑같은 하루이듯이, 축적하지 않는(못 하는) 삶도 모자람 없는 삶이고, 흩는(흩어지는) 사람도 부족함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언제 받아들였던 걸까. 부르면 대답하고, 찾으면 달려 나가고, 안아 달라면 최선을 다해 안아주는 것, 그 이외의 모든 시간은 조용히 조용히 혼자서 그윽하게, 쌓지 않고 흩으며, 점착되지 않고 흩날리며, 중생대의 숲에 감춰진 호수 위로 잔잔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지도에 없는 어느 섬의 가장자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처럼,
2
몽테뉴는 『에세』 제 2장 “슬픔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처럼 생생하고 불에 굽듯 최고조의 열광 상태에서는 탄식을 늘어놓고 생각을 펼쳐 놓을 수 없다. 그럴 때는 영혼이 깊은 상념에 짓눌리고, 육신은 사랑으로 녹초가 되어 기운이 쑥 빠져 버린다. 바로 그 때문에 때로 쾌락의 제단 바로 앞 단계에서, 그토록 시의적절치 않게 연인들을 덮치는 뜻밖의 침체가 야기되고, 극도로 뜨거운 정열의 힘이 오히려 그들을 얼어붙게 하는 것이다. 음미하고 소화할 수 있는 정열은 모두 시시한 것들뿐.
_ 몽테뉴, 『에세』
그리고 나서 자신은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둔한 사람이라 그런 정념에 빠져드는 일이 거의 없고, 심지어 날마다 이성적 성찰을 덮어씌워 아예 그런 정념을 원천봉쇄하고 있다는 자랑 섞인 문장으로 이 장을 마무리한다.
정열에 사로잡힐 일이 없는 사람이, 뭐 저리 당당하게도 “음미하고 소화할 수 있는 정열은 모두 시시한 것들뿐”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는 걸까?
내 두개골 속에 든 것이 액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그저 흐느적흐느적 널부러져만 있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말들이 귓속으로 들어와 뇌까지 달려가는 데 최소 3초의 시간이 필요하고, 예/아니오의 간단한 대답 말고는, 혹은 좋다/너무 좋다/너어어어어무 좋다는 감정 말고는 아무 것도 말하고 표현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 우리에게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면, 그 순간 자체로 충분치 못함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정열과 정념은 몽테뉴의 말처럼, “언제나 해로우며 언제나 분별없는” 것이 맞겠다. 하지만 정말 운 좋게도 그저 이 순간 자체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는 그런 순간에 우리가 같이 있다면, 어떤 분별도 통제도 이성적 판단도 논리적 해석력도 필요 없는 바로 그런 순간 속에 나를 담글 수 있었다면, 나를 탄식하게 하고 내 생각의 전개를 막는다고 하여 그 정열을 탓하고 내쫓을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러니까 실상 중요한 것은 정열도 이성적 성찰도 아니다. 순간이다.
--- 읽은 ---
004.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
폴 발레리 외 지음 / 윤유나 엮음 / 김진경 외 옮김 / 읻다 / 2018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말들이 가지는 치열함은 흉내 내기 어렵다. 그 말들은 저마다 달거나 쓰거나 맵거나 시거나 하여튼 제각각이더라도 독자를 향해 치명적인 질량으로 달려든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말들을 생각하면, 문장이나 의미 같은 것보다 그 글을 읽던 순간 나를 치고 지나갔던 어떤 감정이라든가 그 순간 떠올렸던 더 먼 과거의 기억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먼저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설령 그 글 자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흐릿해졌더라도, 그런 읽기와 회상의 순간들은 나도 모르게 나를 구성한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글조차 가능하면 치열하게 읽으려고 하는 것이다.
005. 별일 없어도 읽습니다
노충덕 지음 / 모아북스 / 2024
드라마를 꺼리는 이유로 여친은 과잉을 든다. 감정의 과잉, 전달욕구의 과잉,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장면의 과잉. syo는 그 모든 것들에 동의하면서도 드라마를 좋아한다. 三은 또 다른데, 인간의 감정이나 그 표현에 대해 그닥 관심이 없고 또 그걸 잘 식별할 줄도 모르는 이 소시오패스에게, 드라마는 그저 하나의 스토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는 유튜브에서 스토리의 핵심 부분만 추려놓은 요약본 영상을 찾아본다. 그런 三을 보고 있자면, 아, 저놈은 정말이지 노력형 소시오패스구나,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 결과 저렇게 되었구나 싶다.
어떤 예술 장르가, 그 장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과잉 따위 일절 없이 적확한 분량으로 해내면 참 좋긴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없다. 왜냐면 이게 과잉인지 필수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예술의 소비자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syo가 과하지 않다고 느낀 어떤 장면을 봉준호가 과하다고 지적하면, syo는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래야 하는 법은 없지만 아마도 바꿀 것 같긴 해. syo가 과하다고 느낀 어떤 장면을 전 세계인에게 보여주고 어떤지 물었더니 80억 지구 인구 중에 75억이 과하지 않다고 대답했다면 syo는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러지 말아야 하는 법은 없지만 아마도 바꾸지 않고 그냥 입꾹닫 할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첫 느낌, 내가 어느 순간 이것이 과잉이거나 과잉이 아니라고 느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길게 하고 있는 이유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지나치게 축약적이다. 마치 주어진 시간이 4분밖에 없는데 10권의 책을 소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유튜버처럼, 책 내용 소개도, 교훈도, 저자의 견해도 모두 축약의 연쇄여서, 뭐랄까 100자평 모음집 같은 걸 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나의 책을 와닿게끔 전달하는 데 필요한 여백이 있다고 믿는다. 그 여백이 누군가에겐 과잉이고 쳐내도 무관한 포장에 불과하다고 채점될 수 있겠지만, 최소한 syo에게 이 책은 다른 책으로 가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책은 아니었다. 물론 봉준호 감독님과 75억 동포들의 견해가 저와 다르다면 딱히 드릴 말씀은 없지만서도요.
--- 읽는 ---
기억의 몫 / 장성욱
에세 / 몽테뉴
어떤 생각들은 나의 세계가 된다 / 이충녕
어제는 고흐가 당신 애기를 하더라 / 이주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