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분명히 하자, 꼭 네가 좋아서 창문을 닫은 건 아냐

 

 

1

 

늦은 밤, 잠 못 이룬 엄마가 시래기를 듬북 넣고 된장을 끓였다. 묵직한 된장 냄새가 거실을 휘감아 돌다가 살짝 열린 방문 틈새로 들어와, 내 침대에 함께 누웠다. 너희 집 된장은 냄새가 참 진하다는 말을, 동생의 남자친구가 했더란다. 도시 외곽에 있는 호수공원에 다녀온 날, 내가 차에 올라타자 여자친구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 된장 먹었어. 동생의 남자친구도 내 여자친구도, 그래서 어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동생과 나도 또한 그랬다. 그러나 이 밤만큼은 어쩐지 언짢아서,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방문을 닫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가을이 있어야 할 자리를 슬쩍 훔친 겨울이 열린 창을 타넘고 들어왔다. 전기장판을 켜고 두꺼운 이불 속으로 도망쳐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이 들면 된장 냄새 없는 아침이 오겠지. 걸어 놓은 옷에 밸 새도 없이 찬바람에 휘말려 사라지겠지. 웅크릴수록 따뜻해졌다. 따뜻해지니 생각이 났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 된장국은 맛이 참 좋았다. 엄마는 때에 따라 감자와 두부를 넣기도 했고, 이번처럼 시래기를 넣어 끓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맑은 애가, 또 다른 날은 강된장에 가까운 진하고 걸쭉한 녀석이 상에 올라오기도 했다. 나는 애답지 않게 된장 맛을 안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도리어 된장 맛을 모르는 애가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 냄새도. 어린 나는 된장 냄새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내일의 시래기 된장국도 틀림없이 맛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시계바늘은 두 시에서 세 시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거실은 이미 잠잠하고, 낮게 TV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슬쩍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이렇게 창문 열어 놓고 전기장판 켜고 자는 건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시키는 나쁜 짓이니까, 그래서 마지못해 닫고 자는 거라고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우리는 얼마간 모자란 존재들이다피하고 싶지만 별수 없이 부족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그럴 때마다 지금의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가 삶의 전망을 크게 바꾸는 듯하다. '그래무엇이 어찌 되었든 이게 나지하면서 자신을 베이스 삼아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가면 된다여행하는 기분으로그것이 '내게 없는 근사함'을 좇는 것보다 훨씬 홀가분하고 담대한 기운을 선물해준다.

이아림요가 매트만큼의 세계


어렸을 적에는 구름이 아주 높이 떠 있는 줄 알았다그런데 비행기를 처음 타보고 나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이륙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구름층을 통과했다뭔가 예상했던 것과 달라 아래를 보니구름이라는 것들이 조금 높은 산봉우리 부근에 떠 있는 것이었다구름은 가도 가도 끝없는 저 위에 있지 않았다하늘에서 보면 구름은 오히려 지상에 붙어 있었다그걸 깨닫자 이상하게 슬펐다.

박형서당신의 노후


우리에게는 무수한 삶의 순간들이 있다즐거운 순간슬픈 순간부끄러운 순간그 모든 순간들이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순간들이지만우리는 아쉽게도 그 모든 순간들을 다 기억하면서 살아가지 못한다그것은 단순히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통합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요컨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순간감당할 수 없는 순간삶의 불운이 예감되는 순간마다 우리는 마치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처럼 그러한 순간들 속에서 눈을 감는다인간이 ''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 있는 것이다. ''는 나를 위협하는 생각들상상들이미지들바람들을 희생한 결과물이다

맹정현프로이트 패러다임


 

 

2



'함께 읽기'야말로 1980년대식 책 읽기가 지닌 정치성의 핵심이며,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대통령과 교육부 장관그리고 학교 선생들과 부모들이 읽지 말라고 금지한 것을 꼭 읽는 것기실 그 어른들은 겁이 나서 읽어보지도 못한 것간혹 읽다가 잡혀가는 것숨기고 불태워야 하는 것그런 것을 길거리에서 어깨 겯듯함께 읽은 것 말이다.

천정환정종현대한민국 독서사』 196 


이 밤도 어딘가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책을 읽음으로써 마음의 어깨를 겯고 함께 나가는 분들이 있다. 얼굴도 모르는 그분들 각자의 책 읽는 밤을 한 번 상상해본다. 이 책을 함께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눈이 되어 밤을 밝히고, 다리가 되어 멀고 높은 곳으로 그분들을 데려가주기를.

 

 

 

3


  

파묵은 언제나 작품을 통해 명확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그 질문을 대단히 방대한 범위와 다양한 방향으로 풀어헤치기 때문에, 독특한 해석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질문들까지 태어나 중심 질문 근처에 포진한다. 그런 이유로 파묵의 작품 속에서 독자는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어어, 하는 사이에 길을 잃기 십상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갑자기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읽고 있지? 아까는 이게 아니었는데, 싶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아니었던 게 아니라 계속 이거다.

 

 


4


테리 핀카드의 헤겔과 찰스 테일러의 헤겔


요것들은 둘다 1000페이지 넘는 놈들인데, 앞의 녀석을 빌려왔다. 하루에 100페이지씩만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그게 아마 안 될 것이다. 헤겔이잖아. 둘 중 한 권은 갖춰놔야겠다 싶어서 찾아봤더니 두 권 다 되게 괜찮다는 평만 가득하여 딱히 고르지를 못하고 직접 확인해야지 별 수 없다는 마음으로 한 권을 빌려왔다. 그나저나 무려 헤겔에 대해 읽는 건데, 마르크스 읽으려고 읽어 두는거라는 이따위 마음가짐으로 읽어낼수 있을까? 빅 배에 비거 배꼽 아닐지? 아차, 헤겔이면 더 비기스트..... 함량도 무거운 책이, 질량도 무겁다.


그나저나, 저게 제일 잘 나온 사진인가보다? 앞의 표지는 자비가 없군. 탈모 부분만 가려도 한결 젊어 뵈는데. 근데, 탈모 하니까 오늘 읽은 탈모에 관한 글(?)이 생각난다. 그 페이퍼 보고 울 뻔했다. 남일 같지도 않고. 시루스 박사님 힘내세요......


 

 

-- 읽은 --



곽재구, 최수연,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오르한 파묵, 빨강머리 여인

콜린 베번, 당신의 행복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냐고 물으신다면

 



-- 읽는 --



테리 핀카드, 헤겔

천정환, 정종현, 대한민국 독서사

규리네, 게임의 심리학

남경태, 종횡무진 서양사 2

조한혜정, 선망국의 시간

알렉스 켈리니코스, 크리스 하먼,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와 그 고전적 전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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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8-11-06 0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글은 참 전기장판 같이 따뜻하네요~ 안뇽히 주무셔요!

syo 2018-11-06 08:12   좋아요 0 | URL
저는 안녕히 잤답니다. 공장쟝님의 하루도 안녕하시길ㅎ

AgalmA 2018-11-06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기권 밖에서 보면 우리는 개미도 먼지도 아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보일텐데 눈에 보이는 이 세계에서는 내가 잘 났지 네가 못 났다 아웅다웅이니 구름이 우리 곁에 더 가까이서 측은히 보는지도는 개뿔. 구름은 구름의 갈 길을 가는 것이고 인간인 우리는 세상 오만 것에 저를 투사해 가타부타~~~~

syo 2018-11-06 08:1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탁견이시다

단발머리 2018-11-0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의 구수한 냄새와 헤겔의 조합은 언제나 반갑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빨강 머리 여인, 집에 있는데...
전 오르한 파묵은 읽을 때마다 자꾸 정좌하게 되요. 뭔가 놓치게 될까 봐. 사실 거의 다 놓치면서 읽지만요.

기다려지는 리뷰 - 종횡무진 세계사 2 - 남경태 선생님 존경합니다
좋은 문단 - 이 밤도 어딘가 각자의 자리에서 - 걸은 어깨에 힘 들어감. 파샤!!!

syo 2018-11-06 10:41   좋아요 0 | URL
된장과 헤겔이라니 ㅋㅋㅋㅋㅋㅋ 재밌는데??

열심히 읽으시기를 응원합니다!! 유비관우장비 화이팅

cyrus 2018-11-06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인데 책을 본격적으로 많이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2010년에 군 제대하고 나서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까 아마도 그 때부터 탈모가 진행했을 거예요. 헤겔의 사진을 보니 문득 마르크스가 부럽네요. 마르크스는 털이 잘 자라나는 체질이잖아요.. ㅎㅎㅎㅎ

stella.K 2018-11-06 15:07   좋아요 0 | URL
헉, 정말...?
그럼 독서를 좀 줄여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독서 보단 머리카락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아직 젊잖아. 난 왤케 걱정이 되지?ㅠ

syo 2018-11-06 15:38   좋아요 0 | URL
그렇지만 아무래도 인생은 헤겔처럼입니다. 마르크스는 털도 많고 탈도 많은 인생이지요...

stella.K 2018-11-06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syo님의 미래가 궁금해요.
오늘은 맛 칼럼니스트 이런 거 하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예전에 저의 엄니도 된장을 잘 담그셨죠.
뭐 지금도 나쁜 건 아닙니다만 예전에 비하면 아니라고 하시죠.
그게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옛날집들은 장독대를 따로 뒀나 봅니다.

대한민국 독서사 재밌을 것 같은데 아직도 못 읽고 있습니다.
헤겔도 만만치 않군요. 저는 말러 평전을 읽어 볼까 하다 포기했습니다.ㅠ

syo 2018-11-06 15:40   좋아요 0 | URL
벌써 ‘미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나이입니다. 그리고 미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나라에서......

말러 평전도 외관을 보고 입을 떡 벌렸던 기억이 나는군요. 2000쪽쯤 되겠던데.... 그 정도면 헤겔은 양반이네요.
 


기다리는 남자는 소리를 본다

   

1

 

문을 밀고 휘파람 소리가 걸어 들어왔다. 기다리지 않는 척 무심한 척 설레지 않는 마음인 척 설레는 마음으로 유심히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테이블에 올려놓은 커피는 차근차근 식었다. 커피가 차가워지는 만큼 지구는 따뜻해지겠지. 그리고 너를 기다린 만큼 나는 행복해지겠지. 구둣발 소리가 걸어 들어오고,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걸어 나가고, 지구는 자꾸만 열렸다 닫히고, 미지근한 커피와 미지근해지지 않는 마음으로 얌전히 앉아 당신의 발소리, 지구가 눈꺼풀을 수억 번 깜빡인대도 오직 나만큼은 잊지 않고 들어 낼 수 있는 그 소리를 기다리는 가운데


이윽고 저기 해 지는 쪽으로부터 온 몸에 노을을 휘감고 당신이,

 



이럴 때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유일한 시간이 있습니다노을 무렵이지요붉고 따스한 노을들이 인간의 등 뒤에서 인간의 등과 마음을 토닥거려주는 것입니다잘한 것보다 잘 못한 것이 훨씬 많은 인간의 시간 속에 노을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쓸쓸해지겠는지요.

곽재구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213쪽



 

2



만약 우리가 현재 상황을 바꾸게 된다면여러분이 다른 사람들과 나눈 대화 덕분일 것이다여론의 형성 과정은 복잡하고 역동적이다그러나 중요한 사실은대화 상대가 무언가를 믿으면 자신도 그 무언가를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그러니 용기를 내자나도 그랬다결론은비록 사회적 통념이 현실과 동떨어진 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좋은 주장이 한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여론은 놀라운 속도로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좋은 주장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한 걸음한 걸음씩 여론으로 번져나갈 수 있다.

로버트 H. 프랭크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241-242 


자신이 가진 말과 다른 말에 부딪혀 자신의 말을 포기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사람의 말은 사람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의 힘을 믿는다. 말의 세계에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말의 말이 있다. 그것을 구조라 불러도 좋고 대타자담론이라 불러도 나쁘지 않으며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어떻게 부르든 말의 세계에는 인간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거절할 수도 없고, 거절을 시도할 생각조차 하기 힘든 말들이 있다. 그 시작은 역시 사람의 입에서였겠으나 결국 사람보다 더 커진 말들이다. 말의 전장에서 우리의 싸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말의 말을 겨냥해 이루어져야 한다. 어쨌거나 말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므로. 눈앞의 인간은 절대로 말로 설득할 수 없다. 토론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뒷날의 거래에서 내주고 받게 될 거래물목들을 결정하는 장소지, 결코 마주 선 사람을 내 옆자리로 당겨오는 곳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평행선만 긋고 또 긋는 우리의 대화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낳는다. 그어 놓은 평행선은 사람의 말을 서로 만나게 하진 못하지만, 말의 말이 그 위로 달리는 한 줄 철길이 된다. 나의 말은 반드시 기록된다. 모든 말들이 담겨 있는 거대한 말의 바다에, 내가 뱉은 말은 기필코 뛰어든다. 그 바다의 성분을 바꾸고 색깔을 고친다. 정말 미세하겠지만. 언어는 개개인의 모든 발화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말로 사람을 건드릴 순 없다. 그러나 말은 말을 건드린다. 대화는 마주선 사람이 아니라, 말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정교하게, 더 깨끗하게, 더 치열하게 말해야 한다.

 


 

3

 


나는 그 아가씨에게는 죄를 짓는 기분으로그녀가 이런 말까지 들을 필요는 없을 텐데 싶은 수식어를 써가며 인물 묘사에 들어갔다인형이 알아듣도록 말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각종 형용사를 열거하던 와중에나는 그런 부류의 여자들콕 집어 말하자면 소위 화류계를 전전하는 여자들을다른 분야에선 찾아볼 수 없는 갖가지 뉘앙스까지 담아 지칭하는 알바니아어 어휘가 얼마나 풍부한지를 새삼 발견했다라틴어켈트어비잔틴어심지어 오스만어 말법까지 그런 여자들을 통해서 우리 말에 스며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그런데 그때 우리가 처한 상황에는 왜 오스만어가 가장 적합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스마일 카다레인형』 114-115

 

나는 살다 살다 이렇게까지 태연자약하게 전방위 돌려까기를 시전하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 '아가씨' 까고, 인형(엄마)까고, '화류계를 전전하는 여자들' 다 까고, 알바니아어 까고, 그 원흉이라며 라틴어, 켈트어, 비잔틴어, 오스만어를 까면서 그 언어 사용자들의 문화를 다 까고, 그런 타국의 말법이 들어오게 만들었다는 혐의로 또 여자들을 한번 더 까고, 마지막으로 이미 바닥까지 떨어져 기고 있는 오스만 사람들의 숨통을 끊었다. 세상에.....

 

분명 수준이 높고 문장을 재미있게 짓는 작가긴 한데, 어쩐지 친구로 가까이 지내고 싶지는 않다.

 



4


야구는 SK가 이겼다. 신난다. 신나는데 눈물이 난다. LG야 LG야, 대체 너는 무엇이건대, 왜 나는 너를 만나서......


 

 

-- 읽은 --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1

아네트 C. 바이어, 데이비드 흄

로버트 H. 프랭크,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이스마일 카다레, 인형

 



-- 읽는 --



데이비드 이글먼, 더 브레인

곽재구, 최수연,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오르한 파묵, 빨강머리 여인

임채호, 물리학의 기본을 이야기하다

양영오 외, 수리적 사고와 논리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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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언어 2018-11-0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책 꽂이에 두고 오랫동안 바라만 보던 곽재구의 책을 꺼내 읽고싶네요.

syo 2018-11-04 21:21   좋아요 0 | URL
마음이 흔들렸을 때 얼른 책을 손에 들면 좋은 만남이 될 가능성이 크지요 ㅎㅎㅎㅎ 봄날의 언어님의 즐거운 독서를 응원합니다.

2018-11-04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4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8-11-04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참 좋네요. syo님의 1번 글에서 시를 봅니다. 페이퍼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번 읽고, 다시 1번으로 돌아가서 그림같은 장면 앞에서 몇 번을 서성였습니다. 마음을 당기는 임팩트한 힘이랄까요? 말의 힘에 대해 쓰신 문장에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말의 힘을 생각하면서 글의 힘을 생각했습니다. syo님의 1번 글이 글의 힘을 믿는 데 무게감을 실어주네요.^^

syo 2018-11-04 21:51   좋아요 1 | URL
항상 그렇지만 나비종님께서는 실제로 제가 쓴 것보다 깊게 읽으시고 높게 평하십니다. 저는 말의 힘에 대해서 말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힘있는 말을 쓰지 못하는 편이에요. ‘더 정교하게, 더 깨끗하게‘는 제 글에는 없는 덕목들이지요. 걔네는 나비종님이 쓰시는 시 속에 있거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다락방 2018-11-05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부분은 마치 영화 만추에서 탕웨이를 묘사한 것 같아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syo 2018-11-05 09:10   좋아요 0 | URL
윽.... 만추 안 봤어요ㅎㅎㅎㅎ 모른다....

다락방 2018-11-05 09:28   좋아요 0 | URL
딱 쇼님이 묘사한 장면이에요. 진짜 딱 그래.

2018-11-05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8-11-05 12:20   좋아요 0 | URL
앗, 맛을 보셨군요ㅎㅎㅎㅎㅎ
혼자 읽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는 걸 알아서 우리가 이렇게 여기서 만났지요. ^-^
방대한 지는 잘 모르겠지만, 끝이 없는 독서를 생각하고 있지요. 자목련님께서도 그렇겠지만요 ㅎㅎ
 

 

보고 듣고 먹는 가을

 

 

1

 

빨갛고 노란 잎사귀에 잠깐 들러서 조랑조랑 떠들다 제 무게 못 이겨 뚝 떨어지는 가을 햇살을 올려다보는 일은, 빛을 마주하는 사건인데도 눈이 편하고 시원하다.

 

늘어선 가로수 아래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각별한 때가 가을이다. 사방에서 빛살이 노랗게 떠들고, 이파리들 끄덕끄덕 대답하고 성질 급한 녀석들은 빛의 손을 잡고 따라 나서기도 한다. 사람이 걷는 속도로 하늘하늘 허공을 밟아 내려오는 이파리 위에 올라탄 빛 손님의 얌전한 얼굴을 보며, 일 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돌아야 성에 찬다는 저 무진장 바쁜 녀석을 쉬어가게 만드는 가을의 중력이 혹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어디를 둘러봐도 예쁘게 노란 가을이 빛낯을 하고 굴러다닌다. 그리고 그것을 세게 끌어당기는 것이 아무래도 사람의 마음 같다. 가을 길을 가는 사람은 마음의 질량이 대단하다.

 

아침에 엄마가 호박전을 부쳐냈다. 호박을 즐기지 않는 입맛에도 잘 감겨드는 맛이었다. 호박으로 만든 먹을거리라면 가리지 않는 엄마의 손이었으니. 나는 일어나 창문을 열고, 사선으로 떨어지는 아침볕을 바라보다가 접시위의 호박전을 바라보다가 했다. 참 많이 닮았다.

 

가을 아침에 내린 빛살 한 접시 그득히 먹고, 나는 도서관에 들러 어느 알바니아 작가가 파리에서 썼다는 자전 소설을 빌렸다.

 

 

 

2



우리에게는 영향을 선택할 권리’, 좋은 영향을 받을 권리가 있다그 선택의 폭은 늘 우리가 원하는 만큼 넓지 않고그 선택권은 전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타협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만적어도 우리는 태어난 곳에 고정되어 살아가는 식물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이기에우리가 받는 영향들을 선택하는 데 참여할 수 있고이미 참여하고 있다.

김한민페소아, 19 

 

사서 꽂아놓는 작가들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읽는 이들의 행복이다. 펼치면 바로 점령될 수 있게 기꺼이 마음의 빗장을 풀고 맞이할 책들이 자꾸 발견되고, 그 책들로 인해 나라는 인간의 바닥이 발각되고, 불모지가 개척되는 일. 그런 기적 같은 일을 만드는 것이 나인지 아니면 모든 일은 책이 하는데 나는 그저 책의 그물에 걸려든 한 마리 벌레일 뿐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좋은 글을 읽고, 좋은 글이 될 때까지 뚝심과 욕심을 가지고 쓰는 일 속에서 나는 내 안에다 나도 만들고 행복도 만든다. 페소아도, 페소아를 읽고 페소아를 쓰는 김한민도, 새로운 syo를 만든다. 페소아를 읽는 syo와 페소아를 읽고 페소아를 쓰는 김한민을 읽는 syo를 만들 것이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든든할 때가 있다. 아, 그렇다면 페소아가 수많은 페소아를 만들어낸 수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쯤은 나도 안다고 해도 혹시 괜찮을까?

 

 

 

내가 먹는 것이 나인 것처럼 내가 읽는 것이 바로 나다우리는 에누리 없이 각자가 읽는 만큼의 ''가 된다나는 독서의 가치가 길게 말할 것 없이 딱 그만큼이라고 생각한다적어도 우리가 책을 읽는 인간독서하는 인간으로서 '호모 부커스'로 정의될 수 있다면 말이다.

이현우책에 빠져 죽지 않기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상처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간혹 내 글이 다소 어둡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그들은 내가 읽는 책은 상처에만 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삶에서 기쁨이나 행복은 없냐고 묻는다왜 없겠는가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냐는 것이겠지행과 불행은 사실이라기보다 자기 해석에 따라 좌우된다그리고 독서는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정희진정희진처럼 읽기


인생의 어떤 시기를 기억할 때 나는 책을 떠올린다힘들어질 줄도 모르고 즐거이 읽은 책힘들었던 나를 붙잡았던 책힘듦을 잊게 했던 책힘듦을 극복하게 해준 책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허무로 다시 힘들어지는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보여준 책.

김겨울독서의 기쁨


 

 

3



  “아마 내가 잘못 생각했었나 봐...... 그냥 그의 주소나 가르쳐 줘아냐어디에 있는지 알아야겠다는 게 아니라말만 좀 전해 줘내가 꼭 만나야겠다고 하더란 말만 전해 주었으면 해......”

  노에미는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전해 달라니요내가 형부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단 말이에요?”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이런 터무니없는 소리 이제 그만두지 않을래요제롬은 가끔 우리 집에 와요그게 어때서요숨길 게 뭐 있어요사촌끼리참 우습네요!” 그녀는 본능적으로 상처받을 말을 내뱉고 말았다. “언니가 여길 와서 이런 소란을 피우더라는 말을 하면 형부가 참 좋아하시겠네요!”

  퐁타냉 부인은 뒤로 물러섰다.

  “너 꼭 거리의 여자처럼 말하는구나!”

  “그럼 한마디 더 할까요?” 노에미가 대꾸했다. “여자가 남편한테서 버림받는 건 아내 잘못이에요만일 제롬이 찾고 있는 걸 언니가 만족시킬 수 있다면야 이렇게 다른 곳을 찾아다니게 되지도 않을 거 아니에요?”

  ‘정말 그럴까?’ 하고 퐁타냉 부인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기진맥진해졌다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그러나 제롬의 주소도 모르고 그를 돌아오게 할 아무런 방법도 없이 다시 외롭게 자기 자신과 대하게 될 것이 두려워졌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회색 노트, 48-49

 

딱 봐도 개새끼는 제롬새낀데도, 그녀들이 주고받는 말을 보면 놀랍고 쓰리다. 세상 어딘가에 여성 혐오 이데올로기의 교범이 있다고 한다면, 그 문건에 "오랜 역사를 통해 효율성이 검증된 최고의 정신적 구속 기구"라고 기록되어 있을 두 가지 전략적 혐오 발언을 그녀들이 몸소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에 흠집을 내고 있다


,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갈라 쳐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 싸움 속에서 성녀는 제 스스로 더욱 성녀가 되도록 하고 창녀는 창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그 싸움을 영속시키라.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며 즐기라


둘째, 남자가 성녀를 찾는 것은 창녀가 성녀가 아니기 때문이고 창녀를 찾는 것은 성녀가 창녀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도록 하라. 모두 여자 탓이라는 걸 끝없이 강조하라. 스스로 남자를 온전히 가질 수 없는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역시, 그 사이를 오가며 즐기라.

 

제롬새끼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노에미는 소파에 쓰러져 눈물을 흘리며 제롬이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어린 여자와 눈이 맞아서 벌써 달아났다고 진술한다. 남편이 그런 새낀 걸 진작에 알고 있었던 퐁타냉 부인조차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는데, 애초에 제롬이 노에미와 있다는 제보의 출처가 퐁타냉 부인의 집에서 일하다 남편과 눈이 맞았다는 이유로 쫓겨난 어느 여자(역시 어린)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퐁타냉 부인이 자신의 남편이 아직 여자 A와 함께 지내고 있으리라 예상한 동안, 제롬새끼는 확인된 경로만 따져도 여자A->노에미->여자B로 아주 착실히 옮겨갔던 것이다.

 

, 내가 저 제롬새끼 말년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라도 티보가의 사람들을 다 읽고야 말겠다. 5권에 별권까지 총 2500페이지만 읽으면 되겠구나..... 이야 신난다...... 와아......

 


 

 

-- 읽은 --



김한민, 페소아

존 조던, 로봇 수업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회색 노트

정은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 읽는 --



이스마일 카다레, 인형

데이비드 이글먼, 더 브레인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아네트 C. 바이어, 데이비드 흄

콜린 베번, 당신의 행복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냐고 물으신다면

조홍식, 문명의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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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1-0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브레인』『정희진처럼 읽기』밖에 제가 읽은 게 없다니...
그것도 더 브레인은 뒤에 얼마 남겨 두고 다 읽은 것 같아 체크해 봐야겠다는...

『정희진처럼 읽기』는 완독했죠. 읽으면서 기죽었죠. 저를 기죽게 하는 책을 좋아하지만 썩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죠. ㅋ

syo 2018-11-03 15:19   좋아요 1 | URL
제 경우 『정희진처럼 읽기』는 이렇게 기가 죽다간 내가 죽겠다 싶어서 아예 부러움에서 숭배로 노선을 바꿨습니다. 이 사람과는 맞서지 않는다- 이러고 나니까 세상 행복해졌습니다....

stella.K 2018-11-03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호박전! 작년까지만 해도 곧 잘 먹었는데
올해는 별로 안 먹게되더군요.
그래도 막걸리와 함께 안주 삼아 먹으면 디게 좋은데...ㅋ

참, 오늘은 토요일인데 페이퍼를 썼네요.
보통 토요일 날 잘 안 쓰잖아요.ㅋ

syo 2018-11-03 19:43   좋아요 1 | URL
엇.... 그런 디테일한 사정까지 파악하고 계셨군요.... 맞습니다. 보통 토요일은 데이트가 있는 날이라서 그랬는데 이번 주는 내일 만나기로 해서..... 귀신이시네요. 우와.

카알벨루치 2018-11-04 10:52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알고리즘 분석가이신가? 대단하시다 ㅋㅋㅋ

다락방 2018-11-04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읽고나니 막 독서의욕이 상승하네요. 책도 읽고 싶고 글도 쓰고 싶고 막!!!

syo 2018-11-04 11:09   좋아요 0 | URL
불타오르네~🎶

프리즘메이커 2018-11-10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포스팅에는 항상 가락이 있어 좋습니다 ㅎㅎㅎ

syo 2018-11-10 16:10   좋아요 0 | URL
전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으나, 프메님이 그러하다고 하시면 그런가보다 합니다 ㅎㅎ
 

 

벚꽃이 피면 어김없이 차트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날이 좀 더워진다 싶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 되게 지겹다는 느낌이지만 실은 아직 열 살도 안된 애기다. 그러나 30년을 넘게, 딱 하루 불꽃처럼 차트를 불사르고 사라지는 역주행의 화신이 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지금 이 시점에도 지니차트 64위의 기염을 토하고 있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syo에게 10월이 십월이 아니라 시월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려준 고마운 노래기도 하다. 경상도 사투린줄 알았지. 시월. 하여간, ’잊혀진 계절이 이중피동 꼴로 틀린 말이라는 사실이 어느 정도 알려진 오늘날에도, 매년 시월의 마지막 날이 오면 대한민국에 사는 그 누구도 이용의 애타는 고백을 피해갈 수가 없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길거리에서, 버스에서, TV에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이쪽도 30년을 넘게 살았지만, 뭐 특별히 기억할만한 시월의 마지막 밤이 없어서, 뭔가 헛산 것 같아가지고, 저놈의 고백은 나이가 들수록 더 아련하면서 더 거슬린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요......그래, 댁은 좋겠구나, 매년 기억할 만한 게 있다니. “지금도 기억할 걸 못 만들고 있나요......나한테 대체 왜 이래...... “지금도 거역하고 있나요......

 

어제는 잠자리에 들면서 올해는 한 번 저 포기를 모르는 기억꾼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이용 없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조져보겠노라 다짐했다. 두문불출. TV도 라디오도 보지 않는다. 실시간 검색어도 보지 않는다. ’이용이라는 단어조차 이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월의 마지막 밤이 3시간 남은 시점까지도 이용의 습격을 용이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방에서 인터넷으로 플레이오프4차전 경기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거실에서 30년째 듣는 너무너무너무너무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온다. 둥땅둥땅둥땅둥땅 띠리링 띵띵띵 디리리리링 딩디리리리리리딩 띵디리링띵 우우우우..... 우우우우.... 우우 우우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 내가 여기 숨어있는 걸 저 노래가 어떻게 알았지?

 

문을 박차고 거실에 나가보니 이용은 우리 엄마 핸드폰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 정말 문틈까지 꽁꽁 싸매는 느낌으로 이용의 기습공격에 대비했건만......

 

요즘, 엄마가 유튜브에 빠져 있다.

 

 

181016 181031 : 27


  

1. 부산 이후부터

: 작가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며 주인공들과 함께 빙빙 돌았다. 그들이 아버지를 가슴에 묻는 길이었다. 책을 덮고 나도 죽은 아버지를 만났다. 참 오랜만이었다.

 

2. 아무튼, 딱따구리

: 따뜻하고 귀엽고 사람한테나 자연한테나 끝없이 다정한 부부의 지속가능한 알콩달콩에콩에콩 에코 생활기.

: 저자는 딱따구리와 직박구리가 어떻게 생긴 애인지 잘 알고, 1년간 정든 동네를 떠나며 슈퍼 아저씨 앞에서 퐁퐁 울기도 하고, 68년도에 생산된 자전거를 고치고 귀여운 이름도 지어주며, 2018년에 50세 생일잔치를 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그런 사람. 남편도 비슷한 사람. 지향하는 삶의 모양새가 닮은 사람이 서로 아끼며 살아가는 삶에서 쑥쑥 자라는 행복은 아, 부럽다. 읽고 있으면 뜨끈한 커피를 큰 컵에다 마시는 기분이 든다. 물론 그 컵은 머그컵이다. 종이컵은 안 돼.

 

3. N. E. W

: 나이 좀 더 먹어서, 이것저것 더 배우고 알게 되면, 김사과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땐 왜 몰랐을까. 김사과도 같이 나이를 먹는다는 걸. 한없이 도망치는 김사과.

 

4. 어린 왕자, 진짜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 이론 꼭지는 부족하고, 토론 꼭지는 작위적인데, 그걸 정리한 짤막한 꼭지는 어쩐지 좋은 희한한 책. 책이란 것은 정말 자유롭게 읽을 수 있구나. 그리고 그 모든 자유로운 읽기에다가, 정신분석(과 분석심리학. 다릅니다)은 자유롭게 지분을 주장하는구나. 와 정말 자유롭다.

 


5. 사진관집 이층

: 어쩐지 입 밖으로 나온 말이 그대로 시가 되어 땅바닥에 뚝, 떨어져 고일 것 같은 신경림 시인. 그만큼 읽기도, 느끼기도 쉬운 시들.

 

6.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

: 진짜, 명성으로 전 세계를 진동시킨다는 이 196명의 작가 가운데 거의 100명은 이름도 처음 들어봤고, 50명은 이름은 알지만 그들이 쓴 책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은 마당이니, syo 같은 놈은 아직 나라면 무인도에 무슨 책을 가지고 가지?’ 하고 생각할 만한 자격도 경험치도 없는 놈이 아닌가! 읽어 본 것들 중에 고르기에, 난 너무 안 읽었던 거야....... 진짜 대책 없이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다.

 

7. 쌤통의 심리학

: 표지 속의 남자는 정말 고 새끼 고거 쌤통이다하는 마음에 더없이 걸맞은 표정을 하고 있다. 이런 경우 읽게 된다. 표지에 낚여 읽지 않아도 될 책을 읽은 경험을 밤하늘에 별처럼 수놓고 싶은 때가 있다.

: 그렇다면 이 책은 별자리가 될랑말랑 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요약하자면 남들 망하는 거 보면서 내심 좋아하는 너 자신을 그냥 받아들여라. 일단 그런 심보를 상수常數로 놓고 그 다음에 대책을 마련하는 게 똑똑한 짓이라니까정도라 하겠는데, 으하하하, 찌질이로 10년 넘게 살아온 syo에게 샤덴프로이데는 이미 상수가 된지 오래였다! 난 이 책이 필요가 없었어! 눈을 감고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8. 한권으로 보는 마르크스

: 이 한권으로는 정말 택도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은 허당인가? 그렇지도 않다. 원제는 “Why Read Marx Today?”인데, 원제에 중점을 두고 평가하자면 충실한(최소 작가 자신이 충실하다고 생각할)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 작가의 말을 그대로 빌려와 한 줄 요약도 가능하다. “우리는 마르크스 자신이 인지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들이 폐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두 줄이었네요. 죄송합니다.

 


9. 로봇 시대에 불시착한 문과형 인간

: 요즘 이 분야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자기계발 붐으로 뭔가를 얻은 사람들이라고는 자기계발서 저자들뿐이었던 그 엄혹한 시대의 기억이 고스란하다.

: 이 분야의 책들을 펴면 항상 사라질 직업들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을 주의 깊게 읽는데, 책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 책에서 쉽게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는 직업이 저 책에서는 옐로우카드를 받고 퇴출의 기로에 서 있는 식의 불일치가 팽배하다. 많이 읽다보면 결국 모든 직업이 싸그리 없어질 것도 같다. 여기서 나는 지혜를 얻는다. 이런 것이다. “많은 일을 로봇이 대신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부지기수의 책들 가운데, 과연 이 책 자체는 로봇이 대신해서 쓰기 어려운 책인가?” 이 책은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10. 무기력한 날엔 아리스토텔레스

: 무기력한 날에 읽으래서 이때다 싶어 며칠을 두고 꼼꼼히 읽었으나 무기력에서 탈출하지는 못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시리즈 제목도 필로테라피라면서.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전혀 힘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기력한 이유는 간단한데, 철학에 의해 플러스 된 기운과, 그 철학을 이해하느라 용쓰는 데 소모한 기운의 마이너스 값을 합했더니 제로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정도라면 그렇게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 어쩐지 잘 읽히지 않았다.

: 이렇게 무기력을 그대로 달고, 이제 비참(스피노자)과 우울(니체)과 절망(키에르케고르)이 남았다.

 

11. 수학이 필요한 순간

: 마지막 챕터까지 수학책인 듯 수학책 아닌 수학책 같은 너였다가, 추가 챕터에서 우힛, 속았지? 나 열라 수학책!’ 하는 책. 수학책 주제(?)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기에 기분 좋은 당혹감을 안고 읽었는데 심지어 좋기까지 해서 당혹.

: 각 꼭지를 들어가면서 아니, 이게 수학이라고?’

: 각 꼭지에서 나오면서 아니, 이것도 수학이었다니.’

: 책 여기저기에서 분야의 경계를 종횡무진하는 저자를 보며 아니, 이게 사람이라고?’

: 그리고 거울을 보며 아니, 이것도 사람이었다니.’

: 책을 덮으면서 아니, 세상에 수학인 것도 없고 수학이 아닌 것도 없나 보구나.’

 

12. 존 롤스 정의론

: 그냥 정의론을 읽을까.

 


13.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

: 곱씹어 보면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지혜의 말씀에 가까운데도, 처음 딱 대면하면 말을 너무 멋지게 해서 소름이 돋는다. 그 정도 멋지니까 문장을 곱씹어 보게 된다. 그렇게 곱씹어 보면 의외로 별다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곱씹기 전에는 쉽게 파악할 수 없어서 곱씹게 된다. 그렇게 곱씹어 보면 이 말이 독특하지 않은...... 이런 순환을 문단 단위로 만들어내 독자가 꼼꼼히 읽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 페터 비에리의 글쓰기.

 

14. 숫자 갖고 놀고 있네

: 본격 산수교양서. 작대기로 수를 세던 시절부터 현대의 아라비아 숫자 표기법과 계산법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전반부 150페이지를 끌고 가는 다정함이 매력적이다.

: 더하고, 빼고, 자리 올리고, 내리고, 우리에겐 기계적으로 당연하여 생각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이런 산수의 과정들을 오래 보여주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오래 보아야 예쁜 법이다.

: 그러니까 이 책은, 구몬이나 눈높이 선생님이 그 살풍경한 문제지를 들이밀며 다음 시간까지 다 풀어내지 않으면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기 전에, 우리에게 한 번쯤 다정하게 알려줬어야 할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랬다면, 산수의 문턱을 이렇게 다정하고 흥미롭게 넘어섰다면, 우리가 수포자로 전락할 확률이 절반까지는 떨어졌을 것이다.

 

15. 비참한 날엔 스피노자

: 일상의 그림자에 숨은 철학 포인트를 끄집어 내 그걸로 다시 일상의 녹는점을 낮춘다. 그러는 동시에 일상의 뒷모습을 표본으로 삼아 철학의 안쪽을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철학과 일상이라는 두 서먹서먹한 친구가, 한때는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힘껏 도왔던, 서로에게 필수적인 사이였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책.

 

16. 첫 문장

: 주인공은 세상을 빙빙 도는데 이야기는 조금도 돌아가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건 빙빙 돌아본 사람은 안다. 생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어디를 헤매 본들,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우리는 다시 점령당한다는 것을. 아프지 않은 눈으로 살피면 여분과 잉여로 보이는 것들이, 당사자에게는 한 치의 남음도 모자람도 없는 정확함일 수 있다.

 


17. 철학자 플라톤

: 특색은 없지만 딱히 단점도 없는 고만고만한 개론서.

 

18. 정치

: 글을 정말 고급지게 쓴다는 느낌. 보수적 정치학자의 명맥을 이어가는(이어가다가 가신) 분이라는데, 과연 글에 품격이 있다.

: 그러나 syo처럼 일종의 입문서를 대하는 기분으로 이 책에 손을 댔다가는 손이 덴다. 이 시리즈가 다 그렇다. 옥스퍼드의 ‘a very short introduction’인가 하는 시리즈를 번역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옥스퍼드 다니는 인물쯤 되면 이 정도는 베리 숏 인트로덕션으로 숙지해 주어야 하는가 보다...... 사노라면, 참 사람 하찮은 기분 들게 만드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 오늘도, 녹색 이슈

: ‘환경은 지켜나가야 한다는 명제가 참임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오히려 환경 문제에 세심한 관심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어차피 옳고 당연한 이야기가 들어 있겠지 싶은 선견이 환경에 관한 책에 손을 댈 기회를 줄이고, 그 결과 이렇게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쉽고 다정한 책에서조차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너무나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20. 보통 사람을 위한 현대 수학

: 보통, 사람, 그리고 위한. 이 세 단어 가운데 최소 어느 한 곳에는 거짓말이 숨어있다. 그 거짓말이 새빨갛다.

: 곱셈을 뜻하는 기호인 가운뎃점(·)과 소숫점 기호인 마침표(.)를 모두 마침표로 찍어 놨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3곱하기 3.5를 쓴다치면 3.3.5라고 표시되는 셈이다. 이러면 이게 3곱하기 3.5인지, 3.3 곱하기 5인지, 그것도 아니면 3곱하기 3곱하기 5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21. 방구석 미술관

: 이슈로 시작한다고 해서 다 잔재주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술가라는 종족은 대체로 그들이 만드는 작품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되곤 하니까, 미술 공부의 문은 작품보다 화가로 열어가는 게 더 좋을 수 있다.

 

22.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처럼 콘텐츠를 흐름에 얹어서 풀어내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 책처럼 키워드 단위로 챕터를 구성해 사전식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렇게도 읽고 저렇게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읽기가 편해지는 것이 마르크스. 뭔들 안 그렇겠느냐마는.

 

23. 내가 사랑한 물리학 이야기

: 누가 이 책을 읽어야 할지 정말 애매하다. 아는 사람에게는 단편적일 것이고,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는 맥락 없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추천할 만한 책은 못 되겠다.

 

24. 독일철학사

: 일단 어렵다.

: 이단 번역이 번뇌다.

: 삼단 독일 철학은 원래 지루하다.

: 결론. 누구를 위한 책인가. 최소한 그게 syo는 아니었다.

 


25.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 편집상에 자잘한 단점(혹은 실수)들이 있긴 해도, 이만한 스피노자 입문서가 없다. 프랑스 사람이 쓴 어떤 책이 좋긴 한데, 다들 아시잖아요, 프랑스 철학자들의 문장이 어떤지. 아름답고 정교하지만 빡치는..... 이 책은 그야말로 한국 스타일이다. 기본적으로 거두절미고, 그냥 거두절미하면 딱딱하니까 딴엔 기교를 부리지만 안 하던 짓이라 어색한, 그러니까 되게 친근한 우리네 이웃이 설명해주는 것 같다..... 

: 뭘 또 폭풍까지야.

 

26. 수학에 관한 어마어마한 이야기

: 구석기 주먹도끼부터 시작해서 역사의 시간축 위에 얹힌 수학의 크고 작은 흔적들을 조명한다.

: 수학 교양서는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분류할 수 있다. 수학에 특별한 소양이 없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만 수학 좀 한다는 사람들은 시간낭비라며 읽던 책을 툭 던지게 하는 스타일이 첫째요, 반대로 수학 좀 하는 이들의 흥미를 끌지만 수학을 잘 모르는 이들을 진절머리 나게 하는 스타일이 둘째다. 그런데 이 책은 1.5째인 것 같다.

: 뭘 또 어마어마까지야.

 

27. 종횡무진 서양사 1

: 작년, 남경태 선생님의 <개념어 사전>을 다시 읽고서 첫 번째 독서에서 감지하지 못했던 빨강이의 향기를 느끼고 좋아했다. 그런 긍정적 선입견을 두르고 책을 손에 들었는데, 표지에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라는 욕심 가득한 부제가 붙어있다. 독창적이면 독창적이지 뭘 또 가장 독창적이야, 얼마나 독창적이면 가장 독창적인지 한번 볼까?

: 하는 배배 꼬인 마음으로 읽으면, 뭐 그리 전복적인 역사관이다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특별히 겁내지 말고, 그냥 남경태 선생님이 늘상 잘 하셨던, 함량 있는 개론서 스타일이라고 보면 되겠다.

: 뭘 또 종횡무진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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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0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숫자와 제목에 붙여진 색깔의 의미는 뭘까... 혼자 막 그런 생각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ㅋㅋㅋ
저는 어제 이용 아저씨 노래 안들었어요! ㅎㅎ 너무 일찍 자버려서 그런가봐요. 내년에는 꼭 성공하시길! ㅎㅎ
syo님의 알찬 솔직 후기 덕분에 오늘도 장바구니에 몇 권의 책을 담았네요. ^^

syo 2018-11-01 12:30   좋아요 0 | URL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냥 색을 넣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제목에만 색을 넣었고, 기왕 넣으려면 이 색깔로 넣어야겠다 싶은 그대로 색을 골라서ㅎㅎㅎㅎ

설해목님 11월도 활자로 묵직하고 끈적끈적한(?) 한달이 되시기를 ^-^

북깨비 2018-11-0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혀진 계절. 저도 나이가 좀 있어서 아는 노래인데 syo님 덕분에 시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가사가 이제 귀에 들어오네요. 유투브에 찾아보니 해마다 10월 31일날 들으시는 분들이 꽤 되시는 것 같아요. 저도 이제 해마다 찾아 듣게 될 것 같습니다. 뭔가 기분좋은 그리움. 💕

syo 2018-11-03 09:13   좋아요 1 | URL
저는 희한하게 매년 시월의 마지막 날에 이 노래를 꼭 듣게 되어서 남들도 다 그렇겠더니 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가 봐요. ㅎㅎㅎㅎ 가사나 멜로디나 다 좋은 노래잖아요. 사실 1년에 하루쯤 듣고 아련해질만한 노래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페크pek0501 2018-11-03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녹색 평론에 꽂혔어요. 예전에 선집을 구입한 적이 있는데 내용이 다 좋더라고요.

이젠 선집을 구할 수 없어서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책으로 읽고 있어요. 163호가 나와서 사려고요.
162호에도 좋은 내용이 많아요. 격월간지입니다.
<오늘도 녹색 이슈>를 보니 생각났어요.

syo 2018-11-03 15:20   좋아요 1 | URL
말씀 듣고, <녹색 평론>을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좋은 잡지라는 이야기야 접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목덜미까지 차 있던 구매욕구가 페크님의 울대 때리기에 당해서 왈칵 쏟아지고 말았네요 ㅎ
 

 

외면하면 물론 편하기야 하겠지요

 

 

1

 

우리는 그게 하나뿐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 세상에 가장 많은 것은 진실이다. 누구나 스스로 진실한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리고 진실들은 경합적이다. 진실이 다른 진실을 꺾고, 덮고, 삼킨다. 강한 진실이 약한 진실의 가슴에 허위의 명찰을 달고 더 강해진다. 더 거대해진다. 뼛속까지 가짜로 태어난 진실은 없다. 정말 작은 진실의 씨앗에 선명한 의도와 큰 힘을 더하면 외피가 거대해진다. 그 거대함 속으로 거미줄에 붙잡힌 벌레들처럼 이런저런 거짓들이 포획된다. 그런 식으로 모든 진실은 진짜 진실에서 출발하지만 때때로 가짜 진실로서 거대해진다. 거대해진 진실을 마주하면, 우리는 그 씨앗이 어떻게 생겼는지 속을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이 거대한 진실의 과육이 어느 층위부터 썩어 악취가 나는지, 어디를 도려내야 될는지 판단하는 일은 힘이 든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진실을 통째로 거짓으로 취급하는 편한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절박한 진실이 누군가에겐 용납할 수 없는 거짓이 된다. 어려워서, 힘이 들어서, 편해지고 싶어서


이미 세상에는 우리의 손을 떠난 진실이 무수히 많다. 그것들은 관리되지 않고 저절로 커지다가 서로 부딪히며 세상을 반으로 쪼개놓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 진실들을 컨트롤할 수 없다. 대체로 승인하거나 부인하고, 용맹하게 달려들어 진실을 해부하려는 노력은 정말 드물게 일어난다. 나는 지쳤고, 겁이 많고 무능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진실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오직 한 가지만 빼고.

 

거대한 진실은 거대한 자들이 만든 진실이고, 아픈 진실은 오로지 아픈 자들에게만 진실이다.

 

 

 

2

 


산양을 지키는 일이 왜 중요한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왜 보호해야 하는 거지산양 하나 멸종했다고 해서 생태계가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멸종위기종을 보호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산양 같은 멸종위기종을 보호한다는 건 단순히 산양만이 아니라 산양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지키고 복원하는 것까지 아우른다밀렵에 희생당하지 않게 감시하는 한편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적절하게 활동할 수 있는 지역을 보장해주는 일이다그리고 이 과정에는 산양의 먹이가 되는 식물들을 보호하는 일도 자연스레 함께 이루어진다즉 먹이사슬의 상위에 있는 종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은 한 지역의 생태계 전체를 보호하고 복원하겠다는 약속이다.

김기범오늘도녹색 이슈』 70

 

관심이 없으면 사태의 일면만 보게 된다돌려 말하면사태의 일면만 보인다면 관심이 없는 것이다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추상적이고 도덕책적인 대의에 동의만 한다고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다양한 변용들과의 공통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완전한 인식으로 가는 디딤돌이라고 말했다거칠게 말하면 이렇다우리는 모두 닮아있지만그 사실은 서로를 톺아보지 않고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깊은 눈으로 들여다보면 너는 나와 닮았다닮아서 나는 네게 관심을 둔다관심이 너를 알게 만든다너를 아는 만큼 다시 나를 알게 된다너와 나를 더 많이 알고 나면 우리는 더욱 닮았고한편 선명하게 다르다그 다름도 이제는 기껍다벌써 사랑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3



따라서 우리가 기꺼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은 17세기에 철학을 이성주의적으로 전환시킨 결정적 요인에는 한편으론 똑같은 정도로 권위적인 진리 요구를 지닌 서로 배타적인 다수의 그리스도교 종파가 존재하므로 바로 그 점이 단순히 권위에 기초하지 않는 심급에 대한 추구를 요구한다는 경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조건적으로 끝내야 하는 종교적 시민 전쟁이 불러일으킨 물리적·도덕적 악이 속해 있었다는 점이다.

비토리오 회슬레독일철학사76

 

도대체 우리가 뭘 기꺼이 인정할 수 있는 건지 기꺼이 인정할 수가 없는 문장이다. syo는 이것을, 번역자가 읽는 이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특정 집단만을 읽는 이로 고려했다는 증거라고 본다. 이 책의 문장들은 시종일관 이렇다. 의미가 아니라 문장 자체를 이해하는 데 에너지 소모가 너무 극심하다.

 


 

4



우리는 처음부터 사물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지는 못한다왜냐하면 우리 신체가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신체적 변용에 따른 관념들을 무차별적으로 갖게 되기 때문이다. (128쪽 2~5)

 

우리는 처음부터 사물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왜냐하면 우리 신체는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신체적 변용에 따른 관념들을 무차별적으로 갖게 되기 때문이다. (128쪽 마지막줄~129쪽 2)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사물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지는 못한다우리 신체가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신체적 변용에 따른 관념들을 무차별적으로 갖게 되기 때문이다. (130)

손기태고요한 폭풍스피노자 

 

두 번째 읽는 책이고, 첫 번째 독서가 좋았던 기억이 있다. 스피노자에 관한 첫 번째 입문서로 쓰기에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하지만 꼼꼼히 읽었더니, 저렇다.

 

우선 책을 꼼꼼하게 읽지 않고 평가하는 syo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원고를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고 출판하는 제작진(?)들의 저 태평함은 어떻게 고쳐놔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토씨(갖지는->갖지, 신체가->신체는)를 제외하면 완전히 동일한 문장이, 심지어 같은 페이지에 들어 있는데도 저걸 그냥 통과시켜?

 

 

 

 

-- 읽은 --



손기태,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비토리오 회슬레, 독일 철학사

미카엘 로네, 수학에 관한 어마어마한 이야기



 

-- 읽는 --



남경태, 종횡무진 서양사 1

로버트 H. 프랭크,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1

임채호, 물리학의 기본을 이야기하다

콜린 베번, 당신의 행복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냐고 물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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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10-3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정말 <독일 철학사> 예문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역시 syo님 같은 분이 필요해요.
독자가 자꾸 말해줘야 역자든 편집자든 작가든
정신 차리고 좋은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겠죠.

그나저나 syo님은 번역이나 편집자 같은 걸 해도 잘할 것 같은디.
또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나올지 안 봐도 비디오여요. 암만...ㅎㅎ

syo 2018-10-30 14:17   좋아요 2 | URL
으하하하, 저도 ‘나 혹시 편집자가 적성인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이 몇 번 있습니다.
특히 작가님들과의 대화를 ‘기승전원고독촉‘으로 끌고 가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편집자가 그런 일도 하는 거 맞죠? 스텔라님은 그런 거 딱 질색이시겠지만? ㅎㅎㅎㅎㅎㅎ


그나저나 생각하셨던 게 요런 반응은 아니었죠? ㅎ

카알벨루치 2018-10-30 14:42   좋아요 2 | URL
번역이 반역인가!!!ㅋ

stella.K 2018-10-30 15:16   좋아요 0 | URL
ㅎㅎ 독촉도 필요하긴 하죠.
물론 작가는 싫어하지만.
그런데 그것 보다는 전 제가 진짜 전문 작가라면
이야기 잘 통하는 편집자가 꼭 있었으면 해요.
그래서 서로 작업에 대한 고충도 나누면서
좋은 책을 만들어 가는 거죠.
작가 혼자 작품을 만드는 거 가능하지 않죠.
syo님이 편집자가 되시겠다면 전 대환영입니다.
제2의 장석주 같은 사람이 나와야죠.
전 syo님 충분하다고 봐요. 진짜루!^^

syo 2018-10-30 15:28   좋아요 0 | URL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말씀이지만 과찬이세요 ㅎㅎㅎㅎ
전 맞춤법도 잘 모르는 필부랍니다.

책과 관련해서 제가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직업은 그저 ‘독자‘예요^-^

stella.K 2018-10-30 15:3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스요님 이러고 나올 줄 알았다니깐요. 흥뿡칫!

그래도 생각은 해 보셔유. 좋잖아요.^^

다락방 2018-10-30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요한 폭풍도, 독일 철학사도... 잘못했네요. 이긍....

syo 2018-10-30 15:28   좋아요 0 | URL
특히 독일철학사 진짜 나빴어요. 진이 다 빠졌어....

뒷북소녀 2018-10-30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엔 뭔가 다급한 마음이 들어서... 남들이 신경 쓰지 않고 사용하는 것들에도 자꾸 마음이 쓰이더라구요.

syo 2018-10-30 18:12   좋아요 0 | URL
음, 예를 하나만 들어주시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