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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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에 관심을 갖게 된건 오래전 부터였다.

여러 곳에서 마담 보바리의 얘기를 접했고 이 책을 읽어야 겠다라고 확고한 생각이 든 계기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였다. 저자의 말에서 마담 보바리의 독서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궁금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담 보바리가 한번만이라도 연애소설을 벗어나 캉디드를 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을 한다. 도대체 마담 보바리가 어떤 책들을 읽었기에 이토록 한탄을 하는 걸까 라는 의문과 함께 먼저 구입한 책이 캉디드였다. 그 책을 읽고 마담 보바리를 읽으려 했는데 캉디드는 아직도 읽지 못한채 마담 보바리를 먼저 읽게 되었다. 책을 읽고 보니 굳이 캉디드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녀의 독서에 대해 안타까움과 환멸이 느껴졌다. 성장과정에서의 무기력하게 읽어댄 연애소설에서 조금만 벗어 났거나 뛰어 넘었다면 그런 타락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후일 '보바리즘' 즉,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이라고 불리우는 환상을 자아내는 병으로까지 추대된다.

그도그럴 것이 그녀의 일상은 무기력하고 변덕스러우며 만족이 없었다. 그런 취향을 갖고 있음에도 상상속에서 튀어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몰취미한 샤를르와 결혼을 했으니 그녀의 환멸은 더더욱 심해지고 환상은 짙어져 갔다.

그러나 남편 샤를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며 엠마를 애지 중지 사랑할 뿐이다. 따분한 남편 그리고 권태로운 시골 생활에서 그녀는 다른 남자의 정부가 되고 가산까지 탕진한 후 결국 음독자살을 하고 만다. 남겨진 샤를르는 딸 베르트와 함께 살아보려고 애쓰지만 결국 파산하고 남들의 따가운 이목과 아내의 외도를 안 후 아내의 곁으로 가버린다. 이처럼 스토리는 책의 분량에 비해 무척 간략하다. 그리고 비극적이다.

이런 비극의 중심에는 엠마가 있지만 저자 플로베르는 <엠마 보바리는 바로 나 자신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권태와 무절제 그리고 외도에 대해 경멸의 시선을 던졌던 건 사실이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나로써는 샤를르 같은 남편을 만나지 않기 바라기에 전전긍긍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나와 도무지 맞지 않는 남편... 그리고 그런 그를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을 때 나도 마담 보바리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러나 저자는 마담 보바리를 통해 19세기 초의 낭만주의와 내부에 감추어진 낭만주의적 기질을 유감없이 해부 함은 물론이고 저자 자신이 낭만적 상상력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보바리즘>이라는 새로의 이념의 탄생과 낭만주의를 해부하는 '마담 보바리'라는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소설속의 임무에 충실하듯 엠마는 두 남자의 정부가 되었음에도 그리고 죽음을 택하면서도 크게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후회와 넋두리는 할지언정.

 

그녀의 자살의 궁긍적인 이유는 외도의 실패보다 그리고 마음의 상실보다 금전적인 면때문이였다. 무절제한 씀씀이로 가산을 탕진하고 자신을 옥죄어 오자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목숨이 남아 있는 한 엉망이 되어 버린 현실 속에 남겨지는건 엠마에게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그녀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겐 최선의 방법이였고 엠마다운 결정이였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베트르보다 남겨진 샤를르가 너무나 갸여웠기 때문이다. 분명 따분하고 눈치없는 남편이였지만 엠마를 깊이 사랑했고 자신만의 세계속에 자신이, 그리고 엠마만의 세계속에 엠마가 사는 공통된 틀은 없었지만 엠마의 죽음과 그녀의 행위를 감당하기엔 그도 적잖은 충격이였을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끝이 나지만 이 소설이 출간될 당시 플로베르와 출판인은 공중도덕 및 종교적 미풍 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피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변호사 세나르에 의해 법정은 '단호히 비난 받아야 하지만 도덕적 교훈을 담고 있는 점을 인정하여' 무죄 선고를 내린다. 그리하여 책의 초반에 세나르에게 바치는 헌사가 먼저 나오는데 과연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도덕적 교훈을 새기게 될지 궁금해 진다. 너무나 무절제한 세상속에서 당연히 그래도 되는 듯 착각과 혼란에 빠지면 어떻게 될지 노파심이 드는건 왜일까...

나 역시 마담 보바리를 좋아하지 않지만 작품속에 녹아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답지만 몽상적이고 권태로운 마담 보바리의 저 눈빛에 전염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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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무어 2 - 사라진 지도들의 가게 율리시스 무어 2
율리시스 무어.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 지음, 이현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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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도 잡자 마자 순식간에 읽었다.

너무 흥미 진진했고 오랜만에 빠져보는 환상적인면에 매료된채 밤 늦게까지 탐독하면서 꼼짝할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혀 '시간의 문'의 다음 이야기인 '사라진 지도들의 가게'를 읽었다.

 

제이슨, 줄리아, 릭은 집 밑으로 통하던 동굴에서 환상의 배 메티스를 타고 이집트로 가게 된다. 당연 고대의 이집트고 줄리아는 빌라 아르고에 돌아 오지만 제이슨과 릭은 이집트에서 마루크의 도움으로 율리시스 무어가 암시한 지도를 우여곡절 끝에 찾게 된다.

그러나 부동산 사업가 올리비아 뉴턴의 추적을 받다 그 지도를 펴보지도 못하고 뺏기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줄리아와 네스터씨는 올리비아 뉴턴의 운전기사 만프레드의 습격을 받고 많은 궁금증을 남긴채 2권은 그렇게 끝이난다. 다음 이야기 그리고 결말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2권을 읽었지만 아직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스케일은 점점 커지고, 율리시스 무어의 과거의 행적이 조금씩 드러나고, 그 속으로 아이들은 깊숙히 들어가지만 아직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분명 1,2권을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베일을 벗겨갈뿐 많은 궁금증을 낳고 있다. 우연히 아이들은 이집트로 갔지만 분명 율리시스 무어는 이집트를 여러번 여행했고 이집트와 연관된 무언인가가 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올리비아 뉴턴이 알고 있다. 빌라 아르고를 탐냈었고 고대 이집트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아직까지도 율리시스 무어와 네스터씨가 알고 있는 비밀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만큼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3,4권은 올해 나올 예정이고 5.6권은 내년에 나온다고 하니 감질맛이 나서 못기다리겠다. 이런 설렘이 있기에 책이 출간될 당시 읽는 재미 또한 찰지겠지만 그래도 감질맛이 나는건 사실이다.

 

이 책의 정보를 보면 주요 연령층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나와 있지만 내가 읽기에도 무난했고 재미났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인 조카에세 빌려줘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읽을 생각이였지만 어쩜 스토리의 전개나 상상으로 꾸려가야 하는 설명이 이해가 안될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 멈칫 했는데 조카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나와 느낌이 같을지 아니면 어려워할지 책이 두껍다고 타박할지 우선은 읽어보라고 권해 줘야 겠다.

나보다 책을 더 좋아하고 빨리 읽는 조카와 같은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눠 본다는게 재미나고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혹시 모르지 너무 재미있어서 다음권은 부모님한테 사달라고 할지... 그럼 나는 옆에서 그냥 얻어 보는 거다... ㅋㅋㅋ

이 얇팍함이란...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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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休
반지인 지음 / 마음길(도서출판마음길,마음길어린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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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햇볕에 바싹 마른 침대 커버를 씌웠다.

샤워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선풍기 바람을 과감히 '약풍'으로 돌린 뒤 이 책에 같이 끼워서 온 음악을 틀었다. 음악을 틈과 동시에 책을 꺼내들려 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음악에 난 새로 씌운 침대 커버 위로 벌러덩 누웠다.

폭신했다. 그리고 음악은 푸근했다. 누런 벽지로 쌓인 천장을 푸른 하늘이라 생각했다. 몽롱해졌다. 음악은 감미롭고 몸은 푹신하고 기분은 상쾌했다. 바깥의 따가운 햇살이 그려지는게 아니라 무한한 푸르른 하늘이 펼쳐졌다. '행복해'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그리곤 이 분위기에 어울리는건 현재 읽고 있는 '아리랑'이 아닌 '조선 선비 살해 사건'이 아닌 더군다나 '요셉과 그 형제들'이 아닌 '그리고 休'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책만이 지금의 분위기에 날개를 달아줄 것 같았다.

나는 훨훨 날았다. 그리곤 너무 행복해 스르르 밀려드는 잠속으로 빠졌다. 수많은 꿈을 꾼듯했다. 그러나 내가 잔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이였다. 너무 달콤했다. 배가 고팠다. 저녁을 챙겨 먹고 다시 음악을 틀고 책을 펼쳤다.

하늘을 날았던 기억, 꿈속의 추억이 밀려 들었다.

 

소박한 사진과 소소한 웅얼댐이 현재의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서 현재를 만끽하고 있었다.

분명 그녀가 지나쳐온 과거, 바라보는 미래가 있었는데 난 왜 그녀가 현재 행복하다고 느낀 것일까...

그리고 난 왜 그녀의 행복을 닮아가는 걸까...

그녀의 웅얼댐이 편안했고 또한 궁상맞기 까지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행복이 내게도 전달되었다.

그녀의 글에 그녀의 사진속에 그리고 흐르는 음악속에 무조건 파묻힌게 아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채.

그녀는 그녀의 소박함을 얘기했고 나는 나의 소소함을 누렸다.

그녀의 전부를 흡수하는 것이 아닌 그녀의 자유로움 속에서 나도 나만의 자유를 꿈꾸고 있었다. 눈으로 그녀의 글을 좇으며 그녀의 사진을 느끼며 머리속으로 그녀의 글과 나의 상상이 뒤죽 박죽 섞여 감에도 나는 내 생각을 많이 하였다.

종국에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나는 나의 세계에 깊이 빠졌다. 그러나 그건 글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는게 아니였다. 그녀의 글과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느낌으로 다가와 주었다.

그런 전달을 해주는건 나 자신이였다.

그녀의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던 나 자신 말이다.

오랜만에 진실된 모습으로 만나는 나는 무척 반가웠고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늘 내 자신을 타박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나와의 만남은 그녀의 사진, 그리고 그녀의 글 - 비록 내 마음 깊이 와닿도록 꼼꼼히 읽지 못하더라도-의 영향도 컸지만 음악의 깊이는 한결 감미롭게 다가와 주었다.

책을 보며 사색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내면 깊숙한 곳의 나를 만날 수 있게 해주었던건 음악이였다.

어떤 음악은 독서를 방해하지만 어떤 음악은 독서와 조화를 이룬 후 깊은 사색으로 이끈다.

힐링음악이라고 하는 첨부되어 있던 음반은 내게 후자의 역할을 해주었다. 무언가를 치유하고 회복시킨다는 힐링 음악...

분명 '그리고 休'와 함께 내면의 나를 회복하고 치유해 주었다.

달뜬 감정이 아닌 차분한 만족감을 느끼는 나를 만나는 것은 실로 너무 오랜만이므로..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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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4 - 양장본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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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랑을 읽으면서 자꾸 태백산맥이 생각났다.

태백산맥보다 더 끈적거리고 진득한 그 느낌.. 그건 바로 한이였다.

한이 서린다는건 분명 이런 느낌일테다. 태백산맥은 민족간의 대립에서 오는 한이기에 깊은 슬픔을 갖고 있다면 아리랑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데서 오는 서러움이 짙다. 그 서러움과 한의 대상이 개개인인것이 너무나 안쓰럽다.

나라를 잃어버렸으니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늘 나라와 나라가 아닌 나와 지배국간의 맞섬으로 시작된다.

야금 야금 먹혀가는 것이 호남평야가 아닌 국토가 아닌 백성들의 혼과 넋이 먹히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주눅이 들거나 숨죽이는게 아닌 목숨을 내 놓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노고를 잊어 버리고 싶지 않다. 그들의 저항이 자기의 것을 빼앗음에도 시작 됐다 해도 그들의 울분을 잊어 버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반면 나와 지배국의 맞대응에서 지배국, 혹은 그 나라의 개인에게 흡수되고 기꺼이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시류를 타고 한 몫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 또 저항에서 더 큰 뜻을 품고 국내에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송수익과 같은 사람, 그리고 그를 따라 나서는 사람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 많은 사람....

그리고 4권에서 내내 비치지 않다 마지막 즈음에 나타난 하와이 농장으로 팔려간 이주 노동자들....

저자의 그 큰 스케일과 구성과 엮음 속에 머리가 아찔해진다.

그러면서 만약 내가 그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둘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한번의 저항으로 목숨을 잃든지 아니면 숨죽여 살든지... 나의 생각은 극을 달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상상은 겁이 난다. 자유를 갖었음에도 몹시 답답해 하는 나인데 그런 자유를 가지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다.

그래서 어찌 되었던 현실을 잘 꾸려낸 그들이 용감하다 생각된다.

그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100% 순순한 눈길이 아니였다고 하더라도.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 였겠지만 일본인들의 철두철미함 그리고 잔인함에 한없이 서글퍼진다. 왜 탐내는 것일까... 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과연 그걸 해탈한 이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건 지켜보는 것 뿐이였다.

그들이 어떻게 하든지 그리고 우리의 백성들이 어떻게 당하는지..

그렇게 1913년은 흘러가고 있었다.

일본에게 해방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그 세월을 지켜봐야 하는 나로써는 괴롭고 우울해진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있다.

그 아픔을 아직 치유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지켜보는 것쯤이야.... 충분히 해 낼 수 있다.

어떤 것들이 내 안에서 튀어 나올지 모른다 해도 난 충분히 견뎌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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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죽음 - 전2권
김진명 지음 / 대산출판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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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보는 김진명의 소설이였다.

늘 지난 작품을 읽어서인지 읽는 내내 시류를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이질감이 느껴졌는데 발간된지 조금 지나긴 했지만 비교적 신간이라서 그런지 시류를 제대로 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문외한인 정치,역사 그리고 복잡미묘한 국제 문제들이라 뚜렷한 주관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아는것이 있어야 풀어놓을 재간이 있고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을 터인데 무엇하나 뚜렷이 말할 수 있는게 없었다.

 

김일성의 죽음을 둘러싼 동북공정의 진행적인 음모....

현무첩을 통해 고구려 역사를 파헤치고 그 역사를 지키려는 측과 부정하려는 측의 갈등은 여전히 뜨겁게 씌여져 있었다.

현무첩의 의미를 풀어내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알았음에도 또한 그것이 주류였음에도 무언가를 시원히 뒤집어줄 것 같았으나 끝은 허무했다. 동북공정의 음모처럼 뒤집기는 여전해 현재진행형인 걸까..

김정일의 욕과 뒤섞인 거친 발언에 지금껏 이끌어온 소설의 진행이 무너져 버렸다. 그렇게 끝낼 것이라면 좀 더 일찍 민서가 김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희생을 막을 것이지 그리고 그런 음모를 진즉 꺽을 것이지 허무하고 허탈했다.

또한 3명만 알면 우리나라 사람을 어찌 어찌 다 알게 된다는 말처럼 민서는 충실했다.

지미 카터를 비롯해 김정일, 중국의 거물들까지 민서는 손만 뻗으면 만날 수 있었다. 민서 같은 역할 자가 있어야 소설이 흘러가겠지만 자연스럽고 매끄러움이 부족했던건 사실이다.

분명 읽는 동안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순식간에 읽었음에도 아쉬운 부분이 많이 보였다. 푹 빠지면 헛점이 많이 보이지 않는 법인데 아이러니 했다. 읽기와 즐거움은 따로 따로인 듯 그렇게 흘러간 소설이였다.

그러나 결코 호락 호락하지 않는 숙제 꺼리를 만들어 놓고 갔다. 나 혼자서 풀 수 없는 그리고 결코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숙제들 말이다.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을 떠나서 중국과 일본과의 정치적 지리적 관계... 이모든 것들을 어떻게 우호적으로 풀 수 있단 말인가...

분명 남과 북은 한민족이라 이렇게 갈라져 있음에도 끈끈한 무엇인가가 응집되어 있어 북한이 어려움을 당했을때 당연 우리에게 손을 뻗을 줄 알았는데 중국에게 먼저 손을 뻗칠거라는 가정은 충격이였다. 이미 그렇게 드러나 있어 가정이 아님에도 그리고 우리와는 단절 되었어도 중국과는 늘 교류를 해왔다는 사실을 앎에도 인정하기 싫었다.

그렇기에 중국의 북한 흡수라는 가설을 이끌어 낼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며 광개토대왕을 그 시대를 상기 시키려 하지만 그 앞에 우리는 너무 초라하다. 그리고 너무 나약하다.

 

충동적인 애국심은 이제 솟아 오르지 않지만 이런 씁쓸함의 여운은 오래간다. 소설이라는 허울을 다 잊더라도 남게 되는 진실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음을 느낀다.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그러나 그 진리는 스스로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도 어디서 날아오는게 아닐 것이다.

그 진리의 자유는 기다리되 멈춤은 안될 것이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자유는 영영 잃어 버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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