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ED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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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더 좀비스'의 이번 시리즈(?)는 전작의 유쾌함과 발랄함(?)의 느낌이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다. 사건을 해결하는 이미지가 강했고 고등학생이 대학의 깊은 속사정에 관여하다 보니 -이건 억측이다. 전작에서의 예들은 이것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부족함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미지가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껄끄러움의 속사정을 나름대로 추측해 보건데 불륜, 그리고 돈, 권력, 대학이라는 거대한 압박까지 가세해 숨통을 조여서 '더 좀비스'답지 않았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더 좀비스에게는 이런게 전혀 어울리지않았다. 돈과 권력? 대학??

물론 그들의 심중에 이런걸 누리고 싶은 마음들이 왜 없겠냐만은 그들에게 왠지 세상의 때로 느껴지는 것들을 미리 느껴보게 하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 세상의 때가 골수까지 파고들어 상처가 넘쳐나는 그들인데 나도 참..... )

문제아,꼴통들로 보일지라도 그들이 세계에서 '더 좀비스'는 멋졌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곳에 주늑들고 - 대학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로 볼때- 돈과 권력에 무릎 꿇고 그들의 세계에서 당연히 추구되는 것들일지라도 벌써부터 그들에게 고3이라는 고삐리의 신분을 벗겨내기가 싫었다.

왠지 대학교내의 사건에 말려 듦으로써 대학과 그들의 모습을 일직선에 두고 비교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모순이 되어갔다.

그들은 취직을 위해 대학을 선택하고 지식과 학구열을 불태우기 위해 대학을 선망하는게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문대 앞에서 그들이 왜 초라해 보였는가..

그들은 명문대를 추구해 옴이 아닌대도 그들은 그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삶을 삶에도 왜 난 그들을 단박에 초라하다고 말하는 걸가.. 시선의 차이였다.

난 '더 좀비스'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갈망하는 자,평탄한 길을 추구하는 자들의 시신에서 '더 좀비스'를 바라봤다 왜?

그런 울타리가 짐짓 튼튼해 보였기 때문이였다. 그들의 삶의 방향을 추구했음에도 겉모습에 홀라당 넘어가 버리는 나의 허영이 얄미웠고 '더 좀비스'를 초라하게 만든 사건의 실태가 맘에 들지 않았다.

결국 이런 나의 맘에 들지 않음이 명문대를 싸고 잇는 온갖 허영들을 벗겨 주었지만 그 벗김이 후련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개선될 수 없는 사회의 구조의 답답함과 그 구조를 따라가야 하는 사람들 틈에서의 반항적인 '더 좀비스'들이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책의 중심 내용과는 다르게 나의 이야기가 많이 빗나가고 말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런 마음의 응어리가 자꾸 꾸역 꾸역 올라오는건  왜 였을까? '더 좀비스'가 성인이 된다는 생각?(어떤 식으로?)

삶이 더 고달파 질거라는 생각?(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그들의 삶이 결코 평탄치 않음을 알고 그 조건을 즐겼음에도 난 왜 이렇게 무겁게 얘기하고 있는 걸까?

물어도 대답없는 '더 좀비스'들이여..

떠나지 말지어다. 변하지 말지어다.

조금은 징그러운 발랄함 속에서 영원한 고딩으로써의 삶을 지속시켜 달라는 요구는 얼토당토 않는 나의 억지요 불순환이라는 걸 알지만 난 그들을 세상속에 덩그러니 놓아두기 싫었다. 그들에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보호막을 걷어 내는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그들이 죽는 것도 아닌데 - 더 좀비스니까- 난 그들의 미래가 심각하다.

 

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더 좀비스'는 실질적인 매력을 잃을 것 같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미래가 부여될지 솔직히 걱정된다.

나의 삶의 미래가 아닌 왜 '더 좀비스'를 걱정하는가..

그들에게 정이 들었다라고 말하는 건 너무 단순하지만.. 왠지 그냥 그 자리에 있어줬음 하는 바램이 생긴다.

헤어짐의 정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냥 내게 ' 더 좀비스'로 남아주면 안되는 걸가...

 

좀비스의 곁에 사건과 '새침한 여학생'-책의 설명을 빌어- 을 첨가시켜 그들을 나이먹고 철들게 하는 것보다 사고쟁이, 철없는 그들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걸 좋아하는 그들로써 나의 소망이 실현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결국 나의 마음 가짐이 중요하다느 얘기군...

그래 좋다.

내게서 '더 좀비스'는 매력으로 넘쳐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고 단순하지만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불멸의 존재로 남겨 두는 수 밖에...

'더 좀비스'여 영원하라.. 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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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김혜자 지음 / 오래된미래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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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오늘의 책'에서 이 책의 소개글을 부탁했다.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판단은 그쪽으로 맡기기로 하고 우선은 써보기로 했다. 그러나 내게 이 책이 없었다. 내가 추천을 한 책이긴 하지만 책방에서 빌려본 거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다닥 책을 샀고 소개를 하기 위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왠만해서 두번 읽지 않는 나로써는 어찌 되었건 읽은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이다. 

읽고 나서 사람들이 왜 책을 2~3번 읽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분명 처음 읽을때 스쳐가버렸던 것들을 두번 읽으므로써 다시 잡을 수 있었다. 그 횟수가 반복 될수록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거, 그리고 발견했더라고 깊이 새기지 못했던거.. 그것들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고 나를 다독이는 시간까지 생겨 여러번의 책 읽기가 유용하다는 걸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번 읽었음 그냥 된거지 왜 또 독후감을 쓰냐고?

두번 읽었을때의 느낌이 또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른 느낌을 말하고 싶어졌다.

 

두번째 읽는 책 속의 고통받는 땅의 사람들이 아픔으로 전해져 왔다.

상상할 수 없는 기아와 질병과 가난과 상처에 시달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책을 읽다 고개만 들면 딴 세상을 만날 수 잇는데 그들을 내가 어떻게 도와야 할까..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엉엉 울어 버렸다.  울다가 잠들어 버린 꿈속에서도 고통받는 대륙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도와달라고 배가 고프고 몸이 아프다고..

그러다 선뜻 그 책을 거내들 수 없었다. 나 자신을 제어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다 쉬다를 몇번 반복한 끝에 겨우 겨우 소개글을 보냈고 -실린다는건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책을 다 읽었음에도 선뜻 나의 느낌을 옮기기가 힘들었다. 아프리카로 자꾸 가고 싶다라는 생각만 앞섰고 사진속의 고통스레 울고 있는 아이.. 벌거숭이가 된 상태에서도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나지가 않았다. 비슷한 고통을 갖고 있음에도 얼굴에 살이 오르거나 웃고 있거나 옷을 아이답게 걸치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라도 볼라치면 그렇게 안심이 될수가 없었다.

처음 책을 읽었을때 사진속 인물들의 얼굴에만 집중을 두었었고 그 얼굴들은 바라보고 있는게 힘이 들어 금방 금방 넘겨버렸는데 두번째 읽음에서는 그 아이들을 오래 오래 쳐다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아이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넌 어쩜 그리 예쁘니...'

'네 옷.. 정말 낡았구나...'

'그 웃음.. 지켜주고 싶어..'

'얼마나 배고프니....'

그러나 그런 소리 없는 대화의 끝은 김혜자씨처럼 '죽지 마라, 죽지 마라.. 제발 살아만 있어 다오'라며 탄식이 되고 있었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는 신에게 항의 했습니다.

"왜 당신은 이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가요?"

그러자 신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널 보내지 않았는가?"

 

내가 이런 신의 부름을 받아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어하는 건 아니다.

세계의 평화 뭐 이런 거창함을 실행하기 위해 가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지 저 아이들에게 '괜찮다'라며 안아주고 위로해 주고 싶을 뿐이다.

그게 무슨 아프리카로 가고 싶은 이유가 되냐고 물을지라도 정말 그 아이들을 위해 아프리ㅓ\카로 가고 싶을뿐이다.

책을읽으면서 많은 분노, 한심함, 무관심 그리고 소수의 욕심으로 인해 한나라가 완전 망가져 버리는 모습을 지켜 보며 그런 감정들을 쉽게 털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런 감정을 품고 그들을 비난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들이 자각하지 않는 한  그런 고통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런 시간이 더뎌 지더라도.. 나도 현재 생각만 하고 있는 것처럼...

그 아이들을 위해 모두가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관심을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아이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기 전에 저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주고 싶지 않은가...

저 아이들에게 '괜찮다'라고 위로해 주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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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남은 아름다운 날들
베스 켑하트 지음, 윌리엄 설릿 사진, 공경희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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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년동안 챈티 클리어 정원을 수없이 방문하며 글을 썼다는 저자를 보니 집근처의 공원이 생각났다. 5년째 살고 있음에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집 근처의 공원을 가보고 공원에서 쉴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원이라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가도 공원 주변은 모텔과 음주 가무를 즐길 수 있는 시설들만 그득해서 민망할 정도였다.

그리고 조금 해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가는 공원은 내가 이상해 보일 정도로 묘한 부위기를 자아냈다. 많은 변화를 꾀하고 있더라고 우리 나라의 공원은 아직도 이런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 편견을 깨고 집근처의 공원에 마음을 열고 자주 들락거리게 만들어 주고 좋아하게 만들어 준건 다름 아닌 자연이였다.

공원 근처의 아파트에 살게 된지 근 3년만의 일이였다.

2년 정도는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았고 1년동안 마음을 열면서 좋아하게 된 공원은 아름다웠다. 계절을 느낄 수 있었고 늘 같은 계절인 것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자연 앞에서 난 정말 우주속에 한낱 티끌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그 사실  또한 싫지 않았다. 자연의 품안에서 평온이 찾아 온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나보다 그 평안함과 자연의 깊이를 더 사랑하고 누렸던 것 같다. 소소한 일상일 것 같으나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분위기에서 썼냐는 느낌이 나타나고 있었고 그 특별함을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저자의 마음을 조금은 내게 전달되어 왔다. 나도 자연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갖어 보았기에..

우리나라의 공원의 비슷 비슷함 속에서도 내가 느낄 수 있는게 이 정도인데 챈티 클리어 정원은 과연 어떨까 하는 상상과 함께 사진속의 풍경을 보며 나름대로 정원을 그려 보았다. 저자가 매력에 푹 빠질만한 정원이라는걸 인지 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들과 함께.. 그리고 정원에서 늘 보는 사람들... 우연히 만난 한국 주부... 그런 평범한 만남속에서 정원에 대한 사랑이 깃들어 가고 그 모든것을 우러르며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사실.. 부러웠다.

그런 자연 속에서 나처럼 하찮은 사람도 얼마나 감상적이 되는지 그런 모습을 공상이라 치부해 버리고 나눌이가 없다 푸념하는데 저자는 모든것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 대화가 결코 외롭지 않았다.

나처럼 쓸떼없는 망상이라고 생각되어 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도 챈티 클리어 정원은 특별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것이 좋았음에도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며 언어였다.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나의 메마른 감성 탓인지...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도 자꾸 겉돈다는 느낌이 들면서 우리나라의 수필가들의 글이 떠올랐다. 챈티 클리어 정원이 아름답고 정감이 가긴 해도 우리나라가 아닌 이상 그런 배경에서의 우리나라 수필가들의 글이 궁금해 지기도 했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 속에서 우리 수필가들은 이보다 더 아름다운 언어의 유희를 끌어냈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비교가 왜 튀어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아름다운 정원 속에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른채 한국적인 것을 요구하고 갈망하고 있었다.

챈티 클리어 같은 한국적 정원을 꿈꾸는 건인지.. 한국적인 글솜씨를 갈망하는 것인지도 제대로 모른채 한편에서는 그렇게 뒤죽 박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꾸 후자가에 마음이 기울어진 나를 발견하며 떠올리게 되는 근처의 공원속의 나는 절대 그런 글을 끌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채 나의 망상을 매듭지을 수가 없었다.

내 주위의 것들을 우선 느껴보자는 결론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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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스케치 1 - 이야기로 만나는 교양의 세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 풀빛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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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와 관심 있는 장르의 책 읽기는 많이 다르다.

최근 나의 관심이 되어 가는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인문과 철학인 것 같다.

관심 가다보니 그쪽 분야의 책들을 구입해 놓긴 했는데 읽어 보려고 펼치면 글씨들은 겉돈다.

그래서 관심이 있다고 무조건 읽어지는 것은 아니구나를 느끼며 나의 수준에 맞는 독서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책 제목에서 이렇게 '철학'이라고 마치 정답을 알려주듯 적혀 있으면 나의 수준은 생각하지도 않고 홀라당 마음을 뺏겨 버리고 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스케치'가 붙어서 조금은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를 했다.

거기다 한국 철학은 더더욱 문외한이라서 무작정 덤벼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에 읽은 철학 콘서트라는 책에서 퇴계 이황의 사상을 엿보고 우리의 철학도 만만치 않구라 라는 걸 깨달았음에도 철학이라는 난관을 뚫어 보고자 이렇게 애를 쓰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왠걸. 잔뜩 긴장하며 펼친 책은 쉽게 읽혔다. 철학에 대한 나의 편견이 너무 심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반면 마음을 조금 연 것 같아서 조금씩 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 갈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론은 언제 나오는 걸까.

책은 부담없이 읽혔고 저자의 의도도 머릿말에서 파악했지만 고조선부터 차근차근 접근해가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지만 철학을 논한다기 보다는 국사책을 읽는 느낌이였다.

주르륵 훑어나가는 느낌들 속에서 내가 철학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했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철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중국이나 유럽의 철학들을 보면 무척 어려웠다.

그냥 읽기도 벅찼는데 우리의 철학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국사책을 읽는다는 느낌은 2권을 읽을 때까지 계속 되었지만 나의 미흡함으로 철학의 난해함을 느낀 건 화담 서경덕의 기氣 철학 정도였다.

성리학의 중심 개념인 가운데 하나인 리理와 기氣가 어우러진 사상의 진보는 갈수록 의문이였고 난해했다. 서경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후세의 지식인들에게 전해지고 있었으니 서경덕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계속 헷갈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우리의 철학에서 크게 착각한 것이 있었다.

무지에서 나오는 생각이겠으나 철학이라고 하면 현세와 떨어져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국사책을 읽는 느낌에다 띄엄띄엄 철학 같아 보이는 사상이 나온다 생각 했으니 제대로 이해할 리 만무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한국 철학의 의의를 금새 잊어 버린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몸담고 살아온 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상황에서의 경험들을 추상화하고 체계화해 낸 것이 한국철학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러한 뜻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랬으니 이미 우리의 철학을, 그것도 삶 속에 끈적끈적하게 배어있는 의의를 맛 보고도 이것은 철학이 아니다라고 치부해 버린 것이다.

우리의 선인들은 삶 속에서 진리를 찾았고 그것을 점점 많은 사람들 특히 민중들에게 접목시키고자 노력하였는데 나는 그러한 것은 역사적 사건들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동안 나는 철학을 너무 어럽게 생각했고(여전히 어렵긴 어렵지만) 실생활과 떨어져 생각했기에 다른 것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깊이 있게 다루었다면 어려워서 손도 못대었겠지만 스케치란 말이 고맙게 느껴지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철학을 실생활과 떼어놓고 생각하려 했던 것이 아쉽긴 하지만 지금부터 서서히 해보려 한다.

우리의 선인들이 처음엔 특권 계층에서 정치적, 개인적 성찰로 시작하였던 철학을 진정 나라를 걱정하고 민생을 걱정했던 마음 만큼은 고스란히 전혀져 왔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고조선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훑어 본 결과 처음엔 미흡하고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아던 것이 점차적으로 현실에 도입되는 것을 보며 그들은 하나의 맥을 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맥을 느끼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것을 지키고 행동으로 옮겼음 하는 바램이다.

철학은 먼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일상에 늘 잠재해 있는 것이다. 괜히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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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피쉬
오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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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겉표지를 보면 소설책이 아닌 것 같았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 색의 가운데 떠 있는 물고기..

제목과 상응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왠지 모를 가벼움과 스쳐가는 듯한 인상을 품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가벼이 읽었다.

그렇게 읽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과 읽힘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책을 읽으면서 자꾸 책을 덮고 벌렁 벌렁 눕게 되었다. 그러면서 책 생각.. 내 생각의 혼란속에 조각 맞추기처럼 이어지는 소설의 전개속에서도 용케 그 모든것을 헤쳐 나가게 되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우리나라의 현대 단편과 비슷하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현대 단편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3년째 이상문학 수상집을 읽어오면서 우리나라의 단편이라기 보다는 그 수상집만의 단편을 만들어 간다는 느낌이 짙었는데 파일럿 피쉬를 읽고 있자니 왠지 그 수상집속의 단편을 보는 것 같았다.

굳이 나의 단편에 대한 짧은 식견을 밝히는 것은 소설의 시점은 현재라는걸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를 살고 있기에 나의 고뇌와 적나라함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긴 하지만 그래서 현대소설 보다 고전을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문학적 현실도피라고 말해도 상관없겠지만 파일럿 피쉬에서 느꼈던 것들을 고뇌에 찬 현실세계였다.

조각을 맞추듯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전개에서도 나는 현재만을 말하고 싶어진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의 나를 만날 수 있지만 내가 살아야 하는건 현재다.

그래서 야마자키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울해진다.

독신, 포르노 잡지의 편집자, 헤어진 연인에게서 19년만에 걸려온 전화..

이런 단적인 몇가지로 야마자키의 현실을 운운하는건 편파적이긴 하지만 몇가지 현실을 보더라도 우울한 건 사실이였다.

겉으로 비춰지는 야마자키는 왠지 모를 문란함이 묻어나는데 의외로 사려 깊고 따뜻한 남자다. 적어도 내가 보는 야마자키는 그런 중후함을 풍겼다.

평범한 삶이라고 혹은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는 그를 고뇌에 찬 인물로 보이게한 저자의 능력도 한몫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고뇌에 찬 소설속 인물들을 좋아함으로써 느껴지는 무게감을 즐기는 편이라 이 책을 단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가 이런 대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야마자키, 그리고 현재의 야마자키..

그 속에서 왜 난 나의 현재만 보는걸까..

야마자키의 과거가 유쾌하지 못해서일가..

아니면 과거의 들춤에서일까..

유키코의 등장으로 인한 그녀에 얽힌 이야기의 풀어헤침이 현재의 야마자키를 더욱 돋보이게하며 씁쓸함을 더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흐름과 회상, 현실직시는 가벼이 넘겼을 소설에서 괜찮은 발견을 했다는 만족감도 있었지만 딱 두가지가 맘에 들지 않았다.

 

문란함, 유키코의 친구 이쓰코였다.

마치 우리의 삶에서도 끌리는대로 내키는 대로 성관계를 맺는다는 인식을 지울 수 없을 정도의 문란함은 정말 맘에 들지 않았다.

그게 내가 그렇게 운운하던 현재의 모습의 단상이라고 해도 그런 솔직함은 여전히 내게는 껄끄러운 문제였다.

그 문란함의 가운데에 있다고 과언이 아닐 친구라고 표현하기도 모한 이쓰코의 등장도 한몫한다.

야마자키와 유키코가 만나게 되는 계기와 헤어짐의 계기의 주역이 된 제 3의 영향적인 인물 이쓰코....

야마자키와 헤어지며 현재 남편의 여자친구가 이쓰코라 말하는 유키코의 발언에서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끝이 없을 것 같은 이쓰코의 묵묵한 역할(?) 역시 소설을 끝내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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